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강, 모세오경

기독교가 뭐꼬 조회 수 3314 추천 수 0 2012.02.17 23:40:41

제19강

모세오경

 

 

늘은 매화꽃 수정을 한번 해봤어요. 보통은 벌이 날아와야 수정이 되는데요. 이 화분이 아파트 안에 있으니까 벌이 들어올 수 없잖아요. 그래서 교우 한 분이 붓으로 하나하나 다 건드려 주었어요. 30분 정도 걸렸습니다. 그림 그리는 붓으로 색칠하듯이 하더군요. 놀라웠어요. 과수원에 있는 매화꽃들을 멀리서 볼 때는 그냥 화사하다고만 생각했는데, 매화꽃을 화분에 심어 놓고 가까이에서 본 건 처음이거든요. 꽃에 수정을 시킬 때, 붓으로 건드리니까 꽃가루가 하늘에서 눈이 오듯이 떨어지는 거예요. 그냥 볼 때는 꽃이구나 하는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붓으로 살살 건드려보니까 꽃가루가 정말 대단히 많더군요. 매화꽃은 별로 크지 않는데, 꽃가루가 아마 수백 개는 될 것 같아요.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꽃가루였습니다. 그걸 확대해서 본다면 장관일 겁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아주 작은 것들, 보통 마이크로(micro) 세계라고 하는 것들을 다 놓치고 사는 것 같습니다. 큰 세계, 매크로(macro) 쪽도 놓치고 살기는 마찬가지겠죠. 아주 작은 것도 놓치고 큰 것도 놓치고, 우리가 알 수 있는 평범한 세계 안에서만 경험하고 사네요. 오늘 저는 매화꽃 수정하는 작업을 30분정도 하면서 황홀한 경험을 했습니다.

 

모세오경

우리는 지금 구약성서에 관해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구약성서의 구체적인 내용 속으로 들어갈게요. 모세오경에 대한 것입니다. 앞부분에서는 구약의 내용으로 들어가기 전에 개론적인 걸 말했어요. 구약성서는 39권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오늘 공부하는 내용은 아주 초보적인 것으로, 구약 39권의 내용을 압축해서 말하려고 합니다. 성서에 대한 전이해가 있는 사람들은 오늘 좀 따분할 것 같아요. 한쪽에 TV를 켜두고 건성으로 들어도 됩니다. 다 아는 이야기를 할 것 같으니까요. 그러나 다 아는 이야기라도 아는 것에 수준 차이가 있을 수도 있어요. 족집게 과외가 있죠? 입시준비하면서 시험에 나올 확률이 높은 걸 집어내는 사람들 말이에요. 가능한 한 제가 그런 자세로 해보겠습니다. 실용정부도 들어섰으니 우리도 실용적으로 나가보지요.; 사실 우리나라가 언제는 실용적이 아니었나요? 미국을 닮아서 언제나 실용적이었죠. 그런데 이번에는 더 노골적으로 실용 정부라고 하니까, 저도 성경공부를 좀 실용적으로 해보려고요. 여러분에게 꼭 시험에 나올 이야기만 하겠고, 여러분이 오늘 들은 이야기만 딱 머릿속에 기억하고 있다면, 어디에 가더라도 구약성서에 대해 한마디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구약성서 39권의 핵심 내용이 무얼까요? 우리의 머릿속에 어떻게 집어넣어야 구약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을까요? 구약성서는 전체적으로 세 부분입니다. 첫 번째는 모세오경, 토라라고 하고요. 두 번째는 예언서라고 합니다. 세 번째는 성(聖)문서라고 하고요. 독일어 성경이나 영어 성경은 모세오경을 지칭할 때, 우리처럼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라고 부르지 않고, 모세의 첫 번째 책, 모세의 두 번째 책이라고 부릅니다. 이 다섯 권이 모세의 저작이라는 전통을 받아들이기 때문이죠. 거기에 얽힌 여러 가지 사연들에 대해서는 제가 말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어쨌든 이것을 우리가 토라라고 하기도 하고, 율법서라고도 합니다. 이 부분이 구약성서의 핵심입니다. 성서 안에서 중요도를 따진다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따져야 합니다. 신약성서도 마찬가지예요. 그 의미는 더 따져봐야겠지만, 마르틴 루터는 야고보서를 지푸라기와 같다고 말하기도 했어요. 그 밖에 다른 성서도 비록 경전 안에 들어오기는 했지만, 권위에 있어서는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경전 안에 들어오지 못한 외경은 권위가 좀더 떨어지구요. 위경은 훨씬 더 멀리 있는 것들입니다. 고대 이스라엘 뿐 아니라 기독교 공동체 안에도 수많은 문서들이 있었는데, 오리지널도 있었고, 위작도 있었고, 그 중간 쯤 되는 것들도 있었습니다.

쉽게 생각해 보세요. 지금도 많은 설교들이 나오잖아요. 어떤 설교들은 정말 기독교 전통에 바르게 설 뿐 아니라 설교를 들어야 할 청중의 삶도 충분히 이해하고 하는가 하면, 사실 한번 듣고 그냥 지나가버리는 설교들도 많거든요. 저는 개인적으로 판넨베르크의 설교가 전자에 속한다고 보는데요. 몰트만의 설교도 괜찮고 폴 틸리히의 설교집에서도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흔들리는 터전』(폴 틸리히, 대한기독교서회)이라는 책인데요. 여러분도 한번 보세요.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신학 대가들의 설교는 역시 다릅니다. 그러나 후자에 속한 설교를 누가 100년이나 200년이 지난 후에도 읽겠습니까? 그런 설교들은 기독교의 중심이 아니라 기독교 바깥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런 설교가 지금 한국교회에서 인기를 끄는 걸까요? 사람들이 전통, 깊이, 본질 같은 것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죠. 그런 설교들이 자기 개인의 종교적 욕구를 만족시켜 주기 때문이에요. 종교적 욕구와 사회적 욕구가 겹쳐 있거든요. 그런 것들이 교묘하게 신앙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겁니다. 무늬는 신앙의 모습인데, 속에는 육체의 욕망(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말하고 있는)이 가득한 거죠. 그런 것들을 적절하게 자극하면 사람들이 따라 갈 수밖에 없어요. 이단 논쟁이 늘 많은데요. 신천지나 영생교 말이에요. 그런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발붙일 수 있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신앙의 내용이나 본질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죠. 그저 청중들에게 종교적인 만족만 주면 되거든요. 그런 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하여튼 성서가 기록되고 편집되던 그 당시에 많은 문서들이 있었고, 서로 무게의 차이는 분명히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모세오경(율법서)을 가장 먼저 경전으로 결정했어요. 얌니아 회의 때(기원후 90년) 구약 39권이 경전으로 결정되었다는 말은 성문서까지 포함한 구약 전부가 결정되었다는 것이고, 모세오경은 그보다 앞서 경전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중요한 것이었기 때문에 모두가 인정하는 성서였어요.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이 예언서입니다. 예언서는 주로 이스라엘의 역사를 다루고 있어요. 그리고 역사 안에서 활동했던 예언자들의 설교가 담겨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전기 예언서는 역사이고, 후기 예언서는 예언자들의 설교입니다. 보통 혼동하는 사람들이 있는데요. 성문서에 속하는 역대기가 역사가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건 전기 예언서와는 좀 다릅니다. 물론 중복되는 게 있어요. 그러나 역대기는 성문서로 분류됩니다. 이런 성문서는 주로 남왕국의 패망과 포로귀환 등 혼란한 시대에 형성된 문학작품이에요.

모세오경을 먼저 보겠습니다. 모세오경은 주로 네 단계로 나눕니다. 우리가 조그만 냇가를 건널 때 징검다리가 있잖아요. 그 징검다리를 하나하나 밟고 가야 냇가를 건널 수 있는 것처럼, 모세오경의 전체 윤곽을 잡기 위해서 제가 네 개의 디딤돌을 만들었습니다. 그 네 개가 창조 이야기, 족장 이야기, 애굽 이야기, 광야 생활이에요. 가나안에는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가나안 직전까지예요. 제가 이걸 표시하고 있어요. 지금 동영상의 화면에 그 도표가 나오죠? 오늘 실시간 강의를 직접 듣지 못하는 사람들은 화면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이해하는데 좀 차이가 있을 거예요. 모세오경이 뭐냐고 할 때 이 네 가지만 기억하면 됩니다. 창조, 족장, 출애굽, 광야 생활이 그겁니다. 머릿속에 기억해 두세요.

첫째로 창조입니다. 창세기 1장부터 11장까지의 핵심 주제가 창조예요. 물론 여기에 창조를 중심으로 타락 이야기, 노아 홍수 이야기, 바벨탑 이야기 등이 나오기는 하지만, 결국은 창조 이야기입니다. 창조와 타락이라고 할 수 있어요. 창세기 1-11장까지를 보통 모든 역사의 근원이 된다고 해서 원(源)역사라고 합니다. 독일어로 ‘우어게쉬히테’(Urgeschichte)라고 하는데요. 이것은 역사의 객관적인 사실이라기보다 역사에 대한 근원적인 의미를 담아내는 설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 11장까지는 이스라엘의 민족사, 족장사가 시작하기 이전의 보편적인 세계 이해를 설화 방식으로 진술하고 있는 거죠. 세계가 시작했다고 하는 이야기와 그 세계가 타락한 이야기가 들어 있어요. 세계가 시작하기는 했는데, 인간의 삶을 보니까 폭력과 살인 등이 많은 거예요. 이 세상이 왜 이런가를 해명하기 위한 하나의 귀납법적인 원인 제시로 타락 이야기가 나오는 거죠. 이런 것을 신학적 해석이자 고백으로 받아들여야지,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면 곤란합니다.

원역사, 구약성서의 맨 처음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창세기 1장 1절이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여러분, 태초가 언제일까요? 물리학자들이 보통 말하는 120억 년 전이 바로 그 순간일까요? 이에 대해서는 우리가 좀 더 많은 생각을 해야 합니다. 원역사 부분에는 창조사건, 아담과 이브의 불순종, 가인과 아벨 등 여러 가지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저는 다른 건 다 접어두고 주로 창조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창세기 1장에서 11장까지의 내용 중에 어디에 포커스를 두고 보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신앙적 위치가 다를 수 있습니다. 창조 영성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창조 사건을 앞에 놓고 이야기할 것이고, 인간의 죄나 죄 사함 등 사죄의 영성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타락 이야기를 앞에 놓고 이야기하겠죠. 저는 창조 이야기만 하겠습니다. 창조된 순서가 이렇게 나와요. 첫째 날은 빛, 둘째 날은 하늘, 육지와 식물, 별, 마지막 여섯째 날은 들짐승과 인간, 이렇게 만들었어요. 보통 우리는 여섯째 날에 인간만 만들었다고 생각하는데 들짐승과 같이 만들었습니다. 정확한 이야기고요. 일곱째 날에는 안식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다 알고 있는 내용이에요.

여기에서 이야기를 좀 더 진전시켜야 하는지 모르겠네요. 창세기에는 창조 이야기가 하나만 나오는 게 아닙니다. 보통 J문서와 E 혹은 P문서가 각축을 벌이고 있어요. J는 하나님을 야훼라고 부른 문서를 말합니다. 하나님을 엘로힘이라고 부르는 E문서의 기자가 말하는 창조 이야기도 있어요. 둘이 좀 달라요. 그것만 비교해서 설명해도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간단하게 인간 창조로만 이야기하자면, E문서에서는 하나님이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만들었어요. 그런데 J문서에서는 남자를 만들고 나서 그 갈비뼈를 뽑아서 여자를 만들었다고 해요. 왜 그랬을까요? 그걸 생각해야겠죠. 제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창조 이야기도 조금씩 문서에 따라 차이가 있다는 거예요. 아주 중요한 건 아니지만 참고로 말씀드렸습니다.

 

빛이 있으라

창조 사건에서 저는 주로 빛 이야기를 하려고 해요. 잘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을 누가 보았나요? 본 사람이 없죠.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이 맨 처음에 빛을 창조했다는 걸 알았을까요? 하나님이 계시를 했다고요? 그렇게 말하기 시작하면 성서 안의 모든 사실이 실증적인 사실로 자리 잡게 되고, 그로 인해 많은 모순이 일어나게 돼서 도저히 해결이 안 돼요. 물론 근원적으로는 하나님의 계시라고 말할 수 있죠. 제가 성서를 읽을 때 중요한 것은 성서기자의 편집의도라고 말했지요? 성서 기자가 왜 창조 순서에서 빛을 가장 첫머리에 놓았을까요? 그 점을 생각하는 게 중요합니다. 빛이 있으라고 하니까 빛이 있었다고 해요. 왜 성서 기자들은 빛을 하나님의 창조물로 썼을까요? 이건 그렇게 어려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생각해 보세요. 우주 물리학적인 지식에 미개했던 고대인들이지만 세계를 직관하는 것은 우리와 차이가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 지금 아무리 과학이 발달했다고 해도, 그 당시 고대인들이나 현재의 우리나 세계를 직관하는 측면에 있어서는 차이가 없었다는 거예요. 구약 성서를 기록할 때가 약 3천 년 전(약 2천5백 년에서 3천 년)이라고 해도, 그때 그들이 바라보았던 빛과 지금 우리가 바라보는 빛은 똑같잖아요. 그들은 그 빛 앞에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태양, 빛이 있는 거예요. 그들은 바로 모든 생명과 존재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꿰뚫어 보았던 겁니다. 오늘의 우리와 똑같은 생각을 했던 거예요. 빛이 없으면 생명이 유지될 수 없으니까요.

참고로 성령에 대해서도 한 말씀드리죠. 여러분, 잘 기억하세요. 왜 성서 기자들이 성령을 이야기했을까요? “성령이 있으니까 성령을 이야기했겠지.”라고 말한다면 성서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렇게 믿는다고 해서 큰 잘못은 아니지만, 그건 성서 이해가 아주 미숙한 거예요. 히브리어로 영을 ‘루아흐’라고 하는데요. 그들이 왜 영에 이름을 붙였을까요? 이게 바로 바람이라는 뜻이거든요. 바람과 영이에요. 고대인들은 평소에 바람과 영을 똑같은 걸로 본 거예요. 바람은 공기죠. 따뜻한 바람과 차가운 바람이 있어서 생명을 죽이고 살리는 것처럼, 생명의 영을 생각한 겁니다. 성서 시대의 사람들은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그걸 염두에 두라는 뜻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들 앞에 직면해 있는 빛, 우리도 지금 그 빛을 보고 있어요. 그들은 이 빛을 하나님이 첫 번째로 만들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게 모든 생명의 근거라고 봤기 때문이죠. 별거 아니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이건 그들의 신앙고백이기도 합니다. 그 당시에 주변의 다른 종교들도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을 겁니다. 바벨론이나 이집트에서도 마찬가지였을 거고요. 이 빛에 대해서 고대인들이 생각했던 것과 우리가 생각하는 것에 차이가 있을까요? 우리가 빛에 대해 뭘 알까요? 제 생각에는 고대인이든 현대인이든 궁극적인 것을 꿰뚫어 보려고 노력했지만 그걸 다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걸 해명하려고 했던 게 아닐까 해요. 그런 점에서는 고대인이나 우리나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이 빛을 우리는 잘 몰라요. 보통 물리학자들도 빛이 입자인지 파동인지 밝혀내지 못한다고 하네요. 빛은 그렇게 신기한 겁니다.

여기에서 빛의 문제만이 아니라 ‘있다’라고 하는 사실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세요. 오늘 이 이야기만 해도 한 시간이 다 가겠는데요. 그래도 어쩔 수 없지요. 이건 대단히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할 때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다.”고 합니다. 빛의 창조인데요. 있으라고 하니 있은 거예요. 존재의 문제입니다. 보통 창조론에서 이야기할 때 무(無)로부터의 창조를 말하죠. 무로부터의 창조. 비존재로부터 존재. 무를 독일어로는 니히츠(Nichts)라고 하는데요. 없음에서 있음으로, 참 대단하죠! 이걸 생각하면 제가 어지러워요. 깜깜합니다. 어떻게, 왜 없는 데서 있는가? 있는 거는 뭐고 없는 거는 뭔가, 말이죠.

하이데거가 프라이부르크 대학 취임 강연을 할 때, 그 제목이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였습니다. 그 내용은 주로 이렇습니다. 앞에서 한번 언급한 것인데요. 그는 존재를 ‘자인’으로, 존재하게 하는 것을 ‘자이엔데’라고 했어요. ‘자인’과 ‘자이엔데’는 다릅니다. 하이데거가 복잡한 의미로 쓰고 있는 것이 자인인데요. 왜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고, 무는 없는가?, 그것을 해명하려고 했어요. ‘태양이 있으니까 말할 수 있겠지.’라고 말하면 간단하죠. 그런데 왜 태양이 빛을 내야 할까요? 참 신기합니다. 하이데거의 이야기를 조금만 더 하자면요. 왜 무가 없는가에 대해서 말할 때, 여기 토끼가 있다고 하면, 왜 토끼도 있고 사람도 있는데, 그 중간은 없는 걸까요? 그렇게 보면 이 세계가 무인 겁니다. 인간도 있고 토끼도 있는데 그 중간은 없어요. 왜 그게 없는가 하는 거죠.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가 하는 거예요. 물론 여기에서 하이데거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렇게 없는 것을 통해서 있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근원이에요. 그것이 바로 존재인데요. 그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사물에 중심을 두지 않고 없는 쪽에 더 중심을 두고 이 세계를 해명한 겁니다. 형이상학(metaphysics)이라는 것이 물리적(physic) 세계의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원리를 찾는 것이니까요. 탈레스가 세계가 물이라고 했을 때, 그는 물을 보편적 원리로 본 겁니다. 하이데거는 그건 잘못되었다, 그건 늘 존재하고 있는 세계에만 관심을 갖고 있는 거다, 그거 말고 오히려 무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한 거예요.

저는 하이데거의 말을 들으면서 하나님이 무로부터 창조했다는 사실을 더 새롭게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물론 이마저도 신비롭기는 합니다만, 이 세상뿐 아니라 무까지도 통치하는 분이라는 걸 알았으니까요. 사실 우리는 무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없어요. 단어적인 의미만 봐도 그래요. 어쨌든 구약성서의 기자들이 빛에 대해서, 빛을 창조의 첫 번째 사건으로 설정한 것은 옳다, 바르게 보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참고로 제가 빛에 대해서 약간 조사한 것을 강의안에 썼는데요.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대로 태양과 지구는 1억 5천만 킬로미터 떨어져 있고요. 태양에서 지구까지 빛이 오는데 8-9분의 시간이 걸린다고 합니다. 디오게네스에게 얽힌 이야기도 여러분이 알고 있을 텐데요. 알렉산더 대왕이 고목나무 둥치에 살고 있는 디오게네스에게 뭐를 줄까 물었더니, 당신 때문에 햇빛을 받을 수 없다고 했답니다. 권력에 대해서 아첨하지 않는 철학자의 반골기질을 이야기했다고도 볼 수 있지만, 디오게네스가 사유하고 있는 존재론적 근거가 빛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빛과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할 것이 많습니다.

하나님이 세계를 존재하게 했다는 사실이 신기하죠. 우리는 이 땅에 이렇게 살다가 죽은 다음에 창조의 세계를 떠나게 됩니다. 무의 세계로 돌아가게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무의 세계로 돌아간다는 걸 두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그것까지도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통치하는 하나님의 세계일 겁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뭐냐는 것에 대해서 성서에 많은 설명들이 있는데요.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는 것이 아니라 희락과 화평이라고 말하잖아요. 그것은 우리가 이 땅에서 경험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생명의 형식이 있다는 겁니다. 창조 안에서 우리가 생각할 게 많습니다. 그 정도로 이야기하고 넘어가겠습니다.

 

너의 고향을 떠나라

그 다음은 족장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이 네 사람을 이스라엘의 주요 족장이라고 할 수 있어요. 창세기 12장부터 50장까지가 이스라엘의 족장 설화입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생지인 갈대아 우르에 살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떠나라는 말을 했어요. 제가 다른 곳에서 이런 말을 했던 기억이 나네요. 갈대아 우르를 떠나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아브라함이라기보다도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입니다. 데라와 아브라함 사이에서 하나님의 소명을 누가 정확하게 느꼈을까 하는 것도 더 생각해 봐야할 부분인데요. 구약성서에는 아브라함 전승이 주를 이루고 데라는 명함도 내밀지 못합니다. 그러나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 주도권을 가진 사람은 데라가 분명합니다. 데라는 아브라함과 며느리 사라와 손자를 데리고 떠났는데요. 왜 다른 아들들은 같이 가지 않았을까요? 둘째 아들이 있었는데 따라가지 않았어요. 이 이야기를 서울 오프 모임에서 상상력을 발휘해서 강의해 보았는데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서울 오프 메뉴에 가서 읽어 보세요.

저는 이 족장 이야기에서 떠나라는 말에 초점을 두고 싶습니다. 1장에서 11장까지의 원역사에서는 제가 빛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고요. 족장들의 설화에서는 떠나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요즘 노마드(nomad)라는 말 자주 쓰이더군요. 유목민의 정신이라고 하던데, 맞나요? 이스라엘 사람들의 뿌리는 분명히 바벨론 문명입니다. 성서가 명시적으로 그렇게 지적하고 있으니까요. 구약성서는 바벨론 문명과 이집트 문명, 이 두 곳에서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외에 하나를 더한다면, 모세가 생활했던 미디안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어요. 모세의 장인이 미디안의 제사장이었으니까요. 아브라함은 메소포타미아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그 다음 율법을 완성한 모세는 이집트에서 사십년을 왕자로 살았고 미디안에서 양치기로 40년을 살았으니까 바벨론, 이집트, 미디안, 이 세 곳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종교도 독자적으로 나온 것은 없어요. 기독교도 기본적으로 유대교의 영향을 받았고요. 기독교와 유대교는 정말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가 반유대적으로 나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아요. 기독교가 유대교 신앙을 그대로 받은 것은 아니지만 뿌리는 거기에 있습니다. 기독교가 유대교와 차이도 분명히 있지만 유대교와 완전히 단절될 수는 없어요.

기독교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종말론도 기본적으로는 유대교의 묵시사상에서 나왔습니다. 묵시사상의 핵심은 두 가지예요. 첫째는 세상을 시간으로 이해합니다. 쭉 가는 거죠. 혹은 오는 겁니다. 시간적으로 이해하는 거예요. 공간적인 것과 반대되는 의미입니다. 둘째는 이원론적인 세계관입니다. 선악의 대립이죠. 이 세상은 악하고 오게 될 에온, 새로운 세계는 선하다는 겁니다. 유대인들의 이러한 종말론적인 시각을 토대로 기독교 공동체가 새로운 종말론을 갖게 되었습니다. 기독교 공동체에서는 이원론적인 시각이 있지만 많이 퇴색되었죠. 이 세상은 악하고 오는 세상은 선하다는 식으로 설명하지 않으니까요. 묵시사상과 종말론 사이에 그런 차이가 좀 있을 뿐, 시간 개념은 분명히 일치합니다. 세계를 시간으로 이해하는 종말론적인 시각, 카이로스, 하나님의 시간 말이에요. 하나님의 나라는 공간이 아니라 시간입니다.

다시 돌아오죠. 창세기 12장부터 50장까지 나오는 족장들의 이야기에서 키워드를 찾는다면 ‘떠나라.’입니다.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하란까지 갔어요. 여기까지는 데라가 주도권을 행사했습니다. 그런데 하란에서 데라가 죽었어요. 왜 데라가 하란에서 멈추었을까요? 그건 모르겠습니다. 그 당시 데라와 아브라함 등이 이주할 때 집단 이주였는지 아니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러나 그 시대에는 그럴 가능성도 있었던 것 같아요. 대개 집단으로 이주를 했잖아요? 그러니까 데라와 아브라함만 떠난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함께 떼거리로 이주를 했는데, 이걸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소명으로 이해했다는 겁니다. 특히 아브라함이 거기에 집중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어요. 우리나라 사람들도 미국으로 이민을 많이 갔잖아요? 그걸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소명으로 이해하고 미국에 뿌리를 내렸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 이민 사회에서 정말 세계를 새롭게 할 어떤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면, 이민을 간 사건은 정말 하나님의 소명이 되는 거예요. 역사가 우연한 것 같지만 필연으로 가게 되거든요. 거기에서 하나님의 섭리가 무엇인지를 잘 파악해야 하는 거죠.

아브라함은 떠난 거예요. 하란을 떠나 가나안까지 갔어요. 아브라함은 흉년이 들어서 이집트에 갔다 오고 이삭도 갔다 왔어요. 일시적으로 갔다 온 거예요. 그 다음에 요셉이 이집트로 갔어요. 요셉에 관련한 자세한 이야기는 설명을 하지 않겠습니다. 결국 야곱을 중심으로 한 70여명의 사람들이 고센으로 이주해서 살았는데, 목축을 하기에 굉장히 좋은 곳이었습니다. 요셉이 파라오에게 자기 식구들에 대해 말하면서 자기 형제들이 모두 목동이라고 했고, 그로 인해 고센 땅을 불하 받았습니다. 이 족장들의 삶을 한마디로 특징짓는다면 떠나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고 할 수 있어요. 계속 떠나서 결국엔 이집트로까지 떠나게 되었던 거죠.

 

엑서더스

진도를 좀 빨리 나가야겠군요. 모세오경의 두 번째는 출애굽기인데요. 이스라엘 민족은 이집트에서 400년 정도 터를 잡고 살다가 또 떠나게 되었습니다. 계속 떠나죠? 그 후로 광야에서 계속 살았어요. 가나안 정착은 어쩌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영적으로 부패하게 되는 단초였을지도 모릅니다. 어디에 편하게 안주하고 있으면 영적인 긴장감이 떨어지게 되거든요. 호세아가 그랬나요? 오히려 광야 생활이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허니문이었다고 말이죠. 정말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신뢰하게 되니까요. 그런데 가나안에 정착하면서 영적으로 쇠퇴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가나안 문명이 화려하고 편안하니까요.

엑서더스 이야기는 제가 다 말할 필요가 없겠죠? 장자가 죽는 열 번째 재앙 이후로,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떠나라고 합니다. 홍해를 건넌 사건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지만, 중요한 건 아니고요. 여기에서는 미리암과 함께 여자들이 소고를 들고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른 것이 중요합니다. 이 때 부른 노래는 우리나라의 아리랑 같은 노래였을 겁니다. “여호와를 찬송하라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출 15:21) 이것은 이스라엘의 정형화된 신앙 표현이었습니다. 홍해란 말은 원어로 보면 갈대밭이라는 뜻이에요. 영화에서 보듯이 홍해 바다가 갈라져서 건넜을 개연성은 별로 없어 보입니다. 모세를 잘 생각해 보세요. 모세는 40년 동안 광야에서 양을 치던 사람이거든요. 그 쪽 지리에 익숙합니다. 어디로 가면 늪지가 있는지 비밀 통로를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아요. 모세가 없었다면 홍해 앞에 걸려서 건너갈 수 없었을 겁니다. 그렇게 본다면 모세가 광야에서 40년 동안 목동으로 산 것은 하나님이 히브리 사람들을 출애굽 시키기 위한 사전준비였다고 할 수 있어요. 이런 것이 다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바다가 갈라져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건너갔고 파라오 기마병들은 바다 속에 수장되었다고 하는 사실 자체는 신앙의 본질과 관계가 없고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미리암과 여자들이 불렀던 노랫말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했다는 찬양이죠.

유대교가 세 개의 종교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했는데요. 이집트, 바벨론, 미디안말입니다. 이런 영향 속에서 고유한 신앙의 정체성을 확보해 나간 겁니다. 처음부터 여호와 하나님을 명료하게 알았던 게 아니에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명료하게 몰라요. 하나님이 자기를 완전히 드러내지 않았으니까요. 계시는 종말까지 계속 됩니다. 세계가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우리는 빛이 파동인지 입자인지도 모르고, 우리가 영과 육으로 이루어졌다고 하는데, 그게 어떤 결합인지도 모릅니다. 나무에서 파란 잎이 나오는 이유도 생물학적으로는 설명할 수 있지만, 그것이 나오는 근원적인 이유는 몰라요. 이 세계에 대해서도 아직 모르죠. 세계가 중층적이니까요. 그 세계를 다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아직 하나님이 자기를 다 드러낸 게 아니라는 거예요. 이 세계가 완전히 자기의 실체를 드러낼 때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겁니다. 그때 우리가 하나님의 실체를 알게 되는 거예요. 지금은 일시적으로 하나님을 경험하고 사는 겁니다. 80년을 사는 사람들이 수십억 년의 세계를 다 알겠어요? 하나님도 그와 같습니다. 우리는 지금 코끼리의 작은 털 하나를 붙들고 사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하나님의 정체성을 모른 채 말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꼭 하나를 짚고 넘어가야겠군요. 모른다고 해서 불가지론에 빠졌다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는 온전히 하나님이 자기를 드러낸 사건에 의존해 있습니다. 그게 뭘까요? 예수 사건입니다. 성육신, 부활, 십자가를 전체적으로 포함한 예수 사건 말이에요. 이거 하나에 우리 기독교가 모든 것을 걸고 있습니다. 과연 예수 사건이 그럴 만한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변증을 해야 합니다. 변증(apologetics)은 독단, 도그마가 아닙니다. 변증은 주변에 있는 보편적인 토대를 가지고 자기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왜 진리인가를 설명하는 거예요. 기독교는 그런 역사를 거쳐 왔습니다. 왜 예수 사건이 종말론적 진리이고 생명의 근원인지에 대해서 사도들과 특히 교부들이 변증을 했어요. 2천 년 신학의 역사는 모두 이 변증의 역사입니다. 그 과정에서 다른 종교로부터 조금씩 영향을 받았던 겁니다. 그런 영향을 받았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되는 건 아니에요. 오늘도 기독교 신앙이 주변의 영향을 받고 있잖아요? 한국에 들어온 기독교는 한국의 토착적인 것에 영향을 받습니다. 토착화를 말하는 건 아니고요. 한국 사람들만의 독특한 세계 이해들이 기독교 신앙에 접목될 수 있다는 겁니다. 그게 쉬운 이야기는 아니에요. 한복 입은 예수님을 그리고, 성찬식 때 포도주 대신 막걸리를 쓰면 한국 식 기독교가 되는 걸까요? 그건 아니죠. 그런 것들은 하나의 형식이니까 그걸 토착화라고 하면 곤란하고요. 토착화는 어떤 면에서 중요한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근본이 중요한 거죠.

예를 들면, 삼위일체가 그런 겁니다. 삼위일체가 처음부터 있었던 교리는 아니거든요. 어거스틴이 플라톤 철학의 영향을 받아서 구성한 기독교의 교리입니다. 변증의 과정을 거쳐서 도그마가 된 거죠.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변증하는데, 하나님은 한분이라는 게 모순이 되잖아요? 모순이 되지만 두 개 다 진리인데, 그걸 해명할 길이 없었던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이 참된 하나님이자 참된 인간이라는 사실이 삼위일체에서 명료하게 해명 되거든요. 이것은 헬라 철학에서 영향을 받은 겁니다. 고대 유대교가 바벨론이나 이집트에게 영향을 받았듯이, 역사적 기독교도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아서 기독교의 본질을 더 드러내게 된 거죠. 이런 과정이 실제로 계시, 즉 하나님이 자기를 드러내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간이 지났군요.

이런 방식으로 이스라엘 민족들의 신앙이 구성되었습니다. 놀랍죠. 간단한 게 아닙니다. 이렇게 한 분이 야훼 하나님이다, 우리를 구원한 분, 파라오의 군대마저도 손쉽게 바다에 던지는 분이 야훼 하나님이라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생긴 거예요. 또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그 여호와 하나님은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적당하게 내려주는 분으로 묘사됩니다. 유목민에게는 이른 비와 늦은 비가 필요 없어요. 잔잔한 호숫가로 인도해주면 됩니다. 양을 잘 키우기 위해서는 풀이 있는 곳이면 충분하니까요. 늦은 비와 이른 비는 농사를 지을 때 필요합니다. 이건 가나안 종교의 영향을 받은 거예요. 그러면서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심화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성서의 역사이자 2천 년 기독교의 역사입니다. 그러한 변화, 흐름, 정체성 확보 등이 역사를 통해서 나오게 되는데, 비뚤게 나가기도 하고 가지를 치기도 하고 막 나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중심에 흐르는 게 있습니다. 2천 년 역사 중에 1517년에 나온 가지가 개신교라고 할 수 있는데요. 로마가톨릭과 개신교가 얼마나 다른지에 대해서는 생각의 여지가 있지만, 제가 보기엔 같은 물줄기 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단들은 여기에서 많이 빠져 나갔다고 봐야죠. 그 다음은 만나와 메추라기인데 다음 시간에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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