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강 하나님에 대한 물음

기독교가 뭐꼬 조회 수 3546 추천 수 0 2012.06.14 10:36:15

제 31강

하나님에 대한 물음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지금 제가 컴퓨터에 음악 CD를 넣고 틀었습니다. 양성필이라고 하는 대금 연주자의 연주였습니다. 제목은 ‘숨 2’, 영어로 ‘Breath 2’라고 되어 있어요. 숨 두 번째네요. 대금 연주는 CD로 들어도 괜찮지만 직접 들으면 훨씬 힘이 있습니다. 대나무에 숨을 불어 넣어서 소리를 내는데 거기에서 폭포수 소리도 나고, 폭풍이 부는 소리도 납니다. 어떻게 해서 이런 다양한 소리를 내는지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어요. 그런 것들을 소리의 경지라고 할 수 있겠죠. 무조건 큰 소리로 힘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조금 작은 소리와 큰 소리가 적절하게 배합됨으로써 어떤 힘을 나타내는 것 같아요. 좋은 연주였습니다.

오늘 저는 점심을 먹고 잠깐 산책을 다녀왔습니다. 다른 일로 바쁘긴 한데 문득 아파트 밑 숲 쪽을 바라보니 한창 아카시아 꽃이 만발하더라고요. 옛날 생각도 나고 해서 아카시아 향을 좀 가까이 맡으러 갔습니다. 누구에게나 아카시아 향기에 대한 추억이 다 있을 겁니다. 어렸을 때 아카시아 꽃을 따러 다니던 추억들은 저보다 나이가 좀 어린 사람들도 있겠지요. 초등학교 때 여학생들과 남학생들이 어울리면서 따러 다니기도 하고요. 용기가 있는 아이들은 아카시아 나무에 가시가 많은데도 그걸 타고 올라가서 나뭇가지를 꺾어 밑에 던져주기도 하고 장대로 따기도 했죠.

제가 80년대 초에 광주에서 군목에 들어가기 위한 훈련을 받았는데요. 군종 장교로 1980년 3월에 들어가서 3개월 동안 군사훈련을 받았습니다. 산 속에 들어가서 총 쏘는 연습도 하고, 야간 사격도 하고, 행군도 했어요. 지금도 기억이 나는 것은, 그 때가 밤이었는지 그 저녁이었는지 기억은 잘 안 나는데, 저녁 어스름이 깔린 때였던 것 같아요. 피곤한 몸으로 군부대 막사로 돌아오는데 아카시아 향기가 진동을 하더라고요. 왜 그런 것들이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게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오늘 점심을 먹고 아카시아 나무 밑에까지 갔다 왔는데요. 이상하게 꽃은 많았는데도 향기는 별로 안 나더라고요.

그곳으로 걸어가는데 바람이 부드럽게 불더군요. 온몸으로 바람을 맞으면서 이 바람이 뭘까 하고 생각을 했습니다. 참으로 신기한 물리현상입니다. 공기의 대류 현상이죠. 그것이 내 몸으로 느껴졌습니다. 지금 저는 이런 물리적 정보를 알고 있으니까 바람을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지만 그걸 몰랐던 고대인들에게는 어땠을까요? 보이지도 않는 뭔가가 자기를 휩싸잖아요. 뭔가가 자기를 흔들고 접촉하고 있는데, 그게 뭔지를 모르는 거예요. 그런데 그 바람이 지구 전체에 가득하다고 하는 겁니다. 내가 서있는 자리만이 아니라 저쪽 나무도 흔들리고 말이죠. 바람은 하나의 자연 현상이니까 고대인들도 저하고 똑같이 느꼈겠죠. 백만 년 전에 살던 사람도 바람에 대해 똑같이 경험하는 건데요. 얼마나 신비로웠을까요? 지구에 가득한 그 무엇, 그러나 그것이 뭔지 알 수도 없고 손으로 잡을 수도 없는 거죠. 그걸 히브리 사람들은 ‘루아흐’, 생명의 영이라고 불렀습니다. 바람과 영, 숨을 하나라고 생각했던 게 상당히 놀랍지 않아요? 좀 전에 들려드린 ‘숨 2’도 이런 것들입니다. 대나무, 바람 소리 등을 통해서 살아 있음을 경험하는 예술적 경험 혹은 종교적 경험들이 어우러져 있는 것 같아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은데 제가 왜 이런 말을 하는가 하면요. 세월이 갈수록 이 세계에 대해서 우리가 좀 더 많이 알게 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별로 그렇지 않다는 게 신기해서 말하는 겁니다. 어렸을 때 아카시아를 따먹으면서 저는 굉장히 황홀한 느낌으로 그 놀이에 심취해 있었거든요. 어른이 된 지금은 조금 다른 방식의 놀이지만 기본적으로 똑같은 것 같아요. 옛날이나 지금이나 세상을 직면하는 나의 세계 경험들은 별로 다른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존재하는가?

오늘은 하나님에 대한 질문입니다. 이게 한편으로는 좀 막막한 것 같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밤새도록 이야기를 해도 끝이 없을 것 같기도 해요. 그냥 직접 질문해 볼까요? 하나님이 존재하나요? 그렇다면 어떻게 존재할까요? 고대인들은 어떻게 하나님을 경험했을까요? 성서에는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표현이 많이 있어요. 지금도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합니다. 그 하나님이 과연 누구냐 하는 겁니다. 제가 아까 바람을 경험했다고 말했어요. 누구나 다 그런 경험을 하는데 그걸 아주 실질적으로 경험하는 사람이 있고 그냥 지나쳐 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험도 그렇지 않을까요? 그냥 지나가는 사람도 있고 실질적으로 경험하는 사람도 있을 텐데요. 영성가들은 그걸 좀 더 실질적으로 경험하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어요. 사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실질적으로 잘 경험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다고 말은 하겠지만, 그게 정말 하나님 경험인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거죠.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하는 말을 많이 합니다만, 그게 과연 무엇을 경험한 걸까요? 여러분도 아마 어렸을 때나 중고등학교나 대학교 때, 혹은 청년 시절에 그런 집회에 많이 참석했을 테고 나름대로 그런 경험을 많이 했을 겁니다.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말이죠. 여러분이 영접한 주님이 누굴까요? 그 주님은 하나님일까요? 그냥 교회 지도자들이 “당신은 예수님을 영접한 겁니다.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믿으면 구원받습니다.”라고 말하니까, 우리가 이 말에 선동되고 세뇌당해서 실제로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요? 오해는 마십시오. 예수님 영접, 혹은 하나님 경험이 특별한 사람에게만 있다는 뜻으로 말한 것은 아니에요.

제가 앞에서 바람을 말한 이유는 이게 하나님 경험에서 중요한 메타포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예수님은 성령으로 난 사람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모르는 바람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요 3:8) 성령은 바람처럼 자유로운 존재로 움직이니까요. 이것은 가르쳐서 알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제가 제 딸들에게 “야, 저기 바람을 봐라. 얼마나 놀랍냐. 뭐가 있는 거야. 형체 안에 들어오지도 않고 아주 자유롭지만, 그리고 스스로 있는 것이 아니라 공기의 이동으로 일어나는 운동이지만, 바람처럼 확실한 리얼리티가 어디에 있냐?”라고 말한다면, 이 말을 알아들을 수도 있고 못 알아들을 수도 있어요. 그냥 낱말 뜻으로는 알아들을 수 있죠. 아버지가 이야기하니까 그런가 보다 하겠죠. 그러나 그건 바람에 대한 경험이 아닙니다. 참된 경험은 바람과 자기와의 일치거든요. 그리고 그 일치를 통해서 어떤 생명의 깊이로 들어가는 거예요.

이런 설명을 상당히 관념적입니다. 생명이라는 것도 다 제각각으로 생각할 테니까, 이게 뭐라는 것도 딱 부러지게 말하기가 힘들어요. 성령은 생명의 영이기 때문에 생명을 이해하는 것이 성령을 이해하는 하나의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게 포괄적으로 관계되어 있거든요. 제가 들려드린 대금 연주자는 숨과 자기가 일치된 경험을 했을 거예요. 그러나 우리는 보통 그런 경험을 하지 못하고 삽니다.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숨 쉬는 거죠. 단전호흡을 하는 사람들은 숨을 쉬는 순간에 호흡과 일치하는 경험을 합니다. 그걸 훈련합니다. 가만히 앉아서 단전에 집중하게 되면 오장육부를 비롯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모든 게 원활하게 움직인다고 합니다. 아마 그게 가능할 것 같아요.

이건 좀 다른 이야기인데요. 우리 기독교인들은 좀더 정직하게 세계를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모르면 모른다고 인정하고, 알면 그걸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 알고 있다고 생각해도 그것이 얼마나 보편적인 진리의 토대 위에 있는 것인지 질문해야 합니다. 물론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편안하게 신앙생활을 해도 결정적으로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에요. 우리가 올바로 인식하기 때문에 의로워진다거나 구원을 받는 게 아니라 모두 의롭다고 인정만 받을 뿐이고,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으니까요. 구원은 우리의 업적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총이기 때문에, 우리가 신앙의 깊이를 세세하게 모른다고 해서 결정적으로 큰 문제가 되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성적 기독교인들로 살려고 한다면, 그리고 교회의 지도자가 되려고 한다면 그런 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요.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 준비하는 사람은 베드로후서에 나오는 말씀대로, 자기가 알고 있는 희망에 대해 질문하는 사람들에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희망은 우리가 믿고 있고 기다리고 있는 종말론에 관계된 것이고, 하나님의 통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게 다 연관돼요.

그런 쪽으로 우리가 좀 솔직해야겠죠. 솔직하게 자기 자신을 내놓고 답을 찾아가야 합니다. 답을 찾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을 걸 때 대답할 수 있는 준비를 한다는 거예요. 여기에서 믿음이 중요하지 신학적인 사유가 뭐가 그리 중요하냐고 불편하게 생각할 필요는 하나도 없습니다. 신학적으로 사유한다는 것은 우리의 선입관이나 고정관념들을 내려놓고 성령과 소통할 수 있는 자세를 갖는다는 거예요. 그게 아주 중요합니다. 신학적인 사유 훈련이라는 것은 자기 성찰입니다. 우리의 신앙에 대한 신학적 반성(theological reflection)이죠. 모든 것들은 그대로 놓아두면 때가 끼기 마련입니다. 그런 식으로 매너리즘에 빠지게 되면 원래 말하려고 하는 근본을 놓치고,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 버리는 수가 많습니다. 그걸 늘 반성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신학적 성찰이야말로 성령과 가장 밀착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말을 걸 때 최대한 알아들을 수 있는 준비 작업이라는 점에서 신학이 중요한 거죠.

 

호접몽

하나님이 존재하는가? 어떻게 존재하는가? 이런 질문들에 대해 어렴풋이 들은풍월로 지나가지 말고 아주 실질적으로 질문하고 답을 찾아보는 게 중요합니다. 강의안에도 나와 있지만, 제 큰 딸애가 중학교 3학년이고 작은 애가 초등학교 3학년이었을 때 둘째 딸이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아빠, 하나님이 보이지도 않는데 정말 있는 거야?”라고 말이죠. 그런 아이들이 제기한 질문에 대해서 제가 대답할 수 있어야만 살아 있는 설교자가 된다는 생각으로 나름대로 설명을 시도했습니다. 그 때 바람 이야기를 했습니다. 바람이 보이지 않지만,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무조건 없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 나뭇잎이 흔들리는 걸 보면 간접적으로 바람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느냐고 말이죠. 어린 딸들에게는 좀 어려운 이야기였겠지요. 바람은 공기의 움직임으로 생기는 일종의 운동이라는 말을 한 거에요. 바람은 운동이라고요. 그 다음에는 사랑을 생각해 보라고 했어요. 어머니와 아버지가 사랑을 하는데 사랑이 물건처럼 있는 게 아니라 관계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요. 관계가 중요합니다. 제가 딸들에게 설명하기 위해서 한 번 시도해 본 겁니다. 이게 완전한 대답은 아니에요. 하여튼 그렇게 실질적으로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도 바람처럼 운동이자 힘이고요. 또한 관계라는 거죠. 마르틴 부버(Martin Buber)의 책에 보면 나와 너의 관계를 중심으로 한 신학적 노력들을 많이 엿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씀드리려고 한 핵심 문제는 존재에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있다 혹은 없다고 말할 때, 우리가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할 것은 ‘있다’는 말이 뭐냐는 겁니다. 만약에 하나님을 사물처럼 존재한다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입니다. 우리가 이 존재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깊이로 생각할 수 있느냐에 따라 하나님에 대한 생각도 심화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존재라고 생각하나요? 아무래도 이 문제는 하이데거의 말을 통해서 풀어가는 게 좋겠습니다. 하이데거가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서광사)라는 책 속에서 한 이야기인데요. 앞에서 한번 말씀드린 내용이라도 중요한 거니까 양해하고 들어주기 바랍니다. 하이데거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존재하는 것들은 왜 있고 무(無)는 왜 더 이상 없는가?” 여러분, 저는 이 말을 듣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됐어요. 공부라는 이런 걸 선배들, 어른들, 스승들에게서 배우는 거예요. 제가 하이데거의 책을 많이 독파한 게 아니기 때문에 모르는 게 태반이에요. 그리고 철학자들의 전문 지식을 제가 얼마나 따라갈 수 있겠어요? 그러나 그게 그렇게 중요한 것 같지는 않아요. 한두 가지라도 알아듣는 게 중요합니다.

하이데거가 한 이 말, 이것을 통해서 제가 어떤 세계로 들어가는 경험을 했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경험이 있을 겁니다. 이 존재하는 것들, 지금 이 세상에 이렇게 있는 것들은 왜 있는 것이고, 없는 것들은 왜 없는 것인가? 제 앞에 연필이 있고, 종이가 있습니다. 종이와 연필은 너무 비슷한가요? 나무에서 왔으니까요. 그럼 그건 접어두고, 시계가 있습니다. 연필과 시계의 중간 쯤 되는 어떤 것은 아직 세상에 없습니다. 왜 없을까요? 아카시아 꽃은 있는데 아카시아 꽃과 다람쥐의 중간 쯤 되는 것은 왜 더 이상 없는 걸까요? 만약에 이런 문제들을 하나님이 그렇게 창조했으니까 그런 거라고 대답한다면, 그건 교리 문답으로는 맞을지 몰라도 이 세상의 깊이를 뚫어 보는 사람으로서는 자격미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없다’고 하는 게 그렇게 당연한 게 아니거든요. ‘있다’고 하는 것도 그렇게 당연한 게 아니고요. 김춘수 시인이 ‘꽃’이라는 시에서 그런 이야기를 한 것 같아요. 그냥 사물에 불과했는데 내가 꽃이라고 부르니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요. 시인의 영감을 제가 그대로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세상에 있고 없고 하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들이 아닙니다. 이런 문제들이 철학자들의 관심입니다. 우리가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에 조금이라도 귀를 기울인다면 하나님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도 우리의 생각을 심화시킬 수 있습니다.

제가 지금 하이데거를 통해서 있는 것과 없는 것이 그렇게 당연한 게 아니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것과 연관해서 있는(존재하는) 것들이 순식간에 사라진다고 하는 명백한 사실 속에 우리가 놓여 있습니다. 우주만물이 다 그럴진대, 오늘 우리의 삶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이게 다 지나가버리는데 우리가 정말 존재하고 있는 건가요? 지금 제가 강의를 하고 있는데, 정말 제가 있는 건가요? 그리고 여러분이 듣고 있는 이 강의는 현실인가요? 아니면 지나간 오래 전의 일에 대해서 우리가 꿈을 꾸고 회상하고 있는 건가요? 현재 이게 확실한 건가요? 이게 확실하다는 증거가 얼마나 있는 건가요? 여러분도 그런 경험이 있을지 모르겠네요. 당연히 있으리라고 봅니다. 밥을 먹다가, 길을 걷다가, 대화를 하다가 어느 순간에, 이게 지금 나의 경험이 아니라 어떤 영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고, 지난 일에 대한 회상 같기도 했을 거예요.

아마 이런 것들이 장자가 말하는 호접몽(胡蝶夢)이겠죠. 장자가 나비가 되는 꿈 말입니다. 장자가 꿈을 깬 뒤에 이렇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내가 나비가 되는 꿈을 꾸었는가, 아니면 지금 나의 삶이 장자에 대한 나비의 꿈인가? 장자가 꿈의 주인공인지, 나비가 꿈의 주인공인지 잘 모르겠다고 하는 거예요. 이런 말이 장난은 아니거든요. 이런 이야기는 우리의 현실 인식이, 우리가 경험하는 것들이, 존재하는 것들이 그렇게 확실한 게 아니라는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전도서에도 인간의 행위가 바람을 잡으려는 것처럼 헛되다고 진술하고 있어요. 이것은 어느 누구라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아니겠어요? 지금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2천 년 전의 예수님과 제자들, 초기 기독교인들은 정말 실재했던 것일까요? 물론 문서로는 그렇다는 것들이 남아 있기는 하죠. 조금 더 멀리 나가볼까요? 지구의 수명이 끝나는 그 날이 분명히 올 겁니다. 45억 년이라고 하는 시간은 분명히 오지 않겠어요? 그 전에 지구가 빙하기에 돌입해서 인간이 다 죽는다거나 생명체가 없어진다거나 아니면 혜성과 부딪쳐 지구가 폭발해서 다시 45억 년 전의 불덩어리처럼 된다면 모르겠지만요. 그럴 가능성도 완전히 부정할 수 없죠. 하여튼 그때가 오는 것은 분명합니다. 시간이니까요. 영원한 것은 아니잖아요. 그렇다면 그런 시간 속에서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이런 것들은 다 무엇일까요? 저는 지금 우리의 삶이 무의미하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그렇게 확실한 게 아니라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생각할 때, 우리가 늘 아는 사물처럼 생각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거죠. 그런 생각을 실체론적 하나님 이해라고 하는데요. 어떤 물건처럼, 옥황상제처럼, 하나님이 어느 우주 공간 안에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책임 있는 대답이 아닙니다.

 

실체론적인 하나님 이해

우리는 보통 세상을 실체(substance)로 인식합니다. 그 실체의 가장 최소 단위는 일반적으로 원소(atom)라고 합니다. 미시 물리학으로 들어가면 더 작은 단위를 말해야겠지요. 세계를 실체로 이해하는 사유방식이 신학 안에서 오랫동안 자리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최고의 실체로 이해한 겁니다. 실체론적 형이상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달리 세계를 과정(process)으로 이해하는 관점도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은 실체라기보다는 과정과 운동의 성격이 있습니다. 오늘 물리학의 도움으로 원소도 공간과 에너지의 결합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일상에서 경험하는 그 실체는 없는 거지요.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변증해야 할까요? 변증도 변증이지만, 우리 스스로도 하나님에 대한 표상을 바르게 이해해야 하는데,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걸까요? 좀 더 단도직입적으로 물어야겠네요. 하나님은 어디에 있나요? 여러분 마음에 있나요? 아니면 우주 공간의 북극성 너머 어디쯤에 있는 건가요? 예수님이 승천해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있다고 하는데, 그곳이 과연 어디인가요? 아주 실질적으로 그런 곳이 있나요? 이러한 문제들은 우리가 세계를 이해해 가는 것만큼 확장되어 갑니다.

에버하르트 융엘(Eberhard Jüngel)이라는 신학자가 『고트 알스 게하임니스 데어 벨트』(Gott als Geheimnis der Welt)라는 책을 썼어요. ‘세상의 비밀로서의 하나님’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 제목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비밀로 존재한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세상이 왜 비밀일까요? 그 비밀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질문이 끝없이 이어집니다. 한국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에 대해서 별로 질문하지 않습니다. 그냥 막연하게 아는 것처럼 전제하면서 믿고 있는 자신의 신앙적 태도에 몰입합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물리학자가 물리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그 대신 이미 앞에 나왔던 물리학적인 원리들만 계속 외우면서, 자신을 훌륭한 물리학자라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사이비인 거죠. 과학자라면 그 비밀 속으로 자꾸 들어가게 되거든요. 제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이 세계를 실체로 이해하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을 실체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겁니다. 잘못이라기보다는 그걸 뛰어 넘어 더 나아가야 한다는 거죠. 그렇다면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 이해가 다 변한다는 말인가? 그런 뜻은 아닙니다. 성서의 하나님 이해가 그런 것을 담고 있어요.

성서적 하나님 이해에서 가장 핵심적인 관점은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가르침에 있습니다. 무슨 뜻인지 감이 오죠? 형상은 실체와 가깝습니다. 정해진 틀이 있는 거예요. 어떤 범주거든요. 그렇게 하지 말라는 거죠. 성서가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창조자로 말하고 있다는 것을 잘 생각하세요. 그냥 하나님이 만들었다는 게 아니에요. 창조는 하나님 존재에 대한 문제인 겁니다. 하나님은 피조된 게 아니라는 거죠. 그러니까 피조 세계에 있는 여러 가지 형식들이나 범주들로 하나님을 재단하지 말라는 거예요. 이 성서의 하나님 진술은 오늘날의 현대 물리학이 이해하는 세계 이해에도 얼마든지 타당한 말을 할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그래서 성서 해석이 중요한 거예요. 십계명에서 제2계명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라.” 헬라 철학에서 말하는 신화들과는 지평이 다른 것 같아요. 그리고 일반 고대 종교들은 거의가 자연신을 섬겼으니까, 태양을 형상화하거나 독수리, 황소 같은 걸 만들었잖아요? 그런 것들을 통해서, 가시적인 생명의 근거를 찾아보려고 했던 거죠. 고대인들만이 아니라 지금 우리도 다 그렇지 않습니까? 지금은 자본이 힘이 됐잖아요. 그 방식으로 자기 생명을 확보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어요. 그건 일종의 종교예요. 자본주의가 이데올로기니까요. 그 형식이 정치가 되었든 스포츠가 되었든 간에 다 구원론적인 겁니다. 구원은 생명 구원에 대한 논리에요. 사람들은 위에서 열거한 것들에서 살아 있다는 확신을 경험하고 있잖아요. TV나 인터넷 등을 통해서 현대인들이 살아 있다는 경험을 하게 된다면, 옛날에 고대인들이 황소 형상을 만들었던 것과 똑같은 거죠. 인간은 이것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인류가 사라지기 전까지는 그대로 남아 있을 거예요. 왜냐하면 우리가 몸을 갖고 살기 때문이죠. 이 몸을 건사하기 위해서 소유, 구조, 제도, 문화, 문명 등을 확보하려고 하거든요. 이렇게 말하는 저도 거기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성서 기자들은 그걸 거부했습니다. 곳곳에 그런 진술들이 있어요. 고대인들은 신에 대한 경험을 어떤 공간적 의미로 받아들였고, 그래서 한 곳에 성전을 짓고 신의 형상을 건립했는데요. 구약성서 기자들은 그런 것들을 엄격히 금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도 절대화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여호와 하나님이 계실 수 있겠는가 하는 예언자들의 반론이 많았거든요. 성서는 하나님을 예루살렘 성전에 묶여 있는 분으로 생각하지 않고 세상 전체를 하나님의 전으로 생각했습니다. 성전중심주의와의 격렬한 투쟁이라고 할 수 있죠. 요한복음에 나오는 성전을 허물라는 말도 여기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어요.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성서의 진술은 이런 차원을 말하는 겁니다.

모세가 출애굽의 소명을 받았을 때, 모세는 하나님께 당신을 누구라고 하면 좋겠는가 하고 질문했습니다. 그 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대답이 나옵니다. 이것도 다 창조자와 연관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범주나 형상, 혹은 실체 같은 것으로 도저히 끌어내릴 수 없는 스스로 있는 자예요. 자존자라는 말을 숱하게 들었을 겁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이 세상과 완전히 구별된다는 겁니다. 보통 이 세상은 존재 근거가 외부에 있습니다. 저도 외부에 의해서 존재하거든요. 조금 더 올라가면 저는 저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있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겁니다. 지금도 유기적으로 이 세상에서 뭔가를 공급받아야 살 수 있어요. 제가 물을 마셔야 살 수 있는 것처럼 제 존재 근거는 외부에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존재 근거가 내부에 있는 겁니다.

이런 존재를 여러분은 알 수 있어요?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 그건 정신착란입니다. 과대망상이에요. 자주 이야기했지만,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또 하나님을 본 사람은 죽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와 생명의 차원을 전혀 달리하기 때문이죠. 우리의 존재근거가 외부에 있기 때문에 종이 한 장으로 얼굴만 가려도 앞을 보지 못하는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겠어요? 종이 한 장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은 창조와 종말 전체를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거든요. 우리는 종말을 모르잖아요? 창조도 모르잖아요? 처음 우주가 시작한 130억 년 전, 아니 우주의 시작 전까지 포함한다면 너무나도 까마득한 이야기인데, 그런 걸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또 미래에 대해서는 더 하나도 말할 것이 없는 상태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의 인식으로는 담아낼 수 없는 분이니까 그분 앞에서 입 좀 다물라고 성서가 말하는 겁니다. 너희는 자꾸 하나님을 규정하거나 재단하려고 하지 말고 그분이 말할 때 귀를 기울이라고 말이죠. 그걸 우리는 계시라고 합니다. 제가 너무 거시적이고 막연한 세계를 말한 것 같지만 이런 것들은 늘 우리의 신앙생활과 깊이 연관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거기까지 가지 않고 현재만 본다고 하더라도, 온갖 시간의 창조와 종말까지의 무한한 세계, 말로 다 해명할 수 없는 세계 시간이 지금 여기에 깊이로 와 있습니다.

성서 기자들은 그러한 하나님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하나님을 도구적으로 사용하죠. 기복주의에 근거해서 성공 신화의 주인공이 되려고 하거나, 아니면 무섭게 우리에게 벌을 주는 분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은 모두 우리의 종교적 욕망, 혹은 종교적 망상이 빚어낸 하나님의 자기 투사(投射)라고 할 수 있어요. 이런 것과는 조금 다르게 고상한 어떤 것이라 하더라도, 그 안에 하나님을 담아둘 수 없는 일종의 율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말한 대로라면, 지금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말할 것이 뭐가 있는가, 소위 불가지론에 빠지는 게 아닌가 하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텐데요. 옳은 지적입니다.

 

하나님 인식에 대해

여기에 경계선이 있습니다. 하나님 인식의 불가능성과 가능성 사이에 놓인 영적인 오솔길과 같은 경계선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인식으로 따라 잡을 수 없습니다. 이건 분명합니다. 이건 바르트가 말한 것이기도 한데요. 설교자의 실존적 자리를 바르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 수 없다. 그러나 말해야만 하는 당위라고 말입니다. 말을 해야 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는 상황이라는 거지요. 바르트의 그런 말이 오솔길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우리가 40일 금식 기도를 수십 번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하거든요.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는 거죠. 어떻게 가능할까요? 여기에는 많은 문제들이 연관되어 있는데요. 아까 계시라고 했습니다. 기독교 신학과 신앙 안에는 하나님이 기본적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전제가 들어 있어요. 그럼 어떻게 계시하는가, 그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다른 것은 다 접어두더라도, 우리는 기본적으로 우리보다 신앙적으로 성숙했던 신앙 선배들의 경험을 기초로 해서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공부해야 합니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금 말을 걸 때 그것을 알아듣고 성숙하게 응답할 수 있습니다.

제가 앞에서 바람 이야기를 했는데요. 제 딸들이 어렸을 때는 제가 아무리 알아듣게 이야기를 해도 못 알아들었을 거예요. 그러나 나중에는 알아들을 겁니다. 그리고 제가 더 세상의 깊이를 알게 된다면 딸이 거기까지도 따라오게 되겠죠. 그 딸들이 저와는 좀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경험하는 방식이 있을 테니까, 제가 없다고 해도 저보다 더 성숙하게 이 세계를 경험할 수도 있을 겁니다. 음악을 공부하든 바둑을 공부하든 다 그래요. 하나님 경험이나 하나님 공부도 이런 단계가 있는 게 아닐까요? 그게 작은 오솔길이죠. 우리는 자칫하면 광신도가 되거나 교주가 될 수 있어요. 내가 어젯밤에 뭘 들었다는 식으로 말이죠.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십중팔구 사이비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좋은 뜻으로 그랬다고 해도 사이비일 가능성이 있어요. 굉장히 마음도 순수하고 인격적이긴 한데, 신학적인 훈련이 없다면 다른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게 인간이거든요. 여러분, 그거 인정하죠? 아무리 괜찮게 훈련된 사람이라고 해도 일종의 주관적 열광주의에 빠질 수 있어요.

또 자칫하면 냉소주의자나 불가지론자처럼 될 수도 있습니다. 확인할 수 없는 거니까 말하지 말라는 식으로요. 하나님은 종말에나 가야 알 수 있는 건데 뭐 하러 지금 이야기 하냐고, 아는 것만 말하라고, 실증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만 이야기하라고 합니다. 이것도 웃기는 거죠. 그러면 시인이 될 필요가 없습니다. 시인이 말하는 게 실증은 아니잖아요? 그러나 시인이 말하는 것은 분명히 리얼(real)한 것입니다. 이 균형을 우리가 어떻게 잡느냐, 이게 핵심이에요.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근본적으로 우리에게 제한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피조물이고 질그릇이죠. 한편으로 우리는 주인의 뜻을 죽었다 깨어나도 잘 모른다는 것을 전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계시에 근거해서, 또 우리의 신앙 선배들이 경험한 하나님에 대한 문서들에 근거해서, 그리고 오늘도 하나님은 영이라는 삼위일체의 한 위격으로 우리와 새로운 방식으로 대화하기 원한다는 점에 근거해서 우리가 영적인 촉수를 놓치지 않기만 한다면,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어느 정도로 알아듣는가 하는 것은 다른 문제예요. 알아들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 제가 여러분에게 하는 말들이 제가 뭘 좀 알고 하는 말 같아요? 아니면 전혀 엉뚱한 말을 하는 것 같아요? 여러분 각자가 판단하길 바랍니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말이 있지만, 저는 기본적으로 사람에 대해서 크게 기대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저 자신을 향한 것이기도 해요. 인식론적 한계가 너무 뚜렷할 뿐 아니라, 심리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우리에게는 많은 상처들이 있기 때문에, 사실 생명의 영과 온전히 소통하기가 좀 어렵습니다. 은총이 아니면 불가능해요. 우리의 모든 상처를 다 딛고서 생명의 영이신 성령과 소통, 교제, 귀 기울임이 가능하려면, 이 모든 상처들, 이것을 기독교 용어로 말하면 죄인데, 그러한 죄의 결과들이 다 씻겨야 하거든요. 그러나 그것은 죽을 때까지 다 씻기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걸 다 안고 가야합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우리에게는 가능성이 없어요. 우리에게서 선한 게 나올 수가 없습니다. 말하는 순간순간에도 계산을 하는 게 우리잖아요? 완전하고 순수한 언어들이 얼마나 되겠어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의 능력보다는 어디에 기대 있어야 하는 겁니다.

다행히도 우리에게는 기댈 언덕이 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인데요.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성서와 2천 년 동안의 해석이 있거든요. 해석이 신학입니다. 저는 그 안으로 들어가는 길이 최선이자 첩경이라고 확신하고 있어요. 그런데 한국교회는 신학 무용론에 빠져 있어요. 꿩 잡는 게 매라는 식이죠. 신학적 영성에 기댄다는 것은 우리의 상처들을 그대로 인정한다는 겁니다. 말하자면 그 상처들을 그대로 안은 채 옷을 갈아입는 거예요. 그 상처들이 더 이상 활동하지 않도록 묶어두는 거죠. 암에 걸렸을 때 약을 먹으면 암세포가 좀 줄어드는 거지, 다 없어지는 게 아니거든요. 죽을 때까지 죄의 경향성을 안고 살아갈 각오를 하세요. 그게 다 씻긴다고 하는 사람은 가짜입니다. 구원파에 가까운 사람들이에요. 그것은 구원을 실증적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들, 하나님을 실증적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들,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려고 하는 사람들과 똑같아요. 우리는 인간의 본질적인 상처들을 안고 있으면서, 다른 것들이 우리에게 들어와 더 크게 활동하도록 해야 합니다. 음악가들은 음악의 힘이 자기를 지배하게 합니다. 그러면 음악이 온전하게 활동하게 됩니다. 우리는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바로 신학적 사유, 신학적 인식이 그것입니다. 개인의 경건성이 중요하지 않느냐고요? 경건 훈련,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그걸 다 포함하고 있어요.

신학적인 인식은 신앙적 인식이라는 말과 똑같습니다. 인식에 대해서 생각해보세요. 우선 존재와 인식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볼까요?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저도 정확하게 설명할 자신이 없습니다. 존재와 인식에서 존재가 우선이냐, 인식이 우선이냐에 따라 조금 달라지는데요. 물론 서로 소통되는 거겠죠.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존재론적이니까 존재가 먼저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로 말하자면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나무가 좋아야 하는 거예요. 인식은 존재가 드러나는 방식입니다. 존재는 드러나지 않아요. 그걸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요? 존재는 어떤 범주 안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바람처럼 자유로운 겁니다. 궁극적인 실체이기 때문이죠. 하나님이기 때문이죠. 존재는 인식의 문제, 행위의 문제를 통해서 드러나게 되는데요. 그 존재를 어떻게 인식하는가, 이게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계시할 때 인식이 가능해요. 따라서 존재는 계시의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계시 자체인 거죠. 존재는 인식으로 드러나고 인식은 존재에 뿌리를 둡니다. 존재론적인 토대가 없으면 우리는 사이비로 흐를 수 있습니다. 신천지가 얼마든지 가능해요. 그들의 신앙도 일종의 인식이거든요. 문선명의 통일교도 가능하죠. 그 방식으로 인식하는 거예요. 모든 훈련들이 신앙적 인식론, 신학적 사유에서 비롯되는 게 아닐까 해서, 그렇게 말한 겁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46 기독교가 뭐꼬 제44강 길 위의 영성 [4] [38] 2012-07-06 7919
45 기독교가 뭐꼬 제43강 한국교회의 미래 [1] 2012-07-06 5082
44 기독교가 뭐꼬 제42강 근본주의란 무엇인가 2012-06-19 5774
43 기독교가 뭐꼬 제41강 기독교와 한민족 [1] 2012-06-19 4800
42 기독교가 뭐꼬 제40강 기독교 윤리는 가능한가 [2] 2012-06-19 4301
41 기독교가 뭐꼬 제39강 기독교 윤리의 실제 [2] 2012-06-18 4861
40 기독교가 뭐꼬 제38강 하나님 나라 윤리 [2] 2012-06-18 4458
39 기독교가 뭐꼬 제37강 기독교 윤리란 무엇인가 2012-06-18 6954
38 기독교가 뭐꼬 제36강 하나님과 인간 [2] 2012-06-16 5321
37 기독교가 뭐꼬 제35강 인간에 대한 물음(2) 2012-06-16 4719
36 기독교가 뭐꼬 제34강 인간에 대한 물음(1) 2012-06-16 4605
35 기독교가 뭐꼬 제33강 성령에 대해 2012-06-14 4244
34 기독교가 뭐꼬 제32강 삼위일체 하나님 2012-06-14 4637
» 기독교가 뭐꼬 제31강 하나님에 대한 물음 2012-06-14 3546
32 기독교가 뭐꼬 제30강 교회는 예배 공동체다 2012-06-07 3802
31 기독교가 뭐꼬 제29강 기독교 신앙과 생명 경험 2012-06-07 4278
30 기독교가 뭐꼬 제28강 헌금에 대해 2012-06-07 4713
29 기독교가 뭐꼬 제27강 기도에 대해 2012-06-07 3831
28 기독교가 뭐꼬 제26강 교회란 무엇인가 2012-06-07 6055
27 기독교가 뭐꼬 제25강 복음주의란 무엇인가 2012-05-31 5487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