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의 대중추수주의를 넘어서!



이 자리에서 나는 어떻게 하면 설교를 요령있게 잘 할 수 있는지에 대한 한 전형을 소개함으로써 오늘의 교회 강단에 내면화 되어 있는 복음의 대중추수주의(追隨主義)적 실용화와 그 가벼움을 지적하고, 아울러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부분적으로나마 제시해보려고 한다. 각종 목회자 세미나에 설교학 강사로 나설 정도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몇몇 설교자들의 설교집과 설교를 중심으로 문제에 접근해보겠다. 옥 아무개 목사의 <우리가 바로 살면 세상은 바뀝니다>(1998, 이하 "우"로 약함), 김 아무개 목사의 <네 마음을 지키라>(1993, 이하 "네"로 약함), 이 아무개 목사의 "하나님께로부터"(기상 2002년 10월호, 이하 "하"로 약함). 우선 한 두 마디 사전 양해를 구해야만 할 것 같다. 오늘의 이 문제 제기는 그분들의 모든 설교를 싸잡아 비판하는 것이 아니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문자로 출판되기 이전에 교회의 생생한 현장에서 선포된 말씀이기 때문에 설교집만으로 이러쿵 저러쿵 시비를 건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 어설픈 부분이 보이더라도 해량(海量)을 바란다.

우선 이 분들의 설교집을 읽고 난 느낌은 "참 쉽게 설교 하는구나"였다. 지식인들로부터 학문적이지 못한 이들에게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이 알아듣기 쉬운 방식으로 말씀이 전개되었다. 설교가 어쩔 수 없이 일반 대중을 상대로 하는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점에서 이런 단순 명료한 설교 방식이 상당히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몇 번 반복해서 읽기만 하면 매우 요령있는 설교 방식을 익힐 수 있는 이런 설교 패턴에는 근본적으로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그 중에서 몇 가지만 간추려 보겠다.



아전인수적 해석

첫째, 특수한 현상을 보편적인 것으로 왜곡시키는 문제.

예컨대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등장한다. "이번 영주 집회 때 그곳에 호우주의보가 내렸고, 계속 비가 왔습니다. 그러나 집회만 시작하면 비가 멈추었습니다. 믿음으로 나서니까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2시간 이상 설교 중에 비가 멈추었다가 설교가 끝나는 순간 비가 쏟아지는데 너무너무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올림픽 때도 하나님께서 모든 태풍과 비를 비껴가게 하셨습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창고도 주시고 하늘 문도 열어 주시고 닫아주십니다."(네, 235쪽). 이런 우연한 사건들을 기도의 응답이라고 해석한다는 것은 비록 일반 청중들이 솔깃해 하는 내용이라고 해도 그야말로 전형적인 아전인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성서의 보도를 통해서 보더라도 하나님은 매우 특이한 방식으로 자신의 구원행위를 사람들에게 알리신다. 만나와 메추라기 사건이라든지, 심지어는 우주의 별들이 운행을 멈추었다는 보도들도 있다. 이런 이야기들은 구약성서의 고대인들이 자신들의 인식론적 범주 안에서 하나님을 우주론적 능력으로 경험했다는 신앙고백이지 기도하고 믿기만 하면 모든 초자연적이고 특이한 사건들이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증거는 결코 아니다. 우리는 성서 안에서 그들이 하나님의 계시를 어떻게 인식해 나갔는지에 대한 보다 심원한 세계를 읽는 것이지, 그들과 똑같은 방식의 신앙형태를 배우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아전인수적인 설교는 성서에 대한 알레고리칼한 해석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 김 아무개 목사의 <아이를 가리키라, 수 8:18:19>라는 설교는 참으로 재미있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다. 고대인들의 전쟁을 설교의 본문으로 삼을 때는 훨씬 더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하는데 이 설교는 가장 전형적인 알레고리칼한 성서 이해를 보여준다. 여호수아가 단창으로 아이 성을 가리켰고, 그것으로 전쟁에 승리를 가져온 것처럼 우리도 오늘의 아이 성을 가리켜야 한다는 논리이다. 신문에 나온 부도덕한 사건들을 열거하면서 이것이 오늘의 아이 성이라는 것이다. 이 설교 중간 부분에서 모르드개와 에스더 이야기를 장황하게 설명하면서 오늘의 하만 장군을 창대에 매달아야 한다고 설명한다. 참으로 편리하고 쉬운 설교 패턴이다(네, 37-47쪽). 이런 식으로 설교하기 시작하면 별로 준비할 것도 없이 그저 책상 앞에 앉아서 한 두 시간 기억나는대로 적당한 성구를 골라낸 다음, 그것을 이현령비현령 식으로 풀어내기만 된다.



복음의 도구주의  

둘째, 복음의 지나친 실용주의적 적용.

복음의 실용화는 아마 미국의 가벼운 실용주의적 가치관의 도입으로 인해서 발생한 현상인 것 같다. 아래는 이 아무개 목사의 설교에 나오는 내용이다.

한 가정 주부가 쓴 아름다운 글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아이들 위해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는 귀하고 복된 삶을 누리게 해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지만, 또 이런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 딸꾹질을 멎게 해주십시오. 아이가 고통스러워합니다. 하나님, 트림 잘 나오게 해주십시오. 토하면 어떡해요. 하나님, 변을 본 지 너무 오래되었습니다. 빨리 변을 보게 해주십시오. 하나님, 소화가 잘 되게 해주십시오. 이렇게 조금씩만 먹는데 소화까지 잘 안 되면 안 되잖아요. 하나님, 지금 손톱을 깎아줍니다. 이 작고 여린 손가락, 다치거나 피나지 않게 해주십시오. 하나님, 코가 막혔습니다. 저는 할 수 없으니 하나님이 뚫어주세요." 정말 아름다운 글입니다. 이 주부는 아이의 트림 속에서, 아이의 딸꾹질 속에서, 아이의 일거수일투족 속에서 하나님을 뵙고 있습니다.이처럼 매사에 하나님을 뵙고 느끼며 사는 이분의 매일이 새날이 되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하, 107쪽).

일상의 작은 부분에서 늘 하나님을 의식하고 살아야 된다는 그의 생각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또한 기본적으로 그런 생각에 동의하고 있지만, 이 문제를 이런 식으로 접근한다는 것은 우리가 신앙을 도구화 하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노골적으로 표현하자면, 설교를 신자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도구로 여긴다는 것이다.

장군, 의사 등, 사회적으로 출세한 사람들을 자주 거론하는 김 아무개 목사의 아래와 같은 감동적인 이야기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치과 병원을 하는 우리 집사님 한 분이 오셔서 '목사님, 금년에 첫날 번 수입을 몽땅 선교비로 드립니다' 하고 갖고 왔습니다. 백 몇 십만원을 그대로, 하루의 수입 모두를 갖고 왔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좋은 선교 방법입니다. 내가 직접 선교사는 못 될지라도 선교를 도울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 하루 수입만 가지고도 선교사가 한달 쓸 수 있는 비용을 낼 수 있는 것입니다.(네, 21쪽).

김 목사는 곧 이어서 선교사로 나서려고 애를 쓴다는 내과 원장 이야기를 또 다시 한다. 6.3빌딩과 횃불회관에 얽힌 최 아무개 장로와 어릴 때부터 헌금을 열심히 드려서 자신과 후손이 축복을 받았다는 록펠러 이야기가 있으며(네, 246쪽), 성경요절을 1,700개나 외운다는 군의관 이야기도 나온다(네, 256쪽). 반면에 가난하게 사는 것을 신앙이 없는 결과로 간주한다. "한 나라가 잘되고 못되는 것은 그 나라의 종교에 달렸습니다. ... 인도와 파키스탄을 보면 한마디로 지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 나라의 문맹률은 80%가 넘습니다."(네, 80쪽). 이 나라 사람들이 이렇게 가난하고 비참하게 살아가는 이유가 종교에 있다는 주장이다. 이런 논리에 따르면 믿음이 좋으면 잘 살게 되고 믿음이 없으면 가난하게 산다는 말이 되는데, 이런 해석은 근본적으로 역사적 사실과도 배치될 뿐만 아니라, 더구나 기독교 정신에 적합하지도 않는다. 참고적으로, 요즘 기독교계에 "청부론" 문제가 불거지고 있는데, 이런 논의도 역시 복음을 지나치게 실용적인 도구로 해석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죄의식과 자기만족

셋째, 편향된 인간론.

상당히 많은 설교자들이 인간을 죄라는 구조 속에서만 바라보고 견강부회식으로 설교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기독교의 인간론과 구원론에서 죄론이 중요한 요소이기는 하지만 우리의 설교와 목회 현장에는 인간의 자유와 해방이 아니라 오히려 죄 문제가 상위 개념에 자리를 잡음으로써 청중들을 죄의식에 몰아넣는 형국이다. 지금 당장이라도 신자들의 신앙의식을 깊이 들어야 보면 이런 현상은 아주 손쉽게 드러난다. 새벽기도회에 빠졌다는 죄책감,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지 못했다는 자책감, 성수주일에 못했다는 불안감이 신자들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다. 설교는 신자들의 이런 약점을 직간접으로 자극함으로써 어떤 결과를 얻어내려고 한다. 이렇듯 교회 안에 있는 심리적 불안을 프로이트는 "집단적 노이로제"라고 비판했으며, 그에 앞서 니체는 훨씬 치밀하게 이런 도덕주의적 현상을 분석한 바 있다. 이런 왜곡된 인간론에 근거한 설교로 인해서 결국 복음의 실질적 능력이 손상받고 있다.

이런 유형의 설교는 빌리 그레함의 영향이 크다. 물론 한국에 복음을 처음으로 전한 미국의 선교사들이 대부분 이런 근본주의적이고 청교도적인 도덕주의에 사로잡힌 이들이었기 때문에 죄 문제를 매우 중요한 케리그마의 구성요소로 강조한 탓이 있기는 하지만, 그때는 그래도 소박한 동기가 있었기 때문에 이 문제가 그렇게 심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 기독교가 급성장하게 된 7,80년대에 빌리 그레함이 소위 "탕자의 비유" 류의 설교를 한국에 이식시킴으로써 그것이 거의 복음의 본질로 자리를 잡았다는 데에 훨씬 문제가 심각하다. 이런 식의 설교나 목회는 7,80년대만이 아니라 오늘날까지 한국 교회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현상은 이러한 죄의식의 강조가 그 역반응으로서 설교 안에 인간의 도덕적 책임감이 지나치게 역설된다는 점이다. 약간 지성적인 교회에서, 중산층이 중심이 되는 교회에서는 세련된 윤리적 설교가 많이 행해지고 있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옥 아무개 목사의 설교집 제목이 이를 단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우리가 바로 살면 세상은 바뀝니다"는 주장은 대단히 그럴듯하게 보이지만 신학적으로 별로 타당성이 없다. 우리가 삶의 모범을 보임으로써 세상을 바꾸겠다는 것은 기독교 신앙이 아니라 인간의 교만이며 자기 성취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물론 예수님이 말씀하신 <누룩의 비유>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복음의 능력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힘은 복음에 있는 것이지 우리 기독교인에게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리고 실제로도 우리에게는 그런 본이 될 수 있는 바탕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대개의 경우에는 허위의식이 빠지게 된다. 또한 바리새인들처럼 절치부심해서 그런 위장된 본을 보인다고 해서 세상이 하나님의 나라로 변하지도 않는다. 기독교인이 모범적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주장 자체만 보면 옳은 말이지만 그것이 윤리적 실천을 통해서 세상을 바꾸겠다는 발상이라면 지나치게 순진하고 단순하고 인간적이다.

이런 점에서 오늘 기독교인의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는 매우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그 밑바탕에 죄의식이 깔려 있고, 그 죄의식을 해소하기 위해서 철저하게 율법적인 모범을 보이며, 그런 율법적 행위를 통해서 결국은 자기 만족에 빠져버린다.



성공신화 부추기기

넷째, 천박한 시대정신과의 결합.

오늘 설교와 목회의 성공신화 부추기기는 거의 한도를 넘어버린 상태이다. 소위 뜨고있는 설교자들의 설교 특징이라 할 이 성공신화는 로버트 슐러 목사의 영향이 크다. 내가 신학생일 때 가장 많이 읽힌 책이 바로 로버트 슐러 목사의 "불가능은 없다"였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이런 종류의 책이 베스트 셀러가 될 수 있었는지, 그리고 실천신학 교수들은 왜 이런 책을 추천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흡사 공격적 마켓팅을 주장하는 기업들의 상업주의와 똑같이 믿음으로 밀고 나가면 못할 게 없다는 식의 목회와 설교였다. 어떤 면에서 군사독재 시절이라는 한국의 상황이 이런 목회와 설교를 토착화시킨 것인지도 모르겠다. 한일장신대학교의 철학과 교수 김영민은 우리의 7,80년대를 가리켜 <돌진근대주의>라고 정의했는데, 그 단어가 바로 우리 한국 교회에도 맞아떨어지는 것 같다. 이런 성공신화를 부추기는 설교가 대표적으로 7,80년대 여의도의 조 아무개 목사로 끝나는 게 아니라 21세기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다는 게 한편으로 재미있긴 하지만, 기독교 정신이 세속주의에 안주하고 있는 것 같아서 슬프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하다.

여기에는 약간 다른 각도이지만 바로 앞에서 언급된 상당히 세련된 윤리적 설교도 포함된다. 기독교인들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고 있는 이런 설교는 일견 매우 바람직하게 보이지만 하나님의 행위보다는 인간의 행위를 앞세운다는 점에서 여전히 시대정신과의 결합에 불과하다. 이 아무개 목사는 이렇게 외치고 있다.

시간은 인생이고 인생은 곧 흐름입니다. 그러나 그 흐름의 객체가 되느냐 아니면 주체가 되느냐는 이처럼 엄청난 차이를 초래합니다. 그러므로 이미 내 눈앞에 버티고 서 있는 1994년을 정녕 새해가 되게 하기 위해서는, 어제와 변함없는 자리에 가만히 앉아 다가오는 새해를 수동적으로 맞이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그 경우 흐름의 주체가 된 1994년은 또다시 나와는 아무 상관없이 흘러가 버리고 말 것입니다. 따라서 어제의 자리를 털고 일어나 1994년 속으로 뛰어드는 주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때에 흐름의 주체가 된 나는 객체인 시간을 새 시간, 새해로 가꿀 수가 있습니다.(하, 100).



이 얼마나 비신학적이고 비성서적인 생각인가? 이 목사는 서양근대주의의 <주객도식>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의 주권인 시간마저도 인간이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신자들은 자기들의 노력 여하에 따라서 얼마든지 자신만만한 인생을 구가할 수 있다고 부추겨주니까 은혜를 많이 받는 것으로 착각한다. 인간이 시간 앞에서 얼마나 무력한지 깨닫고 진작에 어떤 의도를 포기하고 <솔라 그라티아>에 의존해서 살아가게 하는 것이 설교인데도 불구하고 한국의 많은 설교자들은 우리 인간이 마음먹기에 따라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소위 <아이 켄 두 잇> 이념을 기독교 신앙으로 변호하고 있다. 물론 겉으로는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이라고 말은 하지만 의식 속에는 인간중심주의, 업적주의, 자기만족주의가 가득 차 있다. 이런 설교는 비록 종교적인 단어를 나열하기는 하지만 인간이 성취해야할 도덕성, 사회봉사, 능력개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세속적이다.



교양강좌 수준의 설교

여섯째, 성서주석이 결여된 설교.

많은 설교에서 설교하는 그 사람의 말은 많은데 정작 필요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주석은 없다. 물론 설교자들이 겉으로는 하나님이 이렇게, 저렇게 말씀하셨다, 하고 설교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수많은 성구를 줄줄이 꿰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 모든 것이 자기 생각일 뿐이다. 사람들이 듣기 원하는, 그들의 귀에 달콤한 이야기거리만 찾아 헤맨다는 말이다. 내가 앞에서 이분들의 설교를 읽으면서 "쉽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했는데, 이것은 좀 가혹하게 말해서 그분들의 설교에서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듣지 못했다는 뜻이다. 입담 좋은 어느 유명 강사의 교양강좌에 불과했다. 예를 들어 옥 아무개 목사의 <정직한 의인, 잠 11:10-11>이라는 설교를 보면 거의 모든 내용이 신문에 나올만한 것으로 채워져 있다. 그는 대통령을 위한 조찬기도회 때 있었던 이야기로 말문을 열었다. 대통령이 공무원들을 내사해보니까 부정부패가 만연되어 있고, 그중에는 기독교인들이 많았다는 지적이다. 기독교인과 교회가 얼마나 부패했는지 장황하게 설명하다가 중간쯤에 본문을 한번 읽고 의롭다고 인정받은 자는 삶을 통해서도 의인으로 인정받아야 정상이라고 강조한다(우, 38쪽). 그리고 곧 이어서 또 다시 대통령(김영삼?)의 개혁을 지지하는 발언을 하면서 의롭게 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양심적으로 행동하는 몇 사람에 대한 예화를 들고, 그것으로 끝이다. 이런 것을 설교라고 할 수 있을까? 중고등학교 교장의 훈화와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을까? 설교자들이 말씀의 깊이(주석)에 천착하지 않고 이렇듯 듣기 쉬운 교양강좌 수준에 맞추고 있는 이유는 세계, 인간, 하나님을 보는 안목이 부족한 것만이 아니라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대중추수주의가 설교행위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설교의 지평 넓히기

설교가 대중추수주의에 빠져든 이 운명은 설교에 대한 착상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는 데에 있다. 설교는 시인의 시작(詩作)이나 작가의 소설쓰기처럼, 그리고 화가의 그리기처럼 창조적인 작업, 즉 여전히 진리론적 차원에서 논의되어야 할 생기(生起, Ereignis)인데도 불구하고, 상품을 파는 세일즈 기술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단도직입적으로 질문해 보자. 우리는 하나님을 확연히 아는가? 부활과 종말을 알고 있나? 구원과 생명을 아나? 더욱이 우리는 존재를 실증적으로 인식하고 있나? 우리는 단지 하나님과 부활과 구원을 담고 있는 어떤 그릇인 성서를 갖고 있을 뿐이다. 하나님이 자기를 드러내는 계시가 담겨 있는 성서를 붙들고 씨름하는 설교자들의 운명은 이런 점에서 참으로 고된 길에 놓여있다. 우리 설교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는 전해야하는데, 도대체 인간의 언어로 담아낼 수 없다는 딜레마에 직면해 있다는 말이다. 이 경계선에서 설교자는 그 설교의 내용에 대해서 구도 정진하는 자세를 가져야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오늘의 설교학이 어떻게 청중들이 알아듣기 좋게 전달해야만 하는가라는 방법론에만 빠져버렸다는 이 현실은 매우 우려할만 하다. 따라서 나는 이렇게 제안한다. 방법론이 아니라 설교의 지평을 심화시켜나가자고 말이다.



성서주석에서 해석으로

설교의 지평을 넓히자는 말은 청중들의 요구와 무조건 동떨어진 고도의 신학이론을 설파하자는 게 결코 아니다. 청중들의 삶과 분리된 체계와 사상은 아무리 고상해도 별 의미가 없다. 삶의 리얼리티를 확보한 설교이어야 한다는 사실에는 전혀 이의가 있을 수 없다. 다만 설교의 지평을 티브이에서 늘 대하는 개그나 뽕짝 노래나 통속 드라마 수준에 머물지 말고 좀더 깊이 밀고 나가자는 것이다. 그 작업이 바로 성서 해석학이다. 대개의 설교는 자기의 주관적인 경험에 매몰되어 있거나, 비교적 성실한 설교는 성서를 주석한다. 앞서 말한대로 이런 주석이 설교에는 필수적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주제로 삼아야 할 설교는 주석에서 끝나지 않고 해석에까지 나가야 한다. 나는 이 문제를 <말씀과 삶> 2월호에서 언급했는데, 그 내용의 후반 부분은 다음과 같다.  



성서를 해석하는 사람은 이미 아는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전하는 것보다는 모르는 이야기를 찾아나간다. 원래 해석학(헤르메노이틱)이라는 원어가 헬라 신화에 나오는 헤르메스에서 유래했는데, 헤르메스는 숨겨져 있는 신의 뜻을 전하는 사자이다. 이 헤르메스는 인간이 모르는 신의 이야기를 인간이 알아듣도록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따라서 설교가 해석학적이어야 한다는 말은 이미 지나간 이야기를 서술하는 게 아니라 아직 우리에게 오지 않은 사건을 선취적으로 해명해야한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설교는 예언이며, 그것이 곧 진리의 능력이다.  

<중략>

한국 교회의 설교는 아예 주석도 없이 자기의 종교경험만 일방적으로 전달하거나, 아니면 정보차원의 성서주석에 치우쳐 있다. 전자는 재미있기는 하지만 사이비성이 강하며, 후자는 진지하기는 하지만 진부하다. 예수님이 그렇게 설교했던 것처럼 설교의 지평은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에 착근되어야 한다. 따라서 그때까지 잠정적이며 유한한 역사 내의 모든 것들은 해석되어야 한다.



인문학 공부

이렇듯 설교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서 해석학적 과정을 거쳐야 한다면 설교자가 실제로 이런 훈련을 어떻게 받을 수 있을까? 이런 훈련은 별난 게 결코 아니다. 삶의 기초에 대한 공부가 그것이다. 이 삶의 기초에 대한 학문을 가리켜서 우리는 인문학이라고 부른다. 일반적으로는 문학, 역사, 철학을 대표적인 인문학 분과로 간주하지만, 반드시 이런 종류의 공부만을 의미하지 않다. 물리학, 생물학, 고고학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간 삶의 문제와 연관된 제반 공부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인문학은 인간의 생명(삶)에 관한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의학이나 법학도 역시 인문학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의 생명, 그 삶에 대한 공부를 이론적으로, 실천적으로 깊이 있게 해야만 설교자로서의 준비가 갖추어지는 것이다.

우리에게 인문학 공부가 필요하다고 해서 우리가 전문적인 철학자나 역사학자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럴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중요한 것은 그런 인문학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모든 공부의 근본에 대한 이해가 깊어져야 한다는 말이다. 이게 바로 핵심이다. 생명, 죽음, 존재, 시간, 고통, 소외, 자유, 해방, 진리 등등. 이런 개념들에 대한 공부와 인식이 깊어질수록 설교의 깊이는 정비례할 것이다. 왜냐하면 성서 자체가 이런 개념들을 바탕에 두고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수행으로서의 설교행위

지금까지 논의한 문제의 핵심은 설교자들이 대중추수주의에 근거해서 늘 인기를 끌어야겠다는, 그래서 결국 설교를 쉽게 해야겠다는 달콤한 유혹에 빠짐으로써 설교의 지평이 지나치게 가벼워졌다는 사실에 대한 지적이었다. 설교방식은 쉬워야 되지만 그 내용은 어려워(깊어)야 한다는 이 두 가지 엄연한 사실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바리새인은 제쳐두고 심지어 예수의 제자들 조차도 예수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하겠다고 불평할 정도였다.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추었으므로 저희가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눅 18:34). 구약에서도 역시 진실한 예언자의 설교는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했지만, 거꾸로 대중들의 귀에 솔깃한 예언은 인기를 많이 끌었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청중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만 골라서 그럴듯하게 포장만 할게 아니라 아직은 감추어져 있지만 결국 드러나야 할 계시의 말씀을 찾아서 전하는 설교의 바른 자리를 확보함으로써 설교의 깊이를 심화시켜나가야 한다. 설교자의 이런 길은 자동차 세일즈맨의 상술이 아니라 도(道可道 非常道)에 이르려는 수행이라 할 수 있다.

                                                      <기독교 사상, 2003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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