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강, 성서란 무엇인가?

기독교가 뭐꼬 조회 수 3507 추천 수 0 2012.02.17 23:36:43

제17강

성서란 무엇인가?

 

 

오늘부터 당분간 구약성서에 대해서 공부하겠습니다. 제 강의안에는 제목이 ‘구약성서와 헤브라이즘(hebraism)으로 되어 있을 겁니다. 저는 구약성서의 핵심을 헤브라이즘으로 정리했습니다. 헤브라이즘은 시오니즘(zionism)이라고도 할 수 있어요. 구약이 여기에 바탕을 두었다면, 신약은 민족적인 제한을 가진 구원관과 메시아관을 넘어 보편적 세계로 뚫고 나가는 생각을 담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구약성서를 왜 읽어야 할까요? 초기 기독교에서도 구약성서를 기독교 경전에서 제외시켜야 한다는 요청이 많았어요. 간단히 생각해보세요. 사실 여러분이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이겠지만, 구약성서는 기독교회에서 결정된 게 아닙니다. 기독교 공동체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이후에 천천히 형성되었는데요. 물론 그들에 의해서 신약성서가 결정되기는 했지만, 구약성서는 유대교에 의해서 결정되었거든요. 앞에서도 한 번 짚은 내용이기는 한데, 우리는 유대교와 기독교의 관계를 오해하고 있습니다. 보통 우리는 기독교가 유대교로부터 심한 박해를 받았다고 생각해요. 더구나 유대교의 종교 지도자들이 로마와 합작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으니까, 유대교와 기독교는 철천지원수 관계가 아닌가 하는 오해를 한다는 거죠. 이 문제가 그렇게 칼로 무를 자르듯이 정리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헤브라이즘과 크리스챠니티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경전을 정확하게 기원후 90년 얌니아 회의에서 결정했습니다. 여기에서 구약 39권이 유대교의 경전으로 결정되었는데, 조금 재미있죠. 예수님 당시에도 구약성서가 있었거든요. 오랫동안 유대인들은 구약을 읽어왔을 텐데 왜 90년에 가서야 경전을 결정했을까요? 그 전에는 구약성서들이 흩어져 있었습니다. 주로 모세오경이라고 하는 토라가 가장 권위 있는 성서로 받아들여졌고, 그 뒤의 예언서는 그보다 좀 낮은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성문서는 훨씬 더 그랬고요. 얌니아 회의에 이르러서야 이 모든 문서들을 통일하게 되었던 거죠. 다른 한편으로 70년에는 로마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함락되기도 했습니다. 이 해는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볼 때 이스라엘이 로마에 의해서 멸망당했을 뿐 아니라 기독교로 보아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제가 기독교 교회사를 전공하지 않았고 이 부분을 강의 전에 충분히 검토하지 않았기 때문에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70년이 예루살렘의 유대기독교가 유대교로부터 압박을 심하게 받게 되는 기점인 것 같아요.

이런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승천 이후에 예루살렘의 마가 다락방에서 모임을 갖기 시작했던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서서히 그 모양을 갖추게 되었어요. 최소 40년 동안은 유대교와 기독교가 별 충돌 없이 오누이처럼 그 안에서 잘 지냈습니다. 그런데 70년에 예루살렘이 로마에 의해서 완전히 함락된 뒤에는, 유대교가 종교적으로 내적 통일성을 갖추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율법을 강조하게 되었죠. 그래서 유대교는 예루살렘에 있었던 나사렛파, 우리로 보자면 원시 기독교인데, 그들에게도 율법을 더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어요. 그 요청 앞에서 원시 기독교가 고민을 했겠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복음, 이것이 기독교의 핵심이었지만, 예루살렘 기독교 공동체의 대다수가 유대인들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율법을 그대로 지켰던 거예요. 그런 문제로 예루살렘 원시 기독교와 이방 기독교 사이에 계속해서 충돌이 있었고요. 여기에 예루살렘교회의 고민이 있었습니다. 유대교가 요구하는 율법에 더 비중을 두면 이방 기독교와의 관계가 더 껄끄러워질 거고, 유대인의 요청을 거절하게 되면 유대교로부터 압박을 받을 테니까요. 그 압박이라는 게 노골적인 박해는 아니었겠지만,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관계가 소원해질 수밖에 없었던 거죠. 이것은 곧 로마로부터의 종교적인 보호막, 혹은 방패막이를 전혀 얻을 수 없다는 말이 됩니다.

여기서 90년이 중요합니다. 이 때 얌니아 회의가 열리면서 유대교가 구약성서를 정경화했고, 한참 후에 기독교가 그것을 받아들였어요. 그것도 4세기말이었어요. 이걸 보면, 기독교는 오랫동안 명확한 체계 없이 지내왔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경전도 있고 교리도 있고 신학도 발달해 있지만요. 기독교가 나름으로 구체적인 체계를 갖추고 있지 않습니까? 노회나 총회 같은 것도 있으니까요. 물론 그런 것들이 초기 기독교에도 있기는 했어요.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경전이 겨우 4세기 말에 결정된 걸 보면 확고한 체계가 일찌감치 자리를 잡았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어요. 어떤 종교든 세월이 지나가야 체계가 잡히기 마련이고요. 좀 다른 관점에서 보면 그 당시에 기독교의 구심점이 없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여러 학파가 있었다는 거죠. 여러 지역에 공동체들이 흩어져 있었어요. 그 공동체들은 종적인 관계가 아니라 횡적인 관계였거든요. 예루살렘교회의 공동체로부터 그리스의 교회 공동체들이 별 영향을 받지 않았으니까요. 복음이 북아프리카로도 많이 전해졌는데, 거기에 알렉산드리아 학파가 있었습니다. 그들도 자기만의 강한 기독교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었어요. 이렇게 여러 학파들이 서로 팽팽하게 세력의 균형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그걸 하나로 묶어낸다는 게 만만치 않은 일이었을 겁니다. 경전도 서로 다른 걸 사용하고 있었거든요.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등, 서로 자기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거룩한 문서들을 따로 갖고 있었습니다. 그걸 모두 취합해서 정경화(canonization) 하기가 쉽지 않았을 겁니다. 지금 한국의 개신교가 150개 이상의 교단으로 갈라져 있는데, 이것을 하나로 묶기가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것처럼, 초기 기독교도 이런 형편에 놓여 있었던 것 같아요.

90년의 얌니아 회의를 통해서 경전이 된 구약성서를 기독교가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유대교는 기독교와 분명히 반대되는데, 왜 그들의 경전을 기독교가 그대로 받아들였을까요? 그래서 초기 기독교에 그걸 내쳐야 한다는 사람들이 많았던 겁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마르키온(Marcion)인데요. 그는 이단이었습니다. 그 당시 이단은 정통과 크게 달랐던 게 아니라 부분적으로 좀 차이가 있었는데요. 마르키온이 주장한 내용은 인터넷 등을 통해 알아보세요. 그리고 20세기에 들어오면, 베를린에서 교회사가로 활동하던 하르낙(Harnack) 같은 사람들이 구약을 기독교 경전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걸 보면 지속적이지는 않았지만 간혹 그런 주장들이 제기되었다고 볼 수 있죠.

어쨌든 초기 기독교는 유대교의 경전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예루살렘교회의 성도들에게는 당연히 어렸을 때부터 보았던 것이기에 자연스러웠을 테고, 유대인은 아니었지만 이방 기독교에서도 분명히 구약성서를 중요하게 다루었던 것 같아요. 이 점을 혼동하지 말아야 하는데요. 갈라디아서에 보면 토라와 할례 문제가 나옵니다. 바울은 이걸 아주 적극적으로 거부했습니다. 토라는 보통 모세오경을 말하는데요. 그러나 갈라디아서가 말하는 토라와 초기 기독교가 받아들였던 모세오경은 좀 다른 의미로 봐야 합니다. 갈라디아서가 말하는 토라는 주로 율법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이 부분은 좀 미묘한 차이가 있는데, 제가 거기에 대해서는 자신 있게 말할 수가 없네요.

이방 기독교라 하더라도 바울이 세운 교회와 다른 교회들 사이에 차이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어요. 바울만 교회를 세운 게 아니었으니까요. 로마서도 사실은 바울이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로마 공동체에 쓴 편지거든요. 자기가 세운 교회가 아니라는 거죠. 바울이 이방인에게로 가기 전에 이미 세워진 교회들이 있었어요. 안디옥교회도 이방인 교회인데요. 그곳을 거점으로 해서 복음이 유럽으로 확장되었습니다. 물론 안디옥교회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반 정도 섞여 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안디옥교회도 바울이 설립한 교회가 아니었거든요. 예루살렘에 성지 순례를 왔던 이방인들이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세운 교회였어요. 이방 기독교라고 해서 다 바울이 세운 게 아니고, 세운 사람에 따라 생각이 다를 수 있으니까, 바울이 세운 이방 교회들과 다른 이방 교회들 사이에 차이가 있었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섞여서 강의진행이 좀 혼란스러운데, 다시 방향을 잡아야겠군요.

갈라디아서에 보면, 예루살렘 공동체와 바울이 세운 갈라디아 지역의 교회가 서로 싸우게 됩니다. 갈라디아교회를 두고 예루살렘 공동체와 바울이 삼각관계였다고 할 수 있어요. 서로 자기들이 옳다고 싸우는 배경 속에서 바울이 자기 입장을 진술한 게 갈라디아서죠. 그 당시 예루살렘에 있던 지도자들은 쟁쟁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베드로,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 예수님의 제자 요한 등, 예수님의 측근들이 전부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들이었어요. 일당백이라고 할 수 있죠. 게임이 안 되죠. 실제로 바울이 밀렸어요. 자기의 선교지도 다 놓치고 다른 쪽으로 가게 돼요. 갈라디아 지역도 바울이 교회를 세우기는 했지만, 결국 버티지 못하고 마케도니아와 아가야, 지금의 그리스 쪽으로 쫓겨 가게 되니까요. 그런 상황들이 사도행전에 나옵니다. 마케도니아 사람이 환상 속에 나타나서 우리를 도우라 하는 말을 듣고 바울이 배를 타고 드로아에서 유럽으로 건너간다는 이야기 말이에요. 그건 굉장히 아름답게 꾸며진 이야기인데요. 실체적 진실은 바울이 갈라디아, 지금으로 말하면 터키에서 선교지 확보 싸움에 졌던 거예요. 밀린 거죠. 그걸 봐도 한동안 예루살렘교회 지도자들의 발언권이 아주 강력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왜 지금 이런 말을 하는가 하면요. 바울이 유대교의 흔적을 교회에서 다 일소시키려고 많은 노력을 했거든요. 그는 치열하게 부르짖었습니다. 유대교 경전을 보통 우리가 토라라고 하는데요. 율법이라고 하는 토라, 근본적으로 구약성서의 모세오경인데, 바울은 이것을 적극적으로 배제하려고 했어요. 그러나 결과적으로 보면 예루살렘의 초대교회는 유대교의 것들을 수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교회 공동체는 역사의 뒤로 물러가고, 바울이 세운 이방 기독교가 결국 주류가 되었으니까 형식적인 측면에서 보면 바울의 승리라고 할 수 있죠. 그러나 내용적인 측면에서 보면 예루살렘교회 공동체의 지도자들이 초기 기독교 안에 큰 영향을 미친 걸로 생각할 수 있어요. 초기 기독교가 유대교의 경전인 구약성서를 그대로 오랫동안 사용하다가 결국 경전으로까지 받아들였으니까요.

초기 기독교가 유대교의 경전을 받아들인 사연에 대해서 조금 설명했는데요. 하여튼 거기에는 우리가 한두 마디로 간단히 끝낼 수 없는 어떤 사연들이 담겨 있다는 겁니다. 구약성서를 기독교가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볼 때, 구약성서 안에 다른 것들은 그래도 그런 대로 넘어갈 수 있지만, 메시아 개념에서는 우리가 이해되지 않을 때가 많거든요. 유대교인들과 우리는 메시아니즘(Messianism)에 대한 이해가 결정적으로 다르니까요. 유대교인들은 구약성서에 근거해서 나름대로의 고유한 메시아 관을 갖고 있고, 우리는 그들과는 실제로 다른 메시아 관을 갖고 있지 않나요? 같은 구약성서를 받아들이면서, 유대인과 우리 사이에 왜 메시아에 대한 이해가 다른 걸까요? 여전히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는 유대인들의 구약성서 해석이 옳은가요? 아니면 나사렛 예수를 메시아로 믿고 있는 우리의 구약성서 해석이 옳은가요? 둘 다 똑같은 구약성서를 갖고서 다른 메시아 관을 갖고 있기에 이런 질문이 가능합니다. 왜 다를까요? 그들이 잘못됐고 우리가 옳은가요? 그들이 옳고 우리가 틀린 건가요? 아니면 둘 다 틀렸거나 둘 다 옳은 건가요?

이 단락에서 제가 내린 결론은 둘 다 옳다는 겁니다. 유대인들의 해석도 옳고 우리의 해석도 옳다는 거죠. 그런데 왜 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지 않고 우리는 그리스도로 믿느냐고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사실 설명할 자신은 없습니다. 그래도 노력해 보죠. 유대인들은 이렇게 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시오니즘에 근거해서, 예수가 선포하는 하나님 나라의 지평과는 다른, 정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메시아니즘 안에서 살았습니다. 그들로서는 그게 최선이었죠. 그런 범주 안에서 예수와는 적대적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반면에 예수는 민족주의적 헤브라이즘과는 달리 보편적인 측면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어요. 민족적인 메시아니즘의 범주를 뛰어 넘었던 거죠. 그 정도로 설명이 되었을까요? 이 헤브라이즘과 기독교는 하나님과 구원에 대한 해석의 패러다임이 달랐습니다. 지평이 달랐던 거죠. 일단 헤브라이즘은 제국의 틈바구니에서 생존이라는 렌즈로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했던 반면, 기독교는 그걸 뛰어넘으려고 했거든요. 그렇게 서로 해석의 지평이 다르기 때문에, 똑같은 잣대로 상대방을 단죄하거나 재단하거나 매도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서로 다른 범주를 인정해야 합니다. 유대인들이 이해하는 생명, 하나님, 세계라는 범주와, 우리가 생각하는 각각의 범주에서 각자 최선인 것을 단순하게 비교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는 거예요. 이런 말들이 기독론적으로 너무 애매모호하다고 할 수도 있을 테고, 심지어는 유대교를 이단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이단이다 아니다 하는 식으로 말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에요.

오늘은 구약성서를 공부하는 게 목적이니까, 이 이야기를 계속 하겠습니다. 제가 책에서 비유적으로 설명을 했는데요. 현대 물리학의 관점에서 뉴턴의 고전 물리학을 바라보면 적지 않은 오류가 발견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뉴턴이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난 물리학자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잖아요? 구약과 유대인들을 뉴턴에 비유한 겁니다. 현대 물리학도라 하더라도 뉴턴의 물리학적 기초를 그냥 뛰어넘으면 안 되고 그걸 배워야 하는 것처럼, 기독교인 역시 새로운 차원에서 하나님 나라를 해석하기 시작했다 하더라도 유대인의 구약성서를 배척해서는 안 되고 반드시 읽고 배워야만 한다는 거예요. 헤브라이즘의 영적 곳간으로서 기독교인의 신앙을 풍부하게 하는 구약성서를 초기 기독교가 받아들인 것은 당연하고 잘된 선택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가?

구약성서는 크게 세 구조로 나뉘어 있어요. 모세오경과 예언서와 성문서입니다. 예언서는 전기 예언서와 후기 예언서로 나누고요. 후기 예언서도 다시 대(大)예언서와 소(小)예언서로 나눕니다. 전기 예언서는 예언자들의 활동에 대한, 예언자들과 왕정 중심의 역사 서술이라고 한다면, 후기 예언서는 말 그대로 예언자들의 설교입니다. 전기 예언서는 사실 이스라엘의 역사라고 할 수 있어요. 이 둘을 예언서라고 합니다. 요약하면 전기 예언서는 예언자들의 활동이고 후기 예언서는 예언자들의 설교입니다. 예언자들의 설교도 부피가 큰 게 있고 작은 게 있는데, 작은 것들을 열두 소예언서라고 해요. 자세한 내용은 나중에 설명하겠습니다.

보통 우리가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데요. 도대체 그게 무슨 뜻일까요? 말씀, 말이거든요. 하나님의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이 말을 할까요? 생각해 보세요. 보통 구약성서에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직접 말을 하는 것처럼 나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내가 너에게 지시할 어느 땅으로 가라.’ 하는 식으로 나오죠? 아브라함만이 아니라 모세도 그렇고 많은 영적 대가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말을 들은 걸로 나옵니다. 정말 하나님이 말을 할까요? 언어라는 걸 생각해 보세요. 말을 했다면 하나님이 음성으로, 즉 소리로 말했을까요? 그건 아니겠죠. 하나님이 입이 있을까요? 입에서 나오는 그런 소리는 아니거든요. 그럼 뭘까요? 우리가 하나님이 말한다고 하잖아요? 창조 사건에서도 빛이 있으라고 하는 말로 빛이 생겼다고 합니다. 빛이 있었다고 하는 이 아포리즘을 제가 뒤에서 해석하게 될 텐데요. 구약성서에서 중요한 한 대목이거든요. 그 방향만 살핀다면, 빛이 있으라는 말이 성서에 의하면 창조의 힘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론이기도 합니다. 말을 히브리어로 ‘다바르’(רבד)라고 하나요? 우리가 보통 많이 알고 있는 ‘로고스’(λόγος)라는 헬라어죠. 요한복음에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할 때 로고스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빛이 있었고 세계가 만들어졌다고 하죠. 말이 곧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위에서 말한 하나님의 존재론을 조금 보충해야겠습니다. 사람이 개입해서 처리할 수 없는 궁극적인 힘을 존재(Sein)라고 하죠. 하나님에 대해서 사람들이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은 존재론적인 것이 아니에요. 당신이 누구냐 하는 모세의 질문에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자’라고 했잖아요. 우리는 무언가에 의해 변화될 수 있는 걸 하나님의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자체, 그 어떤 것으로도 변형될 수 없는 참된 하나님의 모습을 존재론이라고 한다면, 말 혹은 언어가 바로 하나님입니다. 하이데거는 언어를 존재의 집이라고 말했는데요. 하이데거는 신학자가 아닙니다. 그리고 하이데거 자신도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는 게 아니라고 하고요. 그의 설명에 의하면, 신학은 철학보다는 자연과학에 가깝다고 합니다. 신학은 오히려 실증적인 것을 이야기한다고 하거든요. 반면에 철학은 실증이 아니라 존재를 말하기 때문에 전혀 차원을 달리한다고 말해요. 하이데거의 존재론에서 하이데거는 자기가 말하는 존재가 하나님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엔 그가 말하는 존재는 기독교의 성령론이나 신론과 다를 게 하나도 없어요. 하여튼 언어는 하나님의 존재론이고 창조의 힘입니다. 창조의 힘도 사실은 하나님이거든요.

여러분은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좀 더 열어놓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실체론적인 존재로 자리 잡고 있어요. 옥황상제라든지 산신령처럼 어떤 실체(substance)로 생각하는 거죠.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실체에 머물러 있는 한 우리는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을 이해하기 힘들 겁니다. 제가 여기에서 하나님의 존재론을 말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에요. 우리는 자꾸 하나님을 규정하려고 하거든요. 일단 규정되면 그건 하나님이 아닙니다. 이렇게 말하니 도덕경에 나오는 도(道)와 비슷해지는데요. 하나님을 규정하면 더 이상 하나님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에 의해서만 규정이 가능해요. 그래서 기독교 신학은 근본적으로 계시론에 근거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낼 때만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거죠. 우리가 머리를 굴리거나 인식의 방식을 통해서 하나님을 연구해내는 게 아닙니다. 그건 큰 착각이에요. 신학은 뭘 연구해내는 게 아닙니다. 제가 지금 중요한 걸 말하고 있는데요. 자연과학자들이 연구를 해서 어떤 원리를 발견해내듯이 우리가 하나님을 연구해내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드러내는 거예요. 그걸 계시라고 합니다. 드러내는 그것에 우리가 반응하는 것뿐이에요. 그 반응이 신학인 거죠. 하나님에 대한 진술에서 주도권은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말이 그렇지, 실제로는 신학자들이 연구해서 하나님에 대해 더 많이 알아내는 게 아니냐고 말할 수 있어요. 그러나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 알아내는 것은 곧 없어져요. 그런 건 기독교가 말하고자 하는 진리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그 이상은 설명하기가 힘드네요.

하나님은 하나님 스스로에 의해서만 우리에게 인식되는 분입니다. 그분에 대해서 우리가 어떤 개념 규정을 내리면 이미 그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는 거고요. 모세가 호렙산에서 자기에게 소명을 주신 하나님을 향해 나를 부른 분을 누구라고 백성에게 말해야 하는지를 물었을 때,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 말이 바로 그런 분을 말하는 거예요. 어디에 의존하지 않고 자기 존재 근거를 자기 안에 가지고 있는 분이라는 거죠. 그런 분은 그분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피조물이기 때문에 그분의 생각을 몰라요. 토기장이와 질그릇의 관계라고 할 수 있어요. 질그릇이 어떻게 토기장이의 뜻을 다 알 수 있겠어요. 그저 그렇게 만들어진 자기의 소임을 감당할 뿐이죠. 전혀 차원이 다르니까요. 모세가 하나님에게 들은 하나님의 이름, 즉 신명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I AM THAT I AM)입니다. 어떤 신학자에 의해서 규정될 수 없는 그런 하나님인 거죠. 그런 점에서 신학은 종말론적으로 열린 학문입니다. 당연하죠. 하나님이 자기를 드러내는 것만큼 그 계시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는 작업을 신학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종말까지 계속해서 그 작업을 해야 하니까요. 그러니까 지금까지 신학자들이 말했다는 하나님은 아주 일부에 지나지 않는 거죠.

말이 옆으로 많이 나갔습니다. 하나님은 언어존재론적인 차원에서 보면 언어로 존재합니다. 그 말이라는 것이 지금 우리가 말하는 그런 말이 아니라, 창조의 힘, 생명의 힘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언어라는 걸 우리의 커뮤니케이션 안으로만 축소시키지 마세요. 이것은 더 근원적인 힘을 갖고 있습니다. 언어 철학을 하는 분들은 이렇게 말해요. 나무가 있기 전에 이미 나무라는 말이 있었다고요. 나무라는 말을 통해서 인간이 인식하게 되고 그 인식을 갖고 볼 때 그 나무가 보인다는 거예요. 저도 언어 철학을 잘 모르지만, 오늘 여기 하나님이 말씀으로 창조했다는 것이나,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하는 성서의 진술만 놓고 봐도, 그 말은 말이 되거든요.

다시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로고스를 음성학적으로 나타나는 소리 언어로 축소시켜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 언어 속에는 훨씬 더 창조적인 생명의 근거가, 혹은 힘이 들어 있어요. 하이데거 이야기를 다시 할게요.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말을 하는 게 아니라 말이 말을 한다고 말이죠. 언어가 말을 한다고 해요. 그것은 살아 있는 언어를 지칭하는 겁니다. 창조적인 언어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얼마나 신학적입니까? 성령이 우리를 통해서 말하게 한다거나,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의 영감으로 되었다는 말이, 하이데거가 말하는 식의 언어가 말을 한다는 것과 잘 맞아 떨어지지 않나요?

오늘 제가 언어와 창조의 문제를 말했는데, 무슨 뜻인지 감이 오나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문자적 차원이 아니라 언어존재론적인 차원을 갖고 있다는 겁니다. 그건 이해하겠죠? 하나님이 말했다는 것을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야기한 것처럼 이해한다면, 우리는 성서의 세계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아 어디로 가라’, 혹은 ‘노아야 방주를 지어라’라고 했을 때 정말 소리를 내서 말한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어처구니가 없는 어린아이 신앙에 머물러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일종의 신탁인데요. 그럼 아브라함은 어떻게 하나님의 소리를 들었을까요? 정말 귀를 통해서 들었을까요? 아니면 깨우침이었을까요? 그도 아니면 자기의 삶에 대한 반성을 통해 느낀 것이었을까요? 도대체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그 사실은 무엇을 이야기하는 걸까요? 참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구약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분명히 옳은 일입니다. 다만 거기서 하나님이 말한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잘 따져볼 필요가 있어요. 조금 더 속도를 내야겠네요. 앞서 언어가 하나님의 존재론이라고 했고요. 우리가 머리를 굴려서 하나님을 아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를 계시할 때만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했는데요. 그런 차원에서 구약성서는 하나님의 계시, 즉 하나님이 자기를 알린 겁니다. 어떤 개인, 어떤 민족, 어떤 역사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기를 알린 사건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게 계시죠. 그렇다면 성서가 하나님의 계시라는 걸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것을 우리는 영감론이라고 합니다. 성서가 성령의 영감(inspiration)을 통해서 기록되었기 때문에 다른 것들과 구분된다는 거죠. 여기에 두 가지 입장이 있어요. 하나는 보수적인 입장으로 축자영감설이 있고, 다른 하나는 좀 열린 사람들의 입장으로 전체 영감설이 있습니다. 전자는 문자 하나하나를 성령이 축자적으로 기록했다고 하는 기계적인 방식의 기록을 강조합니다. 반면 후자는 전체적으로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되었다고 하는 유기적이고 역동적인 방식의 기록을 강조하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서 기자입니다. 기자가 기계적으로 참여했는가, 혹은 역동적으로 참여했는가 하는 거죠. 이 말은 곧 성서의 역사성을 묻는 것인데, 성서가 역사에 의존하는가, 아니면 초월하는가 하는 겁니다. 어느 영감설이 의존한다고 보는지 답이 나오죠? 역동적 영감설이 성서가 역사에 의존해 있다고 보고, 축자적 영감설은 성서가 역사에 초월해있다고 봅니다. 어느 입장을 지지하느냐에 따라 바로 성서를 해석하는 방법에서 차이가 생깁니다. 초월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성령의 도움을 통해서만 성서를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반면, 역사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은(저도 이쪽에 포함됩니다.) 역사비평을 통해서만 해석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성서를 역사적 산물로 보느냐, 아니면 그 너머에 있는 것으로 보느냐 하는 겁니다. 역사 안에 있다고 볼 때 역사적 비평(historical criticism)이 필요한 거죠. 역사비평에 대해서는 여러분에게 메일로 보내드렸는데요. 상당히 많은 연구가 진행되었습니다.

 

전승으로서의 하나님 말씀

여러분, 이 신학이 가장 오래된 학문이거든요. 신학은 아무렇게나 주먹구구식으로 성서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굉장히 세밀하게 과학적으로 성서를 연구했기 때문에 그 어떤 학문보다도 훨씬 더 발전되어 있어요. 그중에 하나가 역사비평입니다. 성서를 하나하나 살피면서 이것이 어떤 역사적 배경에서 기록되었는지 정확하게 찾아내려는 작업이죠. 재미있습니다. 여기에서 우선 우리가 전제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전승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구약성서개론을 다룬다는 점에서, 우리는 전승 개념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보통 독일어로는 ‘위벌리페어룽’(Überlieferung)이라고 하는데요. 전승은 하나님의 말씀이 처음부터 완성된 게 아니라 구전으로 시작되어 조금씩 전해져왔다는 겁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소박한 기독교인들은 구약성서가 처음부터 지금과 같은 구조와 내용으로 되어 있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가 않거든요. 성서는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바다 속에서 솟아나거나 어떤 고목나무 밑둥치에서 발견된 게 아니라 이스라엘의 역사 과정에서 출현했어요. 역사 과정에서 출현했기 때문에 당연히 역사가 무엇인지를 알아야겠죠. 아주 오래 전으로 생각을 옮겨보세요. 이미 태초에 구약성서가 있었을까요? 아담과 이브가 구약성서를 읽었을까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이 구약성서를 읽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성서가 없었어요. 아니면 훨씬 후대로 내려와서 이집트에서 해방된 히브리인들이 광야에 있을 때, 혹은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성서를 읽었을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문서로 편집되기 시작한 것은 이스라엘이 명실상부한 왕정국가의 모습을 다진 이후였어요. 그리고 구약성서를 최종적으로 정경화한 시기는 놀랍게도 기원후 90년이었습니다.

이 왕정시대가 주로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입니다. 이 시대가 중요해요. 오래 전에 구약성서는 단편적으로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어떤 사건에 대한 구전이 있었겠죠. 그런 구전들이 편집이 되고 문서가 됩니다. 출애굽 사건을 생각해 볼까요? 모세가 히브리 사람들을 이끌고 홍해를 건너 광야로 나온 출애굽 사건은, 그 사건이 일어났을 당시에 누가 기록해 놓은 게 아니었어요. 입으로 구전이 되었죠. 오랫동안 구전으로 내려오면서 단편적으로 다르게 전해지기도 했어요. 미리암에 대한 전승을 비롯해 수많은 전승들이 이스라엘 민족의 입에서 입으로 구전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언젠가부터 문서화가 됐고, 그런 문서들도 나중에 편집이 됩니다. 이런 과정을 거쳤거든요. 그런데 그런 과정에서 바로 결정적인 시기가 다윗과 솔로몬 때라는 겁니다. 이때 나라가 탄탄한 자리에 서게 되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신들의 뿌리가 어딘지를 질문하기 시작했어요. 어려울 때는 먹고 사는 게 바쁘니까 정신없이 지내다가, 어느 정도 생활이 안정되면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내 부모나 조상이 누구이며 어디에 있는지를 찾는 것처럼, 조상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는 거죠.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경제적인 여유가 생기니까 학자들을 시켜서 뿌리 찾기를 시작했어요. 그 결론이 출애굽 공동체였습니다. 출애굽에서 더 올라가면 어디냐고요? 족장들 시대로 올라가고, 아브라함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됩니다. 그 이상은 뭐냐고요? 설화들로 되죠. 올라갈수록 희미한 거예요. 창세기 1장에서 11장을 우리가 원역사라고 하는데 사실의 역사는 아닙니다. 그건 접어두고요. 하여튼 출애굽으로 거슬러 올라간 이스라엘의 역사가 진행되면서 또 하나의 중요한 사건이 일어나는데 그것이 바로 바벨론 포로 귀환입니다.

구약성서는 이렇게 보아야 합니다. 출애굽과 바벨론 포로 귀환이 두 개의 기둥을 이루고 있어요. 이 두 사건이 구약을 지탱하는 핵심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출애굽을 중심으로 한 신명기적 관점으로 자기들의 역사를 재구성했는데요. 이건 주로 모세오경을 중심으로 한 겁니다. 그리고 예언자들은 주로 바벨론 포로 시절에 많은 활동을 했어요. 이 때 예언서들이 많이 기록되었습니다. 그 뒤로 가면 성문서가 기록되는데요. 성문서는 역사적으로 가장 후기에 쓰였습니다. 이 두 개의 기둥에서 멀리 갈수록 희미하다고 할 수 있어요. 다시 말해 창세기의 앞부분으로 갈수록 역사적 사실이라고 말하기 힘들고, 뒤로 갈수록 점선이 나와요. 그러다가 신구약 중간기에 가면 또 희미해집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개념이 전승입니다. 전승은 전해져 내려왔다는 거잖아요? 그럼 생각해 보세요. 전승이 토씨 하나까지 그대로 전해오는 게 아니잖아요? 중간에 말 재주가 있는 사람에 의해서 들어가기도 하고 빠지기도 하죠. 흡사 우리나라의 민담처럼요. 해님이 된 오빠와 달님이 된 누이 이야기 같은 거 있잖아요? 그것처럼 기억에 따라서 이야기가 달라지거든요. 그렇다고 해서 구약성서가 무조건 근거가 없는 설화라는 게 아니고요. 역사적인 부분도 있는데 그런 부분도 있다는 거예요. 어쨌든 전승에 대해서 잘 이해해야 합니다.

창세기에 보면 비슷한 이야기들이 중복되어 나오죠. 참고로 말하면 아브라함, 이삭, 야곱, 이 세 사람을 3대 족장이라고 하고, 그 외에 또 중요한 사람이 하나 있는데, 바로 요셉입니다. 이 사람들이 할아버지, 아들, 손자의 관계라고 하는데요. 사실은 아브라함 전승, 이삭 전승, 야곱 전승, 요셉 전승이 따로 있었어요. 따로 내려오다가 나중에 창세기를 기록한 최종 편집자에 의해서 한 가문처럼 기록된 겁니다. 그 증거가 있냐고요? 학자들이 연구를 했어요. 증거가 있습니다. 사실 성서를 읽을 때 서로 다른 전승인지, 아니면 정말 한 가문인지가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아요. 그 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경험했는지를 찾으면 되는 거니까요. 그러나 역사비평과 같은 전문적인 과정을 통해서 성서에 나오는 하나님을 왜곡하지 않을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전승이 중요해요. 시간이 많이 지났군요.

그렇게 전승된 것이 문서화되고 편집된 다음, 정경이 되었다고 앞서 짤막하게 설명했습니다. 캐논(canon)이 되었어요. 캐논은 기준, 잣대라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구약성서를, 기독교인들은 신구약성서를 삶의 기준으로 삼았다는 거죠.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가진 성서가 오리지널이 없는 사본이라는 데 있어요. 기초적인 건데 책을 읽으면 나옵니다. 사본이 상당히 여러 곳에서 기록되었습니다. 지금처럼 인쇄술이 발달된 게 아니기 때문에 성서를 양피지에 일일이 받아썼어요. 이 일을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요. 유대인들 중에서는 서기관들이 그 일을 했고, 수도원에서도 그 일을 많이 했습니다. 바울의 편지도 오리지널은 없고 사본만 있는데, 사본마다 조금씩 달라요. 그래서 사본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본들은 유물이기 때문에 박물관에 있어요. 어떤 사본은 고린도서만 있기도 하고, 어떤 사본은 복음서만 있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본은 신약 27권만이 아니라 외경들까지 들어 있기도 하고요. 사본만 연구해도 굉장히 큰 작업입니다. 복음서를 읽다 보면 어떤 건 괄호로 치고 난외주로 표시하기도 하죠. 그 구절이 어떤 사본에 따른다거나, 어떤 사본에 없다는 식으로 말이에요. 성서를 번역할 때 어떤 사본을 택하느냐에 따라 내용이 조금씩 달라집니다. 그런데 전반적으로 볼 때 컴퓨터 작업을 해보니까 현재 세계 기독교계가 쓰고 있는 것은 거의 일치한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거의라고 하지만 아직까지 완전히 복구하지는 못했어요. 그건 불가능하기도 하고요.

결론을 내려야겠군요. 핵심은 성서를 해석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는 지금 사본도 아닌 번역본을 가지고 있어요. 번역본 위에 여러 가지 사본들이 있고, 그 위에 정경이 있습니다. 정경 위에 편집된 여러 개의 문서들이 있겠지요. 그 위에 구전이 있겠고 구전을 따라 올라가면 사건이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구원 사건, 출애굽 사건, 예수님의 공생애 사건, 부활 사건, 십자가 사건 등이죠. 그럼 사건이 중요하겠죠? 그러나 우리에게는 사건이 없어요. 2-3천 년 전의 사건들이 우리에게 직접 올 수는 없으니까요. 이런 과정을 거쳐 우리는 지금 번역된 성서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 성서를 읽고 있는데, 이걸 바로 하나님이라고 말한다면 곤란하지 않겠어요? 그것보다 더 중요한 사건으로 가야죠. 그렇다면 이 사건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한 단계, 한 단계씩 말이죠. 한꺼번에 뛰어 넘을 수는 없어요. 한꺼번에 올라가려는 사람들이 극단으로 가면 이단이 됩니다. 문선명이 『원리강론』을 썼잖아요. 그걸 보면 성서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요. 성서를 그냥 읽고 나서 그걸 하나님의 사건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고 말해요. 신천지도 마찬가지고 여호와의 증인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 과정을 다시 쭉 밟아 올라가는 해석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해석은 가능한 대로 사건에 가까이 가려고 하는 노력이죠.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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