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구원론과 기독론

예수는 그리스도인가?
기독교가 주장하는 ‘구원’이 무엇인가에 대한 설명은 곧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과 동일할 정도로 예수는 기독교의 구원론에서 핵심이다. 즉 우리는 신약의 예수가 바로 구약이 기다리고 있던 메시아라고 믿는다는 말이다. 우리의 신앙에서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관해서 질문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단지 종교적 이데올로기로 떨어질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가 과연 참된 그리스도, 즉 구원자였는가를 질문해야만 한다. 우선 우리와 동일한 구약성서를 경전으로 삼고 있는 유대교가 이 예수를 완전히 배척하거나, 아니면 최소한 자신들의 역사에 등장했던 여러 예언자 중의 한 사람 정도로 취급하고 있는 이유로부터 우리의 질문을 풀어가자.
그 대답을 듣기 전에 우리에게서 흔히 발견하기 쉬운 선입견을 교정하기 위해서 우선 다음과 같은 사실을 한번 짚어야 한다. 유대교와 연관된 문제를 다룰 때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사실은 유대교가 없었다면 예수 그리스도도 역시 역사에 등장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예수가 역사를 초월해서 갑자기 등장한 게 아니라 구약성서의 배경인 유대인들과 유대교의 토대에서 등장했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가 유대교의 역사에 숙명적으로 의존해 있을 뿐이라는 말도 물론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격체와 그 사건은 유대교적인 역사를 근거로 하는 동시에 그것을 초월하는 이중적, 혹은 변증법적인 사태 속에서 이해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를 구약에 근거해서 해석하면서도 바로 그 구약의 민족인 유대인들이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 사실에 대해서는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무조건 틀렸고, 우리는 무조건 옳다는 선입견, 혹은 그런 독단론에 빠져 있는 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그 리얼리티를 잃어버릴 수도 있다.
우리의 경전이기도 한 구약성서 안에서 살아왔던 유대인들이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우리가 마음을 열어놓고 들여다본다면, 그들의 주장은 매우 단순하고 명백하면서도 나름으로 정당하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주장은 예수가 메시아라는 증거가 없다는 것이다. 신약성서에서만이 아니라 구약성서에서도 많이 발견할 수 있는 그런 증거를 그들이 발견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믿음이 없거나, 아니면 하나님이 그들을 버렸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기독교인들이 많을 것이다.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구원을 향한 그의 치열성과 진정성을 인정하고 그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들과 우리가 공동체 경전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런 차이를 확인하고 축소시켜나가는 과정에서 기독교의 구원론과 기독론이 훨씬 풍부한 리얼리티를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에게 메시아의 증거가 없다고 주장하는 그들의 논리는 다음과 같다. 만약 예수가 메시아라고 한다면 그로 인해서 이 세상이 근본적으로 변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때나 지금이나 인간은 여전히 죽어야 하며, 무죄한 자가 고난 받으며, 인간이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투쟁하고, 특히 메시아가 와서 이루어야 할 평화가 진척된 흔적이 전혀 없다. 이것은 단순한 주장이 아니라 명백한 사실이다. 그들의 이런 주장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 일단 그들의 주장은 옳기 때문에 그것 자체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논란이 필요 없다. 만약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들이 주장하는 그런 차원과 그런 방식의 구원을 생각한다면 분명히 예수는 메시아로서 자격 미달이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로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구원은 그런 정치, 경제적인 정의라거나 우리의 복지 향상에 있는 게 아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을 구체적으로 향상시키고, 로마 제국과 같은 악한 힘들을 정복하고, 이 땅에서 ‘샬롬’의 질서를 이루어낸다는 유대인들의 메시아와 예수는 달랐다. 예수는 폭력을 제거하기 위해서 또 하나의 폭력을 사용하는 메시아가 아니라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 같은 순종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끌어들이는 메시아였다. 둘째, 유대인들이 기대하고 있는 그런 구원을 포함한 모든 궁극적인 구원의 사실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은폐’의 방식으로 이미 역사 안에서 시작되었다. 우리는 예수의 부활 사건에서 그런 역사 완성의 선취(先取)를 본다. 다만 그 완성의 성취(成就)는 종말에 이르기까지 숨겨져 있을 뿐이다. 물론 이런 주장이 유대인들과 어떤 사람들에게는 언어유희, 또는 단지 관념으로 받아들여질지 모르지만 우리 기독교는 바로 이 사실에 우리의 모든 것을 걸어두고 있다. 선취와 성취 사이의 역사에 은폐의 방식으로 전개되는 이 구원의 과정을 해명하고 구현해나가는 작업이 곧 교회에 주어진 선교적 사명이다.

구원이란 무엇인가?
이런 사명의 하나가 곧 ‘구원이란 무엇인가?’를 우리의 신앙적 화두로 삼는 일이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늘 단초로 작용하는 구원이 무엇인지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구원에 대한 열망이 없다는 데에 기인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잘 안다고 전제한다는 데에 있다. 기독교의 모든 가르침이 구원과 연결되어 있긴 하지만, 또한 교회 생활에서 늘 구원에 대해서 익숙하게 듣고 있지만 정작 구원이 무엇인지 설명하라고 하면 주저하게 된다. 물론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몇 가지 정답이 있긴 하지만, 그런 것들은 그저 우리가 세례 받을 때 교리문답 공부를 통해서 얻어들은 정보에 불과하지 우리의 삶을 실제로 규정해나가는 근본이 되지 못한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만약 죽어서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 구원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말이 옳다고 하더라도 일단 하늘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제가 되어야 한다. 또한 서로 사랑하는 세계가 되면 그것이 곧 구원의 세계라고 한다면, 인간은 근본적으로 사랑의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며, 구원의 세계가 사랑에 관한 어떤 관념으로만 구성되어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랑의 실천이라 할 휴머니즘만으로 실현될 수 없다는 사실도 고려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휴머니즘이라는 것도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 늘 가변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론에서 이런 문제들을 줄기차게 붙들고 있어야 한다.
우선 우리가 구원을 문제 삼는 것은 오늘 우리의 삶이 어딘가 부족한 게 있다는 걸 전제한다. 만약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이런 삶의 형식들이 완전하고, 완전히 만족스럽다면 우리는 구원이니 뭐니 하면서 말할 필요가 하나도 없다. 우리의 작은 일상에서부터 이런 불만과 불안은 아주 분명한 자리를 잡고 있다. 아주 간단하게, 배고프거나 아프다는 사실은 우리의 이런 상황을 말해준다. 이런 차원에서는 무엇을 먹거나 병이 치료되는 것이 곧 구원의 경험이 된다. 그런데 이런 의식주 문제가 해결되고, 더 나아가 많은 취미와 오락생활이 보장된다고 해도 인간은 여전히 불안하다. 왜냐하면 우리의 이런 삶 자체가 어떤 절대적인 생명을 보장해주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고대사회*에 비해 엄청나게 풍요로운 복지를 구가하고 있는 현대인들이 정신적인 차원과 영적인 차원에서 훨씬 불안할지 모른다는 것은 인간이 생산해내는 삶의 조건들이 구원의 절대적인 요소가 아니라는 사실의 반증이다. 종교라는 구체적인 체계 안에 들어와 있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해도 자기의 모든 행위를 이런 구원론적인 지평에서 확대해 나가기 마련이다. 조금 더 많이 배우고, 조금 더 많이 벌고, 조금 더 아름다운 외모와 건강을 갖고, 자식들이 잘되기는 바라는 모든 노력은 자기를 구원하려는 인간의 일반적인 태도라 할 수 있다.

*고대사회가 오늘 우리보다 행복했는지 아닌지 지금 우리의 잣대로 재단하기는 쉽지 않지만 간접적으로 양쪽의 삶을 비교해볼 수는 있다. <오래된 미래>(녹평 출판)는 티베트의 오지 마을 ‘라다크’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을 한 서양 언어학자의 눈으로 서술한 책이다.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은 현대 문명과 거의 담을 쌓은 채 수천 년 동안 내려오던 삶의 형식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고산지대에서 사느니만큼 밭농사도 크지 않고 약간의 목축을 하면서, 티베트 불교 생활을 하면서 전반적으로 가난하게 살고 있었다. 오늘 문명인들의 눈으로는 그들의 삶이 자칫 불편한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오히려 그들은 참된 평화와 만족을 누리고 있었다. 지금 우리 문명사회에서 사는 사람이 받고 있는 의료혜택이나 온갖 종류의 엔터테인먼트 없이 살아가지만 그런 요소들이 그들을 근본적으로 불행하게 만들지는 않았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는 타종교와의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적인 행태와 구원론적인 경쟁을 펼쳐나간다. 예컨대 오늘의 의료행위가 인간들에게 나름대로 구원의 현실들을 제공해주고 있으며, 급기야 유전자 공학에서는 인간의 운명까지 자신들이 좌지우지 할 수 있다고 선전한다. 만약 이런 유전공학이 현실화된다면 많은 신앙인들이 하나님보다는 이런 유전공학에 자신의 미래를 맡기려 들 것이다. 복지사회를 꿈꾸는 수많은 혁명가와 활동가들은 정의와 평화가 온전히 지배하는 유토피아를 사람들에게 제시하려고 애를 쓴다. 월드컵 때 광장에 모인 수백만의 사람들이 열광의 도가니에 들어가서 자기 초월의 경험을 한 그런 현상에서, 또는 심지어 도박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간의 행위는 근본적으로 자기를 초월하려는 노력이며, 이런 점에서 구원론적이다. 이런 삶의 현장 속에서 기독교는 무슨 구원을 제시할 수 있는가?

구원파?
기독교의 구원론이 다른 종교, 또는 세속의 질서나 이념에서 언급되는 구원론과 경쟁에 나서기 위해서는 우리의 것에 관한 신학적 성찰을 치열하게 이끌어나가야 한다. 과연 우리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뛰어넘는 사건인가? 우리의 노력으로 가능한 어떤 세계인가? 구원은 이 지구의 생태보존에 있는가, 아니면 4차원의 세계인가? 멀지 않은 미래에 지구의 빙하기가 도래한다면, 우리는 무슨 구원을 선포해야 하는 것일까? 그런데 우리 기독교인들은 구원의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이미 결정된 어떤 것쯤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 “구원받으셨나요?”라는 말에는 구원이 흡사 콘서트의 입장권을 소유한 듯이, 더 심하게는 복권에 당첨되거나, 또는 보험에 가입한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죽 했으면 한국교회에 ‘구원파’가 등장했겠는가? 이 구원파는 하나의 이단에 머무는 게 아니라 한국의 정통 교회 안에서 대단히 광범위하게 내재해 있는 신앙 현상이기 때문에 한번 짚어보도록 하자.  
소위 ‘구원파’의 특징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구원받은 순간을 정확하게 기억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기성 기독교인들을 향해서 “언제 구원받으셨습니까?”하고 따지고 든다. 구원받았는가 하는 질문도 우리를 힘들게 만드는데, 더구나 정확하게 ‘언제’냐 하는 질문 앞에서 당황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들은 성서의 몇 대목을 끌어들여서 구원의 일시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주입시켰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성서를 적용하기 시작하면 사실 끝이 없다. 여호와의 증인들도 툭 하면 성서를 펼치고 자기들의 구미에 맞는 성구*를 끌어내는 데 일가견이 있다. 기독교 계통의 모든 사이비 종파들은 대게 이런 식이다. 심지어는 몰몬교도 그렇고, 통일교도 그렇다. 모르긴 해도 JMS의 정명식도 그렇지 않았을까? 그들이 왜 그럴까? 이미 그들에게는 기독교 신앙이 결정된 그 무엇일 뿐이다. 기독교 신앙은 텍스트의 깊이로 들어가는 것과 아무런 상관없이 이미 완료한 어떤 사건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그들은 그것을 그럴듯하게 전달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결국 그들에게 설교는 해석학이 아니라 일종의 수사학으로 떨어져 버린다. 감동스러운 간증, 예화, 도덕성 등으로 무장된 수사학이 한국교회의 설교에 범람하고 있다는 것은 성서 텍스트가 해석되지 않고 세뇌되고 있다는 의미이다. 이런 점에서 정통 기독교도 역시 구원파나 여호와의 증인들이 채택하고 있는 방법론에 안주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말은 곧 정통 교회도 역시 늘 사이비 이단 종파로 빠질 가능성에 노출되었다는 뜻이다.

*약간 옆으로 나가는 이야기이지만, 신구약 66권을 이런 식으로 적용시키기 시작하면 거의 모든 가설이 가능하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성구를 충분한 해석학적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단순히 자기주장의 확증 자료로 삼는 일을 삼가야 한다. 예컨대 거실이나 사업장에 자주 내걸려 있는“네 시작은 미약했으나 나중은 창대하리라”는 성구는 욥의 친구가 욥을 책망하기 위해 내뱉은 말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 말이 흡사 하나님이 하신 것처럼, 아니면 믿음이 좋은 사람이 한 말처럼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현상은 대중 설교자들에게서, 특히 설교를 잘 한다고 이름이 설교 명망가들에게서 자주 나타나는 것인데, 성서 66권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면서 많은 성구를 끌어들이는 것이다. 성서의 정보에 약한 평신도들은 설교자가 성경구절을 인용하니까 옳은가 하고 생각하겠지만 이런 설교 태도는 매우 위험하다. 이들은 무슨 본문으로 설교를 한다고 하더라도 결론은 대개 정해져 있다. 자신의 신앙체험을 절대화한 다음에 그것을 강화하기 위해서 성서를 인용할 뿐이다. 요한복음을 설교하면서 창세기의 아브라함 이야기, 다윗 이야기, 로마서 등등을 인용하면서 자기의 신앙을 변증한다. 이런 설교의 위험성은 성서 텍스트를 나열한 뿐이지 깊이로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구원파의 또 하나의 다른 특징은 죄론의 관념화다. 그들이 주장하는 구원의 확신이 강하면 강할수록 죄의 실체는 훨씬 빠르게 사라진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구원받은 사람은 이미 구원이 결정되었기 때문에 무슨 죄를 지었어도 구원에서 제외되지 않는다고 한다. 구원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죄라고 한다면 그 죄의 실체는 없는 것이다. 물론 그들이 죄를 지어도 된다는 뜻으로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구원을 결정론적인 차원에서 접근하다가 이런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이들에게 문제는 구원의 본질에 대한 해명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단지 구원을 받았다는 사건에만 모든 것을 쏟았다는 데에 있다. 이런 문제는 정통 교회에도 없지 않다. 다만 구원파처럼 극단적으로 나가지 않았을 뿐이지 인간의 종교적 반응에 치중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런 점에서 성서가 교회에서 구원의 지평을 열러가는 계시로 해석되는 게 아니라 단지 소비되고 있을 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구원을 말하기는 하되 너무 자신감 넘치게 선포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우리가 구원을 적극적으로가 아니라 소극적으로 말해야 하는 이유는 성서 자체가 구원을 매우 다르게 보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국제 정치적인 사건이 구원일 수도 있고, 어떤 때는 불치병이 치료되는 것일 수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도덕적으로 변화하는 사건일 수도 있고, 또는 우주론적인 사건이기도 하다. 더구나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구원이 임하기도 하지만 그것과 전혀 상관없이 구원이 무조건적으로 임하기도 한다. 물론 이런 다양한 구원 사건 안에서 공통되는 부분은 하나님과 예수, 더 정확하게 말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곧 구원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아직 하나님을 잘 모른다는 데에 있다. 만약 기독교의 구원을 이미 완료된 그 어떤 것으로 간주하고 그것을 적당하게 포장해서 전달하는 것만으로 모든 신학과 설교와 선교의 목표를 삼는다면, 그래서 청중들의 열광적 반응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이것은 결국 사이비 소종파의 행태와 다를 게 하나도 없다.

구원은 소유인가, 존재인가?
그렇게 버젓이 구원파 행세를 하는 집단만이 아니라 위에서 한 마디 지적한 것처럼 정통교회도 역시 그 내면에는 구원파 유의 구원 인식이 보편화한 상태이다. 그러다 보니 구원문제가 배타적인 관점에서 작용하게 된다. 예수 당시에 바리새인들이 죄인과 의인을 구분하듯이 구원받은 사람과 못 받은 사람으로 구분된다. 이런 배타적 구원론은 구원이 소유의 대상으로 인식된다는 것인데, 구원의 개념을 좀 더 명확하게 정리하기 위해서 “구원은 소유인가, 존재인가?”라는 질문을 생각해보자.
기독교적 구원의 본질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한 첫걸음으로서 일단 그것의 존재론적인 성격을 파악하는 게 좋을 듯싶다. 이렇게 질문해보자. 사랑을 소유할 수 있을까? 혹은 나만 사랑할 줄 알고 남은 사랑할 줄 모르나? 사랑은 우리가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어떤 대상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능력으로 우리 인간을 통치하는 존재 자체다. 이 세상에 어느 누구도 사랑을 소유하거나, 더더구나 독점할 수 없다. 구원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리에게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서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이, 그래서 그 나라에 참여하는 것이 구원이라고 한다면 아무도 그것을 소유할 수 있는 대상으로 여길 수 없다. 이처럼 구원은 우리 인간에 의해서 좌지우지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불러일으키는 생명 사건이기 때문에 우리는 단지 그 세계를 향해서 마음을 돌릴 뿐이지 소유하는 게 아니다.
기독교의 구원이 소유의 차원에서 규정되는 이유는, 또한 현대인들이 모든 것을 소유의 문제로 생각하게 된 이유는 서양사상사의 구도에서 볼 때 이 세상을 지나치게 주관과 객관의 대립으로 여기게 되었다는 데에 있다. 반드시 그 사람에게만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코기토 에르고 숨”(나는 생각하므로 존재한다)는 명구를 남긴 데카르트 이후로 서양 사상은 주관적으로 사유하는 인간에게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사유하는 주체로서의 ‘나’가 강조됨으로써 한편으로는 정치적, 종교적 억압으로부터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이 부각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타인과 자연을 철저하게 대상화함으로써 결국 주관과 객관의 대립관계에 빠져들게 되었다. 이런 대립적인 관계로 인해서 인간은 자연을 소유하고 정복하고 이용할 대상으로 여기게 되었다. 이것이 곧 모더니즘의 근본적 성격인데, 어찌된 일인지 신앙의 세계까지 지배하고 말았다. 즉 구원을 소유의 대상으로 여기게 되었다는 말이다.
구원을 소유의 차원에서 생각하게 되는 경우에 몇 가지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첫째는 경쟁구도이다. 백화점에서 한정된 숫자의 물건을 특별 할인 판매하는 경우에 고객들은 체면이고 뭐고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 오직 남보다 앞줄에 서려고 기를 쓰는 것처럼 기독교의 구원도 자칫하면 남보다 앞서야 한다는 인간의 욕망으로 인해서 그 본질이 훼손될 가능성이 있다. 둘째는 그것을 획득하기 위해서 지불되어야 할 인간 업적에 대한 강조이다. 상품을 획득하려면 돈을 지불해야하듯이 구원을 받으려면 무언가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생각이 소유지향적 구원론*에 개입될 수 있다. 물론 겉으로는 값없이 은혜로 구원을 얻었다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는 어떤 종교적 대가를 지불해야한다는 의식이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다. 셋째는 구원 사건의 수행(修行) 성격이 약화된다. 일단 돈을 주고 고급 승용차를 구매한 다음에는 이미 자기 소유가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기독교인이 구원을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구원(진리)의 세계를 향한 치열한 자기정진은 불필요하고, 단지 종교형식에만 매달릴 가능성이 있다. 본질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게 되고 비본질에만 정성을 쏟는다는 말이다. 흡사 사이비 음악가가 음악 자체에 대한 관심은 버려두고, 단지 자기 음악을 상품으로 만드는 일에만 마음을 두듯이 말이다.

*한국교회의 소유지향적 구원론은 이 땅에서 행하는 신앙의 태도를 규정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최후의 심판’까지 규정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땅에서 행한 결과에 따라서 하늘나라에서 받는 상급이 다르다고 주장한다. 황금면류관을 받는 사람도 있고 개털 모자를 받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급기야 ‘부끄러운 구원’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우리는 죽음 이후의 문제까지 소유의 차원에서 규정하고 있는 셈이다. 구원은 단지 구원일 뿐이지 넉넉한 구원과 부끄러운 구원이 나뉠 수 없다. 왜냐하면 구원의 세계는 단지 구원받는가, 아니면 배제되는가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구원 내부에서 또 다른 차등이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하늘나라에 가서 다른 사람보다 나은 상을 받겠다는 생각을 했다면 그는 이미 구원이나 하늘나라와는 상관이 없는 사람일지 모른다.

구원을 소유가 아니라 존재의 차원에서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은 이제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이는가 하는 문제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오직 하나님에게만 마음을 두고 살아갈 수 있다. 교회 공동체도 역시 서로 간에 공연한 경쟁심으로 마음의 상처를 받지 않게 된다. 가장 좋은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다른 것은 기꺼이 포기하고 그것 자체에만 마음을 집중시킬 수 있듯이 말이다(마13:44-46).

구원의 지평에 관한 질문
기독교는 자신의 구원론이 이 세상의 다른 구원론적 행태과 비교해서 어떤 점에서 우월하며 절대적인지 변증해야 할 책임이 있다. 이 변증은 두 가지 방향에서 전개되어야 한다. 하나는 기독교적인 구원론의 신학적인 토대를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것이 삶의 현실에서 일종의 능력으로 증거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학적인 토대가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해서는 여기서 일일이 거론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한국교회의 신앙이 단지 사람들의 열광적 반응에만 초점을 맞추고 이런 신학적 근거를 소홀히 했기 때문에 사이비 이단들이 발호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는 게 아니라 그 능력에 있다고 말하듯이 구원은 이 땅에서 살아가야 할 사람들의 삶에 일종의 능력으로 현실화해야 하는데, 그것이 곧 구원의 징표이다. 과연 오늘 우리에게 이런 구원의 능력이 얼마나 실제적으로 확증되고 있는 줄기차게 물어야 한다.
구원론의 신학적 토대와 그것의 현실화는 구분할 수는 있지만 이원론적으로 분리될 수 있는 관계는 아니다. 만약 신학적 이론이 정당하다고 하다면 그것은 당연히 삶의 능력으로 드러나게 하는 영성과 직결되어 있으며, 삶의 능력이 정당하다고 하다면 그것은 당연히 신학적으로도 합리성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다르게 표현한다면 신학적 토대는 이론이고, 삶의 능력은 실천인데, 사실 기독교 구원의 이론과 실천은 근본적으로 ‘영성’이라는 하나의 현실과 묶여 있기 때문에 분리할 수 없다.

“예수 믿고 구원받는다.”는 명제로 요약된 기독교의 구원론에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우리는 최소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지평의 질문을 던져야만 한다.  
1) 구원은 현재적인가, 미래적인가? 우리는 죽어서 하늘나라에 가는 것을 궁극적인 구원이라고 말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구원이 단지 미래적인 속성만 있는 건 아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는 예수의 선포를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구원은 현재적 사건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현재 우리의 삶은 아무리 예수를 믿고 구원받았다고 하더라도 구원의 현실과는 거리가 있다. 이에 대한 결정된 답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신학적으로, 신앙생활 안에서 이러한 긴장을 유지하면서 구원의 심층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2) 구원은 세계 내재적인가, 초월적인가? 만약 우리가 죽은 다음에 하늘나라에 가는 것을 구원이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철저하게 초월적인 사건이지만, 오늘 우리의 삶에 현실화한 것을 구원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내재적인 사건이다. 만약 구원의 초월적 성격만 강조한다면 이 땅에서의 삶은 무의미하게 되며, 그렇다고 해서 내재적 성격만 강조하면 이 땅에서의 삶이 절대화한다.  
3) 구원은 죽음 이후와 연속적인 사건인가, 불연속적인 사건인가? 많은 기독교인들이 하늘나라에 간 다음에도 형제들을 알아볼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이런 생김새와 성격이 그대로 유지되기 때문에 알아본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우리가 예수의 부활이 영원한 생명이라고 한다면 이 땅에서의 생명과 전혀 다른 생명으로 변화되는 것을 구원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사이에 어떤 연속성이 있는지, 아니면 완전히 단절되는 것인지 아직 완전한 답을 우리는 갖고 있지 않다.
4) 구원은 하나님의 배타적 행위인가, 인간과의 협동적 사건인가? 이런 질문은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 이래 2천년 기독교 신학의 역사에서 계속되어온 논쟁이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구원을 하나님의 배타적 행위로 생각한다. 다만 이 구원 사건에서 우리가 인형처럼 완전히 수동적인 입장에 있는 것인지, 아니면 어느 정도 의지와 결단을 통해서 그의 부르심에 응답하는지에 대해서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역사적 예수와 케리그마의 그리스도
기독교의 구원에 대한 질문은 곧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질문과 동일하다는 점과 구약성서를 함께 경전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기독교와 유대교가 예수를 다르게 판단하는 이유가 구원을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 강의 말머리에서 지적했다. 결국 기독교가 유대교를 비롯해서 여러 종교들, 더 나아가서 이 세속의 사이비 구원론과 정당하게, 그리고 진리론적 차원에서 경쟁하려면 우리의 구원론을 보편적 지평에서 해석하고 변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도 언급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그런 관점을 배경에 놓고 우리가 메시아로 고백하는 예수에 관한 우리의 독특한 신앙고백을 해명해야 할 단계에 도달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구원은 곧 예수의 운명, 그의 삶, 그의 사건에 직결되기 때문이다. 예수가 누구인가 하는 질문은 곧 역사적 예수와 케리그마의 그리스도가 어떤 관계인에 관한 해명이기도 하다. 이것은 곧 역사적인 예수가 바로 그 역사적 한계를 뛰어넘는 ‘그리스도’ 메시아라는 우리의 믿음에 어떤 정당성이 있는가 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바로 이 사실, 즉 역사적 예수와 케리그마의 그리스도 사이의 관계를 이 세계가 동의할 수 있도록 이론적 체계를 세우는 게 바로 신학이라는 점에서 이 문제는 단지 조직신학의 한 부분으로서만이 아니라 기독교 전체의 운명이 달린 주제라 할 수 있다. 우선 역사적 예수와 케리그마의 그리스도 개념을 살펴보자.

1) 역사적 예수: 복음서가 예수를 지칭할 때 그의 출신지인 ‘나사렛’을 앞에 붙여 ‘나사렛 예수’라고 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즉 예수는 역사를 초월해서 갑자기 나타난 존재가 아니라 구체적인 역사 안에 등장한 존재라는 의미가 거기에 담겨 있다. 출생지는 베들레헴이지만 줄곧 나사렛에서 성장한 예수는 목수 요셉의 아들로 알려져 있었다. 우리와 똑같이 역사적 한계 안에서 살다가 끝내 십자가에 처형당했다. 과연 역사적 예수는 누구인가? 그가 무엇을 가르치고, 무슨 일을 했나? 그의 삶 전체를 끌어가던 동력인 하나님의 나라는 과연 무엇인가? 그는 뛰어난 유대 랍비였는가, 세례 요한의 뒤를 이은 예언자였는가, 민중 해방을 외친 혁명가였는가, 경건한 수도승이었는가? 어떤 사람에게는 예수를 역사적(인간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경솔한 행동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예수가 참된 인간이었다는 사실은 이미 신약성서와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확실하게 지켜내려고 했던 요소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한다.
복음서와 사도신경이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언급하는 이유는 예수의 육체적 사실성에 대한 강조였다. 예수는 하늘에서 떨어진 인물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이 여자의 몸을 통해서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사실의 강조라는 말이다. 교부 시대에 예수의 인간성을 부정하고 신성만을 강조한 가현설(docetism)이 이단으로 단죄되었다는 사실에서도 우리는 교회가 예수의 인간성을 지켜내기 위해서 절치부심했다는 역사적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현대신학에서는 주로 해방신학이나 민중신학 계열의 학자들이 ‘역사적 예수’를 중요하게 취급하고 있다. 그들은 소위 ‘예수 세미나’를 통해서 예수가 당시에 소외된 계층의 해방을 위해 투쟁했다는 사실을 증명해내려고 노력한다. 이런 접근이 전혀 무의미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슈바이처 박사가 <역사적 예수 연구>에서 이미 밝혔듯이 우리가 성서에서 ‘역사적 예수’를 완전하게 복원한다는 것 자체도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어느 정도 밝혀진다고 하더라도 예수가 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역사혁명나 복지향상에 종속될 수 없다는 점에서 이들의 노력은 근본적인 한계를 안고 있는 셈이다. 우리가 ‘역사적 예수’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는 역사를 혁명으로 이끌기 위한 게 아니라 예수 운명과 사건의 역사적 확실성에 토대를 놓기 위한 것이다.    
2) 케리그마의 그리스도: 나사렛 출신의 예수는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존재이지만 역사 안에 한정되지 않고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 의해서 ‘그리스도’로 고백되었다. 이렇게 고백된 예수를 가리켜 우리는 ‘케리그마의 그리스도’라고 일컫는다. 이 말은 곧 예수에 의해서 선포된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그것을 선포한 예수와 동일시되었다는 뜻이다. 구원을 선포한 사람이 바로 구원의 주체가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객관적으로 증명하기는 쉽지 않다. 그를 통해서 환자가 치료되고, 소외되었던 사람들이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죄를 회개하고, 평화를 발견했다고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그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이 증명되는 건 결코 아니다. 더군다나 이런 문제는 증명으로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물론 초기 공동체의 부활경험이 이런 사태의 핵심 역할을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확연한 증거는 될 수 없다.
여기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집단이 바로 사도들과 원시 기독교 공동체의 신앙경험과 그 고백이다. 예수의 공생애에 함께 했던 사람들, 예수의 부활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예수는 단지 역사적인 인물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로 고백되었다. 과연 그들의 인식에 어떤 충격이, 어떤 변화가 있었기에 우리와 동일한 인격체였던 나사렛 출신의 예수를 그리스도,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게 되었을까? 우리는 여기서 그 질문에 대답하려는 건 아니다. 예수를 단지 사람으로만 한정하지 않고 하나님으로 인식하고 고백한 초기 기독교의 신앙이 바로 우리에게도 유효하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으로 만족하자.
그런데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한다는 게 그렇게 간단한 건 아니다. 어떻게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는가? 특히 지성적인 사람들에게는 기독교의 이런 주장이 받아들여지기 어렵다. 이미 교부시대에도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고 인성만 인정하는 ‘에비온주의자들’이 있었다. 그렇지만 교부들은 예수의 인성을 부정하는 가현설을 이단으로 단죄했듯이, 에비온주의자들도 이단으로 척결하고 예수를 “참된 신, 참된 인간”(vere Deus, vere homo)으로 규정했다. 이런 고백에 이르기까지 신학적 논쟁의 긴 역사가 있었다는 건 “예수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었다는 사실과 더불어 진리의 역사는 이렇게 논쟁의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해보자. 역사적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했지만 공동체는 그를 그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와 동일시하게 되었다. 즉 그는 그리스도의 통치를 선포했는데, 결과적으로 그가 바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것이다.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을까? 이제 우리는 예수가 자신을 그리스도로 인식했는지, 그런 인식이 있었다면 언제인지, 아니면 자기의 인식은 없었지만 공동체에 의해서 그렇게 고백된 것뿐이지 ‘묵상’의 방식으로 검토해보자.  

예수의 메시아 인식
필자는 여기서 어떤 답을 전제하고 이 주제를 신학적으로 묵상하려고 하지 않는다. 거의 전적으로 교회생활에 매달렸던 고등학생 때와 신학대학교에 다닐 때 가졌던 궁금증을 이제 30년이 지나서 다시 되새겨보려는 것뿐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언제 인식하셨을까?”
복음서를 찬찬히 살펴보면 예수 자신은 자신의 정체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언급한 적이 별로 없다. 이 말은 곧 간접적으로는 언급한 적이 있다는 뜻이다. 이에 대한 증빙은 거의 요한복음에 집중되어 있다. 그 이유는 공관복음서가 예수에 대한 사실적 보도에 기울어진 반면에 요한복음은 해석된 예수에 대한 변증에 초점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주제와 연결시켜서 이 관계를 다시 정리한다면 공관복음서는 예수에 대한 메시야 고백 이전의 보도인 반면에 요한복음은 그 고백 이후의 증언이다. 물론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을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구별하는 것은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개괄적인 면에서 보면 그렇다는 말이다. 요한복음은 시기적으로도 공관복음에 비해 훨씬 늦게 형성된 탓에 상당한 전승사를 통해서 소화된 초기 기독교의 신앙을 담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신앙은 곧 역사적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예수의 정체(identity)에 대한 증언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본문은 마태복음 16:13-20(막 8:27-30, 눅 9:18-21)이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는가에 대한 예수의 질문과 제자들의 대답이 오간 후에 베드로의 그 유명한 신앙고백이 등장한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16절). 베드로의 이 신앙고백을 들은 예수는 그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셨으며, 이 신앙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러나 예수는 이 본문에서 스스로 “나는 메시아이다”라고 말씀하지는 않으셨다. 판넨베르크의 설명에 따르면 마가 전승의 원형 상 예수가 이 메시야 칭호를 훨씬 단호하게 거절했을 것이라고 한다.(사도신경 해설, 79). 백번 양보한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의 말을 인정하는 방식으로 예수는 자기 자신의 정체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알리셨지 직접적으로 선포하지는 않으셨다.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그 많은 예수의 정체에 대한 증언도 거의 이런 형식으로 전개된다. 수가성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의 대화는 좀더 직접적인 형식을 취한다. 그 여인이 이렇게 말한다. “저는 그리스도라 하는 메시아가 오실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이 오시면 저희에게 모든 것을 다 알려 주시겠지요.”(요4:25). 그 즉시 예수는 이렇게 대답한다.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26절). 이 텍스트가 예수의 자기 해명에서 가장 직접적인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나는 그리스도이다”라는 명시적인 언급은 아니다. 한 여자의 표현을 빌려서 여전히 간접적으로 해명할 뿐이다. 마르다와의 대화에서 예수는 이렇게 말씀하신 적도 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 11:25,26). 물론 그 이외에서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는 양의 문이다, 등등의 언급이 예수의 자기 해명이라고 볼 수 있다. 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자신을 아들로 표현한 적도 여러 번 있다. 그러나 이런 구절들은 한결같이 간접적이라는 특징을 보인다. 왜 그럴까?
그 이유를 두 가지로 좁혀 생각해보자. 우선 유대인들의 메시아 상(像)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예수는 자기 메시아성(性)을 직접적으로 선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강력한 카리스마를 수반하는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메시아였다. 메시아로서 예수가 걸어간 길을 아무리 설명해준다고 하더라도 이해하지 못하는 그들에게 자기 자신의 정체를 직접적으로 드러낼 수는 없다. 단지 간접적으로 그런 메시아의 징표들을 보여주고 증언할 수 있을 뿐이다.
또 다른 이유는 예수의 메시아 인식에 관계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불경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예수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의 메시아성에 대해서 질문하고 있었지 않았느냐는 말이다. 예수는 십자가를 져야할 마지막 순간에도 가능한 대로 그 잔을 받지 않기를 바랐으며, 십자가에 달리시면서 “왜 나를 버리시는가!”라고 외치셨다는 복음서 기자들의 증언을 미루어보면 그런 개연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 또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그에게 기도를 드렸다는 사실을 놓고 볼 때 예수는 하나님을 대상으로 여긴 게 틀림없다.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했을 뿐인데, 초기 기독교는 그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를 동일시하게 되었다. 선포의 대상이 선포하는 자와 일치를 이룬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의 메시아 인식이 불분명했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다만 그런 인식이 기계적인 차원에서 증명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우리가 사법고시에 합격하면 변호사나 판사가 될 수 있는 자격을 따는 것처럼 예수에게 메시아 자격이 그런 방식으로 주어진 것은 아니다. 예수의 어린 시절에 메시아 인식이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광야에서 금식 기도하면서 마귀에게 시험받던 그 시기에 메시아 인식이 이루어졌을까? 아니면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였을까? 아니면 십자가에 달릴 때까지 그런 인식이 완전하지 못했지만 부활 사건으로 인해서 그가 메시아였다는 사실일 확인된 것일까? 우리는 그것의 세밀한 내막을 알 수는 없다. 다만 역사적 예수가 바로 케리그마의 그리스도, 즉 메시아였다는 사실만을 알고 믿을 뿐이며, 따라서 그가 이 세상 끝날 다시 오실 분이라는 사실을 믿으며 기다릴 뿐이다.

예수의 칭호
예수라는 한 인격체 안에 인성과 신성이라는 두 본성이 구별되지만 혼합되지 않은 방식으로 완벽하게 결합되어 있다는 이 신앙고백적 사태를 인식하거나 해명하기 힘들다는 이유로 신앙의 중심 주제로 삼지 않거나, 다른 방식으로 처리하는 것은 별로 바람직하지 않다. 인식과 해명이 힘에 버겁기 때문에라도 우리는 여전히 그런 신학적 작업을 전개해 나가야 하며, 다른 방식의 처리는 이미 앞에서 지적한대로 기독교 초기 역사에서 이단으로 제거되었다. 인간이자 신이라 할 이 예수 그리스도, 즉 역사적 예수이며 케리그마의 그리스도라고 우리가 고백하는 그분을 해명하기 위해서 그에게 붙인 칭호를 검토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붙인 이런 호칭*에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이 밝혀질 수 있는 단서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약성서에는 예수의 칭호가 55개나 되고, 그 칭호의 기원과 의미를 상세하게 밝히는 작업은 간단한 게 아니어서 여기서는 대표적인 것만 몇 가지 개괄적으로 다루는 것으로 만족하자.  

*한(F. Hahn)은 예수의 호칭에 관한 최근의 연구 결과를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설명했다. 1) 팔레스틴의 원시 기독교에서 가장 오래된 기독론은 철저하게 종말론적인 성격이다. 앞으로 오게 될 인자, 재림한 주, 종말의 메시야는 전승의 초기에 자리 잡고 있다. 여기에는 높이들림의 신학적 동기는 거의 없는데, 여기서 재림지연의 문제는 주가 현존한다는 표상이 아니라 강한 기다림과 그 호소에 의해서 극복된다. 2) 헬레니즘적 유대기독교는 한편으로 높이들림의 표상에 토대를 놓았다가 다른 한편으로 점차 지상의 예수에게 메시야 표상이 옮겨간다. 즉 높이들림의 표상은 재림지연의 사실을 설명하려는,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열광적 종말기대를 수정하는 시도라는 것이다. 3) 헬레니즘적 이방기독교는 구약성서-유대교 전승의 영향을 벗어난다. 즉 인자, 다윗의 아들 표상이 완전히 사라지고, ‘그리스도’ 칭호는 거의 고유명사처럼 이해되는 반면에, ‘퀴리오스’와 ‘하나님의 아들’은 헬레니즘적 영향으로 재해석되고 전면에 나타난다. 퀴리오스는 지배적인 제의개념이 되며, 온 세상 위에 신적인 통치능력을 소유한 자를 찬양하는 데 적합하게 된다.(Christologische Hoheitstitel, 347 이하. 이신건, 조직신학입문 104에서 재인용.).

1) 그리스도(메시야): 신약성서에서 예수를 지칭할 때 가장 자주 쓰이는 용어인 그리스도라는 호칭은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의미의 히브리어 ‘메시야’의 헬라어 표기이다. 이 칭호는 고대 이스라엘에서 왕들에게 사용되었다. 그 이유는 왕들이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고 그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스라엘과 세계를 통치할 왕권을 평화와 정의로 실행할 자들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초기 기독교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불렀다는 것은 곧 이스라엘의 약속된 왕이 바로 역사적 예수와 동일하다는 의미이다. 판넨베르크는 이 부분을 이렇게 설명한다. “메시야 칭호는 하나님의 통치인 최후 심판을 위해서 재림할 예수가 미래에 갖게 될 기능의 특징을 가리켰다. 따라서 이 칭호는 부활한 주의 현재적 현실성과 관련되었다. 이 부활한 주는 비밀스러운 하나님의 시각에서 이미 현재 세상을 다스리는 분이다.”(사도신경해설, 80).  
2) 주(퀴리오스): ‘주’라는 단어는 구약성서를 헬라어로 번역할 때 경건한 유대인들이 직접 부르기 힘든 야훼라는 이름을 바꿔 부르기 위해서 사용된 것이라고 한다. 부활 이전의 예수는 단순히 의례적인 차원에서 ‘주’라고 호칭되다가 이런 습관이 결국 하나님의 이름을 바꿔 부른 ‘주’라는 단어 안으로 흡수되어서 예수를 지칭하는 말로 자리를 잡았다. 이 주라는 호칭의 개념은 초기 기독교에서 두 가지 관점에서 받아들여졌는데, 팔레스틴 초기 기독교에서는 예수가 다시 올 ‘주’라는 사실이 강조되었고, 헬라교회에서는 교회와 세상의 주라는 사실이 강조되었다. 어쨌든지 교회는 역사적 예수를 교회와 세계, 더 나아가 온 우주의 참된 주로 고백한 것인데, 이는 곧 그 이외의 것들을 상대화한다는 의미이다. 판넨베르크는 이 초기 기독교의 ‘주’ 개념을 이렇게 풀어서 설명하고 있다. “예수는 ‘우리의 주’라고 불렸는데, 이것은 초기 기독교 신앙에서 헬라 세계가 알고 있던 여러 종류의 ‘주’들과 관계된다. 한편으로는 헬라식으로 퀴리오스라는 칭호로 불린 로마의 카이저가 있었으며, 다른 한편으로 밀의종교에서 볼 수 있는 신적인 것들이 있있다. 그 모든 것들에 대립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참된 퀴리오스, 세계의 참된 주로서 선포되었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지배당해야만 했다. 따라서 특별히 교회의 선교적 사명은 ‘예수가 퀴리오스’라는 징표에 담겨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초기 기독교 이후로 주라는 칭호는 그리스도를 우주론적이고 보편적인 진리의 차원에서 선포해야 한다는 특징을 갖게 되었다.”(사도신경해설, 96).
3) 하나님의 아들(독생자): 원래 고대 근동과 로마 헬라, 그리고 이스라엘에서 왕은 하나님의 아들로 일컬어졌다. 만인지상이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던 사람에게 붙여진 호칭이 이제 기독교에 의해서 나사렛 예수에로 돌려졌다는 말은 위에서 언급한 ‘주’ 개념과 마찬가지로 이 세상의 모든 권위를 상대화한다는 의미라 하겠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된 다음의 기독교 역사에는 그의 출생에 관한 신화적 요소(동정녀 출생)가 개입하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이 예수의 초월성을 가리킨다고 생각하면 오해다. 물론 예수는 또 다른 차원에서 이 세상과 우리 인간을 초월하시는 분이지만 하나님과 같은 차원에서 우리를 초월하는 분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첫째, “예수는 아미 하나님에게서 그 권능을 위탁받았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도록 위탁받은 분이다”는 뜻이며, 둘째, 자신의 사명과 자신의 역사에서 표현된, 그리고 그에 의해서 선포된 하나님과의 관계를 해석해주고 있다.(판넨베르크 88).
4) 인자(사람의 아들): ‘인자’라는 표현은 유대교의 묵시문학에서 종종 등장하는 용어이다. 예컨대 다니엘서(7:13)는 인자를 가리켜 앞으로 오게 될 하나님의 나라에서 심판자와 구원자의 역할을 하는 자로 묘사하고 있다. 초기 기독교가 예수를 인자로 호칭했다는 말은 곧 예수가 자신의 활동과 고난과 운명을 통해서 이 세상을 심판했으며, 앞으로 심판할 분으로 인식했다는 뜻이다.

21세기의 그리스도론
21세기에 접어든 이 시점에서 한국의 기독교는 어떤 위기감 내지는 무력감에 사로잡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의식이 여러 가지 불안한 현상들을 생산해내고 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면 몇 가지 주변적 방식을 갱신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근본에 대해서 질문하고 답변하는 치열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오늘 우리가 공부한 그리스도론적인 면에서 생각한다면, 예수가 오늘 이 세계의 그리스도이심을 이 세계가 알아듣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 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 우리가 펼쳐나갈 수 있는 구체적인 작업은 다음과 같다.
1) 사이비 그리스도론을 적발해내야 한다.(초대교회가 그랬듯이).
사이비 그리스도론은 기독교계 안의 이단만을 뜻하는 게 아니라 세상의 절대 이념을 뜻한다. 예컨대 자본이 ‘주’가 되는 이 사회 시스템이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을 무효화시킨다. 우리의 한국교회가 이런 자본논리, 상품논리에서 벗어나 있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아마 세상은 기독교와 자본주의를 한 묶음으로 간주하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2) 기독교의 그리스도론을 보편적인 언어로 번역해내야 한다.(초대교회가 그랬듯이)
우리는 일반적으로 기독교 신앙을 작은 범주 안으로 축소시켜버렸다. 한편으로는 신앙 만능주의에, 다른 한편으로는 세계와 신앙의 이원론에 빠져버렸다. 만약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참된 진리라고 믿는다면 세계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와 삶의 내용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예수에 관한 질문을 모두 마치지 못했다. 역사적인 차원에서는 그의 공생애에 일어났던 사건들을, 즉 왕, 예언자, 제사장이라는 예수의 3대 사역에 관해서, 신앙적인 차원에서 그의 동정녀 탄생과 재림과 최후의 심판에 관해서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 더 결정적으로는 다음 장에서 다루게 될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다.
이런 문제를 우리가 선배 신학자들의 가르침에 따라 충분하게 소화한다고 하더라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완전히 인식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 이유는 기독론이 단지 예수 그리스도에 한정되는 게 아니라 삼위일체의 구도로 심화하고 확대되어야하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예수를 단지 우리의 메시야라는 단순 명제로만 접근한다면 열광주의적 소종파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예수 사건이 이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과 어떻게 연관되는지, 도한 현재 역사를 떠난 그 예수가 이 역사를 영적으로 추동해가고 있는 성령과 어떻게 연관되는지 충분하게 해명해야만 한다는 말이다. 결국 기독교의 구원론과 기독론은 창조론과 성령론과 종말론 같은 다른 교의학적 주제와 상호적으로 연관되어야만 실질적 진리의 지평을 담아낼 수 있을 것이다.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창조는 무엇인가, 성령은 무엇인가, 종말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다른 게 아니라는 말도 된다. 이런 점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신앙고백은 베드로와 초기 기독교, 그리고 지난 2천년 기독교 역사로 종결되는 게 아니라 역사가 지속하는 그 마지막까지 열려 있다고 보아야 한다.


[레벨:0]김이배

2005.12.01 00:12:36
*.87.108.80

참 좋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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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10장 인간학적 철학과 신학(교정, 5월27일) 2004-11-24 4188
44 10장 신학의 세계 지평 2004-11-23 3957
43 9장 헤겔철학과 신학(교정, 5월20일) 2004-11-17 4898
42 9장 언어의 세계와 신학의 세계, 11월18일 2004-11-16 4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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