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강 녹취록 - 4장 예수 그리스도를(2)

사도신경해설 조회 수 2982 추천 수 0 2009.04.05 00:45:36

판넨베르그 사도신경해설 20강-제4장 예수 그리스도를(2)

안녕하십니까? 오늘 20강입니다. 지난번 강의하고 오늘 강의하고 사실은 연결되어야 해요. 물론 전체강의가 연결되긴 합니다만 이번만은 조금 특별합니다. 지난번 강의가 한 패러그래프를 요렇게 정리하지 않고 중간에 끝났어요. 최소한도 한 패러그래프 정도는 이렇게 간 다음에 정리를 했어야 했는데. 그런데 이 패러그래프가 아주 길기 때문에 시간상 그냥 중간에 끊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몇 가지 문제가 좀 있어요. 패러그래프가 중간에서 끊겼다고 하는 문제도 있고요. 또 중간에 끊긴 자체가 애매한데 끊겼습니다. 그래서 고 부분을 좀 정리해야 되겠습니다. 애매하기도 또 끊기면 안 될 고 자리에서 끊겼어요. 제가 좀 실수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난번 강의 마지막 부분, 고거를 조금 정리하는 이야기를 먼저 드려야 되겠습니다. 좀 겹칠 수도 있어요.

지난주에 우리가 핵심적으로 다룬 이야기는 예수 그리스도,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 이 분에 대한 우리들의 생각, 판단, 그런 것들이 기독교 신앙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그러한 이야기였습니다. 이게 어떻게 보면 뻔 한 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기독교라는 것이 늘 예수님을 믿자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어야 된다고 하는 말은 두말하면 잔소리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라고 할 때 교회 안에서 우리가 그렇게 이야기할 때도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관심은 없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이 클 수도 있고요. 그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해명되어야 되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이 있는 겁니다. 또 더 나아가서 예수님이 과연 누구냐 하는 그러한 그 질문이 천차만별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겁니다. 이게 아주 실질적인 예수 그리스도, 2천 년 전 유대인의 한 노동자 가정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요셉을 노동자라고 단정 짓기는 쉽지 않습니다만 어쨌든 예수님의 역사성이 구체적이라고 하는 거를 말씀드리기 위해서 직간접적으로 성서가 말하고 있는 고 내용을 거론한 것뿐입니다. 예수가 하늘에서 뚝 떨어지거나 없는 인물이 만들어지는 그러한 과정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바로 그 분이라고 하는 사실, 거기에 우리가 몰입할 정도로 우리의 신앙이 그 중심을 잡아야 된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지난번 19강의 주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할 때 그 말이 어떤 의미가 있느냐 하는 겁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가 기독교 신앙에 중심을 이루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지난 강의를 연속해서 제가 설명을 드리고 있는 중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어떻게 보면 좀 걸림돌도 될 수 있는 거라고 하는 거예요. 뜨거운 감자라는 표현이 맞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역사적 인물을 그 종교의 절대적인 토대로 삼는다고 할 때 이게 불안한 요소로 작용할 수도 있는 거죠. 만약에 예수라고 하는 분의 역사성이 흔들린다고 한다면 기독교 신앙전체가 흔들릴 수도 있잖아요. 그렇지 않는 방식으로 기독교가 유지될 수 있는 길을 찾을 수도 있는 겁니다. 이 말이 여러분들에게 돌고 도는 이야기처럼 들릴까봐 조금 조심스럽습니다. 예수님이라고 하는 유대인, 그분의 운명, 그에게 일어났던 사건들, 그런 것들을 기독교 신앙의 유일한 토대로 삼는다고 하는 이 사실이 자칫하면 우리 근거 자체도 흔들릴 수도 있는 불안한 요소일수도 있는 겁니다. 그래서 판넨베르크의 설명에 따르면 기독교 신학이 이 불안한 요소들을 극복하기 위해서 몇 가지 다른 대안들을 좀 찾았다고 하는 거죠. 다른 대안들도요. 미묘한 차이가 있는 겁니다. 지금 판넨베르크가 이야기하는 예수 그리스도,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기독교 신앙의 모든 것으로 확보하고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자칫하면 기독교 신앙 자체를 허물 수 있는 위기나 불안이 될 수 있다고 하는 것, 이런 것 때문에 조금 다른 방식으로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해 보려고 하는 시도들이 있었다고 하는 겁니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놓는 이러한 기독교 신앙의 문제들이 불안한 요소로 제기 되는 것은 역사적 예수의 방식을, 그 연구를 통해서 그 예수의 근거들이 좀 흔들리기 시작한 거죠. 더 이상 역사에 실존했던 예수 그리스도, 그가 선포했던 하나님의 나라 그가 기대했던 하나님의 나라, 종말론적 하나님의 나라 이런 것들이 오늘 우리시대에 적합하지 않다고 하는 판정을 조금씩 받게 된 겁니다. 결국 그러한 방식으로는 오늘 현대인들에게는 어필할 수 없게 된 겁니다. 19-20세기 까지 그러한 상황들이 계속 진행되어 왔습니다. 유럽의 근대주의 자연과학의 발달, 역사 실증주의의 발전들, 그러한 모색들, 구체적으로는 진화론이라든지 기독교의 역사비평이라든지 등등 새로운 물리학의 발전이라든지 이러한 전반적인 세계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오늘 현대인들이 크게 다가오는 형편이었기 때문에 2천 년 전 나사렛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한 예수님, 그 사건들의 확실성들이 도전받게 된 거죠. 그래서 이러한 문제들을 넘어서려고 한 몇 가지 시도들이 있었습니다.

판넨베르크는 그것을 “일종의 건강하지 못한 잘못한 왜곡된 도피로였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러한 문제 앞에서 정면승부하지 않고 슬슬 피한 거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 피하는 그 방법, 그 시도들 그런 것을 판넨베르크는 3가지로 이야기 합니다. 지난번 강의에서 두 번째 말하다가 말았거든요. 첫 번째부터 이야기하겠습니다. 판넨베르크 책안에서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나열하지는 않지만 제가 보기에는 세 가지로 그가 분류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책 68쪽 맨 아래에서 넷째 줄이요.

사실은 신앙을 역사적 인식의 돌발적 사건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려는 시도가 기독교 역사에서 되풀이 되었다. 말 표현이 좀 따라가기 쉽지 않는 거라서 무슨 말인가 하고 좀 이상하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렇게 복잡한 문제는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은 어떤 역사흐름의 돌발적 사건이잖아요. 메시아가 역사에 개입했다고 하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가 어떻게 이해하느냐하는 것은 둘째 치고 기독교 신앙에 근거해서 볼 때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은 역사의 돌발적 사건인 것은 분명합니다. 이러한 문제들이 근대학문에서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에 그런 문제들을 정면승부로 뚫고 나가지 않고 좀 회피해보려고 하는 그런 시도들이 되풀이 되었다고 하는 거죠. 기독교역사에서 되풀이 되었다고 하는 겁니다.

첫째는 이것입니다. 예수는 기독교와 더불어 세상에 돌입하게 된 진리를 역사적으로 끌어낸 분이라고 생각되었다. 주장되었다. 그렇게 말할 수 있어요. 그 예수에 대한 이해를 아주 그 독특성을 강조하기에는 현대학문과의 대화가 어렵다고 보고 대신 보편적 진리에 근거로 보려고 했던 겁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역사로 끌어낸 분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러한 관점이라고 한다면 예수님은 일종의 현인이지요. 종교 창시자라고 할 수도 있고요. 그런 사람들은 많이 있을 수 있고요. 뛰어나지만 그러나 절대적이지 않는 그러한 현자인 가능성 그러한 쪽으로 이야기하는 입장들이 있는 거죠. 그렇게 된다면, 이러한 방식으로 한다면 예수님의 메시아성, 메시아성이라고 할까요? 역사적 단절, 역사의 이질적인 것이 들어온 거잖아요. 기독교 신앙이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 말입니다. 역사의 돌입한 이질적인 어떤 사건이라고 하는 딜레마는 벗어날 수 있는 거죠. 예수님은 진리를 역사 안에 구현시킨 분으로 보려고 하는 겁니다. 그게 하나구요.

또 하나는 오늘날에도 역시 다층적인 차원에서 주장되고 있는 것처럼, 신앙경험에서 예수의 현실성에 대한 어떤 특별한 통로가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신앙경험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신앙경험, 예수가 어떤 지간에 우리가 신앙적 경험, 여기서 예수가 누구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는 길이 있다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지난번 강의에도 예를 들었습니다만 쉴라이르마허의 절대의존의 감정 이런 것들이 한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런 것이 두 번째 인거예요. 첫 번째는 예수님을 진리를 역사 안에서 구현시킨 분으로 생각하는 것, 두 번째는 신앙경험, 실존적인 신앙경험에서 예수의 현실성을 찾아낼 수 있는 길이 있다고 보는 입장이죠. 이것을 조금 더 설명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것을 설명하고 있는 거예요. 이는 곧 부활하고 들림 받은 이와 직접적으로 조우한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며, 또한 신앙경험이 나사렛 예수에 대한 역사적이고 사실역사적인** 현실성을 특별하고 자유롭게 인식하도록 중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역사적이고 사실 역사적인 현실성, 학문적인 표현이지요.

Historie은 어떤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역사를, Geschichte는 어떤 의미가 있는 해석된 역사를 말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 단어들이 항상 그렇게 엄격하게 구별되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우리말로는 더더욱 힘들다. 글쓴이의 의도에 따라 구별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역자는 문맥에 따라서 Historie를 Geschichte와 구분하여 ‘사실역사’라고 번역하기도 했으며, 때에 따라서는 그냥 역사라고도 했다. 별 문제는 없으리라고 본다.

여기서 역사적이라고 하는 건 게수튀리히이라고 하는 거고 사실 역사적이라고 하는 것은 History합니다. 이 독일어에서는, 보통 영어에서는 무조건 히스토리라고 하는데요. 독일어에서는 게쉬히테로 이야기합니다. 역사에 대한 심층적 이해인거죠. 하여튼 이러한 히스토리와 게쉬히테 이러한 현실성을 이러한 신앙경험으로 우리가 따라갈 수 있다고 그렇게 이야기 하는 겁니다. 이게 두 번째입니다. 핵심이 이거죠.

다시 정리합니다. 첫 번째는 예수를 보편적 진리의 구현자로 보는 거구요. 두 번째는 신앙경험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겁니다. 판넨베르크에 따르면 이러한 도피로들은 지금도 여전합니다. 조금 지성적인 사람들은 아 예수님은 현자야 진리를 구현한 분이야. 뛰어난 종교 창시자 뭐 그렇게 볼 수 있는 거죠. 교회 안에서도 사실은 본인들이 어떻게 믿고 있는지 설명을 할지 모르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두 번째 신앙경험에 중심축을 놓는 이러한 관점은 오늘날에 아주 일반적이죠. 특히 한국 교회는 이게 거의 득세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이게는 조금 더 극단화 시키는 예수가 산신령이 되든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냥 믿고 있는 자신이 중요한 거죠.

마지막으로 세 번째입니다. 마지막으로, 정말 히스토리칼한 인물이 예수가 아니라 오히려 기독교적 ‘케리그마’에 대한 신앙, 그리고 새로운 현존이해에 그 본질적 내용이 담겨있는 사신을, 복음을 믿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점이 주장되기도 했다. 케리그마에 대한 신앙, 새로운 현존, 새로운 피조물이다라고 하는 그러한 현존이해에 대한 이해, 이런 것들이 기독교신앙의 본질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는 겁니다. 이게 세 번째 항목이었어요. 케리그마라고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이죠.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사건들의 핵심 내용을 가리킵니다. 뭐 그렇게만 설명을 하죠.

이 세 가지를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첫 번째는 보편적 진리, 두 번째는 신앙경험, 세 번째는 케리그마 이겁니다. 요 각각이 일리가 있는 거예요. 사실은요. 예수님께서도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진리라고 말씀하셨잖아요. 진리. 기독교도 보편적 진리라는 것이 분명하구요. 다 각각 신앙경험도 중요하구요. 케리그마도 기독교 신앙에서 없어서는 안 될 문제들입니다. 이것 각각이 중요하지 않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것들이 출발하고 있는 그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하는 겁니다.

이런 세 가지 유형의 기독교 신앙은 역사적 예수에 대한 그 관점, 중요한 관점, 그런 것들을 유보시킨 거죠. 그걸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조금 기독교 신앙이 약간 변수로 내 놓는 겁니다. 예컨대 케리그마 신앙의 대표자가 루돌프 불트만인데요. 케리그마 이게 중요한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에게 어떤 일이 실지로 일어났느냐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고 그것을 어떻게 초기 기독교인들이 신앙적으로 인식해서 구원을 경험했느냐 하는 게 중요한 거죠. 굉장히 매력적인 입장입니다. 저도 설교할 때나 성경 공부할 때 그 비슷한 이야기를 많이 이야기했습니다. 성서텍스트를 사실로서 읽을 수 없고 그것을 기록한 사람들의 신앙 경험이 중요하다. 그와 비슷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제 설명이 이러한 케리그마적인 입장과 통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거는 아닙니다. 고거는 좀 구별을 해야 되요. 저는 역사적 예수가 기독교 신앙에서 상수로 앉을 수도 있다는 거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성서 텍스트의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서 우리가 성서텍스트를 사실적 언어, 신문기자의 뉴스보도가 아니라 오히려 시인들의 시적 감수성의 표현들로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인들이 어떤 역사적 경험이 전혀 없이 그냥 자기의 내면에서 나오는 어떤 시적 영감을 언어로 표현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들은 분명히 어떤 역사적 경험을 하는 겁니다. 정확한 비유인지는 모르겠네요. 제가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느냐 하면 이 불트만의 케리그마 신학이 제 입장이 아니라는 것을 제거 굳이 변명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네 진도를 나가겠어요.

이 세 가지, 이런 모든 시도들은 기독교 신앙이 정말 역사적 인물, 그리고 분명한 사실 역사적인 생기들과 연결되어있다는 사실로부터 달아나려는 거의 같은 크기의 도피로들이다. 기독교 신앙의 취약성 앞에 놓인 도피로. 이러한 취약성에 맞서 기독교 신앙을 확보하려는 시도. 그러나 이러한 시도에 의하면 기독교 신앙을 기초하고 있는 예수와의 관계가 반복적으로 포기될 뿐이다. 제가 뭐 긴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죠. 기독교 신앙의 취약성앞에 놓인 도피로들, 취약성이라고 하는 것은 앞에서 제가 설명했듯이 역사적 예수에게 모든 것을 걸어 놓는다고 하는 그러한 사실 말입니다. 이게 취약할 수 있다고 하는 거예요. 만약에 이러한 역사적 예수의 근거가 흔들려 버린다고 한다면 그러면 거기 예수 그리스도에게 모든 것을 걸어놓은 기독교 신앙도 역시 흔들리기 마련이죠. 이러한 취약성 때문에 안정만을 찾아보려고 하는, 도피로를 찾아보려는 시도가, 판넨베르크에 의하면, 세 가지로 주어졌는데 결국 이런 것들은 기독교 신앙이 기초하고 예수와의 관계가 반복적으로 포기되는 것뿐이다.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이 말이 여러분들에게 전달되었으리라고 보고요.

교회 신앙에서도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신학이라고 하는 것은 신학자체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영성을 위해서 있는 것이고요. 또 영성으로부터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이러한 신학적인 책을 읽을 때 그것을 실제 자기의 신앙과 연관시켜서, 연관시키는 게 아주 중요합니다. 이런 말들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할 수 있을 거예요. 열심히 예수 믿고 역사적 예수가 포기되느냐 하는 거죠. 그런데 아마 여러분들이 그걸 인정할 수 있을 겁니다. 예수님이 없어도 교회는 굴러갈 수 있어요. 그래서 이단들도 가능한 겁니다. 역사적 예수와 단단하게 연결되어 있지 않아도, 그래도 교회 혹은 유사 교회 이런 것들은 가능합니다. 사람들은 늘 기독교 신앙의 뿌리를 생각하기 보다는 지금 당장 나에게 어떤 실용성이 있느냐 그런 차원에서만 접근하기 때문에 그런 것들만 충족시켜 준다면 교회활동은 얼마든지 가능한 거죠. 제가 보기에 한국교회도 역사적 예수와의 관계가 포기된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많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관심도 사실은 별로 없고요. 관심이라고 하는 것은 반복되는 것 같지만 내가 얼마나 열심히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거기에만 놓여있습니다. 반복적으로 포기될 뿐이다 이러한 지적은 옳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예수는 한 번도 이러한 사실역사적 인격체와 다른 그 어떤 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원시 기독교의 신앙에 따르면 그 인격체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이러한 세계에 등장했으며, 원시 기독교 신앙에서 높여진 主는 이런 사실역사적 예수, 정말 역사적인 예수, 사실 역사적이라고 하니까 표현이 이상하죠? 정말 역사적인 예수와 다른 그 어떤 분이 아니다. 중요한 문제입니다. 따라서 원시 기독교 사신과 신약성서 문헌들은, 제가 문건들이라고 번역했군요. 문헌이라고 하는 것이 옳습니다. 되풀이해서 정말 역사적 인격체를 언급한다. 뚜렷하게 그분, 그 예수를 의미하는 거죠. 그 관계가 소월해지만 이단 또는 위경을 따르는 자들로 떨어지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예수에게서 일어난 운명, 그의 십자가와 부활을 언급한다. 복음서 기자들의 문헌이 출현하면서 예수의 지상적 삶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 완전히 새로운 생각으로 되돌아보기 시작했다. 재미있는 표현이죠. 복음서가 나오기 전에 다른 문서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신약성서에 들어온 그러한 문서들 중에서도 복음서보다는,갈라디아서가 맨 처음 되었죠. 그러한 문서들이 많이 있었는데 복음서가 초기 기독교 안에 자리를 잡으면서 이러한 문제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적 삶의 의미들을 새롭게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승을, 지상적 예수의 모습을요. 이러한 그러한 문헌들에 대한 것을 전혀 사용하지 않은 것 같이 보이는, 그리고 오직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에만 집중하고 있는 바울의 사신도 역시, 그렇잖아요. 바울은 예수의 공생애에 대해서 별로 이야기하지 않잖습니까? 십자가와 부활만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실 그렇게 하는 것처럼 보이는 예수의 유일회적인 정말 역사적 현상을 신앙의 근본이라고 확신했다.

예수의 부활은 정말역사적 본질로서, 예수가 누구인가에 대한 정말 역사적인 본질로서 그리고 구체적인 시간 가운데서 십자가에 달린 이에게 일어난 생기로 간주함으로서, 생기? 지난번에도 이야기했죠. 생기? 태어나다는 날生하고 일어나다 起, 어떤 것이 일어나는 사건을 가리킵니다.

독일어 Ereignis라는 단어는 ‘일어난 일’, ‘사건’을 뜻하지만, 신문보도 처럼 어떤 객관적 사실(Tatsache)이나 사건(Geschehen)이라기보다는 의미가 포함된, 혹은 해석된 현상이기 때문에 생기(生起)로 번역했다.

아이거니스라고 하는 독일어예요. 간주함으로써 우리의 정말역사적인 사유에서 매우 불편한 문제들이 많이 발생한다고 하는 것은 두말 할 나위 없이 분명하다. 이게 불편한 문제들이 발생하느냐 하는 것은 설명하지 않아도 대충 감은 잡으시겠죠. 부활, 아직까지 역사에서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궁극적 생명이 어떻게 우리와 똑같이 역사 안에서 살았던 예수라고 하는 그 분에게 일어나느냐 하는 문제는 불편한 거예요. 그걸 우리는 무조건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되지 말할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설득력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가 믿고 있는, 우리가 희망하고 있는 것을 무지막지하게 아니면 단순하게 이렇게 외칠 수만은 없는 거죠. 그걸 우리는 변증해야죠. 그걸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해명할 수 있어야죠. 이러한 역사적 예수와 그리고 부활, 이러한 사건들, 사건, 혹은 생기, 이런 것을 연결, 하나로 주장한다는 것은 그냥 믿음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믿음은 또 이해를 해야 되니까요. 그리고 또 교회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설득력있게 전해야 될 책임이 있기 때문에 어쨌든 불편한 문제인거죠. 그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예수의 부활을 구체적인 인간에게서 발생한 생기라고 보도하고 있는 원시 기독교의 증언이 무엇을 목표로 하는지를 인식하고, 또한 이를 통해 일어난 사태를 받아들이는 일을 적어도 방해하지는 못한다. 이러한 일들이 불편하기는 하지만 기독교 신앙이 여기에 묶여 있기에 이걸 포기할 수 없구요. 원시 기독교 신앙이 이것을 통해서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했는지 그것을 이해하는데는 뭐 그렇게 방해거리가 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판넨베르그가 계속 여기서 강조하려고 하는 기독교 신앙의 토대가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라고 할 때 우리에게 익히 잘 알려진 교리화된 그러한 차원의 그분이 아니라 상당한 경우의 교회안에서 놓치기 쉬운, 유보되기 쉬운 그러한 그분을 이야기 하는 겁니다. 역사적 예수, 역사적 예수의 사건을 이야기하는 거죠. 아 내가 요 문제를 동어 반복으로 말씀드리는 것 같죠. 오늘 그런 정도로만 하겠습니다. 나중에 이 책을 읽어가다 보면 명료하게 들어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책을 보겠습니다. 70쪽, 앞서 말한 대로 기독교 신앙을 살려내기 위해서 역사적 인물인 예수의 근본적인 의미와 묶여있는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해보려는 도피로(逃避路)는 순전하게 교의학적인 그리스도像을 정말역사적인 문제들과 독립시켜 설계해보려는 시도에 이미 내재해있다. History, 예수의 히스토리와 좀 독립시켜서 그리스도상을 좀 설계해 보려고 하는 시도가 이미 들어있다. 그런 시도들이 많이 있었다는 거죠. 신학은 단순히 예수에 대한 여러 가지 다른 신약문헌들을 이해하는 것에만 머물러 있을 수 없다. 그렇죠. 만약 정말 역사적 인물인 예수에 대한 기독교 신앙이 그 인물의 유일한 특수성과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면, 신학은, 신앙은 신약성서 증언의 배경으로 들어가 예수 자신에 대해서, 그의 출현과 그의 운명에 대해서 되물어야만 한다. 그게 조직신학이고 도그마, 교의학이고 그렇습니다. 성서에 있는 것만 질문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뒤 배경으로 들어가서 예수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하는 것이죠.

정말역사적 인물의 특수성에 대한, 정말 역사적인 히스토리칼한, 그리고 그가 살아온 삶의 과정을 표시하고 있는 생기들에 대한 질문은 만약 신화나 전설에 매달리지 않고 오히려 최소한의 확실성이나 개연성에 도달될 수 있는 수준까지 도달하고자 한다면 정말 역사적 연구 Historical research를 필요로 한다. 일반적으로 예수가 누구인가 하는 그러한 문제,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는 그 준거에 대한 요구, 그 기준에 대한 요구는 기독교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다. 왜냐하면 오직 이럴 때만 예수와 전혀 상관 없거나 아주 미미하게만 상관이 있는 일을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선포하거나 믿는 일을 피하고, 신앙을 온전히 보호할 수 있기 때문이다. 71쪽 맨 위에 있는 줄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요 부분은 여러분들이 줄을 쳐놓고 반복해서 읽어 보십시오. 두 번째 줄부터입니다. 일반적으로 예수가 누구인지에 대해 알 수 있는 준거에 대한 요구는 기독교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다. 그래요. 예수는 누구냐? 그걸 알수 있는 크리토리움 준거를 대라. 그러한 요구는 중요한 거죠. 이러한 요구, 이러한 준거를 댈 때만 그러한 요구와 그러한 질문으로 들어갈 때만 우리는 예수와 별로 상관이 없는 그런 일들, 상관이 있어봐야 조금 미미하게 상관있는 일들을 복음으로 선포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왜냐하면 오직 이럴 때만 예수와 전혀 상관이 없거나 아주 미미하게만 상관이 있는 일을 복음인 그리스도의 사신으로 선포하거나 믿는 일을 피하고, 신앙을 온전히 보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단도직입적으로 제가 말씀드린다면 이렇습니다. 십일조 헌금을 해라 이런 거는 그게 인제 구약에 나와 있는 율법 중에 하나이지만 신약공동체에서도 특별히 한국교회에서는 신앙이 매우 중요한 요소로 요구 받고 있다고 하는 점에서 우리가 그것에 대해서 질문할 수 있는데요. 그러한 십일조 헌금을 해라 하는 요구는 그거는 인제 예수님과 상관이 없는 거죠. 역사적 예수에 대한 그러한 관심들, 예수가 누구냐 예수의 본질이 뭐냐에 대한 기준을 대라고 하는 요구에 직면하고 있는 사람은 그런 것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게 한두 가지겠어요? 많죠? 그래야만 신앙을 온전하게 보존하는 거죠. 지금 많은 경우에 이 예수에게 일어난 사건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아 예수 믿고 천당간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고 그 자체도 상당히 추상적으로 생각하지 안으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질문하지도 않아요. 하나님 나라가 뭔지 부활이 뭔지 뭐 그런 것에 대해서 아주 진지하게 질문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습니다. 대신 세례 받을 때 알고 있는 교리문답 몇 가지 붙들고 믿음이 좋은 것 같은 자신의 신앙적 포즈, 태도 그런 것들만 강조하죠. 그리고 우리 공동체가 엮어가고 있는, 교회를 짓는다거나 선교사를 파송한다거나 그러한 교회의 메너지먼트 이런 것들에 모든 관심을 쏟고 있습니다. 판넨베르크가 지금 강조하고 있는 역사적 예수에게 집중한다고 하는 이 문제는 이런 점에서 우리의 신앙의 순수성을, 순전성을 지킬 수 있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 연구가 어떻게 진행되어 왔는지 조금 설명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조금더 왜곡되고 있는지 설명합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불트만의 순수 케리그마신학*과 달리 케제만 이후 진행된 오늘의 예수연구는 이러한 생각에 근거해서 역사적 예수에 대해 다시 질문하기 시작했다.

케리그마 신학(Kerygmatheologie)은 대표적으로 불트만의 실존주의적 신학을 가리킨다. 바르트가 말씀의 객관성에 기초한 신앙을 강조했다면 불트만은 말씀의 주관성에 기초한 신앙을 강조했다. 즉 예수의 역사문제는 기독교 신앙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고 실존적으로 신앙에 참여하는 것만이 중요하다는 주장이다. 참고적으로 ‘케리그마’는 기독교의 기본적인 구원론을,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그 믿음과 구원을 뜻한다. 판넨베르크에 의하면 이런 실존주의적, 신자의 주관주의적, 케리그마적 신앙은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을 그 중심으로 다루기 때문에 신학이 일종의 인간론으로 축소될 위험성이 있다.

불트만의 케리그마 신학에 대해서는 제가 역주로 달아 놓았으니까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앞에서도 도피로 중에 하나가 케리그마라고 했죠. 연관되는 이야기입니다. 그 케리그마 신학에서 역사는 역사 무의미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사실성 이런 것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고요. 거기에 도달하게 된 사람들의 실존적 경험 이런 것들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이렇게 예를 들겠습니다 80년 광주에서 일어난 민주항쟁이라고 하는 역사적 사건이 있지 않습니까? 이걸 케리그마 신학으로만 본다면 거기서 어떤 일들이 도청앞에서 일들이 일어나났는가 시민군들과 계엄군사이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가? 뭐 등등 그러한 일들의 역사적 사실들은 중요하지 않고 광주사람들이 그날 있었던 그런 일들을 어떻게 민주적 항쟁으로 기억하고 그렇게 경험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게 되는 거예요. 그런 것하고 비슷하게 연관시킬 수 있습니다. 나름대로 의미가 있기는 있는 거예요. 사실 역사적이란것을 우리가 100% 완벽하게 복원할 수 있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런 점에서 이러한 실존적이고 케리그마적인 신학도 의미가 있는 겁니다. 판넨베르크는 이것 자체를 부정하려고 한 것은 아니고요. 이것이 유보시키고 약화시키고 있는 더 중요한 부분들, 이거를 확보해야 된다고 하는 겁니다. 그것이 반드시 객관적인 사실, 역사 뉴스보도에 나오는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80년 5월에 어떤 사건이 분명히 있었다고 하는 사실 이걸 짚는 거죠. 그것의 완벽한 복원을 어떻게 해 낼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거기에 사건이 분명히 있었다는 사실을 놓칠 수 없습니다. 세월이 지나도 그거는 계속 그 민주항쟁의 토대로 남아야 되는 겁니다. 세월이 점점 흘러가고 그런 것들이 다 없어지고 광주에 있었던 사람들에게 경험된 민주를 향한 그리고 억울한 일을 당한 것에 대한 항쟁이라고 하는 그러한 것만 남게 된다면 토대를 잊어버리게 되는거죠. 불트만이 순수 케리그마 신학을 이야기 했는데 그거와는 달리 케제만 이후에 다시 역사적 예수에 대해 다시 질문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기독교 신학이 역사적 예수를 소홀히 했다가 다시 그것으로 돌아가게 되는 거죠.

기독교 신앙은 게르하르트 에벨링이 언급한대로 예수에게 ‘근거’를 두어야만 한다. 물론 이 경우에 예수 역사에 나타난 정말 역사적 실태의 단편적인 문제만을 고려하자고 하는 것은 아니다. 몇 월 몇 시에 무슨 일이 일어났다 그러한 단편적인 사실에만 집중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이미 다른 방식으로 획득된 기독교 신앙의 개념을 예수에게 소급시키고 있다. 오히려 예수 출현과 그의 역사에 나타난 정말역사적 현상이 그의 전체 주변에서, 부근에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20세기 사람들이 느끼는 이질감에서 조망되어야만 한다. 예수님의 사건에 벌어진 전체 일들과 오늘 우리가 느끼는 어떤 이질감이 있잖아요. 전혀 다른 세계이기 때문에 그런 데서 역사적 현상이 조망되어야 하는 거죠. 이 사건이 있어났다면 이 일이 우리에게 어떤 지속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가라는 점을 진지하게 질문할 수 있다. 네 역사적 예수에 대한 질문이 중요하다는 것을 그리고 그렇게 진행되어 왔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72쪽입니다. 예수는 절박한 세계종말을 긴박하게 기대함으로써, 예수님의 역사성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몇월 며칠 몇시에 뭐가 있었다 그러한 것을 이야기하는 것을 역사적 예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큰 덩어리로 이야기, 덩어리라고 하는 표현이 적합한 것인지 모르겠어요. 예수 사건이죠. 예수 운명이죠. 요즘 제가 마가복음 묵상에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몇 번 갔느냐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마가복음에 의하며 한번 가시고 다른 복음서에는 두 번 가신 것이거든요. 예수님의 공생애가 1년이냐 2년이냐 3년이냐 그런데서 보는 차이도 있기도 합니다. 예루살렘 입성할 때 나귀를 타고 가시는데 나귀를 얻는 장면이 공관복음서에서는 아주 그 세밀하게 나와 있지만 요한복음은 그렇게 말하지는 않거든요. 그러한 차이들이 있습니다. 복음서들 사이에서 역사적 사실에 대한 크고 작은 차이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차이들은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런 것들을 역사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의 운명인거죠. 역사적 운명을 이야기합니다. 다시 읽습니다.

예수는 절박한 세계종말을 긴박하게 기대함으로써 자신의 복음 선포와 자신의 역사를 확고히 했다. 여기서 언급된 세계종말은, 하나님의 나라죠. 그것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통치가 관철되는 그것이다. 예수라는 인물의 이러한 특이성은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오는 전환기에 특히 요하네스 슈바이쓰와 알베르트 슈바이쩌에 의해 실행된 신약성서 연구로 인해서 전에 없이 분명하게 주목을 받게 되었다. 예수의 종말론, 예수의 모든 복음선포는 종말론적이었다고 하는 이러한 사실이 슈바이쓰와 슈바이처에 의해서 많이 늘어났고 그게 그당시의 19세기, 20세기 여간에 신학의 중심, 주제였습니다. 슈바이처가 참 대단한 인물이죠. 의사로 아프리카 선교사로 파이프 오르간 연주자로 명성을 날렸고요. 신학 박사학위 논문인가 정확하게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 사람이 쓴 역사적인 예수연구 이거는 아주 고전처럼 되어 있습니다. 이런 연구결과로 인해서 금세기의 신약성서 주석이나 또한 교의신학은 계속적으로 그 영향력이 축소되었다. 하나로 모여지니까요? 종말론인 관점으로만 모여지니까 연구분야가 줄어들었다는 뜻이겠죠. 그 이유는 오늘날, 다른 이유도 있군요. 고걸 지금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러한 시각이 오늘날 자연과학에 의해 규정된 세계이해와 부조화되기 때문만이 아니라, 예수에 대한 기대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루어진 역사진보의 단순한 사실을 통해서, 또한 이에 따라서 그에 의해 기대된 세계종말의 지체를 통해서 오류로 판명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잖아요. 임박한 종말, 하나님나라를 예수님이 선포했는데 그러한 세계상이 오늘 현대의 세계상과 어울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종말, 하나님 나라가 오지 않는것 처럼, 오지 않은 것으로 예수의 말씀이 실패하고 어긋난 것으로 그렇게 이해되었던 거죠. 그러니까 더 이상 이런 쪽의 연구는 되지 않는 겁니다.

예수의 의미를 현재의 시각에서 복원하기 위해서 그가 선포한 복음선포의 종말론적인 성격을 거듭해서 새롭게 해석하거나 아니면 제거해보려 한 것은 이해할만 하다. 새롭게 해석하고 제거해 보려고 했다. 새롭게 해석하는 것은 실존적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서 내가 하나님 뜻대로 사는 것이 하나님 나라가 임한 거다 하는 그러한 방식으로 새롭게 해석하고 그런 종말론적인 시각을 기독교에서 제거해보려고 하는 것은 오류였다. 착각, 잘못이었다. 해버리고 다른 것에 집중하려고 하는 거죠. 예수님의 종말론적 복음선포 보다도 그분의 박애주의, 원수사랑, 이런 것에 기독교 신앙의 토대를 놓자. 그런 쪽으로 나갈 수 있는겁니다. 그럴 수 있겠다 하는 겁니다. 무언가 다르게 해석해 보려는 신학적 동기는 역시 아주 명약관화하다. 신학과 기독교적 경건은, 기독교 신앙은 예수현상의 특이성을 기꺼이 있는 그대로 따라가려고, 따라가야만 한다. 자꾸만 이렇게 저렇게 합리화하려고, 아니 합리화는 아니고 우리 인식 안에 끌어내리려고, 우리 인식 범주, 우리 이해력안으로 끌어내리려고, 아까 말한 도피로 이런 것들을 찾지 말고 초기 기독교 사도들과 신앙공동체들이 경험했던 예수 현상의 독특성을 있는 그대로 일단 따라가도록 해야 된다 하는 거죠. 이걸 놓치면 기독교 신앙은 변질되거나 또는 변죽을 울리는 형편에 놓이게 되는 거죠.

지난주에 걸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역사적 예수가 기독교 신앙에 얼마나 중요한지 판넨베르그의 설명을 들었습니다. 아마 이것이, 이러한 글의 설명이 우리일반 교회생활에서 딱 들어오지 않을 수도 있을 거예요. 우리는 전혀 이런 문제들을 생각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요.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쉽게 쉽게 지나간 정도에 머물러 있어서 그렇습니다. 가능하면 책도 좀 읽어 보시고 그가 이야기하려고 하는 역사적 예수의 문제가 우리 기독교 신앙의 비록 2000년이라고 하는 그러한 간격을 두고 있지만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더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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