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강, 역사적 예수(1)

기독교가 뭐꼬 조회 수 4942 추천 수 0 2011.05.03 13:27:14

제04강

역사적 예수(1)

 

 

제2강에서 우리는 초기 기독교의 역사적 토대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우리가 예상하는 것과는 달리 초기 기독교는 아직 기독교라 할 수 없을 정도로 유대교에 아주 가까웠어요. 지금 우리는 초기 기독교와 유대교가 상당히 다를 거라고 생각하죠. 예수님도 바리새인들과 관계가 별로 좋지 않았으니까요. 더구나 지금까지도 유대교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볼 때, 기독교와 유대교는 처음부터 다른 길을 걷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죠. 그러나 그게 우리의 생각과는 좀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어요. 이 문제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여기에만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없으니까, 그 정도로 하고 지나가겠습니다. 기독교라는 우리의 정체성은 유대교와 처음부터 완전히 달랐던 게 아니고 그것을 모판으로 해서 시작되었다는 점을 짚으려고 말한 겁니다.

 

예수와 하나님 나라

이제 우리는 본격적으로 ‘기독교가 뭐꼬?’라는 문제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야 합니다. 그 출발점은 뭐니 뭐니 해도 예수님이죠. 예수님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전에 한 번 짚은 대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독교라는 종교를 만들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아예 그럴 의향조차 전혀 없었다고 봐야죠. 예수님은 온전히 하나님의 나라에 집중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요. 여러분은 아직도 이 단어가 익숙하지 않을 겁니다. 혹은 다른 선입관으로만 볼지도 모릅니다. 천천히 시간을 기다려보세요. 강의를 하는 저나 듣는 여러분이나 모두 느끼는 바이지만, 용어 하나하나에 전이해가 없으면 강의의 많은 부분들을 놓치게 됩니다. 단어가 나올 때마다 개념을 다 설명하기 시작하면 진도가 나가지를 않아요. 그러니 설명이 필요하다고 생각될 때는 설명을 하고, 그냥 지나가도 되겠다고 생각될 때는 지나가겠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님의 관계만 해도 한 학기 정도는 공부해야 할 내용이에요.

하나님의 나라가 과연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처음으로 회당에 와서 한 말이나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한 말이 모두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회개하라는 말은 마음을 바꾸라는 거예요. 헬라어로 ‘메타노이아’(metanoia)인데, 이 말은 도덕적인 변화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마음의 중심을 다른 곳으로 옮기라는 뜻이에요. 하나님의 나라 쪽으로 옮기는 거죠. 도덕적인 변화가 세례 요한의 하나님의 나라 이해였다면,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이해는 전폭적인 하나님의 통치와 은총에 대한 선포였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의 첫마디를 그걸로 시작하셨어요. 그 후로도 공생애 동안 그 기준에 따라 살았고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 이해를 어디에서 가져온 걸까요? 이런 문제를 우리가 찬찬히 잘 이해해야만 성서를 바르게 알 수 있습니다. 성서가 다 그런 것을 바탕에 놓고 있으니까요. 제 동영상 강의를 듣는 분들 중에는 설교하는 목사님들도 있을 텐데요. 이런 개념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설교에서도 방향을 놓치지 않고 잘 나갈 수 있습니다. 제가 설교비평을 할 때 도덕적 설교는 주일 공동 예배에 행하는 케리그마 설교에는 맞지 않다고 했는데요. 그 이야기는 설교가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도덕적으로 살아서 이 땅에 정의로운 세계를 이루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배타적이고 전적인 통치를 가리킵니다. 그런 힘 앞에서 우리가 뭘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 나라에 마음을 둬야 하지요. 온갖 계획과 프로그램에 빠져 있는 우리의 마음을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가 얼마나 엄청나고 절대적인가에 대한 이해가 중요합니다.

제가 지난 며칠 동안 제주도에 있으면서 파도를 실컷 보았는데요. 지구의 4분의 3정도가 바다인가요? 물은 어디서 유래된 것일까요? 물리학 DVD를 잠깐 보았는데, 지구가 불덩어리였을 때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 수천 년 동안 비가 되어 내려왔다고 해요. 그것이 바다가 되었고요. 여기에는 복잡한 물리학적 사연들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그런 바다 앞에서 우리가 물 한 바가지 더 떠내거나 붇는 게 바다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언뜻 했어요. 우리가 믿음이 없어도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할 가능성이 많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요. 이것도 자칫 오해 받을 수 있는 말이긴 한데요. 그러나 믿음이라는 것이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기도 하고 축소하기도 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전적인 의지에 달려 있으니까요. 하나님이 우리의 기대에 부응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는 전적인 힘으로 이루어 가니까요.

뭐와 연결해서 보충적으로 설명해 볼까요?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조금의 책임감도 없이 하는지 모르겠네요. 왜 책임감이 없다는 표현을 썼는가 하면, 여러분은 이미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을 거의 절대적인 명제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과 다른 이야기를 하면 오해의 소지가 생길 수 있기 때문에 신학적으로 위험하다는 거죠. 그러나 우리는 실제로 신학적 위험성을 감수하고 살아야 합니다. 백척간두진일보시방세계현전신(百尺竿頭進一步十方世界現全身)이 필요한 거지요. 하나님과 만나는 경험은 백 자 길이의 장대 꼭대기에 선 것 같은 영적 경험입니다. 그 절벽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니에요. 한 발만 내딛으면 떨어져 죽지만 한걸음 더 나가야 하는 겁니다. 이 말은 그래야 모든 것을 이룬다는 선승불교의 아포리즘(경구)에요. 저는 그게 기독교가 말하는 하나님 이해에도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신학적으로 상당히 위험해 보여도 근본적으로 크게 잘못된 게 아니라면 한번 끝까지 나가보는 것도 필요한 것 같아요. 믿음절대주의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는 믿음이 없어도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개연성이 있다는 말이 위험하게 들리기도 하겠죠. 그러나 제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믿음이 무의미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통치가 절대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예요. 예수님 전하신 게 바로 그겁니다. 이게 다 연관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잘 안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어떤 것인지 안다는 것이고 그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들어와 있으며 여전히 종말론적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과 하나님 나라를 깊이 이해하는 게 따로 있는 게 아니에요. 기독교 신앙의 많은 가르침들은 서로 멀리 있는 것 같지만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거미가 촘촘하게 쳐놓은 그물처럼 말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어느 방향으로 접근하느냐에 따라 가르침들이 서로 연결됩니다. 하나님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별개가 아니라는 거예요.

이 문제를 좀 더 가깝게 느끼도록 한마디 더 하겠습니다. 우리 지구가 지금은 생명으로 가득하지만, 혜성 하나가 날아와 부닥치면 어떻게 되는지 알죠? 우리가 쌓아온 모든 문명들이 한순간에 깡그리 무너지고 맙니다. 혜성이 와서 충돌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게 아니에요. 0.01%라도 있는 건 있는 거예요. 그걸 우리가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혜성의 작용보다 우주론적으로 더 큰 힘이기 때문에 방향을 바꾸기가 어려워요. 그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지 않느냐, 그냥 넋 놓고 가만히 있어도 되느냐, 감나무 밑에서 감이 떨어지기만 입 벌리고 기다려야 하느냐 하는 반론이 생길 수 있습니다. 사실은 하나님의 통치 앞에서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이 있겠어요? 궁극적인 면에서는 우리가 할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럼 전도는 뭐 때문에 하느냐고 하겠죠.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전하는 게 전도예요.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게 아니라 우리가 할 일이 없고 할 수도 없다는 겁니다. 그건 무위에 가까워요. 노자가 말하는 무위이무불위(無爲而無不爲)인데요. 의도하지 않음으로써 못함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원칙적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칭의론이 맞아요. 우리는 다만 그렇게 하나님의 은총이 절대적이며 엄청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분이 어떻게 이끌어 가는가를 가만히 기다리면서 주목하는 것뿐입니다. 그게 선교에요. 물론 여기에는 더 많은 이야기가 필요합니다. 너무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니까 여기서 접겠습니다.

 

역사적 예수는 누군가?

앞으로 한 달에 걸쳐 예수님에 관해 말하려고 합니다. 역사적 예수를 생각해보세요. 이 분은 누굴까요? 역사 안에 있었던 그 예수 말입니다. 우선 역사에 대해서 말할까요? 역사를 뭐라고 해야 할까요? 영어로는 히스토리(history)라고 하죠. 독일어에는 히스토리 외에도 게쉬히테(Geschichte)라는 단어가 있어요. 히스토리는 실증적인 역사를 말하고, 게쉬히테는 신학적으로 해석된 역사, 실존적 역사라고 할 수 있어요. 역사적이라는 말의 반대는 초월적입니다. 역사 안에 들어있는 것을 역사에 내재한다고 하죠.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이 세상 안에서 일어난 구체적이고 실증적인 역사예요. 역사 바깥에 있는 것을 초월이라고 합니다. 이 역사의 내재와 초월이 삼투압처럼 나갔다 들어왔다 할 텐데, 우리는 내재 속에서만 갇혀 있어요. 이 시간, 이 지구 안에서만 살고 있죠. 그러나 하나님은 역사 초월인 동시에 내재입니다.

유럽 철학은 역사가 무엇인가를 밝히는 과정이었고 그것을 완성한 사람이 헤겔이었습니다. 그는 역사 철학자였죠. 마르크스도 헤겔학파에 속합니다. 헤겔에 의하면 역사는 정반합의 변증법으로 발전해간다고 합니다. 헤겔이 말하는 역사적 진보, 발전 개념은 상당히 일리가 있어요. 헤겔은 결국 절대 정신이 지배한다고 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사랑 혹은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어요. 칼 마르크스도 역사학자라고 할 수 있어요. 헤겔이 역사를 포괄적으로 접근했다면 마르크스는 경제와 노동의 문제로 접근했죠. 하여튼 역사 철학이 유럽 철학의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전공한 판넨베르크도 역사를 신학의 중심 주제로 끌어들였는데요. 뭉뚱그려 말하자면 그는 하나님의 계시가 역사로 나타난다고 말합니다. 그런 신학이나 철학, 혹은 물리학의 대가들이 말한 명제 몇 개를 설명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지만, 그들이 어떤 과정을 통해서 거기에 도달했는지를 따라가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역사로서의 계시란 말을 듣고 우리는 대충 그런가 보다 하고 간단히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거기에 도달하기까지는 아주 복잡한 전 작업이 있었던 거죠. 어떤 사람들은 판넨베르크의 역사 계시개념을 비판하면서 히틀러가 행한 악한 역사도 계시냐고 반문하는데요. 판넨베르크가 말하는 역사는 실증적인 역사, 구체적으로 일어난 역사를 지칭하는 게 아니라 계시가 역사 개념으로 나타나는 것이고, 역사를 신학의 포괄적인 지평으로 보는 겁니다.

역사적 예수에 대해서 우리가 얼마나 할 이야기가 많은가를 전하려다가 여기까지 왔는데요. 예수에 관해서 한 달 정도 이야기할 것입니다. 예수에 관한 가르침을 신학 전문용어로 크리스톨로지(Christology)라고 하고요. 이걸 앞으로 여러 번에 걸쳐 강의할 겁니다. 크게 나누면 역사적 예수와 그에게 일어난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기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사건에서 시작되는 거니까 이 대목이 우리 공부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잘 들어보세요.

생각해 보세요. 예수가 과연 누굴까요? 예수가 과연 실존했던 인물인가요? 이 문제는 소위 ‘예수 세미나’ 그룹에서 이슈화했어요. 대구성서아카데미 사이트에서도 거론되었던 『예수 퍼즐』(씽크뱅크)이라는 책이 말하듯이 예수는 신화적 존재인가요? 저는 그런 식으로 접근하지 않을 작정입니다. 제가 예수 세미나 운동에 관심이 없는 이유는 그들이 하는 말이 틀렸다기보다는 그게 신학의 본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는 것은 사회과학 혹은 고고학이거든요. 신학이 아니에요. 성서를 사회과학적인 관점으로만 접근하면 정말 성서가 말하고자 하는 진수는 다 놓치고 변죽만 울리게 됩니다. 그것도 일종의 극단인 거죠. 보수주의적 입장의 신자들이 성서를 자기중심적인 신앙으로 해석하고 자기 합리화에 이용하는 것처럼, 예수 세미나에 속한 사람들도 성서가 말하는 핵심이 아니라 주변적인 것들을 이야기하다가 마는 경향이 큽니다. 이렇게 되면 문제가 심각해집니다. 예를 들면 동백꽃에 대한 시(詩) 한 편이 있다고 해요. 시인은 동백꽃에 여러 의미를 담아 시를 썼겠죠. 그럼 그 시를 시로 이해해야 하는데, 그 시에 나오는 동백꽃에 대한 정보가 잘못되었다고 말해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시인이 동백꽃에 대해 잘 몰라도 동백꽃과의 영적 생명의 리얼리티를 전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그 시인이 알고 있는 동백꽃의 정보가 잘못되었다고 한다면 그게 옳은 지적이라고 해도 시를 읽는 게 아니죠. 시를 산문처럼 읽고, 아니 과학보고서로 이해하는 거죠. 이것도 성서를 훼손하는 겁니다.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서 무엇을 말한다고 할 때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전제해야 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정보가 그렇게 많지 않아요. 아주 빈약하죠. 보기에 따라서 그렇게 빈약하지도 않습니다. 2천 년 전의 어떤 인물에 대해서 살펴 볼 때 예수보다 더 많은 자료를 가진 사람도 찾아보기 힘들 거예요. 그렇게 본다면 예수에 대한 정보가 많다고 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예수를 역사적으로 복원해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이 문제는 아프리카에서 의료선교로 평생을 바쳐 20세기의 성자로 일컬어지는 알베르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박사가 『역사적 예수 연구』에서 이미 그 기초를 다져놓았습니다. 그분은 19세기에 있었던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을 받았는데요. 이전의 권위적인 교회나 신학의 형태에서 벗어난 합리적이고 계몽적이며 이성적인 신학적 흐름을 자유주의 신학이라고 하는데요. 이 흐름이 없었다면 기독교는 계몽 이전의 시대, 즉 군주가 모든 사람의 생사여탈권을 장악하던 중세 시대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거예요. 여러분도 자유주의 신학에 대해 많이 들었을 겁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자유주의라고 하면 죽일 놈처럼 쳐다보죠. 자유주의는 다른 말로 하면 문화개신교주의(Kulturprotestantismus)라고도 합니다. 이 시대적 흐름에서 로마가톨릭은 제외되었어요. 로마는 교황이 장악했기 때문이죠. 이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의 흐름에는 독일을 중심으로 한 개신교 학자들의 공헌이 아주 컸습니다. 문화개신교주의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지만, 자유주의 신학은 교회가 아니라 문화, 즉 인간, 이성, 계몽, 종교성 등에 중점을 두었죠. 그래서 이 때 종교학이 발전합니다. 슐라이어마허(Schleiermacher)가 대표적인데요. 그는 자유주의 신학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어요. 기독교를 문화의 현상으로 이해하기 시작한 겁니다. 전통적인 입장에서 보면 조금 위험해 보이죠. 그러나 이들의 연구로 인해 기독교가 그 자신을 방어하는 데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믿음만 있으면 된다는 전통만 고수하다가 자유주의 신학이 나오면서 면역기간을 거친 겁니다. 자유주의 신학으로 인해 기독교가 아프고 열도 났지만, 그걸 통해서 20세기에 들어와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으니까요.

앞에서 말씀드리다가 말았는데요. 자유주의 신학의 공헌 중의 하나는 성서에 대한 역사비평을 철저하게 다루었다는 겁니다. 역사비평이라는 말은 성서를 역사적 문서와 똑같이 다루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성서를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하던 것에서 태도가 바뀐 거죠. 헬라 철학의 여러 문서처럼, 그리고 고대 동양의 여러 문서들처럼 성서도 그런 문서들 중의 하나로 보고 분석해냈어요. 지금도 그 작업은 계속되고 있는데요. 그게 역사비평입니다. 어떻게 성서를 하나의 문서로 다루느냐고 기분 나빠할 수도 있는데요. 여기에는 전(前)이해가 필요합니다. 성서는 물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형성 과정에서 역사적 사건이 개입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는 없잖아요. 역사 내재와 초월이 함께 있는데, 성서에 자꾸 초월적인 부분만 있다고 보면 안 되잖아요. 한국 개신교 신자들에게서 이 현상이 두드러지죠.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인데 설화나 신화라고 하냐고 따지는 분들도 있습니다. 성서 텍스트에는 분명히 고대인들의 신화적 표현이 들어와 있어요. 여기에서 말하는 신화란 아무 근거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고대인들의 문학적인 기법을 말하는 겁니다. 그런 방식으로 고대인들이 어떤 근원적인 사실을 전하려고 했던 거죠. 성서가 기록될 당시에는 신화적 표현이 아주 보편적이고 당연한 글쓰기의 방식으로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걸 인정하자는 거예요. 그걸 인정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끌어내리는 게 아닙니다. 이런 문제에서는 일반 평신도들만이 아니라 신학자들도 오해하는 경우가 많아요.

제가 ‘예수 세미나’ 쪽의 얘기를 크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그들의 얘기가 이미 다 했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역사비평에서 다 이야기한 내용들 중에 아주 작은 것들을 가져와서 침소봉대해서 새로운 것처럼 말하니까, 옆에서 보기에 좀 그렇습니다. 현대신학을 잘 모르는 평신도들이나 나름대로 합리성을 추구하던 사람들에게는 뭔가 대단히 새로운 것을 발견을 한 것처럼 보이긴 하겠지요. 이건 선동이지 신학이 아니에요.

어쨌든 19세기의 역사비평을 잘 받아들였던 앨버트 슈바이처의 결론은 신약성서에서 역사적 예수를 복원해 낼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성서에서 역사적 예수에 관한 문제들을 해결해보려고 해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서의 신학적인 관점이에요. 성서가 담고 있는 것은 역사적인 것이 아니라 신학적인 것이니까요. 물론 성서는 아주 역사적입니다.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니라 우리의 삶 안에서 나왔으니까요. 그런 측면에서 보면 성서는 역사 내재입니다. 역사 안에 있는 거예요. 그러나 그 안에 담겨 있는 내용은 역사 기술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신앙고백이기 때문에 신학적인 거죠.

우리가 몇 주에 걸쳐서 예수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게 될 텐데요. 성서 안에는 분명히 예수에 대한 역사적 사건들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손가락이에요. 바르트 식으로 설명하자면 그릇인데요. 성서라는 그릇 안에 뭔가가 담겨 있죠. 그릇보다는 그 속에 담겨 있는 내용물이 더 중요합니다. 예수 세미나 쪽 사람들은 그릇만 보려고 하는 것 같아요. 그릇에 담겨 있는 게 뭔지를 알면 충분하잖아요. 기독교 비판 앞에서 여러분은 겁먹지 마세요. 세상 사람들의 비판이 어떻게 보면 그럴듯한 게 많아서 기독교 신앙이 근본적으로 위기에 처한 게 아닌가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을 텐데요. 걱정하지 마세요. 안티기독교 등에서 제기하는 비판에는 어떤 것은 옳고 어떤 것은 잘못되었는데, 거기에 대해서 일희일비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겁니다. 성서 기자들과 2천 년 기독교 역사에서 활동했던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어떻게 진리와 직면하고 그것을 해명해내려고 치열하게 투쟁했는가를 알고 우리도 그 흐름 속으로 들어가는 게 중요해요. 그리고 결정적인 판단은 최후의 심판 때 하나님이 행하실 겁니다. 오늘 우리가 고민하고 논의하고 풀어가야 할 문제에 대한 최종적 판단을 하나님께 맡기자는 거예요. 이것은 책임 회피가 아닙니다. 안티기독교가 말하는 것에서는 생산적인 것이 나올 수 없어요. 오늘 이 문제에 대해서는 더 들어가지 말고 지나갑시다. 제가 말하려는 핵심은 기독교의 중심 안으로 들어가자는 거예요. 하나님의 계시, 생명 등이 어떻게 드러났으며 어떻게 전승되었는지, 어떻게 앞으로 나아갈지에 집중하면 충분합니다. 전달되었나요? 공연한 것으로 여기저기 기웃거리지 말고 좌고우면(左顧右眄) 하지 말라는 겁니다.

 

마리아의 동정녀 문제

역사적 예수 문제를 언급할 때 첫 번째로 부닥치는 문제는 마리아입니다. 예수님이 처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는 건데요. 이 이야기에 대해서는 제가 다른 글에서도 따로 길게 설명을 했으니까 참고하세요. 여기서 이걸로 질질 끌지는 않겠습니다. 저는 처녀 마리아라는 문제에만 집중하려는 게 아니라 그런 문제에 접근하면서 성서를 보는 눈을 전하려고 하는 겁니다. 공부는 어떤 객관적인 사실과 정보를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공부해야 할 세계 안으로 들어가는 태도를 배우는 거예요. 선생을 통해서 저런 방식으로 저렇게 하는구나, 하는 것을 배울 수 있으면 최고의 선생을 두었다고 할 수 있죠. 처녀 마리아의 주제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요? 많은 사람들이 이 부분에 대해서 오해를 하고 있는데요. 한편에서는 예수가 처녀 마리아에게 태어났으니 얼마나 대단하냐고 합니다. 예수는 출생부터가 초자연적이니까 정말 메시아이지 않느냐고요. 그러나 다른 한 편에서는 처녀가 아기를 낳는다니 기독교가 얼마나 무식하냐고 합니다. 양쪽 다 극단적인 태도인데요.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예수가 나셨다는 이야기는 물론 일종의 전승입니다. 초기 기독교 안에서 형성된 것인데요. 처음부터 그렇게 형성되어 있던 건 아닙니다. 모든 교리가 다 마찬가지인데요. 없던 것이, 혹은 아직 나타나지 않은 것이 역사 과정을 통해서 나타난 것이죠.

동정녀 마리아 전승은 초기 기독교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맥락에서 시작된 신앙적 표현입니다. 천사가 남자를 알지 못하는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게 누가복음의 전승이구요. 마태복음은 비슷한 이야기를 천사가 마리아의 남편인 요셉에게 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사자이기도 한 천사 이야기도 심상치가 않아요. 천사가 무엇인가요? 좀 생각해보세요.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이야기는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에는 기록되어 있는데, 요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없어요. 왜 그럴까요? 만약 이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신앙의 내용이었다면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이 생략하지 않았을 겁니다. 간단하게만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의 마리아 동정녀 탄생에 대한 전승은 복음이 헬라파 유대인들에게 전파되면서 요청된 것이었어요.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당연히 출생도 특별해야 한다고 생각한 겁니다. 동정녀 탄생에서 핵심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에 있는 거지요.

참고적으로 성탄절 전승도 좀 생각해보세요. 로마가톨릭과 개신교는 12월 25일을 성탄절로 지키고, 정교회는 1월 7일을 성탄절로 지킵니다. 성탄절은 역사가 많이 흐른 다음에 교회 전통에 자리를 잡은 거예요. 처음에는 성탄절이 없었죠. 역사 안에 있던 교회의 필요성에 의해서 생긴 겁니다. 교회의 많은 전통, 교리 등이 그런 과정을 거쳤습니다. 그런 것들이 아무런 근거도 없고, 공허하고, 작위적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기독교 교리가 어느 한 순간에 뚝딱하고 만들어진 게 아니라는 의미에요. 마치 물리학이 오랜 역사 과정을 통해서 발전한 것과 비슷합니다.

동정녀 탄생의 전승에서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예수님이 여자의 몸을 통해서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구체적인 인간의 몸이 중요하지요. 몸이라고 하면 헬라어로는 두 개의 단어가 사용됩니다. 하나는 단백질 덩어리를 가리키는 ‘사르크스’(sarx)이고 다른 하나는 영과 대비되는 ‘소마’(swma)예요. 헬라 사람들은 단어를 세분화했습니다. 육체, 물질로서의 몸과 약간 다른 뜻으로의 몸으로 구분했어요. 그런 구분이 신약성서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요. 바울의 몸 이해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몸은 부활과 연관되기 때문이죠. 우리의 몸이 어떻게 부활하는가 하는 것까지 살펴보려면 공부할 게 참 많죠. 부활이라는 것이 이 헬라어와 깊이 연관되어 있어요. 다시 주제로 돌아가겠어요. 동정녀 탄생에서 핵심은 몸이고요. 동정녀라는 것은 부수적인 요소입니다. 동정녀 문제에 대해서는 제가 번역한 판넨베르크의 『사도신경 해설』을 참고하세요. 이 책은 정말 중요하기도 하고 내용도 좋습니다. 사도신경은 기독교 교리의 핵심을 모은 겁니다. 니케아 신조와도 거의 비슷하고요. 기독교 신앙의 모든 내용들이 총망라되어 있어요.

판넨베르크에 따르면 동정녀 출생의 핵심은 예수가 창조적인 하나님의 영으로 인해 마리아의 몸을 통해 출생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려야만 한다는 겁니다. 창조적인 하나님의 영은 무엇을 말하나요? 성령이죠. 진리의 영, 생명의 영, 종말의 영입니다. 이런 용어들은 성령론에 해당하죠. 어떻게 보면 기독교 신앙이 다 연관되어 있어요. 연관된 동시에 하나하나가 다 깊이가 있죠. 각각의 깊이와 연관성을 기독교 지도자들이 잘 알아야 성서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왜곡하지 않고 전할 수 있습니다. 성령론도 우리나라에서는 얼마나 크게 오해되는지 모릅니다. 주먹구구식으로 끌어들이죠. 불 받아서 마음이 뜨거워지면 성령을 받았다고 합니다. 자기 혼자 울고 나서는 성령을 받았다, 은혜를 받았다고 하죠. 그건 심리적인 자기 연민입니다. 심리적 작용과 성령 경험은 달라요. 성령론에 대한 깊은 공부를 통해서 성령과 진리가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알고, 또 진리를 교회가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열린 상태에서 보편적 진리 논쟁과 함께 우리가 경쟁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 우리가 불 받으라는 식의 성령론이나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된 기독교 신앙을 주변 사람에게 변증해 나갈 수 있을 겁니다. 그렇지 못하면 우리는 독단에 빠지거나 자기 망상에 빠지겠죠.

다시 돌아와서요. 동정녀 마리아의 핵심은 예수가 하나님의 영으로 인해 마리아의 몸을 통해 출생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려야만 한다는 겁니다. 이 이야기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에 무게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칭호는 인자, 메시아, 다윗의 후손, 하나님의 아들 등등, 여럿입니다. 초기 기독교에서 지역에 따라서 호칭이 다르게 나왔어요. 그런 칭호들 중에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부르며 따르던 공동체들이 있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에 대한 구성적 윤색과 설명으로 동정녀 마리아를 이해해야 한다는 건데요. 앞에서 잠간 언급한 것처럼 헬라적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동정녀 전승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는 겁니다. 변증을 위한 윤색이었어요. 여기에서 어떤 분들은 참 이상하다, 우리가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는 예수님의 동정녀 마리아 탄생이 핵심이라기보다는 종속적인 것이라니, 그게 정말 맞나 하고 반문할 겁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기독교 신앙의 토대가 허물어지는 게 아닌가 걱정할 분들도 있을 텐데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 생각도 없이 그냥 주입식으로 기독교 신앙의 토대를 세우게 되면, 오히려 더 쉽게 허물어져요. 기독교에 초월적이거나 초자연적인 부분이 전혀 없다는 게 아니라 성서와 기독교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을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는 겁니다. 만약에 동정녀 출생이 성서가 말하려고 하는 핵심이라면 그것을 어떤 경우에도 붙들어야죠. 그러나 기독교가 말하려고 하는 핵심은 그게 아니라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여자의 몸을 통해서 왔다는 겁니다. 이 핵심을 포기하면 안 돼요. 핵심이 아닌 것을 붙들고 논쟁을 해봤자 소모적일 뿐입니다. 초기 기독교 교부들은 영지주의자들과는 달리 예수의 인성을 강조했습니다. 여기서도 마리아의 몸은 중요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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