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지평융해의 해석학
-게오르크 가다머를 중심으로-

가다머(Hans-Georg Gadamer, 1900-2001)의 해석학을 가장 특징적으로 일컬을 수 있는 개념은 영향사(Wirkungsgeschichte)와 연결된 “지평융해”(Horizontverschmelzung) 개념이다. 영향사는 작용, 또는 활동이라는 독일어 Wirkung과 역사라는 독일어 Geschichte의 합성어인데, 과거의 텍스트와 오늘의 독자 사이에 이해가 발생하는 그 과정이 단지 기술적인 방식으로 진행되는 게 아니라 상호적으로, 또는 변증법적으로 진행된다는 뜻이다. 과거의 텍스트는 현재의 해석자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 뿐만 아니라 현재의 해석자에 의해서 영향을 받기도 한다. 즉 텍스트가 해석자에 의해서 본래의 사태를 잘 드러낼 수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어떤 사건은 그 당시에 완료되는 게 아니라 늘 미래를 향해서 열려져 있기 때문에 이런 영향사를 고려해야만 참된 이해가 발생하게 된다. 지평융해는 독일어 Horizont(지평)과 Verschmelzung(융해)의 합성어다. 지평은 어떤 사상(事象)이 활동하는 일정한 방향성을 가리킨다. 가다머의 경우에 텍스트의 고유한 지평과 해석자의 고유한 지평이 영향사적으로 결합됨으로써 새로운 지평이 창출된다. 그에게는 이것이 곧 해석학의 과업이다.
위에서 간단히 설명한 지평융해라는 용어에는 가다머가 쉴라이에르마허와 딜타이, 또는 베티와 허쉬 전통과는 달리 하이데거의 전통에서 해석학 문제를 존재론적으로 접근해나가는 그 특성이 담겨 있다. 즉 방법론으로서의 해석학이 아니라 이해 자체에 대한 철학적 해명이라는 점에서 해석학의 자리를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의 주저가 “진리와 방법. 철학적 해석학의 기초”(Wahrheit und Methode. Grundzüge einer philosophischen Hermeneutik, 1960)라는 사실은 바로 그의 해석학적 성격을 잘 드러내 준다. 즉 해석학은 방법이 아니라 진리 해명이라는 것이다. 이 책이 세상에 나오게 됨으로써 해석학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되었다. 하이데거의 언어 존재론적인 해석학이 이제 미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을 훨씬 함축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그 기초를 탄탄하게 다졌다. 인간의 방법론이 중요하게 아니라 예술과 문헌이 자신의 진리를 드러내는 그 진리론적 성격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팔머는 이 문제를 이렇게 요약한다.

이해란 객관(혹은 대상)보다 우위에 서서 그와 대립하는 인간의 주관적 과정이 아니라 인간 자체의 존재 방식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해석학은 이제 정신과학을 위한 일반적인 보조 분야로 규정되어서는 안되며 인간의 유일무이한 존재론적 과정으로서 이해를 설명하는 철학적 노력이라고 정의되어야 한다. 이러한 재해석의 결과는 기존의 해석학과는 전혀 다른 해석학 이론, 즉 가다머의 철학적 해석학으로 나타났다. (240).

가다머는 정신과학의 이해 방법론을 해석학으로 제시하는 딜타이와는 달리 모든 학문에서 도대체 ‘이해’가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한 존재론적인 질문을 제기한다는 점에서 하이데거의 해석학적 요청과 맥을 같이 한다. 그는 이미 <WM>에서 하이데거의 이해에 대한 설명을 자신이 받아들인다고 분명히 했다. 즉 이해가 인간의 주관적 태도가 아니라 ‘현존재’ 자체의 존재방식이라는 점에서 말이다. 그는 이렇게 진술한다.

나는 인간적 실존에 대한 하이데거의 시간적 분석이야말로 이해가 인간적 주관이 갖는 여러 태도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 ‘현존재’(Dasein) 자체의 존재방식이라는 것을 설득력 있게 입증했다고 믿는다. 내가 여기 <진리와 방법>에서 사용하는 ‘해석학’이란 용어도 이런 의미를 갖는다. 이해란 현존재의 유한성과 역사성으로 이루어진 인간적 실존의 근본적 운동을 직시하는 말이다. 따라서 그것은 ... 세계에 대한 경험 전체를 포괄한다. 이해의 운동은 포괄적이면서 보편적이다. (WM, 2판 서문, 팔머, 241에서 재인용).

이런 그의 입장은 근대의 주관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는 기술론적 사유에 대한 비판인데, 이제 그의 해석학적 특징을 조금 더 자세하게 몇 대목으로 구분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이 내용은 주로 팔머의 “해석학이란 무엇인가”를 부분적으로 요약하거나 또는 풀어낸 것이다.


미의식에 대한 비판

가다머는 주관주의적 예술 경험은 정당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이 주관주의라는 것이 데카르트 이래로 이 세상을 자기와 대상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태도이기 때문에 예술과 언어의 존재론적 근거에서 볼 때 이것은 인간의 착각일 수 있다. 소위 주-객 도식(Subjekt-Objekt Schema)으로 인간이 세계를 재단한다는 것은 인간이 그 세계 안에 던져진 존재이며 인간의 사유 자체가 바로 존재의 생기라는 점에서 늘 한정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현실에 대한 우리의 경험은 주관적으로 나타나는 것처럼 보인다. 내가 생각하고 내가 외로워하고 내가 기뻐한다. 문제는 그런 주관주의적인 경험이라는 것이 어떤 위대한 예술작품에 대한 바른 경험이 될 수 없다는 데에 있다. 자기의 주관적 경험보다는 오히려 예술 작품 자체가 자기를 드러내는 것을 인식해나가야 한다. 그 예술 작품은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그런 방식으로 인간에게 자신을 보인다. 따라서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대한 어떤 천재적인 평론가가 완벽하게 평론을 내렸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담고 있는 예술 경험의 세계가 완전히 드러난 것은 아니다. 또 다른 계기에, 어떤 다른 사람에게 훨씬 심원한 차원에서 작품의 모습이 드러나게 된다. 즉 주관적인 미적 체험보다는 작품으로 하여금 스스로 드러나게 하는 태도가 우리에게 훨씬 중요하다는 말이다.
주관적 미(美)의식 및 미체험과 존재론적 미체험의 차이를 구분한다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다. 현대 미술품이나 시는 감상자가 아무런 전이해 없이 자기에게 느껴지는 대로 느끼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가르치고 있는데, 이런 태가 바로 주관적인 것인지, 아니면 가다머가 말하려는 예술품의 존재론적 미 체험인지 여러 각도에서 분석해야 한다. 다른 부분도 그렇지만 여기서도 한 감상자의 태도가 아주 추상적인 주관주의에 떨어질 수도 있으며 반면에 작품의 존재론적 차원에 돌입할 수도 있는데, 이 차이가 누구에게나 확인될 수 있을 정도로 확연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흡사 인생을 살아가면서 단지 자기 욕망을 성취하는 것에 치우치는 사람과 삶 자체의 존재론적 깊이에 들어가는 사람 사이의 차이가 눈에 뜨이지 않을 수 있는 경우가 같다. 어쨌든지 가다머는 원칙적인 차원에서 작품의 존재론적 세계에 돌입해야만 참된 감사, 또는 이해가 발생한다는 점을 피력하고 있다.  
가다머에 의하면 참된 예술 경험은 하나의 세계*를 열어준다. 하나의 작품을 대상으로 보지 않고 세계로 간주하면, 즉 우리가 작품을 통하여 세계를 보게 되면 우리는 예술이 감각지각이 아니라 인식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예컨대 우리가 휠더린의 시를 읽거나 보티첼리의 그림을 감상할 경우에 그저 우리의 감각적 쾌락이 주관적 경험에 머무는 게 아니라 그것을 통하여 새로운 세계를 접하게 되는 것과 같다. 위대한 예술작품은 늘 그런 세계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볼 수 있는 눈만 준비되어 있으면 그런 일이 가능한 것이다. 결국 예술 경험이란 예술 작품 자체가 말하고 있는 새로운 세계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에 미적 경험과 비(非)미적 경험을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미와 비미라는 인간의 구분이 작품의 참된 세계를 폐쇄시키는 인간의 주관적 성격에 의한 결과일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 문제에서도 역시 주-객 도식의 이분법적 사유방식을 극복해야 한다는 점이 핵심적으로 작용하는 요소이다.

* 가다머가 설명하는 이러한 세계는 성서를 읽은 사람들이 성서에서 발견할 수 있는 그런 세계와 똑같다. 이 양자에서 세계는 늘 새롭게 자기를 드러내는 존재론적 능력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성서를 도구적으로 이용하거나 아니면 감상적 차원에서 위로 받기 위한 대상물로 삼으면 성서 읽기를 바르게 하지 못하는 것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많은 사람들이 성서를 읽고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이 대개 그 사람의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판단과 경험과 반응에 불과하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다. 성서는 성서만의 고유한 세계를 그 안에 담고 있기 때문에 그 세계가 온전히 드러날 수 있도록 우리의 주관적 태도를 제거하는 것이야말로 성서를 읽는 바른 자세라 할 수 있다.

놀이와 예술작품의 존재방식

가다머는 위에서 언급한 예술작품의 존재 방식을 놀이(Spiel, game) 현상으로 설명하고 있다. 가다머가 말하는 놀이는 인간 주체가 쾌락을 얻으려고 거기에 참여하는 일종의 유희가 아니며, 또한 놀이에 참여할 수 있는 인간 주체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놀이는 예술작품 자체의 존재방식이다. 놀이에 참여하는 개인들의 주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놀이 자체가 그들을 끌어가는 것이 중요한 것처럼 예술작품도 역시 작가나 감상자의 주체가 아니라 작품 자체가 이들을 끌어가고 있다는 점이 핵심이다. 그에 의하면 놀이는 놀이자의 의식과는 독립되어 있는 그 자체의 역동성과 목표를 갖고 있다. 놀이는 주관과 대비되는 의미에서의 객관이 아니다. 왜냐하면 놀이는 우리가 그 속에 참여하는 존재의 자기 규정적인 운동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테니스 게임을 하는 이들이 있다고 하자. 이들은 물론 자기들이 운동을 하고 싶다고 주관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이 놀이에 참여했지만, 일단 테니스 게임이 시작되면 테니스 자체가 선수들을 이끌어간다. 선수들은 놀이를 자신의 능력 너머에 있는 현실로서 경험하기 때문에 선수들의 주관적 판단에 따라서 게임의 방식을 바꾸게 되면 일단 그 게임은 역동성을 잃게 된다.

우리는 하나의 놀이가 그것의 존재 의미를 놀이자들의 의식이나 행위에서 갖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의식이나 행위를 놀이의 영역으로 끌어 들여 놀이 자체의 정신을 부여한다는 것을 보았다. 놀이자는 놀이를 자신의 능력 너머에 있는 현실로서 경험한다. 이것은 이러한 현실이 ‘의도적으로 구성된’ 현실일지라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리고 이것은 놀이되는 것이 ‘보는 사람에게 현전으로 나타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WM, 104, 팔머, 254에서 재인용).

이러한 놀이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술작품은 단순한 즐거움을 위한 대상이 아니라 형상이 부여된 사건으로서의 존재 진리의 ‘현전’(現前, Vorhandensein)이다. “시는 미학적 의식의 척도에 의해서 그 본질적 진리가 파악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시는 모든 문학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내용적 의미를 전달해 줌으로써 그 진리를 드러낸다.”(WM, 155). 따라서 형식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내용이 중요하다. 놀이의 규칙이 문제가 아니라 그런 규칙을 통해서 놀이하는 이들을 뛰어넘는 놀이의 힘*을 경험할 수 있듯이 시라는 형식을 통해서 만나게 되는 예술작품의 진리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예술작품에 존재론적으로 담지 되어 있는 그 능력을 성서 해석과 연결시켜서 설명한다면 성령의 힘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하나님의 세계가 언어로 형상화할 때 작용했던 그 성령의 힘이 스스로 진리를 존재론적으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성서를 읽는 사람들은 철저하게 그 힘에 의존해야만 한다. 어떤 점에서 명확한 것은 아니지만 이런 주장은 칼빈이 해석학적 토대인 ‘성령의 조명’과 같은 차원으로 생각해도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이 양자가 모두 기본적으로 성서의 세계가 배타적 교권이나 도그마, 또는 학문적인 역사 비평에 기계적으로 묶여 있지 않다는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거듭 강조되듯이 예술 경험에서의 주체는 사람의 주관성이 아니라 작품 자체라는 주장은 곧 예술 작품의 역사성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이미 완료된 작품을 사람이 자신의 주관적 판단에 따라서 이렇게 저렇게 감상하고 해설하는 것은 자신의 주관성에 의한 즐거움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진정한 해석이 될 수 없다. 예술작품은 그것이 조성된 그 시대에 완성된 게 아니라 그 뒤에도 계속적으로 해석되고 의미가 보충됨으로써 만들어져 가는 중이다. 물론 미켈란젤로의 미완성 ‘피에타’를 그의 제자가 다시 손질한다거나, 그리스 시대의 조각상에 다시 조각칼을 댄다는 말도 아니다. 그 작품의 외양은 그대로 남아 있겠지만 그것이 담아내고 있는 세계는 미켈란젤로나 그리스 시대의 조각가가 경험한 그것으로만 끝나는 게 아니다. 그 작품을 경험한 오늘의 해석자는 원래의 작품이 의도하고 있던 세계보다 훨씬 심원한 지평을 열어줄 수 있으며, 그런 과정에서 작품은 여전히 만들어지는 것이다. 또는 그 작품이 자기 존재를 드러내고 있는 중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문제를 좀더 명확히 이해하려면 가다머가 말하는 역사 문제를 해명해야만 한다.

역사이해 비판

가다머는 이 부분에서 하이데거의 입장을 거의 그대로 받아들인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우리는 주어진 텍스트나 문제를 시간적으로 현재의 상황에 의해 채워져 있는 공허한 의식으로 이해하지 않고, 오히려 상황에 대한 잠정적인 견해, 즉 이미 고정되어 있는 지각방식과 일정하게 관념화되어 있는 ‘선(先)이해’를 기초로 해서 이해한다. 이 말은 곧 어떤 과거의 역사를 현재와 전혀 무관하게 보거나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이다. 역사는 항상 현재의 의식을 통해서만 보이고 이해된다. 아마 이 부분은 불트만의 “전제 없는 이해는 불가능하다”는 주장과 같은 맥락에서 언급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만이 아니라 과거가 현재에 미치고 있는 영향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즉 현재는 오직 과거로부터 전승된 의식이나 지각방식, 또는 선이해를 통해서만 이해된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가 분리된 상태다. 과거의 사건을 오늘 우리의 주관적 잣대로 판단하고 해석하면 그 의미가 드러난다는 말이다. 그러나 가다머는 이미 오늘의 이러한 해석 행위가 과거로부터 이어져오는 이해의 흐름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전통이란 우리와 독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바로 그 안에 속해 있으면서 동시에 그것을 통해 존재하는 바로 그런 것이다. 대체로 전통은 너무나 투명한 매개체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제대로 볼 수 없다. 이것은 물고기가 물을 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다.”(팔머, 258, 259).
그런데 해석학에서 역사 문제를 매우 중요하게 다루었던 딜타이의 경우에 역사는 개인의 체험과 완전히 무관하게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그 자신이 바로 역사적인 존재라는 것을 자각하는 데서 이해된다. 즉 역사에 대한 이해는 한 개인이 다른 사람과 공통의 ‘삶’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서 가능하다. 따라서 삶에 대한 일정한 이해가 주어져 있을 경우에만 위대한 예술과 문학에 나타난 삶의 표현을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딜타이에게 역사적 의식은 바로 자기 인식의 한 방법이었다.  
우리가 앞에서 딜타이를 다루면서 언급했던 것처럼 그는 자연과학적 방법과 정신과학의 방법을 구분함으로써 정신과학의 해석학적 방법을 독립시키려고 했는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역사적 연구에서 객관적 인식을 획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즉 삶의 표현들은 ‘삶이 대상화한 산물들’이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이 가능하다고 말이다. 가다머는 바로 이런 딜타이의 입장을 비판하기를, 딜타이가 자기 스스로 비판했던 역사학파의 객관적 시각에 사로잡혔다는 것이다. 가다머에 따르면 역사를 초월해서 역사를 직관해야만 가능한 객관적 인식은 인간에 근본적으로 불가능한데도 불구하고 딜타이는 무의식중에 과학으로부터 귀납적 방법을 빌려서 역사학의 객관적 타당성을 확보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이다.

역사적 경험은 절차가 아니며 따라서 방법의 자율성을 가질 수 없다. ... 역사적 경험은 완전히 다른 종류의 객관성을 가지며 또한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획득된다.(WM, 228, 팔머, 261 재인용).

결국 가다머가 비판하고 있는 근대의 역사학은 방법론적 접근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역사적 인식을 추구한 것이다. 딜타이가 말하듯이 우리가 공동의 삶을 이해하고 있을 때 문학작품에서 인간의 삶을 발견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곧 역사를 객관적으로 해명한다고 볼 수는 없다. 즉 역사는 우리의 객관적인 학문이나 주관적인 실존경험에 의한 것일 수 없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역사가 인간의 주관에 속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주관이 세계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는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우리의 주관적 경험을 뛰어넘으며, 따라서 객관적인 세계를 우리가 구성할 수 없다.  
따라서 역사를 생각할 때 과거는 현재와 미래 속에 있는 우리와 절대적으로 분리된 과거의 대상이 될 수 없다. 현재와 아무 상관이 없는 과거 그 자체를 보아야 한다는 생각은 이해 자체의 본성과 반대되는 환상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이해는 항상 우리의 현재 및 과거와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세계를 항상 과거, 현재, 미래라고 보는 데 있어서 이해 자체의 본질적인 시간성은 소위 말해서 이해의 역사성이다.”(팔머, 264). 이런 관점은 판넨베르크가 말하는 보편사 개념과 맥을 같이 한다. 전체 역사를 하나로 보는 관점, 또는 종말론적 지평에서 역사를 해석하는 관점이 곧 과거, 현재, 미래를 유기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성서를 바르게 읽고 해석하기 위해서는 ‘이해의 역사성’을 반드시 고려해야만 한다. 구약성서의 율법과 사건을 독립된 것으로, 또는 독단적으로 수호하거나 또는 역사비평을 통해서 그 의미만을 건져내는 일은 이해의 역사성을 외면하는 태도이다. 성서의 세계가 과거에 단절되어 있거나 현재 안에만 해소되는 게 아니라 전체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면 성서는 끊임없이 과거와 현재와, 더 나아가서 미래의 지평에서 소통의 관계를 맺는 것이기 때문에 성서 해석자는 성서의 이러한 역사성을 늘 해석의 토대로 삼아야만 할 것이다. 이러한 성서의 역사성이 구체적으로 무슨 의미일까? 복음서에 ‘오병이어’ 사건이 있다. 오병이어 사건을 보도하고 있는 복음서 기자들의 의도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발생하는 사건들이 그들의 일상을 뛰어넘는 세계라는 점을 밝힘으로써 그의 메시아성을 밝혀내려는 것이었다. 이 메시아성을 밝히기 위해서 현재 우리의 눈으로는 신화적 요소라 할 수 있는 오병이어 사건이 도입된 것이다. 그 사건은 그 당시의 그런 보도로서 완결된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시각에서 새롭게 해석되어야만 한다. 그것이 과연 실제로 발생한 사건인지 아니면 다른 것을 전하기 위한 하나의 문학적 방식이었는지는 서로 다르게 판단할 수 있긴 하지만 전혀 새로운 세계관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 삶의 지평에서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그 해석학적 논의는 충분히 전개되어야만 하며, 더 나아가 이것이 미래의 지평과 연결되는 그 관점도 역시 놓치지 말아야 한다.    

본래적인 역사의식

위에서 설명한 대로 가다머는 과거와 현재가 단절된 상태에서 접근되고 있는 역사연구가 역사의 본질을 왜곡시킨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어떤 역사적 작품을 해석하기 위해서 필요한 본래적인 역사의식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영향사 의식’(ein wirkungsgeschichtliche Bewußtsein)이다. 이는 곧 “역사가 항상 그 위에서 작용하게 되는 의식”, 또는 “역사적으로 작용하는 의식”이다. 가다머는 이런 영향사적 의식의 본성을 해명하기 위해서 세 가지 ‘나-너 관계’를 유형론적으로 제시하는데, 여기서 ‘나’는 역사 작품을 읽는 사람이고 ‘너’는 그 작품을 의미한다. 가장 비본질적인 역사의식의 단계로부터 차례대로 가장 본질적인 역사의식으로 발전되는 과정을 그의 설명에서 확인할 수 있다.

1) 한 영역 내에서 대상으로서의 너
‘너’와 너를 이해하는 것 사이의 관계가 일종의 방법론으로 떨어질 때 너는 나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 될 뿐이지 현재의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게 된다. 타자는 나의 경험 영역에 있는 하나의 대상이 될 뿐인데, 모든 귀납적 사고의 목적론이 바로 너에 대한 이런 접근법에 내재되어 있다고 한다. 이런 유형에서 전통은 우리와 분리된 하나의 대상이 되면 우리와 무관한 사물이 되고 만다. 자연과학이 가장 전형적으로 이런 역사의식에 함몰되어 있다고 볼 수 있는데, 가다머에 따르면 이런 생각은 방법론으로 해석학적 문제가 해결될 수 있으리라고 예상한다는 점에서 방법론에 대한 매우 나이브한 신앙에 불과하다. 예컨대 다윈의 <종의 기원>을 읽고 해석하는 오늘의 과학자가 그 책에서 ‘진화론’을 배우고 그것을 자신의 연구에 이용하는 방식이다. 이 사람에게 진화론은 자기의 연구목적을 위해서 이용되는 것뿐이지 진화론을 지배하고 있는 훨씬 본질적인 역사의 힘은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
이런 차원을 성서신학과 연결해서 설명한다면 바로 위에서도 한번 언급한 적이 있는 ‘역사비평 일원론’이라고 할 수 있다. 성서의 객관적 사실의 엄밀성만 밝혀내고 그것을 종교사학적으로 객관화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역사관이 바로 그것인데, 이런 방식은 성서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가 그 성서 자체를 뛰어넘는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2) 반성적 투사로서의 너
첫 번째 유형이 타자를 사물로 보는 것이라면 여기서는 인격적으로 보는 것이다. 첫 번째 유형이 주로 자연과학의 방법론이라고 한다면, 이 유형은 주로 앞에서 가다머가 비판한 근대 역사주의 방법론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는 역사를 관찰하는 사람의 주관적 영향력이 절대적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여전히 역사의 한계 안에 머물러 있는 사람을 초월하는 역사를 파악할 수 없다. 즉 역사를 대상화, 또는 객관화함으로써 결국은 역사의 진정한 유의미성을 파괴한다는 것이다. 가다머는 이렇게 진술한다.

이러한 나-너 관계는 직접적인 관계가 아니라 반성적 관계이다. ... 따라서 이 관계 속에 있는 인격체들은 각각 상대방의 반성적 활동을 무시할 가능성이 남아 있다. 각각의 인격체는 그 자신의 반성을 통해서 타자의 요구를 알게 되며, 그 결과 그는 타자 자신보다도 더욱 잘 타자를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비로 이러한 반성적 성격은 자신의 주장에 놓여 있는 직접성의 관계를 결여하게 된다. (WM, 341, 팔머, 281에서 재인용).

3) 전승(Überlieferung) 발화자로서의 너
세 번째 유형은 본래적인 개방성을 그 특징으로 하는데, 이는 나로부터 의미를 투사하는 게 아니라 “어떤 것이 저절로 말해지도록 하는” 진정한 개방성을 갖는 관계이다. 이 관계는 바로 지배하는 게 아니라 들으려는 개방성이 할 수 있는 마틴 부버의 나-너 관계와 비슷하다. 따라서 기꺼이 타자에 의해서 자신이 변형되는 것도 감수하는데, 이것이 곧 ‘영향사적 의식’의 기반이다. “영향사 안에서 놓임으로써 인식의 자유가 제한 받는 게 아니라 그것이 가능해진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WM, 343). 이것은 곧 전승을 향한 개방성을 의미한다. 전승의식을 통해서 ‘너’ 경험이 참되게 발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영향사적 의식은 현재를 진리의 정점으로 보지 않는다. 작품의 진리가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을 그대로 수용하기 위해서 스스로를 개방시킨다. 어떤 정보에 의해서 방법론적인 자기 확신에 빠지는 게 아니라 개방된 경험을 중시하는 삶의 태도가 그것이다. 전통의 과거에 대해서 개방적이고 미래의 가능성에 대해서 개방적이다. “경험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단순히 객관화한 지식을 갖게 되기보다는 오히려 그를 성숙시키고 그로 하여금 전승과 과거에 대해 개방적인 수 있도록 해주는 객관화할 수 없는 경험을 갖는다.”(팔머, 282).
성서 해석에서 이런 세 번째 유형을 고려한다는 의미는 성서의 객관적 사실을 파악하는 데 머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주관적 해석에 머물지도 않고, 오히려 성서가 속해 있는 전승사에 개방적인 태도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은 기독교의 종말론적 해석과 맥을 같이 한다. 과거의 오늘의 사건은 바울이 진술하듯이 ‘마지막’에 이르러야 얼굴을 맞대고 보듯이 확연히 드러난다면 오늘 성서 해석자가 자신의 주장과 경험을 최소화하고 종말론적인 역사의 힘에 의존시켜야 한다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지금까지의 논의는 주로 가다머가 근대의 미의식과 역사의식에 가한 비판이었다. 근대의 미의식이 인간의 주관주의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예술작품의 존재론적 성격이 파묻혀 버렸다는 것이며, 또한 근대의 역사의식에서는 역사가 단순히 인간의 주관에 대립해 있는 그 어떤 대상에 불과하기 때문에 역사의 영향사적 지평이 훼손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결국 미의식에 대한 비판이었든지 역사의식에 대한 비판이었든지 핵심은 인간의 주관주의적 세계 이해를 극복하자는 것이다. 텍스트와 작품 자체가 드러내고 있는 어떤 세계를 들여다보고 그것이 활성화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우리의 일이지 우리의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경험을 그런 작품의 이름으로 드러내는 것은 참된 예술 경험이 될 수 없다. 이제 그의 이런 비판을 바탕에 두고 그의 해석학적 구조가 어떻게 전개되어 나가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해석학적 경험의 구조

가다머에 따르면 기존의 경험 구조는 지나치게 과학적 지식에 편중되었기 때문에 검증 가능한 것들만 확실한 경험이라고 여기게 된다. 과학의 목표는 “어떠한 역사적 계기나 요소도 부착되지 않을 정도로 경험을 객관화하는 것”이다.(WM, 329). 이런 방식의 경험 구조는 학문에서 경험의 역사성이 자리를 확보할 수 없게 만듦으로써 결국 근대과학은 방법론에 머물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신학의 ‘역사비평’도 역시 이러한 함정에 빠질 수 있다.  
이에 반해 가다머는 역사적이며 변증법적인 경험 개념을 주장한다. 여기서의 인식은 단순히 지각들의 흐름이 아니라 생기, 사건, 더 나아가서 일종의 만남이다. 가다머가 인용하고 있듯이 헤겔에 의하면 경험은 의식과 대상과의 만남에 의한 산물이다. “의식에 대한 앎과 의식의 대상에서 이루어지는 변증법적 운동은 이로부터 새로운 진정한 대상이 발생하는 한에서 본래적인 의미에서 ‘경험’이라고 불릴 수 있다.”(WM, 336). 그러나 헤겔이 말하는 이 경험은 의식의 자기 대상화이기 때문에 그것으로는 그것을 초월해 있는 차원을 포착할 수 없다. 이와 달리 가다머의 주장에 따르면 경험은 “인식행위가 아니라 경험에 의해서 자유롭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경험을 향한 개방성에서 변증법적으로 완성된다.”(WM, 338). 여기서 말하는 경험은 단지 여러 사물과 사태에 대한 지식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오히려 대상화할 수 없는 ‘이해’의 축적을 의미한다. 사람들이 평생에 걸쳐 얻게 되는 이런 이해의 경험 차원은 객관적으로 서술할 수 없는 것이지만 실제로 우리의 삶을 끌어가는 힘으로 작동한다. 사람과의 만남, 물리학에 대한 인식, 종교적 체험 등, 수많은 경험이 어떤 이해의 틀을 형성함으로써 사람에 대한 참된 지식을 가능하게 하는데, 이것을 개념적 언어로 묘사할 수는 없다. 기독교적으로 말하자면 일종의 영성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가다머에게 “진정한 경험은 자신의 역사성에 대한 경험이다.”(WM, 340). 어떤 정답을 획득해서 그것을 삶의 수단으로 삼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이 부정되고 다시 지양됨으로써 새로운 세계를 맛보고, 다시 그것이 지향되는 과정에서 자신의 실존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 참된 경험이다. “자신의 역사성에 대한 경험”이야말로 진정한 경험이다. 과거와 미래에 개방적인 태도를 취함으로써 자기의 주관성 보다 훨씬 거대한 어떤 세계를 인식하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석학적으로 경험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우리가 해석 행위에서 만나게 되는 것은 어떤 사건 자체가 아니라 그것에 대한 진술인 전승(Überlieferung)이다. 그가 말하는 전승은 단지 역사적 사건의 집합이 아니며 우리가 객관화하고 연대적으로 서술할 수 있는 어떤 대상이 아니라 일종의 ‘너’처럼 스스로 말을 건네는 그 무엇이다. 즉 그 전승은 우리의 입장에서 재단하고 대상화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자유롭게 말하는 그 무엇이기 때문에 변증법적인 힘이며 대화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가다머는 ‘너’로 만나게 되는 이 텍스트를 딜타이의 해석학적 개념인 ‘삶의 표현’으로 간주하지 말라고 주장한다. 삶의 표현이라는 개념에는 여전히 인간의 주관주의적 요소가 강하게 자리 잡음으로써 전승의 고유한 영향사적 지평이 말살될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다머에 따르면 참된 해석이 일어나려면 텍스트가 말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동시에 독자는 텍스트를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그 자체의 주제로서 수용하며 개방적인 태도를 취해야 한다. 이것이 곧 전승을 향한 우리의 개방성이라 할 수 있는데, 이런 개방성이야말로 영향사적 의식의 나-너 구조에 해당하는 것이다.
오늘 성서 해석의 문제에서 가장 심각한 것은 전승사적 차원에 속한 경험의 구조가 제 각각으로 단절되어 있다는 점이다. 성서의 사건과 그 보도가 어떻게 보편사적 차원과 연관되어 있는지에 대한 관점이 철저하게 배제된 채 단지 그런 것의 종교적 의미만을 찾는 것에 머물러 있는 형편이다. 이런 해석과 설교로 인해서 기독교 신앙은 전체 생명과의 연대성이 상실될 뿐만 아니라 주변의 인문학과 대화할만한 장을 확보하지 못하게 되었다.    

해석학의 물음 구조

위에서 언급한대로 경험의 변증법적 성격이라는 개념은 해석학이 근본적으로 참된 물음에 내재된 부정성의 운동과 부정성과의 만남에 반영되어 있다는 말이다. 자연과학도 역시 이런 부정성의 개입으로 인해서 변증법적으로 진행되는 것이다. 경험이 일정한 시간과 공간에서 일어난 폐쇄된 사건의 객관적 진실을 파악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런 사실을 뛰어넘어 역사적으로 이 세계를 끌어가는 전승사적 힘과의 변증법적 관계를 파악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경험 안에 있는 긍정적인 요인과 부정적인 요인들의 상호적 관계에 대해서 질문하는 행위는 해석학적 논의에서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다. 여기서 묻는다는 것은 그 사태를 고정된 것으로 인정하는 게 아니라 개방된 것으로 본다는 의미이다. 어떤 텍스트를 향해서 진정한 물음을 던짐으로써 그 텍스트는 다시 새로운 대답을 준비하게 된다. 가다머에 의하면 물음을 제기하는 순간에 질문의 대상이 된 그것은 일정한 빛을 받게 되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이미 질문 받은 존재를 ‘폭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해석학의 본질인 물음이 어떻게 정당하게 수행되는가? 가다머에 의하면 그 길은 주제, 즉 사상 자체에 몰입됨으로써 주어진다. 진정한 대화는 각자가 상대방을 논리적으로 제압하기 위한 논증이 아니라 자신의 명백한 논리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대화의 주제에 끌려 들어가는 것*이다. 즉 주어진 답변을 끌어내기 위한 논리가 아니라 그 텍스트와 더불어서 사상 자체로 몰입해 들어감으로써 질문과 응답, 즉 참된 대화가 개방적인 차원에서 진행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텍스트는 자신을 존재론적으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해석학의 과제는 고정된 문자의 형태로 소외되어 있는 텍스트에 대화의 생동력을 불어넣는 일이며, 이를 근원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것은 물음과 대답이다.(WM, 350). 따라서 텍스트를 이해한다는 것은 곧 텍스트가 안고 있는 물음을 이해하는 것이다. 텍스트의 의미지평, 또는 의미방향을 결정하는 물음지평을 이해함으로써 텍스트를 이해하는 단초가 열린다고 할 수 있다.

*성서를 해석해야 할 우리 설교자들이 범하기 쉬운 가장 큰 함정은 성서와의 관계를 물음의 구조로 끌어가지 않고 도그마의 구조로 끌어간다는 사실이다. 대개의 설교자들은 청중들로 하여금 성서에서 질문할 수 있는 그 길을 터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단절시킴으로써 해석학적 작용이 발생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 예컨대 욥기서 기자가 치열하게 고민했던 하나님의 존재론이 오늘 우리의 지평에서도 여전히 질문으로 다가와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단답식의 대답만 강요하고 있는 실정이다. 교회가 이런 질문의 구조를 막는 이유는 기독교 신앙을 개방된 진리가 아니라 자신들의 목적에 이용할 도구로 간주하기 때문인데, 어쨌든지 이런 상태가 반복되면 성서 텍스트는 결국 죽은 문자가 되어 언젠가는 용도 폐기될 날이 멀지 않을 것이다.

2002년 초에 서거한 가다머는 100세 되던 2000년 1월에 Spiegel지(誌)와의 인터뷰에서 철학의 본질은 정확하게 질문하는 것을, 즉 가장 본질적으로 필요한 것에 대해서 질문하는 것을 배우는 학문이라고 했다. 이 질문은 그가 60세 때 저술한 <진리와 방법>에서 제기된 해석학의 물음 구조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인다. 가다머의 생각에 따르면 물음과 대답의 변증법적 관계는 곧 텍스트와 독자에게 있는 각각의 지평을 융해시킨다. 그렇다고 해서 각각의 지평이 사라진다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질문하는 자는 분명히 자신의 지평 안에서 질문하며 그 답변은 텍스트의 지평에서 제시된다. 그런데 이러한 지평들이 질문과 대답의 변증법적 작용을 통해서 사라지고 새로운 지평으로 대체되는데, 이 새로운 지평이 곧 텍스트가 탈(脫)은폐되는 사건이다. 우리가 몰랐던 어떤 것이 존재하고 있으며, 그것도 우리가 막연히 생각하고 있던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는 사건이다. 이런 점에서 이해와 해석은 기본적으로 지평융해의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지평융해 개념은 가다머 해석학의 핵심이기 때문에 성서해석과 연관해서 좀더 검토하기로 하자. 역사적 사건에서 작용하고 있는 나름의 고유한 지평들은 독립적인 힘이기는 하지만 전승사, 더 나아가서 보편사의 차원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것이 어떤 사건과 텍스트를 완전하게 하지는 못한다. 독자의 지평도 여전히 그런 기능과 한계를 담고 있기 때문에 이 두 지평이 본래적인 질문과 대답의 구조 속에서 전승사와 보편사를 향해 개방됨으로써 결국 두 지평이 융해되고 새로운 지평이 열리게 되는데, 이것이 곧 해석 사건이라는 것이다. 앞에서도 비슷한 논리로 언급되었지만 성서의 지평과 독자의 지평이 각각 그 지평에만 머무르게 되면 진정한 의미에서 이해와 해석 사건이 발생할 수 없다. 반면에 질문과 대답의 구조 가운데서 변증법적으로 전승사와 연결된다면 이 과정에서 새로운 깨달음의 세계가 열릴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한 질문도 그렇고, 구원과 종말, 궁극적으로 생명에 대한 성서의 지평과 오늘 우리 독자의 지평이 보편사적 지평에서 열린 질문과 대답의 구조를 이끌어갈 수 있다면 결국 성서가 나름의 지평 안에서 진술하고 있는 구원과 종말의 새로운 지평이 우리에게 열리게 될 것이다.
그런데 가다머에게는 이렇게 존재론적 탈은폐가 물음과 대답으로서의 경험의 변증법적 사건에서 일어나도록 유인하는 매개체는 곧 언어다. 이 언어야말로 서로 다른 지평이 상호 융해될 수 있도록 하는 보편적 매개체인 셈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판넨베르크는 가다머가 보편사적 지평에서 다시 언어의 지평으로 해석학의 지평을 축소시켰다고 비판한다. 판넨베르크에 따르면 가다머가 그렇게 한 이유는 가다머가 헤겔의 보편사 개념이 안고 있는 폐쇄된 결정론적 역사 문제를 지나치게 의식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문제는 판넨베르크를 다룰 때 다시 생각하기로 하고, 우선 가다머가 지평융해의 매개를, 즉 해석학의 보편성을 언어라고 주장하는 그 근거에 대해서 그의 설명을 들어보자.  

언어의 본성과 해석학의 보편성

기본적으로 가다머는 언어의 형식과 도구적 기능을 강조하는 기호이론을 반대하고, 대신에 언어의 특성 및 우리가 언어에 존재론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언어를 두 사람 사이의 의사교환을 위한 수단으로 생각할 뿐이기 때문에 언어의 존재론적 능력을 상실하는데, 가다머는 하이데거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언어를 도구적으로 사용하는 게 아니라 언어의 힘에 참여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과연 이게 무슨 뜻인가? 언어의 존재론적 힘이란 무엇인가?
가다머에게 말은 인간에게 속하는 게 아니라 상황에 속하는 것이다. 예컨대 누가 “저 나무는 푸르다”라는 말을 했을 때 여기서 이렇게 말한 사람의 주관이 핵심이 아니라 그 나무의 푸르름이 핵심이다. 그 나무는 색을 향해서 탈(脫)은폐하는데, 그게 인간의 주관적 능력이 아니라 바로 언어 자체의 힘이라는 것이다. 즉 이 사실을 진술한 사람이 그 말을 창안해 내는 게 아니라 그가 오히려 말의 존재론적 능력에 따라서 이 사실을 배운다. 나무가 푸르다는 사실에서 그 나무를 보고 자기 생각을 진술한 그 사람의 주관이 중요한지, 아니면 그런 푸르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언어의 존재론적 성격이 중요한지가 핵심 사안인데, 언어의 기호이론에 의하면 전자가 중요하며, 가다머에 의하면 후자가 중요하다. 가다머의 생각에 따르면 진술하는 사람이 말을 창안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가 말을 따라 그 사태를 배우는 것이다. 그가 말을 만들어서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라는 생각은 순전히 언어학 이론의 허구일 뿐이다. 그는 이렇게 진술한다.

‘말’은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나의 주관적 의식을 표현하기 위한, 주) ‘기호’(sign, Zeichen)가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만들어서 일정한 의미를 부여한 그런 것도 아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사물을 가시화하기 위하여 임의적으로 만든 창안물이 아니다. 이는 완전히 틀린 생각이다. 오히려 의미의 원천(Idealität der Bedeutung)은 ‘말 그 자체 속에’ 놓여 있다. 말에는 항상 이미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Es ist immer schon Bedeutung.). (WM, 394)

가다머의 입장은 언어를 인간의 자기 반성적 산물로 보는 것에 대한 철저한 부정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기호학자들이 말하는 반성적 산물이라는 주장과 가다머가 말하는 경험의 산물이라는 주장의 차이를 간단히 따라잡을 수는 없다. 일단 우리의 일상적 경험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자기에게서 일어나는 어떤 사건을 반성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말을 생각해내기 때문에 어떤 점에서 언어를 반성적 산물이라고, 그래서 결국 인간의 그것이 나타나는 기호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로고스’ 개념이 언어의 존재론적 토대를 지시하고 있듯이 언어는 인간이 자기를 반성하기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다만 그 로고스가 우리의 일상적 언어로 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당연히 인간의 반성적 역할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볼 때 언어는 인간의 반성이 만들어낸 기호라기보다는 언어가 존재론적으로 포함하고 있는 어떤 사상(事象)의 자기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팔머의 표현에 따르면 언어를 인간의 반성과 주관의 도구로 보는 것은 흡사 꼬리를 치고 있는 개를 보고 꼬리가 개를 흔든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앞에서도 보았듯이 텍스트가 오늘의 독자들에게 단순한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새로운 세계를 드러내고 있듯이 언어도 역시 인간이 도구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어떤 대상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탈은폐하는 자기의 능력을 갖고 있다. 인간은 단지 그 언어의 존재론적 능력을 파악하고 그것에 참여함으로써 진리를 알 수 있다.

생생한 말 속에 살아 있는 언어, 즉 텍스트에 대한 모든 이해와 해석자들을 포괄하는 언어는 사고 과정(그리하여 해석)과도 너무나도 밀접하게 혼융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만일 언어가 내용적으로 전달해 주는 바를 무시하고 언어를 형식으로 생각하게 되면, 우리가 얻는 것이라곤 하나도 없다. 언어의 무의식은 언어의 진정한 존재방식이다.(WM, 382, 팔머, 296에서 재인용).

따라서 언어는 인간의 주관에 의해서 좌지우지 될 있는 어떤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초개인적인 사상(事象)이다. 세계도 역시 인간의 주관에 대립해 있는 어떤 대상이 아니라 인간 자체가 포함되어 있는 더 근본적인 사상이다. 언어는 이런 세계가 탈은폐하는 존재방식이기 때문에 인간이 이 세계를 이해하려면 이런 언어 존재론적 능력과 성격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가다머에 의하면 언어는 우리의 주관성보다는 세계의 명령을 따른다는 면에서 (과학적이라는 의미와는 다른 뜻에서) 객관적이다.

이 특수한 객관성(Sachlichkeit)은 세계에 대한 언어의 공속적 관계로부터 도출된다. 이때의 객관성은 상황을 말하며 이 속에는 사상과 화자 사이의 거리를 전제로 하는 자족적인 타자성에 대한 인식이 들어 있다. 이러한 거리에 기초하여 <상황>과 같은 것은 정의될 수 있고, 궁극적으로는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진술의 내용이 될 수 있다(WM, 421, 팔머, 299에서 재인용).

언어가 세계의 존재방식이라고 한다면, 즉 언어가 바로 세계의 탈은폐 방식이라고 한다면 텍스트를 해석하는 해석학이 감당해야 할 폭은 사뭇 광대하다. 우리가 고대어를 통해서 그들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바와 같이, 이 말은 곧 그 고대인들에게 세계가 탈은폐되었다는 뜻인데, 오늘 텍스트를 다루는 해석학은 인간의 모든 삶의 세계를 검토하고 확인하는 작업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해석학은 철학의 보편적 존재방식이지 정신과학을 위한 방법론적 기초가 아니다. 언어를 통해서 탈은폐*의 길을 가고 있는 세계, 또는 삶의 세계에 참여하는 것이 해석학이기 때문에 철학은 바로 이런 해석학적 방식을 통해서 수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탈은폐 개념에 대한 설명이 약간 필요할 것 같다. 물론 이 개념도 이것을 사용하는 학자들에 따라서 약간씩 다른 의미로 해석될 여지가 있긴 하겠지만 기본적으로는 이 세계가 인간에게 은폐되어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이것이 드러나는 과정이 곧 학문이고, 예술이고, 종교라고 보는 관점이다. 신학 개념으로 바꿔 말한다면 탈은폐는 곧 ‘계시’이다. 여기서 핵심은 탈은폐의 사건이 어떻게 발생하는가, 하는 점이다. 인간이 자연과학이나 사회 분석을 통해서 이 세계를 탈은폐하는가, 아니면 세계 자체가 탈은폐하는가, 하는 질문이다. 하이데거와 가다머는 당연히 후자의 입장을 견지한다. 따라서 언어 사건도 역시 세계가 자신을 탈은폐하는 계기로 작용하는 것이지 이 세상 앞에서 인간이 자기를 반성하는 과정으로서 출현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가다머의 주장대로 인간의 반성적 차원이 아니라 언어 존재론의 시각에서 해석학을 해명할 수 있다면 해석은 분명히 보편적 지평을 확보하게 될 것이다. 자연과학과 정신과학에서 제 각각 다르게 적용되는 게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우리 삶 전반에서 보편적인 해석의 토대가 작동되어야만 한다. 그가 말하는 언어 존재론적 해석학이 과연 이런 보편적 지평을 확보했는지에 대해서는 앞으로 좀더 논의가 있어야 하겠지만 해석을 인간의 반성이 아니라 존재의 탈은폐 사건으로 자리 매김을 확고히 했다는 점에서 그의 해석학적 노고는 인정받아야 할 것이다. 팔머가 인용한 다가머의 진술을 여기서 부분적으로 재인용하기로 하겠다.

우리는 이제 이러한 사변적 운동은, 이 운동은 전체로서의 존재에서 출발하며 주관성이 아니라 사상(事象)들에 의해서 인도되는데, 우리가 해석학적 경험에 대한 분석을 통해 역사의식과 미의식을 비판했을 때 우리가 보았던 바로 그것이란 점을 알게 되었다. ...  우리와 대립해 있는 듯이 보였던 것은, 즉 사건의 의미 혹은 텍스트의 의미는 우리가 단순히 확인하고 묘사할 수 있는 고정적이고 자기 폐쇄적인 대상이 아니다. 왜냐하면 역사적 의식은 그 자신 속에 사실상 과거와 현재의 매개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 해석학은 철학의 보편적 존재방식이며, 따라서 결코 정신과학을 위한 방법론적 기초가 될 수 없다. (WM, 450-451, 팔머, 309에 재인용).

이제 가다머의 해석학에 대한 설명을 정리하도록 하자. 그는 정신과학의 포괄적인 일반적 방법론으로서의 해석학을 제시하는 쉴라이에르마허와 딜타이, 베티에 이르는 전통과 달리 모든 곳에서 보편적으로 작용하는 역사적이고 변증법적이며 언어적인 사건으로서의 이해를 다룬다는 점에서 보편적, 변증법적 해석학을 지향하고 있다. 그가 하이데거의 언어 존재론적인 면에서 같은 노선에 서 있기는 하지만 하이데거보다는 훨씬 더 헤겔의 변증법적 접근을 시도했다. 아마 이는 팔머가 지적하고 있는 대로 후기 하이데거의 수동적인 인간이해를 헤겔의 변증법적 사유로 극복해보려는 시도가 내재되어 있다 하겠다. 팔머는 가다머의 해석학을 이렇게 정리해주고 있다.

따라서 <진리와 방법>은 해석에 관한 현대의 사고를 새로운 단계의 기초 위에 올려놓음으로써 해석학 이론의 고찰을 위한 전혀 새로운 지평을 열어놓았다. 하이데거의 해석학은 이미 이해라는 사건을 존재론적으로 생각했던 반면에 가다머는 이해의 존재론을 근대 미학과 역사 해석의 가장 근본적인 공리들을 의문시하는 변증법적 해석학으로 발전시켰다. 그리고 가다머의 해석학은 현대의 문학비평을 지배하고 있는 여러 가지 해석 개념들을 철저히 비판할 수 있는 철학적 토대를 제공하였다고 할 수 있다.(팔머, 315).

김영한은 가다머 해석학의 신학적 함축성을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설명한 바 있다. 첫째, 가다머가 주장하는 ‘텍스트의 사실’은 성서 해석학 및 신학적 해석학에서 중요한 의미를 부여한다. 둘째, 영향사 원리는 성서 해석학에서 소박한 역사적 객관주의와 비판주의가 지니는 객관주의적 일면성을 극복하는 길을 제시한다. 셋째, 가다머의 해석학의 한계는 성서의 사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단순히 영향사적 의식에 천착될 수 없다는 데에 있다. 그의 논평 가운데서 셋째 항목은 별로 타당하지 않다. 그는 구원사를 가다머의 영향사와 대치시키고 있는데 이는 근본적으로 다른 문제다. 굳이 구원사적 전망이 필요하더라도 그것이 영향사 개념과 근본적으로 대립하는 것은 아니다. 가다머의 영향사가 말하려는 바는 텍스트가 역사적으로 단절된 게 아니라 개방되어 있다는 뜻이기 때문에 김영한이 두 번째 항목에서 언급했듯이 신학적 이해에 도움을 줄 수 있다. 따라서 이 문제는 판넨베르크가 비판하고 있듯이 가다머의 언어 존재론에 대한 비판에서 다루어져야만 한다.

지평융해 개념과 설교

성서 텍스트를 본문으로 그것을 읽는 현대인들에게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전달함으로써 이들이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 사건에 참여할 수 있도록 권고하고 독려하는 행위가 설교라고 한다면 기본적으로 두 가지 작업이 전제된다고 볼 수 있다. 하나는 성서의 지평을 이해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오늘의 지평을 이해하는 일이다. 이런 두 지평이 바르게 이해됨으로써 오늘 우리에게 성서가 말하려는 구원 사건에 대한 새로운 지평이 열리게 되는데, 이 두 지평은 자신의 고유한 세계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융해되는 과정을 통해서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된다는 점에서 각각의 지평이 연관되어야 할 전승사적 힘에 대해서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는 게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이런 성서의 지평을 이해할 때 그것을 단지 우리가 이해해야 할 어떤 대상으로 삼지 말아야 한다는 데에 있다. 그 성서의 세계는 우리 인간의 주관적 체험에 의해서 판단 받아야 할 그 어떤 대상이라기보다는 그것 자체가 자기를 탈은폐하는 존재론적 사건이다. 따라서 나의 주관에 의해서 성서를 분석한다거나, 또는 역사비평에 의한 객관적 사실을 확인하는 것으로 끝내버린다면 우리는 성서의 세계에 온전히 참여할 수 없다. 오히려 우리는 어떤 사건이 그 당시로서 일단락되지 않고, 즉 완료되어버리지 않고 계속적으로 미래를 향해 작용함으로써 자기를 드러내는 영향사적 연관을 숙고해야만 한다. 예컨대 우리는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려고 한 사건을 놓고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일컫고 있다. 그 말은 맞다. 그러나 그 이삭 사건은 그것으로 완료되어버린 게 아니라 계속된 역사 속에서 새롭게 해석되면서 신약 시대까지 그 영향을 끼쳤다. 오늘까지도 그런 영향사는 작용한다. 이런 점에서 오늘의 설교자는 성서의 사건과 그 보도를 늘 새로운 각도에서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도 구약성서를 새롭게 해석했는데, 그것은 영 엉뚱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 율법의 근본정신을 살리는 해석이었다. 만약 성서에 있는 본문을 문자적으로, 또는 역사 비평적으로 전하는 것만을 설교의 목표라고 한다면 해석학적인 차원에서는 불충분하다. 또는 그것을 오늘의 삶에 실용적으로 적용시키는 것만을 보충한다고 해서 설교의 역할을 다 했다고 볼 수도 없다.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성서 텍스트가 단지 인간의 주관적인 하나님 경험을 서술한 것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외면상 그것은 한 개인이나 민족의 하나님 경험이긴 하지만 그것보다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 사건으로 이해해야 한다. 성서 본문에서 인간을 읽어내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읽어내야 한다는 말이다. 그게 바로 성서의 개별적 본문이 맞닿아 있는 근원적인 지평이다. 만약 성서에서 인간의 실존적 체험만을 들추어내서 그것을 하나님 자체라고 생각한다면 그런 하나님은 늘 은폐되어 있거나 아니면 성서의 지평에만 한정됨으로써 사람들에게 구원의 능력자로 다가갈 수 없다. 그것이 바로 불트만이 말하는 인간의 실존주의적 해석에 내포되어 있는 함정이다. 그런데 오늘의 설교자들도 성서에서 하나님의 자기 계시가 일으켜나가는 그런 구원의 역사에 들어가기보다는 인간의 주관적 경험에 매어 달리고 있기 때문에 성서의 지평에, 혹은 그 실질에 빠져들지 못하고 늘 변죽만 울리게 된다. 그래서 앞서 몇 번 강조했듯이 설교의 내용이 거의 인간의 실존적 경험에만 머물러 있게 된다. 내가 기도했더니 어떤 일이 일어났다느니, 십일조 헌금을 드렸더니 어떤 축복이 임했다는 식이다. 또는 어떤 방식으로 살자, 착하게 윤리적으로 살자, 이 사회를 개혁해나가자 운운한다. 이런 방식으로는 결국 성서 해석이 인간의 반성적 차원에 머물게 됨으로써 하나님이 탈은폐되지 않는다.

성구명상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 <요한복음 8:38>

유대인들에게 예수의 가르침은 쉽게 받아들일 만 한 게 못되었다. 그 이유는 그 내용 자체에 문제가 있었기보다는 자신들의 전통과 사뭇 달랐기 때문이었다. 나름대로 종교적인 지식이 풍부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그들은 율법이라는 진리가 전통 안에 갇혀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 진리의 능력을 간수할 수 없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전해들은 그 법칙에 따라서 이 세상을 판단하고 살면 그만이었다. 이러한 종교적, 학문적 태도는 그 당시만이 아니라 오늘의 우리에게도 여전하다. 툭 하면 “이게 우리의 전통이야. 그렇게 말하면 성서가 말하는 것과 달라.”라는 말을 한다. 그 내용을 근거로 해서 진리 논쟁이 벌어져야 하는데 자기들이 전해들은 것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상대방의 생각을 한 마디로 재단해버린다.
여기서 진리 논쟁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 그 어떤 절대적인 진리도 없다는, 일종의 극단적인 상대주의를 말하려는 게 아니라 자신의 주관적인 판단이나 전통의 객관적인 기준보다는 진리 자체의 탈은폐적 성격을 상위 개념으로 설정해야한다는 말이다.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로서 살아가는 우리는 늘 한정적인 인식의 범주 안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아무리 역사에서 많은 정보를 취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어떤 절대적인 진리를 실증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다. 엄밀하게 말하면 그 진리 자체가 우리에게 노출되는 그 세계를 따라갈 뿐이다. 이런 점에서 가다머가 말한 대로 참된 대화는 자신의 생각을 상대방에게 설득시키려는 논쟁이 아니라 개방적인 자세로 그 대화의 주제에 충실하게 따라가는 것이다.
예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할 뿐이었다.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요 8:28).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조상에게서 전해져 내려오는 전통과 풍습을 듣고 그대로 따라 살았지만 예수는 자신이 아버지(하나님)에게서 본 것을, 그가 가르친 것을 말한다. 이 양자의 태도가 비슷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유대인들이 들은 것, 예수의 본 것이 결국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예컨대 제주도에 사는 사람이 서울에 직접 와서 그 풍경을 보는 경우와, 다른 사람에게서 전해들은 것은 같을 수가 없다. 그들이 서울에 대해서 말할 때 똑같은 대상이지만, 그리고 내용도 비슷할 수 있지만 직접 본 사람과 전해들은 사람의 머릿속에는 전혀 다른 그림이 들어 있다. 아무리 자세하게 전해 들었다고 해도 그것은 결국 남의 체험에 불과하지만 직접 본 사람에게는 직접 체험이기 때문에 살아있는 지식이며, 그래서 진리 체험이다. 이 양자에서 결정적인 차이는 다음과 같다. 전해들은 사람은 들은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반면에 직접 본 사람은 모든 것을 알기 때문에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다. 결국 전자는 돌팔이 약장수처럼 같은 내용을 그럴듯하게 꾸미기 위해서 온갖 수사학을 모두 동원할 수밖에 없지만 후자는 그런 노력 없이 그저 자신이 본 것을 말하기만 하면 된다. 전자는 주어진 문구에 매달려야만 하지만 후자는 자유롭다.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0). 하나님을 보고 그 세계에 들어간 사람은 자유로워진다는 말이다.
이러한 두 가지 삶의 태도 사이에 놓인 틈은 너무나 심각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경우에 거의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종교 전문가들이라 할 수 있는 바리새인들도 예수를 이해할 수 없었다. “너는 누구냐?”(요 8:25). 그들의 눈에 예수는 해괴한 사람이었다. 전혀 다른 것을 말하고 있는 예수는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모든 시대는 예언자를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들과 다른 것을 보고 생각하고, 그래서 다르게 살아가는 예언자들을 보기 싫어했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 나오는 이야기와 같다. 동굴 밖의 세계를 본 사람이 다시 동굴로 돌아와서 새로운 세계를 아무리 설명해 주어도 그들은 동굴 속의 삶에 젖어 있었기 때문에 알아듣지 못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작용한다. 첫째, 인간과 그 인간이 형성해나가는 역사의 과정에는 패러다임 쉬프트가 일어날 수 있는 길이 별로 없다. 둘째, 그 이유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두려움이 인간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우리 기독교 내부에서도 거의 동일하게 작용한다. 가다머가 해석학적 구조로서 중요하게 생각했던 근본적인 것에 대한 질문인 하나님은 누구인가, 어떻게 존재하는가, 이런 질문에 대해서 생각을 하지 못한다. 그저 어린이들이 산신령을 생각하는 것 정도로 하나님을 표상할 뿐이지 하이데거가 말하듯이 무(無)로서 존재자를 존재하게 하는 그 존재 자체의 차원에서 생각하고 질문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뿐만 아니라 기독교인들은 이런 새로운 진리 자체를 두려워한다. 흡사 어머니 품에 안겨서 젖을 먹던 그런 편안한 분위기에 사로잡혀 있는 유아처럼 그것을 벗어나는 모든 것에 대한 무조건적인 두려움이 기독교인들을 사로잡고 있다.
여기서 설교자들에게 요구되는 태도는 우선 예수가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씀하는 것처럼 그 세계를 보아야 한다. 보지 못하고 바리새인들처럼 들은풍월만 읊조리고 만다면 설교자로서의 기본적인 자질을 갖추지 못한 것이다. 물론 겉으로만 보면 재미있는 설교도 하고, 사람들이 은혜를 받았다고 하니까 나름대로 설교자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 세계를 보지 못한 사람의 설교는 아무리 화려하게 꾸며졌어도 참은 아니며, 바리새인들처럼 종교적 권위와 호감이 갈만한 인간미와 철저한 학문성으로 아무리 무장했어도 진리를 말하는 게 못된다. 진리의 세계에 들어가지 못하면 자유도 없다.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
많은 경우에 신앙은 무조건 믿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해가 되지 않지만 믿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믿음 지상주의가 기독교 역사에서 일종의 패권을 행사해 왔으며, 어떤 면에서는 역사를 왜곡시켜왔다.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가 지동설을 주장했을 때 교회는 그것이 기독교 신앙과 상치된다는 뜻으로 종교재판에 회부해서 결국 정죄(定罪)했다. 이런 예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지만, 이런 큰 사건만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인 신앙생활에서도 역시 진리론적 자세를 의미하는 이해보다는 무조건적인 믿음이 우선한다는 논리가 앞서 있다. 이런 태도에 머물러 있는 한 우리는 진리와 상관없이 살아가게 된다. 조금 극단적으로 말하면 자폐증 환자처럼 자기의 폐쇄된 정신세계에 갇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기독교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야가 세상과 다르다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우리의 세계관은 당연히 달라야 하지만, 진리에서 벗어나면 안 된다. 우리의 설교는 진리론적으로 타당한지, 그래서 자유의 세계를 확장시키고 있는지, 계속해서 우리 자신을 향해서 질문해야 할 것이다.
끝으로 ‘본다’는 게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만에 하나, 죽어서 하늘나라를 보고 돌아왔다는 어떤 사람들처럼 직접 하나님을 보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없기를 바란다. 하나님은 우리가 차원을 달리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를 직접 본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하고, 다만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을 뿐이다. 물론 스데반은 순교 당하는 순간에 하늘의 영광을 보았다고 하고, 바울은 다마스커스 도상에서 부활한 주님을 직접 만났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경험이라는 것도 하늘나라 자체라거나 부활하신 주님 자체라고 할 수는 없다. 바울이 예수 공동체를 박멸하기 위해서 칼춤을 추고 다닌 그 시기에 예수님은 이미 지상의 활동이 끝나고 승천한 이후였기 때문에 바울을 만나기 위해서 하나님 우편 자리를 잠시 비우고 지상에 내려왔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런 문제는 복잡하니까 여기서 접어두고, ‘본다’는 말의 의미를 좀더 따라가 보자.
‘본다’는 말은 ‘안다’는 말과 똑같다. 예수님의 ‘본다’는 말씀은 우리가 연극을 관람하듯이 보았다기보다는 진리의 세계를, 즉 하나님 아버지의 세계를 안다는 뜻이다. 거꾸로 바리새인들의 ‘듣다’는 아직 ‘모른다’는 뜻이다. 설교자들에게 가장 우선되는 일은 성서의 세계를 ‘아는’ 것에 있다. 그런데 ‘앎’, 또는 ‘깨침’에 이르는 왕도는 없기 때문에 남의 가르침을 통해서 아는 세계에 이를 수 없다. 도에 이르는 길을 가듯이 하나님의 자기계시가 우리에게 열리도록 영적 감수성을 열어두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심청이 아버지의 눈이 열리는 순간처럼 우리에게 그런 영적 개안의 때가 오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외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보는 것을 말한다고.

[레벨:1]박상열

2007.03.18 11:57:32
*.139.176.131

다비아에서 가끔 '지평융해'라는 말이 나오면
매번 지평? 땅인가? 땅이 융해된다? 이렇게 넘어 가곤 했습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다비아에 온지 반년이 넘은 지금에서야 이 글 도전(?) 하게 되었네요.^^;;
읽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고, 무슨 얘긴지 정확하게 파악은 안되지만,
그냥 '지평융해'란 단어의 느낌은 조금 알것 같습니다.ㅋ
언어가 말을하고, 또 성경이 말을 한다는것,
어쩌면 이전에 성경에서 좋은? 구절을 찾으려 할때마다 성경 구절들이
숨어버리곤 했던 경험들에 대한 좋은 설명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영적인 것들을 억지로 찾는게 아니라, 내가 성경으로 부터 성령으로 인해
진리를 듣고 보고 알게 된다는 사실...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리라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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