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강, 강의안내

기독교가 뭐꼬 조회 수 4961 추천 수 0 2011.05.03 13:13:51

제 01강

강의 안내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지난 몇 년 동안 저는 두 가지 작업에 힘을 쏟았습니다. 하나는 설교비평이고, 다른 하나는 설교가 무엇인가에 대한 강연과 글쓰기였습니다. 설교비평은 설교를 직접 끌어다가 비평한 것이고 강연과 글쓰기는 설교 전체에 대한 개론, 예를 들면 한국교회의 강단은 무엇이 문제인가, 성령론적 설교란 무엇인가, 설교와 해석학 등을 다룬 것입니다. 열 몇 편의 글을 강의안으로 묶어 지난 봄 학기에 영남신학대학교에서 강의를 했어요. 앞으로 정리해서 책으로 낼 생각입니다. 말이 나온 김에 책 이야기를 하나 더 할게요. 대한기독교서회에서 설교비평 3권을 작업 중입니다. 전체적으로 교정도 보고 사진도 구하고 있는데요. 판넨베르크의 사진을 구하기가 쉽지 않군요.

제가 설교비평을 한다는 게 외도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제 전공을 설교학이 아니라 조직신학이거든요. 설교학 전공 교수님들에게는 정말 죄송해요. 외과의사가 성형외과 수술을 하는 것과 비슷하니까요. 제 입장에서는 성형외과에서 성형 수술을 하는데, 내 입장에서 마음에 들지 않으니까 그렇게 하지 마라, 자연적인 아름다움을 살려라, 대충 그렇게 주장하는 거죠. 지금 재미있으라고 하는 말이니까 오해하지는 마세요. 어쨌든지 기회가 되면 목사 후보생들인 신대원 학생들에게 이런 강의를 하고 싶긴 합니다. 설교는 신학의 꽃이거든요. 거기에는 조직신학, 윤리신학, 성서신학, 교회사 등이 총체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요. 그런 준비가 없으면 설교가 불가능합니다. 성서주석만으로 설교가 가능하지 않습니다. 창조, 종말, 칭의, 성화, 구원, 교회, 하나님 나라 등 조직신학의 분야와 연결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신대원을 졸업한 목사님들에게 문제는 성서신학과 조직신학을 연결시키지 못한다는 데 있어요. 많은 목사님들이, 그리고 신학생들도 조직신학을 싫어해요. 설교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거죠. 성서를 실제 삶에 적용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엄청난 착각입니다. 성서라는 텍스트와 지금 설교를 듣는 청중 사이의 콘텍스트 사이에 다리를 놓는 작업을 설교라고 할 때 그 중간에 어떤 작업이 필요해요. 그것을 조직신학이 감당해야 합니다.

성서 본문을 예로 들어 설명할게요. 삭개오 이야기는 다들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삭개오는 부자였지만 키가 작아서 열등감이 있었고, 그래서 사람들 틈에 끼지 못하고 용감하게 뽕나무에 올라갔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집에 모시게 되죠. 거기서 그는 남의 것을 사기 친 일이 있으면 네 배를 갚겠다고 했고 자기 재산을 반이나 떼서 가난한 사람을 돕겠다고 했어요. 이 본문을 가지고 우리도 예수님을 믿으면 삭개오처럼 변화가 온다거나, 베풀고 봉사해야 한다고 주로 설교합니다. 그런 식으로 신자들에게 헌금을 강요하는 데까지 나갈 수 있죠. 그러나 이것은 성서 텍스트의 난독, 오독, 왜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의 핵심은, 특히 복음서의 중심인물은 예수님이거든요. 여러 사람이 나오지만 포커스를 맞춰야 할 중심 인물은 예수님이라는 말이죠. 그리고 예수님과 상대하던 사람들 중에서도 삭개오가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이 삭개오의 집에 들어간 것에 대해 불평하고 수군수군하던 바리새인들이 문제였어요. 굳이 예수님과 상대한 사람들을 설교의 주제로 삼고자 한다면, 삭개오가 아니라 바리새인이어야 하죠. 바리새인들의 율법주의, 자기 성취, 자기 집중이 하나님 나라와 얼마나 관계가 먼가 하는 식으로요. 삭개오는 바리새인들의 문제를 부각시키기 위해서 나오는 하나의 장치에 불과합니다. 이 본문에서 핵심은 잃은 자를 구원하러 왔다는 거예요. 삭개오의 변화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예수님을 만난다고 해서 다 재산을 나눠주는 게 아니거든요. 거꾸로 그건 예수님을 만나지 않아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잖아요.

우리는 자주 성서 본문에 대해 오해를 많이 합니다. 특히 한국교회의 적용 중심식 설교나 성경읽기가 포퓰리즘(populism)에 빠져 있다는 게 문제예요. 사람들에게 얼마나 은혜가 되느냐, 사람들을 얼마나 교회로 견인해 내느냐에 모든 목표가 집중돼 있을 때, 성서 텍스트가 많이 오독됩니다. 그래서 요즘 성서 텍스트 톺아보기 쪽으로 작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지금까지는 구체적인 설교자들을 대상으로 설교비평을 하거나, 이론적으로 설교가 무엇인가를 이야기했다면, 이제는 실제 성서 텍스트로 들어가는 일에 대해서 말하고 싶어요. 성서 텍스트마저 오독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한 마당에 기독교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고 있을까요?

 

강의 계획

우리는 ‘기독교가 뭐꼬?’라는 화두로 6개월간 공부를 하려고 합니다. 강의안이 있고 거기에 맞춰 진도를 나가겠지만 강의안에 없는 이야기도 많이 하게 될 겁니다. 강의안은 파워포인트로 띄워놓았어요. 저의 강의를 도와주는 박원관 씨가 2주에 한 번씩 강의안을 메일로 보내드릴 거예요. 강의안을 잘 읽으면 강의를 따라오는데 별 문제가 없을 겁니다. 저도 강의안을 따라가도록 집중해야 하는데, 샛길로 빠질까 걱정이네요. 강의하거나 설교하는 분들은 다들 경험하는 일일 텐데요. 생각들이 숨어 있다가 어떤 계기가 되어 창조적으로 나오는 경험 말입니다. 제가 시인이 아니라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시를 쓰는 것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시를 준비해서 쓰는 게 아닙니다. 처음부터 딱 준비된 상태에서 쓰는 게 아니라 쓰는 순간에 언어가 말을 거는 거죠. 물론 아무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상태라는 건 아니에요. 준비된 상태이긴 한데, 그것만으로는 가능하지 않은 어떤 미묘한 게 있어요. 작곡가의 경우라면 소리가 말을 거는 아주 미묘한 순간이겠죠. 그래도 준비는 충실히 하는 게 좋습니다. 너무 자유롭게 강의하다 보면 정말 중요한 걸 빠뜨릴 수도 있으니까요.

독일대학 같은 경우에는 여러 가지 종류의 강의 형태들이 있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게 ‘포레중’(Vorlesung)이에요. 이 단어는 ‘읽는다’는 레젠(lesen)과 ‘앞에’라는 전치사 포(Vor)가 조합된 말입니다. 독일어는 조합이 잘 돼요. 그래서 철학을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앞에 무슨 단어를 붙이는가에 따라 의미가 확장되거든요. 포레중은 가장 기초적인 강의입니다. 말하자면 개론(introduction)이죠. 우리나라 신학대학교에서는 개론 수업을 강사나 젊은 강사들에게 주로 맡기는데요. 독일에서는 이 포레중 수업을 노교수들이 맡습니다. 경우에 따라 다르지만 제가 경험한 걸로 말한다면 보통 100명에서 150명 정도의 학생이 수업을 듣고요. 그 강의를 그 분야의 최고 권위자가 한다는 겁니다. 우리 같으면 그런 노교수들은 고급세미나나 하려고 할 텐데요. 포레중에서 많은 경우 노교수가 강의안을 놓고 읽습니다. 다 그런 건 아닌데, 대개는 책 읽듯이 읽어요. 강의안을 찬찬히 읽어가는 것도 나름으로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반반씩 하려고 합니다. 진행되는 대로 할게요.

 

머리말 다시 읽기

제 강의안에 머리말이 나오는데요. 사실 이것만 갖고도 한 시간은 설명해야 합니다. 기독교가 뭐냐, 믿는다는 게 뭐냐 하는 것에 대해 질문 좀 하자는 거죠. 너무 아는 것처럼 지나치고 있는 게 아니냐고요. 깨놓고 보면 아무것도 모르면서 스스로 아는 것처럼 속거나 속이고 있을 수 있잖아요. 그런 게 많은 것 같아요. 그런 점에서 좀 더 진솔하게 터놓고 말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뜻으로 이 머리말을 썼어요. 제 강의 전체 제목은 ‘기독교가 뭐꼬’이고, 부제로는 ‘지성인을 위한 인문학적 기독교 읽기’에요. 인문학을 통로로 해서 기독교의 맛을 보자, 기독교 안으로 들어가자는 취지입니다.

제가 자주 쓰는 표현이 있는데, 어디로 ‘들어가자’는 말을 생각해보세요. 어떤 세계가 있어요. 음악이든 미술이든 어떤 세계가 있죠. 세계는 무슨 세계가 있다는 말이야, 하고 이상하게 생각한다면, 그는 예술이나 이 세상을 전혀 모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도 마찬가지예요. 거기에는 많은 세계가 담겨 있습니다. 단어 하나에도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치열하게 고민했던 수많은 담론이 들어가 있어요. 기도원에서 기도하다가 단박에 받아낸 교리는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예수님은 역시 다르구나.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다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아서 말씀하셨을 거야.’라고 생각할 겁니다. 정말 그랬을까요? 이게 복잡한 문제입니다. 예수님도 시대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역사의 아들인 거죠. 유대인의 전통, 역사, 그 당시의 삶을 벗어난 게 아니었어요. 예수님도 그 시대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 세계에 매여 있었습니다. 그걸 벗어났다면 사람이 아니라 귀신이죠.

여기서 예수님이 누구냐 하는 근본적인 질문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정체성은 니케아 공의회 이후에 확립됩니다. 참 인간(베레 호모, vere homo), 참 하나님(베레 데우스, vere Deus)이라는 예수님에 대한 정확한 개념이 생기죠. 인간이지만 하나님인 겁니다. 어느 한 쪽에 더 무게를 두지 않아요.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동일시되었던 참된 인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일반적으로 예수님의 신성에 무게를 많이 두죠. 그러나 초기 기독교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인성을 신성과 똑같은 무게로 주장했어요. 이게 기독교 신이해의 혁명적 전환이었습니다. 나중에 자세하게 언급할 기회가 오겠지만, 이 부분은 아마도 조직신학에서 다뤄야 할 것 같아요. 신학이 어떻게 보면 어렵지만 어떻게 보면 어렵지 않아요. 직면해 있는 세계를 보고 삶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신학이 재미있죠.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아야만 철학 책을 읽는 게 아니잖아요. 하여튼 예수님의 정체는 신비죠. 반신반인이 아니라 온전한 인간인 동시에 온전한 신이니까요. 도대체 이것이 무슨 뜻인가 하는 건데. 처음부터 진도를 너무 나가지 말지요. 이 정도만 할게요.

그래도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가죠. 초대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인성을 한순간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와 다를 게 없는 똑같은 참된 인간이라는 거죠. 우리처럼 먹고 배설하고 우리가 가진 모든 희로애락, 에토스나 파토스 등을 다 가지고 있었어요. 어느 한 가지라도 빠지면 인간이라고 할 수 없으니까요. 그렇다면 그 시대의 아들로서 제한을 가졌다는 말이냐고 물을 수 있겠죠. 오해하지는 마세요. 지금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자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사셨던 그 시대는 신화적인 시대였어요. 그러니 예수님이 세계를 바라보는 형식도 2천 년 전 고대인의 것이었다는 겁니다. 그때는 물리학이 많이 발달하지 않았으니까 태양, 화산, 해일 등에 대해 잘 알지 못했겠죠. 그러니 그들은 얼마나 세계 앞에서 두려웠을까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세요.

제가 아무개 목사님에 대한 설교비평을 할 때, 끝에 가서 ‘시간 여행’이라는 한 대목을 잡았습니다. 오늘 성서를 읽는 사람은 지금 여기서 읽지 마라, 시간 여행을 해서 2천 년 전으로 돌아가라고요. 그 시대로 가서 그들의 삶과 언어로 그들의 세계관로 읽으라는 겁니다. 전문적인 용어로 하면 그들의 지평에서 성서 본문을 이해하고 경험해야 한다고 말이죠. 모차르트의 음악을 연주하려는 사람이 지금의 현대적 감각만 가지고 그의 음악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우스운 일이잖아요. 그가 살았던 18세기 후반 고전주의 시대로 돌아가야죠. 마찬가지로 성서를 해석하려면 2천 년 전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성서를 읽는 사람들이 시간 여행을 해야 하는데 그걸 안 해요. 그런 거 못 느끼세요? 2천 년 전과는 아무 상관도 없이 지금 열심히 전도하고 교회 짓고 사람들 모으는 데 심취해 있다면, 2천 년 전의 원초적 영성을 전혀 경험할 수 없습니다.

원초적 영성이라는 말이 나와서 한 말씀을 더 드립니다. 제가 시무하는 샘터교회에서는 예전예배를 드립니다. 예전이 기독교 역사예요. 2천 년 전과 지금을 연결해주는 거죠. 형식주의를 옹호하는 게 아닙니다. 그 예배에 참여하면서 2천 년 전에 카타콤에서 예배를 드리던 사람들의 경험이 와 닿아야 합니다. 2천 년 동안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기도하고 찬송하고 말씀을 대했는지 배워야 합니다. 지난 주 예배순서를 보면 사도신경이 아니라 니케아 신조가 나오는데요. 그걸 신앙고백 시간에 같이 읽었습니다. 사도신경과 비슷한 내용이지만 조금 표현이 다릅니다. 우리가 325년에 있었던 니케아 공의회의 신조를 통독한 거죠. 역사 속으로 들어간 겁니다. 참 안타까운 게 성서 텍스트와 2천 년의 영성을 보자기에 묶어놓고는 펴볼 생각조차 안 해요. 그 반면 지금 여기서 경험할 수 있는 개인적이고 주관적이고 심리학적이고 감상적인 영성만을 좋아합니다. 그런 식의 영성이 생명을 담고 있는 성령의 영성과 얼마나 소통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좀 회의적입니다. 그게 전부 무의미하다는 뜻은 아니에요. 나의 주관적인 결단 혹은 실존적인 영성과, 2천 년 기독교 역사 및 성서 텍스트가 안고 있는 객관적인 세계가 조화를 이뤄야 한다는 거죠. 예수를 믿는 것도 내가 믿어야 하는 거지, 내가 믿음이 없는데 그게 가능하냐고 주장한다면 기독교의 원초적 영성에 대해서 뭔가 경험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알겠습니까? 강하게 끊어서 말합니다. 여러분이 믿지 않아도 하나님은 구원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는 그걸 놓치고 ‘내’가 믿는다는 데 열중하죠. 여러분이 믿지 않아도 구원 받을 가능성은 높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일이에요. 그러나 내가 뭘 믿어도 하나님의 일과는 거리가 멀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비하면 개인의 실존적인 믿음과 결단은 우스운 거예요. 별 게 아니라는 뜻으로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수적이라는 뜻이에요. 종속적입니다. 더 근원적인 것은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구원 통치예요. 우리가 이것을 알아야 하고, 이것이 역사 안에 있습니다. 제가 첫 시간에 진도는 안 나가고 엉뚱한 소리만 하네요. 그러나 이런 게 모두 우리 공부와 직간접적으로 다 연결됩니다.

 

차례 확인하기

우리가 앞으로 공부하게 될 내용의 차례를 검토해보겠습니다. 시작은 초대교회의 배경입니다. 여기서는 원시 기독교 공동체, 유대인의 생존 투쟁, 율법, 시내산, 안식일, 성결법 등등을 공부하게 될 겁니다. 우리가 기독교에 대해 어렴풋이 알고 있는데요. 인문학적으로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시내산 하나만 하더라도 할 말이 산더미 같습니다. 시내산은 율법을 받은 산이에요. 시내산은 모세가 소명을 받은 호렙산과 똑같은 산입니다. 미디안의 제사장인 이드로는 모세의 장인이었습니다. 미디안 신을 섬기던 제사장이었는데, 모세가 그의 데릴사위가 됩니다. 모세가 이드로와 사십년 동안 먹고 자고 했다면 미디안 종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거예요. 호렙산은 미디안 종교의 성산, 성지였어요. 모세가 왜 이 미디안의 성지에서 하나님의 소명을 받았는지 차근히 검토해야 한다면 공부할 게 얼마나 많겠어요? 안식일 문제도 그렇습니다. 유대인이 인류에게 준 유산이 많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안식일은 정말 큰 유산입니다. 혁명적인 법이에요. 유대인들이 율법을 아주 많이 생각하는데, 복음서에 보면 이로 인해 예수님과도 많이 충돌합니다. 율법은 자유를 주고 해방하고 생명을 살리기 위한 것인데 교조화가 되면서 잘못 사용되었거든요. 성결법에 따르면 돼지고기를 먹지 말아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왜 먹을거리마저 이렇게 까다롭게 구별했을까요? 이유가 뭘까요? 그 시대에는 위생 상태가 좋지 않고 전염병이 많이 돌았기 때문에 지방이 많은 돼지고기 등은 건강에 좋지 않았어요. 그래서 안 먹는 게 건강에 유익했죠. 하여튼 우리가 유대교를 이해해야 하는 이유는 초기 기독교가 여기에서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단락은 역사적 예수입니다. 처녀 마리아, 인간 예수, 출가, 세례 요한과 예수, 하나님 나라, 팔복, 제자선택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세 번째 단락은 십자가와 부활 사건입니다. 이 대목을 다루면서 다음과 같은 키워드를 생각하면 됩니다. 갈릴리에서 예루살렘까지, 밥상 공동체,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손 씻는 빌라도,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빈 무덤 등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네 번째 단락은 세계교회의 역사인데요. 오순절 성령강림, 313년, 1054년, 1517년, 솔라 스크립투라, 솔라 피데, 솔라 그라티아, 1948년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공부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만 공부를 잘해도 신대원 3년 졸업한 거나 마찬가지예요. 유대교와 기독교, 십자가와 부활, 교회 역사 중에 마틴 루터가 개신교 신앙의 슬로건으로 내놓은 솔라 스크립투라, 솔라 피데, 솔라 그라티아만 알아도 개신교의 특징을 알 수 있습니다. 1948년은 WCC가 창설된 해입니다.

다섯 번째 단락은 구약성서와 헤브라이즘이라는 제목입니다. 헤브라이즘과 크리스챠니티,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성서, 전승으로서의 하나님 말씀, 모세오경, 빛이 있으라, 너의 고향을 떠나라, 엑서더스, 만나와 메추라기, 예언서, 성문서를 키워드로 삼아서 공부하겠습니다. 여섯 번째 단락은 신약성서와 구원의 보편성입니다. 여기서의 키워드는 신약성서의 형성과정, 복음서, 사도의 선교 역사, 서신, 바울과 기독교, 요한계시록입니다. 일곱 번째로는 기독교의 형태와 본질을 다룹니다. 실천신학 분야죠. 교회 안에 있는 실제 행태를 살핍니다. 예배, 기도, 헌금, 성찬식, 목사, 장로, 당회, 여성안수를 중심으로 설명하겠습니다. 이런 문제들은 현실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관심이 많을 겁니다. 조직신학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려고 합니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에 대한 물음입니다. 이 대목에서의 핵심 개념은 존재에 대해서, 실체론적인 하나님 이해, 신앙적 인식론, 하나님의 불변성, 비종교적 해석, 삼위일체로서의 하나님입니다. 제가 삼위일체를 얼마나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을지 걱정이군요.

인간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겠지요. 인간은 무엇일까요? 신앙은 인간론적 관점을 완전히 포기해야만 할까요? 인간창조와 진화, 호모 에렉투스 등등에 대해서도 설명할 겁니다. 호모 에렉투스는 3백만 년 전에 나타난 인류의 조상입니다. 침팬지와 인류가 갈라진 그 시기의 생물학적 인간이죠. 그러한 생물학적 인간 이해를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걸 두려워할 필요가 하나도 없어요. 그런 다음, 기독교의 인간 이해로 넘어가는데요. 인간은 흙이다, 영적인 존재, 인간 현실로서의 죄를 다룹니다. 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기 때문이죠. 죄는 숙명인가요? 과연 죄가 뭔가요? 한국교회의 병폐 중 하나가 죄책감에 근거한 영성입니다. 죄인을 강조해요. 죄가 기독교의 현실이기는 합니다. 헌금 못했는데, 기도 생활 못했는데, 새벽기도에 빠졌는데, 이러다 내가 어떻게 되는 거 아닌가 하는 불안 심리에 빠져 있어요. 이것은 인간의 생명을 죽이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기독교가 말하는 죄는 무엇일까요? 여기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 많습니다. 인간에 대한 질문은 윤리적 질문을 야기합니다. 기독교의 윤리적 지평입니다. 가치 판단, 존재와 행위, 개인과 사회, 성서는 기독교 윤리의 전범인가, 인간 본질로서의 성, 금욕과 쾌락, 청빈과 소유, 유기론적 생명윤리 등을 키워드로 설명하게 될 겁니다.

그 다음으로 기독교와 한민족의 관계에 대해서 설명하겠습니다. 우리는 한민족이죠. 우리말을 쓰고 우리의 먹을거리를 먹습니다. 한민족과 기독교의 관계 및 토착화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해요. 그 나라에 들어온 선교사들이 누구였는가에 따라 신앙 색깔이 달라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준 분들은 미국 선교사들인데요. 그분들에게 감사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조금 안타까운 점은 우리나라에 들어온 침례교, 장로교, 감리교 선교사들은 본류(main stream)가 아닌 지류에 해당하던 근본적인 성향의 사람들이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 우리의 신앙이 이 모양을 가지게 된 겁니다. 처음 출발이 그랬어요. 그러나 우리의 문제는 우리가 책임져야죠. 소제목으로 이승훈과 김대건, 기독교 신앙과 서구문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직접선교, 간접선교, 근본주의, 기독교 교파를 다루었고요. 마지막으로 다룰 주제는 21세기의 한국교회입니다. 한국교회의 미래는 있는가, 복음 세상 안인가 밖인가,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는가, 남북통일은 구원이다, 땅은 하나님의 것이다, 기독교의 구원론적 지평 등등을 소주제로 다룰 생각입니다. 위의 내용을 뼈대로 하고, 중간에 다른 내용들이 첨가될 겁니다.

 

종말론적 구원

제 강의는 기본적으로 기독교를 구원론적 관점에서 설명하게 될 겁니다. 기독교는 여전히 종말론적 메시아 공동체거든요. 오고 있는 나라를 살아가고 그것을 전하려고 하는 공동체입니다. 이런 말들은 전문적인 용어지만, 정말 기독교 신앙에서 중요한 용어입니다. 그런데 종말론(eschatology)을 주술적으로 사용하거나 휴거처럼 받아들이죠. 종말은 역사관입니다. 마르크시즘은 기독교 종말론의 세속화입니다. 종말론은 마지막 때가 무엇인가에 대한 깊은 통찰이고 고민이에요. 종말을 생각하자면 현재와 과거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구원은 현재적 구원이 아니라 종말론적 구원입니다. 이 종말론적 구원을 어떻게 현재로 당겨서 맛보는가가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이 가난한 자, 우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정말 가난하고 우는 사람들이 복이 있습니까? 그건 종말론적 선언입니다.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전권에 의해 일어날 일을 말씀한 거예요. 예수님의 삶을 보세요. 십자가는 실패이고 무기력한 죽음입니다. 정말 무기력한 죽음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죠? 십자가를 영광으로 생각하잖아요? 2천 년 전으로 돌아가 시간 여행을 떠나보세요. 아무 의미도 없이 반역죄로 몰려 죽은 겁니다. 그걸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고 믿을 수 있겠어요?

그것으로 끝났다면 기독교는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역사 안에 등장할 수 없었어요. 구원은 생명입니다. 구원, 메시아, 생명, 종말, 하나님 나라가 다 연결됩니다. 어느 관점이냐에 따라 이 용어나 저 용어로 쓸 수 있어요. 구원은 참다운 생명인데, 이 땅에서 우리가 참다운 생명을 얻을 수 있을까요? 구원은 궁극적으로 종말론적입니다. 생명이 완성되는 거니까요. 그러나 이 땅에도 무상하지 않은 생명이 있었습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신 분을 하나님이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려내셨어요. 이 부활의 의미 아래에서 초기 기독교인들은 십자가의 의미를 재해석하기 시작했습니다. 판넨베르크는 예수의 십자가 이후에 이 세상의 어떤 삶도 실패로 단정 지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그 일을 하십니다. 정말 억울한 죽음이 많죠? 이천 냉동 창고 화재 사건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다 죽었어요. 왜 그런 일이 일어날까요? 이 세상을 보면 하나님이 구원하신 일이 별로 없는 것 같아요. 그러나 구원은 종말론적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것을 기다립니다. 그것을 우리가 실질적으로 이해하고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게 기독교 영성이에요. 그러면 삶이 변하게 됩니다. 영성의 대가들을 보면 알 수 있잖아요.

어느새 오늘 강의시간이 지났네요. 앞으로 6개월 동안 할 걸 지금 다 끝낸 셈입니다. 오늘로 종강할까요? 오늘은 맛보기로 보여드렸고요. 이런 이야기 안으로 세밀하게 들어가면 할 말이 얼마나 많겠어요? 사이버 강의실을 통해 여러분이 이런 딱딱한 주제에 재미를 느끼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여러분이 재미가 있으려면 먼저 제가 재미있어야 하는데요. 저는 재밌습니다. 오늘 강의의 결론은 기독교에 대해서는 우리가 생각하고 공부할 것이 무지 많다는 겁니다. 기독교가 그렇게 우습게 믿어도 될 만한 게 아니에요. 엄청난 사태이고 사건입니다. 질문을 받겠습니다.

첫 질문은 다음입니다. “복음을 전하려면 쉬워야 하는데 목사님 설명을 들으니 너무 어려운 것 같습니다. 기독교 복음을 아는 게 어렵습니까, 쉽습니까?” 어렵다니 걱정이네요. 복음을 전하는 게 말로 해서 될까요? 사영리(四靈理) 식으로 전도하라고 많이 말하는데요. 하나님, 인간, 죄, 예수님 식으로 말이죠. 그런데 사실 그런 걸로 교회 나올 사람이 많을까요? 복음을 전하는 게 형식은 단순할지 몰라도 그 안으로 들어가면 내용이 심오하죠. 마치 개미 굴처럼요. 겉으로 보면 개미 한 마리 왔다 갔다 하는 것 같은데, 들어가면 갈수록 넓습니다. 여왕벌도 있고 일벌도 있고, 거대한 빌딩 같잖아요.

두 번째 질문이 다음입니다. “종말론적 관점을 알면 일상에서 벌어지는 고통 문제가 해결되나요?” 해결되기 어렵습니다. 종말론적 관점을 가졌다고 해서 암에 걸린 사람이 고통에서 자유로워지겠어요? 물론 영성이 깊어지면 좌절이나 낙심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단계까지 들어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죠. 저도 만약에 자동차 사고가 나서 하반신을 못 쓰게 된다면, 굉장히 힘들고 상처를 입을 겁니다. 테니스도 못 치고요.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하반신을 못 쓴다고 해도 하나님 나라와 소통할 수 있는 길이 있으니까요. 영성으로 극복할 수 있어야죠. 그걸 잘 하기 위해서라도 신앙의 성숙이 필요하지 않겠어요? 예수님도 로마의 지배 아래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시대의 아들로서 그 영향을 전적으로 받았어요. 그 시대의 아들이 분명한데 어떻게 메시아일 수 있을까요? 그냥 뛰어난 선생에 불과한 건 아닐까요? 까다롭죠? 이런 문제들이 우리 기독교의 계속되는 숙제입니다. 이건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니까 여기서 접겠습니다. 다음 시간에 뵙죠. 수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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