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1강

기독교 신앙과 현실성 문제

 

설교자의 딜레마

오늘 제가 샘터교회 예배 때 전한 설교의 제목은 ‘보이지 않는 현실성’이었습니다. 설교에서 모든 걸 다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게 설교의 한계예요. 제가 설교를 할 때 보통은 30분 내외로 하는데요. 모든 걸 다 말할 수 없으니까, 비약되는 부분들이 많습니다. 그런 대목이 나올 때마다 이건 좀 더 설명을 해야 하는데, 하는 아쉬움이 있어요. 그래도 그냥 전달되는 것만큼만 전달하자고 생각합니다. 또 제가 아무리 설명을 잘한다고 해도 설교는 듣는 사람과의 상호 작용이기 때문에, 제가 하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보고 그냥 넘어가요. 좀 더 궁극적으로 보자면 모든 깨달음은 성령의 문제입니다. 성령이 진리의 영이고 보혜사니까요. 보혜사라는 말에는 깨닫게 한다는 뜻도 들어있습니다. 성령은 아주 근원적인 능력입니다. 사실 이것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어디에 있을까요? 진리, 참인 것, 생명, 창조, 좀 더 나아가 종말도 마찬가지고요. 이런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원초적이고 역동적인 통치 능력이 성령입니다. 우리는 다 이 안에 들어 있지 않습니까? 창조 안에, 생명 안에, 진리의 힘 안에, 종말론적으로 열려진 세계 안에 들어 있어요. 결국 우리의 깨우침은 영의 문제입니다. 저는 세월이 갈수록 이 부분을 점점 더 많이 느끼게 돼요. 여러분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어요. 사람이 사람을 가르친다는 것이 가능한지는 여전히 회의적입니다.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 선생과 학생으로 자리 잡고 가르치고 배우기는 하는데, 그건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어요.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제가 목사이기도 하고 한 집안의 아버지이기도 한데요. 목사라는 것도 선생이고, 아버지도 선생일 수 있잖아요? 일단 선생의 입장에서 본다면 선생의 장점은 조금 먼저 그 길을 갔다는 거예요. 먼저 간 길을 안내한다는 점에서 선생이 됩니다. 그러나 선생이라는 위치는 많이 위험해요. 이것은 저 자신을 향해서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미 마태복음에도 그런 말이 나오는데요. 선생은 없다는 말이에요. 하나님 외에 누가 선생으로 나설 수 있겠느냐는 거죠.(마 23:1-8, 약 3:1 참조)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은 선생 노릇하기를 좋아했거든요. 그게 저에게도 있습니다. 이것은 인격의 문제라기보다도 인간의 속성인 것 같아요. 인간이 자기중심적이니까요.

선생들은 대개 자기가 알고 있는 관점으로만 세계를 봅니다. 고정관념이라고도 할 수 있어요. 자기의 틀이 있죠. 저도 제 관점으로만 뭘 보거든요. 사실은 진리라고 하는 건 그 안에 함몰되는 것이 아닌데, 선생들은 계속 그 안에 머무르면서 학생들을 그리로 끌어들이는 겁니다. 물론 좋은 선생들은 그러지를 않죠. 음악 선생을 예로 들겠습니다. 음악 선생이 학생들에게 레슨을 할 때 시원찮은 선생들은 자기 식대로 가르칩니다. 자기를 따라 하라는 거죠. 나는 ‘바담 풍’ 해도 너는 ‘바람 풍’ 하라는 식으로요. 사실은 자기도 바이올린이나 피아노나 클라리넷의 세계에 들어가지 못한 상태에서 누구를 가르친다는 겁니다. 그 깊이가 100이라고 한다면 자기도 겨우 3이나 4밖에 모르거든요. 그런데 깨달음이라는 것이 자기가 들어가 본 만큼만 아는 거잖아요? 자기가 들어가 보지 못한 것은 아무리 들어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성경은 100이 아니라 더 깊이 들어가는 영적 세계인데요. 우리가 부활, 재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듣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냥 낱말로만 알 뿐이죠. 진리의 깊이가 100이라고 한다면 3이나 4정도만 아는 겁니다. 그 선생이 3정도만 안다고 할 때, 그 밑에 이야기는 남의 말이나 변죽을 울리는 것에 불과합니다. 선생들은 자기가 몰라도 선생 노릇을 해야 하니까, 더 깊은 곳에 있는 것은 절대 말하지 않아요. 결국 진리라는 것은 일정한 범위 안에 있는 정보를 가져다가 반복해서 가르치는 게 아니라, 그 밑으로 들어가도록, 나아가도록 하는 운동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선생 자신이 그 밑을 전혀 모르니까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깨우침이 안 일어나는 거죠.

교회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식으로 목사 노릇을 해야 하니까, 뭔가를 아는 것처럼 말해야 하니까, 힘이 들어가고 과장하게 되는 거예요. 진리 자체에 대해서는 말할 게 없으니까 학생들을 쥐어짜는 겁니다. 제 집사람이 피아노를 전공했습니다. 간혹 그런 이야기를 같이 하면서 신앙 교육과 예술 교육이 비슷하다는 걸 공감하는데요. 피아노나 바이올린을 가르치는 사람들도 그게 잘 안 되어 있으면 학생들을 들볶아요. 왜 그렇게 못하느냐, 왜 연습을 안했느냐고 말이죠. 자기가 알고 있는 한도 내에서 학생들을 들들 볶습니다. 그런 방식으로라도 잘 따라하는 학생에게는 점수를 잘 주는 거죠.

이런 근본적인 한계 때문에 궁극적인 차원에서 볼 때 선생들은 학생들을 가르칠 수 없다고 말해야 합니다. 정말 괜찮은 선생은 자기가 가르치는 게 아니라 학생이 음악의 소리와 만나도록 합니다. 사실은 선생이 직접 만나게 해줄 수는 없어요. 다만 학생에게 소리가 저기 있으니까 거기에 귀를 기울이라고 몸짓만 하는 거예요. 학생과 소리가 만나게 되면 그때 예술이 되는 거죠. 그게 안 되면 선생을 따라서 기술자가 되는 겁니다. 기술자가 돼도 사람들은 예술가라고 이야기합니다. 모든 설교에 종교적 교훈 같은 것들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목사의 설교를 잘 판단하지 못하는 것처럼, 예술에서도 평범한 사람들은 피아노 소리만 듣고는 그 사람이 정말 예술의 세계로 들어갔는지 아닌지를 구분하지 못합니다.

이런 점에서 교육은 근본적으로 사람에게서는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근원적인 힘인 성령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볼 수 있어요. 우리가 좌우할 수 없는 힘으로서 나타나는 진리의 세계가 바로 성령의 활동이니까요. 나 스스로도 잘 알지 못하는 동시에 아는 것마저도 다 설명하기 힘든 그러한 한계 때문에, 신자들이 잘 알아듣지 못해도 저는 그냥 지나갑니다. 몰라도 괜찮다고 말이죠. 결국 성령과의 소통이 신자들에게 일어나게 되면, 제가 비약하고 지나가더라도 영적인 스파크가 일어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설교 한편으로 신자들이 변한다는 게, 변한다기 보다는 좋은 충격을 받는다는 게 쉬운 일이겠어요? 그런 일은 아주 드뭅니다. 많이 것이 축적 되어야 해요. 오랫동안 시간이 지나면서 영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거죠. 이렇듯 멀리보고 가야 하기 때문에 설교하는 30분 동안 아쉬움이 있어도 즐겁게 지나갑니다.

 

광신과 신앙 사이에서

오늘 설교 보이지 않는 현실성’에서 제가 말하고 싶었던 핵심은 이겁니다. 이것저것 성경 본문도 이야기하고 나름의 논리로 설명했지만, 중요한 것은 두 가지의 다른 명제를 통합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세계로 들어가자는 거였어요. 첫째 명제는 부활이 보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사실 부활만 보이지 않는 세계일까요? 하나님도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결코 하나님을 직접 대면할 수 없어요. 하나님을 본 사람은 다 죽습니다. 죽지 않고서는, 현재와 질적으로 다른 세계로 우리가 옮겨지지 않는 한, 우리는 하나님을 대면할 수 없습니다. 신성불가침인 거죠. 부활도 마찬가지고 기독교 신앙의 가장 궁극적인 문제들은 보이지 않습니다.

둘째 명제는 예수의 부활이 확실하다는 겁니다. 예수 부활의 확실성이죠. 이 두 명제는 각각으로 보면 옳지만 서로 모순됩니다. 우리는 보통 보이지 않으면 확실하지 않다고 생각하니까요. 우리가 그런 틀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실증적 세계관이죠. 그 틀에 묶여서 보이지 않는 세계를 확실하다고 생각하기가 힘듭니다. 물론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의 나라는 보이지 않지만 확실하게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광신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많아요. 광신과 건강한 기독교 신앙은 종이 한 장 차이입니다. 정통 기독교 안에도 광신적인 요소가 많이 있을 겁니다. 그걸 딱 선명하게 구분해 내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것을 몇 가지의 기준으로 제시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다만 이렇게 말할 수는 있습니다. 이런 신앙들이 실제로 생명 지향적으로 나가고 있는가 하는 거죠. 생명 지향성으로 어느 정도는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절대적인 기준은 될 수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는 무엇이 생명 지향적인지에 대한 최종적이고 완료된 대답을 아직 갖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저 사람이 예수를 믿더니 신실해졌다, 술 담배도 안하고 집에도 일찍 들어오고 아내하고 옛날에는 많이 싸웠는데 지금은 괜찮아졌다는 식의 모습을 보고 우리는 생명 지향적으로 변했다고 말하겠지만, 그게 아닙니다. 혹은 옛날에는 생태적인 마인드가 없었는데 저 사람이 예수 믿고 난 다음에는 물건도 아껴 쓰고 에너지도 절약하고 생태 운동에도 참여하더라고 하면서 이걸 생명 지향적이라고 보기도 할 겁니다. 물론 이것도 생명 지향적이기는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그 사람이 생명 지향적인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제삼자가 판단하기가 쉽지 않아요. 속으로는 욕구 불만이 가득한데도, 겉으로는 상당히 세련된 행동을 할 수 있는 게 사람이거든요. 이런 기준으로 우리가 대충 파악할 수 있을 뿐이지, 이렇다 저렇다 말하기는 힘든 겁니다. 지금 광신과 신앙의 차이를 말하려고 하는 건 아니고요. 보이지 않는 부활 세계가 확실하다고 하는 것, 이 두 개의 다른 차원의 명제들이 어떻게 우리의 신앙적 세계 속에서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 하는 것이 관건입니다. 왜 광신을 말하는가 하면요. 우리는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해서 막연하게 생각해 버리는 경향이 있고요. 또 확실하다는 것도 속으로는 정말 믿어지지 않는데 겉으로만 믿는다고 말하기 때문에, 그것을 광신이라고 말한 겁니다.

광신까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보이지 않는 세계의 확실성에 깊이 들어가지 않을 경우, 나타나기 쉬운 또 하나의 현상이 자기 연민입니다. 이것은 제가 다른 데서도 여러 번 이야기했을 거예요. 기독교 신앙을 자기 연민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관심 없이 하나님을 자기 자신의 신앙적이고 실존적인 대상으로, 위로의 대상으로 만들어 놓는 겁니다. 그렇다면 굳이 하나님을 믿을 필요가 있을까요? 부처님을 믿어도 되죠. 돌덩어리를 믿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일단 믿으면 됩니다. 돌이 나를 구원한다는 절절한 신앙이 나올 수 있어요. 남편에게 구타당하는 여자들을 보면, 우리는 왜 그렇게 맞고 사냐 헤어지지, 하는 생각을 할 겁니다. 그들이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은 바로 자기 연민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구타하는 남자가 어느 순간에 자기를 끔찍이 사랑하는 것처럼 느껴지거든요. 심리적으로 거기에 묶여서 떠나지 못하는 거예요. 기독교도 신앙적으로 나르시시즘이라는 자기 연민에 빠질 위험성이 있습니다.

이러한 확실성, 리얼리티, 보이지 않는 세계, 창조, 이런 것들이 열리지 않기 때문에 자기 연민에 빠집니다. 앞서 말한 대로 100보다 더 밑으로 들어가야 할 수의 세계에서 3까지만 알고 있어서 그래요. 3의 개념밖에 모르고, 3의 개념도 확실하게 모르는 거죠. 이걸 안다면 더 많은 수가 있다는 생각을 하고 더 내려가게 되는데, 이것도 정확히 모르고 딱 굳어진 상태로 머물러 있기 때문이죠. 그 안에만 머물러 있으면 재미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자기의 어떤 심리적인 욕구에 빠져들 수밖에 없습니다. 많은 여성도들이 교회 갈 때마다 울면서 부흥회를 해야 하잖아요? 거의 습관적으로 그렇게 해요. 그걸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낍니다. 그런 신앙들은 어쩔 수 없어요. 그런 것들도 필요하긴 한데, 그것이 우리의 영성을 건강하게 하는가 하는 차원에서 볼 때, 그건 퇴행입니다. 퇴행을 생명 지향적이라고 할 수는 없거든요. 다른 길을 모르니까 그 길로 갈 수 밖에 없어요. 어린아이 같은 믿음이죠. 단순하고 소박하게 믿는 거예요. 어린아이라고 한다면 그런 걸로 만족할 수 있겠죠. 그러나 어른이 어린아이의 행동을 한다면 병원에서 진료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 둘 사이를 구분하기가 힘들기도 하지만 자꾸 착각을 합니다. 믿음을 심리적인 위로로 생각하면서 거기에만 머물고 있는지, 아니면 더 깊은 세계에 들어가려고 하는지 말이에요. 사람들은 세계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냥 위로만 받으면 그만이죠. 이게 인간 심리에 나타난 사도마조히즘(sadomasochism)과 비슷합니다. 마조히즘이 교회 안이나 신앙 안에 심각하게 자리 잡고 있어요. 공격적이기도 하고 자학적이기도 하고, 병적으로 나타나기도 하죠. 교회 안에서 이걸 병이 아닌 것처럼 느끼는 이유는 이게 종교적으로 포장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포장을 뜯고 속을 까보면, 역설적이면서도 실존적인 운명을 다 맡기는 신앙이라기보다는 그냥 ‘묻지 마’ 식의 광신, 퇴행 같은 것들이 너무 많아요. 거기에 만족하고 살겠다면 어쩔 수 없죠. 어쨌든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보이지 않는 그 부활의 세계를 나는 믿는다고 하는 말이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라는 겁니다.

부활의 확실성

이 두 가지 문제에서 두 번째 문제를 먼저 말해야겠습니다. 부활이 과연 확실하냐는 겁니다. 이 문제를 우리가 얼마나 고민을 했냐는 거죠. 제가 오늘 설교에서 짚은 것은 사도성의 문제였어요. 부활이 확실하다는 것을 우리가 어떤 근거로 말할 수 있을까요? 사실 말할 근거가 많지 않습니다. 자연과학적으로 그것을 가타부타 결정할 수는 없는 상태죠. 자연과학자들도 부활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겁니다. 혹은 반대로 있다고 말할 수도 없을 거예요. 자연과학은 실증학문으로서 상당히 근거가 있는 이야기를 제시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을 결정적으로 대답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연과학도 미완의 학문인 거죠. 그래도 학문 중에서는 가장 실증적입니다.

심리학도 과학입니다. 마음에 대한 과학입니다. 인간의 정신이 일정한 유형을 가지고 있어서 분류가 가능합니다. 물론 인간의 정신에는 많은 가변성이 있어요. 우리가 컴퓨터로 다 계산해 낼 수 없는 많은 변화의 가능성들이 있어서 기계적으로 다룰 수가 없습니다. 단지 확률일 뿐이에요. 인간의 심리를 다루는 심리학과는 달리 물리학이나 생물학은 확률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절대적인 엄밀성을 가졌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제가 심리학, 생물학, 그리고 과학에 대해 자세하게 말할 수 있는 입장은 못 됩니다. 신학적 접근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면서 자연과학과의 차이를 말하고 있는 겁니다. 진리에 대한 신학적 접근이 생물학이나 물리학의 접근법에 비해 근거가 없는 게 아니라는 걸 말하는 거예요. 한 번 말한 것 같은데 다시 짚고 넘어간다면, 자연과학은 지금 세계를 끌어가고 있는 과학적인 것들에 대한 안내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세계가 어떻게 변할지 누가 압니까? 모르는 상태니까 달라지는 거예요. 더 많은 설명이 필요한 내용을 공연히 끄집어낸 것 같네요. 이 정도로 하고 지나가겠습니다.

부활이 확실하다는 것은 사도들의 증언에 근거한 겁니다. 일전에 말했듯이 예수의 부활현현은 사도 이외의 다른 사람들에게는 나타나지 않았거든요. 사도들과 몇몇 사람들에게만 나타났어요. 고린도전서 15장에 나와 있는 사람들과 복음서에 나와 있는 막달라 마리아 등이 그들입니다. 그들을 통틀어 제가 사도(使徒)라고 말하는 건데요.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타난 특별한 신앙 경험이자 궁극적인 생명 경험이었습니다. 그냥 예수와 상관없는 사람들도 알아 볼 수 있는 어떤 사건이 아니었다는 거예요. 자연과학은 종교나 성별에 상관없이 객관적인 어떤 사실들에 대해서만 말하잖아요? 그러나 예수의 부활은 그런 방식이 아니라는 겁니다. 사도의 경험에 근거하고 있어요. 교회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할 때 니케아-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나온 네 가지 규정이 있었잖아요? 그중에 하나가 사도성이었죠. 단일성, 보편성, 거룩성, 그리고 네 번째가 사도성이었어요. 우리는 일단 이 사도적 신앙을 전제로 합니다. 다시 말해 기독교 신앙은 근본적으로 사도들의 경험이 옳았다, 진리였다, 궁극적인 생명의 경험이었다고 전제하는 겁니다. 이것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기독교 신앙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기독교의 정체성은 예수님을 경험한 사도들을 통해서 확립되는 겁니다. 우리는 직접 예수님을 만나지도 못했고, 예수님이 무슨 말을 했는지 듣지도 못했어요. 우리는 사도들의 부활 경험에 근거해서 부활이 확실하다고 전제하는 거예요.

이게 막연한 것 같죠? 사도들이 만약에 잘못 경험했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이 들 겁니다. 정말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이 말짱 헛일일 테니까요. 만약 그게 의심스럽다면 기독교 신앙을 좀 유보하고 천천히 생각해 보세요. 그러나 일단 우리가 기독교 공동체 안에 들어왔다면 그걸 전제로 하는 겁니다. 따라서 어떤 종교든 아무리 그 종교가 객관적인 입장을 취한다고 하더라도 어느 단계에서는 주관적인 결단을 해야 하는 거예요. 선택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결혼할 때 배우자를 선택하잖아요. 그 때 그 사람이 나에게 가장 맞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결단하는 거지, 그 사람이 객관적으로 볼 때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해서 결혼하는 게 아니잖아요? 이게 적당한 비유인지는 잘 모르겠네요.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와 결혼하는 것입니다. 어느 한 순간에 결단이 필요한 거예요. 내가 여기에 내 운명을 맡기겠다는 거예요. 어쨌든 우리는 사도들의 부활 경험을 통해서 예수의 부활이 확실하다고 말하는데요. 이게 맞는 이야기일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뭔가 좀 더 이야기가 필요한 것 같긴 한데요. 나중에 생각나면 더 하기로 하죠.

이걸 보충해야겠군요. 그럼 사도들이 하는 말은 앞뒤가 맞지 않아도 믿어야 한다는 뜻일까요? 그건 아닙니다. 그들도 나름대로의 한계가 있었어요. 2천 년 전이라고 하는 시대적인 한계를 갖고 어떤 궁극적인 경험, 역사적 예수에게서 하나님을 경험한 겁니다. 따라서 그들의 표현은 고대인들의 방식을 따를 수밖에 없었어요. 그걸 조금 구분해야 합니다. 사도들은 2천 년 전의 세계관, 그 한계 안에서 뭔가 절대적인 것을 경험했던 겁니다. 우리가 그들이 놓여 있었던 시대적인 상황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2천 년 전에 그들은 성령을 받아서 방언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우리도 모두 방언을 해야 성령을 받은 거라고 말한다면 곤란한 거죠. 중요한 것은 그들이 영에 대한 체험을 했다는 겁니다. 따라서 오늘의 우리는 방언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성령을 경험하면 되는 거예요. 그 정도만 하겠습니다.

제가 부활의 확실성을 강조하려다 보니까 이쪽으로 치우치는 것 같아요. 우리는 사도들의 예수님 경험이 진리라는 것을 전제하고 시작하는 겁니다. 이게 전제 되지 않으면, 우리는 다른 길을 찾아가야 해요. 지금은 이 땅에 예수님이 없어요. 예수님을 직접 경험했던 사도들도 없고요. 다만 그들이 전한 문서, 성서만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부활은 실제 보이지 않는 세계입니다.

 

부활 변증에 대해

이런 질문이 들어왔군요. “부활의 확실성에 대한 근거를 사도들의 경험에만 둔다면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변증해야 하나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부활 변증이 불가능합니다. 이것은 설명할 방법이 없어요. 우리가 생명의 궁극적 미래에 대해서 알 수 있을까요? 그걸 어떻게 증명할 수 있겠어요? 과학적으로 가능할까요? 유비(analogy)는 가능하겠죠. 그러나 예수의 부활은 세상이 끝날 때 우리가 참여하게 될 궁극적인 생명인데, 무슨 수로 사람들에게 변증할 수 있겠습니까? 궁극적인이라는 말이 너무 진부하죠? 그러나 적당한 다른 단어가 없네요. 아퀴나스가 신 존재증명을 열 가지로 했나요? 아리스토텔레스 방식에 의해서 신의 존재를 증명하긴 했는데, 그건 하나의 방식으로서 또 다른 모순에 빠지게 됩니다. 하나님도 사실은 증명의 문제가 아니라 해명의 문제예요. 변증은 해야 합니다. 변증이 무의미하다는 게 아니에요. 하지만 그것은 증명할 수 없는 겁니다. 어느 정도까지는 우리가 가능한 대로 보편적인 근거에서 해명하고 변증하지만 어떤 단계에 이르면 선택의 문제가 돼요.

철학을 보통 형이상학, 메타피직(metaphysic)이라고 하는데요. 피직(physic)이라면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를 말하겠죠.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이 창조입니다. 이 세계에서 성령이 활동하고, 특별히 2천 년 전의 예수님에게서 생명과 부활과 하나님의 성육신 같은 사건들이 일어났다고 하는 그 사실에 기독교 신앙의 토대가 있습니다. 그걸 이해하는데 철학적 사유가 필요하지 않겠어요? 존재와 인식,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와 형상, 하이데거의 존재 이해, 화이트헤드의 과정 등에 대한 이해 없이, 우리가 어떻게 보이지 않는 세계의 현실성을 포착할 수 있겠어요? 이것이 관건입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나라, 죽음 이후에 천당에 가는 것 등, 이 모든 것에서 보이지 않는 현실성을 잡아내야 하는 겁니다.

보이지 않지만 확실한 세계라는 게 어떤 것인지 느낌이 오죠. 그래서 신학자들이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already) 왔지만 아직은 오지 않은(not yet) 것으로, 개념적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었어요. 실증적으로가 아니라 개념적으로 설명한 거예요. 보이지 않는 확실성에 대해 제가 조금 더 설명을 해야겠는데요. 우리가 왜 보이지 않는 현실성 쪽으로 우리의 생각의 폭을 넓혀야 하는지,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 두 가지로 생각해 봤습니다.

하나는 현재 우리는 우리의 오감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에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에 던져져 있어요. 주어진 존재들입니다. 이 안에 던져져 있는 존재에요. 따라서 그걸 넘어서는 다른 세계에 대해서는 우리가 확인할 수 없습니다. 개미들이 우리 인간의 삶을 확인할 수 있을까요? 차원이 다르잖아요. 그러나 그렇게 감각적으로 확인할 수 없다고 해서 없는 것은 아니잖아요. 없다고 단정할 수 없잖아요. 보통 물리에서도 4차원 6차원 7차원을 이야기하니까요. 낮은 차원에서는 높은 차원을 전혀 실증적으로 확인할 수 없습니다.

다른 하나는 시간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있다 없다, 확실하다 아니다, 보인다 안 보인다고 하는 말들은 시간 안에 있는 거예요. 현재는 아직 현실이 아닌 어떤 것이 시간이 지나면 나타날 수 있어요. 컴퓨터로 말하자면 5백 년 전에는 컴퓨터를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때는 없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컴퓨터가 있죠. 없던 게 있어요. 이제는 현실이 된 거예요. 5백 년 전에는 현실이 아니었습니다. 보이지 않았어요. 미래의 있어야 할 어떤 거였어요. 그렇다면 5백 년 전에는 없었지만 지금은 있는 그것이, 5백 년 전에는 현실(reality)이 아니었을까요? 5백 년 전에도 여전히 현실이죠.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그 5백 년 전과 지금의 컴퓨터가 연관된다고 할 수 있을까요? 지금의 컴퓨터는 뭔가가 발전해 온 거 아닌가요? 5백 년 전에는 다만 실체로서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지 현실성은 현실성입니다. 나중에는 드러났으니까요. 그와 마찬가지로 궁극적인 부활 생명도 아직은 우리가 손으로 잡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확실하다는 것을 우리는 성서를 통해서 약속을 받았고 그렇게 믿고 있고 희망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5백 년 전에 과학자가 컴퓨터가 현실성이라고 말했다면 미친 사람이란 소리를 들었을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은 5백 년 전이나 5백 년 후나 다 존재하는 분이잖아요? 이미 미래까지 가 있는 분이잖아요? 그렇다면 하나님은 2천 년 전에 특별한 방식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생명 사건을 끌어다가 나타낼 수 있지 않겠어요? 이게 너무 논리적인 설명인가요? 말장난 같이 들리나요? 그 미래는 5백 년 후가 아니라 수억 년 후 일수도 있습니다.

그 미래에 모든 것이 완성됩니다. 이게 종말이죠. 그때 예수의 부활이 실체로 드러나게 됩니다. 컴퓨터가 5백 년 후에 실체로 드러났듯이 말이에요. 그런 점에서 종말론은 기독교 신앙의 토대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종말론을 말하면서, 휴거나 새 하늘과 새 땅 등, 우리의 현실과는 상관없는 것처럼 막연하게 이야기하죠. 우리의 현실과 종말론이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는 우리의 신학적 준비가 미비해서 해명하지 못할 뿐이지, 종말론은 오늘의 삶까지 지배하고 있는 절대적인 힘입니다. 하나님의 통치 방법이에요. 컴퓨터가 어떤 방식으로 5백 년 전에도 이미 현실성이었는지, 지금은 알 수 있지만 그 때는 몰랐듯이 말이에요. 이러한 종말에 오늘 우리 삶의 모든 의미와 근거와 희망을 두고 사는 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그것이 2천 년 전의 예수 그리스도 사건과 어떻게 연관이 되는지를 해명해 나가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고 설교이고 신학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독교 신앙을 희망의 신학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 생명의 완성을 믿는 거죠. 5백 년 전에도 컴퓨터를 믿을 수 있던 사람, 그것을 현실로 느꼈던 사람들이 있었을 수 있습니다. 예언자 같은 사람들이죠. 기독교인들은 우주적인 세계관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여기서 살고 있지만, 몇 억 년 후일지는 몰라도 그때 세계가 완성된다는 희망에 부풀어서 사는 거예요. 그때가 되면 꽃이 피듯이 확연하게 생명이 발현한다는 희망을 갖고 말이죠. 구체적인 것은 저도 모르겠습니다. 너무 차원이 다르니까요. 5백 년 전의 컴퓨터를 상상해 보세요. 그때 컴퓨터를 상상할 수 있었을까요? 종말은 그것보다 더한 거예요. 질적인 변화, 극단의 변화니까요.

오늘 설교를 하면서 인용하지 못한 본문이 있습니다. 병행 본문인데요. 베드로전서 1장 8절과 9절이에요.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너희가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이런 말씀도 정말 우주론적이거든요. 보지 못해요. 은폐되어 있죠. 숨어 있어요. 그러나 그걸 믿어요. 이게 광신은 아니잖아요. 이해하겠죠? 보이지 않지만 그것을 현실로 믿는 ‘보이지 않는 현실성’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기독교 영성입니다. 그것으로 우리의 영혼이 구원을 받는다는 거예요. 잘 생각해 보세요.

참고적으로, 영혼의 구원이 뭔가요? 놀라운 이야기 아닙니까? 영혼이 뭐예요? 이런 것들을 인문학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신학이기도 하고 다비아가 추구하고 있는 인문학적 성서 읽기입니다. 특별한 것은 아니고요. 일상적인 걸로 이해하라는 겁니다. 영혼에 대해 사람들은 막연하게 생각합니다. 인간의 구성요소인데요. 어느 한 부분이 아니라 인간 전체를 구성하는 요소예요. 인간 생명의 가장 깊은 차원을 우리는 영혼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우리의 영혼이 구원을 받는다고 할 때 이 구원은 종말론적인 구원을 말하는 거예요. 그 때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날까요? 여러분, 그 세계를 향한 진정한 희망을 열어 가십시오.

 

부자와 나사로 비유

질문이 하나 올라왔습니다. 직접 인용하겠습니다. “예수님이 말한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는 천국과 지옥에 대한 비유인가요? 이 비유는 신인동성동형론과 관계가 있나요?” 신인동형론과는 관계가 없고요. 천국과 지옥에 대한 비유도 아닙니다. 구체적으로 몇 장 몇 절이죠? 누가복음 16장이네요. 오늘 다른 질문이 없으면 이것과 함께 제가 오늘 설교한 ‘보이지 않는 현실성’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보충해서 설명해 볼까 합니다. 질문이 들어왔으니까, 성서를 잠깐 보겠어요. 사실 성서의 한 부분을 해석한다는 것은 독립된 단락도 나름대로 중요하지만, 이 부분이 누가복음 전체의 맥락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늘 전체를 본다는 게 힘들기는 하지만, 그 안에 어떤 흐름이 있거든요. 부자와 거지에 대한 이야기가 어느 맥락에서 거론된 것인지 이해하는 게 필요합니다. 16장에 보면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가 나오고, 그 다음에 부자와 거지 나사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이 이야기는 천국과 지옥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천국과 지옥은 고대인들의 어떤 세계 이해인데요. 저는 지금 그게 있는지 없는지를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성서에 나와 있는 그런 개념들은 딱 결정되어 진술되고 있는 게 아니라 해석되어 가는 과정에 있던 겁니다. 다시 말해 그런 개념들은 어느 시점에 딱 결정되어서 그대로 고수되는 게 아니라, 그 개념이 주변의 영향을 받으면서 더 심화되고 풍부해지는 과정을 겪는다는 거예요. 천국과 지옥만이 아니라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부활에 대해서도 앞에서 이야기했는데요. 부활이 유대교에 뿌리를 두고 있기는 하지만, 주변의 여러 다른 종교들에서도 영향을 받았어요. 그와 동시에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고유한 예수님에 대한 경험이기도 하고요. 그런 것들이 두루두루 섞이면서 부활이 초기 기독교의 신앙으로 자리를 잡게 된 겁니다. 그런데 대개는 이 부자와 거지의 비유를 거론하면서 예수님도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말했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연세중앙교회 윤 아무개 목사는 “거지 나사로는 예수님을 사생결단하고 잘 믿었다. 결사적으로 예수님을 잘 믿었기 때문에 천국에 갔다. 이 땅에서는 비록 구더기처럼 살았지만 아브라함 품에 안겼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거지 나사로 비유에 대해서 미리 준비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충분하게 설명하기는 힘들고, 상식적으로 두 가지만 말하겠습니다.

첫째, 이 비유는 죽음 이후에 우리의 운명에 대한 것은 하나님만이 결정한다는 하나님의 결정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비유뿐 아니라 마태복음에 나와 있는 최후의 심판에 대한 비유도 그렇습니다. 오른편과 왼편에 나온 사람들은 자기들이 생각했던 것과 정반대로 결정됩니다. 하나님의 판단이라는 것은 우리의 어떤 상식을 뛰어넘으니까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우편에 갔다고 나오잖아요? 거지 나사로와 부자도 그렇죠. 어떻게 보면 부자는 아주 고상하게 살았어요. 윤 아무개 목사는 여기서 부자는 예수님을 잘못 믿고 나사로는 결사적으로 믿었다고 하는데요. 상식적인 차원에서 그 당시 일반적인 유대인들의 삶의 모습을 본다면, 아마도 이 부자가 하나님을 훨씬 더 잘 믿었을 겁니다. 욥기에 나온 대로 말이죠. 이 본문은 이 부자가 하나님을 믿었는지 안 믿었는지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아요. 게다가 이 본문은 거기에 관심조차 없습니다. 그냥 좋은 옷을 입고 호화롭게 날마다 즐기더라고 간단하게 말하죠. 다른 묘사는 거의 없어요. 멋있게 살았어요. 사치스럽게 살았다고 하니까, 하나님을 믿지 않았을 거라고 트집을 잡을 수도 있지만, 성서기자는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그 당시의 사람들은 욥기의 욥처럼 복 받고 잘 살면 의인이라고 생각했고, 가난하고 병들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거라고 생각했어요.

성서기자의 설명에 따르면 거지 나사로는 정말 비참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걸 먹었고, 개들이 와서 헌데를 핥았다고 합니다. 그 밖에 부자와 나사로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어요. 우리의 상식으로 본다면 이 부자가 하늘나라에 가서도 나사로보다는 더 복 받은 사람으로 드러나야 하는데 정반대의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 비유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우리의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결정권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다는 거예요. 뒷부분에 가면, 이 부자가 지옥 불에서 힘들어합니다. 그러면서 살아 있는 자기 형제와 자식들에게 이 상황을 말해줘야 한다고 하잖아요? 31절에 보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온 사람이 와서 권한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이 말을 듣지 않는다고 말이죠. 기적이 일어나도 사람들의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이건 조금 더 연구해 봐야 할 문제입니다.

둘째, 이 본문은 이 부자에게 사회적 책임의 부재를 묻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이 부자가 가난한 거지 나사로를 부양해야 할 책임은 없었어요. 그러나 그 시대를 함께 살았던 사람으로서 타인의 가난을 외면하는 것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묻는 비유의 말씀일 수도 있습니다.

이 본문에 대해 제가 그 이상의 것을 말하기는 힘듭니다. 본문의 뒷부분에 나온 내용을 본다면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 무슨 얘기를 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듣지 않는다고 하는데요. 여기에 좀 더 영적인 생각을 가미한다면, 사람은 생각이 변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생각의 틀을 패러다임이라고 하는데, 이런 패러다임은 한 번 굳어지면 고치기가 힘듭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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