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본주의적 강해설교자들의 조급증
-이동원 목사와 하용조 목사의 설교 비평-

강해설교의 빛과 그림자
서울 중심의 교회 운동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한두 번 이름만 들었지 무슨 설교를 어떻게 하는 전혀 몰랐던 지구촌 교회 이동원 목사와 온누리 교회 하용조 목사의 설교를 이번 여름에 관심을 갖고 듣거나 그들의 설교집을 집중적으로 읽을 기회가 있었다. 그들의 설교를 직접 듣는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설교에 빠져 들어갈 정도로 그들의 설교는 특별한 맛이 있는 것 같았다. 동일한 복음을 선포하는데도 다른 설교자들에 비해서 이들의 설교가 훨씬 돋보이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여기서는 한두 가지 핵심만 간단히 간추려보겠다.
남보다 뛰어난 설교의 카리스마를 확보하고 있는 이들의 우선적인 특징은 일단 ‘입담’이 남다르다는 것이다. 이동원 목사의 경우에 설교가 시작되면서부터 끝날 때까지 청중들의 관심을 자신의 설교 행위 안으로 끌어들이는 능력이 탁월했다. 물론 청중의 관심을 끌만한 예화를 자주 사용하거나 성경을 직접 읽게 하는 등, 몇 가지 주변적인 요소가 있기는 하지만 결정적으로는 역시 이 목사의 언변이 설교를 추동해가는 원천이다. 우리가 <특강 2>에서 다루게 되겠지만 이동원 목사의 예화 사용문제는 문제가 적지 않다. 그런 적용이 지나치게 기계적이라는 사실과 그 모든 예화가 거의 미국 일변도라는 것이다. 그런 문제는 일단 접어놓고, 어쨌든지 설교의 내용이 별로 풍부하거나 탄탄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청중들에게 무언가 감동을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의 입담이 아주 뛰어나다고 볼 수밖에 없다. 어떤 젊은 목사들은 그의 말하는 기술을 흉내 내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이 문제는 그런 기술로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우선 타고난 기질이 있어야 하고, 다른 사람이 대신해 줄 수 없는 독서와 공부, 자기 성찰과 삶의 경험이 종합적으로 그런 능력을 제고시킨다.
이에 반해 하용조 목사는 어눌하다고까지 말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 화려한 말솜씨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언어 구사력만으로 보면 이 목사보다 한 수 아래지만 자신만의 독특한 감수성을 통해서 이 목사 못지않은 설교의 카리스마를 확보하고 있다. 어느 쪽이 설교 현장에서 좀 더 효과적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판단할 수 없다. 서로 다른 특성의 설교자들이지만 청중을 설득해내는 능력이라는 점에서는 한국의 그 어떤 설교자들보다 뛰어난 사람들이라는 점만은 분명하다.
이 목사와 하 목사 양자 모두 “말을 잘한다”는 사실만으로 현재와 같은 설교의 효과를 얻어낼 수는 없다. 입담으로만 따진다면 이들보다 뛰어난 설교자들은 수두룩하지만 그들이 모두 이 목사나 하 목사 정도의 입지를 확보하고 있지 못하다. 다른 설교자들이 이들을 따라잡기 힘든 결정적인 이유는 이들이 소위 ‘강해설교’라는 설교방식을 체화(體化)했다는 사실에 있다.  
강해설교의 장점은 보기에 따라서 여럿이지만 두 가지로 줄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강해설교는 설교자가 성서의 세계에 철저하게 의존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설교의 군더더기가 대폭적으로 줄어든다. 시어머니의 잔소리 같은 설교에 식상해있는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그런 군더더기가 철저하게 배제된 강해식 설교는 당연히 신선하게 다가갈 수밖에 없다. 왜 우리의 설교와 목회가 ‘잔소리’의 수준을 넘지 못하는지 도대체 이해할 수 없다. 그런 것을 목회의 열정이라고 강변하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겠지만 그건 자기 욕망의 합리화일 가능성이 훨씬 높다. 이런 인간적 한계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목회와 설교를 좀 ‘소극적으로’ 실행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다.  
둘째, 강해설교는 설교자로 하여금 기독교의 기본 교리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는 장점이 있다. 일반적으로 설교자들의 신학 수준은 평신도보다 별로 더 깊지 않기 때문에 이단으로 드러났거나 그런 의심을 받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정통 교회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설교자들 중에서도 실제 설교에서는 신학적으로 선명하지 않은 발언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런데 이 목사와 하 목사는 강해설교의 특성에 따라서 성서 본문에서 말하지 않는 신학에 대해서는 가급적 언급하지 않기 때문에 기독교 교리에서 벗어나는 경우도 그만큼 드물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두 가지 장점을 다시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다음과 같다. 강해설교는 성서의 존재론적인 능력을 드러내는 반면에 설교자의 실존적 한계를 축소시킨다. 이 목사와 하 목사는 타고난, 그리고 갈고 닦은 언변에다가 이 강해설교를 꾸준하게 밀고 나감으로써 한국 강단에서 독보적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잠간 강해설교에 대한 해명이 필요한 것 같다. 강해설교는 제목설교와 대별되는 본문설교와 비슷한 형식의 설교방식인데, 본문설교가 전적으로 본문에 집중하는 반면에 강해설교는 설교자의 경험이 상당하게 개입된다는 차이가 있다. 엄격하게 말한다면 모든 설교는 강해의 성격이 있다는 점에서 강해설교를 본문설교, 제목설교, 교리설교와 구별되는 또 하나의 설교 장르로 구분할 것까지는 없다고 본다. 그런데 한국교회에서 강해설교가 이렇게 특별한 대우를 받는 이유는 두 가지인 것 같다. 하나는 강해설교라는 장르의 대가들이 교회를 부흥시켰다는 (매력적인)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강해설교가 시리즈 형식으로 진행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시리즈 형태의 설교 방식은 청중들로 하여금 말씀의 편식증에 빠지게 한다는 위험성이 있다. 교회력에 의해서 본문을 선택하는 경우와 정반대의 현상을 보이는 셈이다. 이런 형식의 강해설교는 설교자의 편에서 보면 일종의 설교편이주의라 할 수 있다. 일단 설교자가 한권의 성서를 들어다볼 수 있는 창구가 마련되기만 하면 모든 구절을 그런 식으로 재단할 수 있다는 점에서 거의 설교준비를 하지 않아도 설교실행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나는 이동원 목사와 하용조 목사의 강해설교에서 이런 현상을 분명하게 보았다. 그들은 겨우 대학생 시절 공부했던 큐티 공부 수준으로 모든 성서를 마구 파헤칠 뿐 그 이외의 심화과정이 전혀 없었다. 바르트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없다는 ‘불가능성’과 선포해야 한다는 ‘당위’ 사이의 딜레마에서 설교자가 감당해야 할 영적인 긴장감을 말재주와 감상주의로 해체해버렸다는 말이다. 물론 그런 방식이 훨씬 효과적으로 먹히는 게 우리의 목회 현실이기는 하지만.

규범론자들의 공격성
강해설교의 장점을 나름으로 체득한 이 목사와 하 목사는 강해설교의 이러한 장점을 통해서 설교의 바람직한 토대를 온전하게 확보하고 있을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한국 교회에서 놀라운 대중성을 확보하긴 했지만 거기에는 그 효과 못지않은 부작용이 자리를 잡고 있다. 그 부작용의 내용과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강해설교는 원칙적으로 설교자의 실존적 한계를 축소시키고 하나님의 존재론적 능력을 강화하지만 여기서도 역시 다른 설교 방식에서와 마찬가지로 설교자가 성서와 기독교 교리를 해석할만한 준비를 갖추지 못했을 경우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왜곡될 위험성이 크다. 다만 강해설교의 특성상 이런 왜곡 현상이 잘 드러나지 않고 숨어 있기 때문에 설교자나 청중이 서로 기만하거나 당하면서도 그 사태의 심각성을 충분히 알아채지 못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대중들이야 설교자가 하나님, 은혜, 구원 같은 용어들을 그럴듯하게 사용하니까 그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고 설교라고 생각하겠지만 여기에는 엄청난 왜곡이 자리 잡을 수 있다. 이들의 설교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가장 큰 부작용은 말씀을 절대적인 ‘규범’(norm)으로 간주하고 오늘의 청중들에게 그대로 주입시키려고 애를 쓴다는 것이다.  
물론 그들이 2천 년 전, 또는 3천 년 전의 ‘삶의 자리’에서 형성된 성서를 오늘 우리가 그대로 따라야 할 ‘규범’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는 신앙의 순수성을 가리키는 한 단면이라고 할 수도 있다. 다만 자신들의 신앙적 태도를 남에게 강요하거나 남을 재단하는 기준으로 강요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이는 흡사  ‘여호와의 증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규범’으로 지키기 위해서 감옥에 가는 한이 있어도 병역의 의무를 거부하고 자식의 생명을 담보하면서까지 수혈을 거부하는 행위가 비록 성서의 형식에 집착함으로써 그 내용을 훼손시키는 우를 범하는 일이지만, 자학적인 범주에 머물 뿐이지 가학적으로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내가 상관할 필요가 없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 목사와 하 목사의 성서해석은 단지 순수하다거나 열정적인 데서 머무는 게 아니라 매우 무모할 정도로 공격적인 모습을 보일 때가 적지 않다는 점에서 길을 잘못 들었다. 자신들이 성서에서 확인한 규범에서 약간이라도 벗어난 대상이 있다면 그들은 흡사 십자군 전쟁에 나선 군사들처럼 ‘공격 앞으로!’의 자세를 보인다. 이들이 동성애자들을 단죄하는 대목을 보면 그 치기(稚氣)와 저돌성에 섬뜩한 느낌마저 든다.

그런데 가장 아름다운 것을 가장 추한 것으로 바꾸어 놓는 것 이것이 바로 사탄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성적인 타락이 최악의 자리에 도달하게 되면 나타나게 되는 것이 동성연애의 현장입니다. 이성을 실험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반드시 동성을 실험하기 시작합니다. <중략>
그 결과로 하나님을 떠난 우리 시대의 모습이 가장 현저하게 드러나 있는 삶의 장면이 바로 성적인 타락입니다. 이 성적인 타락에 대한 가공할 타락의 극악한 현상이 바로 동성연애의 삶의 현장이 아닌가요? 로마 시대를 처벌하신 하나님이 오늘 이 시대에 침묵하고 계십니까? 이 시대의 이런 성적인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처벌은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습니까? 그것이 바로 AIDS입니다. (이동원, 로마가 들어야 했던 복음 35,36).

이 목사는 로마 시대를 처벌하신 하나님이 오늘 이 시대에 에이즈로 처벌하신다고 용감하게 주장한다. 동성애자들이 모두 에이즈에 감염된 것도 아니고, 에이즈가 반드시 동성애 때문이라는 확증도 없는 마당에 그는 몇 가지 정보에 의존해서 그렇지 않아도 성적 소수자로서 소외 받는 그들을 위로하지 못할망정  더 심하게 구석으로 몰아넣는다. 이런 대목만 본다면 그는 은혜의 설교자가 아니라 오만한 심판자의 자리에 서 있는 것 같다. 하 목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동성애는 하나님의 저주”라고 독설을 쏟아낸다.

여자와 여자가 살면 무슨 일이 생깁니까?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가정이 없어집니다. 보통 일이 아닙니다. 마귀의 방법입니다. 미국 사회는 동성연애를 합법화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정치적인 세력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인간의 숫자의 힘으로 바꾸어 버리기 시작했습니다. 저주받은 사회입니다. 동성연애는 하나님의 저주입니다. 그렇게 하고서 교회에 나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교회가 타락하니까 동성연애 하는 사람들끼리 교회를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동성연애 하는 사람도 목사 안수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가정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여자와 남자의 역할이 다릅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여자와 남자의 역할을 다 바꾸고는 그것을 평등이라고 부릅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하용조, 로마서의 축복, 77).

하 목사는 어떤 근거에서 동성애를 하나님의 저주라고 단언하는 것일까? 동성애자들이 폭력적으로 이 사회를 전복하려는 야심을 가졌다거나 다른 사람에게 극도의 불쾌감을 끼치는 부도덕한 집단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면 혹시 몰라도, 그렇다고 하더라도 설교자는 이런 방식으로 단죄할 수는 없는데, 단지 설교자와 다른 성적 취향을 가졌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저주’ 운운할 정도로 그들을 비난한다는 것은 설교자로서 최소한의 양식도 포기한 게 아닐까 생각한다.
더구나 이 목사와 하 목사는 바울의 비난을 단순히 전달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강화시킨다. 그게 참으로 이상하다. 자신들이 아무리 성서를 하나님의 절대적인 규범으로 여긴다고 하더라도 성서 시대와 전혀 다른 오늘의 삶에 적용시킬 때는 오늘의 정황을 어느 정도 감안하는 법인데, 이들은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동성애자들을 매섭게 공격한다. 이 자리에서 동성애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의 성(性)윤리에 대해서 더 이상의 왈가왈부하지 않겠다. 이미 학문의 세계에서 일반적으로 수용되고 있는 진화론을 철저하게 부정하는 이들의 태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이들은 생명의 깊이와 그 신비에 마음을 여는 게 아니라 ‘규범’ 안에서 그 세계를 마음대로 재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무당이 사람을 잡는 법이다.
나는 이들이 설교시간에 동성애자들을 직접적으로 비난한 사건에 대해서 여러 관점으로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어쩌면 그들의 내면을 심리학적으로 검토해보아야 할지 모르겠다. 나까지 포함해서 설교자들의 심리와 정서가 왜곡될 가능성은 항상 열려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런 부분을 스스로 성찰해보아야 한다. 아니면 그분들이 잠깐 실수를 하신 걸까? 성서에 대해서 아무리 세심하게 접근한다고 하더라도 때에 따라서 오해하는 경우가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이런 일은 실수도 병적인 심리작용이나 실수가 아니라 그들의 신앙과 신학과 삶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사람은 자기가 아는 것만큼만 볼 수 있다고 하지 않는가.

근본주의의 아마추어리즘
그들의 이러한 태도는 일종의 도덕주의라 할 수 있는 퓨리터니즘과 성서의 문자적 권위에 집착하는 축자영감설의 결합이다. 원래 퓨리터니즘은 영국 국교의 교권에 의한 신앙의 형해화, 그리고 도덕성의 해체로부터 다시 신앙의 순수성과 열정으로 돌아가려는 신앙 운동이었으며, 축자영감설은 로마 가톨릭의 교황과 교권 중심의 신앙에서 말씀 중심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었다. 만약 이런 원래의 목표를 순수하게 유지하기만 했다면 이 두 운동은 기독교의 본질을 회복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폐쇄적이면서 동시에 독단론적 입장에 빠져들게 되었다. 그런데 이 두 신앙운동은 미국에서 ‘근본주의’라는 종교 현상으로 나타나면서 큰 세력을 떨치게 되었는데, 이 목사와 하 목사는 이런 미국의 근본주의에 거의 절대적인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사실 근본(根本)이라는 말은 우리에게 매우 소중한 삶과 신앙의 태도를 가리키고 있는데, 이것이 여러 부분에서 퇴행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게 아쉽다.  
여기서 미국의 근본주의의 정체에 대해서 더 이상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만 한 가지 사실만 지적하자. 한 가지는 어떤 우여곡절이 있었든지 미국의 근본주의가 우리의 운명이었다는 사실 자체이다. 흡사 미군이 50년 넘게 서울 한복판에 버젓이 자리 잡고 있듯이 우리가 오늘 그 역사적 사실성을 부정할 도리가 없다. 그런데 그런 사실은 그 사실성에 머무는 것만이 아니라 오늘의 현실성이 되어버렸다. 즉 그 미국의 근본주의가 한국교회의 신학과 구조와 내용을 온통 지배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 목사와 하 목사 유의 성공한 설교자들은 한국교회를 견인하는 주류라는 이 현실 앞에서 우리는 현재 아무런 대책도 없이 그런 흐름을 추종하려는 움직임만 보고 있을 뿐이다.    
다시 우리의 본론으로 돌아오자. 생각의 방향을 조금 바꾸면 동성애자들을 향한 비난의 책임은 이 목사와 하 목사가 아니라 2천 년 전 로마의 동성애 현상을 비난한 바울(롬 1:26,27)에게 있을지 모른다. 그들의 책임은 바울의 진술을 있는 그대로, 또는 청중의 마음을 끌어내기 위해서 약간 과장했다는 것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면책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동성애자들에 대한 바울의 비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실체적 진실을 우리가 아직 정확하게 모를 뿐만 아니라 설령 진술된 그대로 바울이 비난했다고 하더라도 오늘과 그 당시의 성윤리가 전혀 다르다는 점에서 설교자는 성서를 우리 실정에 맞도록 해석해야할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여자들은 교회 집회에서 말할 권리가 없으니 말을 하지 마십시오”(고전 14:34)라는 바울의 언급을 오늘 그대로 적용시킬 수는 없는 것 아닌가. 2천 년 전 고린도 교회의 상황에서 진술된 바울의 가르침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작년에 어느 교단의 총회장이 신학대학교 설교 시간에 발언했다는 ‘기저귀를 찬 여자가 강단에서 설교하게 할 수 없다’는 식의 발언도 가능하게 된다. 아마 이 목사와 하 목사도 본인들 교회에서 바울의 가르침을 이런 식으로까지 극단적으로 적용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유독 동성애자들을 흡사 종교 재판에 임하듯이 정죄(定罪)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그 설교를 직간접으로 들은 동성애자들 중에서 한 사람이라도 시험에 들었다면 그들은 그 책임을 바울에게 전가할 셈인가?
나는 이 분들의 인격이 뒤틀려 있다거나 가부장적 엄숙주의에 기울어져 있다거나 세상의 이치를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성속 이원론에 빠져 있기 때문에 그런 결과에 이르렀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신학적 오리엔테이션이 터무니없이 부족한 것 같지도 않다. 그 근본적인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의 설교 현상만 놓고 볼 때 그들이 성서를 심도 있게 해석할 줄 모른다는 게 그 대답이다. 이는 곧 그들이 비록 단기간에 교회를 부흥시켰는지는 몰라도 성서 해석에서만은 아마추어리즘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말이다. 아마추어는 아무리 다른 재주가 많아도 역시 그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다.
설교를 기보(棋譜)해설이라고 가정해보자. 프로 9단이 둔 기보를 해설하는 사람이 겨우 아마 5급 정도라고 한다면 그는 죽었다 깨는 한이 있더라도 바둑의 깊은 수(手)를 읽지 못한다. 그 이유는 그 기보에는 기본적으로 아마 5급의 눈에 보이지 않는 길(道)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해설자가 그럴듯하게 말하는 재주가 있고 그런 말발이 먹히는 상황이라면 꼼수를 정수로 왜곡시킬 가능성은 늘 열려있다. 다만 5급의 해설자가 자신의 주제를 파악하고 기보에 은폐되어 있는 깊은 수의 신비가 드러날 수 있도록 조심스럽게 접근하기만 한다면 해설자로서 최소한의 자격은 있다 하겠지만, 강해설교의 대가로 자타가 인정하고 있는 이 분들에게서 이런 태도를 기대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강해설교의 대가들을 이런 식으로 깎아 내리는 것에 대해 못마땅해 할 분도 있을 것이다. 또한 지구촌 교회와 온누리 교회 신자들이 보여주는 신앙생활의 역동성이 이 목사와 하 목사의 설교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나의 이 비판이 단지 ‘딴지걸기’에 불과하다고 생각될지 모르겠다. 이 자리는 특정한 교회 신자들의 신앙 유형을 거론하는 자리가 아니기 때문에 이 문제는 거론하지 않겠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모이며, 그들이 많은 일을 한다는 것만으로 바람직한 기독교 신앙이라고 단정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하나의 종교 현상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인다는 것은 어느 종교에서나, 심지어는 사이비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나는 것인가 우리의 논의에서 일단 제외해야 한다. 내 눈에 그들의 설교는 하나님 존재의 신비와 그 말씀의 깊이를 구도자처럼 천착하는 게 아니라 그 말씀을 단순히 절대적 ‘규범’으로만 받아들임으로써 결국 청중들의 영성을 풍요롭게 하기보다는 황폐화하는 방향으로 나갈 뿐이다. 이것이 곧 근본주의적 강해설교의 결정적인 한계이다.

친미 사대주의
이런 한계는 그들이 동성애자들을 단죄했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인류의 역사와 관계된 문제를 자주 왜곡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확인된다. 사회주의, 북한, 노조, 운동권(?) 등등, 그들은 인류가 감당해야만 했던 역사의 무게를 아무런 해명 없이 신앙이라는 명분으로 간단히 폐기시키는 우를 범한다. 그리고 자신들과 생각이 다른 집단을 향해서 끊임없는 비난과 조롱을 보낸다. 그 모든 게 바로 기독교 신앙의 이름으로 행해진다는 게 슬픈 일이다. 나는 여기서 해방신학이나 민중신학만이 성서를 바르게 해석하는 것이라는 뜻으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다. 아무리 보수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나라와 종말론적 구원의 세계를 약간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설교자라고 한다면 역사의 신비를 꿰뚫고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들 두 목사는 역사의 신비에 대해서 마음을 열어두지 않는다.
그들의 설교에서 이런 증거를 많이 발견할 수 있지만 그 중에서 한 가지만 제시하겠다. 이들의 의식에 뿌리를 박고 있는 친미 사대주의는 그들의 세계관과 역사관의 미숙성을 적나라하게 폭로한다. 물론 개인의 판단에 따라서 미국에 대한 평가가 다를 수 있지만 거의 일방적으로 그 나라를 지지한다는 것은 가치 판단의 차이라기보다는 그것의 미숙성을 보여줄 뿐이다. 이동원 목사가 아무리 미국 생활이 몸에 젖었다고 하더라도 거의 미국 일변도의 예화를 사용한다는 것과 영어 단어 사용이 지나치게 많다는 것은 단지 습관의 문제가 아니라 미국이라는 나라를 향한 그의 근본적인 인식과 연결된 사태이다. 더 나아가서 그는 전형적인 ‘레드 콤플렉스’에 사로잡힌 사람처럼 북한을 깎아 내리고 미국을 치켜세운다.

그러나 이상한 방법으로 구합니다. 꼭 저 북한 같아요. 도움이 필요한 걸 알면서도 정당하게 말하지 못하고 비비 꼬아가지고 도움을 얻어낼려고 한단 말이죠. 이 잘못된 공산주의 철학이 사람들의 윤리와 가치관을 파괴시키는 결론이에요. 얼마 전에 저희 교회에 연변 과기대에 우리 김 박사님께서 다녀가셨습니다마는 김진영 박사께서 그 중국에서 사시면서 느낀 것 중에 하나는 뭐냐하면 이 공산사회에 세뇌된 사람들에게 두 가지 특성이 있다면, 결코 볼 수 없는 두 가지, 절대로 하지 않는 두 가지, 첫째는 뭐냐하면 I'm sorry가 없다는 것, 잘못했다는 말을 하지 않는 것, I'm sorry, 또 하나는 들어볼 수 없는 것 중에 하나가 Thank you, 감사합니다. 이 소리가 없다는 것, 그러나 미국 사람들 만나면 얼마나 자주 이 소리를 합니까?  I'm sorry, I'm sorry. 자기가 발을 밟는 사람이 아니라 밟히고 나서도 밟히는 사람이 I'm sorry 그래요. 한국 사람들은 밟아놓고도 I'm sorry를 안 해요. 그러니까  I'm sorry, 그리고 Thank you, 기독교 문화가 준 그 영향입니다. 기독교 문화가 준 영향, 그러나 아직도 기독교 문화가 우리에게 생활화되지 않아서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도 아직도 잘못을 정직하게 인정하는 겸허함이 우리 문화나 라이프 스타일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동원, 2000. 12.17일자 설교, 마리아 찬가 1).

아무리 설교의 내용을 강조하기 위한 발언이었다고 하더라도 이런 정도로 반북, 친미의 자세를 보이는 이유를 나는 모르겠다. 도대체 I'm sorry와 Thank you가 무슨 기독교 문화의 라이프스타일이라고 이런 말투 하나로 미국을 치켜세우는지. 하 목사의 경우도 역시 똑같다. “일단의 유럽 청교도들이 핍박과 학살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고자 하는 목적으로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그리고 유래 없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 미국은 그 후로 강대국이 되었습니다. 그 열쇠가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을 잘 섬기고 싶었던 그들의 믿음이었습니다.”(하용조, 로마서의 비전, 146). 미국의 힘이 바로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역사에 대한 최소한의 인문학적 소양이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이런 내용을 설교 시간에 선포할 수는 없다. 이건 설교라기보다는 성서가 늘 경계하고 있는 바알 숭배이다.
이들의 역사의식이 이런 정도인 줄은 이들의 설교집을 읽거나 설교를 세세하게 듣기 전에는 나도 미처 알지 못했다. 북아메리카의 인디언들과 아프리카의 흑인 노예들에게 가한 청교도들의 폭력을 그들은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는가? 2차 세계대전 이후 동서냉전 시대에 미국이 펼친 제국주의적 정책을 그들은 모르는가? 그들의 그런 일관된 폭력성이 이번 이라크 전쟁에까지 이를 가능성이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눈을 감는 이유는 무언가? 흡사 개인과 국가와 인류의 역사에 내재해 있는 모순과 갈등과 그 어둠의 신비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단지 ‘공자 왈’ 유의 도덕주의에 사로잡힌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이 어린이들에게 들려주는 훈화 수준과 전혀 다른 게 없다. 나는 여기서 설교의 전반적인 맥락을 무시하고 이들의 몇 마디 언급만 끊어내서 트집 잡으려는 게 아니다. 이들의 설교를 끌어가는 전반적인 역사 인식이 위에서 인용한 구절에 그대로 담겨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려는 것뿐이다.

설교의 조급증
이 목사와 하 목사의 설교에 적지 않은 문제가 발견된다고 하더라도 그들에 의해서 한국 교회 강단이 상당한 정도로 자극을 받고 있으며, 더 나아가서 그들이 침체기에 빠진 한국 교회의 역동성을 제고시켰다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사실 문제를 찾기 시작하면 이 목사나 하 목사보다는 그 이외의 목사들에게 훨씬 많은 문제가 있다는 점에서 이들을 비판하기보다는 적극적으로 옹호해야 한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이 주장의 중심에는 이 분들의 설교가 확보한 대중성이 있다.
만약 ‘꿩 잡는 게 매’라는 논리가 설교에도 적용된다면 내가 할 말은 없지만, 설교는 대중성보다는 진리의 성격이 우선하기 때문에 그런 논리를 받아들일 수 없다. 이들은 대중성을 얻기 위해서 설교의 지평을 끊임없이 가벼운 신앙적 담소거리로 확대 재생산해내고 있다. 이것은 지난날 부흥회와는 약간 무늬를 달리 하지만 실제로는 기독교 신앙의 우민화(愚民化)에 불과하다. 하나님의 말씀이 노출과 은폐의 방식으로 담지(擔持)하고 있는 그 생명의 깊이와 리얼리티를 외면하고, 우리가 여러 사이비 이단들에게서도 비슷한 현상을 발견할 수 있듯이 단순히 청중들의 죄책감을 자극하거나 아니면 기독교 교리의 반복 학습에 머물거나, 또는 다양한 이벤트를 통해서 종교적 열정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설교를 반복해서 듣는 청중들의 신앙이 어떤 내용으로 채워질지 불을 보듯 분명하다.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어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통치에 마음을 열기보다는 단조로운 절대 규범과 가벼운 종교적 감상주의에 안주함으로써 종교적 자기만족에 머물고 말 것이다. 더 나아가 이런 설교에 물들게 되면 외면적으로는 영적 에너지가 분출되는 것 같은 포즈를 취하겠지만 역사의 신비 앞에서는 한편으로 너무나 무기력하고 다른 한편으로 지나치게 독선적인 사람들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한국의 모든 목사들이 염원하고 있는 대형교회를 달성한 분들이니까 뭔가 배울 게 있다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것이다. 교회 성장이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요긴하다는 점을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이런 문제는 여기서 거론하지 않겠다. 다만 다음과 같은 사실만은 양보하지 않겠다. 교회성장과 하나님의 나라와는 별로 상관없는 관계라는 사실 말이다. 아마 어떤 분은 “당신은 너무 이상적이아. 당신의 말은 목회현실을 모르는 탁상공론이고, 또는 먹물들의 고담준론에 불과하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주장이 오히려 현실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잠을 자고 있을 때도 지구는 역동적인 생명운동을 펼치고 있듯이 하나님은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 방식으로 당신 자신의 일을 하고(missio Dei)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믿는다면 이제 더 이상 교회 성장에 대한 말은 그만두어야 한다. 목사들도 먹고살아야 한다고? 교회에서 밥을 주지 않으면 다른 일을 해서 입에 풀칠하는 게 훨씬 낫다.  

흥분하지 말고 시나브로 결론을 내려야겠다. 나는 이 목사와 하 목사의 설교에서 어떤 조급증을 보았다. 청중들을 당장 신앙적 결단으로 끌어내려는 조급증 말이다. 또는 자신들의 설교를 통해서 청중들이 감동 받아야만 한다는 결벽증이 도사리고 있는지 모르겠다. 본인들이 의식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들은 설교를 통해서 청중들을 딱딱한 음식을 먹지 못하는 미숙한 아이들로 만들어버린다. 그래야만 자신들의 설교가 당장에 효과를 보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좋게 보면 하나님에게 받은 사명감의 억제할 수 없는 표출이지만, 정확하게 보면 아직 진리의 길에 들어서지 못한 열광주의적 근본주의자의 어리석음이다. 나는 이 두 설교자만이 아니라 모든 한국의 설교자들에게 성령의 주체적 활동을 위해서 잔소리꾼 같은 설교자의 역할을 좀 줄여나가라고 조언하고 싶다. 다음과 같은 리츨의 ‘쓴소리’는 우리 모두 귀 기울일 만하다.  

사람들은 당시에는 듣고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을 마음속에 새겨두는 법이다. 우리에게 가장 강한 인상을 주고 우리의 생애를 철저하게 바꾼 설교는 대개 시간이 훨씬 지난 후에야 비로소 충분히 이해되는 것이었다. 설교자는 이 점에 대하여 확신을 가져도 되며 그가 설교에서 말한 것을 모든 청중이 당장 이해해야한다는 목표를 신경질적으로 추구해서는 안 된다. 쉽게 이해되고 지나치게 단순화된 설교가 자칫 참된 생명의 말로 해석될 수도 있다. 오늘날 교회생활의 위험한 경향은 지나치게 복잡하게 된 설교에 있다기보다는 너무나 한정된 말로 너무 단순하게, 청중이 옛날부터 들어온 것을 너무 많이 반복하여 재확인하는 것에 불과한 설교에 있다. 이해되지 않는 것보다는 오해되는 게 훨씬 더 위험하다. 청중에 대한 설교자의 진실한 사랑은 청중을 어린애처럼 다루는 게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어린애는 자기들의 시시콜콜한 문제를 해결해주는 영적인 아버지를 열심히 찾는다. 설교를 가능하게 하는 참된 사랑은 설교를 듣는 청중을 성숙한 남녀로 보고 한 주간 동안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지, 어떻게 증오하고 사랑해야 하는지, 어떻게 돈을 벌어야 하는지 또한 써야 하는지를 알고 있는 사람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럴 때 설교자는 이 사람들이 죄와 약함에 있어서 설교자와 함께 십자가 아래 서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 사람들은 비록 그들 자신은 깨닫지 못하지만 설교자와 함께 봉사하도록 설교자에게 위탁된 사람들인 것이다. (디트리히 리츨, 손규태 역, 설교의 신학, 대한기독교서회, 1990년, 204, 205. 부분적으로 흐름에 맞도록 고쳐 적었다. 필자주. ).

송재왕

2004.09.30 13:19:16
*.66.212.122

신학과 철학 맞죠? @@;; 앗싸~ 오늘 특강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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