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강 삼위일체 하나님

기독교가 뭐꼬 조회 수 4640 추천 수 0 2012.06.14 10:38:54

제 32강

삼위일체 하나님

 

시간이 빨리 지났습니다. 상투적인 이야기 같은데요.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더 빨라진다고들 말하고, 우리도 그렇게 느끼고 있습니다. 도대체 시간이 뭘까요? 그걸 완벽하게 해명하는 사람이 있다면 당장 노벨 물리학상을 타기에도 손색이 없을 겁니다. 그리고 그 시간이란 게 어디까지 진행될 것인가도 그렇고, 왜 이 세상이 시간과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도 정말 신기합니다. 이런 것들이 다 하나님의 문제와도 연관되어 있어요. 하나님이 왜 이 세상을 이 모양으로 만들었을까 하는 궁금증이죠. 우리는 대개 세상이 원래 그렇게 있는 것으로 전제하고 거기에 익숙해져 있어서, 우리가 먹고 말을 하고, 이 세상에 색깔이 있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는데, 사실은 이게 당연한 게 아니잖아요? 예를 들어 색맹이어서 색깔을 잘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이 전혀 다르게 보이겠죠. 청각 장애인들은 소리를 경험하지 못하니까 또 다른 세상이겠고요. 어쨌든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는 부분적이고, 우리는 이 세상을 전부 포착하지 못하고 삽니다. 우리가 청각 장애인은 아니지만 어떤 면에서 우리는 청각 장애인일 수도 있어요. 우리가 모르는 어떤 부분에 대해 인식의 한계를 안고 살아가니까요. 그걸 모르면 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겁니다. 태어날 때부터 청각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소리가 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인데요. 얼마나 신비로운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 경험에 대해

그 하나님을 우리는 어떻게 경험할 수 있을까요? 이런 질문은 지난주에 시작해서 오늘 마치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는 망설여지기도 합니다. 제가 어떻게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제가 읽은 신학 책들의 내용도 있고 또 나름대로 작은 경험도 있어서 뭔가를 말할 수도 있고 또 말을 하기도 했고 또 앞으로도 말을 하겠지만, 이런 것은 너무나 부분적이어서 하나님에 대해 어림짐작조차 할 수 없을 정도거든요. 언젠가 제가 예를 들었듯이 코끼리 털 하나를 가지고 코끼리 전체를 봐야 하는 상황인데, 어떻게 하나님에 대해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겠어요? 그래도 우리는 말해야 하니까 말을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어디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경험하나요?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곁에 있다고 늘 신앙적으로 배워왔어요. 우리는 이런 익숙한 신앙 속에서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주제의 뒷부분에 가면 삼위일체가 나오는데요. 우리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잖아요? 성령도 하나님이라고 하고요. 이 세 하나님을 우리가 어떻게 경험하는 겁니까? 이게 가능한가요? 여러분은 기도할 때 보통 어떤 하나님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나요? 아마 천차만별일 겁니다. 여러분은 그저 복음서에 나온 바로 그 예수님만을 생각하며 기도할 수도 있을 것이고, 아니면 구약에 나와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진술을 통해 그런 하나님만을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어쩌면 아이 성과 여리고 성을 함락시키고 가나안 땅을 정복하게 한 하나님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도 아니면 노아의 홍수와 같은 심판의 하나님인가요? 또는 뜨거운 성령 체험을 가능하게 하는 성령의 하나님을 생각하나요? 이런 경험들은 많이 있을 겁니다. 찬송을 열심히 부르기도 하고요.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따뜻해지기도 합니다. 어떤 집회에 가서 예수님에 대해 잘 듣고 배워서 내가 죄인이며 예수님이 진정한 구원자라는 사실을 고백하기도 하죠. 그렇게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함으로써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는 경험도 할 겁니다. 그것으로 하나님을 다 경험한 걸까요?

고대 유대인들의 하나님 이해는 사실 그 시대의 세계관 안에서 이루어진 겁니다. 그 당시의 고대인들은 하늘, 땅, 지하라는 삼층 구조로 우주를 생각했거든요. 하늘에는 뭔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을 경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세계를 주술적으로 생각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중국에 대지진이 일어났습니다. 끊임없이 지구에 재앙이 일어나고 있어요. 지금처럼 자연과학이 발달한 상태에서도 이런 것들 앞에서는 두렵지 않습니까? 그런 현상들에 대해서 고대인들이 어떻게 생각했을지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지진이나 화산 폭발도 경험했겠죠. 해일도 경험하고요. 그런 자연 앞에서 그들은 얼마나 두려웠을까요? 창세기에 보면 그들은 그것을 하나님의 징벌로 받아들였다고 하는데, 아주 당연한 일입니다. 노아 홍수도 그런 게 아니었을까요? 우리는 노아 홍수 같은 것을 무조건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죠. 그건 그 사건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좀 다르긴 합니다만, 고대인들과 우리는 세상을 전혀 다르게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이해도 좀 다르다고 할 수 있어요.

신약 공동체도 유대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어요. 다만 예수님에 대한 독특한 경험이 있었을 뿐이고, 그 경험으로 인해 유대인들의 민족주의적인 하나님 이해, 일종의 시오니즘에서 벗어났다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똑같았어요. 2천 년 전이나 3천 년 전이나 고대인들은 이 세계를 그렇게 알고 이해했기 때문이죠. 그러한 하나님 이해를 가리켜 실체론적 이해라고 앞 시간에 이야기했는데요. 하나님도 실체로서 우주 공간 어딘가에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죠. 이런 생각은 오늘날엔 아무 설득력이 없습니다. 우주 공간 어딘가에 하나님이 옥황상제처럼 자리를 잡고 있고, 이 지구에 있는 사람들을 체스 하듯이 하나하나 놓아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지금 없잖아요? 1992년에 다미선교회의 파문이 있었을 때 그들은 북극성 어딘가에 휴거처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휴거라는 표상이 요한계시록에 있는데요. 초기 기독교인들은 그런 방식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들의 세계 이해가 그랬으니까요. 어떤 궁극적 생명의 세계에 휴거의 방식으로 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제대로 정신이 박힌 사람이라면 그런 방식으로 세계를 이해할까요? 그렇다고 해서 이 휴거라는 신약성서의 신앙적 표상이 무의미하다는 건 아니에요. 다만 그 시대의 신화적인 방식으로 이야기했다는 거예요

오늘 우리는 그러한 방식으로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계속해서 발전해왔는데요. 이 발전은 뭘 말하는 걸까요? 하나님이 변한다고는 할 수 없잖아요. 어떻게 하나님이 변한다고 말할 수 있겠어요? 다만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이해가 변하는 거라고 할 수 있겠죠. 여기 두 지점이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여기를 창조라고 하고, 저기를 종말이라고 생각해보죠. 창조와 종말이 있고, 그리고 종말 이후에 어디로 가겠죠. 어디까지 갈까요? 영원히 갈까요? 창조 이전은 아무 것도 없는 무(無)의 세계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창조와 종말 사이의 어느 한 점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 종말, 종말 이후, 이 전체를 통해서 자기를 계시합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종말에 가서야 그분의 실체가 드러나요. 이런 한계를 생각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온전히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변화하는 게 아니라 역사와 더불어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인식이 심화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에 대한 인식의 변화들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한국교회에는 많이 있어요. 그래서 오늘의 시대와 충돌하게 되는 겁니다. 동설 이후를 살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천동설에 근거한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겁니다. 패러다임이 완전히 달라졌는데도 많은 신자들이 천동설에 근거한 하나님으로만 받아들이는 거예요. 물론 이 천동설이 무조건 잘못된 건 아닙니다. 부분적으로 보면 지동설이 맞기는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이 우주 전체도 움직이니까 천동설이 완전히 이상한 것은 아니죠. 다만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던 그것은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어요. 잘못되었다고 하기보다도 그 정도로만 이해했던 거죠. 그러니까 이 우주가 어떻게 되었느냐 하는 것은 천동설이나 지동설로 딱 결정되는 게 아닙니다. 앞으로 우주 물리에 대한 다른 패러다임이 나올지 몰라요. 그렇게 되면 전혀 새로운 차원으로 가는 겁니다. 그런 차원에서 좀 전에 우리에게 청각 장애, 시각 장애가 가능하다고 말한 거고요. 이것과 연관해서 한 마디 더 하면요. 과학이 아무리 정밀하고 엄밀하고 실증적인 학문이라고 하더라도 모든 걸 해명하지 못합니다. 결정적으로 미래는 아직 아무도 모르는 거죠. 이건 가봐야 아는 겁니다. 뉴턴이라는 물리학자가 그렇게 위대했지만 양자역학을 몰랐잖아요. 정말 그게 있다는 걸 상상도 못했습니다. 뉴턴의 물리학과 양자역학은 전혀 맞지 않거든요. 제가 물리학적 용어로 정확하게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맞지 않는다기보다 대립되는 부분들이 많이 있어요. 전혀 다른 차원이죠. 마찬가지로 지동설도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그래도 지금까지 밝혀진 물리생물학적인 토대를 우리가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 방식으로 우리가 세계를 이해해야 하니까요.

오늘의 많은 기독교인들이 여전히 천동설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기복적인 신앙이 다 그런 거죠. 생각해보세요. 하나님이 자기가 보기에 예쁜 사람에게만 복을 더 줄까요? 이미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똑같이 비를 내려주고 햇빛을 준다고 말했는데, 우리는 여전히 편애하는 하나님 쪽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게 완전히 틀린 건 아닌데요. 좀 다른 차원에서 이야기를 해야겠죠. 우리가 사탕을 덜 먹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거든요. 그런 관점이라면 하나님이 우리를 편애한다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특별히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속적인 가치로 사업을 했는데 잘 된다든지, 죽은 사람이 살아난다든지 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이해한다면, 이것은 천동설적인 하나님 이해입니다.

 

비종교적 해석

이런 문제를 극복하려고 애썼던 가장 대표적인 신학자가 본회퍼(Dietrich Bonhoeffer)입니다. 1906에 태어나 1945년에 죽었으니까, 39년을 살았네요. 나이로 따지자면 1886년에 태어난 칼 바르트보다 훨씬 후대에 태어났군요. 아마 본회퍼도 칼 바르트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텐데, 히틀러를 암살하려다가 체포되어서 교수형을 당했다는 사실만 보면 두 사람의 신학적 토대가 크게 달라 보입니다. 본회퍼는 좀 재미있는 학자입니다. 굉장히 영성이 깊고요. 대단히 자유주의적이고 진보적인 신학자였어요. 이 분의 신학이 상당히 진보적인데, 한국에서는 재미있게도 복음주의 쪽에서 본회퍼를 많이 받아들입니다. 본회퍼의 영성 때문인 것 같은데, 사실은 착각하고 있는 거죠. 본회퍼의 영성이 복음주의 쪽에서 생각하는 그런 수준이 아니거든요. 본회퍼의 신학을 이해할 때 중요한 키워드를 몇 가지 말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는 성숙한 시대이고, 다른 하나는 비종교화입니다. 두 개념이 서로 연결됩니다. 성숙한 시대라는 말은 모더니즘, 즉 계몽의 시대를 지났다는 뜻이에요. 본회퍼에 따르면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에요. 그가 말하는 종교는 성숙한 게 아니라 유아적인 신앙을 가진 종교성이에요. 예를 들면 죽음이나 외로움이나 허무 같은 것이 두려워서 신을 찾거나 자기에게 다가올 불행을 막기 위해 신을 찾는 것이죠. 샤머니즘도 포함되고요. 오늘 한국 기독교인도 거의 이런 종교성에 머물러 있을 겁니다. 기독교는 이러한 종교적인 차원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된다는 거에요.

그런 유아적인 상태의 종교성에서는 하나님이 두 가지의 상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폭군 상이에요. 사람들이 하나님을 무서워하는 겁니다. 말을 잘 들으면 복을 주고 잘 듣지 않으면 벌을 주는 폭군으로서의 하나님인 거죠. 어느 책에서 본 것 같은데, 꾸민 이야기인지 실제 있었던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어요. 한 수녀가 주일학교에서 어린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주일학교에 다니는 어린이 하나가 어느 날 성당에 나오지 않고 부모와 함께 마차를 타고 놀러갔다가 마차가 전복되어서 죽었습니다. 다음 주일에 그 수녀는 아이들에게, 봐라 그 아이가 주일에 성당에 나오지 않고 놀러갔다가 죽었다고, 하나님의 벌을 받은 거라고 가르쳤어요. <신의 아그네스>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중세 때는 하나님의 진노, 죄책감 등을 강조했습니다. 죄책감에 대해서는 다른 데서도 몇 번 말했지만, 한국교회에서 죄책감은 정말 심각한 문제입니다. 더 이상 현대인들은 죄책감에 사로잡히지 않아요. 죄의식이 별로 없습니다. 그게 좋다는 게 아니라 현실이라는 말이에요.

한국교회에서는 신자들을 가능한 한 죄의식에 빠지게 하는 목회가 성행하고 있습니다. 노골적으로 강조하기도 하고, 아니면 은근하게 언급하기도 해요. 간단한 예를 들면, 십일조를 떼어 먹으니까 그 정도 액수의 사고가 나든지, 병원에 가든지 해서 다 나가더라고 많이 설교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어떻게 복음이 전파될 수 있는지, 기가 막힌 상황입니다. 기독교 영성은 죄책감이 아니에요. 죄에 대한 책임감은 당연히 있어야겠죠. 그러나 심리적인 죄의식에 사로잡혀서는 안 됩니다.

다른 하나는 자동응답기로서의 하나님이에요. 이것이 폭군으로서의 상과 다른 것 같지만 내면적으로는 비슷해요. 구하기만 하면 다 주는 것과 같은 이런 하나님 상은 신자들을 다 어린아이로 만듭니다. 자동응답기에다 기도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그런 방식은 성숙한 시대에는 맞지 않은, 정말 원초적인 종교성이죠. 본회퍼는 기독교는 그게 아니라고 말하는 겁니다. 기독교는 그런 종교성이 아니라 이 삶의 한 가운데 서 있는 신앙이라고 말합니다. 삶의 중심에서의 초월이라고 말해야겠군요. 본회퍼의 『옥중서간』은 유명한 책인데요. 본회퍼가 죽은 뒤에 그의 친구 베트게(Bethge)가 썼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감옥 속에서 죽음을 예감하고 하는 말인데, 본회퍼 신학의 진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젊은 신학자이고, 영성가이고, 목회자였던 본회퍼가 감옥 속에서 유언처럼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한계에 처해서가 아니라 중심에 있어서, 약함에 있어서가 아니라 힘에 있어서, 따라서 죽음과 죄책을 계기로 해서가 아니라 생과 인간의 선에 있어서 신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 인식론적 초월성은 신의 초월성과는 무관하다. 신은 우리의 생활 한 가운데서 피안적이다. 교회는 인간의 능력이 미치지 않는 곳, 한계에서가 아니라 마음의 한 가운데 있다.

 

잘 들어 보세요. 다음에 나오는 이야기는 굉장히 중요한 말입니다. 너무 충격 받지는 말고요.

 

만일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우리는 이 세상 속에서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않으면 성실할 수가 없다. 신은 우리가 신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우리와 함께 하는 신은 우리를 버리는 신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면서 신의 유기를 경험한 것이 생각나는군요. 조금 더 인용합니다.

 

신이라는 작업가설 없이 우리를 이 세상 속에 살게 하는 신은 우리가 항상 그 앞에 서 있는 신이다. 신 앞에서 신과 함께, 우리들은 신 없이 산다.

 

마지막 구절이 잘 알려져 있습니다. ‘신 앞에서 신과 함께, 우리들은 신 없이 산다.’ 본회퍼가 말하려는 핵심은, 지금까지 초월성만 강조하고 폭군이자 자동응답기의 하나님으로만 가르쳤던 기독교의 가르침과는 달리 이 세상성에 대한 강조입니다. 독일어로는 ‘벨틀리히카이트’(Weltlichkeit)라고 하는데요. 하나님이 창조한 이 세상에, 교육이나 사랑과 같은 삶의 중심에 피안이 변증법적으로 같이 담겨 있는 겁니다. 그 전에는 무조건 이원론적으로 생각해서 초월적인 저 세상만을 수호했는데, 그것은 성숙하지 않는 시대에 해당한다는 거예요. 모더니즘 이후로, 지동설 이후로 성숙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폭군 같고 자동응답기 같은 신이 아니라 오히려 신 없이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고 본회퍼는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가 하는 이야기가 다 옳다는 건 아닙니다.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이해가 시대와 함께 더욱 새로워졌고 심화되었다는 것이죠. 우리가 그런 걸 배워야 하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본회퍼에게서는 우리의 죄나 한계를 보충하기 위해 절대자를 요구하는 일반적인 종교성이 아니라, 건강한 삶 안에서의 하나님 이해를 배울 수 있습니다.

현대 신학은 이런 것들을 근본에 두고 그 뒤로 해방신학, 여성신학, 생태신학, 정치신학, 과학신학 등으로 계속해서 자신의 자리를 넓혀가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에 대한 상이 고정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겁니다. 하나님이 불변하는 존재이기는 한데, 우리가 가진 인식의 한계 때문에 부분적으로 알다가 좀 더 알게 되면서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변화하는 거죠. 여성신학에서 문제제기를 하듯이, 가부장적 시대에서는 하나님이 곧 아버지처럼 인식된 게 당연한 것 아니겠어요? 그러나 지금은 성적인 차원을 뛰어넘어 하나님을 이해하잖아요. 그렇게 시대와 더불어 세계를 이해하는 지평에 따라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인식도 달라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게 어디까지 갈까요? 우리가 세상을 얼마나 더 알게 될까요? 어느 때가 되어야 이 세계가 온전히 우리에게 실체를 드러낼까요? 그게 정말 궁금합니다. 우리가 지금 완전하게 그걸 알 도리는 없죠. 우리는 잠깐 살다가 갈 뿐 아니라, 지금까지 인류 역사가 풀어낸 것도 다 알지 못하는데, 앞으로 펼쳐질 더 궁극적인 실체에 대해서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바로 그 궁극적인 세계와 연관되어 있으니까, 하나님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조금 어지럽죠. 현묘하다고 할까요? 신비롭기도 하고요. 그런 점에서 볼 때 하나님은 온전하게 내 삶과 운명과 죽음까지도 맡기고 의존해야 할 절대적인 대상임을 더 깊이 알게 됩니다.

 

삼위일체론적 하나님 인식

비종교적 해석은 하나님을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 인식의 심층으로 들어가는 관점이에요. 그것을 바탕에 놓고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가장 본질적인 인식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그것은 삼위일체입니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에 대해서는 많이 들었을 거예요. 우리가 정말 어려운 부분으로 들어왔군요. 삼위라, 삼위가 뭐예요? 아버지로서의 하나님, 그 다음에 아들로서의 하나님, 여성들은 화내지 마세요. 딸로서의 하나님은 없습니다. 그 다음에 영으로서의 하나님이고, 이게 하나라는 건데요. 아버지, 아들, 영, 이 셋이 일체라는 겁니다. 이게 말이 되나요? 생각해보세요. 우리는 이 삼위일체론을 존재론적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세 개가 따로 있는데 하나라는 건 세상에 없어요. 어떻게 그게 가능하겠어요? 이것은 인식론적인 차원입니다. 하나님이 아버지, 아들, 영으로서 삼위일체로 존재한다고 인식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셋으로 딱딱 나뉘어 존재한다는 데 초점이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신비를 알 수 없기 때문에 그런 방식으로 인식한다는 데 초점이 있는 겁니다.

여기서 아버지는 무소불위하고 전지전능한 분으로, 주로 구약에서 말하는 유일하고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페르소나예요. 좀 어려운 신학 용어가 나와도 이해해 주세요. 페르소나(persona)는 위격이라는 뜻입니다. 아들은 역사적 예수님이죠. 아버지가 초월적이라면 아들은 역사적입니다. 아버지는 역사를 초월해 있지만 아들은 역사적이고 역사 의존적이에요. 그래서 한계를 가지고 있어요. 우리와 똑같이 죽었죠. 일단, 이 두 관계는 대립적입니다. 예수님도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어요. 만약에 이것을 존재론적으로 하나라고 생각한다면 자기가 자기에게 기도한 게 돼요. 그럼 말이 안 되죠. 예수님이 공생애 때 하나님께 기도를 했다는 것은 하나님을 대상으로 생각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구별이 되는 거예요. 구별이 중요합니다. 영은 보통 우리가 말하는 성령인데요. 성령은 현재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의 현재성이라고 할까요? 이 하나님은 초월적이기 때문에 지금 우리와 함께 하는 분은 아니고요. 예수님도 2천 년 전에 역사 안에 들어왔다가 떠났기 때문에 지금은 없어요. 그래서 지금 우리는 성령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경험하는 겁니다. 그런데 기독교 신학에서는 이 셋이 일체라는 거예요.

이게 어떻게 일체가 될까요? 그냥 간단히 한 마디만 한다면 이렇습니다. 본질은 하나고 격은 셋이라는 거예요. 이런 존재를 우리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생각해 보세요. 유대교는 유일신론입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삼위일체론으로 넘어오면서 유대교와 구별이 돼요. 앞서 제가 말한 아버지 하나님은 유대교의 하나님이고 마호메트가 말하는 알라 하나님입니다. 만약 기독교가 유일신론에 머물러 있었다고 하면, 유대교나 이슬람교와 구별되지 않았을 겁니다.

기독교로 구별되는 결정적인 요소가 바로 이 삼위일체론입니다. 삼위일체로 넘어오는 길목에 기독론 논쟁이 자리하고 있어요. 삼위일체론이 처음부터 시작된 게 아니에요. 삼위일체론이 나오게 된 핵심은 예수였어요. 예수가 누구냐 하는 것에서 시작된 겁니다. 이게 초기 기독교가 당면한 딜레마였어요. 그들이 풀어야 할 숙제였어요. 다음의 두 가지 대립 명제를 극복하는 걸 가리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유일신이라는 것, 다른 하나는 예수도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의 경험에서는 이 두 명제가 아주 분명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유일신이라는 것은 유대교로부터 나왔고, 예수도 하나님이라는 것은 기독교 공동체 신앙의 고유한 경험이었습니다. 둘 다 자명하지만 이게 서로 대립되는 거잖아요? 하나님은 한 분인데 어떻게 예수님도 하나님이라는 말이 성립됩니까? 이 숙제를 풀어야 했던 겁니다. 하나님의 단일성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도 예수의 신성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 기독론 논쟁이었어요. 기독론 논쟁의 핵심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고, 예수도 하나님이라는 걸 해명하는 거 말입니다. 이걸 극복하기 위해서 서로 다른 여러 주장들이 나왔는데, 이 때 많은 이단들이 출현했어요. 정통에서 빠진 건 다 이단이니까요.

대표적인 게 예수의 인성을 강조한 에비온주의(Ebionism)였어요. 이 사람들은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관계를 종속론으로 생각했습니다. 예수가 하나님께 종속되어 있다는 거죠. 인성을 강조하면 당연히 예수가 한계를 가진 존재가 되니까 하나님께 종속을 당하게 됩니다. 또는 그와 다르게 예수님의 신성만을 강조한 사람들도 있었어요.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하면 인성이 약화되니까 당연히 가현설로 나가게 됩니다. 이 가현설에 근거해서 양태론이 등장하는데요. 정통 교회는 이들과 싸웠습니다. 치열한 신학논쟁이었습니다.

에비온파는 하나님을 완전한 인격체로 생각한 반면, 아들과 성령은 하나님의 속성을 취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예수는 본질적으로 하나님과는 다른 인간으로서, 신성을 입은 인간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죠. 이것을 동성론이라고 합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아리우스예요. 니케아 공회의가 열렸을 때 아리우스와 아타나시우스가 크게 싸웠습니다. 그게 기독교의 분수령이라고 할 수 있어요. 아리우스는 예수를 성자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정통주의와는 달리 예수가 결국 피조물로서 신적 존재일 뿐 하나님 자체는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와는 정반대로 가현설은 인간 예수를 부정하고 예수를 단순히 하나님의 현시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참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고 유일한 하나님이 자기를 드러내는 세 가지 양태의 하나로 보았던 거죠. 이것을 양태론이라고 했습니다. 215년경 로마에서 가르쳤던 사벨리우스는 이렇게 말했어요. “하나님은 단일한 실체(monas)이다. 하나님의 존재 안에는 구별이 없으며, 단일체인 하나님은 세 가지의 상이한 양태, 혹은 형태로 자기를 나타낸다. 흡사 연극배우가 관중 앞에서 세 가지 역할을 할 수는 있지만 그 인격은 하나인 것과 같다.” 지금 많은 신자들이 삼위일체론을 이 양태론적으로 생각할 겁니다. 이러한 주장은 정통 교회의 입장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엄밀히 보면 문제가 있어요. 즉 예수의 인격, 인격은 정확한 표현이 아니고요. 예수의 위격(페르소나)이 하나님으로부터 구별되면서 서로 의존적이라는 사실을 놓치는 겁니다. 이것은 중요한 문제인데요. 제가 하는 이야기가 너무 관념적인 것 같죠? 그런데 이런 투쟁을 교부 시대 때 아주 치열하게 했습니다. 그 결과가 기독교 2천 년 역사입니다. 이 세 격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구별을 부정하는 입장은 고대 교회 역사에서 축출되었습니다. 구별되면서 서로 간에 의존적인 거예요. 하나님은 하나님만으로서 온전한 하나님이 아니라 아들에 의해서 자신의 하나님 되심이 드러나는 겁니다. 예수에게 의존하는 거죠. 예수는 동시에 하나님에게 의존합니다. 역사적 예수만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한다면 삼위일체인 신론에서 벗어나는 거예요. 성령도 마찬가지고요. 성령도 예수님과 하나님께 의존적이면서 구별되거든요. 여러분이 이것을 머릿속에 넣어두면 좋겠어요. 우리는 자꾸만 하나님을 유일신이라고 하는데 유일신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삼신론도 아니에요. 삼신론은 양태론입니다. 구별되지 않으니까요. 삼위일체는 세 페르소나가 구별되면서 서로 의존적인, 그러나 세 개의 독립된 신은 아닌 하나님입니다. 그와 달리 단일한 실체(monas)를 강조하려는 이단 사상 앞에서 초기 기독교는 예수에 관한 두 가지 문제를 풀어야 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으로부터 구별된 예수님의 고유한 인격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과 동일한 예수님의 본질이었습니다. 위격은 구별되나 본질은 동일해요. 이러한 예수님에 대한 이해가 삼위일체론 안에서 시도됩니다. 삼위일체의 기초를 놓은 터툴리안은 말합니다. “아들은 아버지와 구분되어 있으나 나눠지지 않고, 구별되어 있으나 분리되어 있지 않다. 하나님은 단순히 유일신이 아니라 ‘하나의 실체-세 인격’이다.” 그러나 터툴리안도 삼위일체론을 결정짓지는 못했습니다. 여기에도 양태론적인 모습이 나타나거든요. 이게 점점 발전하게 됩니다.

325년에 세계 최초의 종교회의가 니케아에서 콘스탄틴 황제에 의해 소집되었고, 381년에는 2차 종교회의가 콘스탄티노플에서 테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해 소집되었습니다. 여기에서 기독론과 삼위일체론이 결정 돼요. 두 번에 걸친 종교회의와 그 중간에 진행된 몇 번의 회합, 포럼이 있었습니다. 325년의 첫 번째 회의에서 대표적으로 이질론(헤테로 우시오스)을 주장한 아리우스와 동질론(호모 우시오스)을 주장한 아타나시우스가 대결했는데, 결국 완전한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일단락이 되었어요. 이질론은 아리우스가 주장한 것으로 본질이 다르다는 것이고, 동질론은 아타나시우스가 주장한 것으로 본질이 하나라는 겁니다. 중간쯤 되는 사람들이 이를 중재하기 위해서 유질론(호모 이우시오스)이 등장하기도 했어요. 본질이 비슷하다는 거죠. 재미있죠? 그 당시에는 이단 논쟁이 아주 격했습니다. 결국 이런 과정을 통해서 아리우스가 배격되고 삼위일체가 확정 돼요. 아타나시우스의 주장이 정통으로 결정된 거죠. 세 입장의 차이는 작은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을 이해하는데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초기 기독교가 오랜 논쟁을 통해서 결국 예수님의 동질론을 선택했다는 것은 하나님 이해에 있어서 혁명적인 전환이었습니다. 예수에게서 인간성을 제거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과 동질로 생각한 하나님 인식은, 유대인들의 사고 범주에서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신성모독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인간으로 끌어내리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죠. 그러나 초기 기독교는 이러한 논쟁 과정을 통해서 인간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던 겁니다.

 

호모우시오스

단도직입적으로 질문해볼까요? 여러분도 생각해 보십시오. 제 설명을 듣고 그냥 그러려니 하고 생각하지 말고 실제로 본인이 그것을 이해하는지를 생각해 보라는 겁니다. 그것이 우리 기독교 신앙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기도를 열심히 하고 신앙생활 잘 하면 되지 않는가,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하고 신앙생활을 해도 됩니다. 그러나 바둑에서도 고수가 되려면 여러 수를 알아야 하잖아요? 동네 바둑을 두면서 취미 생활로 바둑을 할 수도 있어요. 우리도 그렇게 신앙생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깊이 들어간다면 여러분의 영성이 더 풍요로워지겠죠. 정말 여러분이 그것을 이해하고 있는지 질문해 보라는 거예요. 인간 예수를 하나님으로 믿었다는 게 무엇을 의미합니까? 어떻게 인간이 신으로 들어 올림을 받을 수 있을까요? 이것은 양자론이고요. 어떻게 하나님이 인간으로 내려올 수 있나요? 이것은 성육신론입니다. 어떻게 하나의 인격을 가진 예수가 반신반인이 아니면서 온전한 인성과 신성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요? 그게 가능한가, 아닌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런 문제들을 수학 공식처럼 풀어낼 수가 없어요. 우리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초기교회에서 전개해온 삼위일체 논쟁을 통해서 호모우시오스(homoousios)라는, 예수님과 하나님의 본질이 동일하다는 신학적 주장이 채택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거 하나만이라도 외워두세요. ‘호모우시오스’요. 그들은 하나님이 인간 예수가 되었다고 하는, 하나님 인식에서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 만한 단안을 내렸던 겁니다.

초기교회는 어떻게 인간 예수에게서 하나님의 본질인 신성을 인식했을까요?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예수, 바로 거기에 하나님이 임재 한다고 믿었던 건데요. 발상 전환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런 생각은 불가능합니다. 십자가 처형은 부끄러움, 수치, 스캔들, 절대적인 무력감이고, 하나님은 절대자이고 전지전능 무소불위한 분인데, 이 요소가 어떻게 일치할 수 있을까요? 초기 기독교는 그걸 본 거예요. 유대교인들에게는 그게 불가능했고요.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자가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이지, 어떻게 하나님일 수 있는지 용납이 되지 않는 거죠. 그러나 초기 기독교는 그걸 받아들였습니다. 어떻게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질이라고 믿게 되었을까요? 그들은 왜 예수를 주라고 불렀을까요?

사도들과 초대교회가 예수에게서 메시아적 표징을 발견했다는 것이 그에 대한 대답입니다. 복음서 곳곳에서 증언되는 모든 이야기의 결론은 인간 예수에게서, 그의 인격과 행위에서, 궁극적으로는 그의 십자가와 부활에서 하나님의 메시아적 사건이 발생했다는 거예요. 복음서 기자들에게 예수의 도덕적 가르침이나 지혜의 가르침이나 초자연적 행위들은 그 자체로는 별 의미가 없고, 예수와 관련된 모든 진술과 사건은 구원론적으로 해석되어야 할 그의 메시아성 안에서만 타당성을 획득할 수 있었습니다. 이 말의 뜻은 하나님의 존재론이 그의 구원 행위에 있는 것처럼 예수에게서 발생한 구원 사건이 곧 하나님이며 동시에 하나님 나라였다는 거예요. 이제 하나님은 유대인들의 신(神) 표상이었던 영원하고 절대적인 존재로서만이 아니라, 구체적인 역사의 구원행위 안에서 자기를 드러내는 분, 자기를 낮추는 분, 십자가에서 자기를 내주는 분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예수는 온전한 인간이었지만 그에게서 온전한 메시아성이 드러나게 되었던 거예요. 십자가에 처형당하는 것이 오히려 신성이고, 더구나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새로운 생명으로 변화됨으로써(부활) 궁극적 종말에 일어나게 될 생명을 선취한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초기 기독교인들이 알았던 겁니다. 그걸 경험한 거예요. 경험하고 인식하고 구약성서에 근거해서 해석했던 겁니다. 그래서 독특한 기독교 신앙의 내용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역사의 실존, 역사의 한계 안에 들어온 하나님, 그 안에서 하나님과 동질의 격으로 올림 받은 예수, 인간 예수를 하나님으로 믿었던 겁니다. 유대교는 인간 예수를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기독교 공동체를 용납할 수 없었으며, 로마인들도 기독교인들을 무신론자라 여기고 무시했어요. 이 틈바구니에서 그들과 구별된 새로운 종교, 바로 기독교가 시작하게 되었던 거죠.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제가 바르게 설명을 했는지 모르겠네요. 삼위일체는 어거스틴과 교부들이 플라톤 신학의 영향을 받아서 기독교 신앙을 헬라 철학화한 단순한 사변적 교리가 아니라 기독교의 아주 독특한 하나님 이해예요. 학자들이 그저 머리를 굴려서 그럴 듯하게 기독교를 설명하기 위한, 무식한 사람들의 눈속임을 하기 위한 요설이 아닌, 가장 궁극적인 하나님의 현실 안에서 하나님을 진술하기 위한, 기독교의 정직하고 치열한 자기 진술이자 신앙고백입니다. 참 놀라운 거죠. 하나님이 역사 안에 들어왔고, 지금 이 시간에는 영으로 그를 경험합니다. 그리고 그 셋이 서로 의존적으로 세계 역사를 완성시키실 겁니다. 수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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