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로즈메리 래드포드 류터의 여성신학적 착상
-여성의 경험과 기독교 전통의 충돌 사이에서-

“그러나 누가 이 메시지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을까?” 마리아는 생각했다. “예수가 하느님의 옥좌를 비웠음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오히려 베드로와 몇몇 다른 제자들은 그것을 다시 채우려고 바삐 애쓰고 있지 않은가. 그들은 부활한 예수를 천상의 아버지를 대표하며 지상을 지배하는 새로운 군주와 주인(new Lord and Master)으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아, 그래. 그들은 그의 충실한 종들이 될 테지. 그리고는 그의 이름으로 유대인들을 꾸짖고 이방인들을 정복하며 지금 로마인들이 우리 위에 군림하듯이 그들 위에 군림하겠지.” 마리아는 전율했다. “완전히 경직된 이 사고의 구조물을 찢어 그 속으로 이 다른 세계의 빛을 들이비치게 할 방도가 없을까? 아마도 이 다른 전망은 상당한 부분이 여전히 왜곡 당하게 될 것이다. 다른 사람들, 그것도 오히려 나와 같은 여자들 편에서 그 참된 전망이 가진 무엇인가를 얼핏 보게 될 것이며, 그들이 나를 자매로서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류터, 안상님 역, 성차별과 신학, 17f. 이하 ‘성차별’로 약함).

위의 인용은 류터가 자신의 저서 <성차별과 신학>에서 희곡형식으로 진술한 서론의 마지막 부분이다. 그 희곡에 등장하는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한 예수를 최초로 만난 목격자다. 그가 베드로를 중심으로 한 사도들에게 예수의 부활소식을 알리자 사도들은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여자, 그것도 과거가 있던 여자에게 예수의 부활 소식을 듣는다는 사실이 부끄러웠을 뿐만 아니라 이런 상황을 빨리 정상으로 돌려놓아야 한다는 조급증에 사로잡혔다. 그들이 예수를 최상층으로 하는 피라미드 종교 권력 체계를 만들기 위해서 음모를 꾸미기 시작하자 마리아는 자조 섞인 기분으로 위에서 인용한 독백처럼 내뱉었다. 부활의 참된 전망을 여자의 입장에서 새롭게 해석해 내는 게 곧 류터의 여성신학적 착상이라 할 수 있다.  
데일리와 케롤 크라이스트는 탈(脫)기독교적 여성신학을 도모하며, 피오렌자는 비록 기독교를 해체하지는 않지만 기존의 가부장적 교회의 대안으로서 ‘여성 에클레시아’를 제안하는 등, 비교적 진보적 입장에서 여성신학 작업을 전개하는 데 반해서, 류터(Rosemary Radford Ruether)는 여성의 경험과 성서 및 전통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지 않고 변증법적인 순환관계로 인식함으로써 과거의 전통과 오늘의 경험 사이의 대립적인 국면을 극복하고자 한다. 이는 곧 그가 한편으로 성서와 기독교 전통에서 여성 해방적 요소를 확보하고, 다른 한편으로 여성 차별적인 요소를 변혁시켜나가는 것을 여성신학의 근본 방향으로 생각한다는 뜻이다. 그녀의 표현 방식을 빌리자면 성서에 담긴 여성 해방적 요소들이야말로 ‘성서 안의 성서’로서 다른 비기독교적 전승들과 더불어 여성해방을 위한 전거인 셈이다. 여성신학의 여러 경향의 연관에 대해서 윤철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러셀이 남성 중심적이고 가부장적인 성서 본문 안에서 본래적인 내용으로서의 해방적인 전승(Tradition)을 구별해 내려하고, 트리블이 가부장적 문화의 한계 안에 있는 남성 중심적 본문들의 외적인 요인들보다 본문 자체에 귀 기울이고 집중함으로써 문헌비평적 접근에서의 수사학적 재표현과 재해석을 통하여 성서 내재적 비가부장화의 원리를 제시하려 한다면, 류터는 성서 안에서 가부장적인 억압적 전승들로부터 사회 비판적인 예언 전승들을 분리하여 비판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여성해방을 위한 전거로 삼으려고 한다. 그리고 피오렌자는 위에서 언급한 모든 접근 방식들 비판하면서, 즉 그녀 스스로 신정통주의 신학의 잔재라고 비판하고 있는 ‘성서 안의 성서’(canon in canon)를 분리함으로써 성서의 권위에 근거하여 페미니스트 해석학을 위한 전거로 삼으려고 하는 모든 시도를 비판하면서, 성서와 기독교 전통 전체에 예외 없이 은폐되거나 드러나 있는 모든 남성 중심적이고 가부장적인 요소들을 여성의 경험이라는 권위에 근거해서 철저히 비판하고, 나아가 성서와 전통 속에서 억눌리고 비가시화된 여성의 경험들을 재건함으로써 미래지향적 여성해방의 원동력으로 현실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데일리의 여성 중심적 페미니스트 모델은 지식사회학의 도움을 받아 남성 중심적 본문의 주석으로부터 새로운 문화적 본문들, 전승들, 신화들을 산출하는 삶-중심(life-center)의 구성으로 나아가고자 시도한다.(윤철호, 기독교 인식론과 해석학, 424,425, 글의 흐름을 약간 고쳐 적었음).

성서와 기독교 전통에 대한 류터의 비판적 시각이 날카롭긴 하지만 여전히 그 안에 담긴 여성 해방적 전통을 여성신학의 귀중한 토대로 삼는다는 점에서 비교적 온건한 계열에 속한다. 여기서 온건하다는 말은 명확하지 않다거나 신학적이지 않다거나, 타협적이라는 게 결코 아니다. 우리는 류터의 주장에서 정통신학의 가부장적이고 여성차별적 요소에 대한 강력한 비판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극단적인 신학자들과 류터의 차별성은 비판의 강도에 있는 게 아니라 성서의 여성 차별적 요소를 기독교의 본질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있을 뿐이다. 필자가 보기에 여러 페미니스트 학자들의 나름의 특징이 있겠지만 류터는 가장 심도 있게 조직신학적 접근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제 그의 책 <성차별과 신학>을 중심으로 그의 입장을 검토할 텐데, 주로 1장 ‘여성신학 -방법론, 전거 및 규범’을 집중적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이것만으로도 그의 신학적 특징이 충분하게 드러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여성 경험과 역사적 전통
류터는 전통적인 신학을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 비판함으로써 여성신학의 새로운 길을 모색한다. 지난날의 신학은 기독교 전통을 절대적인 규범으로 삼고, 그것을 통해 인간 경험을 해석했다는 것이다. 이런 신학 방법론이 고수되는 한 여성의 고유한 경험이 신학의 중심부로 들어올 수 있는 길은 차단된다. 류터는 전통 신학이 간과했던 경험을, 즉 여성의 경험을 신학적 해석학의 준거로 삼는다. 물론 류터가 여성의 경험만이 기독교 전통을 재단할 수 있는 잣대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전통 신학에서 간과되었던 경험을 통해서 그 전통이 바르게 해석될 수 있는 변증법적 모델을 찾아내자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류터의 여성신학은 ‘경험’을 해석학적 순환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으로 여긴다. 여성의 경험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류터는 피로렌자와 비슷한 길을 가고 있지만, 조금 밝은 안경을 끼고 들여다보면 이 두 신학자 사이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피로렌자는 여성의 경험에 근거해서 기독교 전통을 재구성한다면, 류터는 재해석한다. 어쨌든지 류터의 신학에서 여성의 경험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건 분명하다.

인간의 경험은 해석학적 순환의 출발점이자 종결점이다. 성문화한 전통은 경험 속에서 뿌리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경험의 검증을 통하여 끊임없이 새로워지거나 그렇지 않으면 폐기된다. ‘경험’은 상호 작용하는 변증법 속에 신적 존재의 경험, 자신의 경험, 그리고 공동체와 세계의 경험을 포함한다. 일반적으로 인정된 상징들, 규칙들, 법률들도 경험을 밝혀주고 해석해주는 능력에 따라 믿을 만한 것으로 인정되거나 혹은 거부된다. 권위의 체계들은 이러한 관계를 전도시키려 하며, 받아들여진 상징들로 하여금 경험된 것에 대한 해석뿐만 아니라 경험될 수 있는 것마저 좌지우지한다.(성차별, 19.).

우리는 류터가 여성의 경험을 여성신학의 해석학적 토대로 삼는 이유를 세밀하게 검토해야 한다. 그녀는 단지 여성의 억압적 현실을 해방의 현실로 끌어내자는 박애주의적 충동이 아니라 오히려 매우 탄탄한 역사 해석학적 토대에 근거해서 신학 작업을 전개하고 있다. 흡사 헤겔이 역사를 정반합의 변증법적 발전이라고 보았듯이 류터는 종교적 계시의 역사가 과거 경험과 현재 경험의 해석학적 순환을 통해서 우리에게 드러나고 발전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단서를 우리는 신구약성서와 기독교의 종교적 상징이나 의식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예컨대 삼위일체 도그마만 하더라도 그것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유대교의 유일신론적 하나님 경험을 역사적 예수에 대한 자신들의 경험 안에서 새롭게 인식하고 해석한 결과이다. 더 나아가 교부시대에 이루어진 플라톤 철학과의 접목은 기독교의 삼위일체론이 교의학적 토대를 잡아나가는 그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말을 바꾸면 초기 기독교 역사에서 헬라철학의 도움이 없었다면 삼위일체론적 하나님 인식에 도달될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기독교의 하나님 인식과 진리인식은 그들이 어떤 삶과 역사를 경험했는가에 따라서 달라졌다고 보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류터에 의하면 기독교 신학이 여성의 경험을 해석학적 토대로 삼는 것이야말로 신학이 가야할 바른 길이다. 그는 이런 해석학적 순환을 아래와 같이 진술하고 있다.

따라서 히브리의 예언자들은 가나안과 근동의 종교들의 상징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해석했다. 기독교는 그 이후의 잇따른 단계마다 예수를 해석하기 위하여 아주 다양한 유대교적 종교적 상징들과 헬레니즘적인 종교적 상징들을 차용했다. (성차별, 21).
하나의 종교적 전통은 그 계시적 유형이 대대로 재생산되어 공동체 내의 개인들과 끊임없이 대화하고, 그리고 그들에게 개인적 및 집단적 경험의 구원적인 의미를 제공해 줄 수 있다면 결코 생동감을 상실하지 않을 것이다. (성차별, 22).

이런 점에서 류터는 오늘 성서를 읽는 독자들이, 그리고 기독교 전통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는 사람들이 그것을 자신의 경험에 의해서 새롭게 해석한다는 것은 신학적 전통에 비추어보더라도 매우 타당한 작업이다. 특히 지난 2천년 동안 여성의 경험이 거의 무시된 가운데 형성되고 전승된 기독교의 가르침이 그런 가부장적 질서가 허물어지는 이 시대에 여성의 경험에 의해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보수적인 입장의 신학자들이나 교회 지도자들은 성서와 기독교 전통을 인간의 경험에 근거해서 새롭게 해석하는 작업을 비신앙적인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여성 신학을 부당한 것으로 매도한다. 그들은 ‘오직 말씀으로’ 명제를 금과옥조로 여기고 있으며, 성서와 전통을 절대규범*으로 간주함으로써 오늘의 인간 경험, 더구나 여성의 경험에 근거하여 기독교 신앙을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작업을 한사코 거부한다. 결국 이들에게 기독교 신앙은 오늘 우리의 삶과 전혀 다른 역사적 지평에 있던 사람들의 신앙적 경험을 오늘 우리가 그대로 반복하는 것에 불과하다.

*한국교회에서 성서와 전통의 절대규범 현상은 거의 극에 달한 상태이다. 성서를 문자의 차원에서 완벽하다고 주장하는 축자영감설을 한국교회 안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대개는 그 뜻이 무엇인지 모르고 성서가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잘못이 있을 수 없다는 막연한 느낌으로 그것을 추종할 뿐이다. 이는 흡사 로마 가톨릭 교인들이 성모 마리아를 절대화한다거나 교황을 절대화하는 현상과 비슷하다 하겠다. 그런 수구적인 입장에 있는 분들만이 아니라 비교적 건전하다고 평가받는 교회에서도 역시 성서가 ‘해석’되지 않고 그전 고수될 뿐이라는 점에서 기독교 신앙의 규범화는 극복되기 힘든 상태이다. 물론 모든 가치와 준거를 상대화하는 포스트모던의 사조 가운데서 교회가 흔들리는 않은 근거에 집중한다는 것은 나름으로 의미가 있지만, 그 근거들이 진리론적 논쟁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독단적으로 강요된다는 점에서 문제가 심각하다.    

필자가 볼 때 기독교 신앙을 역사적으로 해석하지 않으려는 이들의 태도는 두 가지 점에서 문제가 있다. 첫째, 이들은 성서와 기독교 신앙이 기본적으로 자신들이 처한 ‘삶의 자리’에서 해석된 것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성서는 허공을 향한 독백이 아니라 구체적인 독자를 향한 신학적 진술이다. 그 독자들은 우리와 똑같이 피와 살을 지난 몸으로 살았으며, 우리와 똑같이 역사적 질고와 인간적 실존을 안고 살았다. 둘째, 기독교 전통을 절대화하는 경우에, 즉 새로운 해석을 차단할 때 벌어지는 문제는 오늘의 교회가 “부단히 개혁되는 교회”라는 종교개혁자들의 가르침에 위배된다는 사실이다.  

전통의 위기
류터에 의하면 구원의 패러다임에 대한 기존의 해석이 오늘의 경험과 대립될 때 종교적 전통들은 위기에 빠지게 된다. 이런 위기는 그 공동체가 자체적으로 흡수하고 자체 개혁을 끌어냄으로써 큰 문제없이 해결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크고 작은 분열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지난 기독교 역사에 이런 일들은 자주 일어났다. 어떤 점에서 소종파 운동은 전통과 새로운 인간경험의 불화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불화의 원인은 두 가지로 보인다. 하나는 공동체 자체가 본질을 훼손했을 때이며, 다른 하나는 새로운 경험에 적응하지 못했을 때이다. 이 두 가지가 분리되어서 발생하기도 하고, 때로는 겹치기도 하는데, 여성신학의 문제는 기독교의 본질이 훼손되었다기보다는 가부장적 질서가 허물어지는 이 새로운 경험에 기독교가 적응하지 못함으로써 불거지는 문제라 할 수 있다. 류터에 의하면 이런 위기로 인해 기독교의 분열이 일어나는데 그 강도에 따라서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우선 급진적 분열은 전통을 전달하는 제도적 구조들이 타락했다고 인식될 때 발생한다. 16세기 종교개혁은 이런 위기에 의한 결과였다. ‘면죄부’로 대표되는 그 당시 로마 가톨릭의 제도적 구조들이 타락했다는 인식으로 인해서 개신교의 분열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또 다른 면에서 보면 로마 가톨릭의 업적 신앙이 새롭게 인간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던 르네상스 이후의 인간 경험과 배치됨으로써 위기에 빠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로마 가톨릭의 제도가 부패하고, 그 가르침이 새로운 경험에 적합하지 못함으로써 사람들은 구원과 계시의 문제를 근원으로부터 새롭게 모색하게 된 것이다. 대표적으로 루터는 바울의 ‘이신칭의’에서 그런 모순을 극복할 수 있었다. 만약 로마 가톨릭이 미리 이런 문제를 자체적으로 흡수하고 해결했다면 개신교의 분열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둘째, 훨씬 급진적인 위기는 모든 종교적 유산이 타락한 것으로 나타날 때 발생한다. 기독교 역사에 이런 근본적인 회의는 계몽주의 시대에 급부상했다. 특히 니체, 프로이트, 마르크스의 기독교 비판은 기독교의 모든 유산에 대한 전적인 부정이었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모든 종교는 지배 계급이 자신들의 권력을 정당화하고 억눌린 자들을 무마하기 위해 사용하는 하나의 도구라고 가르쳤다. 그가 종교를 가리켜 ‘민중의 아편’이라고 비판한 것은 일리가 있는 말이다. 이 세상의 문제는 허무하고 무의미하기 때문에 하늘에만 희망을 두고 살아야 한다는 기독교의 가르침으로 인해서 이 세상의 악한 질서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계속해서 억압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니체는 인간의 죄의식*을 자극함으로써 도덕성을 함양시키려는 기독교의 가르침을 비판한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기독교의 종교현상은 집단적 노이로제로 나타난다. 비록 이런 기독교 비판가들의 비판이 기독교의 근원보다는 오히려 드러난 표면적 현상에 집중하고 있지만 이들의 비판을 통해서 기독교 신앙의 한계가 드러났다는 점은 분명하다. 류터의 표현을 빌리자면 기독교 유산이 타락한 것이다.

*니체가 비판한 기독교의 죄의식 문제는 우리가 여성신학 분야에서만이 아니라 기독교 영성과 교회생활 전반에서 결정적으로 진지하게 검토되어야 사안이다. 류터도 그녀의 책 ‘성차별’ 7장 “죄의식- 개종의 길”에서 여성이라는 사실 자체가 죄인으로 각인되었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헬라 신화 ‘판도라’와 히브리 신화 ‘이브의 유혹’이 서양역사에서 여성이 죄인이라는 숙명을 벗어나지 못하게 한 근거였다고 한다. 그런데 죄의식 문제는 중세기에, 특히 청교도적인 ‘참회신앙’에서 결정적인 의미를 획득함으로써 미국과 한국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기독교의 복음은 자신의 심리적 죄책감을 해소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창조, 해방, 자유, 평화의 나라에 참여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기독교 역사에서 일정한 부분은 구원을 오직 죄 문제에 한정시켰으며, 괜찮은 경우라고 하더라도 죄의식에 근거해서 다른 신앙의 문제들을 풀어가려고 했다. 니체에 의하면 이렇게 인간을 반생명의 세계로 타락시키는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그 하나님은 죽었다.’  

기독교의 위기는 계몽주의 이후로 지금까지 계속되어 왔지만 아직 자체적으로 정화할만한 길을 발견하지 못한 형편이다. 특히 가부장적 질서가 붕괴된 지금도 여전히 가부장적 질서에 의해서 견인되고 있는 기독교 신학과 교회질서는 이제 새로운 전통에 의해서 대체되거나 새롭게 해석되어야만 한다. 그것을 거부한다면 기독교는 이 역사에서 버림을 받게 될 것이다. 류터는 이제 여성신학을 위한 역사적 전통을 찾아 나선다. 이런 전통은 단지 기독교 내부만이 아니라 기독교가 이단으로 단죄했던 분야까지 망라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단순한 휴머니즘 제고나 복지향상을 기독교 신앙으로 생각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땅에 두 발을 딛고 사는 기독교인들에게는 여기서 아주 어려운 선택을 요청받는다. 한편으로는 밖으로부터 주어지는 배타적인 구원을 기다리면서, 동시에 하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그 과정에서 기독교인들이 참여해야 할 일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일단 류터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자. 류터가 제시한 전통은 다음과 같이 다섯 영역에서 모색될 수 있다.
1) 히브리 및 기독교 경전
2) 영지주의(Gnosticism), 몬타니즘(Montanism), 퀘이커주의(Quakerism), 쉐이커주의(Shakerism)에서 볼 수 있는 이단적인 기독교 전통
3) 전통적인 기독교 신학의 주류인 정교, 로마 가톨릭, 개신교가 담지한 중요한 신학적 주제
4) 비기독교적인 근동 및 그리스, 로마의 종교와 철학
5) 자유주의, 낭만주의, 마르크스주의 등과 같은 기독교 이후의 비판적 세계관
역사 안에 있던 이런 전통들은 그 시대적 한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대개가 성차별적이라는 사실을 류터는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전통 안에 숨어있는 여성해방적인 요소를 찾아내고 그것의 근본적인 의미를 회복해내는 일이 여성신학의 작업이기 때문에 류터는 이 다섯 영역을 여성 신학적 비판의 눈으로 새롭게 해석해나간다. 우리는 편의상 두 가지로 대별해서 검토하려고 한다.

예언자적 원리
류터는 성서의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는 예언자적-여성 해방적 원리에 의해서 폐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런 가부장적 질서에 의한 내용은 기본적으로 성서의 정신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가부장제는 남성을 신성의 대표자로 우상화하는 것이며, 성서가 비판하고 있는 우상숭배*와 불경에 해당된다. 성서의 여성 차별적 내용을 폐기해야 한다는 류터의 주장은 단지 여성 신학을 위한 일방적인 것은 결코 아니다. 이미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그들에게 타당하지 않은 율법을 폐기시킨 전력도 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구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유대교의 종교적 전통을 거의 그대로 따랐지만, 사도행전 15장에 묘사된 첫 세계 공의회에 따른다면 이방인 기독교인들에게 율법의 의무를 지우지 않기로 결정한 것은 분명하다.  

*성서가 말하는 우상숭배는 무엇일까? 우리는 가나안의 농경 신이었던 바알과 아세라가 구약성서의 대표적인 우상이고, 광야에서 아론을 중심으로 황금으로 만든 송아지도 그런 우상의 형상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우상숭배는 단지 종교적인 성격만은 아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종교는 늘 구체적인 삶의 방식과 그런 이데올로기와 함께 하기 때문에 우상의 본질을 그런 요소들과 함께 묶어 판단해야만 한다. 오늘 우리 자본주의에서 전형적인 현상으로 나타나는 돈이나 권력의 절대화도 역시 우상숭배다. 인간에 의해서 생산 가능한 것을 절대화하는 삶의 태도, 또는 그것에 의존되어 있는 삶의 태도가 곧 우상숭배이다. 여기에는 국가, 자본주의, 성, 가부장제, 더 나아가서 교파(교단), 교회 등, 모든 것이 포함된다.  

류터에 의하면 다음의 네 가지 주제가 예언자적-해방지향적 전통의 본질이라고 한다.
1) 억눌린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보살핌과 옹호
2) 지배적인 권력 구조와 그 권력의 담당자들에 대한 비판
3) 현재의 불의한 제도가 극복되고 하나님이 뜻하는 평화와 정의의 통치가 역사 안에서 이루어지는, 다가올 새 시대의 비전
4)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 또는 이러한 맥락에서 이데올로기란 기본적으로 종교적인 것이므로 종교에 대한 비판
류터는 이러한 예언자적-여성 해방적 성서전통의 예를 이사야 10:1,2, 아모스 8:4-6, 누가 4:18,19 등에서 찾고 있다. 이러한 성서적 전통을 찾기 시작하면 끝이 없을 것이다. 그만큼 성서는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대한 관심을 극진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런 예언자적-해방 지향적 전통은 이스라엘 역사에 등장해서 정의와 평화를 외친 예언자들만이 아니라 비교적 종교적 도그마에 가까운 모세오경에서도 발견된다. 예컨대 안식일, 안식년, 희년 개념은 해방을 그 뿌리에 두고 있다. 성서에서 이런 예언자적-해방지향적 전통의 본질을 제시하는 류터의 발상은 당연하다. 류터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예언자적 하나님은 불의한 사회를 거꾸로 뒤집어엎음으로써 그 사회를 극복한다고 여겨진다. 하나님의 역사(役事)는 현 사회 질서의 불의를 심판할 뿐만 아니라 신적인 뜻과 진정으로 일치하는 새로운 사회를 창조하게 된다. 예레미야는 다가올 이 시대를 여자가 남자를 보호하게 될 때(렘 31:22)와 같은 일이 일어날 때라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토지와 재산의 동등한 분배 및 조화가 회복되고 모든 사람이 각자의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서 편안히 살면서 어느 누구도 위협받지 않게 될 때이다.(성차별, 33).

그런데 류터는 예언자적 주제가 이스라엘의 역사와 기독교 역사에서 이데올로기로 변질되었다고 비판한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하고 왕권이 확립되면서, 그리고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등장하면서 메시아 상의 언어는, 즉 주(主)라는 언어는 기존의 기독교 군주들을 신적인 왕권의 표현 및 지상의 그리스도의 대표자로서 신성화하기 위해 사용되었다.(성차별, 35). 종이라는 단어도 원래는 하나님에게만 충성을 바치지 왕이나 귀족이나 사제들 같은 인간에게는 절대 바치지 않는다는 뜻인데도 불구하고 제국주의적 전통 안에서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의 노예상태를 강화하는 데 사용되었다.
예언자적 의미의 이데올로기적 변질을 비판하고 새롭게 원래의 정신으로 되살려내는 일이 곧 기독교 신앙의 창조적 역동성인데, 이를 위해서는 지난 2천년 동안 신학을 억압해왔던 가부장적 질서가 폐기되고 전혀 새로운 해방 운동이라 할 수 있는 여성 신학적 질서가 필요하다. 류터는 이렇게 말한다.

여성신학은 전에 없던 사상들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예언자적-해방 지향적 전통을 규범으로 정의하면서 성서적 신앙 그 자체의 예언자적 내용과 맥락을 재발견하고 있다. 어느 수준에서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다른 해방 신학들과 더불어 여성신학이, 성서적 해석의 전통들 속에서 발전해 오면서 그 해방 지향적 내용을 은폐시켜 온 이데올로기적 신비화의 옷을 벗겨낸다는 것이다. (38).

이런 류터의 진술 앞에서 크게 반론을 제기할 사람들은 별로 없겠지만, “예수-구원, 불신-지옥” 패러다임에 젖어 있는 사람들은 매우 낯설어할 것이다. 오늘의 교회 지도자들과 설교자들은 성서를 새로운 눈으로 읽을 수 있는 영적 분별력을 키울 필요가 있다. 그 분별력은 예언자적-해방 지향적 영성이다.  

그 이외의 여성 해방적 전통들

류터는 위에서 살펴본 대로 성서의 해방적 전통이 이스라엘의 제국화 과정에서 철저하게 이데올로기로 전락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본래의 예언자적-해방적 전통을 되살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녀는 이런 작업이 성서와 기독교 주류 전통 안에서만 이루어질 수 없고 그 이외의 여러 이단사, 타종교사, 세속사의 전통에서도 역시 병행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그녀의 작업은 기독교가 창조의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리고 진리론적 논쟁에서 물러나지 말아야 한다면 마땅히 받아들여져야 할 방법론이다. 원래 기독교 정통의 역사로 주변의 여러 사상과의 논쟁을 통해서 형성되었다는 점에서도 역시 오늘 주변과의 열린 논의는 신학과 교회에서 필요로 하는 당연한 작업이다. 류터가 다루고 있는, 기독교 중심에서 볼 때 소위 ‘비주류’에 속하는 전통들은 지금까지 기독교 신학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은 것들이다. 여기서 우리는 지난 2천년 동안 정통 신학이 그 중심 주제에 관해 상당한 문제가 있기 때문에 배척해 놓은 이단 내지 소종파의 전통을 비록 그 안에 여성 해방적 요소가 있다고 해서 다시 받아들이는 것이 타당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조금 더 논의가 필요하다. 그러나 신학과 교회의 종말론적 지평에서 볼 때는 비록 역사에서 이단으로 단죄된 전통이라 하더라도 얼마든지 새롭게 조명될 필요가 있다. 다만 이런 주변부의 전통을 자신의 논리를 합리화하기 위해서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해서는 안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류터의 논의를 모두 다룰 필요는 없고 그중에서도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몇 단락만 잠시 검토하자.

류터의 설명에 의하면 가부장적 정통 교회보다는 오히려 그 당시에 이단시되었던 대안적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예언자적-해방적 전통이 남아 있다. 예컨대 몬타니즘은 예언적 은총이 남녀 모두에게 똑같이 쏟아지고 있다고 보았다. 그들에게는 성직도 동등하게 허락되었다. 영지주의도 역시 남성적 원리와 여성적 원리를 결합한 양성신의 개념을 갖고 있었다. 영국의 청교도 좌파들은 여성도 설교를 행하고 교회 안에서 평신도 그룹의 장을 맡을 수 있는 권리를 제시하고 있다. 18,19세기 말엽의 영국계 미국인들 중에 쉐이커교도들은 하나님의 양성동체성(androgyny)에 근거해서 모든 신학적 범주들을 변형시켰다.
류터는 여성신학이 이러한 소종파나 이단들의 주장을 그대로 기독교의 정통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는 점을 정확하게 지적한다.

기독교 진리의 전통적인 규범을 단순히 뒤집어엎어서 억압된 전통들을 “올바른” 것으로, 지배적인 기독교를 “잘못된”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한다면 많은 문제들이 발생할 것이다. 많은 대안적 기독교들은 살아있는 동력으로서 남아있지 않다. 우리는 그 문헌과 사상들을 그것들과는 적대적인 교회당국에 의해 보존된 단편적인 형태로만 알 뿐이다. 우리는 이들 집단에 있어서 양성동체적 신성이라는 사상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했는지, 혹은 그들의 운동들 속에서 여성의 역할들이 실제로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해 그저 추축할 수 있을 뿐이다.(성차별, 43).

류터에 따르면 여신의 영성을 강조하는 이교적 낭만주의에 근거해서 전통 기독교를 거부하는 것은 무모한 행동이다. 위의 인용에서 볼 수 있듯이 그런 이교적 전통들은 역사를 변혁해낼 수 있는 정도의 실제적인 에너지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이교의 전통에서 여성 해방적 요소들만 새롭게 해석해 내면 충분한 것이며, 거기서 더 나아가 기독교 전통을 배척한다면 그것은 종교와 역사에 대한 정당한 판단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끝으로 류터는 여성 해방적 전통을 기독교 이후의 사상, 즉 자유주의, 마르크스주의, 낭만주의에서 찾는다. 자유주의는 19세기와 오늘날 시민권, 투표권, 재산 소유권 등의 권리를 여성들에게 확대시켰다. 그러나 마르크스 여성 해방론자들에 의하면 자유주의 여성해방은 부르주아적 전통을 여전히 내포하고 있다고 보고, 노동에서 계급과 성의 위계 체제를 사회적으로 완전히 재구성함으로써 여성을 위한 평등의 세계를 주장한다. 낭만주의적 여성 해방론자들은 자유주의와 마르크스주의에 의해서 무시된 여성의 특질을 오히려 여성 해방의 적극적인 요소로 삼고 있다. 이들 낭만주의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이 이제까지 매우 중요한, 심지어 전통적인 남성다움 속에서 발견되는 것들보다 훨씬 우월한 독자적인 가치들과 심리적인 특질들의 보유자였다”고 본다.
이러한 세 가지 전통, 즉 자유주의, 맑스주의, 낭만주의는 류터의 여성 신학적 착상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가 이들 전통을 무조건 받아들인다는 게 아니다. 그는 한편으로 이런 운동에 내재해있는 또 하나의 변질된 형태를 인식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그것이 여성 해방에 매우 적극적인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의 새로운 종합적 체계를 세워보려는 것이다.

왜 자유주의는 부르조아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로, 마르크스주의는 관료적 국가 공산주의의 이데올로기로, 그리고 낭만주의는 파시즘의 이데올로기로 각각 변질되었는가? 여성 해방론자들이 이러한 비판적 사고 유형들을 차용할 대 그들은 어떻게 그러한 결점들을 피할 수 있을까? 여성해방론적으로 단순히 차용하는 것을 모색하는 것이 아니라 세 가지 모두의 새로운 종합체를 모색하는 것이다.(52).

우리는 위에서 류터 여성신학의 기본적 착상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앞서의 데일리는 문화사적인 관점에서, 그리고 피오렌자가 성서신학적인 관점에서 이 문제를 다루는 반면에 류터는 조직신학적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 교리의 문제가 훨씬 심층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예컨대 인간학, 기독론, 교회론, 죄론, 종말론 같은 기독교 교리의 핵심 문제가 여성 신학적 틀에서 해석되고 있다. 류터는 일단 다른 여성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기독교 전통에서 규범으로 자리하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남성적 인식을 문제로 삼는다. 이 남성적 시각에서 인식된 하나님 개념으로 인해서 결국 기독교 역사는 가부장적 질서를 확산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비록 기독교가 역사에서 그런 한계를 보인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라는 단어에 담긴 남성적 이미지를 탈색시키고 여성적 이미지를 부각시킴으로써 ‘양성신’ 이미지로 해석해낼 필요가 있는가에 대해서는 동의하기 어렵다. 성서와 기독교 전통 안에 담긴 하나님에 대한 남성적 이미지는 신론이나 계시론의 구도에서 볼 때 매우 미미한 부분에 불과하다. 전능, 무소부재, 영원한 사랑, 은폐의 존재와 노출의 존재, 종말론적 다스림과 같은 성서와 신학 개념이 과연 가부장적 질서이기 때문에 이 세상을 파괴하는 쪽으로 작용하는 것일까? 사랑, 생명, 평화 같은 개념이 반드시 여성적 개념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설령 기독교 전통 안에 남성적 이미지가 부분적으로 담겨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것대로 교정해 나가면 되고, 훨씬 중요한 문제는 성서와 기독교 전통이 2천년 동안 천착해왔던 하나님의 존재론을 심화, 확대하는 작업이 아닐까 생각한다. 말하자면 인식과 존재의 관계, 역사 내재와 초월의 관계, 구원의 보편성, 타종교와의 관계 등등이 그런 것들이다. 이렇게 말하면 그런 사유 자체가 바로 가부장적이라고 비판할지 모르겠지만, 성서와 신학은 인간을 구성하는 성의 차원이라기보다는 모든 사물과 생명 세계의 궁극적인 토대라 할 수 있는 존재의 차원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만은 분명히 해야겠다.  

생태학적 여성신학- 여성, 육체, 자연

류터가 자신의 책 3장에서 “여성, 육체 및 자연- 성차별주의와 창조의 신학”을 다룬 후, 자신의 작업을 결론적 후기에서 다시 “여성, 육체, 자연- 신적 존재의 형상”을 언급하고 있다. 이는 곧 지난 역사에서 완전히 소외된 여성문제를 생태학적인 관점에서 정리하는 것을 자신이 제시하는 여성신학의 목표로 삼는다는 뜻이다. 그는 이렇게 대담하게 외친다.

우리는 우리의 육체로부터, 그리고 대지, 하늘, 바다 등에 두고 있는 우리의 뿌리들로부터 우리를 소외시키는 허위의식의 껍질을 하나하나 벗겨내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또한 우리의 관계를 왜곡시켰으며 그 결과 그 관계들을 서로 적대하는 대립적 위치로까지 전화시켜 버렸던 뒤틀린 의식들도 하나하나 폭로해야 한다.(279).

1) 자궁통제: 류터에 의하면 여성들이 당하는 첫 번째 예속은 자궁의 예속이다. 단지 출산을 목적으로 여성이 몸이 이용당하고 있다는 뜻이다. 기독교 역사에서나 헬라 역사에서는 여성들은 남편을 선택할 수도 없었고, 육체적 쾌락을 추구할 수도 없었다.
2) 착취당하는 노동: 여성들은 아버지로부터 남편으로 그 소유권이 이동됨으로써 모든 노동력을 착취당할 뿐이다. 또 하나의 다른 여성들은 완전히 노동으로부터 배제되어 단지 사치스러운 소비를 위한 장식품으로 떨어진다. 양자 모두 여성의 노동이 남자의 소유물이 된 것과 같다.
3) 대지와 인간에 대한 강탈: 이 대목은 단지 여성신학적 관점이 아니라 생태학 일반의 관점이다. 문명의 발전으로 인해서 자연은 훼손되고, 잉여 노동력은 부의 편중을 낳게 됨으로써 땅과 인간의 소외가 악순환에 빠져 있다.
4) “엉청난 거짓말”: 류터는 물질과 정신의 이원론, 빈익빈부익부의 숙명주의, 남녀차별, 가부장주의 같은 것들을 엄청난 거짓말이라고 선언한다. 또한 우리의 육체, 우리의 피, 생존을 위한 우리의 육체적 본능을 우리의 적이라고, 또는 죄라고 보는 것들도 역시 거짓말이다.
류터는 <성차별과 신학>에서 지난 2천년 동안 기독교 신학이 걸어온 가부장적 질서를 예리한 여성신학자의 눈으로 파헤치면서 결국 그런 역사가 여성을 소외시키고, 그 여성의 육체를 부정하였으며, 더 나아가 여성의 존재론적 토대라 할 수 있는 자연까지 파괴시켰다는 점을 지적한다. 우리는 그녀의 비판에 대해서 그 어떤 반론도 제기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기독교 역사에 나타난 그런 현상들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특히 여성을 출산의 도구로만 생각한다거나 영육이원론에 근거해서 인간의 육체를 천하게 여기고 나아가 인간의 육체노동을 정신활동보다 훨씬 못한 것으로 여겼다는 것도 사실이다. 류터는 이런 기독교의 가부장적 가르침을 ‘엄청난 거짓말’이라고 표현한다. 이 거짓말을 분쇄할 ‘신의 지혜’가 인류 앞에 도래하고 있다.

하느님의 평화, 자비로운 쉐키나, 지혜의 신, 권능을 주는 모체, 바로 그 분 속에서 우리가 살고 움직이며, 우리의 존재를 향유한다. 그 분이 오고 계시다. 그 분은 여기에 계시다.(성차별, 287).

우리는 류터가 분석하고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모든 것에 대해서 일단 동의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가부장적, 성차별적 신학과 교회 구조로 인하여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환경파괴, 인간성 말살 및 노동 소외, 생산과 소비의 악순환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상처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이런 이성과 풍요의 시대가 왔는데도 역시 전쟁과 폭력은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전제한다면, 하나님 인식에 대한 전혀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할 것이다. 남성적 하나님 인식이 실패했다면 이제는 여성적 하나님 인식, 또는 양성적 하나님 인식이 요청된다는 말이다.
여기까지는 류터를 중심으로 한 여성신학자들의 말이 옳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이 과연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아직 확신이 서지 않는다. 현대에 벌어지는 온갖 추문, 고난, 무의미, 탐욕은 단지 가부장적인 하나님 인식과 그런 교회의 질서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남성과 여성을 불문하고 인간 보편에 내재한 자기 한계 내지는 죄성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은 그런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요소들이 결국 남성의 경험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겠지만 여성이 인류 역사의 전면에 나설 수 있는 기회가 적었기 때문에 그런 폭력적 태도가 숨겨져 있었을 뿐이지 이런 본질적인 면에서는 남성과 여성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신학과 역사에 나타난 성차별적, 반(反)예언자적 현상을 비판하고 변혁해나갈 필요는 있지만 신론을 성적 차별성에서 접근할 필요는 없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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