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신약신학

신학입문 조회 수 4989 추천 수 133 2004.09.27 23:44:12

5장

신약신학

 

 

1. 왜 4 복음서인가?

 

구약을 기독교 신자들이 읽어야 할 필요성과 당위성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앞서 짚어보았듯이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대목이라고 하더라도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함으로써 우리의 신학적 사유를 심화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여기서 우리는 신약성서 안에 4권의 복음서가 함께 들어가 있어야 할 이유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신약신학의 세계로 들어가도록 하겠다. 복음서를 진지하게 읽지 않은 학생이라고 하더라도 최소한 교회의 가르침에 관심을 기울였던 학생이라고 한다면 4권에 이르는 복음서의내용이 중복되거나 같은 이야기인데도 약간씩 차이가 나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이런 복음서를 전체적으로 정리해서 한권의 복음서로 만들었으면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침을 따라잡는 데 별 어려움이 없었을 텐데도 불구하고 초대 교회는 그런 작업을 시도하지 않았다. 그들이 게을러서 그랬는지, 아니면 우리가 알 수 없는 그 어떤 사연이 숨어 있었는지 잠시 검토해보자.

우리가 그 당시의 모든 속사정을 샅샅이 풀어내기는 힘들지만 최소한 다음과 같이 추정할 수는 있다. 초기 기독교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구전으로 전승되던 예수에 관한 이야기들이 문서로 작성되고, 경우에 따라서는 편집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특히 예수에 대한 이야기는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이 흡사 신문의 사실보도처럼 기록된 것이 아니라 구전되던 것들이 2,30년이 지난 다음 기억에 의해서 기록된 것이기 때문에 약간씩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그들은 오늘 우리가 생각하듯이 성경을 쓴다는 생각을 한 게 결코 아니었다. 예수의 1세대 제자들이 세상을 떠나기 시작하면서 예수에 대한 전승이 훼손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보존하기 위해서 문서로 작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문서 작성의 필요성은 전체 교회의 동의 하에서 이루어진 게 아니라 개인적으로, 또는 어느 지역 공동체의 요청에 의해서 제기되었다. 그것을 우리는 마태공동체, 또는 마가공동체라고 이름을 붙일 수 있다.

서로 다른 삶의 자리에서 집필되었다고 하더라도 공동의 기반은 아주 분명했다. 우선 이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한다는 점에서 동일한 신앙의 토대를 지녔다. 그것만이 아니라 이들이 각자의 복음서를 집필할 때 단순히 자기들만의 기억과 전승에만 의존한 게 아니라 이미 상당한 내용을 담고 있었던 <Q>문서를 기초 자료로 사용했다. 그래서 4권의 복음서에 차이가 있으면서도 그 기본 구도나 내용 면에서 병행되는 부분이 많은 것이다.

초기 기독교회는 시간이 지나면서 이 복음서를 신앙의 중요한 자료로 삼기 시작했다. 앞서 말한 대로 원래는 성경을 기록한다는 차원이 아니라 단지 예수님에 대한 기억을 보존하겠다는 생각에서 시작된 것이었지만 그 문서들이 여러 지역교회에서 종교적 권위를 확보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하나의 신앙을 갖고 있는 교회가 서로 다른 복음서와 서신들을 사용하게 됨으로써 발생하는 분열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런 분열현상을 극복하기 위해서 기원후 397년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27권을 신약성서로 채택했다.

그런데 문제는 왜 복음서가 4권인가, 하는 점이다. 사실 4복음서만이 아니라 그 이외에서 몇 권의 복음서가 있었다. 그 중에 가장 유명한 복음서는 ‘도마복음서’였다. 이런 복음서는 경전이 되기에는 문제가 많다고 생각해서 초기 기독교가 배척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영적인 권위는 적지 않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예수의 공생애를 다룬 복음서는 지금처럼 네 권이 아니라 한 권만 정경으로 결정되었다고 하더라도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네 권이 모두 선택되었는지에 대한 결정적인 대답은 없다. 단지 우리는 그 당시 경정화의 과정에서 몇 가지 원칙이 작용했을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그 복음서의 저자가 사도적 권위를 갖고 있는지, 그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는지, 이단의 사상이 포함되지는 않았는지, 대충 이런 기준으로 정경이 결정되었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지역적인 안배라든지, 또는 어떤 지역의 교회가 교권을 많이 행사할 수 있었는가 하는 문제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4 복음서가 비록 비슷한 것 같지만 세부적으로 들어가게 되면 상당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최소한의 기준에 들어온 것을 모두 선택함으로써 하나님의 계시 능력을 축소시키지 않을 수 있다고 판단했을지 모른다.

어쨌든지 지금 우리는 네 복음서가 다 들어있는 신약성서를 기독교의 경전으로 택하고 있다. 이런 사태에 연관된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게 해결될 수 없다는 점을 우리는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 네 복음서를 비교하면서 가능한대로 가장 원본에 가까운 자료를 재구성해 내야하며, 더 나아가서 그 자료의 원천인 사건 자체를 추적해야 한다. 특히 내용과 구성 면에서 공관복음서(마태, 마가, 누가)와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는 요한복음의 전승사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않으면 우리는 복음서를 이현령비현령 식으로 오해하기 쉽다.

 

2. 신약과 초기 기독교 공동체

결국 우리가 신약성서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한 전제 조건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처했던 ‘삶의 자리’에 대한 세밀한 연구이다. 이런 문제를 명확하게 부각하기 위해서 로마 가톨릭 교회와 우리 개신교 사이에 개재한 교회와 성서에 관한 입장 차이를 잠시 검토하자.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규정하는 권위를 성서와 교회 양자에 두고 있지만 개신교회에서는 주로 성서에 두고 있다. 마틴 루터가 ‘sola scriptura'라는 말로 로마 가톨릭을 비판함으로써 그 이후로 모든 개신교회는 성서만이 유일한 권위를 갖는다고 주장하게 되었다. 로마 가톨릭이 주장하는 교회의 권위는 결국 교황의 권위로 이어지게 되어 실제로 성서와 교황칙령이 거의 비슷한 권위를 갖게 되었다.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로마 가톨릭의 주장이 성서의 권위를 약화시키는 것 같지만 초기 기독교의 사태를 좀더 세밀하게 분석해보면 그들의 주장이 그렇게 어긋나는 것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현재의 성경을 정경으로 결정한 주체가 바로 교회이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그 과정에서 성령이 활동하셨다고 믿고 있지만 성령이 교회를 통해서 활동하신다는 점에서 우리는 성서 형성에 개입된 교회의 역할을 축소하지 말아야 한다. 이는 곧 성경이 갑자기 역사에 등장한 게 아니라 초기 기독교의 구체적인 삶 안에서 점진적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교회는 성경 못지않은 권위를 갖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정경화 이후에는 교회가 이 성서에 의해서 규정된다는 점에서 성서의 권위가 교회를 능가한다고도 주장할 수 있다. 이것이 곧 우리 개신교의 입장이다. 실제로 역사적 교회는 끊임없이 오류를 저질렀기 때문에 교회를 성서보다 우위에 두려는 태도는 정당하지 않다. 교회는 이제 성서에 의해서 규정되어야 할 자리를 잡는 게 바른 태도일 것이다.

이런 구도는 오늘도 역시 계속된다고 볼 수 있다. 신약성서가 오늘 우리의 신앙을 규정하는 가장 권위 있는 기준임에 틀림없지만 그것은 교회에 의해서 해석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미 처음 성서가 집필될 때 교회의 해석이 개입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충분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오늘의 교회가 경전화에 주체였던 초기 기독교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 해석 행위는 당연히 요청된다.

 

3. 본문 읽기

신약성서는 구약성서에 비해서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훨씬 친근하다. 그 이유는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이 신약성서가 유대교와 구별되는 기독교 신앙의 특징을 가장 명확하게 증언하는 문서이기 때문이다. 비록 예수가 구약을 읽거나 인용했으며, 사도행전에서 볼 수 있듯이 사도들도 구약을 기독교 신앙의 근거로 삼았지만, 신약성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직접적으로 진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독교 신앙에서 본질적인 구성요소이다. 기독교 신앙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케리그마라고 할 때 예수에 대한 정보를 신약성서보다 정확하고 많게 제공하는 문서는 아무 것도 없다. 우리는 여기서 이 신약성서를 학문적으로 공부한다고 할 때 짚어보아야 할 요소가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구약신학도 역시 마찬가지이지만 신약신학은 그 무엇보다도 본문을 충실히 읽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어거스틴이 어느 날 대낮에 밖으로부터 한 외침을 들었다고 한다. “본문을 취하여 읽으라”(tolle lege). 이 외침을 들은 어거스틴을 성서를 펼쳐들었는데, 로마서 13:13,14절이었다. 그 구절이 그의 심령을 뒤흔들었다. “...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려 ...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 신학이 근본적으로 성서해석학이라고 할 때 그 시작은 본문 읽기에 있다.

우리가 그 어떤 신학 방법론이나 여러 교리 체계, 또는 여러 신학자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기에 앞서서 본문에 관심을 두어야 하는 이유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선 성서의 본문 자체가 하나님의 계시를 가장 충실하게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이외의 신학적 특성은 거의 이 성서에 대한 해석에 불과하다고 보아야 한다. 또 다른 중요한 점은 여전히 은폐되어 있는 성서 본문이 자기 스스로 그것을 열어 보이는 순간을 포착하려면 본문 읽기보다 더 우선되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지금 한국교회 예배는 주로 설교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있지만 원래 예배학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본문읽기’가 매우 중요한 계시 사건이다. 전통적 예전예배에서는 성서의 세 군데, 즉 구약과 서신과 복음서가 각각 읽힌다. 이 세 본문이 교회력과 연관해서 구성되어 있다.

 

4. 헬라어 공부

위에서 언급한 본문 읽기를 가장 정확하게 하기 위해서는 신약성서의 언어인 헬라어 공부가 전제되어야 한다. 우리가 이런 원어로 성서를 읽어야 하는 이유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고대 헬라어가 갖고 있는 고유한 의미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즉 신약성서는 헬라어를 중심으로 발전된 문화권 안에서 이루어진 종교문헌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헬라어를 배운다는 것은 단지 헬라어로 기록된 신약성서를 번역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일상으로 사용하는 언어와 다른 언어를 통해서 그 언어가 담지하고 있는 세계를 경험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예컨대 언어라는 뜻만이 아니라 이성이라는 뜻도 포함하고 있는 ‘로고스’라는 헬라어를 통해서 그 헬라어를 사용하던 사람들의 세계관을 배울 수 있다는 말이다.

어쨌든지 우리가 헬라어를 통해서 헬라인들의 세계를 충분히 파악하고 그 헬라어로 기록된 신약성서의 본래의 의미를 좀더 세밀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헬라어를 공부해야 하지만, 만약 그게 충분하지 못할 경우에는 여러 번역본을 참고하는 것도 도움이 적지 않다. 영어, 독일어, 불어, 중국어, 일본어, 뿐만 아니라 우리말 성서 중에서도 공동번역을 참조하는 것이 좋다. 우리가 공동예배 시에 여전히 <개역성경>만 고집한다는 것은 우리의 신앙이 지나치게 근본주의적이고 문자적이라는 사실을, 결국 합리적이기보다는 감정적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5. 성서해석 방법론

우리가 신약성서를 읽고 주석하기 위한 학문적 방법론 중에는 본문비평, 문서비평, 양식사비평, 편집사비평 등이 있다. 본문비평은 말 그대로 여러 사본과 번역 본 중에서 가장 원본에 가까운 내용을 찾아가는 연구 방법론이다. 이미 성서자체가 나름의 전승사 안에서 변화되었으며, 정경화 이후에도 여러 상이한 사본에서 약간씩의 차이를 보이고 있기 때문에 이런 본문비평은 성서연구 방법론에서 가장 기초적인 부분이다.

문서비평, 양식사 비평, 편집사 비평은 그 중심이 되는 토대가 약간씩 구분될 뿐이지 신약을 역사비평적인 관점에서 접근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한국의 신약학계는 크게 역사비평의 수용여부에 따라가 구분될 수 있다. 근본주의 계통의 학자들과 신학교에서는 역사 비평을 거부하고 그렇지 않은 대부분의 신학교에서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대개 받아들이고 있다. ‘역사비평’은 신약성서를 역사적 산물로 인정하고 그것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서 다른 고대문서와 마찬가지로 역사적 분석 작업을 펼쳐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런 연구방법론이 성서를 완벽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일반신자들에게는 일단 정서적으로 거부 반응을 보일지 모르지만 성서를 형해화한 언어가 아니라 역사와 더불어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역시 역사비평은 필수적이다.

 

6. 신약신학 과목

영남신학대학교 학부와 신대원 및 대학원에 개설되어 있는 신약성서 과목은 대략적으로 다음과 같다. 사도행전, 예수 세미나, 성서지리학, 누가복음, 신약신학, 바울의 선교와 신학, 신약개론, 요한문서, 신약성서의 제자직, 사도행전, 고린도전후서, 헬라어, 신약성서배경사, 신약원전강독, 예수의 비유

위에 열거된 과목을 수강함으로써 이제 학생들은 스스로 신약성서를 읽고 주석하고 설교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한다. 위의 과목을 성격별로 다시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1) 신약언어: 헬라어, 원전강독

2) 신약연구의 토대: 신약신학, 신약개론, 성서지리학, 신약성서배경사

3) 신약주석: 사도행전, 누가복음, 요한문서, 고린도전후서

 

7. 인문학적 착상

신약성서가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 있었던 특별한 사건을 증언하고 있긴 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구체적인 인간과 그 세계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지 공중에서 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다. 그 당시의 기독교인들도 일반 로마인이나 헬라인, 유대인처럼 우주 앞에서 경외심을 갖고, 죽음 앞에서 두려워했다. 이런 인간의 특성을 갖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믿었기 때문에 우리는 신약성서에서 그들의 신앙이 이런 인간학적 바탕에서 전개되었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이런 인간학적 특성은 오늘날 인문학이 관심을 갖는 분야이기 때문에 아주 특별한 종교적 문서를 다룬다고 하더라도 인문학적 소양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철학, 문학, 역사학, 사회학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서 물리학, 생물학, 고고학, 정신분석과 심리학 등 인간과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모든 학문이 신약학의 배경이 되어야 한다. 예컨대 <역사>의 본질이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아니면 거의 독단적인 이해만 갖고 있는 상태에서 요한계시록의 종말론을 이해할 수는 없다. 문학적 이해 없이 복음서의 비유를 깊이 이해할 수는 없다.

인문학적 착상이 충분하지 못할 경우에 벌어지는 성서해석의 오류 문제를 구체적으로 제시해보자. 로마서를 강해한 온누리 교회의 하용조 목사와 지구촌 교회의 이동원 목사는 동성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입장을 보이고 있다. 동성애는 ‘하나님의 저주’(하용조)이며, 하나님님을 그들을 에이즈(이동원)로 ‘심판’하신다고 말이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동성애자들을 비난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 텍스트에 근거해서 2천년이 지난 오늘의 현대인들에게 똑같은 잣대로 접근한다는 것은 인간 삶의 심층을 전혀 모르는 태도이다. 만약 성서에 기록된 내용을 오늘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시키려고 한다면 여자들은 교회에서 가르치는 일을 할 수 없으며, 머리에 너울을 반드시 써야만 한다. 이런 사태에 연루된 문제는 성서를 읽는 사람들이 성서를 ‘규범’의 차원에서만 이해한다는 사실과 역사와 더불어 변화되는 삶의 지평을 들어다볼 줄 모른다는 사실이다. 전자는 신학의 깊이가 없다는 것이며, 후자는 세계에 대한 이해가 없다는 것인데, 이 양자 모두 기본적으로는 인문학적 사유가 없기 때문에 벌어지는 영적 미숙성이라 할 수 있다.

 

8. 성서주석과 성서해석

위에서 언급한 ‘인문학적 착상’의 문제는 결국 성서를 얼마나 깊이 있게 해석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와 직결된다. 나는 여기서 한국교회에서 벌어지는 성서읽기의 한계, 또는 오류를 다루어보려고 한다. 우리의 신학작업은 결국 성서를 정확하게 이해함으로써 신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세계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우리 설교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작업은 성서에 대한 정확한 이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신자들이 알아듣도록 전하는 목회 행위인 설교는 말씀과 청중, 또는 텍스트와 컨텍스트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정통적인 입장에 있는 사람은 말씀과 텍스트를 중요하게 생각할 것이고 현대적인 감각을 가진 사람은 청중과 컨텍스에 무게를 두고 설교할 것이다. 어느 쪽이 옳은가, 더 중요한가 하는 문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텍스트와 컨텍스트 문제는 우리의 인식론적 편의를 위해서 구분했을 뿐이지 근본적으로 하나의 사태다. 텍스트는 늘 컨텍스트를 담고 있으면, 컨텍스트는 늘 텍스트에서 해석되기 때문이다. 이런 상호성 가운데서 접근하지 않고 어느 한쪽에 치우쳐서 설교를 하게 되면 근본이 취약해진다.

어떤 설교자는 성서 안에서 우리의 삶에 그 어떤 현실성도 없는 이야기만 전달하고 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서의 정보를 낱낱이 꿰고 있지만 이런 설교는 텍스트의 범주에 갇혀 있는 셈이다. 이런 설교는 청중들의 성서지식만 확대시키지 신앙의 성숙으로 끌어내지 못한다. 그런데 이런 텍스트 중심의 설교보다 훨씬 바람직하지 못한 것은 컨텍스트에 사로잡혀 있는 설교다. 이들은 성서 구절을 명분으로 내세우고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요령만 모색한다. 구원, 성령, 기도, 믿음 등, 우리에게 익숙한 기독교적인 용어를 나열하면서, 실제로는 오늘의 부박한 시대정신이 자극하는 삶의 처세술을 선전하는 것이다.

우리의 설교 강단이 이렇게 양극단에 치우쳐 있으면서 실제로 성서의 본질에서 멀어진 이유는 이 시대정신에 너무나 성급하게 영합한다는 데에 있다. 도시의 중산층 교회에서 매력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설교주제인 복지문제를 예로 들어보자. 교회가 이 사회의 복지문제에 최대한의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설교에 좋은 반응을 보인다. 이것은 바로 설교자와 청중이 빠져들기 가장 쉽고 어리석은 함정이다. 기독교라는 것이 기껏해야 착하게 살고, 봉사 잘 하고, 이 세상의 복지 향상을 위해서 존재하는 종교라고 한다면 얼마나 허탈한가? 우리의 삶에 별로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복지를 애물단지처럼 여긴다는 것은 설교의 근본이 상실되었다는 증거다. 물론 우리가 양심적으로, 윤리적으로 살고 우리의 세계를 복지사회로 발전시켜나가는 것은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우리가 감당해야할 당연한 의무이지만 교회의 본질에 속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따라서 교회의 본질에 천착해야할 설교는 그런 것과는 전혀 다른 토대에 놓여있어야 한다. 설교의 토대가 주변적인 것에 머물게 된 문제점이 어디에 있는지 검토하게 되면 설교가 근거해야할 그 자리가 눈에 보이게 될 것이다.

오늘 한국 교회의 설교가 정작 성서와 기독교 전통이 말하는 근본을 붙들지 못하는 이유는 설교의 원자료라할 성서를 주석하는 것에만 머물러 있지 해석하지 않기 때문이다. 설교를 준비하는 사람은, 개인에 따라서 차이가 있긴 하지만 대개 자신이 선택한 본문을 충분히 읽고 주석집의 도움을 받은 다음에 말씀을 들어야 할 청중들의 형편을 고려해서 설교를 작성한다. 이들은 대개가 무엇을 설교해야 할지 잘 알고 있다. 흡사 수능시험을 앞에 둔 수험생들이 문제를 풀어가듯이 성서를 공부한다. 머리가 좋고 많은 노력을 기울인 학생이 높은 점수를 받듯이 설교 능력이 뛰어나거나 노력을 많이 기울인 설교자는 그만한 성과를 거둔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다. 이미 드러난 사실들을 열거하면서 나름의 수사학을 이용해서 전달하기만 하면 된다. 이런 설교는 늘 거기서 거기다. 본문이 바뀌더라도 똑같은 설교만 하게 된다. 기도 열심히 하고, 교회 봉사 많이 하고, 세상 사람들에게 칭찬 받도록 반듯하게 살라고 한다.

이와 달리 성서를 해석하는 사람은 이미 아는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전하는 것보다는 모르는 이야기를 찾아나간다. 원래 해석학이라는 원어가 헬라 신화에 나오는 헤르메스에서 유래했는데, 헤르메스는 신의 뜻을 전하는 사자이다. 신의 뜻은 숨겨져 있다. 헤르메스는 인간이 모르는 신의 이야기를 인간이 알아듣도록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이런 점에서 설교가 해석학적이어야 한다는 말은 이미 지나간 이야기를 서술하는 게 아니라 아직 우리에게 오지 않은 사건을 선취적으로 해명해야한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설교는 예언이며, 그것이 곧 진리의 능력이다.

사실 과학도 그렇고 예술도 그렇다. 과학 선생은 이미 나와 있는 과학이론을 가르칠 뿐이지만 진정한 과학자는 아직 모르는 과학의 세계를 연구한다.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는 누구에게 배우거나 누구를 가르치지 않고 음악의 세계에 들어가 있을 뿐이다. 그 세계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열지 않고 연주자가 들어간 것만큼만 열기 때문에, 그 음악의 세계를 얼마나 기술적으로 잘 표현해 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은 그 다음의 문제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음악교육은 늘 이런 기술에만 머물러 있다. 사실 설교도 이런 수준에서 한걸음도 앞서지 못했다.

한국 교회의 설교는 아예 주석도 없이 자기의 종교경험만 일방적으로 전달하거나, 아니면 정보차원의 성서주석에 치우쳐 있다. 전자는 재미있기는 하지만 사이비성이 강하며, 후자는 진지하기는 하지만 진부하다. 예수님이 그렇게 설교했던 것처럼 설교의 지평은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에 착근되어야 한다. 따라서 그때까지 잠정적이며 유한한 역사 내의 모든 것들은 해석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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