효목제일교회 청년회 특강/  03.02.14.(금)                  



지성, 이성, 영성



한국의 각 교회마다 청년 신자들이 별로 없다고 걱정들이 많습니다. 신자들의 나이 분포도를 그린다면 아마 모래 시계처럼 허리가 잘룩한 모양이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그런데 잘룩한 허리 부분이 점차 확대된다는 사실에서, 3,40대와 중고등 학생 층도 점차 줄어든다는 사실에서 한국교회의 상태를 진단해 볼 수 있습니다. 사실 3,40대와 학생회는 같은 정비례합니다. 3,40대의 자녀들이 바로 학생층이니까 말입니다. 제가 잘 알고 있는 대구 시내의 모 교회는 5,6년 전에 6,70명이던 학생회가 지금은 10여 명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물론 그 교회만의 특별한 사정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3,40대 교인들이 줄어들기 때문에 학생들의 숫자가 줄어든다는 논리가 이 교회만이 아니라 다른 교회에도 해당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아마 청년회 사정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겠지요. 내가 관여하고 있는 <대구성서 아카데미> 운영위원인 김영옥 장로의 말을 들으니까 옛날에 본인이 지도하던 청년들이 지금은 이미 3,40대가 되었는데, 그들 중에서 상당한 숫자가 교회에 나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분이 지도하던 그 당시의 대학생들은 아마 전형적인 <386 세대>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오늘 한국 정치와 시민단체 등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는 이 386 세대의 핵심 멤버들이 옛날에는 거의 대부분 교회에 나갔었는데, 이제는 발길을 끊었다는 안타까운 현실을 우리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물론 교회 외적인 요인이야 찾아보면 얼마든지 있습니다. 7,80년대의 군사정권이 끝나고 이제 93년 문민정부가 시작된 이후로 사회 참여의 기회가 많았졌기 때문에 교회의 구심점이 느슨해 질 수 있습니다. 비록 IMF라는 함정이 있긴 했습니다만 그래도 꾸준하게 삶의 조건들이 향상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교회보다는 이 세상에서 즐겁게 사는 것을 택할 수 있습니다. 또한 3,40대의 교육 수준이 그 앞 시대와는 견줄 수 없을 정도로 높았다는 것도 그 한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교육은 인간을 나름대로 성숙하게 만들기 때문에 인간을 죄인으로 다루는 종교보다는 자기의 주체성을 살릴 수 있는 세상을 중심 무대로 삼고 살아가기 마련입니다. 20대 청년기의 신앙생활이 3,40대로 연결되지 않는 이유가 이런 외적인 것에 어느 정도 있다는 것을 부인하기는 힘들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한 대답이 못됩니다. 더구나 교회는 늘 이런 시대정신을 눈여겨보아야 한다는 점에서 이를 대처하지 못한 책임은 여전히 교회에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이런 현실의 문제를 우리 안에서 찾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습니다. 현재 청소년들과 3,40대가 줄어들었다는 이 하나의 현상만을 놓고 교회의 위기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의 증상일 뿐입니다. 그러나 문제의 본질을 담고 있는 증상입니다. 예를 들어 감기 환자가 있다고 합시다. 그는 기침이라는 증상을 보입니다. 그가 만약에 깊은 기침을 한다면 심한 감기에 들렸다는 것이겠지요. 사람이 기침을 하는 경우는 많기 때문에 기침이 무조건 그 한 사람의 건강에 위기가 온 증거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만, 실제로 심한 감기에 걸린 사람은 이런 기침을 하기 때문에 이 기침이라는 증상을 통해서 이 사람의 건강을 점검해볼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청소년들과 3,40대 신자들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역으로 이렇게도 진단이 됩니다. 청년과 3,40대가 많으면 교회가 건강할 것일까?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사실 요즘도 이렇게 젊은 사람들이 잘 모이는 교회가 있다고 합니다.

지난 주 금요일(2월7일)에 <기독교사상> 편집부장 한종호 목사와 객원기자 박명철 목사, 두분이 우리 <대구성서 아카데미>를 취재하러 대구에 왔습니다. 그날 우리는 설교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습니다. 한종호 목사가 서울로 올라가면서 자기가 쓴 책을 하나 건네 주더군요. <전병욱 비판적 읽기 - 설교비평의 새로운지평을 연다>는 제목이었습니다. 기독교 주간신문 <뉴스앤조이> 편집인으로 있으면서 삼일교회 전병욱 목사의 설교를 비판한 글들이 실려 있었습니다. 전병욱 목사는 전형적인 386 세대의 목사로서 교회를 개척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수천명의 젊은이들이 모이는 교회로 성장시켰다고 해서 장안의 화제가 된 인물이라고 합니다. 내가 직접 전병욱 목사의 설교를 읽거나 듣지 못했기 때문에 단언적으로 말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지만, 한종호 목사의 책을 통해서도 대충 짐작을 할 수 있었습니다. 문득 70,80년대의 조용기 목사가 이제 2000년 대에 다시 나타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만 조금 더 현대적 감각을 지닌 젊은 목사의 모습으로 말입니다. 7,80년대의 한국교회도 역시 그랬습니다. 대표적으로 빌리 그레함의 엄격한 청교도주의와 로버트 슐러 목사의 "불가능은 없다"는 책에서 알 수 있듯이 적극적 사고방식을 부추기는 천박한 인간학이 조용기 목사에 의해서 소위 삼박자 구원으로 집약되었습니다. 사실 이런 특징은 이분들만이 아니라 한국 교회 전체에 해당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현상은 지금도 역시 여전하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런 신앙적 특징을 두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폐쇄적 도덕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성장지상주의입니다. 심리학적으로 말해서 전자는 자기부정으로서 이 세상을 늘 성속이원론에 근거해서 보며, 후자는 자기집착으로서 이 세상을 자기 중심적으로만 봅니다. 이런 심리적 요소는 모든 인간의 삶에 어느 정도 현상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이런 현상 자체만을 놓고 문제를 삼을 필요는 없습니다만, 우리 기독교인의 삶에 이런 요소가 거의 정신적 질병처럼 극단화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이런 심리적 요소가 신앙의 이름으로 이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심각하게 생각해야합니다.

도덕주의는 한국 기독교에 어떤 모습으로 투영되었을까요? 옛날에는 부흥회가 자주 열렸습니다. TV도 없고, 별다른 재미도 없이 살 때라서 그런지 부흥회를 열면 여러 교회 신자들이 돌아가면서 많이 모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부흥회의 설교는 거의 회개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어렸을 때 남의 집 과수원을 넘나들던 일부터 시작해서, 미주알 고주알 잘못한 것들을 토해내게 합니다. 때로는 그 내용을 글로 쓰라고까지 합니다. 그 종이를 불에 태우면서 모든 죄가 깨끗이 씻겨졌다고 믿습니다. 이런 정도는 양반입니다. 심지어는 심한 욕을 합니다. 그런데 이런 일은 옛날만이 아니라 요즘도 일어난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그 유명한 윤석전 목사라는 양반도 학생과 청년집회에서 그렇게 몰상식한 욕설을 많이 내뱉는다고 하는군요. 자기를 학대하면서 쾌감을 느끼는 인간의 심리현상인 매조키즘을 이용한 대중선동입니다. 물론 이런 대중 집회에서는 일정 부분 파격적인 요소가 가미될 필요가 있긴 합니다만 그것이 대중을 심리적으로 조작하는 차원에 까지 이른다는 점에서 심각한 요소입니다. 이렇듯 무식한 부흥회의 설교만 이런 도덕주의적인 성격이 있는 게 아닙니다. 매우 세련된 도시 교회의 설교도 역시 그 밑바닥에는 인간에 대한 심한 불신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교묘하게 신자들을 자기의 죄의식에서 떠나지 못하게 만듭니다. 신앙생활의 모든 부분들이 그렇게 돌아갑니다. 새벽기도회에 나가지 못한 것에 대한 불안감, 온전한 십일조를 하지 못했다는 죄책감, 이성을 보고 음욕을 품었다는 죄의식이 우리 기독교인의 삶을 어둠을 속으로 끌어들입니다. 지금도 상당히 많은 신자들의 심리 상태를 들여다보면 이런 죄의식으로 찌들려 있을 것입니다. 일종의 편집증입니다. 이런 죄의식이 병적으로 고착화된 사람은 다른 사람도 그런 시각으로만 봅니다. 기독교인들이 세상을 악하다고 보는 것도 이런 이유입니다.

성장제일주의는 제가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7,80년대에 모든 한국 교회는, 지교회든지 총회차원의 교회이든지 불문하고 자기 몸 불리기에만 관심을 두었습니다. 매년마다 몇 개 교회를 개척하고, 몇 명 신자를 늘리는 것이 지상 목표였습니다. 통합측 교단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매 해마다 몇만 교회, 몇백만 신자 운동이 연례행사처럼 펼쳐졌습니다. 개개 신자들도 늘 그런 식의 설교만 좋아했습니다. 열심히 충성하고 믿음대로 살면 부자된다는 식입니다. 이게 과연 예수님의 복음에 얼마나 합당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질문하지 않고 "하면 된다"는 식으로 교회를 이끌어왔고, 신자들도 그것을 좋아했습니다. 이런 특징은 단지 사람들의 자기만족에 불과한 것이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와는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우리가 그렇게 입만 열었다 하면 외치는 선교가 사실은 우리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게 소위 <Missio Dei> 개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이 선교라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 스스로 하는 일이지 우리가 하는 게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른 곧 선교는 교회의 프로그램에 의해서 진행되는 일들만이 아니라 온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역사들로서 하나님의 선교가 진행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자신들이 하나님의 선교를 독점하고 있다는 듯이 지나치게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정열의 배후를 조금만 깊이 들어야보면 인간의 욕망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인간적 욕망이 얼마나 철저하게 작용하고 있는지 우리는 여러 현상에서 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의 예만 들어보겠습니다. 장로 투표에서 떨어졌다고 교회의 분란을 일으키고 그러다가 결국은 교회를 그만 두는 일들이 21세기 한국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장로 투표에서 떨어지면 물론 잠시 섭섭하겠지요. 누구때문이라는 미움도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교회의 질서를 혼란스럽게 만들기 까지 한다는 것은 교회 봉사라는 것이 자기들의 욕망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장로는 그야말로, 목사로 마찬가지이지만, 섬기는 카리스마인데도 불구하고 장로가 되지 않았다고 해서 화가 난다는 것은 어떤 이해타산이 있다는 말이겠지요.

위에서 말한 두 가지 요소가 한국교회를 성장시킨 요소이기도 하고, 내적으로 병들게 해서 결국은 부실한 공동체로 남게 한 요소이기도 합니다. 자기를 학대함으로써 그 불안을 벗어나려고 과도할 정도로 애를 쓴다면 그게 온전하겠습니까? 겉으로는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면서 결국은 자기를 성취하는 데서 만족한다면, 그런 신앙이 오래 가겠습니까? 한국 경제처럼 상당한 부분이 거품입니다. 보통 때는 그럴듯하기 때문에 알아채지 못하지만 상황이 변하면 그런 거품은 사라집니다. 그래서 지금 대부분의 교회는 성장이 멈추었으며, 오히려 마이너스 성장으로 돌아선지 오래 되었습니다. 9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교단을 불문하고 교회 개척이 많았는데, 지금은 거의 없는 실정이고, 교회를 개척한다고 하더라도 자립하기는 참으로 요원합니다.

오래 전부터 나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한국교회는 스스로 갱신될만한 능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망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말입니다. 물론 교회가 망하지 않고 새로워질 수 있다면 더 이상 좋을 게 없습니다만 그런 내부적 개혁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아야 합니다. 왜 그러냐하면 사람의 의식이라는 것은 혁명적인 충격이 없는한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를 학문적으로 정리한 사람이 바로 토마스 쿤이라는 과학철학자입니다. 여러분도 아마 <패러다임 쉬프트>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그가 과학의 역사를 연구해 보니까 기존의 틀이 허물어질 정도로 혁명적인 것이 나와야만 변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천동설과 지동설의 차이라든지, 뉴턴과 아인슈타인의 차이 같이 전혀 틀을 달리하는 컨셒이 나와야 변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과학사 분야만이 아니라 우리 종교에도 거의 똑같이 적용됩니다. 7,80년대에 도덕주의와 성장제일주의를 신앙의 근본으로 믿고 살아온 기독교인들의 생각은 그들이 죽거나 아니면 교회가 망할 정도로 혁명적인 변화가 오기 전에는 요지부동입니다. 성서말씀은 일점일획도 변함이 없다고 어릴 때부터 철석같이 믿고 있는 신자들은 신학의 <역사비평>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아무리 객관적인 타당성과 합리적인 논리를 가졌다고 하더라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가장 빠른 교회 개혁은 교회가 망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내 예상이나 기대와는 달리 앞서 예를 든 전병욱 목사의 경우처럼 여전히 7,80년대 식의 목회와 설교가 여전히 먹히고 있습니다. 또는 신선한 아이디어, 프로그램, 이벤트 목회가 성공을 거두기도 합니다. 전반적으로는 한국교회가 침체기에 들어섰는데 다른 한쪽 구석에서는 7,80년대와 같은 양적인 성장이 일어나는 것일가요? 많은 교회들은 이렇게 급성장하는 교회에 흥미가 많습니다. 일단 이렇게 소문이 나기 시작하면 그 교회에는 저저로 사람이 많이 모이게 됩니다. 음식점도 그렇지 않습니까? 음식맛을 똑같아도 어떻게 소문이 나기 시작하기만 하면 그 집은 장사를 잘 됩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전병욱 목사 교회를 찾아가서 한 수 배우려고 준비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길이 아니라면 가지 말아야겠지요. 신앙의 패라다임을 거꾸로 돌리면서까지 교회 부흥에 매달린다면 이처럼 불쌍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현실을, 그리고 그 역사를 바르게 보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 한국교회의 비정상적인 현상을 바르게 분석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바른 길을 찾을 수 있겠지요.

지금 우리의 현실은 과도기입니다. 전체적으로는 7,80년대의 신앙 형태에 머물러 있으면서 시나브로 힘을 잃어가는 중이며, 부분적으로는 7,80년의 왜곡된 신앙에 색다른 옷을 입힘으로써 잠시 시선을 끌고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의 7,80년대 신앙이 그 시대에는 어쩔 수 없었던 우리의 운명이었다면, 이제 기독교 본질에 부합하는 근본을 회복하는 일에 모든 힘을 쏟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방향을 잡지 못하거나 아니면 이집트의 고기맛을 그리워하던 광야의 이스라엘 민족이나 또는 소돔성의 향수를 잊지 못해 뒤돌아보다가 소금 기둥이 되었다는 롯의 아내일지 모릅니다. 결국 우리는 현재 교회의 교회다움을 지켜나가는 자리에 들어서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위에서 7,80년대의 왜곡된 신앙이 우리의 운명이었다고 말한 것은 그 당시에는 대한민국 전체로 보나 교회로 보나 생존이 최상위 개념이었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생존을 어쩔 수 없이 도적질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때의 한국교회는 교회의 본질에 충실하지 못할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지요. 생존 차원이 아니라 오히려 비만을 염려해야할 상태입니다. 한국 사회도 똑같습니다.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 7,80년대의 군사독재 정권이, 또한 그들의 이데올로기인 돌진근대주의가 우리의 운명이었을지 모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이런 정권의 등장을 합리화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쨌든지 지나간 과거 역사로서 그렇게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이제는 우리가 인간 삶의 본질과 민족의 미래를 보다 전진적으로 내다보아야 할 때가 되었는데, 아직 현실을 그렇지 못합니다. 아마 노무현 씨를 대통령으로 뽑은 이 사건이 이런 변혁의 단초가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후손들은 노무현을 21세기의 대한민국을 해석하기 위한 일종의 코드로 읽을지도 모릅니다. 새로운 밀레니움이라는 거창한 구후로 21세기를 맞긴 했습니다만, 국내 정치적 지형으로보면 이제야 실제적으로 패러다임 쉬프트가 가시화 된 게 아닐까요? 어쨌든지 한국교회가 앉아있는 이 사회는 원하든 원치 않든 이런 변화의 물살을 탔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떻습니까? 어떠해야 합니까? 사회가 변한다고 해서 덩달아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교회는 본질상 늘 변혁되는 공동체니까 시대정신보다 훨씬, 그들과 전혀 다른 차원에서 새로워져야 합니다. 두 가지 차원에서 그렇습니다. 우리 개신교회의 역사적 가르침에서 보면 <에클레시아 샘퍼 레포만다>라는 명제에 충실해야한다는 점이 그 한 가지입니다. 루터의 이 말은 교회의 본질이 바로 개혁에 있다는 뜻입니다.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종말론적이라는 점이 다른 하나입니다. 이 세상의 생명이 완성되는 종말의 지평에 근거해서 자기를 규정해야할 교회는 당연히 매우 높은 수준에서, 거의 무한정으로 개혁되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이 사회 집단과 경쟁관계에 있습니다. 노동, 의료, 교육, 거주 등 인간의 모든 문제를 상대적으로 만족할 수 있는 수준에 설정하고 있는 정치, 경제집단과 달리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수준에서 이런 인간의 행위들을 자극하고 이끌어가야합니다. 이를 위해서 교회는 자기 개혁을 종말론적인 차원에서 미리 수행해야만 합니다.



종말론적인 개혁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까요? 이런 종말론적 지평은 그렇게 아득한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종말이 아무리 먼 미래의 사건이라고 하더라도 현재보다 조금 앞에 있을 뿐이지 현재와 상관없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미래일뿐만 아니라 과거와 현재를 모두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오늘 우리의 구체적인 삶과 전혀 상관없는 초월적인 사건에 불과할 테니까요. 또한 종말론적인 시각은 반드시 거시 담론만을 뜻하는 게 아니라 미시 담론을 뜻합니다. 거시는 늘 미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물론 미시도 역시 거시의 틀에서 해석되어야 합니다. 이 두 시각은 한 사태의 양면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종말론적 지평은 곧 지금 여기라는 지평과 맥을 같이 합니다. 이런 점에서 개신교 신앙의 기본이며, 종말론적 개혁의 출발은 신앙의 기초와 본질에 충실한 것입니다. 좀 쉬운 예를 들어볼까요? 여러분이 외국어를 잘 하려면 우선 기초에 충실해야 합니다. 첼로 연주자가 되고 싶은 사람도 역시 기초에 충실해야합니다. 음악의 열정이 아무리 대단해도 어느날 갑자기 장한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이처럼 한국 교회의 교회다움을 회복하는 길은, 또한 기독교 개개인들이, 특히 오늘 기독 청년들이 건강한 신앙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런 기초 연습에 충실해야 합니다. 우리의 7,80년대 교회가 왜곡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기초에 부실했습니다. 지금 불거지고 있는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들도 어쩌면 이런 기초가 부실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무조건 돈을 많이 벌고 보자는 생각이 앞서 있었기 때문에 우리 삶의 기초인 정의, 평화, 자유, 기쁨 같은 가치들에 대해서 무관심했습니다.

신앙의 기초와 본질에 충실해야 한다는 이 문제는 이 강의 앞 부분에서 제기한 질문과 맞닿아 있습니다. 21세기 한국교회에 청년들과 중장년 층이 매우 부실하게 된 교회 내부적인 원인을 밝혀보자는 그 질문과 그 대답이 곧 신앙의 기초와 본질 문제라는 것입니다. 신앙의 기초가 부실했기 때문에 환경의 변화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허물어지고 말았으며, 지금도 그런 현상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있듯이 모래 위에 세운 집입니다. 이미 1958/59년도 겨울학기 쮜리히 대학교 전교생을 대상으로 한 강좌에서 게르하르트 에벨링은 이 문제를 지적한 적이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순수하고 솔직하고 성실하게, 그리고 큰 기대를 갖고 질문하는 사람들이 극히 드물다고 말입니다. 그의 말을 직접 인용해보겠습니다.



여하간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순수하고 솔직하고 성실하게, 그리고 그것에큰 기대를 걸고 묻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더구나 기독교에 익숙한 사람에게 이런 질문을 기대하기는 더욱 힘든 일이다. 사실 나 자신도 이 강의에서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기대대로 철저히 캐묻고 겸해서 다른 문제까지 솔직하게 물어갈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여하간 질문하는 우리는 잘못된 자명성을 한사코 고집하는 세찬 세력의 저항을 경험할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따지면서 실제로 우리자신을 적나라하게 드러냈으면 하는 기대도 세찬 저항을 경험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여기 저기에서 움직이는 그 무엇, 적어도 기독교 신앙의 새로운 이해를 우리에게 기대하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어떤 섬광같은 불가항력의 것을 의식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오히려 이 복잡한 시대에서 기독교 신앙이해에 필요한 새롭고 실제적인 모든 동기를 얻을 수 있다고 확신한다. 서두에서 이미 우리 물음의 모험적 성격을 말한 바 있지만, 그것은 우리 물음의 필연성을 강조한 것이다. 기독교 신앙에 대해 진지한 자세를 갖춘 사람이라면, 결코 오늘 긴급하게 등장하고 있는이해의 문제를 못본 척 지나칠 수는 없을 것이다.



위에서 에벨링이 지적한 문제는 벌써 40 여년 전 독일의 상황이지만 오늘 우리에게도 거의 같은 차원에서 문제를 제기해줍니다. 거의 모든 교회에서 기독교와 신앙의 본질에 대해서 질문하지 않으며, 이런 질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으로 간주됩니다. 그런데 이런 경향은 오래 된 교회일수록, 그러니까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교회일수록 심합니다. 개인적으로도 역시 교회를 오래 다니면 다닐수록 기독교의 본질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신앙생활을 합니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조상 대대로 동굴 안에서 사는 종족이 있었습니다. 어둠고 습하고 곰팡이 냄새가 나는 동굴 안에서 이것이 자신들의 운명이라고 생각햇습니다. 어느날 우연하게 어떤 사람이 동굴 밖으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동굴 밖은 동굴 안과 전혀 다른 세계였습니다. 푸른 하늘과 구름, 안개와 비, 꽃, 나무, 색깔, 향기, 태양빛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는 동굴로 돌아가서 자기 동족들에게 동굴 밖에 세계에 대해서 본대로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자기 동족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를 미친 사람 취급했습니다. 장로들은 그를 종교재판에 부쳐 화형시켜버렸습니다. 플라톤은 이 사람을 소크라테스로 생각하면서 이런 말을 했겠지요. 우리도 역시 어떤 본질에 대해서는 눈감으려는 경향이 아주 많습니다. 우선 본질에 대해서 침묵한채, 기존의 전통만을 무조건 고수하려는 우리의 태도가 교회 안에서 어떻게 자리를 잡고 있는지 오늘의 제목과 연관해서 생각해 봅시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바람직한 기독교 청년들의 정체성이 확연하게 드러날 것으로 봅니다.



반지성주의



교회를 지배하고 있는 정서를 한 마디로 규정한다면 아마 <반지성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독교의 역사에도 이런 반지성주의는 수도 없이 많습니다. 십자군 전쟁과 종교재판은 이에 대한 아주 두드러진 사건들입니다. 어떻게 검을 쓰는 자는 검으로 망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겠다는 사람들이 폭력적으로 타종교를 말살하려고 했는지 참으로 기가 막히는 일입니다. 아마 나름대로의 논리는 있었을 것입니다. 모슬렘들에게 빼앗긴 기독교 성지를 되찾자는 명분이 있었습니다. 이런 명분에는 단지 종교적인 것만이 아니라 오히려 정치적인 것이 훨씬 강하게 작용했습니다. 참으로 종교와 정치는 인간의 문화 중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보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가장 파괴적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이 둘이 손잡고 나쁜 일을 하기 시작하면 어느 누구도 말릴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몸으로 느끼고 있는 이라크에 대한 미국의 전쟁 준비는 바로 현대판 십자군 전쟁이 아닐까요? 대테러 전쟁이라고는 합니다만 독재자 후세인을 제거하기 위해서 수십만명의 양민이 희생될 수도 있는 전쟁을 치르겠다는 부시의 생각은 비록 그가 매주일 열심히 교회에 나가서 예배 드리고 기도하는 대통령이라고 하드라도 반지성적 신앙인의 본보기인 것 같이 보입니다. 중세기의 십자군 전쟁을 일으킨 교황들의 신앙도 이와 마찬가지였겠지요. 지금 프랑스, 독일, 러시아는 가능한대로 이라크 전쟁을 늦추어 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이라크의 무기사찰 기간을 더 늘려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에 반해서 미국의 부시는 당장 이라크를 요절내도록 유엔에서 결의해야 한다고, 그런 결의가 없더라도 자신들이 앞장 서서 때려부수겠다고 준비 중입니다. 반지성적인 십자군 전쟁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종교재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세계 기독교 역사에는 진리에 대한 탐구와 순전한 선교적 열정에 못지 않게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향한 박해의 흔적이 많습니다. 수많은 물리과학자, 천문학자, 인문학자, 신학자, 또는 짚시들이 종교재판을 받고, 때에 따라서는 화형에 처해지기도 했습니다. 마틴 루터가 종교재판을 받았다는 사실을 아시죠? 갈릴레오도 그렇습니다. 수년 전에 감리교회에서는 감리교 신학대학의 두 교수를 종교재판에 회부해서 교수 면직(출교?) 처분을 내린 바 있습니다. 그 두분이 종교다원을 주장했다는 이유입니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지성을 박해하고, 스스로 반지성주의의 길을 걸었습니다.

이런 반지성주의는 성서에 대한 오해에 근거합니다. 성서를 문자적으로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일종의 기독교 패권주의적 사고방식에서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기독교 믿음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기독교 패권주의를 강화시키고 있는 셈입니다. 약간 예민한 주제를 조금 생각해보실까요? 여러분은 진화론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진화론을 부정해야만 참된 신앙인이 되는 걸까요? 요즘도 소위 <창조과학회> 소속된 사람들은 터어키 지역에서 노아 방주의 잔해를 찾아보겠다면서 탐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노아 홍수 사건이 객관적 역사라고 믿는 것입니다. 노아 홍수와 같은 이야기는 구약성서만이 아니라 바빌론 신화에서 많이 등장합니다. 고대인들은 그런 엄청난 자연재해를 신의 징벌로 생각했습니다. 구약성서 기자들도 역시 그런 고대인들의 자연관과 사유방식 안에서 하나님을 생각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런 설화들을 도입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계몽주의 이후를 사는 오늘 기독교인들에게 이런 사건을 역사로 믿어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은 참된 기독교 신앙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반지성적 맹신입니다.

이런 극단적인 경우는 아니라고 해도 우리의 일상적 신앙생활에서도 역시 이런 반지성주의는 매우 교묘하게 작용함으로써 지성적인 기독교인들의 의식을 마비시키려고 합니다. 교회 안에서는 믿음은 무조건적인 것이라는 주장이 전가의 보도처럼 행사됩니다.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믿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해 되지 않는 사태를 어떻게 믿을 수 있나요? 기독교의 신앙은 말도 안 되는 것을 억지로 믿는 것이 아니라 이해되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믿음과 이해의 관계를 좀더 진지하게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옳으니 그르니 너무 따지지 말고 믿어야 돼!" 이런 말을 우리는 귀가 따갑도록 듣습니다. 교회의 주류가 그런 쪽에 있으니까 그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이 이해되는 것도 아니라는 점에서 믿음이 중요하다는 주장에 반론을 제기하지 못합니다. 물론 믿음은 아주 독특한 삶의 결단이고 체험이며, 모든 사물이나 이론들은 결국 믿음의 대상이라는 점에서 원칙적인 점에서 이 말은 맞습니다. (맞고요!). 그러나 문제는 믿음 일방주의가 우리의 지성적 활동을 불신앙적인 것으로 몰아간다는 데에 있습니다. 큰 병에 걸린 사람을 병원에 데리고 갈 생각은 않고, 안수 기도로 치료하겠다고 하면 이게 어디 정상적인 신앙입니까? 경기도 포천에 있는 <할렐루야> 기도원에서 이런 일이 벌어집니다. 정통 교회에서도 이런 일에 관심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들처럼 노골적으로 밀어붙이지 못할 뿐이지 속내에는 그런 현상에 대한 부러움이 많습니다.

한국교회의 반지성주의는 속히 제거되어야 합니다. 7,80년대에 한국교회가 반지성적인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결국 그런 토양에서 생활하던 젊은이들이 지금 장년이 되어서 교회에 발길을 끊고 있습니다. 전주에 있는 한일장신대학교 철학과 교수 김영민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상한 곳이 있다. 돈 몇 푼으로 인륜이 망가지고 천륜에 금이 가도록 알알이 자본주의적인 세상이지만, 수령자도 모르면서 한 주에 수 천만원이 자발적으로 헌납되는 탈자본주의적인 곳이 수두룩하다. 희한한 곳이 있다. 시간이 돈이라고 분초를 다투어 뛰어다니며 실없는 모임이라면 누구나 기피하는 세상이지만, 엿새를 꼬박 일하고도 쉴 줄 모르고 줄기차게 매주 수 백명 씩 한데 모여 별 생산성 없는 프로그램을 경건하게 진행하며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 것이 있다. 기이한 곳이 있다. 온갖 원심력으로 찢겨진 마음을 한 데 모을 수 없는 세상이지만, 믿을 수 없이 견고한 구심력으로 뭇 사람들을 한 데 모으고, 냉소와 허탈이 만연한 세상에서 열정과 광기가 살아 번득이며, 이기적 보신주의로 살벌한 세상에서 스스로 에너지를 쏟아붓고도 득의한 듯 희희거리는 곳이 있다. 그러나 정녕 이상한 일은 그 놀라운 자산과 열정과 에너지가 여름 강물처럼 사회로 밀려들어가 정화와 연대와 정의를 위한 변혁의 힘으로 기능하지 못한 채 필경 파편처럼 분분히 날라가 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 아 교회여, 내 순정의 샘터였던 곳이여, 돌진적 근대화의 튀기나 속물들과 단호히 결별하고 전국의 인문 세력과 견결히 연대하시라."(한겨레21, 1999.4.15.). 우리의 가슴에 비수가 꽂히는듯한 독설이지만 따지고 보면 옳습니다. 생각을 갖고 살아가려는 젊은 지성인들이 발길을 돌릴 수 밖에 없는 이 반지성주의로부터 우리가 어떻게 자유로워질 수 있단 말인가요?



지성을 넘어서



아마 어떤 분은 마음 속으로 이미 내가 강조하고 있는 지성의 한계를 계산하고 있을 것입니다. 당신이 말하고 있는 그 지성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근대주의의 그 지성이야말로 세계사를 질곡으로 끌어들인 장본인이라는 점에서 기독교 신앙은 그런 지성을 경계해야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옳습니다. "아는 것은 힘이다"라는 베이컨의 경구는 이미 그 천박한 한계를 여지없이 드러낸 바 있습니다. 그런 지성의 축적으로 이룩한 현대의 삶이 비록 외양으로는 풍요를 구가하지만 그 질적인 면에서는 여전히 궁핍하다는 점에서 지성은 아무리 날고 기는 재주가 있어도 어떤 범주를 벗어나지는 못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지성에서 인간이 구원받는다고 생각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지성의 양면을 보아야 합니다. 한 면은 말 그대로 우리로 하여금 어떤 사실을 알게 한다는 것입니다. 거기서 일종의 계몽의 역할이 기대됩니다. 초등학교도 다니지 못한 사람보다는 대학을 나온 사람이 세상에 대한 정보를 좀더 많이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교회에서도 보면 지성을 갖춘 사람과는 최소한 대화가 가능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 면은 지식 자체만으로는 궁극적인 가치를 생산해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게 참으로 까다로운 문제인 것 같습니다. 이렇게 설명해봅시다. 인간은 지성을 통해서 어떤 사실을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수학의 함수관계나 기업의 매카니즘이나 법의 운용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머리가 좋은 사람은 수능에서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고, 사법고시에 합격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능력은 지성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지적인 수준이 높을 수 있다는 나쁠 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지성은 그것만으로 끝납니다. 좀더 가치 있는 차원으로 올라가지는 못합니다. 예를 들을까요? 우리의 현대사에서 가장 비민주적인 <유신헌법>을 만든 사람은 그 당시에 가장 지성적인 집단에 속한 인물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법의 원리만 알았지 그것이 어떻게 인간을 위한 것으로 사용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눈을 감았습니다. 또는 알았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안일을 위해서 유신헌법을 만들고 말았습니다. 이런 이들은 우리 주변에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성이 늘 이렇게 불의하게 사용된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지성은 보다 창조적으로 쓰일 수 있는 가능성이 많습니다만, 그것 자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필요합니까?

그 답은 이성입니다. 지성과 이성을 이렇게 구분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자신이 없습니다. 나는 전문적인 언어학자나 인문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확답을 할 수는 없습니다. 비록 전문가들이 볼 때 잘못된 관계설정이라 하더라도 내 나름대로 규정해보려고 합니다. 지성은 단순한 정보에 불과하지만 이성은 그 정보를 유익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판단하는 기능입니다.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성은 단순한 앎이라고 한다면 이성은 그것의 목적을 분명히 인식하는 앎입니다. 이런 점에서 이성이 훨씬 근원적인 앎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의학공부를 할 수 있는 능력은 지성이지만 그 의술을 바르게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은 이성입니다. 변호사나 판사는 법에 대한 앎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반드시 이성적인 것은 아닙니다. 의술과 법이 나쁘게 사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성은 있는데 이성은 없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성적인 사람은 비록 지성적이지 않드라도 지성적이면서 이성적이지 못한 사람보다 훨씬 바람직하고 의미있게 살아갑니다. 이런 점에서 아는 것은 많지만 이성적이지 못한 대학교수보다는 아는 것은 별로 없지만 인간이 자연의 일부인 것을 명확하게 알고 분수에 맞도록 성실하게 사는 농부가 훨씬 이성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사이비 지성이 아주 많습니다. 이 세상은 일단 접어두고 교회 세계만 보더라도 단순한 지성에만 머무는 경우가 많습니다. 말하자면 수십년 동안 교회에 다니면서 성서와 교회 질서에 대한 정보에는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빠삭한 사람들이면서 정작 비이성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이 그런 모습이 아니었을까요? 그들은 이것 저것 아는 것은 많았지만 예수와 진리를 몰랐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노예라고 했으며 장님이라고 했습니다. 참 이상하죠? 자기는 본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눈이 멀었으며, 자기는 자유인이라고 생각하는데 실제로는 노예라는 사실이 말입니다.



이성과 영성의 통전화로!



결국 신앙의 토대는 반지성주의도 아니고, 그렇다고 지성주의도 아니라, 오히려 이성에 놓여야 한다는 말이 됩니다. 지성과 이성의 차이를 앞에서 잠시 언급했습니다만, 일반적으로는 별로 구별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서 시대의 헬라어를 보면 이 차이를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로마서 12장1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너희의 드린 영적 예배니라." 여기서 "영적인 예배"라는 단어를 자세하게 보십시오. 공동번역은 "진정한 예배"라고 표현하고, 루터번역은 "vernuenftiger Gottesdienst"(이성적인 예배)라고 표현했습니다. 원래 헬라어 성경에는 "로기켄 라트레이안"인데, 로기켄의 원형인 로기코스(이 형용사는 로고스라는 명사에서 왔음)라는 헬라어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rational, 다른 하나는 spiritual입니다. 개역성경은 로기코스를 영적인 것으로, 루터는 이성적인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진정한이라는 뜻으로 번역한 공동번역은 그 중간의 입장 같군요. 아마 바울이 살던 그 시대에는 이성과 영성을 같은 것으로 본 것 같습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이성적인 것과 영적인 것은 당연히 달라야 하는데 헬라 사람들은, 그리고 그런 헬라 사람들과 똑같은 의미에서 이 단어를 사용한 바울 같은 초대 교회 지도자들은 이 두 개념을 하나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왜 이성과 영을 동일한 것으로 보았을까요?

직접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우선 교회 안에서 영성이 어떻게 왜곡되어 있는지 짚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보통 교회 안에서 "박 집사님은 참으로 영성이 풍부하네요."라고 말할 때 보통 사람들과 다른 세계에 삶의 무게를 두고 살아간다는 것을 뜻합니다. 때로는 이런 의미가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삶의 태도로 받아들여질 때도 있습니다. 기도원 출입이 잦고 철야기도를 많이 하고, 입만 열었다하면 온갖 신비로운 언어를 쏟아내는 사람들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좀더 극단적인 경우에는 흡사 족집게 점쟁이처럼 누구의 인생을 훨히 내다보는듯한 말을 할 때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임산부가 아들을 낳을 것인지 딸을 낳을 것인지 기도를 통해서 미리 알아낼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소위 <영발>이 센 사람들 말입니다. 이런 요소들을 영적이라고 한다면 위에서 인용한 성서구절의 로기코스의 다른 한 축이라할 이성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영성이 건강한가 아닌가 하는 검증은 바로 그것이 이성적인가 아닌가에 달려 있습니다. 가장 이성적인 것이 가장 영적인 것이며, 가장 영적인 사람이 가장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성과 영성은 바로 하나의 사실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자, 이제 우리는 바울과 초대 교회는 왜 이성과 영성을 동일한 것으로 보았는가에 대해서 답할 차례입니다. 그 대답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이성이나 영성 모두 사물과 사건의 근본에 관계되는 인간의 구성 요소라는 사실이 바로 그 대답입니다. 영적인 사람은 사물의 근본을 통찰합니다. 이성적인 사람도 역시 그와 같습니다. 예를 들어 여기 꽃이 있다고 합시다. 보는 사람마다 각각 느낌과 판단이 다릅니다. 꽃가게 하는 사람은 그 꽃의 가격을 생각하겠고, 꽃꽂이 하는 사람은 머리 속에 그런 그림이 떠오르겠죠. 식물학자는 그 꽃을 과학적으로 분석하지 않을까요? 시인이라면 한편의 시상이 떠오를지도 모릅니다. 모두가 제 나름대로의 경험으로 그 꽃이라는 사물을 평가합니다. 그들 중에 영적인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 꽃의 근원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 꽃의 생명 작용, 그 원인과 결과, 그것의 우주론적 의미들을 파헤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는 이제 그 꽃으로 돈벌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꽃의 일부가 되어서 자신을 초월하게 됩니다. 인간의 이런 정신적 작용이 바로 영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동양종교에서는 늘 화두를 안고 수행합니다. "이게 뭐꼬?"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지구상의 모든 사건과 현상은 신비, 그 자체입니다. 이게 도대체 무엇일까요? 지구 상에서 벌어지는 이 온갖 조화는 어디에 오며 어디로 가는 걸까요? 저는 이 자리에서 두 가지 예만 들겠습니다. 하나는 우리 주변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물입니다. 신기합니까, 아닙니까? 지구상의 물질은 우리가 아는 한 기체와 고체와 액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중에 액체인 물이 가장 신기한 것 같습니다. 어떻게 자기 형체를 갖지 않으면서 고유한 물질일 수 있습니까? 손을 씻거나 목욕을 하면서 그 물의 느낌을 좀더 절실하게 생각해 보십시오. 무언가 다른 차원의 인식이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헤르만 헷세가 쓴 <싯달타>를 보면 그가 강물을 보고 큰 깨침을 얻습니다. 지금도 인도인들은 인더스강을 신의 젖줄기처럼 생각하면서 살아갑니다. 기독교의 전통에서도 보면 세례받을 때 물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약간만 시각을 다른 곳으로 돌리면 이 문제는 훨씬 심각한 것으로 다가옵니다. 지구에 비해서 거의 무한대의 공간인 우주에서 물이 있는 곳은 거의 지구가 유일합니다. 아마 외계인이 지구를 방문했다고 한다면 모든 게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그중에서도 물이 제일 그렇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화학방정식으로는 H2O라는 아주 간단한 조직으로 구성된 물은 태양과 지구의 사이의 절묘한 조화로 인해서 존재하게 된 물질입니다. 지구와 똑같은 행성인 금성은 태양에 가깝게 붙어 있기 때문에, 화성은 멀기 때문에 물을 만들어낼 수 없었으며, 잠시 만들어냈다가도 유지시킬 수 없었습니다. 물이 없으면 모든 생명현상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지요?

두 번째의 예는 쌀입니다. 무위당 장일순 선생의 이야기 모음집의 제목이 <나락 한알 속의 우주>라고 되어 있습니다. 평소에 이런 생각을 하던 청년들은 장일순 선생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어느 정도 감을 잡았을 것입니다. 쌀 한톨에 우주가 담겨 있습니다. 너무 흔하기 때문에 별생각 없이 밥을 먹습니다만 그 쌀은 단순히 우리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생산된 먹거리이기 전에 우주론적인 사건입니다. 탄소동화작용만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물과 탄소와 태양이 놀라운 화학작용을 일으킴으로써 모든 생명의 기초인 식물의 생명을 유지시켜나갑니다. 따라서 쌀 한톨에는 1억5천만 킬로미터 가량 떨어져 있는 태양으로부터 광속 8분동안 달려온 태양 에너지가 담겨 있다는 말이 됩니다. 이런 쌀을 먹는 우리 인간도 역시 생물학적인 관점에서만 본다면 태양의 자손입니다. 그 태양 에너지가 밑바탕이 된 식물을 먹고 살아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가 여기서 말하려고 한 바는 우리 앞에 드러난 현상은 단지 우리가 체감할 수 있는 현상 자체만이 아니라 훨씬 큰 힘이 그 뒤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눈여겨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모든 현상들이 그런 대상이 됩니다. 위에서 예를 든 그런 물질 현상만이 아니라 고통과 소외, 기쁨과 희열 같은 심리적인 문제도 그렇고, 궁극적으로는 생명과 죽음이 그렇습니다. 이런 문제에 자기의 모든 삶을 집중시키는 사람들을 우리는 수행자, 수도사, 또는 도사라고 합니다. 일상을 꿰뚫고 있는 본질을 들여다 보려는 것입니다. 간혹 자신들이 깨달은 바를 몇 마디 말로 표현합니다. 삶은 대몽이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이들의 깨달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들은 뭔가 희한한 사람들이라고, 또는 위대하기는 하지만 현실적이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외면하거나 냉소적으로 바라봅니다. 이들의 작업이 추상적인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저 일상에 취해서 살아가는 우리보다 훨씬 현실적이고 구체적이고 정확합니다.

이런 점에서 영성과 이성은 상통합니다. 본질을 꿰뚫어본다는 점에서 이성과 영성은 같은 지평의 인간 작업입니다. 굳이 구별해본다면 이성은 좀더 분석적이며, 영성은 통시적입니다. 이성은 미시적이라고 한다면 영성은 거시적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구별될 필요는 없습니다. 사물을 가장 정확하게, 가장 구체적으로, 가장 미시적으로, 가장 분석적으로 보는 사람은 결국 영적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즉 자기 자신을 초월해서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사족같은 말을 덧붙인다면 여기서 초월은 이 세상과 아무 상관없이 그저 신선놀음 하듯, 뜬구름 잡듯이 자기 흥에 겨워서 살아간다는 게 아니라, 이 세상의 외면적 현상에 사로잡혀서 온갖 번뇌와 이해타산에 빠지지 않고 훨씬 본질적인 것에 모든 마음과 삶을 투자함으로써 참된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도 사람들에게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저런 염려에 빠지지 말고 우선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했습니다. 부엌에서 많은 일로 분주하던 마르다에게 이르기를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한 두가지 뿐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한국 교회는 이런 차원에서 영적인 공동체일까요?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교회의 일들이 오히려 우리의 마음을 분산시킬 때가 많지 않습니까? 그런 정도가 아니라 우리는 어쩌면 반지성적이거나, 또는 추상적인 지성주의에 빠져 있기도 합니다. 모든 사물과 역사를 가장 정확하게 파악하며 사는 사람들이 바로 기독교인들입니다. 이성적이며 영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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