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페미니즘과 영성

여성신학 조회 수 4271 추천 수 83 2005.04.11 13:42:43
7장
페미니즘과 영성
-그리스도교의 통전적 영성 회복을 위해서-

영성과 하나님 경험

한국교회를 노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신학무용론이 한국교회 자체를 위기로 몰아넣을 가능성이 높은데도 불구하고 목회자들은 그 문제를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우리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한국 교회에서 신학이 푸대접을 받는 이유는 목사들이 목회를 경영의 차원에서 생각함으로써 원칙과 본질보다는 현장의 쓰임새에만 신경을 쓴다는 이유도 있긴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현재의 신학이 별로 영적이지 못하다는 판단 때문이다. 여기에는 목회자와 신학자, 양쪽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
우선 신학자의 책임은 아주 명확하다. 그들은 신학을 일종의 학문적 이론으로만 생각하지 그런 이론 뒤에 있는, 또는 그 깊이에 있는 보다 본질적인 실질을 놓치고 있다. 그들의 신학에 리얼리티가 없다는 말이다. 예컨대 신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여러 학설들을 다양하게 설명할 수 있다. 가현설이나 에비온주의, 아다나시우스와 아리우스 논쟁 등을 중심으로 예수의 신성과 인성의 관계를 이론적으로 해명할 수 있다. 현대신학에서 이 기독론이 어떻게 확대 해석되었는지에 대해서 많은 주장들을 소개하고 자기의 의견을 제시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다. 그런 논의들이 드러내야 할 영적인 실체에 대해서는 아무런 인식이나 경험이 없다. 그러다 보니 결국 누가 어떻게 주장했다는 것만 논리적으로 설명할 뿐이지 예수 그리스도 사건이 드러내려는 그 세계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는 것이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사랑의 이론에 대해서는 많이 듣고 공부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나름대로 설명할 수는 있지만 사랑 자체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신학이론이나 체계는 아무리 장황하고 화려해도 정보에 불과하다. 신학은 이런 신학 정보를 많이 확보하는 것보다는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에 그 무게를 두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그 신학은 죽은 학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이 바로 그리스도교 영성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약간의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왜냐하면 이 말이 자칫 우리가 실제로 하나님을 감각적으로 경험할 수 있기나 한 것처럼 오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신구약성서에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 자주 진술되고 있지만 그것은 기본적으로 부분적이고 간접적인 현상이다. 성서는 하나님을 본 사람은 죽는다고 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필자가 여기서 기독교 영성을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이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선 낭만주의 철학과의 대화를 통해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토대를 형이상학이나 도덕이 아니라 (절대의존) 감정으로 이동시킨 쉴라이에르마허의 생각을 잠시 살펴보자. 그는 두 철학자에게서 영향을 받았다는 첫 번째 인물은 셸링이다. 셸링의 동일철학(Identitätsphilosophie)은 넓은 의미에서 주관과 객관, 정신과 물체가 서로 독립적으로 대립하고 있지만 사실은 이들 양자는 그들에게 공통의 본질인 절대적 동일자의 두 현상형식, 속성, 또는 양태에 지나지 않는다는 학설이다. 두 번째 인물은 야코비(Fr. H. Jacobi, 1743-1819)였다. 야코비는 이성에 대한 감정의 우위를 인정하고 합리론에 반대하여 신앙철학, 감정철학을 주장함으로써 칸트철학을 반대하는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참된 지식은 직접지(知), 즉 감정 신앙뿐이라고 주장한다. 야코비의 이런 생각이 쉴라이에르마허의 <종교에 대해서 -종교를 경멸하는 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지성인들을 향한 강연>(Über die Religion. Reden an die Gebildeten unter ihren Verächtern, 1799)의 토대가 되었다. 이들의 사유에서 키워드라 할 수 있는 직접지를 비유적으로 설명해보자. 사람들은 물맛이 어떤지 하고 물어본다면 사람의 숫자만큼이나 다양한 설명이 쏟아질 것이다. 밋밋하다거나, 달콤하다거나, 혹은 쓰다거나 시원하다는 말도 나올 것이다. 어디 그것만이겠는가? 짜게 느낄 수도 있고, 심지어는 아무 맛도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이렇게 다양한 대답이 나오는 이유는 일단 물이 종류에 따라서 약간씩 다르다는 사실과 물을 마시는 순간의 상황이 다르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문제는 물맛에 대한 설명이 물 자체를 가기키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물맛이라고 설명했지만 그것은 그 사람의 주관적인 판단에 불과하지 실제로 물맛이 아닐 수도 있다. 이 말을 바꾸면, 물맛의 경험을 언어로 설명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물맛은 직접적인 것이지만 언어는 간접적인 것이기 때문에 언어로 물맛을 그대로 드러낼 수 없다는 말이다.
하나님 경험도 이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할 수는 있지만 그 하나님을 언어로 설명할 수는 없다. 물론 사람들은 그 하나님을 삼위일체라고, 또는 사랑이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그 설명이 곧 하나님 자체는 아니라는 말이다. 엄밀히 말해서 성서는 하나님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 경험에 대한 해명이다. 물맛에 대한 글만 읽고 물맛을 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성서텍스트만 알고서는 결코 하나님을 경험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런데 여기서 그 하나님 경험이라는 게 무엇일까? 이 질문이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본질적인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흡사 물맛 경험처럼 단 하나의 경험으로만 결정되는 게 아니다. 물이 어떤 사람에게는 시원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달콤하게 경험되듯이 하나님도 어떤 사람에게는 거룩한 두려움으로, 어떤 사람에게는 사랑으로, 어떤 사람에는 절대의존감정으로, 어떤 사람에게는 궁극적인 관심으로 경험된다. 그렇다면 결국 하나님 경험은 주관적인 경험에 불과한 거 아닌가, 하는 반론이 가능할 것이다. 그렇지는 않다. 경험은 분명히 주관적이지만 단지 우리의 심리나 감정에 묶여 있는 게 아니라 훨씬 근원적인 것에 의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런 문제는 조직신학이나 성서신학처럼 철저하게 이론적인 분과에만이 아니라 윤리학이나 실천신학처럼 실천적인 분과에도 역시 똑같이 적용된다. 즉 기독교 윤리학은 사회봉사를 강조하기 때문에 건강하다거나, 실천신학은 기도를 많이 하게 하기 때문에 건강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이것은 사실상 그런 사회봉사나 기도와 같은 교회생활 자체가 경우에 따라서 인간의 욕망일 가능성이 늘 있다는 인간학적 차원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런 실천적 분과에서도 역시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실제로 경험할 수 있게 하는가, 어떻게 하나님의 세계와 그 나라에 대한 경험이 일어날 수 있는가,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어떻게 생명에 대한 깊은 체험이 가능한가 하는 점이다. 이것이 곧 영성이다. 이런 점에서 신학은 기본적으로 영성을 기초로 한다. 이런 영적 체험이 반드시 어떤 실천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런 생명의 힘으로 이 세계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에게 자기를 맡기는 자세가 필요하다. 결국 인간이 핵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분의 영이 핵심이라는 말이 된다. 그런데 많은 신학자들이 신학을 단지 정보로서만 생각함으로써 결국 이런 하나님과 그 영을 놓치고 그저 인간 인식이나 실천에만 머물러 있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다른 한편으로 목회자들은 영성을 어떤 주술적 현상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이 세상의 모든 합리적인 인식론을 무시하고 비이성적인 방식으로 어떤 초월적인 세계에 이르게 하는 힘을 영성이라고 본다. 교회 안에서는 영적이라는 말과 비이성적이라는 말이 거의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서 영적인 사람은 가정 일이나 사회생활을 가능한대로 축소하고 오직 기도와 찬송만 한다거나 신자들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기도해주는 이들로 간주된다. 이런 사람들은 툭하면 기도해 보니까 그게 아니더라, 심지어는 어느 누구에게 귀신이 붙어있는 게 보인다고 까지 주장한다. 만약 교회가 이런 상태를 영적이라고 생각한다면 기독교의 영은 진리가 될 수 없다. 참으로 영적인 사람은 옳고 그름을 가장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영성의 토대는 바로 진리 자체이신 예수님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나우엔의 목소리를 들어보자.

성령과 악령을 분별하여 사람들의 영과 몸뿐만 아니라 그들의 모든 인간관계에도 활발한 변화가 일어나도록 사람들을 인도할 수 있는 영 분별자들이 더욱 절실히 필요합니다. 이런 분별의 은사는 성령의 은사 가운데 하나로 오직 끊임없는 기도와 묵상을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기도훈련을 통해 형성되고 다듬어진 사역자의 영적인 삶이야말로 영적 리더십의 핵심입니다. 우리가 비전을 잃을 때 아무것도 보여 줄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렸을 때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 삶의 청사진을 묻어버리면 아무것도 건축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안에서 생명을 주시는 성령과 계속 교제하고 있을 때 우리는 사람들을 사로잡힌 데서 불러낼 수 있으며 희망을 주는 안내가가 될 수 있습니다.  <헨리 나우엔,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 88>

위에서 언급한대로 오늘 한국 교회는 신학의 부재와 영성의 왜곡이라는 위기 가운데 빠져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위기를 절감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다. 가장 확실하고 결정적인 이유는 한국교회가 1990년대부터 양적인 면에서 성장하지 못하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교회의 물적인 토대가 비교적 튼튼하다는 데에 놓여 있다. 그러나 교회는 자기 자신을 근거로, 또는 목적으로 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 나라만을 지향하는 공동체이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의 영적인 통치가 교회 안에서 작동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가시적인 역량을 확보하고 있다 하더라도 위기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즉 우리는 교회의 내면적인 현상을 정확히 뚫어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오늘 우리는 교회의 신학 부재와 영성의 왜곡 문제를 ‘페미니즘과 영성’이라는 관점에서 검토하려고 한다. 여성신학자들의 고유한 영성 이해가 전통적인 입장과 어떤 차별성이 있는지를 고찰함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교 영성의 근본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여성신학자들의 성서 신학적 영성 이해로부터 이 문제를 풀어가도록 하자.

구약성서의 영 개념

구약성서의 인간 창조 설화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루아흐’를 불어넣자 생명을 얻게 되었다고 전한다. 바람, 영, 숨, 생기 등, 여러 의미로 해석되는 히브리어 루아흐는 구약성서 전체를 통해서 보면 히브리어로 378번, 아람어로 11번 등장한다. 이경숙에 따르면 구약성서에서 이 루아흐는 아래와 같이 세 가지 용법으로 쓰인다고 한다.(이하 “여성신학적 관점에서 본 구약성서의 ‘영’ 개념”, in: 영성과 여성신학, 참조)

1) 자연현상을 변화시키는 바람으로서의 루아흐
구약성서에가 가장 자주 사용된 루아흐의 의미는 바람인데, 이때의 루아흐는 하나님에게서 시작되는 생명의 힘으로써 자연을 변화시킨다. 다음과 같은 구절을 그 한 예이다. “모세가 곧 이집트 땅 위로 지팡이를 뻗치자 야훼께서 그 땅에 주야로 샛바람이 불게 하셨다. 아침이 되어 보니 샛바람이 메뚜기 떼를 물고 오는 것이었다.”(출 10:13). “야훼께서 바람을 일으키시어 바다 쪽에서 메추라기를 몰아다가 진지 이쪽과 저쪽으로 하루 길 될 만한 사이에 떨어뜨리시어 땅 위에 두 자 가량 쌓이게 되었다.”(민 11:31). “풀은 시들고 꽃은 진다, 스쳐 가는 야훼의 입김에. 백성이란 실로 풀과 같은 존재이다.”(사 40:7).
우리는 고대 이스라엘이 왜 바람을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생명의 숨결 같은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는지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그들 앞에서 벌어지는 생명 현상, 특별히 계절에 따라서 변화되는 나무와 풀의 모습을 보면 바람이 곧 생명의 힘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봄바람이 불면 꽃이 피고 잎이 나고, 가을바람이 불면 시들어버리는 자연현상에서 그들은 생명의 바람을 루아흐라고 불렀을 것이다.
2) 생명을 주는 숨으로서의 루아흐
구약성서에서 루아흐는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숨으로 일컬어졌다. 루아흐는 인간 속으로 들어와 생명력 혹은 생기를 주며 인간의 육체와 정신 모두를 살아 있게 하는 역할을 하는 영적인 힘이다. 몇 구절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그가 콧김을 마시고 입김을 들이쉬시면 만물은 일시에 숨이 멎고 사람은 티끌로 돌아가고 말 것입니다.”(욥 34:14,15). “하늘을 창조하여 펼치시고 땅을 밟아 늘리시고 온갖 싹이 돋게 하신 하느님, 그 위에 사는 백성에게 입김을 넣어 주시고 거기 움직이는 것들에게 숨결을 주시는 하느님 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사 42:5). 특히 에스겔 37장은 묵시문학적 상상력에 근거한 생명의 회복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야훼께서 나에게 또 말씀하셨다. ‘숨을 향해 내 말을 전하여라. 너 사람아, 숨을 향해 내 말을 전하여라. 주 야훼가 말한다. 숨아, 사방에서 불어 와서 이 죽은 자들을 스쳐 살아나게 하여라’. 나는 분부하신 대로 말씀을 전하였다. 숨이 불어왔다. 그러자 모두들 살아나 제 발로 일어서서 굉장히 큰 무리를 이루었다.”(9,10절). 이런 점에서 보면 루아흐는 ‘생명력’, ‘하나님의 힘’, ‘창조적 힘’을 제공하는데, 이 힘이 너무나 강해서 죽어 말라비틀어진 뼈들도 다시 살아나게 할 수 있을 정도라 할 수 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명의 숨결을 바람과 같은 단어인 루아흐라고 일컬었다는 사실은 자연의 생명을 이끌어가고 회복시키는 힘이 곧 인간 생명의 근원과 동일한 힘이라고 간주했다는 뜻이다. 인간이 살아있다는 것은 숨을 쉰다는 것이며, 거꾸로 숨을 멈춘다는 것은 곧 생명을 잃었다는 증거라고 할 때 자연현상에서 볼 수 있는 바람과 인간의 숨결을 동일시한 것은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
3) 특별한 능력을 주는 루아흐
구약성서에는 야훼로부터 루아흐를 받아서 특별한 능력을 행사한 인물들이 많이 등장한다. 예컨대 사사시대의 영웅들인 기드온, 입다, 삼손 같은 이들은 야훼로부터 루아흐를 받았으며, 모세, 엘리야, 엘리사 같은 이들의 카리스마도 역시 루아흐에 그 토대를 두고 있다. “야훼의 영이 그에게 내리자 그는 이스라엘의 판관이 되어 싸움터로 나갔다. 야훼께서 메소포타미아 왕 구산리사다임을 그의 손에 붙이셨으므로 그가 구산리사다임을 쳐 이겼다.”(삿 3:10). 이스라엘의 고대 예언현상도 야훼의 루아흐와 연관되며, 예언자들이 황홀경에 빠져서 예언하게 되는 것이 곧 루아흐를 받은 결과이다(민 11:25-29, 삼상 10:5-10). 특히 요엘 예언자는 미래에 일어나게 될 영적 현상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그런 다음에 나는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아들과 딸은 예언을 하리라. 늙은이들은 꿈을 꾸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리라. 그 날, 나는 남녀 종들에게도 나의 영을 부어주리라. 나는 하늘과 땅에서 징조를 보이리라. 피가 흐르고 불길이 일고 연기가 기둥처럼 솟고 해는 빛을 잃고 달은 피같이 붉어지리라.”(요엘 3:1-4, 개역성서: 2:28-31).
위에서 살펴본 대로 이경숙 교수는 구약성서에 묘사되어 있는 루아흐 개념을 세 가지로 정리하면서 결론적으로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구약성서의 루아흐는 언제나 움직이는 바람 같은 존재이다. 그런데 바람으로 파악되는 루아흐는 허무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를 실현시키는 능력의 존재이다. 자연현상을 움직여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실현하기도 하고, 또 피조물에게 생명을 주고 숨을 주어 피조 세계를 보존하고 유지하고, 또 인간들에게는 불가능한 것으로 보이는 것도 가능하게 하며 힘없고 약한 자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기도 한다. 그리고 루아흐는 인간에게 예언하는 능력, 전쟁에 승리할 능력, 지혜와 총명의 능력 등을 부어하는데, 이러한 특별한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자신의 부귀영화를 위해서 능력을 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 즉 구원의 의지를 역사 속에 실현시키는 직접적인 도구가 된다.(54)

신약성서의 영 개념

최영실 교수는 “신약 성서적 관점에서 본 영성과 여성”이라는 글에서 이 주제를 세 영역, 즉 공관복음, 사도행전, 바울 서신에서 다루고 있다. 원래 요한복음이 예수 그리스도를 매우 심층적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약성서의 영 개념을 다룰 때 반드시 짚어야 할 대목인데도 그냥 뛰어넘어 간 것이 약간 아쉽기는 하지만 최 교수가 여성 신학적 관점으로 접근한다는 취지에서 그렇게 했다고 보고 일단 그 내용을 간추리면서 따라가기로 하자. (“신약 성서적 관점에서 본 영성과 여성”, in: 영성과 여성신학, 참조).
첫째, 공관복음에 나타난 영성: 누가복음 4:18,19절은 이사야 61:1,2의 인용인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주님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누가는 영의 활동을 철저하게 장애인과 소외된 사람들의 인간다운 삶이 보장되는 하나님의 나라와 연결시키고 있다.
둘째, 사도행전에 나타난 영성: “그러나 성령이 너희에게 오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뿐만 아니라 땅 끝에 이르기까지 어디에서나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행 1:8)는 바로 사도행전의 주제가 되는 구절인데, 여기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바는 영의 역할이 곧 선교에 있다는 것이다. 사도행전 2장17절은 요엘 3:1 이하를 인용한 말씀으로서 이는 곧 사도행전의 영 이해가 곧 구약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셋째, 바울서신에 나타난 영성: 최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과 세상의 영을 구별한다. 고린도전서 2:12-15절을 읽어보자. “우리가 받은 성령은 세상이 준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총의 선물을 깨달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 은총의 선물을 전하는 데 있어서도 인간이 가르쳐 주는 지혜로운 말로 하지 않고 성령께서 가르쳐주시는 말씀으로 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영적인 것을 영적인 표현으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영적이 아닌 사람은 하느님의 성령께서 주신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그것이 어리석게만 보입니다. 그리고 영적인 것은 영적으로만 이해할 수 있으므로 그런 사람은 그것을 이해하지도 못합니다. 영적인 사람은 무엇이나 판단할 수 있지만 그 사람 자신은 아무에게서도 판단 받지 않습니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영적인 것은 어떤 사물이나 사태에 대한 바른 인식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인식이라고 볼 수 있다. 예수의 십자가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었지만 기독교인들에게는 구원의 길인 것처럼 그것을 인식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길은 영(프뉴마)의 역할에 달려 있다.  
넷째, 요한복음의 영성: 최 교수가 다루지 않은 요한복음의 영 개념을 잠시 살펴보자. 가장 전형적인 구절은 소위 ‘니고데모와의 대화’로 일컬어지는 3:1-21이다. 특히 5-7절은 다음과 같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육에서 나온 것은 육이며 영에서 나온 것은 영이다. 새로 나야 된다는 내 말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 바람은 제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듣고도 어디서 불어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모른다. 성령으로 난 사람은 누구든지 이와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요한은 영을 인격적인 존재로 설정하고 있다. 인간의 판단과 범주에서 자유로운 영에 의해서 새롭게 된 사람은 세상 사람들과 전혀 다른 생명의 차원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신비롭게 보인다. 기독교 신앙의 새로운 차원을 영으로 해명하고 있는 셈이다.  
사마리아 수가 성 우물가에서 어떤 여인과 나눈 예수님의 대화 중에서 이런 말씀이 있다. “그러나 진실하게 예배하는 사람들이 영적으로 참되게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올 터인데 바로 지금이 그 때이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하는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 하느님은 영적인 분이시다. 그러므로 예배하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참되게 하느님께 예배드려야 한다.”(요 4:23,24). 이 대목에서도 요한은 영이 바로 하나님과 일치할 수 있는 차원이라는 점을 지적함으로써 신앙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있다.  
신약성서의 영(프뉴마) 개념은 구약성서에 비해서 한편으로 훨씬 인격적인 차원으로 집중되고 있으며, 또 다른 한편으로 기독론적인 차원에서 해명되고 있다. 즉 루아흐가 자연의 생명 현상에 작동한다는 구약성서의 개념은 상대적으로 축소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영의 활동이 강조되고 있다는 말이다. 결국 이런 신약성서의 영은 실존적인 차원에서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와 신비적인 합일을 이루게 하며, 궁극적으로 부활에 참여하게 한다.

초대 기독교의 영성 이해

구약성서의 영성이 생명 일반의 토대에서 인식된 차원이고, 신약성서의 영성은 주로 기독론적 영성이라고 한다면, 초대 기독교의 영성은 종말론적이고 공동체적인 영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화여대 정용석 교수는 이것은 다음과 같이 여섯 유형으로 설명하고 있다. 종말론적 영성(eschatological spirituality), 예배 영성(liturgical spirituality), 공동체적 영성(communal spirituality), 순교영성(martyrdom spirituality), 수덕적 영성(ascetic spirituality), 신비적 영성(mystical spirituality). 이런 초대 기독교 영성이 지난 2천년 동안 기독교의 생명력을 유지시켜주는 토대로 작용했다. 그런데 교회가 성직자 중심의 계급 구조로 바뀌면서 영적 역동성은 약화되고 교권이 그 중심을 차지하게 됨으로써 영성 문제는 이제 수도원 공동체만의 과업으로 축소되었다. 기독교가 국교였던 유럽의 대다수 시민들은 태어나면서부터 기독교인이 되었지만 실제로는 거의 영적인 생활 없이 형식적인 교회의 틀 안에 머물러 있었을 뿐이다. 이런 교권 중심의 교회에 도전하는 일부 신비주의자들이나 소종파 교인들은 정통 교회가 상실했던 영성 문제를 중심 주제로 담아내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렇지만 그들의 영향력이 정통교회를 움직일 만큼 강력하지는 못했기 때문에 교회는 여전히 교리와 형식적인 예전에 치우쳐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세계 교회 역사에서 전무후무할 정도로 비약적인 성장을 이룬 한국교회의 선교 초기에는 부흥 사경회 중심의 영성 운동이 활발하였으며, 해방 이후 전도와 성서 공부 중심으로 영적 활동이 전개되었다. 7,80년대는 신유, 입신, 방언 등, 신비주의적 영성이 적극적으로 모색되었으며, 더불어 해방신학에 토대를 둔 민중신학 영성과 이어서 여성신학 영성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 특히 80년에 시작된 ‘큐티’ 영성은 매우 독특한 한국적 영성의 전형이라 할 만하다. 한국식 경건주의라 부를만한 이 큐티 영성은 단지 감정적인 접근에 머물렀던 그 이전의 영성을 말씀의 지평으로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그 공헌도가 높다. 그 이외에도 여러 유형의 영성이 한국교회 안에서 싹을 트기도 하고 활성화하기도 하고, 그러다가 다시 시들어버리기도 했다. 얼만 전부터는 소위 ‘열린 예배’를 드리는 교회가 많아졌는데, 이것은 일종의 초대기독교에서 볼 수 있는 예배 영성이다. 90년대부터 해외 선교사들을 파송한 한국교회의 저력은 일종의 선교 영성 안에서 해석될 수 있다. 최근에는 ‘영성’ 자체를 주제로 하는 세미나도 많고, 그런 책들도 상당히 출판되었고, 영성을 핵심 주제로 하는 정기간행물이 나올 정도이다. 이제 21세기는 한국 교회가 영성의 시대라 불러도 좋을 정도로 영성이 일종의 화두로 대두되고 있다.
필자의 생각에 다양한 영성 운동이나 그런 모임이 다양하게 펼쳐지는 것은 바람직하긴 하지만 그 근본이 건강하지 못하면 기독교인들의 영성을 훼손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조심스럽게 접근해야만 한다. 그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영성과 죄의 결탁이다. 기독교 신앙이 기본적으로 회심에 있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바이지만 그것이 하나님 나라를 향한 전적인 방향 전환이라기보다는 개인이 죄의식이 자극됨으로써 발생하게 되는 심리적 카타르시스에 머물게 되는 것은 심각한 문제라는 말이다. 원래 복음은 죄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죄가 용서받았다는 사실에 대한 선포이기 때문에 ‘유앙겔리온’인데도 불구하고 교회 현장에서 이런 죄 문제가 왜곡됨으로써 인간의 인간다움이 훼손되는 계기로 작용하게 되었다.
인간의 죄의식에 토대를 둔 영성은 인간을 두 방향으로 몰아갈 위험이 있다. 하나는 하나님 앞에서 서 있는 인간이 자기를 학대한다는 점이다. 인간이 하나님에게서 존재의 신비를 경험하고 그런 차원에서 두려움을 느낀다는 것은 인간을 현실의 고난으로부터 자유롭게 한다는 점에서 기독교 신앙과 영성의 기초에 속하지만, 그게 아니라 불안과 공포, 자기혐오에 빠지게 된다는 것은 인간을 철저하게 비인간화하고 소외시킨다는 점에서 기독교의 영성이 아니다. 다른 하나는 죄의식을 벗어나기 위해서 도덕적(종교적) 행위에 매달림으로써 자신이 성취한 그런 업적에 만족하게 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새벽기도회를 다녀왔다는 만족감이나 교회 행사에 참여했다는 만족감, 또는 교회당을 건축했다거나 장애인들을 돌보았다는 만족감이 우리를 사로잡게 된다. 인간의 자기 학대와 자기 만족감이라는 현상은 한 사건의 두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즉 인간의 자기 연민(나르시시즘)이 한쪽으로는 자기학대로, 다른 한쪽으로는 자기 만족감으로 나타나는 것뿐이다. 이것은 결코 기독교 영성의 바른 모습이라 할 수 없는데, 판넨베르크는 이 문제를 이렇게 언급한 적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참여함으로써 기독교인이 자유로워진다는 종교 개혁의 중심 사상은 참회적 신앙심을 벗어남으로써만 보장될 수 있다. 오직 이럴 경우에만 믿는 자는 종교개혁적 교리강습이라는 전제가 소멸됨으로써 믿는 자로 하여금 기독교인다운 인격적 자기 정체성을 형성하지 못하게 하는 자기 공격의 경험을 피할 수 있다. 만약 소외되었던 생활방식이 구원받았다는 기쁨과 해방하는 영의 새로운 표명이 우리에게 요청된다면, 니체는 자기가 만났던 기독교인 중에서 이런 것을 찾아볼 수 없었다고 조롱한 바 있는데, 전통적 참회 신앙심과의 결별이 불가피하듯 기독교적 신앙심과 생활태도에 대한 새로운 형식을 찾아보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로 불가피하다. (christliche Spiritualität).

위에서 설명한 대로 기독교가 신자들의 영성을 죄의식에 근거해서 접근함으로써 발생하는 이런 왜곡 현상은 결국 기독교가 현실 역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길을 막아버리고 말았다. 자기 연민에 사로잡힌 사람이 역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역사에 참여할 용기가 없든지 아니면 역사를 무시하는 방향으로 흘러 들어갈 수밖에 없다. 이런 전반적인 기독교 신학과 교회의 문제를 정면에서 도전하고 비판하는 신학을 일컬어서 우리는 해방신학이라고 한다. 이들은 인간을 소외시키는 이 구체적인 역사를 영성의 토대로 삼고 그 변혁의 지평까지 밀고 나가려고 한다. 왜냐하면 이들에 의하면 하나님의 영은 개인의 심령적 차원에만 머무는 게 아니라 인간의 전체 삶, 즉 정치와 경제에 이르기까지 모든 공동체적 삶의 차원에서 활동하는 힘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방의 영성 안에 여성신학도 한 축을 감당하고 있는 셈이다. 즉 여성의 경험과 그 삶의 현장을 해방신학적 관점에서 신학의 중심 주제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성신학의 영성도 역시 기본적으로는 해방의 영성이라는 말이다. 우선 한국의 대표적인 여성 신학자들이 이 영성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 조금 더 검토하기로 하자.

강남순의 영성

강남순에 의하면 20세기 중반 이후의 현대적 영성개념은 다음과 같이 네 가지 특성을 지닌다. 첫째, 영성은 더 이상 로마 가톨릭이나 기독교, 또는 종교적 현상과 같은 독점적인 의미로 이해되지 않는다. 즉 영성은 수도원에서 종교적인 수련을 통해만 획득될 수 있는 어떤 능력이나 태도가 아니라 인간의 삶 전반에 걸쳐 있는 것이라는 말이다. 둘째, 영성은 개인적인 통전성(wholeness)과 초월을 향한 것이다. 셋째, 영성은 더 이상 ‘완전성’의 문제가 아니라 통전적인 인간의 삶을 향한 ‘성장’으로 이해되므로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는 것이다. 넷째, 영성은 이제 단지 ‘내적’인 것에만 초점을 두지 않고 인간이 된다는 것과 연관되어 있는 삶의 모든 영역을 통합하는 과정에 초점을 두게 된다.(Katherine Zappone, The Hope for Wholeness, A Spirituality for Feminists, 1991, 10-13, 강남순, 여성신학의 영성, in: 여성과 여성신학, 22에서 재인용). 이런 일반적 영성 개념을 토대로 해서 여성신학적 영성을 강남순은 이렇게 다섯 항목으로 해명하고 있다.
첫째, 여성 신학적 영성은 여성신학이나 페미니즘과 마찬가지로 여성의 경험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 여성신학의 영성을 말하려면 여성신학이 해석학적 토대로 삼고 있는 여성의 경험에 근원을 두어야 한다는 강남순의 주장은 당연하다. 다면 여기서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요소는 과연 여성의 경험이라는 것이 그렇게 영성을 제고시키는 방향으로만 작동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에 대한 설명이 아마 아래에 열거되는 항목에 담겨 있을지 모른다.
둘째, 여성 신학적 영성은 가부장적 종교에 의해서 이분법적으로 이해되어 온 것들을 재통합하고자 하는 특성을 지닌다. 이 과정에서 열등하거나 속된 것으로 여겨졌던 요소들의 본래적 가치를 회복하게 되는데, 예컨대 여성의 몸이나 성(sexuality)에 대한 긍정적 평가가 이에 속한다.
셋째, 페미니스트 영성은 인간과 자연의 상호 연관성에 대한 인식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 부분은 둘째 항목과 연관되는 것인데, 기존의 가부장적 질서에 의해서 소외되었던 여성과 자연, 더 나아가서 사회의 마이너리티 상호간의 연대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넷째, 교회 현실에서 논리적이고 추상적인 접근 방식을 거절하고 미학적이고 원형적이고 육화되고 삶을 확장하는 방식을 추구하는 게 여성 신학적 영성이다. 이런 강남순의 주장은 전통적인 교회 의식이 위계적이고 관념적이었다는 판단에 의한 것 같은데, 일부분은 옳고 일부분은 옳지 않은 지적이다. 만약 신학이 종교의 차원에 우리의 삶을 확장시키는 방향으로만 움직인다면 굳이 존재의 신비에 접해 있는 종교의 영역이 아니라 휴머니즘이나 정치, 경제 이데올로기의 차원에서 접근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다섯째, 여성 신학적 영성은 개인의 성장과 사회정의의 정치학과 변혁 사이의 밀접한 관계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지닌다. 즉 여성 문제가 단지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정치-종교적 차원과 밀접한 연관성을 담고 있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페미니스트 영성의 올바른 추구는 구체적인 사회 변혁을 추구하는 것과 분리되어 생각될 수 없으며, 이런 올바른 사회 변혁은 개인적인 변혁의 토대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개인과 사회, 종교와 역사를 이분법적으로 나누지 않음으로써 통전적인 개인과 사회의 영성을 회복하자는 이런 주장은 일단 옳다고 본다. 다만 여기서 신학의 역할이 인간의 실천을 어느 깊이 만큼 규정할 수 있는가에 대한 논의가 좀더 진지하게 다루어질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은선의 영성

이은선은 구약성서에서 영을 의미하는 ‘루아흐’와 신약성서의 ‘프뉴마’와 라틴어의 ‘스피리투스’가 공통적으로 숨, 공기, 바람, 호흡을 가리킨다는 기본적인 인식에 근거해서 억압받고 고통받던 이들에게 이러한 영이 체험될 수 있도록 길을 제시하는 것이 곧 신학의 과업이라고 본다. 따라서 이은선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은 당연하다. “그러면 이제까지 그처럼 억눌려져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고 그리하여 성스러운 바람의 긴급한 해방과 구원을 필요로 하는 존재와 대상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가장 포괄적인 의미로 보면 이제까지 남성에 대한 여성들, 인간에 대한 자연이 그런 상태였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여성신학적 영성의 단초를 발견할 수 있다. 이은선은 생태여성주의 영성을 아래와 같이 세 차원으로 설명한다.
1) 온 생명적 통합성(The global life Integrity)
이은선은 ‘온 생명적 통합성’을 이렇게 설명한다. “온 생명적 통합성이란 우리 존재와 우주의 옹 영역을 성스러운 영역으로 보는 것이다. 그것은 온 자연과 우주의 영역에서 이제까지의 신학적 담론에서와는 달리 하나님의 영을 파악하는 눈이고 그것을 느끼는 감응이며, 그리하여 살아있는 생명체로서의 지구를 발견하는 것이다.”(299). 지구 전체를 하나의 생명 현상으로 인식하고 자기 자신을 그 생명 현상에 밀어 넣음으로써 각자는 영성을 획득할 수 있다. 이렇게 지구의 생명을 하나로 인식하는 방식은 이미 불교나 도교의 유기론적 인식과 거의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우주 물리학적 관점에서 지구의 생명 현상을 생각하면 이런 유기적 관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지구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생명의 역학관계도 역시 이런 논리의 정당성을 제공한다. 지구 안에서 자리를 잡고 있는 모든 생명체가 탄소로 이루어진 유기물을 서로 공유하고 있다고 한다면 결국 통합적 생명을 구성하는 것이다. 신학적인 차원에서는 이 문제가 성령론의 관점에서 접근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영이 이 세상의 모든 생명과 연결되어 있다면 결국 모든 생명이 통합적 구조 안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은선은 이 문제를 ‘영기독론’의 시각에서 접근하고 있다. 이런 접근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자칫 역사적 예수에게 일어났던 구원론적 사건이 단지 인간학적 요구로 해소될 염려가 없지 않다는 점에서 많은 검토가 필요하다.
2) 타자성(The Otherness)
원래 시몬느 드 보부아르에 따르면 타자성이라는 개념은 자기 자신이 되지 못하고 대상화되는 존재로서의 여성의 노예성을 의미했는데, 이은선은 프랑스 철학자 레비나스의 타자성의 윤리학에 근거해서 적극적인 의미로 이 타자성을 해석하고 있다. 즉 타자성은 “내가 나 자신을 성의 영역으로 파악했다면 그만큼 똑같이 나와 다른 이도, 남성과 다른 여성도, 그리고 인간과 다른 자연도 같은 권리와 생명을 가진 존재로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다.”(312). 그가 이렇게 영성 문제를 레비나스의 타자성 개념으로 풀어 가는 동기는 교회 안에서 남자 목사들이 영의 활동을 독점함으로써 여성들이 영을 부여받는 수동적 역할에 머물고 있다는 현상을 교정해보려는 데에 있다. 이런 파행적 성령 운동은 철저한 물질주의와 성공주의에 토대를 두고 성령의 활동을 소유의 차원에서 접근하는 태도이다. 이런 자기 중심적으로 세속적 물질주의에 의해서 기독교인들의 실제적인 삶은 ‘실제적인 무신론’에 물들게 된다는 그녀의 지적은 옳다. “타자성으로 만나는 하나님의 영은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자기 도취에서 벗어나게 한다. 그래서 다시 주변의 다양성을 보게 하고, 차이를 만나게 하며, 그 다양성과 차이에 대한 인정이야말로 진정으로 우리로 하여금 존재의 신비를 만나서 거기서부터 실천이 우러나게 한다.”(317).
3) 지속성(continuity)
이은선이 교육학자이기 때문인지 몰라도 생태여성주의 영성이 유지되기 위한 교육학적 방법론을 세 번째 항목으로 제시한다. 즉 타자성에 대한 인식이 한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계속 유지되어야 참된 영성이 가능하다는 차원에서 ‘지속성’이 요구된다는 말이다.
이은선 교수가 제시한 생태여성주의 영성의 세 항목은 굳이 세 항목으로 구별할 필요 없이 첫 항목인 ‘온 생명적 통합성’으로 줄여도 될 것 같다. 왜냐하면 타자성과 지속성은 이 온 생명적 통합성 안에 들어 있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온 생명적 통합성이라는 것은 매우 보편적인 시각이고 가치이기는 하지만 신학적 구도로서는 그렇게 당연한 것은 아니다. 이런 영성은 예컨대 틱낫한이나 법정 같은 이들의 영성과 거의 차이가 없다. 기독교의 영성이 불교나 그 이외의 동양 종교와 반드시 달라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근본적으로 다른 요소를 심화시키지 못한다면 그 정체성에서 혼란이 야기될 것이다. 예컨대 불교는 인간의 자아를 내부적인 차원에서 완성시켜나가려고 하지만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으로 보며, 노장에게서 도와 자연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근원적인 힘인데 반하여 기독교에서 자연은 하나님에 의해 무로부터 창조된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 말하는 영성은 사람과 자연 자체의 ‘전지구적 통합성’에 머무는 게 아니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근원으로서의 하나님 안에서 해명되어야 한다.    

위에서 소개한 두 여성 신학자 이외에도 여성 신학적 영성을 다루고 있는 여성 신학자들은 많다. <영성과 여성신학>에서 강영옥은 “마리아 전통과 영성”을, 최만자는 “한국 기독교 전통과 여성의 영성”을, 서현선은 “여신숭배 전통 속에 나타난 여성해방 운동을 위한 영성 고찰”을 다루고 있다. 동서양 철학적 사유에 근거해서 성서와 기독교 역사를 새롭게 해석해나가고 있는 구미정은 여성과 남성이라는 대결구도를 뛰어넘어 생태적 여성신학을 주창하고 있다. 필자는 이들 여성신학자들의 주장에 기본적으로 동의하지만, 이렇게 생명을 살리는 영성 개념이 반드시 여성신학적 구도에서만 설득력을 갖고 있는가, 하는 점에서는 약간 의견을 달리한다. 물론 지금까지 전통적 신학이 남성들에 의해서 수행되었기 때문에 남성과는 다른 시각을 가진 여성의 체험에서 참된 영성을 회복할 수 있다는 그들의 주장이 가능하기는 하지만, 우리가 좀더 기독교 영성을 깊이 들여다보기만 하면 비록 남성들의 주관적인 경험에 의해서 부분적으로 왜곡된 부분이 있기는 했지만 여성신학이 말하려고 하는 그 내용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영성 문제를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라 할 삼위일체론적 구도에서 접근함으로써 정통신학과 여성신학 사이의 긴장을 해소시키고, 더 나아가 영성의 깊이를 훨씬 전향적으로 잡아낼 수 있다고 본다. 아래 삼위일체론적 영성은 <기독교 사상> 2003년 6월호에 게재했던 원고 “설교자로서 기독교 영성 어떻게 볼 것인가”의 일부를 약간 손질한 것이다.  
  
삼위일체론적 영성

어떤 기독교 신자들은 ‘삼위일체론’을 고대 기독교가 하나님의 존재를 해명하기 위한 수사에 불과하기 때문에 오늘 우리에게는 더 이상 현실성이 없는 도그마로만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 교회 설교자들도 형식적인 차원에서 삼위일체의 하나님이라는 말은 하지만 그것의 신학적 내용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그 내용에 접근하지도 못하는 형편이다. 이 문제는 역시 영성을 다룰 때도 똑같이 적용된다. 영성을 단지 인간의 심리적 차원의 어떤 경험으로만 이해함으로써 결국 영성이 신론이 아니라 인간론에 떨어지고 만다. 그러나 기독교 신학은 늘 하나님과 그 나라와 그 존재 방식에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인간의 구원을 모색했다는 점에서 철저하게 신론 중심의 사유방식이라 할 수 있다. 과연 우리가 일상적으로 말하고 있는 영성은 삼위일체론적인 구도에서 어떻게 이해될 수 있을까?
1) 아버지로서의 하나님
영성이 영(靈)으로 존재하는 하나님에 대한 체험이며, 그 체험에 근거해서 이 세상에서의 삶에서 그런 능력이 드러남을 가리킨다면, 하나님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그 체험이야말로 영성의 본질을 바르게 이해하는 첩경이라 할 수 있다. 신약성서 기자들과 교부들은 단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것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그 모든 구원 사건을 끌어가는 근원으로서의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그 토대로 삼았다. 이미 이러한 신앙적 형태는 신약이 기본적으로 구약을 전제하고 있으며, 사도신경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기독교의 영성은 단지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다는 사실에, 즉 “그리스도 일원론적 신앙”에 머무는 게 아니라 우선 창조주이신 하나님과의 관계로까지 확대되어야 한다. 우리가 창조주인 하나님을 믿는다고 한다면 세계 전체는 바로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대상이며, 따라서 우리는 그 안에서의 영성을 확보해야한다.
2)영으로서의 하나님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아버지와 아들로서만이 아니라 영적인 존재로 믿는 삼위일체론에 따르면 우리의 영성이 어떤 지평으로 확대, 심화되어야 하는지 그 길이 보인다. 어떤 이들은 이 영이 하나님이나 예수 그리스도보다 좀 낮은 하나님의 존재 양식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지만,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종교회의를 거치면서 정통 기독교는 성령을 하나님이라는 동일한 본질으로서의 세 위격 중에 한 분으로 인식하고 고백한다. 이런 성령 이해는 단지 교회의 교리사적 인식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성서의 하나님 이해이기도 하다. 이미 구약성서는 하나님을 영적 존재로 해명하고 있으며, 요한복음도 하나님은 영이라고 명시적으로 진술하고 있다. 이 영은 인격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바람처럼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우리가 예측할 수 없다. 매우 다층적인 차원에서 언급되고 있는 영에 대한 성서의 진술이 일치되고 있는 점은 영은 기본적으로 생명을 살리는 힘이라는 것이다. 성령은 곧 살리는 영이다. 영으로 존재하는 하나님과의 일치와 그 경험과 그것이 삶에서 나타나는 능력을 영성이라고 할 때 결국 영성은 살리는 능력, 생명의 능력이라고 볼 수 있다. 영성이 깊은 사람은 곧 생명을 살리는 능력의 사람이라는 뜻이다.
3) 아들로서의 하나님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하나님과 영과의 관계 안에서 해명하는가, 하는 관점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 말은 곧 그리스도 영성이 우리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라는 뜻이다. 역사 초월적인 존재인 하나님이 창조의 영성을 확보하고 있다면, 성령은 창조 유지의 영성을 확보하고 있으며, 역사적 존재인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와 생명 완성의 영성을 성취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해방신학자나 여성신학자들, 또는 영성신학자들이 정치, 경제의 소외, 또는 자연과 여성의 소외를 극복하는 영성을 강조하기는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성취된 구원의 영성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을 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정통의 기독론을 남성 중심적 사유방식으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기독론적인 영성을 포기하거나 약화시킨다면 결국 기독교 자체의 정체성이 훼손될 염려가 있을 뿐만 아니라 이것이 진리론적인 차원에서 정당하기 때문에 다른 작업보다 훨씬 집중적으로 심화, 발전시켜야 할 대목이다. 아직 우리에게 완전하게 드러나지 않은 생명의 비밀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에 담겨 있다는 사실을 믿는 자들이 기독교인이라고 한다면 이 관점을 소홀히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것의 핵심은 곧 예수의 부활에 담겨 있다. 즉 부활의 영성이야말로 모든 영적 현상의 토대이다.

부활의 영

예수의 부활 사건이 기독교 영성의 토대인 이유에 대해서 우선 생각을 정리하고 그 부활의 리얼리티가 무엇인지 따라가도록 하자. 많은 기독교인들이 기독교 신앙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를 대충 넘어감으로써 신앙과 기독교 영성이 사변적인 방향으로 치우치든지 아니면 실용적인 쪽으로 치우치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는 점에서 우리는 우리의 근본에 대해 심층적으로 생각하는 태도를 유지해야만 한다.  
구약성서의 ‘루아흐’나 신약성서의 ‘프뉴마’가 곧 생명의 숨결, 생명의 바람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면 결국 성서가 말하는 영의 활동은 곧 생명 활동이다. 자연의 생명으로부터 시작해서 인간의 생명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명 현상을 주관하는 힘은 곧 영의 활동이라는 말이다.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는 모든 생명 현상의 특징은 한 개체의 생명이 죽음을 통해서 파괴된다는 사실이다. 생명은 살아있는 것이어야 하는데, 생명의 특징을 갖고 있는 모든 것은 곧 죽어야만 하는 운명 속에 놓여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경험하는 생명은 어떤 한계 안에서만 타당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식물의 생명 현상은 좀 복잡하니까 일단 접어두고, 동물, 그 중에서 우선 우리 인간에 한정해서 좀 더 생각을 발전시켜보자. 우리가 모든 노력을 기울여 우리의 생명을 연장시켜보려고 하더라도 결국은 죽을 수밖에 없다는 이 사실 앞에서 우리는 절망한다. 우리가 정신 훈련을 통해서 이런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기는 하지만 두려움을 극복한다고 해서 죽음 자체를 넘어서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점에서 우리의 모든 노력에 상관없이 결국 우리의 생명은 소실되고 만다는 결론이 나온다. 여성을 억압하는 모든 문화적 질서를 개혁함으로써 이런 여성 해방을 이룬다고 하더라도 곧 죽는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그런 해방의 프락시스가 아무런 효용이 없다는 사실도 역시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죽음이라는 절대적인 사건 앞에서 우리의 모든 해방 운동을 무효화하자는 말은 결코 아니다. 다만 그런 해방의 영성은 늘 어떤 범주 안에서만 효력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우리가 훨씬 궁극적이고 본질적인 영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말이다.
어쨌든지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조건들을 향상시키는 것에 머무는 게 아니라 그 모든 것을 파괴하는 죽음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야말로 궁극적인 영의 활동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야말로 참된 영성의 토대라고 생각한다. 즉 예수의 부활 사건은 종말에 일어나게 될 모든 죽은 자들의 부활이 역사 안으로 선취된 사건이라는 점에서 궁극적인 생명이라 할 수 있다. 이 예수의 부활을 일으킨 그 영과 하나 된다면 우리는 우리의 모든 삶을 파괴시키는 죽음으로부터 해방될 것이다.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이 세상에 대해서는 죽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산다는 고백을 했는데, 이를 다르게 표현하면 죄에 대해서는 죽고 부활에 대해서는 산다는 뜻이다. 우리가 이런 궁극적 생명을 희망하고 믿을 수만 있다면 우리 삶의 왜곡된 현실도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으며 자유로울 수 있다. 이것보다 더 근본적인 해방이 있을 수 없다는 점에서 예수의 부활이야말로 참된 해방의 영성이다.
이제 우리는 예수 부활의 리얼리티에 대해서 질문할 차례가 되었다. 여기서 예수의 부활에 대한 총체적인 해명을 제시할 필요는 없지만 최소한 기독교 영성의 가장 중요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담긴 리얼리티의 단초만이라도 일단 정리할 필요는 있을 것이다. 우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오해를 풀어야 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부활이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없는 현상이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이것이 초자연적 사건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을 증거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양측의 주장이 한결같이 부분적인 정당성만 갖고 있다. 부활 현상이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없다는 말은 일단 옳기는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는 말은 정당하지 않다. 우리가 생각하는 과학은 우리에게 알려진 현상을 자신들의 방식으로 해명하는 학문이기 때문에 미래에 일어날 생명의 완성인 부활을 재단할 수 있는 유일한 잣대는 결코 아니다. 다른 한편으로 부활을 무조건 초자연적 범주로 밀어놓고 하나님의 능력을 강조한다는 것은 과학과 종교를 이원론적으로 나누는 것이기 때문에 창조론의 차원에서 정당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진리의 보편성이라는 차원에서도 역시 정당하지 않다. 따라서 부활의 리얼리티를 이해하는 방식이 자연과학 실증주의에 놓여 있는 것도 아니고 신앙만능주의에 놓여 있는 것도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 과학과 신앙이 종합적으로, 또는 변증법적으로 작용함으로써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경험한 부활의 리얼리티를 확보하는 게 정당한 접근 방식이다. 이런 작업은 앞으로 인류 역사 과정을 통해 훨씬 다층적이고 다각적인 관점에서 진행될 것이라는 점만 확인하고, 성서가 말하려는 부활의 리얼리티가 무엇인지 짧게 설명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 안에 은폐된 궁극적 생명이 유일회적으로 역사 안에 실현된 생명 사건이다. 여기서 생명이 하나님 안에 은폐되었다는 말은 아직 우리에게 그 전모가 완전하게 밝혀지지 않았다는 뜻인데, 이 생명은 종말에 가서야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보듯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런 종말론적 사건의 선취라는 사실에 대한 확실성 여부는 결국 종말에 가서야 확인될 수 있으며, 따라서 그 이전까지 우리는 사도의 전승에 근거해서 진리로 믿을 뿐이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는 ‘사도적 전승’에 신앙적 인식의 토대를 두는 종교라 할 수 있다. 그들의 부활 경험이 비록 논리적으로 완벽하게 진술되지는 않지만 그들의 경험 사건 자체만은 명백한 사실이라고 믿는다. 종말이 오기 이전이라고 하더라도 우리의 이성적 판단과 영적 감수성이 예민하게 작동한다면 그 부활 생명의 사실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인식과 믿음을 확보한 사람들은 생명의 에너지를 자신의 내면세계에 담고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데, 이것이 곧 기독교의 영성이다.

주로 남성의 독과점 방식으로 운영되어온 정통의 신학이 생명의 본질에 천착해야 할 영성의 핵심을 놓치고 성직자의 권위와 교회 성장 이데올로기, 지배와 정복이라는 남성적 이념에 치우쳤다는 점에서 우리는 당연히 여성신학이 강한 톤으로 외치고 있는 여성 신학적 영성에 귀를 기울어야 한다. 다만 그들의 영성이 단지 인간학적 현실의 요청에만 머물러 있음으로써 훨씬 근본적인 기독교 신학의 토대를 상실하지 않도록 옆에서 관심을 가질 필요는 있다. 그것이 곧 삼위일체론적인 영성, 좀 더 구체적으로는 부활 영성이라는 것이다. 이런 정통 신학의 근본을 유지하기만 한다면 여성신학의 영성은 생명력을 상실해 가는 오늘의 현실교회를 영적 차원에서 갱신하고 개혁하는 견인차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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