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성서 아카데미/ 제3회 설교공부 강의안/ 2003.2.17(월), 오후2시



설교 쉽게하기의 한계와 설교지평 넓히기





지난 2월7일 <대구성서 아카데미>를 취재하러온 기독교 사상 편집 팀과의 모임을 마친 후, 저와 현풍제일교회 이신건 목사, 편집부장 한종호 목사, 이렇게 셋이서 따로 찬 한잔 마시며 몇 시간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우리는 그날 주로 설교에 대해서 많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중에 이신건 목사님이 전한 한 토막이 이렇습니다. 그동안 학생들만 가르치다가 이제 목회 현장에 들어와서 만나게 되는 가장 큰 어려움은 뭐니뭐니 해도 설교 문제라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 가깝게 지내는 목사와의 통화에서 이렇게 말했답니다. "아무개 목사, 설교 준비하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인줄 잘 몰랐어. 설교하고 나서 돌아서면 곧 설교할 때가 오고, 그 설교를 마치면 또 다시... 너무 힘들어서 이제 설교는 일주일에 두 번만 하기로 했어." 목회자라면 누구나 갖는 문제이겠지요. 그러자 이미 20년 이상 목회를 한 상대편 목사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이 목사, 조금만 있어봐. 설교하는 게 그렇게 힘들지 않는 날이 올거야." 이 말의 의미는 분명합니다. 이 두 사람이 처한 상황이 바로 한국 강단의 현주소입니다. 한쪽에서는 설교행위에 부담을 느끼고 있으며, 다른 한쪽에서는 설렁설렁 넘어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쪽이 정직한 걸까요? 쉽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걸까요? 아니면 자기 자신을 속이고 있는 걸까요? 어쨌든지 우리 모든 설교자들은 설교행위에 상당한 부담을 느끼면서 이런 설교의 부담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찾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1. 설교 쉽게하기의 한계



쉬운 설교라는 말은 설교 하는 입장과 듣는 입장에 따라서 약간 틀립니다. 설교 하는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별 수고를 많이 들이지 않고 준비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하며, 듣는 입장에서는 설교자가 준비를 많이 했건 하지 않았건 상관 없이 머리를 별로 쓰지 않아도 쉽게 이해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 두 입장은 일치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설교자가 별로 준비를 하지 않았는대도 청중들이 잘 알아듣고 은혜를 많이 받았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하며, 온갖 수고를 다 기울이고 기도도 많이 했는데 별 반응이 없는 경우가 있다는 점에서 설교 준비와 청중의 반응이 늘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설교자의 입장에서는 쉽게 준비한 설교가 청중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는 경우를 가장 바람직할 것입니다. 바람직하다기 보다는 그렇게 기대하는 것이죠. 그런데 이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게 해결될 수 없다는 데에 설교자의 고민이 있습니다.  

우선 이 사태의 진면목을 정직하게 들여야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곧 설교자들이 겉으로는 설교하기 힘들다고 하소연하고 있습니다만, 실제로는 너무나 쉽게 설교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설교준비를 쉽게 하는 설교자의 형태는 두 가지로 분류됩니다. 한쪽에는 거의 준비 없이 즉흥적으로 강단에 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전문적인 부흥사들이나 소위 입담 좋은 유명 설교자들이 이런 형태에 속합니다. 이미 각본에 있기 때문에 좌고우면 하지 않고 그 각본대로 설교를 하면 되니까 힘들 게 하나도 없습니다. 일종의 설교 노하우에 정통한 사람들입니다. 물론 마음의 준비야, 또는 기도의 준비야 나름대로 하겠지만 실제로 설교 자체에 대한 준비는 별로 힘들여 하지 않습니다. 이는 흡사 동네에서 감기 환자나 보는 내과 전문의가 이런 환자를 위해서 별로 공부를 하지 않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런 초일류 설교자들의 머리 속에는 문제은행처럼 많은 설교의 재료들이 들어 있어서 경우에 따라서 그것을 꺼내 쓰기만 하면 됩니다. 단지 상황에 맞도록 편집만 잘 하면 됩니다.  

다른 한쪽에서는 설교 준비를 철저하게 하고 싶은 마음이 있긴 하지만 실제로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마 대개의 설교자들이 이런 상태에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늘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설교 전후에 무언가 미흡하다는 마음으로 늘 쫓깁니다. 그래서 여기 저기 설교 세미나에 참석하기도 하고, 남의 설교집을 참고하기도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고 계속 힘들어 합니다. 그러다가 그런 노력도 포기하고 그냥 쉽게, 준비없이 설교하는 일이 상습적으로 반복됩니다. 본인 스스로 설교에서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고 신자들의 반응도 무덤덤하고, 교회 부흥도 시원치 않으니까 기발한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서 여기 저기 기웃 거리거나 아니면 설교보다는 다른 교회 프로그램에 치우치게 됩니다. 그러면서 목회의 연륜만 쌓이는 겁니다.

위에서 거론된 두 가지 형태가 외면적으로는 상반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한쪽은 스스로 설교를 잘하고 있으며 신자들의 반응도 좋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한쪽은 스스로 설교가 별로라고 생각하고 신자들의 반응도 시원치 않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양쪽이 실제로는 똑같습니다. 한쪽은 자기 설교가 괜찮다고 생각하면서 설교 준비를 별로 하지 않는 것이며, 다른 한쪽은 자신감이 없어서 설교를 대충합니다. 양측 모두 설교를 모르기는 매 한가지입니다. 앞의 설교자는 모르면서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며, 뒤의 설교자는 자기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 뿐입니다. 어떤 점에서는 무언가를 안다고 생각하면서 수없이 지껄이는 설교가 훨씬 문제가 많겠지요.

저는 실제로 교회 현장에서 그런 현상을 적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성서와 세계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또는 그것에 진지하지도 못한채 아주 작은 자신의 말 기술에 의지해서 청중들을 억지로 설득시키려는 설교자들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일종의 대중선동입니다. 대중들은 대개가 논리적이기보다는 심리적이고 감정적이기 때문에 기만당하기 아주 쉽습니다. 사이비 교주들에게 끌려다니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박태선 집단도 그렇고, 문선명 집단도 그렇습니다. 사이비 종교 단체에 속한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자살하는 사례가 외국의 경우에도 종종 있습니다. 정통 교회 안에서도 대중이 기만당하고 있다는 현상만 보면 이런 사이비 집단에서 일어나는 현상과 비슷합니다. 설교자의 말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한 판단은 전혀 없이 그저 아멘과 믿습니다는 구호로, 흡사 개그 콘서트에 모인 오빠 부대들처럼 기계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이렇듯 대중을 조작해나가는 설교는 그것이 아무리 큰 효과를 보인다고 하더라도 비기독교적이며 비신학적입니다. 이에 비해서 어떤 설교자들은 약간 답답할 정도로 고지식하게 말씀에만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것을 해석한다기 보다는 그냥 있는 그대로 전할 뿐입니다. 이런 설교를 듣는 청중들은 별로 재미를 느끼지 못합니다. 물론 이런 설교에 머물러 있는 것이 좋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래도 대중을 선동하는 설교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덜 위험하다는 말씀이죠.



위에서 설교 쉽게하기의 현상에 대해서 두 가지로 구분했습니다만, 그런 외면적 현상 안에 숨겨진 보다 실질적인 이유를 우리는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설교학 교수들이나 뛰어난 설교 실천가들이 늘 충고하는대로 "설교는 쉽게 하는 거야"라는 주장의 밑바탕에는 두 가지의 논리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하나는 복음의 정체성 문제입니다. 케리그마로서의 복음은 이미 우리에게 명확하게 들러나 있기 때문에 콩이냐 팥이야 따질 것 없이 단순하게 전해야 한다는 생각이 우리 설교자들의 마음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콩나물 항아리에 물주기 식이라고 말씀들 하지요. 똑같은 말씀이라도 자꾸 반복해서 듣고 들으면 믿음이 자란다고 말입니다. 다른 하나는 청중의 지적 수준에 대한 평가입니다. 수준이 낮은 청중에게 굳이 어려운 말을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지요. 아마 한국 교회 강단의 설교는 TV에서 방영하는 삼류 연속극이나 단지 말초적인 웃음이나 파는 시트콤, 또는 기껏해야 교양강좌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설교와 목회를 "꿩잡는 게 매"라는 식으로 생각한다면 목사는 이런 수준에 맞추어서 설교를 해야합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많이 팔리기만 한다면, 인기를 얻을 수 있다면 클래식 가수가 뽕짝 노래만 불러도 될까요?

저는 <그말씀> 1996년6월호에서 이렇게 주장한 적이 있습니다. "쉬운 설교가 좋은 설교라는 막강한 주장이 한국교회 강단을 지배함으로써 우리의 설교는 모르는 사이에 최소한 네 가지 위기에 노출되어 있다. 이 위기는 한편으로 한국교회 강단의 역동성으로 포장되기도 하기 때문에 그 음모를 분간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 네 가지 위기가 정확한 진단인지 아닌지는 생각하는 분들에 따라서 다르게 평가되긴 하겠지만, 일단 그것을 여기서 다시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모든 설교가 천편일률입니다. 왜 그렇게 설교가 한결같은지 모르겠습니다. 설교집이나 기독교 신문이나 잡지에 실리는 설교가 판에 박은 듯 똑같습니다. 예컨대 "죽도록 충성하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한다고 합시다. 이런 제목으로 무슨 설교가 나올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충성하는 사람은 사적인 일을 돌아보지 않는다. 충성하는 사람은 성령의 이끌림을 받는다. 충성하는 사람은 기도하는 사람이다. 이런 틀에다가 결론적으로, 충성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큰 축복이 있다고 설교를 정리합니다. 약간의 적당한 예화나 설교 구조를 밑받침할만한 성구를 모아놓으면 설교가 됩니다. 설교를 쉽게 해야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또는 능력의 한계 때문에 모든 설교자들이 똑같은 설교를 하게 됩니다. 이건 설교의 위기입니다.

둘째, 설교 내용이 빈곤합니다. 이 부분은 첫째 요인과 연관되지만 약간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위의 것이 주로 설교의 형식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이번 것은 주로 내용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설교의 본문으로 삼고 있는 성서는 초월적인 방식으로 출현한 게 아니라 역사적 과정 안에서 출현했기 때문에 설교자들은 성서 본문이 담고 있는 그 역사 현실성을 이해하고 해석해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작업을 거치지 않고 피상적으로 드러난 사건만 전달하기 때문에 그 설교의 깊이가 없게 됩니다. 말하자면 복음의 형식에만 치우쳐 있지 그 내용에 천착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요한복음에 나오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를 본문으로 택했을 경우에, 진리론과 자유론에 대한 공부가 밑바탕에 있어야 이 설교의 내용을 풍부하게 엮어낼 수 있습니다. 그런 공부가 충분치 못하면 진리가 곧 예수와 직통으로 연결되어서, 예수 잘 믿으면 자유로워진다고 설교하게 됩니다. 결론적으로는 맞습니다. 그러나 그 결론에 이르게 되는 방식과 논리가 지나치게 단순하고 비약되었기 때문에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셋째, 설교가 감상적입니다. 설교의 내용이 논리적으로 전개되지 못하게 되면 어쩔 수 없이 청중들의 감정에 호소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앞서 우리의 설교가 TV의 드라마 수준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런 대중적인 드라마의 속성은 감상주의입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빠진 남녀가 어느 다리 위에서 만납니다. 비가 오거나 눈이 오는 날이면 더욱 감정이 살아납니다. 이런 드라마는 이런 장면에서 시간을 질질 끕니다. 감상적인 배경 음악을 깔아야 되겠지요. 설교가 이런 컨셒으로 진행되고 있지는 않을까요? 그러다 보니 설교에 감동스러운 예화가 많이 등장할 수 밖에 없습니다. 사업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십일조 헌금을 한푼도 떼어 먹지 않고 드렸더니 결국 사업이 성공하더라는 식의 예화들입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한국의 통속 드라마와 설교를 지배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런 것도 결국은 설교를 쉽게 해야한다는 유혹과 한계에 의한 설교의 위기입니다.

넷째, 설교자의 카리스마가 상실되었습니다. 설교는 목사에게 주어진 고유한 카리스마(은사)인데, 오늘 교회 회중들은 이런 목사의 카리스마를 겉으로는 인정하는 것 같지만 속내로는 거의 무시하는 실정입니다. 그 이유는 일반 신자들도, 특히 교회 평신도 지도자들도 성서의 세계를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저는 목사와 평신도의 질적인 차이를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평신도들이라고 해도 최소한 인문학적 소양이 있기만 하다면 목사들보다 훨씬 정확하게 성서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그동안 설교자들이 성서를 너무나 안이하게 접근하는 설교를 함으로써 평신도들이 설교의 본질을 오해하게 되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모임에 몇분 대표적인 평신도 지도자급의 선생님들이 참석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일반적으로 목사의 설교에서 생명의 충만감, 존재의 신비감을 느끼십니까? 아니면 오늘도 역시 그 타령이구나, 할 때가 더 많습니까? 약장수같은 쉬운 설교로 인해서 오늘 목사 스스로 설교의 카리스마를 잃어버렸습니다.



2. 쉬운 설교의 전형



이제 저는 이러한 쉬운 설교의 전형을 구체적으로 소개하려고 합니다. 이런 설교를 배우면 설교가 너무나 쉽습니다. 굳이 설교 준비할 것도 없습니다. 특히 요즘은 인터넷에서 무진장한 정보를 얻을 수 있으니까 이렇게 쉬운 설교의 요령만 배우면 그런 정보를 이용해서 아주 간단하게 설교를 준비할 수 있습니다. 그 장본인은 서울 명성교회의 김삼환 목사입니다. 지난 번 두 번의 특강에서 옥한음 목사의 설교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말씀드렸습니다만, 이번에 이 김삼환 목사의 설교집을 보고 그래도 옥 목사의 설교가 낫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선택한 설교집은 생명의 말씀사에서 1993년에 출판한 <네 마음을 지키라>입니다.

우선 이 설교집을 읽고 난 느낌은 "참 쉽게 설교 하는구나"였습니다. 지식인들로부터 학문적이지 못한 할머니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에게 알아듣기 쉬운 방식으로 말씀을 전하더군요. 설교가 이런 대중을 상대로 하는 커뮤니케이션이기 때문에 단순한 설교방식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설교를 쉽게하기 원하면 이 분의 설교집을 읽어보십시오. 순식간에 설교 요령을 터득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설교 준비할 것도 없이 그냥 성령이 이끄는대로, 좀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자기의 주관적인 느낌에 따라서 본문을 선택하고 대충 구수하면서도 약간 지적인 냄새가 풍기는 이야기를 하면 됩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이런 설교의 방식을 들여다 보겠습니다.

1) 특수한 현상을 보편적인 것으로 왜곡시킵니다. 김삼환 목사의 설교집에 이런 구절이 등장합니다. "이번 영주 집회 때 그것에 호우주의보가 내렸고, 계속 비가 왔습니다. 그러나 집회만 시작하면 비가 멈추었습니다. 믿음으로 나서니까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2시간 이상 설교 중에 비가 멈추었다가 설교가 끝나는 순간 비가 쏟아지는데 너무너무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올림픽 때도 하나님께서 모든 태풍과 비를 비껴가게 하셨습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창고도 주시고 하늘 문도 열어 주시고 닫아주십니다."(235f.). 이런 우연한 사건들을 모두 기도의 응답이라고 해석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일입니다만, 이상하게 일반 대중에게는 잘 먹힙니다. 이런 식으로 설교하기는 참으로 쉽습니다. 약간의 상상력만 있으면 일부러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도 있습니다. 별로 기도를 열심히 하지 않는 내 삶의 주변에도 이런 간증거리는 허다합니다.  

2)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의 신앙형태에 대해서 자주 거론합니다. 김삼환 목사의 설교에는 의사, 장군들이 많이 나옵니다. <기도 성령 전도>라는 제목의 설교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치과 병원을 하는 우리 집사님 한 분이 오셔서 '목사님, 금년에 첫날 번 수입을 몽땅 선교비로 드립니다' 하고 갖고 왔습니다. 백 몇 십만원을 그대로, 하루의 수입 모두를 갖고 왔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좋은 선교 방법입니다. 내가 직접 선교사는 못 될지라도 선교를 도울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 하루 수입만 가지고도 선교사가 한달 쓸 수 있는 비용을 낼 수 있는 것입니다."(21쪽). 김 목사는 곧 이어서 선교사로 나서려고 애를 쓴다는 내과 원장 이야기를 또 다시 합니다. 이런 예는 이 설교집에 많이 나옵니다. 이렇듯 사회적으로 성공했으면서도 매우 신앙적으로 사는 사람들의 예를 통해서 대중들의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설교를 쉽게 하려면 이런 예화들을 잔뜩 준비하기만 하면 됩니다. 어떤 설교를 하든지 이렇게 세속적으로도 성공하고 교회에 모범적인 사람들을 본문과 연결시키만 하면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기도도 많이 하고, 헌금도 많이 드리고, 사회봉사도 많이 하고, 교회에 열심히 나오고, 장군이면서 주일학교 교사를 하겠다고 자원할 정도이니까 어떤 설교에든지 써먹을 수 있습니다.

3) 자연현상을 이용하는 설교가 많습니다. <저는 우리 하나님, 시편 95:1-11>이라는 설교에서 그는 TV 다큐멘터리에 나온 백로 이야기를 중심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백로 어미가 어떻게 새끼를 키우는가 하는 과정을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높은 곳에 둥지를 틀고 살아야 합니다. 마음놓고 편안하게 살아가는 것을 부러워해서는 안 됩니다. 백로는 둥지 위에 어미와 같이 있어야 합니다. 어미와 같이 있으면서 어미가 하는 것을 날마나 배우고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그렇게 해서 성장한 백로들이 모여 하늘을 덮고 날아가는 모양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33). 매우 재치있는 설교 방식인 것 같습니다. 이 설교를 듣고 신자들은 계속 교회를 중심으로 살아야만 되겠다고 생각하겠지요. 기도하고 예배드리고 말씀 읽으면서 ... 살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이런 방식의 설교는 아주 쉽습니다. 쇠똥굴이의 습성을 통해서도 설교할 수 있죠. 누가 보든 않든 상관없이 자기에게 주어진 과업을 열심히 수행한다든지, 더러운 똥을 유용하게 이용하는 능력이라든지, 하여튼 좋은 쪽으로 얼마든지 비유할 수 있습니다. 이런 방식은 설교를 쉽게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알레고리 방식과 거의 똑같기 때문에 설교자의 주관성에 치우칠 염려가 많습니다.

4) 한 본문의 설교를 위해서 여러 본문을 적용시킵니다. 설교가 흡사 성서 본문의 짜집기 식으로 전개되는 것입니다. <아이를 가리키라, 수8:18:19>라는 설교는 참으로 재미있기도 하고 우습기도 합니다. 여호수아가 단창으로 아이 성읍을 가리키니 그 순간에 복병이 성읍을 함락시켰다는 본문입니다. 고대인들의 전쟁을 설교의 본문을 삼을 때는 훨씬 더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하는데 이 설교는 가장 전형적인 승리주의에 사로잡힌 형식을 보여줍니다. 여호수아가 단창으로 아이 성을 가리켰고, 그것으로 전쟁에 승리를 가져온 것처럼 우리도 오늘의 아이 성을 가리켜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신문에 나온 부도덕한 일들을 열거하면서 이것이 오늘의 아이 성라는 것입니다. 이 설교 중간 부분에서 모르드개와 에스서 이야기를 장황하게 설명하면서 오늘의 하만 장군을 창대에 매달아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참으로 편리하고 쉬운 설교 패턴입니다. 이런 식으로 설교하기 시작하면 별로 준비할 것도 없습니다. 그저 책상 앞에 앉아서 한 두 시간 기억나는대로 성구를 골라내기만 하면 됩니다.



기독교사상 편집부장 한종호 목사의 <전병욱 비판적 읽기>는 삼일교회 전병욱 목사의 설교를 비판하는 책입니다. 아마 한국 최초로 설교에 대한 실명비판이라는 점에서 상당히 센세이셔날한 반응을 보인 것 같습니다. 저는 그 책을 읽고 전병욱 목사의 설교와 김삼환 목사의 설교가 상당히 닮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사실 이 두 분만이 아니라 설교의 대가들과 목회에 성공한 분들에게 공통으로 드러나는 특징들이 있습니다. 일단 설교의 내용은 차치하고 상대방을 설득시키는 요령이 탁월하다는 점입니다. 그 요령이 각자마다 다르기는 하지만 별 내용이 아닌 것을, 또는 왜곡된 내용을 어떻게 해서라도 설득시킨다는 것입니다. 그 설득력은 아마 멧시지가 쉽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하는 것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설교를 쉽게 함으로써 설득력을 확보하고 있는 이런 설교에 결정적으로 부족한 것이 있습니다. 성서주석입니다. 칼 바르트는 본 대학교에서 고백교회 운동을 하다가 조국으로 추방당하면서 신학생들에게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엑세게제, 엑세게제, 엑세게제!" 김삼환 목사와 전병욱 목사의 설교에는 이런 성서주석이 없습니다. 거의 모든 설교가 그렇습니다. 쉬운 설교를 하려다가 보니까 신자들의 귀에 솔깃한 말을 해야하고, 그런 말을 하기 위해서는 성서본문 주석이 거의 필요 없습니다. 다만 사람들의 마음을 읽어내기만 하면 됩니다. 그래서 설교자들이 성서신학이나 조직신학이 아니라 앞다투어 상담학을 공부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설교의 패턴은 왜곡된 인간론과 오늘의 천박한 시대정신에 호소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왜곡된 인간론은 죄의식에 기초한 신앙심이며, 천박한 시대정신은 성공신화입니다.

죄의식에 기초한 신앙은 우리의 목회 현장에 깊숙이 뿌리박고 있습니다. 내가 중고등부 학생회에 있을 무렵에는 이런 현상이 훨씬 노골적이었습니다. 부흥회를 열었다 하면 "회개하라"고 욱박지릅니다. 청중들을 죄의식에 사로잡히게 함으로써 신앙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하는 형태입니다. 요즘도 그런답니다. 윤석전 목사라는 양반은 청소년 집회에서 그렇게 쌍소리를 많이 한다면서요? 이런 집회에 가서 실컷 욕을 얻어먹고, 실컷 울고 불고, 그런 과정이 반복됨으로써 심리적인 카타르시스를 경험하는 것을 기독교 신앙으로 변호되고 있습니다. 대중집회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파격적인 언사를 사용할 수는 있지만 거의 노골적으로 죄의식을 자극하는 설교는 정당하지 못합니다. 이런 유형의 설교는 빌리 그레함의 영향이 큽니다. 물론 한국에 복음을 처음으로 전한 미국의 선교사들이 대부분 이런 근본주의적이고 청교도적인 도덕주의에 사로잡힌 이들이었기 때문에 죄 문제를 매우 중요한 케리그마의 구성요소로 강조한 탓이 있기는 합니다만 그때는 그래도 소박한 상태였기 때문에 초창기에는 이 문제가 그렇게 심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국 기독교가 급성장하게 된 7,80년대에 빌리 그레함이 소위 "탕자의 비유" 류의 설교를 한국에 이식시킴으로써 그것이 거의 복음의 본질로 자리를 잡았다는 데서 훨씬 문제가 많다는 것입니다. 이런 죄의식은 한국 기독교를 매우 무력하고 편집증적인 종교로 만들었습니다. 이 세계를 성속이원론으로 봅니다. 세상은 악하고 교회는 거룩합니다. 이런 식의 설교는 참으로 쉽습니다. 인간과 문화의 실존이 어떤 깊이가 있는지 헤아리지 않고 무조건 죄냐 아니냐 하는 이분법으로 재단해버립니다. 예컨대 공산주의는 악이다, 타종교는 마귀다 하는 식입니다.

이런 식의 설교나 목회는 7,80년대, 또는 무식한 부흥사만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날까지 한국 교회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일반 신자들의 정서가 어떤 상태인지 말입니다. 늘 불안한 모습을 보입니다. 새벽기도회에 나오지 못했다는 죄책감,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신자들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신앙적인 모범생을 목표로 한 목회와 설교이기 때문에 그런 모범생이 되지 못한 신자들은 늘 불안해 합니다. 이렇듯 교회 안에 있는 도덕적 불안증을 프로이트는 "집단적 노이로제"라고 불렀습니다. 그에 앞서 니체는 훨씬 치밀하게 이런 도덕주의적 현상을 분석하고 비판했습니다. 이런 인간론에 근거해서 설교를 하는 것은 참으로 쉽습니다. 인간 이해가 매우 단조로우니까요. 그냥 이런 구도에다 짜맞추면 얼추 맞아떨어집니다.

설교와 목회의 성공신화 부추기기는 거의 한도를 넘어버린 상태입니다. 소위 잘나가는 설교자들의 설교 특징은 바로 이것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앞서 죄의식과 청교도적 도덕주의가 빌리 그레함의 영향에 의한 것이라고 설명했는데, 이 성공신화는 로버트 슐러 목사의 영향입니다. 제가 신학생일 때 가장 많이 읽힌 책이 바로 로버트 슐러 목사의 "불가능은 없다"였습니다. 어떻게 이런 종류의 책이 베스트 셀러가 될 수 있었는지, 그리고 신학대학교 실천신학 교수들은 왜 이런 책을 추천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빌리 그레함과 더불어서 로버트 슐러 목사는 7,80년대 한국 교회의 목회와 설교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습니다. 믿음으로 하면 되지 않는 게 없다는 식의 목회와 설교였습니다. 군사독재 시절이라는 한국의 상황이 이런 목회와 설교를 토착화시킨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한일장신대학교의 철학과 교수 김영민은 우리의 7,80년대를 가리켜 <돌진근대주의>라고 부르더군요. 그 단어가 바로 우리 한국 교회에 "딱!"입니다. 이런 성공신화를 부추기는 설교가 7,80년대에 조용기로 끝나는 게 아니라 21세기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위세를 떨치고 있다는 게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386 세대의 목사로서 가장 잘 나가는 삼일교회의 전병욱 목사가 세련된 모습으로 이런 길을 가고 있으며, 이것이 여전히 먹히고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두 가지로 구도를 적절하게 활용할 수만 있다면 설교는 아주 쉬워지고, 상당한 효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적당하게 죄의식을 강조함으로써 청중들을 주눅들게 하고, 우리가 무언가를 성취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멋있게 포장해서 전하기만 하면 됩니다. 여기에는 어떤 본문을 택하든지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두가지 요소가 모두 비기독교적이라는 데에 있습니다. 죄는 기독교의 본질이 아닙니다. 더구나 청교도적인 죄의식은 절대로 기독교의 본질이 아닙니다. 죄는 어떤 파렴치한 행위이거나 부도덕한 행위를 뜻하는 게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 자기집착입니다. 어거스틴의 표현을 빌리자면 교만(휘브리스)이고, 토마스 아퀴나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기사랑(아모르 수이)입니다. 인간은 늘 이렇게 자기에게 집착합니다. 사실 교회활동도 많은 부분에서 자기 욕망이고 자기 집착입니다. 따라서 죄문제는 청교도적인 도덕성 회복의 차원이 아니라 훨씬 심원한 차원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성공주의는 두 말할 것도 없이 비기독교적입니다. 최근에는 청부론이 등장했다고 합니다. 깨끗한 부자가 가능할까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 있듯이 만약에 우리가 온전히 하나님 나라에 마음을 두고 있다면 부자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충실하면서 우리가 청부가 될 수 있을까요? 소유 자체가 죄는 아니지만 깨끗한 부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성공주의는 예수의 십자가와 완전히 배치됩니다. 팔복의 말씀과도 완전히 대립합니다. 그런대도 우리는 여전히 성공신화를 신자들에게 바겐세일 합니다. 이렇게 설교하기 시작하면 아주 쉽습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성과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3. 설교의 지평 넓히기



저는 <그말씀>에 게재한 글에서 설교를 쉽게 할 생각하지 말고 오히려 어렵게 하자고 주장했습니다. 물론 전달 기술은 커뮤니케이션 이론에 따라서 요령껏 해야겠지만 그 내용만큼은 어렵게 해야한다고 말입니다. 사실 설교는 시인이 시작(詩作)이나 작가의 소설쓰기처럼, 그리고 화가의 그리기처럼 창조적인 작업입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설교되어야 할 복음을 이미 완료된 상품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재주껏 전달하기만 하면 된다고 여기는데, 이것은 큰 착각입니다. 복음은 완료된 상품이 아니라 여전히 진리론적 차원에서 논의되어야 할 생기(生起, Ereignis)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질문해 봅시다. 우리는 하나님을 확연히 압니까? 부활을 압니까? 종말을 압니까? 구원을 압니까? 생명을 아나요? 존재를 아나요? 우리는 단지 하나님과 부활과 구원을 담고 있는 어떤 그릇을 갖고 있을 뿐입니다. 그 그릇은 성서입니다. 이것은 곧 계시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드러내는 계시가 담겨 있는 성서를 붙들고 씨름하는 설교자들의 운명은 참으로 고된 길 뒤에 있습니다. 그래서 바르트는 설교자를 이렇게 규정했습니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한다는 당위와 전할 수 없다는 불가능 사이에 존재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는 전해야하는데, 도대체 인간의 언어로 담을 수 없는 하나님을 전해야한다는 모순, 딜레마에 직면해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경계선에 선 설교자가 얼마나 고민하고 생각하고 기도해야할는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대도 설교를 쉽게 해야한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돌팔이 약장사이거나 보험 외판원이지 감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한국 교회 현장에서는 이런 약장사가 판을 칩니다.  

제가 여기서 설교를 어렵게 하자고 주장한 것은 청중들의 요구와 무조건 동떨어진 고도의 신학이론을 설파하자는 게 결코 아닙니다. 청중들의 삶와 분리된 이론과 사상은 아무리 고상해도 별 의미가 없습니다. 삶의 리얼리티를 확보한 설교이어야 한다는 사실에는 전혀 이의가 있을 수 없습니다. 다만 설교의 지평을 개그맨들 수준이나 뽕짝 노래나 공연한 감상주의에 젖어버리는 연속 드라마에 머물지 말고 좀더 들어가 보자 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성서 해석학의 작업입니다. 대개의 설교는 자기의 주관적인 경험에 매몰되어 있거나, 비교적 성실한 설교는 성서를 주석합니다. 앞서 말한대로 이런 주석이 설교에는 필수적입니다. 그러나 저는 주석에만 머무르지 말고 해석에 까지 나아가야 하는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여기서 성서주석과 성서해석이 어떻게 다른 것인지 잠간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이 내용은 <말씀과 삶> 2월호에 실려 있습니다. 그 내용의 후반 부분을 여기에 인용하겠습니다.  



오늘 한국 교회의 설교가 정작 성서와 기독교 전통이 말하는 근본을 붙들지 못하는 이유는 설교의 원자료라할 성서를 주석하는 것에만 머물러 있지 해석하지 않기 때문이다. 설교를 준비하는 사람은, 개인에 따라서 차이가 있긴 하지만 대개 자신이 선택한 본문을 충분히 읽고 주석집의 도움을 받은 다음에 말씀을 들어야 할 청중들의 형편을 고려해서 설교를 작성한다. 이들은 대개가 무엇을 설교해야 할지 잘 알고 있다. 흡사 수능시험을 앞에 둔 수험생들이 문제를 풀어가듯이 성서를 공부한다. 머리가 좋고 많은 노력을 기울인 학생이 높은 점수를 받듯이 설교 능력이 뛰어나거나 노력을 많이 기울인 설교자는 그만한 성과를 거둔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다. 이미 드러난 사실들을 열거하면서 나름의 수사학을 이용해서 전달하기만 하면 된다.

이와 달리 성서를 해석하는 사람은 이미 아는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전하는 것보다는 모르는 이야기를 찾아나간다. 원래 해석학(헤르메노이틱)이라는 원어가 헬라 신화에 나오는 헤르메스에서 유래했는데, 헤르메스는 신의 뜻을 전하는 사자이다. 신의 뜻은 숨겨져 있다. 헤르메스는 인간이 모르는 신의 이야기를 인간이 알아듣도록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이런 점에서 설교가 해석학적이어야 한다는 말은 이미 지나간 이야기를 서술하는 게 아니라 아직 우리에게 오지 않은 사건을 선취적으로 해명해야한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설교는 예언이며, 그것이 곧 진리의 능력이다.  

사실 과학도 그렇고 예술도 그렇다. 과학 선생은 이미 나와있는 과학이론을 가르칠 뿐이지만 진정한 과학자는 아직 모르는 과학의 세계를 연구한다.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는 누구에게 배우거나 누구를 가르치지 않고 음악의 세계에 들어가 있을 뿐이다. 그 세계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열지 않고 연주자가 들어간 것만큼만 열기 때문에, 그 음악의 세계를 얼마나 기술적으로 잘 표현해 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은 그 다음의 문제이다. 그런데 우리 나라의 음악교육은 늘 이런 기술에만 머물러 있다. 사실 설교도 이런 수준에서 한걸음도 앞서지 못했다.

한국 교회의 설교는 아예 주석도 없이 자기의 종교경험만 일방적으로 전달하거나, 아니면 정보차원의 성서주석에 치우쳐 있다. 전자는 재미있기는 하지만 사이비성이 강하며, 후자는 진지하기는 하지만 진부하다. 예수님이 그렇게 설교했던 것처럼 설교의 지평은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에 착근되어야 한다. 따라서 그때까지 잠정적이며 유한한 역사 내의 모든 것들은 해석되어야 한다.



이렇듯 설교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서 해석학적 과정을 거쳐야 한다면 이런 훈련을 어떻게 받아야 하는 것일까요? 이런 훈련은 별난 게 결코 아닙니다. 삶의 기초에 대한 공부가 그것입니다. 이 삶의 기초에 대한 학문을 가리켜서 우리는 "인문학"이라고 부릅니다. 일반적으로는 문학, 역사, 철학이 인문학을 대표합니다만 반드시 이런 종류의 공부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물리학, 생물학, 고고학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간 삶의 문제와 연관된 제반 공부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인문학은 인간의 생명(삶)에 관한 학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의학도 인문학이고 법학도 역시 그렇습니다. 인간의 생명, 그 삶에 대한 공부를 이론적으로, 실천적으로 깊이 있게 해야만 설교자로서의 준비가 갖추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인문학적 공부의 기초는 최소한 신학교 다닐 때 탄탄하게 다져야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신학교에서 그런 교육이 거의 전무합니다. 단지 교회 운영을 잘하는 기술자를 양산해내는 직업학교에 불과합니다. 물론 신학교에서 이수하는 과목을 보면 다양하기는 합니다. 헬라어, 히브리어, 라틴어 같은 고전어로부터 시작해서, 성서원전 강독, 교리사와 조직신학, 기독교 윤리, 그 이외에서 기독교 교육이나 실천과목을 배웁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신학교에서는 고도의 학문성과 깊은 영성을 소유한 학생들을 배출해내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 과연 이런 학문성과 영성이 실제로 준비되고 있는가 하는 점을 생각하면 "아니올시다"입니다. 저의 신학교 생활을 돌아보면 이것은 아주 자명합니다. 신학다운 신학을 공부하지도 못하고 참된 영성도 갖추지 못한채 단순히 목회기술의 초보자로서 졸업하고 맙니다. 이런 상태로 졸업한 다음에, 아주 살벌하고 비인간적인 목회 현장에 투입되니까 이것으로 신학과 영성은 끝입니다. 실제로 현장 목회자에게 신학과 영성은 거의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그런 필요성을 인식하는 경우라 하더라도 철저히 시장원리에 지배받는 목회 현장에서 그런 훈련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일종의 악순환에 빠져 있는 셈입니다.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단절시켜야만 목회와 설교가 제자리를 잡아갈 수 있는데, 현실은 사실상 막막합니다. 이런 마당에 인문학적 공부는 씨도 먹히지 않겠지요.

우리에게 전문적인 인문학 공부가 필요하다고 해서 우리가 전문적인 생물학자나 철학자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럴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인문학에서 정리되어야 할 모든 공부의 근본에 대한 이해가 깊어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게 바로 핵심입니다. 생명, 죽음, 존재, 시간, 고통, 소외, 자유, 해방, 진리 등등. 이런 개념들에 대한 공부와 인식이 깊어질수록 설교의 깊이는 정비례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서 자체가 이런 개념들을 바탕에 두고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른 학문에 전문가가 될 필요는 없지만 존재와 시간이 무엇인지는 좀더 진지하게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 여건상 그런 깊이에까지 들어가지 못했다면, 시간이 없거나 머리가 따라주지 않아서 그렇다면, 그런 깊이가 있다는 사실만이라고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엉뚱한 소리를 하지 않게 됩니다. 어떤 면에서 설교자는 성서라는 악보를 통해서 노래를 부르는 성악가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소리의 능력에 따라서 잘 부르는 사람도 있고 좀 미치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는 있을 수 있고, 그런 차이는 사실상 크게 중요하지도 않습니다만, 성서라는 악보에 있는대로 부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섣부른 노래를 대단한 것인양 착각하고 있다면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일 겁니다. 이런 일들이 목회와 설교에서는 아주 그럴듯하게 일어납니다.



맺는 말



예수의 설교는 양면성이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어린아이들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간단 명료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 어떤 지성과 종교적 경험으로도 파악해낼 수 없을 정도로 어려웠습니다. 바리새인은 제쳐두고 심지어 예수의 제자들 조차도 예수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하겠다고 불평할 정도였습니다.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마 16:11).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막 4:9, 7:14, 눅 14:35).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뇨"(막 4:13).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추었으므로 저희가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눅 18:34). 구약에서도 역시 진실한 예언자의 예언은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했습니다만, 거꾸로 대중들의 귀에 솔깃한 예언은 인기를 많이 끌었습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그 설교자의 설교를 듣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대중이 모이는가 하는 것을 잣대로 설교의 정당성 여부를 판단할 수 없습니다. 바람직한 설교에 사람들이 많이 모일 수 있지만 사람들이 모이지 않는다고 해서 반드시 나쁜 설교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어쨌든지 오늘 우리가 지금까지 논의한 문제의 핵심은 설교자들이 대중추수주의에 근거해서 늘 쉬운 설교를 해야겠다는 유혹에 빠져 있으며, 이로 인해서 결국 설교의 지평이 나무나 축소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청중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만 골라서 할 것이 아니라 아직은 감추어져 있지만 결국 드러나야 할 계시의 말씀을 찾아서 전해야합니다. 이런 노력을 통해서 설교의 지평은 확대됩니다. 이런 점에서 설교와 그 설교 행위자의 길은 자동차 세일즈맨의 상술이 아니라 도(道可道 非常道)에 이르려는 수행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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