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장 신학과 철학

신학입문 조회 수 4695 추천 수 158 2004.11.16 23:20:23
11장
신학과 철학

한국의 신학교에서는 철학 공부가 별로 중요하게 다루어지 않는 상태이다. 유럽의 학생들은 고등학교 때 이미 교양철학과 라틴어 공부를 통해서 초보적인 철학적 사유에 대해서 맛을 보고 들어오기 때문에 신학의 효율성이 높은 편이지만 우리의 형편은 그렇지가 못하다. 이제 신학대학교에 들어온 이후라도 신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고 싶은 학생이라고 한다면 반드시 철학은, 동양철학까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서양철학만큼은 충분할 정도로 학습해야만 할 것이다. 우선 신학과 철학의 관계에 대해서 아래의 졸고를 읽어보도록 하자.

신학과 철학
신학과 철학 중에서 어떤 쪽이 기독교 전통에 가까울까? 대개의 사람들은 ‘두 말하면 잔소리’라는 식으로 신학이 기독교의 전통에 가까울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이런 생각은 반쯤만 옳다. 원래 신학(神學)이라는 용어는 플라톤에 의해서 최초로 사용되었는데, 그 당시에 이 신학은 ‘신화와 관련된 이야기’였다. 그래서 초기 기독교 교부들은 신학이라는 용어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오히려 철학(哲學)에 기울어져 있었다. 철학은 신화처럼 허황한 이야기를 진리론적인 차원에서 검증하는 학문이기 때문에 기독교를 진리로 생각했던 교부들은 기독교야말로 가장 참된 철학이라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기독교는 신학이라는 용어를 기독교적으로 재해석해서 받아들임으로써, 이제 신학은 철학에 의해서 그 토대가 검증받아야 할 신화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철학 중에서 가장 확실한 철학으로서의 자리를 다지게 되었다.
오늘의 적지 않은 기독교인들은 여전히 철학을 기독교 신학과 대립되는 학문으로 간주하고 있다. 이런 입장을 변호하기 위해서 인용되는 대표적인 교부가 터툴리안인데, 그는 “아테네는 예루살렘과 함께 무엇을 이룰 수 있는가? 아카데미는 교회와 함께 무엇을 이룰 수 있는가?”라고 말한 적이 있다. 루터 역시 철학적인 이성을 창녀라는 극단적인 말로 표현한 적이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터툴리안도 스토아 철학을 받아들였으며, 자신을 가리켜 오캄주의자였다고 고백한 적이 있는 루터 역시 로마 가톨릭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비난했을 뿐이다. 우리는 교부들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기독교 신학이 철학과의 관계를 대립적으로 보았다는 증거를 찾기 힘들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플라톤의 철학 안에 삼위일체론이 내재되어 있다고까지 언급한 어거스틴에게서 볼 수 있듯이 신학은 철학과 도반(道伴)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신학과 철학 사이에 역사적으로 전개된 이런 깊은 연관성은 절대정신의 변증법적 발전을 통해서 이루어지게 될 하나님의 역사가 곧 사랑의 세계라고 본 헤겔 이후에 위기에 빠져들게 되었다. 19세기 중반 이후 니체, 마르크스, 프로이트 등에 의해서 새롭게 전개된 인간 중심적 세계관, 그리고 다윈과 파블로프 같은 이들에 의해서 발전된 생물학적 인간론은 신학으로 하여금 더 이상 이 세상의 학문과 길동무를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런 현상은 교회 외부의 인간학적 착상에도 그 원인이 있겠지만 더 엄밀하게 말한다면 기독교 내부의 원인이 훨씬 크다.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가 제기한 지동설을 학문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종교적 권위로 억압하던 교회가 그 이후의 모든 학문을 향해서도 똑같은 태도를 보이다가 결국 이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불신 당하게 된 것이다. 이런 위기를 탈출하기 위해서 쉴라이에르마허 같은 학자는 기독교 신앙을 ‘절대의존의 감정’이라고 규정했으며, 리츨은 칸트의 영향을 받아 ‘윤리적 요청’에서 하나님의 존재 가능성을 확보해보려고 했지만 그런 정도로는 신학과 철학의 관계가 복원되기 어려웠다. 오히려 날이 갈수록 남보다 못한 관계로 발전했다.
오늘 기독교 신학이 처한 형편은 어떤가? 1921년 ‘로마서 주석’ 2판을 펴낸 칼 바르트는 기독교 교부 시대에 있었던 신학과 철학의 관계를 복원하는 것보다는 성서와 기독교 2천년 역사적 전통에 집중함으로써 기독교 신학의 내적 정당성을 마련해보려고 했다. 바르트와 쌍벽을 이루는 루돌프 불트만은 실존철학의 영향을 받아 인간의 신앙적 실존을 기독교 신학의 토대로 삼아보려고 했다. 바르트 신학을 말씀 객관주의라고 한다면 불트만 신학은 말씀 주관주의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들에 의해서 20세기 전반부 개신교 신학이 지배당했다.  
이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의 기독교 운동과 신학은 양극단으로 치우치게 되었다. 한쪽은 이 역사를 계급투쟁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해방신학이며, 다른 한쪽은 여전히 개인의 영적이고 도덕적인 구원에만 천착하는 근본주의신학이다. 물론 이 양 극단 사이의 스펙트럼이 넓기 때문에 그 여러 갈래를 여기서 모두 설명하기 힘들지만 거칠게 윤관만 잡아서 본다면 다음과 같이 두 경향으로 구획 정리할 수 있다. 전자는 사회, 역사, 혁명이, 후자는 개인, 도덕성, 개량이 그 중심축으로 작용하다. 이들이 사회와 교회, 역사와 실존이라는 양 극단으로 구별되어 있지만 철학과의 대화에 성실하지 못하다는 점에서는 비슷한 한계를 보이고 있다. 물론 넓게 보면 해방신학은 마르크시즘에, 근본주의는 케인즈와 막스 베버의 경제철학과 선을 대고 있지만 교회 현장에서, 특히 설교 현장에서 그런 철학적 치열성은 찾아보기 힘들다. 여기서 해방신학적 전통과 근본주의적 전통을 싸잡아 철학의 부재라고 비판하는 것은 물론 오해의 소지가 없지 않다. 해방신학적 전통은 경우에 따라 기계적이고 낙관주의적인 역사관에 빠지는 일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역사의 신비를 향한 영성이 탄탄하다는 점에서 근본주의와 같은 차원에서 다루어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 교부들과 지난 2천년간의 기독교 신학자들이 철학과의 대화를 포기하지 않은 이유는, 그리고 오늘 우리도 여전히 그런 전통을 유지해야만 하는 이유는 기독교의 도그마가 보편적 진리로서 손색이 없다는 사실과 아울러 그런 보편적 진리의 지평을 확보하기 위해서 가장 적절한 도구가 바로 철학이라는 사실에 있다. 여기서 말하는 철학은 단지 역사에 등장했던 구체적인 사조로서의 철학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인간의 삶과 역사의 리얼리티를 해명하려는 모든 인문학적이고 자연과학적인 담론을 일컫는다. 이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우리는 이 세계를 창조하고 예수 사건을 야기했으며, 종말을 완성하실 하나님, 그리고 이 세상을 끌어가는 생명의 영인 성령을 훨씬 적절하게 변증할 수 있을 것이다. (졸고, 말씀과 삶, 2004년 11월호에서)

철학적 사유

위의 글을 바탕에 두고 이제 좀더 구체적으로 이 문제를 다루어보도록 하자. 목회 현장에서 신학적 사유가 별로 중요한 기능을 감당하지 못하는 이유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우리가 신학을 ‘모른다’는 것이다. 바둑의 길을 모르면 바둑이 재미없듯이 신학을 모르면 신학에 흥미를 느낄 수 없는 법이다. 어떤 사람은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읽었고, 현대신학의 전반적인 흐름을 알고 있으니까 신학을 안다고 말할지 모르겠다. 여기서 우리는 신학의 정보와 신학적 사유를 구분해야만 한다. 조치훈 씨가 둔 바둑의 기보 몇 편을 달달 외웠다고 해서 바둑의 길이 보이는 게 아닌 것처럼 몇 년 동안 신학에 관한 역사와 정보를 습득했다고 해서 신학을 아는 게 결코 아니다. 만약 신학을 아는 목사라고 한다면 위에서 확인한 것처럼 목회 현장에서 공연한 것으로 인해 자신의 영성을 고갈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칼 바르트, 위르겐 몰트만,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 하인리히 오트, 에버하르트 융엘 등, 여러 신학자들의 책을 읽고 충분히 소화한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런데 그 작업 자체가 힘들기는 하지만 그것이 바로 신학적 사유의 핵심이 아니다. 그 신학자들이 궁극적으로 언급하려고 하는 하나님은 그런 신학 이론에 완전히 담기는 게 아니라 흡사 가을바람이 우리를 스쳐지나가듯이 그런 하나님의 손길을 최대한 논리적으로 설명하려는 노력일 뿐이다. 여전히 신학적 체계 안에 담길 수 없는 그 하나님과 그 나라 안으로 발걸음을 들여놓는 것이 곧 신학적 사유의 단초이다. 도를 얻기 위해서 토굴이나 암자에서 화두를 붙들고 수행하다가 갑자기 돈오(頓悟)의 세계에 들어가듯이 신학도 역시 행위와 언어의 세계를 초월하여 자유롭게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생명의 세계를 열어가는 하나님의 영에게 사로잡히는 경험이다. 그렇다고 해서 여기서 내가 어떤 초월적 신비주의적인 영성을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학문의 방식이든지 직관의 방식이든지 결국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세계를 사유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의 이런 작업에 결정적으로 기능하는 분야가 곧 철학이다. 하나님의 존재에 관해서 사유하려면 반드시 철학적 존재론과 인식론의 훈련을 거쳐야만 한다. 아마 어떤 사람은 스스로 존재하는 하나님의 계시를 인간학적 인식 안에서 해결하려는 철학은 신앙적이지 않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여기서 우리는 크게 오해하는 부분이 있다. 철학이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한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자신을 계시하시지만 그것을 인식하려면 그것을 인식할 수 있는 사유의 통로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이미 교부 시대부터 플라톤의 이데아 이념이 하나님을 형이상학적 구도에서 설명하기 위한 도구로 채용되었듯이 기독교 신학은 지난 2천년 역사 안에서 끊임없이 이런 철학과의 대화를 통해서 하나님과 그의 계시를 명확히 하고 심화시키려고 노력하였다. 그런 기독교 신학의 전통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대개의 신학대학교에서는 신학생들에게 철학을 공부할 기회를 충분하게 제공하지 않고 있다. 이는 주로 미국 신학대학교의 현상이라 할 수 있는데, 디오게네스 알렌의 목소리를 들어보자.

신학생들이 철학을 연마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는 신학대학들이 다소 있기는 하다. 이러한 요청에 부응하고 노력하고 있기는 하지만, 특히 영어권의 지역에서 그들은 오히려 오늘날의 철학 분야가 신학으로부터 점차로 멀어져서 신학에 대한 이해가 상당한 정도로 강화되기 이전에 더욱 많은 시간을 철학 공부에 할애해야 한다는 엄연한 사실을 거스르는 방향으로 달음질치고 있다. 대부분의 신학대학들에서는 교수와 교육 자원에 드는 많은 비용으로 인해 정규적인 체제에서 많은 학생들이 철학에 대한 광범위한 공부를 하기 위한 기회가 배제되고 있는 실정이다. 신학대학원의 학생들 중에 신학대학이나 학부과정에서 하나 이상의 철학 과목을 이수한 학생은 소수이며 대부분은 거의 택한 적이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따라서 학생들이 신학 공부를 시작하면서 자주 좌절하게 되는 것은 결코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그들은 꼭 필요한 선행조건을 갖추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중략> 그들은 철학적인 지식이 실제로 주요한 교리 형성 체계와 신학적 저작의 의미를 더욱 깊이 음미할 수 있게 해 준다는 점을 깨달을 기회를 갖지 못했었다. 그들은 철학을 시도해 보았지만 그게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을 내렸으며, 결과적으로 의미심장하고 실효성 있는 신학하기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한 채 그들 나름의 길로 내닫고 있다. (디오게네스 알렌, 정재현 역, 신학을 이해하기 위한 철학, 대한기독교서회, 4, 부분적으로 고쳐 적었음).

신학의 토대가 바로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그 하나님을 사람들에게 변증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그가 창조한 이 세계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신학적인 차원에서 본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가 창조한 이 세상에 초월해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 창조 행위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존재론이기도 하다는 점에서(내재) 우리는 이 세상을 정확하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창조한 이 세상의 현실성을 설명하려는 노력이 바로 철학이다. 헬라의 철학자들은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물, 흙, 공기, 불 등으로 이루어졌다고 설명해보려고 노력했다. 또는 이데아로부터 유출된 것으로 이해되기도 하고, 이성에 의해서 성립된 것으로 제시되기도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질료와 형상으로 설명해보려고도 했다. 그 어떤 주장도 결정적인 대답이 되기는 힘들지만 이 세상을 나름대로 설명해보려고 했다는 점에서 그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있는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철학은 필수 불가결한 작업이다.
물론 이에 대한 다음과 같은 반론도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기독교의 구원은 이런 철학적 사유 과정을 통해서 어떤 진리를 깨달아야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일어난 십자가와 부활을 우리가 믿기만 하면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것이다. 즉 복음은 고상한 철학적 사유가 아니라 단순히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다는 사실이다. 만약 철학적 존재론과 인식론을 통해서만 신학적 사유가 가능하고, 그 안에서만 하나님을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다면 이런 훈련을 받을 수 없는 대다수의 민중들은 기독교의 구원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단순한 복음을 철학적으로 덧칠하는 것은 오히려 오직 믿음으로 의로워지고 은총으로 구원받을 뿐이라는 종교개혁의 가르침보다는 오히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기대어 자연신학을 주장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입장에 서는 것일지도 모른다. 옳은 주장이다. 다시 한번 더 강조하건데 신학과 철학을 혼동해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신학은 하나님의 계시론에 기대어 있으며, 철학은 오히려 이 세계의 존재론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철학은 자신들이 이 세상에 대한 어떤 대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 대답을 찾아가는 과정에 대한 성찰이라는 점에서 신학에 필수적이라는 말이다. 즉 이 세상에 대한 대답을 하나님에게서 제시하는 우리 기독교의 사유과정이 얼마나 보편적 진리론에 합당하지에 대한 검증을 철학이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결국 진리에 대한 선택은 우리 기독교 신앙 안에서만 가능하지만 그것의 타당성 여부는 철학적으로 검토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철학적 검토의 근원적인 의미가 무엇인지 한 마디만 짚도록 하자. 앞에서 신학을 신학에 대한 정보가 아니라고 했듯이 여기서 철학 공부라는 것도 단지 몇몇 철학자들의 해명에 대한 정보를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철학적으로 사유하는 세계로 돌입하는 것이다. 오랜 역사의 철학에 대한 구체적인 공부가 없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철학적으로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곧 철학적인 반성을 할줄 아는 사람이다. 즉 전혀 철학 공부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죽음, 삶, 시간, 역사, 존재, 무, 시간, 공간, 우주, 종말 등등, 소위 형이상학적 질문을 실질적으로 머리와 가슴에 안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는 말이다. 성서와 신학도 역시 그 기초에는 이런 형이상학적 질문을 담고 있기 때문에 이것에 대한 깊은 통찰이 있는 사람만이 신학의 세계에도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철학 공부는 경우에 따라서 거의 진척이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흡사 손으로 구름을 잡듯이 막연하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사유의 세계가 바로 그런 속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개 속을 걷는 것 같다가 어느 순간에 가느다란 햇살을 느낄 것이며, 점차 사유의 시야가 훤히 트이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때부터 이제 우리는 본격적으로 신학 공부를 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최소한의 준비를 갖추게 될 것이다. 여러 철학적 주제가 있지만 그 중에서 ‘시간’에 대해서만 우리의 생각을 정리해보자.

시간

동물들은 현재에 묶여서 살지만 인간은 과거와 현재를 통시적으로 생각하고, 더 나아가서 미래까지 생각한다는 점에서 구별될 수 있다. 이렇게 인간의 인간적 특수성을 가장 적실하게 보여주고 있는 시간은 무엇인가? 시간은 우리에게 어떻게 인식되는가? 시간은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실체인가, 아니면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경험에 불과한가? 이 시간의 문제는 기독교가 역사적 종교라는 점에서도 신학적 사유에서 특별히 중요하다.
우선 우리의 작은 경험에 대한 직관으로부터 풀어가자. 우리 각자는 20년, 30년, 또는 40년 동안 각각의 세월만큼 이 지구에서 살아왔다. 우리는 그런 인생의 세월을 길다, 혹은 짧다고 표현을 하지만 그 시간의 양을 측정할 방도는 그 어디에도 없다. 50년도 역시 과거이며 하루도 역시 과거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다. 많고 적은, 길고 짧은 문제가 아니라 지나갔다는 사실만 남는다. 인생을 정리하게 되는 나이에 이르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참으로 빨리 지나갔다고, 또는 참으로 허망하다고 말하게 되는데, 이처럼 시간이 덧없다는 뜻이다. 이렇게 보면 시간은 단지 우리가 주관적으로 어떻게 느끼는가 하는 주관적 문제이지 어떤 객관적 실체로 존재하는 게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삼십 년 전이 바로 어제 같을 수 있고, 어제가 바로 삼십 년 전 같을 수 있는 게 바로 시간이라는 말이다.
이 문제를 약간 과학적인 방식으로 접근해보자. 우리에게 측정되는 시간은 태양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지구가 태양을 한 바퀴 도는 시간이 바로 일년, 365일이다. 지구의 자전이 하루, 24시간이다. 이런 자전과 공전이 지속됨으로써 시간이 흘러간다고 여긴다. 만약 지구의 자전과 공전이 없다면 시간도 사라지는 것일까? 아니면 그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시간이 진행될까? 우리가 시간을 숫자로 표시할 때는 이렇게 자전과 공전이지만 시간을 체감하는 것은 어떤 사물의 변화에 있다. 꽃이 피고 진다거나 인간이 늙으면 시간이 흘렀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런 사물의 변화가 없다면 시간도 없어지는 것일까? 늙거나 죽는 게 없는 천국에는 시간이 없는가? 시간은 절대적인가, 아니면 상대적인가? 시간은 어떤 공간에서나 일정하게 흐르는지, 아니면 다르게 흐르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시간이 장소에 따라서 다르게 흐른다는 것은 납득이 안 된다. 아인슈타인이 시간을 빛의 속도 안에서만 절대적인 것으로 보고 그 빛의 속도를 극복하면 시간 여행이 가능하다는 가설을 제시했다. 그것이 상대성 이론에 담겨 있는 내용이라고 한다. 그런데 사실 이런 문제는 우리의 실제 삶에서는 경험될 수 없는 일종의 선험적 물리의 세계에서나 타당하다. 실제로는 그것을 경험할 수 없고 그게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감각적 세계를 훨씬 뛰어넘는 현상에 불과하다.
어느 선승에 얽힌 이야기다. 큰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매일 용맹정진 하던 선승이 어느 날 잠시 쉬러 앞마당으로 나왔다. 그 마당에 서 있는 나무에서 아름다운 새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일이야 늘 있어 온, 그런 일상사였다. 그런데 이 소리가 얼마나 좋았든지 이 선승은 선방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도 잊고 그냥 그 소리에 푹 빠져 버렸다. 그러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자신이 수행하던 선방에 들어갔더니, 바로 얼만 전까지만 해도 함께 수행하던 도반(道伴)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모두가 낯선 이들 뿐이었다. 이 선승은 깜짝 놀라 한 사람을 끌고 나와 아무개 아무개가 어디 가고 당신들만 있는가 하고 물었다. 이 질문을 받은 그 사람은 그 아무개라는 사람은 이미 30년 전의 사람이라고 대답했다. 이 선승이 잠시 새소리에 정신을 빼앗긴 그 순간이 30년이었다는 이야기다. 물론 선승에 얽힌 이야기들은 우리의 일상적 경험에서 빗겨날 때가 많긴 하지만 그래도 무언가의 본질을 잘 드러내주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시간은 그렇게 절대적인 게 아니라는 가르침이다. 순간이 영원일 수도 있고 긴 시간이 순간일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하이데거가 존재 문제를 시간으로 풀어내려고 있는지 모른다.
그런데 우리가 시간과 역사 문제를 논의할 때 과거와 현재만이 아니라 미래 차원까지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종종 망각한다. 어쩌면 세계와 인간과 시간에 대한 사유에서 가장 근본적인 차원은 오히려 미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여전히 결정되어 있지 않고 미래를 향해서 열려져 있기 때문이다. 아직 결정되지 않은 세계에 대해서 과거와 현재의 사태만 기준으로 왈가왈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것이 완전히 결정될, 그 참된 모습이 완전히 드러나게 될 미래야말로 사물과 현상을 논의할 수 있는 결정적인 재판정이다. 특히 기독교 사상은 종말론이라는 교의를 통해서 이런 미래에 대한 전망을 열어왔다. 이런 종말론적 지평이 일종의 추상적 교의에 머물지 않고 우리의 삶을 실제적으로 견인해나가는 역동성으로 작용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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