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강, 역사적 예수(2)

기독교가 뭐꼬 조회 수 4716 추천 수 1 2011.05.03 13:28:44

제05강

역사적 예수(2)

 

 

강의를 시작한지 벌써 한 달이 다 갔습니다. 달력을 한 장 넘겨야겠습니다. 한 장씩 해서 열두 번만 하면 1년이 다 가죠. 날짜를 하나하나 잘게 보면 숫자가 많은 것 같은데 열두 번 만에 1년이 간다고 생각하니 많아 보이지 않네요. 1년이 끝날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1년도 한꺼번에 가버리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지구의 자전과 공전을 중심으로 시간을 계산하면서 삽니다. 우리가 계산하는 시간들은 태양계 안에서만 가능한 거예요. 태양계 안에서만 이런 시간이 가능하다고 한다면, 태양계 너머에서는 시간이 달라진다는 말이겠죠. 그런 관점으로 볼 때 시간이 얼마나 비밀스럽습니까?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죠. 모든 일들이 참 미미하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느껴요. 우리가 열심히 해서 남기는 업적들도 별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고요. 그러니 가능하면 힘을 빼고 살아야죠. 제가 또 설교조로 이야기를 합니다만, 우리는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시간이 지날수록 절실히 느끼고 살아야 합니다. 달력을 한 장 넘기며 느끼는 상념이 있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어떤 분이 설날에도 강의를 하냐고 물더군요. 다음 주가 설이죠. 많은 사람들이 고향에 가서 가족 친지를 만나기 때문에 우리의 사이버 강의실에 오지 못 할 것 같아요. 그래서 다음 주 목요일에는 정식 수업은 하지 않고, 시간 있는 사람만 따로 강의실을 열어서 특강을 하겠습니다. 수업은 나가지 않고 다른 이야기를 하겠다는 거예요. 뭘 할 건지는 아직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교회에서 행하는 신앙생활에 대한 이야기나, 부활에 대한 이야기, 혹은 하나님 나라나 내세에 대한 이야기를 할 것 같아요. 선택은 여러 가지로 열려 있습니다. 여기저기 갈 데가 없는 사람들, 절기 때 더 쓸쓸한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다음 시간에는 강의실을 열어놓고 특별한 강의를 하겠어요. 양쪽 다 불만 없죠?

 

인간 예수

지난 시간에 이어 역사적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하려고 합니다. 지난번에는 동정녀 마리아에 대해서 이야기했는데요. 동정녀 탄생에 관한 이야기는 예수님의 탄생이 기적적이었다는 것, 즉 일반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태어났다는 것을 강조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의 인성을 강조하기 위한 변증이었다고 했어요. 거기에서 핵심은 예수님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여자의 몸을 통해 인간이 되셨다는 예수님의 인성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신이냐 인간이냐 하는 논의는 초기 기독교 때부터 계속 있어 왔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완전히 이해하려면 아마 종말에나 가능하겠죠. 어떻게 한 인격체 안에 신성과 일성이 어떻게 일치를 이룰 수 있는가 하는 가 핵심인데, 거기에 대해서 나중에 삼위일체론을 다루면서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겠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동정녀 출생이 예수님의 육체성, 즉 이 땅에 몸을 입고 태어났다는 사실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인간 예수라는 부분을 짚어 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라틴어로 표현하면 ‘베레 호모 베레 데우스’(vere homo, vere Deus)입니다. 참된 인간이며 참된 하나님이라는 말은 우리가 교회에서 항상 들었던 말이기 때문에 익숙하기는 하지만, 이 말의 실체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게 예수님은 반신반인이 아니라는 겁니다. 반은 인간이고 반은 신인 것이 아니라, 온전한 신이며 온전한 인간이라는 거죠. 전체적으로 인간이며 전체적으로 신이라는 것이 가능할까요? 힘들죠. 그런데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을 바로 그렇게 이해했습니다. 과연 그게 무슨 의미일까요? 어떻게 그게 가능할까요?

이 문제는 다른 것과도 연결이 되는데요. 예수님은 하나님이었는데, 어떻게 인간의 몸을 입고 성육신(incarnation)했는가, 또 인간으로서 어떻게 하나님께 양자(adoption)가 되었는가 하는 관점입니다. 이 두 가지는 상반되는 것이지만 모두 정통 기독교 교리입니다. 양자론은 계속 논란이 되기는 했습니다. 위에서 내려와 인간이 되었다는 교리와 아래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교리는 상충됩니다. 그러나 예수님 정체의 신비를 해명하는데 둘 다 적용됩니다. 참된 인간이며 참된 하나님이라는 이 명제에는 예수의 정체성, 성육신론과 양자론 등 주변의 많은 것들과 연관되어 있어요. 보통 한국교회와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을 신적인 존재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말로는 참된 하나님이자 참된 사람이라고 하지만, 머릿속에는 예수님이 거의 신성화되어 있죠. 예수님이 우리의 메시아이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과 같다는 것은 옳은 이야기입니다. 메시아는 인간을 구원할 자인데 인간이 인간을 구원할 수 없으니 신인 것도 옳고 하나님의 아들이니 하나님인 것도 옳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에게 내려오는 기독교 정통 교리로 보자면 예수는 그것 뿐 아니라 온전한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제 말이 자꾸 쳇바퀴 도는 듯해서 미안합니다. 좀 까다로운 부분이래서 그렇습니다.

일반 신자들은 예수님을 주로 신적인 차원에서 생각합니다. 정서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인식론적으로도 그래요. 예수님을 인간적으로 접근하면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신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예수님에 대해 반만 아는 거예요. 기독교가 이해하는 신개념의 반 토막에 불과하다는 거죠. 기독교의 신 이해는 따지고 보면 굉장히 혁명적입니다. 유대교나 이슬람교와 비교했을 때 여기에서 근원적인 차이가 나요. 유대교에서는 유일하고 전지전능한 하나님을 어떻게 우리와 똑같은 육신을 가졌던 인간 예수와 동일시할 수 있냐고 하면서 불가능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인들은 그것을 극복했던 거죠. 초기 기독교인들은 어떤 경험을 했기에 그것을 극복할 수 있었을까요? 어떤 인식의 비약이 있었을까요? 그것이 무엇인지를 우리가 천천히 찾아 들어가야 합니다. 그게 갑자기 되지는 않습니다. 신비이기 때문이죠. 제가 신비라고 말하면 막연한 것처럼 받아들이기 쉬운데, 그런 뜻이 아니라고 몇 번 설명했습니다. 막연하다거나 확실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고요. 보통 동양에서도 불립문자(不立文字)라는 말이 있지요. 말과 언어로 담아 낼 수 없는 어떤 경험을 말합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에게서 그걸 경험한 거예요.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죠. 그분이 선포한 하나님 나라에 대해 한 신학자가 말한 표현을 빌리면 ‘선포한 자가 선포된 내용과 하나가 된 것’입니다. 선포된 내용이 선포한 자와 하나가 되는 그 계기에 어떠한 경험이 있었다는 거죠. 그 경험이 초기 기독교가 유대교를 넘어서서 새로운 하나님의 인식으로 들어가게 된 결정적인 요소가 된 겁니다.

여러분은 제 말을 조금 오해할 수도 있어요. 그 인식이 객관적인 사실이 아니지만 생각이 좀 어른스러워졌다는 뜻이냐고 말이죠. 어린아이들이 철이 들면서 뭔가를 알게 되는 것처럼 말이죠. 그 뜻은 아닙니다. 표현이 좀 미묘하긴 한데요. 신학은 좀 그렇습니다. 신학은 그 미묘한 차이를 정확히 집어내서 사유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거기에는 여러 가지 색깔의 사건이나 흐름들이 굉장히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유대교의 힘이 들어오기도 하고 초기 기독교의 독특한 사상이 들어가기도 하며 헬라의 영향도 받는 등, 그 외의 많은 것들이 연결되어 있지요. 흡사 장마가 졌을 때 이 골짜기 저 골짜기에서 물들이 들어와 큰 물줄기를 이루듯이 말이죠. 기독교는 그런 흐름 속에서 배태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퍼즐』 류의 책들은 없었던 이야기들을 아주 허황되게 쓰는 것 같아요. 초기 기독교인들이 쓴 예수 이야기는 참된 예수가 아니라 신화에 불과하며 바울이 꾸며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이죠. 그런 사람들은 교회 바깥에서 단순히 현상만 가지고 그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도록 내버려둬야지, 그걸 가지고 씨름하면 힘만 들어요. 교회 바깥의 사람들과 종교 논쟁을 할 필요가 하나도 없습니다. 기독교는 아주 고유한 신앙 경험인데 그걸 어떻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할 수 있겠어요? 설명이야 계속해야겠지만, 그게 논쟁이 되어버리면 아무 의미가 없죠. 논쟁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끼리 해야 합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교회 안에서 신앙 논쟁을 해야죠. 신앙도 없이 기독교를 종교학적으로 혹은 현상학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과 기독교의 고유한 경험을 논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에 빠진 사람한테 제삼자가 너 그 사람 잘 못 본 거라고 말하면 논쟁이 되겠습니까? 안 되는 거죠. 『예수 퍼즐』은 아무 의미가 없어요. 그냥 그렇게 떠들라고 내버려둬야지 심각하게 논의할 만한 대상이 아닙니다.

제가 이야기했는지 모르지만, 기독교 신앙은 고유한 세계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이라는 것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나타나지 않고 오직 예수를 추종하는 일부의 사람들에게만 나타났거든요.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객관적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기독교 신앙은 자기들끼리만 통한다는 말이냐고 질문할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다른 세계를 향해 말하려면 신학적으로 해야 하는 거죠.

신학이라는 것은 독단을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신학이 교회 밖의 모든 세계와 진리론적으로 열려 있기 때문이죠. 강의를 들을 때 용어를 이해하는 게 굉장히 중요한데요. 제가 진리론적이라고 했는데, 진리는 독단과는 좀 다릅니다. 진리가 뭘까요. 기독교가 도그마를 갖고 있기는 하지만, 음악가들의 음악 경험이나 시인들의 언어 경험처럼 기독교는 분명히 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독특하고 배타적인 경험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이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세계 전체가 하나님의 계시라고 이해한다는 점에서 보면 보편적이거든요. 따라서 어떤 것이 진리로서 옳은가 그른가를 논쟁한다면, 이런 진리론의 차원에서 대화할 수 있겠죠. 아까 제가 『예수 퍼즐』과는 논쟁이 안 된다고 했는데요. 다른 방식으로는 논쟁이 가능합니다. 고유한 신학적 영성으로 가능한 거죠. 왜냐하면 초기 기독교의 경험이 바로 그런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경험했던 부활 등의 신앙을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많이 비판했어요. 프로이트(Freud)나 니체(Nietzsche)나 포이에르바흐(Feuerbach) 등이 대표적이죠. 기독교 안에 비판 받을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그냥 좀 나타나는 것이죠. 어떤 공동체든 그런 심리적인 요소들, 종교 현상적인 요소들이 나타납니다. 기독교 안에는 절대 그런 요소들이 없다고, 증류수처럼 아주 순수한 것만 있다고 말할 수 없지요. 다만 그렇게 본질적이지 못한 요소들이 있어도 그 중심에 진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보편적인 진리와 얼마든지 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신적인 존재로만 생각하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해 반쪽만 이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일단 예수님을 온전한 인간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와 다를 게 하나도 없는, 우리의 인간적인 요소를 그대로 가지고 있는 분으로 이해해야 해요. 저는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쓴 『최후의 유혹』이라는 책을 재미있게 읽었는데요. 예수님은 과연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어느 정도까지 유지하고 있었을까요? 어디까지는 인간이었고 그 이상은 인간이 아니었을 거라는 어떤 선이 있었을까요? 육체적으로는 우리와 똑같았으니까 화장실도 가야하고, 좀 더 극단적으로 말하면 이성에 대한 사랑도 느꼈을 것 같은데요. 정말 예수님에게 이성적인 끌림이 있었을까요? 이런 이야기들은 별 의미가 없기는 하지만, 인성을 강조하기 위해 하는 질문입니다. 그냥 생각해 보세요. 이 부분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예수님이 온전한 인간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겁니다. 총체적인 인간이었어요. 어느 한부분이라도 인간적이지 않은 부분이 없었습니다. 이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지금까지 역사적 예수에서 두 가지 문제를 다루었는데요. 하나는 동정녀 탄생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성입니다. 이게 역사적 예수를 이해하는데 고려해야 할 항목들이니 기억해 두길 바랍니다. 사실 제가 일일이 다 말할 필요는 없는데, 확인하는 차원에서 정확하게 짚고 있는 중입니다.

강의 중간에 어떤 분이 예수님의 인간성과 죄의 관계에 대해서 질문했어요. 예수님의 인간성을 인정하면 예수님의 죄성도 인정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질문이에요. 좋은 질문이네요. 좋은 질문이라는 것은 제가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것을 풀자면 이 문제만 가지고는 안 되고요. 죄, 칭의, 창조, 하나님 나라 등이 모두 연결되어 있습니다. 층층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전체적인 흐름을 이해해야 풀 수 있어요.

우리에게는 죄론에 대해 공식처럼 박혀 있는 것이 있어요. 원죄와 자범죄가 있다고 하죠. 원죄는 어떤 것인데 우리가 어떻게 해야 용서를 받을 수 있고, 자범죄는 어떻게 해야 한다고들 말합니다. 그런 말들이 근본적으로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걸로 모든 게 해결되는 건 아니죠. 왜 구약성서와 신양성서가 죄 문제를 이야기했는지 근원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죄의 문제는 아담 때문에 모순에 빠지게 되는데요. 우리가 짓는 모든 죄가 내 책임이 아니라 결국 아담으로 돌아가게 되거든요. 기독교에 원래부터 원죄 개념이 있었던 게 아닙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 궁극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생긴 문제이죠. 원죄 개념은 주로 어거스틴 때부터 나온 건데요. 어거스틴과 서로 대적되는 신학도 있었죠. 누구죠?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한 펠라기우스입니다. 펠라기우스는 죄를 말하기는 하지만 원죄에 무게를 두지 않습니다. 하여튼 이런 문제들에는 포괄적이고 다층적인 맥락이 있어요. 그런 점에서 온전한 인간이 죄를 지을 수 있느냐 하는 그 문제만 가지고 대답하기는 힘듭니다. 여기에는 죄가 무엇인가에 대한 전이해가 있어야 해요. 이 질문에 대해서는 이 정도만 하겠습니다.

 

예수의 출가에 대해

예수님의 공생애 중 우리가 다음으로 짚어야 할 것이 출가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서른 살 즈음에 출가를 했다고 하는데요. 정확히 서른 살인지는 모릅니다. 책에 나온 내용은 누가복음 3장 23절을 기준으로 해서 제가 옛날에 쓴 것이고, 이 내용을 다시 확인하지는 못했어요. 이재철 목사님이 어느 설교에서 예수님이 사십대 중반에 출가를 했다고 말하던데, 복음서에 나오는 ‘오십 세’라는 구절(요 8:57)을 근거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하여튼 성서 기자들은 공생애 이전의 예수님의 생애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어요. 유대인으로 태어났으니 자기 아버지의 직업을 물려받았겠죠. 목수입니다. 예수님이 서른 살 즈음 되었다고 하면 나이가 많은 건데요. 장가를 가도 몇 번은 갔을 나이입니다. 그러나 그 때까지 예수님은 결혼하지 않았다고 해요. 그런데 예수님이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게 성서에 명시적으로 나오나요? 하여튼 우리는 그렇게 알고 있어요. 예수님이 서른까지 가족들과 함께 있었다는 것은 아버지 요셉이 일찍 세상을 떠나서 가족들을 돌봐야 하는 상황이었을 수 있습니다. 여자 동생들이 시집을 가고 남자 동생들도 거의 자립을 했을 때 어머니를 동생들에게 맡기면서,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의무에서 벗어났을 거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어요. 예수님이 출가하기 전에는 동네 사람들로부터 평범한 젊은이로 받아들여졌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공생애 활동을 보고 동네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한 거죠. 예수님은 고향에서 별로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심지어는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는 소문도, 동네 사람들은 물론 가족들도 그대로 받아들였던 것 같아요.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을 볼 때, 아마도 예수님은 출가하기 전에 비범한 메시아적 특성을 나타내지 않았던 것 같아요. 예수님의 가족들도 예수님을 붙잡으러 온 적이 있었으니까요.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출가를 했을까요? 지금 저는 여러분의 신앙을 더 돈독하게 하기 위해서 이 강의를 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둘째 문제이고 무엇보다 기독교의 실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즉 모든 것을 열어놓고 인문학적으로 질문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 그 쪽으로 여러분을 이끌고 들어가는 중입니다. 이런 것에 대해 평소 질문했던 사람도 있을 것이고, 교회의 가르침에만 머물러 있던 사람도 있겠지만, 이런 질문들에 대해 불손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예수님은 출가하기 전에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본인 스스로 메시아라고 생각했을까요?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어렸을 때 이야기가 한두 군데 나오기는 합니다. 열두 살 때 예루살렘을 방문한 이야기가 있기는 한데, 그것은 객관적인 사실이라기보다 신앙고백이라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어쨌든 예수님은 서른 살 즈음에 집안과의 관계를 끊고 출가합니다. 그 때 예수님께 하나님에 대한 어떤 경험, 혹은 충격이 있었는지는 성서가 설명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뭐라 말하기가 참 곤란합니다. 예수님이 스스로 천사를 보내서 어떻게 하라고 했다든지, 내가 사명을 받아서 어떻게 했다든지 하는 이야기가 거의 없으니까요. 예수님이 출가한 뒤에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 금식하면서 유혹을 받았다는 내용이 나오기는 하지만, 다른 종교의 창시자들이나 예언자들과는 좀 다릅니다. 그들은 뭔가를 보거든요. 그런데 예수님의 출가 사건에서는 그런 게 없어요. 물론 요한복음에 보면 나는 아버지에게서 듣고 본 것을 전한다는 말이 나오기는 하는데,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에 비해 예수님을 좀 더 변증하는 쪽으로 설명하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 것 같습니다. 하여튼 공관복음만 본다면 어떻게 예수님이 메시아적인 정체성을 확인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설명이 없습니다. 다른 종교인들에게서는 그런 걸 많이 볼 수 있거든요. 그러나 예수님은 그냥 선포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 죄가 용서를 받았다고 말이죠.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일반적인 종교 창시자들의 예언과는 전혀 차원을 달리합니다.

 

세례 요한과 예수

예수님의 출가 문제와 세례 요한과는 직간접적인 연관이 있습니다. 단순히 역사가적인 관점으로만 본다면 예수님은 먼저 출가한 세례 요한에게서 많은 영적인 자극과 도전을 받았습니다. 세례 요한을 따라 출가한 거라고 볼 수 있다는 거죠. 물론 복음서에는 세례 요한이 엘리야처럼 메시아가 오기 전에 길을 예비할 자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상당히 어려운 문제들입니다.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관계에 대해서는 여러분이 기초 상식으로 잘 알고 있을 테니 길게 끌지 맙시다.

세례 요한은 헤로디아로 인해 죽게 되는데요. 헤로디아가 헤롯과 재혼을 했습니다. 시숙과 결혼을 한 거죠. 그걸 세례 요한이 공개적으로 비판했다가 감옥에 갇혔고,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췄을 때 뭐든지 원하는 대로 주겠다는 헤롯의 말에 그 딸이 세례 요한의 목을 요구합니다. 헤로디아의 충고에 따라 살로메가 그걸 원한 건데요. 그 당시 최고의 영적 거인이 이런 여인의 농락으로 인해 죽었다는 것은 역사의 비극 같습니다. 세례 요한은 그 당시 에세네파 공동체의 일원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정이 있어요. 에세네파는 상당히 금욕적이고 엄격한 도덕성을 강조했죠. 이 에세네파를 쿰란 공동체라고도 하는데요. 쿰란 공동체는 로마 식민지하에 있었던 모든 체제와 질서를 부정하고 사회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자기들만의 순수 공동체를 형성하며 살았습니다. 이들이 남긴 문서들이 많이 있는데요. 유대교의 역사가인 요세푸스(Josephus)에 따르면, 이들은 광야에서 생활하면서 2년 동안의 시험을 거친 뒤에 정회원이 될 수 있는 자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유대교 안에 있었던 극단적인 금욕주의적 공동체였어요. 바리새파는 그들과는 또 다른 유대 공동체였고요. 상당히 많은 분파들이 유대교 안에 있었던 겁니다. 우리는 지금 로마가톨릭이 하나라고 생각하지만, 그 안에도 여러 갈래가 많이 있거든요. 하여튼 이 쿰란 공동체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빛의 아들들을 사랑하고 어둠의 자식들을 증오해야 할 임무를 띠고 살았습니다. 그만큼 이 세상을 선과 악의 대립으로 보았던 거죠. 선과 악의 이원론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었고, 영지주의의 영향도 받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영지주의가 광범위하게 영향을 끼쳤으니까요. 1947년에 사해 동굴에서 발견된 쿰란 문서들에는 금욕적인 삶을 주제로 하는 내용들이 나오는데 세례 요한의 삶과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이 내용은 타이센(G. Theissen)이라는 독일 학자가 쓴 『갈릴래아 사람들의 그림자』(한국신학연구소)라는 책을 참고한 것입니다.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관계를 그린 소설도 있을 텐데요. 거기에는 많은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헤로디아가 요한을 사랑했는데, 유혹하다가 실패했고, 그게 증오로 바뀌어서 요한을 죽였다는 그런 내용 같아요. 그게 전혀 개연성이 없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세례 요한이 감옥에 갇혔을 때, 요한은 제자들을 시켜서 예수님에게 묻습니다. 오실 그 이가 당신인가요, 아니면 더 기다릴까요. 당신이 메시아냐는 말이죠. 일종의 메시아 운동입니다. 그 당시에는 메시아 운동이 크게 일어났었어요. 그래서 사이비 메시아도 많았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을 기대한 운동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한 예수님의 사건도 그 큰 운동 속에 하나의 흐름이라고 볼 수 있었던 거죠. 세례 요한이 그걸 물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기다려야 하냐고요. 그런데 예수님은 내가 바로 그 사람이라고 대답하지 않았어요. 왜 그랬을까요? 만약에 본인이 메시아라는 확신이 있었다면, 그렇게 대답했을 텐데 말이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도 내가 메시아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비슷하게 이해할 수 있는 진술들이 조금 나오기는 하지만요. 왜 그랬을까요? 메시아로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그랬을까요? 주변 사람들이 생각하던 메시아 관과 예수님이 생각하던 메시아관이 달라서 그랬을까요? 복잡한 문제입니다. 여러 가지 문제가 복합적으로 연결되어 있었겠죠. 이 문제는 예수님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되었을 거예요. 과연 내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가 옳은가, 하나님의 권위를 내가 갖고 있는 것인가 하고 말이죠. 이런 문제로 여러분이 불안해하지 않도록 미리 답변을 해야겠군요. 저는 예수님이 불확실하다거나 자신의 메시아성에 대해 확신이 없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게 아니라, 메시아라는 것이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라 오랜 과정을 거쳐 일어난 큰 구원사건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겁니다. 제가 속 시원하게 딱 부러지게 말하지 않으니까 불안한 생각이 들 수도 있을 텐데요. 불안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마패 같은 증명서를 가지고 있었던 게 아니라, 하나님과의 꾸준한 관계 속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다는 거예요. 거기에서 결정적으로 행동한 분이 바로 하나님입니다.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선택할 만한 메시아로서의 어떤 가능성들이 있었던 겁니다. 그 과정에 큰 덩어리가 있어요. 그 안에 수많은 사연들이 담겨있고요. 그 사연을 하나하나 딱딱 끊어서 설명해주면 좋겠는데, 그럴 수 있는 게 아니어서 설명이 빙빙 도는 것 같네요. 우리와 똑같은 인성을 가졌던 그 예수님이 수많은 사연들을 거쳐 참된 하나님이 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것을 어떻게 딱 집어서 여러분에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 오실 그 이가 누구냐는 질문에 내가 바로 네가 기다리던 그 사람이라고 대답하지 않았고, 제자들이 예수님께 예루살렘에 가서 어려운 일을 당해서는 안 된다고 했을 때 사탄아 물러가라고 말했어요. 이런 걸 보면 예수님은 최소한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메시아와는 전혀 다른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당시 메시아 운동의 흐름 속에 있긴 했지만 그 흐름과는 질적으로 다른 어떤 분이었고, 어떤 사건에 휩싸인 분이었어요. 예수님은 이렇게 간접적으로 대답합니다. 너희가 듣고 보는 것을 말하라고,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말입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 중에 결국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도 있었어요. 좀 더 전문적으로 알고 싶으면 책을 참고하길 바랍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세례 요한과 예수님 사이에는 여러모로 통하는 점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요한의 선포와 예수의 선포가 상당히 달랐습니다. 두 분 다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한 것은 맞지만, 내용이 달랐던 거죠. 세례 요한은 금욕적이었지만 예수님은 그렇지 않았어요.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할 정도였습니다. 종교 지도자로서 경건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금식을 해야 하는데 왜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느냐고요. 예수님이 금식을 했는지 안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공생애 초반에 40일 금식 후에 마귀의 시험을 이겼다는 보도가 있긴 하지만 그것이 습관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설교의 내용도 달랐어요. 세례 요한은 사람의 구체적인 도덕적 죄를 이야기했지만, 예수님은 덮어주고 용서해주라고 했어요. 요한은 심판을 말했지만, 예수님은 용서와 사랑을 말했습니다. 예수님도 천국이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고 했어요. 그러나 예수님이 회개에 사용한 ‘메타노이아’라는 말의 의미는 세례요한이 말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예수님에게 회개는 하나님을 향해서 방향을 트는 존재론적 변화입니다. 존재라고 할 때 이것은 행위와 연관됩니다. 존재와 행위의 문제인 거죠. 그게 뭘까요? 존재론적인 변화는 우리가 어떤 노력을 하더라도 달성할 수 없는, 오직 하나님을 통해서만 가능한 어떤 변화를 이야기한다면, 행위나 도덕적 변화는 우리가 어떤 노력을 해서 가능한 것입니다. 칭의라고 하는 것,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하는 것은 존재론적인 변화를 말합니다. 우리가 의롭게 될 수는 없어요. 우리의 어떤 노력을 통해서도 가능하지 않죠. 그러나 하나님이 의롭다고 인정하는 거예요. 그것도 정확한 표현은 아닌데 일단 그 정도로 이야기하겠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존재론적인 변화를 말했어요. 그러나 요한이 선포한 회개는 실제적인 삶에서 정의로워야 한다는 윤리적 변화를 담고 있거든요. 여기에서 많은 설교자들이 혼동을 합니다. 교양 있는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고요. 우리가 변화해서 도덕적인 주도권을 확보하자는 게 요한 식의 하나님 나라라고 한다면, 예수님은 그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냥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 죄인이든 세리든 간에 그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박해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자는 거예요. 그걸 알게 하면 그 사람이 변화될 수도 있고 변화되지 않을 수도 있죠. 그러나 실제로 하나님 나라에 직면해 있는 사람이라면 어떨까요? 예, 변화해야겠죠. 그런데 또 그 변화가 뭐냐는 문제가 있어요. 하여튼 원칙적으로 말하자면 예수님은 도덕적 변화보다는 더 궁극적인 존재의 변화를 선포했던 겁니다. 도덕적인 변화는 우리가 노력하면 돼요. 당근과 채찍으로 자극을 주면 사람을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변화, 존재의 변화는 안 되거든요. 예수님이 도덕적 변화를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은 더 근원적으로 인간을 살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했던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미 사랑으로 임박했다는 거예요. 그 은총과 선물이 충만하게 임하는 거죠. 그것은 내가 뭘 해서 얻는 것과는 상관없이 임해요. 생명의 나라, 자유와 평화, 종말의 나라가 임하는 쪽으로 마음을 돌리는 것이 회개인 겁니다. 이게 헷갈리면 예수 믿고 예수 믿는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는 쪽으로 나갑니다. 나쁜 이야기는 아니지만 핵심을 잡은 건 아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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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8]김평화

2011.05.06 17:46:58
*.182.36.237

감사합니다. 잘 보겠습니다.

목사님 지난주에 처음으로 출석한 사람입니다.

자료가 너무 많네요.  우선 기독교가 뭐꼬라는 올라온 자료를 먼저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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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11.05.06 22:12:31
*.120.170.250

김평화 님,

반갑습니다.

다비아에 컴밍 아웃 하셨네요.

예, 기독교가 뭐꼬를 먼저 읽으시고

(나머지도 차츰 다 올리겠어요)

성서연구와 설교모움을 그 다음으로 읽으면 되겠군요.

가능하면 교회에서 뵙겠습니다.

주님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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