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강, 십자가와 부활(4)

기독교가 뭐꼬 조회 수 2658 추천 수 0 2012.02.11 19:15:36

제14강

십자가와 부활(4)

 

 

주일은 잘 보내셨습니까? 저는 요즘 개인적인 일로 좀 빠듯하게 지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일들이 밀려요. 내일 포항에 가서 강의할 내용도 준비해야 하는데 어렵습니다. 일도 어떻게 보면 욕심일 수 있는데요. 그런 방식으로 하는 것은 지혜로운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예상한 대로 일이 진행이 되면 괜찮은데, 중간에 다른 피치 못할 일들이 생겨요. 그런 일이 생기면 며칠 동안 시간을 보내게 되니까 다른 일까지 엉켜 버립니다. 그런 일들로 바쁘게 지냈습니다.

오늘은 여러분의 질문을 받고 제가 대답하는 시간인데요. 질문이 없네요. 그러나 질문이 없더라도 큰 문제는 없습니다. 가르치는 사람은 학생이 구체적으로 질문하지 않더라도 학생이 무엇을 궁금해 하는지 항상 예상하고 있어야 하거든요. 학생들의 마음을 뚫어봐야 선생이니까요. 꼭 그렇지는 않다 하더라도 비슷한 수준에서 생각하다 보면 뭐가 궁금할지 알게 되더군요. 동영상 메뉴에 구체적인 질문을 올려놓지 않아도 주일 저녁 시간을 끌고 나가는 데는 어렵지 않습니다. 꼭 질문이 있어야만 하는 건 아니니까요.

‘기독교가 뭐꼬?’라는 강의는 원래 대학학부 저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거였습니다. 저학년이 배우는 교양과목이라고 해서 그 내용이 가볍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을 대상으로 하든 표현은 좀 달라지겠지만 그 내용만큼은 사실 똑같은 무게입니다. 신학, 삶, 역사에 대한 이해가 중요한 거지, 듣는 학생이 누구냐 하는 것은 결정적으로 중요하지 않아요. 만약에 제가 중학교나 고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기독교에 대해 가르친다고 하더라도, 현재 제가 갖고 있는 신학적 착상을 다 빼버리고 말하지는 않을 겁니다. 듣는 사람들의 이해 수준에 맞도록 표현은 다르게 하겠죠. 목요일 밤에 한 시간 하는 수업으로는 사실 강의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주일 밤에는 질문도 질문이지만 목요일에 충분하게 하지 못했던 내용을 보충하려고 합니다.

 

예수의 부활 예고에 대해

질문이 올라왔습니다. 직접 인용합니다. “예수님이 성전을 허물면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고 말한 것을 우리는 예수님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한 거라고 배웠는데요. 그렇게 본다면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요? 또 포도원 주인이 아들을 보냈는데 죽임을 당하는 이야기가 나오잖아요? 거기에서도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비유로 말한 게 아니었을까요?”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습니다. 크게 틀린 이야기도 아니고요. 예수님이 실제로 그렇게 생각했든 생각하지 않았든 그것은 차치하고라도, 중요한 것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생각이거든요. 신구약성서 모두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생각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생애에 대해서 말하기 때문에 복음서에 한정해서 말한다면, 복음서 안에 있는 일들과 시간들과 인물들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런 것들을 보도하고 있는 성서 기자들과 그들이 속해 있던 공동체가 중요한 겁니다. 성서 기자들이 처했던 시간과 장소가 중요하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활동하던 30-33년까지 보다도, 복음서가 기록되던 그 시간 말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서 뿐 아니라 서신을 포함한 모든 신약성서에서 언급되는 예수님은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로서의 예수가 아니라,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 신앙으로 고백되고 해석된 예수이기 때문이죠. 실제로 역사 안에 있었던 바로 그 예수와 초기 기독교에서 이해되고 해석된 예수가 일치하느냐 일치하지 않느냐 하는 것은 많은 연구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성서를 읽을 때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이해하고 설명하려고 했던 그들의 생각이에요. 이 말이 앞뒤가 잘 맞지 않는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어요. 예수님에게 일어났던 사건이 중요하지 그걸 전달한 사도와 초기 원시 기독교가 왜 중요하냐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예수님에게 일어났던 사건이나 예수님 자체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결코 아니에요. 원천적으로 중요해요. 성서론이나 계시론의 관점에서 말한다면, 하나님의 구원 사건이 중요합니다. 계시니까요. 계시와 하나님의 구원 사건은 일치하기도 하고 작은 차이를 보이기도 하지만, 그 작은 차이까지는 여기에서 말하지 않겠습니다.

말을 할 때 그 안에 들어 있는 용어의 개념들을 대단히 명확하게 구분하면서 말해야 하거든요. 학문적인 글일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한다고 하더라도 한계가 있더라고요. 저도 설교를 하면서 계속 느끼는 바지만, 설교 한 편으로 모든 걸 다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 듣는 사람과 말하는 사람과의 언어에 대한 이해의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전달하는 데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어요. 아무리 노력해도 그걸 넘어서기가 힘들어요. 그걸 일치시키려면, 즉 의사소통을 정확히 하려면 일일이 그 개념을 다 설명하면서 넘어가야 하는데, 한정된 시간에 그럴 수가 없잖아요. 특히 설교는 더 그렇죠. 그러나 그런 부분들이 일치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어쩔 수가 없는 거예요. 계시와 하나님의 구원 사건이 어떻게 구분되고 어떻게 연결되는가 하는 것은 신학적인 개념인데, 그런 것들을 강의 속에서 모두 짚고 넘어가기가 힘들잖아요. 여러분이 전체적인 흐름만이라도 알고 따라온다면 그런 차이들은 큰 문제가 아니라고 봅니다.

하나님의 구원 사건, 당연히 중요하죠. 문제는 성서와 연관시킬 때 생깁니다.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우리가 어떻게 만나는가 하는 거예요. 성서가 하나님의 구원 사건 자체는 아니잖아요. 예를 들면 구약에서 가장 중요한 출애굽 사건이 있었다고 합시다. 그것은 언어나 문자가 아니잖아요. 사건이죠. 예수님의 공생애에서도 사건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출애굽과 예수님의 공생애를 연결해서 생각해 보세요. 다 하나님의 구원 사건입니다. 우리는 구원 사건을 직접 만나지 못하고 문자로 만나요. 그런데 문자가 어떻게 사건 자체를 담아내겠어요? 이건 생각해 볼 필요도 없이 아주 명확한 거예요. 예수님의 공생애 사건은 문자로 다 담아 낼 수도 없고, 가능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원초적인 구원 사건, 예수 세미나에서 말하는 역사적 예수의 실체를 다 알 수가 없어요. 그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사건이기는 하지만 역사 안에서 살아가는 한, 우리는 그걸 직접 만날 수 없으니까요. 2천 년 전과 지금 우리 사이의 역사적인 틈을 메워주는 것은 오직 글자, 즉 성서거든요. 성서를 기록한 사람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나중에 언급하게 되겠지만 기왕 말이 나왔으니 지금 잠간 설명하고 지나가겠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를 담고 있는 성서는 신문기자가 현장에서 직접 사건을 보고 적은 게 아니라 오랫동안 전해 내려오던 내용을 기록한 겁니다. 사실 신문기자가 현장에서 직접 보고 쓴 거라 해도 엄밀하고 객관적인 걸 다 잡아낼 수는 없어요.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거든요. 신문기자가 글을 썼다고 해도 자기 머리를 통과해서 나오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머릿속을 통과할 때, 기자에 따라서 같은 사건이라 하더라도 기사 내용이 다르게 나올 수 있는 거죠. 물론 객관적이고 초보적인 사실은 누가 쓰더라도 차이가 없겠지만 사건에 대한 해석은 다를 수 있습니다. 신문보도도 해석이 들어가는데, 하물며 역사 문서인 성서는 당연히 해석된 거라고 할 수 있죠. 잠시 이야기가 옆으로 나갔는데요.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가 예수님의 이야기를 다룬 복음서를 읽을 때 예수님이 실제로 무엇을 했는가를 아는 게 아주 중요하기는 하지만, 사실은 그걸 알기가 매우 어렵다는 겁니다. 그걸 전제로 하고 여러분이 성서를 읽어야 해요. 성서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졌습니다. 통해서 왔다는 말에는 많은 일들이 있었다는 의미가 들어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성전을 허물고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짓겠다고 한 예수님의 말씀을 십자가의 부활과 연계시키는 것은, 즉 예수님이 자기의 죽음을 미리 내다보고 부활을 예측한 거라고 말하는 것은, 적절한 해석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 본문을 좀 더 연구해봐야겠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거의 모든 부분에서 후대의 해석입니다. 지금 제가 갑자기 받은 질문이라서 충분한 주석적인 근거를 제시할 수는 없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 의해서 해석된 것이지 처음부터 결정되고 예정된 어떤 사건의 실현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복음서에 나온 예수님의 말씀은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이냐고 질문할 수 있겠죠. 그렇지 않습니다. 다소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그 안에는 아주 중요한 요소들이 들어와 있어요. 사실 그런 것들을 다 말로 하기는 참 힘든데요. 뭐가 있을까요? 그건 여러분이 잘 찾아보세요. 예수님에게 어떤 사건들이 있었던 게 분명해요. 그런 사건들이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 의해서 해석되었던 겁니다.

앞 시간에 부활에 대해 말씀드리면서 언급했을 텐데요. 예수님의 부활이, 왜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인식되지 않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바울은 오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에게도 부활한 주님이 나타났다고 했는데요. 그렇게 분명한 사실로 경험되는 것인데, 왜 다른 사람들에게는 나타나지 않는 걸까요?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만 나타났던 걸까요? 만약 그랬다면 왜 그랬을까요? 더구나 죽음을 이기고 종말론적인 생명을 선취한 부활의 몸을 입었다면 사람들 앞에 떳떳하게 나타나는 게 좋지 않았을까요? 빌라도 앞에도, 제사장 앞에도, 유대 민중들 앞에도 내가 바로 부활한 예수라고 했으면 예수의 메시아성이 명명백백하게 드러났을 텐데, 그게 아니잖아요.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 앞으로도 믿을 가능성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부활이 전혀 인식되지 않았습니다. 부활 현현이 없었어요. 이게 뭘까요? 여기에 뭐가 들어가 있는 걸까요? 어려운 문제입니다. 이런 게 일종의 딜레마일 수도 있고 기독교 신앙의 역동성일 수도 있어요.

초기 기독교 안에서 형성된 것들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내려오고 있지만, 그것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실증적이고 객관성이 있는 건 아닙니다. 실증적이고 객관성이 있다는 게 큰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걸 중요하게 생각하고, 딱딱 맞아 떨어지는 믿음의 증거를 대라고 하죠. 기독교 신앙은 그렇게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굉장히 희미하게 시작했어요. 어떻게 보면, 그게 확실했어요. 확실성의 차원이 서로 달랐던 거예요. 이해하겠죠? 초기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확실성을 경험했을까요? 그들은 부활한 예수 앞에, 즉 자신들이 어쩔 수 없는 현상 앞에 직면해 버렸던 겁니다. 그들도 설명할 수 없는 엄청난 걸 경험한 거죠.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었던 경험이었어요. 그걸 나중에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구약의 어느 부분에서 말한 죽은 자가 떠오르기도 하고, 삼일 만에 무슨 일이 이루어지겠다는 말 등이 생각나면서 예수의 부활이 구약에 근거한 예언의 성취로 해석된 겁니다.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서요.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는 그들이 경험하고 이해한 독특한 방식으로 확실성에 이르는 길이 있었어요. 그걸 우리가 잡아야 합니다. 그 길은 다른 것과는 완전히 구별되는데요. 자연 과학처럼 실험실에서 반복을 통해 똑같은 답을 얻어내는 그런 확실성은 아니에요.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경험한 확실성은 계시적인 확실성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드러내야만 겨우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어떤 확실성인 거죠. 이것이 자연 과학과 대립되는 것은 아니지만, 동일시되는 것도 아닙니다. 기독교 고유의 진리에 이르는 인식론이에요. 진리 인식의 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게 독특한 거죠. 일반 실증적인 세계가 말하는 방식의 확실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도성에 근거한 확실성이라는 겁니다. 야, 이건 말장난이다. 도대체 이 세상의 실증적인 확실성과 하나님의 계시에 의한 확실성이 다르다고 하면 말이 되냐? 이렇게 말할 사람도 있을 겁니다. 우리가 여태까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방식의 테두리 안에서는 말이 안 되지만, 그것을 뛰어넘는 신앙, 영성, 신학적 사유에서는 말이 됩니다.

질문한 분에게 대답을 할게요. 예수님이 성전을 허물고 사흘 안에 다시 짓겠다는 말을 했다고 성서 기자가 전하고 있기는 하지만, 성서 기자가 기록한 내용과 예수님 자신의 생각은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한 것으로 표현하기는 하지만, 성서 기자들의 공동체에 의해, 즉 전승에 의해 그렇게 기록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복음서 안에는 예수님이라면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겠다고 생각한 표현들이 많이 들어왔어요. 그렇다면 복음서 안에 있는 예수님의 말들을 예수님이 직접 말한 거라고 믿을 수 없는 것인가 하고 생각할 수 있는데요. 이것은 신학자들이 더 연구해야 할 부분입니다. 신학의 길은 거의 끝이 없어요. 지금까지 계속 그런 문제들을 연구했는데도 아직까지 답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나는 무엇 무엇이다.’라고 하는 하나의 정형화된 패턴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나는 양의 문이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 등등 이렇게 말했잖아요. 헬라어로는 ‘에고 에이미’(ἐγώ εἰμί)로 시작하는데요.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이야기거든요. 예수님이 과연 그렇게 말했을 거라는 생각이 드나요? 그렇게 말했을 가능성이 좀 떨어져요. 요한복음에 나와 있는 ‘에고 에이미’ 식의 정형화된 예수님의 자기표현 방식은 요한복음의 신학이 반영된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요한복음의 내용들을 터무니없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제 말이 뱅글뱅글 도는 것 같죠? 서로 모순에 빠진 것 같기도 하고요. 순환의 모순이라고 할까요? 자꾸 너무 관념적인 이야기를 한 것 같네요. 여기까지만 말하겠습니다.

 

부활의 역사성

질문이 이어지는군요. “부활이 구약의 예언에 근거한 초대교회의 해석이란 말은, 부활이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는 뜻인가요?” 꼭 그런 건 아닙니다. 이 질문도 더 정확하게 풀려면 질문한 분이 말한 ‘역사적 사건’이라는 단어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것부터 미리 말해야 합니다. 역사적이라는 게 실증적인 역사를 말하는 건지, 해석된 역사를 말하는 건지 알아야 한다는 거죠. 둘은 전혀 다른 뜻이거든요. 그러나 무슨 뜻으로 질문했는지는 제가 알고 있어요. 굳이 학문적으로 문장을 해석하려면 더 세세한 개념 정리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제가 해석이라고 말한 것은 예수님에게 부활이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구약에 근거해서 해석했다고 하는 뜻이 아닙니다. 부활 현현 사건은 신앙의 눈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벌어진 특별한 일이었어요. 그건 실증적인 사건이 아닌 겁니다. 그러나 뭔가 사건이 있었던 거죠. 제가 말한 부분을 잘 생각하세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가진 사람의 영적인 눈에만 나타난 하나의 사건이 부활 현현이었어요.

오늘 샘터교회의 설교에서도 그와 비슷한 이야기가 나왔는데요. 예수님이 회당에 들어가서 안식일을 맞아 랍비라는 칭호를 받고 이사야서를 찾아서 읽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너희들이 들은 말이 지금 여기서 그대로 이루어졌다.”고 말해요. 예수님이 한 설교는 눈먼 자가 보게 되고 하는 등의 이사야 예언들입니다. 그런 게 회당 안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보여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이사야가 선포한 구원의 해, 복음의 해, 희년의 해와 일치된다는 걸 말하거든요. 거기에도 신학적으로 많은 이야기가 필요합니다. 다른 질문에서도 나온 것 같은데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했어요.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를 예수님 자체와 일치시켰는데, 즉 선포된 것을 선포자와 일치시켰는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하는 거죠. 여기에는 더 궁극적인 세계를 이해하려고 했던 초기 기독교인들의 새로운 인식론이 작용했다고 볼 수 있어요. 인식론은 어떤 것을 깨닫고 이해한다는 겁니다. 그 맥락 안으로 들어가는 게 신학적 사유이고 영성이라고 할 수 있어요. 설교 이야기를 하다 말았군요. 그러니까 나사렛 회당에서 예수님이 인용한 이사야의 그 예언이 바로 예수와 일치되었다, 예수에게 일어났다고 하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정말 눈 먼 자가 당장 눈을 떴던 건 아니에요. 신앙적인 고백을 담고 있는 거죠. 이 모순을 풀어야 합니다. 아직은 눈먼 자가 보지 못하고 앉은뱅이가 일어나지 못했는데, 이미 예수에게서 실현되었다고 하는 그 믿음, 그 인식, 그 통찰, 그 해석이 초기 기독교의 고유한 예수님 이해이고, 하나님 이해이고, 역사 이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할까요? 여기에 혹시 설교할 분들이 들어와 있는지 모르겠는데요. 설교자인 목사들에게 필요한 것이 이것입니다. 그 맥락 안으로 일단 목사가 뛰어 들어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서는 뜬 구름 잡는 이야기가 되든지 아니면 실용적으로 써먹을 도구가 되고 맙니다.

성서는 영적 현실에 대한 문서인데요. 영적인 세계는 허황하고 비현실적인 세계가 아니라 가장 심층적인 생명의 세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건 굉장히 탄탄한 거예요. 탄탄한 인식, 즉 사유 방식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우리는 신학적인 사유를 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눈먼 자가 보게 되는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이미 예수와 하나가 된 사람들에게는 그 일이 일어난 것과 똑같다고, 다를 바 없다고, 거기에 도달해 있다고 인식하는 겁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에게서 이미 구원이 실현되었다, 현실이 되었다고 인식했다는 거죠. 하나님 나라를 설명할 때 보통 우리는 ‘이미’ 왔지만 아직은 ‘아닌’, ‘아직’은 오지 않았지만 ‘이미’라고 하는 변증법적인 관계로 설명하잖아요? 그 맥락인 거죠. 그것이 안식일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는 예수와 연관되어서 나온 거예요. 그게 가능할까요? 아직 눈먼 자가 눈 뜨는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이미 일어난 것과 똑같은 어떤 세계를 보는 것 말입니다.

최종적인 세계를 최후 혹은 종말이라고 하죠. 우주론적인 종말의 그때, 정말 마지막이라고 하는 그때 말입니다. 그때에 가서 우리에게 실질적으로 드러나게 되고 우리가 참여하게 될 그 영원한 생명이, 소급해서 혹은 선취(先取)적으로 예수에게서 발생했다는 것이 곧 부활인데요. 그것이 기독교 역사 안에서 영적인, 신학적인, 심층적인, 신앙적인 토대가 될 수 있습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는 거죠. 사실 그건 아무리 설명해도 들을 귀가 없으면 들리지 않습니다. 종말과 지금은 엄청난 차이가 있는데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고 하겠죠. 그것을 같이 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합니다. 그런 눈을 갖기 위해서 하나님이 누구냐 하는 것도 알아야 하는 거죠. 하나님은 드러나서 존재하는 분일 뿐 아니라 오히려 존재하지 않으면서도 존재하게 하는 원초적인 힘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생각하는 틀을 승화시키고 넓혀 나가야 전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거예요. 저도 설교하면서 부분적으로 말을 더듬거릴 때가 있습니다. 이런 내용들을 신자들이 다 안다고 전제를 하고 설교를 해야 하는데, 실제로 신자들은 잘 모르잖아요. 성도들이 그 깊이 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니까요. 제가 머뭇거리면 오해할 수도 있는데, 그게 아직 제가 설교의 베테랑이 되지 못했다는 증거겠죠. 전달이 잘 안되더라도 진도를 팍팍 나가야 되는데 말이에요. 하나님의 구원을 우리가 어떻게 아직은 아닌데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인식하고, 인식할 뿐만 아니라 그 세계 속으로 들어가 살아내느냐 하는 겁니다.

조금 설교조로 말해서 죄송합니다. 오늘이 주일 저녁이니까 설교조로 말해도 되겠네요. 우리가 지금 살아 있잖아요. 그러나 금방 죽습니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사는 거예요. 그걸 인정하면, 우리가 성취하려고 하는 것들이 무의미하다는 걸 깨닫게 되고, 의미가 있다고 해도 아주 사소하고 상대적이라는 걸 알게 되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더 근본적인 생명 속으로 들어가려고 하게 됩니다. 들어가려고 해도 잘 안되니까 문제인데요. 실제로 그런 게 잘 되는 사람들을 신비주의자 혹은 영성주의자라고 할 수 있어요. 마지막 순간이 아직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온 것과 다름없는 그 삶을 실질적으로 살아가야 하는 거예요. 그건 신학공부를 많이 해야만 가능한 게 아닙니다. 평소에 성서를 잘 읽고 영성이 열리게 되면 그 관계 속으로 들어갈 수 있어요. 바울도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말했는데, 그게 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게 어떻게 가능할까요? 서로 다른 인격(personality)인데 말이죠. 그냥 감정적으로 일치된다는 게 아니거든요. 실증적으로 느끼는 거는 아니에요.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품고 사는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신비의 문제예요. 존재론적 신비입니다.

오늘 제가 말한 내용들이 어떻습니까? 재미있죠? 그런 것들을 여러분이 쭉 생각해 보세요. 성전을 허물고 짓는다는 그 한 구절을 가지고, 제가 비약하고 생략하고 지나가면서 많은 이야기들을 같이 얹어서 했는데요. 그러한 힘들을 우리가 키우게 되면 성서를 읽을 때 헛발질을 하지 않고 잘 따라갈 수 있습니다.

 

예수의 초능력에 대해

다음 질문은 이렇습니다. “눈먼 자가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일어났다는 성서의 증언을 실제로 예수님이 행한 일로 생각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데요.” 어떻습니까? 초자연적 기적에 대한 질문인데요. 일단 이에 대해서 설명하려면 전이해가 필요합니다. 성서가 무엇인지, 기적이 무엇인지에 대한 것들이요. 이런 것들을 다 접어두고 질문한 분의 생각에 따라 필요한 대답들을 조금씩 열어간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런 일들은 일단 가능합니다. 눈먼 자가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거 말이에요. 갑자기 생각이 났는데요. 심청의 아버지가 이름이 뭐죠? 심청전의 마지막 대목으로 기억하는데요. 심학규 씨가 왕비가 와서 “아버지!”라고 하니까 “이게 웬일이냐, 내 딸 좀 보자!”라고 하면서, 딸이 죽었다고 생각했던 그 장면을 절절하게 창을 하더군요. 그리고 눈을 떴습니다. 그런 건 가능할 거예요. 저는 그게 창이지만 실제로도 가능하다고 봅니다. 사실 자연 현상과 초자연적 현상은 크게 다른 게 아니라고 봐요. 범주에 따라 다르니까요. 작은 범주 안에서는 초자연적이지만 큰 범주 안에서는 자연적이 되는 경우가 많거든요. 생각해보세요. 정용섭이라고 하는 사람이 이 시간 2008년 3월 2일 밤에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5백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불가능한 일인데, 지금은 가능한 현실이 되고 말았어요. 사실 기적이죠. 초자연적이죠. 그러나 범주를 넓히면 모든 것들이 자연적인 것으로 해명이 가능해져요. 예화가 적당한지는 모르겠네요. 하여튼 예수님 앞에서 눈을 뜨는 초자연적인 기적들은 일어날 가능성이 있었고 일어날 수도 있었습니다. 이것을 전제로 하고 다음 이야기를 할게요. 그러나 여기에서 짚고 싶은 것은 그런 일이 예수님에게만 일어난 게 아니기 때문에 특별한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금도 아마 그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을 텐데, 하물며 고대 사회에야 얼마나 더 했겠어요? 그런 일들이 더 많았겠죠. 예수님도 그런 경우가 많았거든요.

어떤 목사들은 예수님처럼 자기도 초자연적 능력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 합니다. 그런 분들에게 일어나는 사건을 예수님의 공생애에 나오는 일과 비교하지 마세요. 전혀 다른 일이에요. 예수님이 그런 일을 했으니까 우리도 할 수 있다고 하는 건 신앙이 아닙니다. 사건 자체도 다르고요. 신유집회의 전문가인 그 목사님의 경우는 사기인 것 같아요. 기계적으로 그런 일들이 가능할 것처럼 말하잖아요. 그럼 사기꾼인가요? 저한테 어떤 대답을 바라세요? 솔직한 대답을 듣고 싶다고요. 의도적인 사기는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사기가 된 걸 뭐라고 하나요? 아, 그걸 미필적 고의라고 하는군요. 외워 둬야겠네요.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제가 그 목사님을 설교비평에서 한번 다뤘는데요. 많이 순화시켰습니다만 문제가 많습니다. 심각한 문제가 많아요. 기독교를 크게 병들게 하는 요소가 많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한국에서야 교회만 키우면 만사오케이잖아요. 이게 정말로 심각합니다. 지금 신천지가 이단이라고 야단이지만, 그게 더 커지면 힘 꽤나 줄 수 있을 걸요. 저는 신천지 신학을 잘 모르기 때문에 말할 처지는 아닙니다. 그러나 이분은 이단과 정통 사이에 놓여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목사는 강단에 올라가서 “믿음으로 하면 낫습니다. 치료됩니다. 믿습니까?”라고 하면서, 자기를 머릿속으로 그리기만 해도 낫는다고 말하는데, 그렇게 말하면 사기 치는 겁니다. 예수님에게 있었던 일들을 통해서 성서 기자들이 뭘 말하려고 하는지 그 핵심을 잡아야 합니다. 치료된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요. 예수님이 기계적으로 그런 일을 행한 것도 아니고요. 아주 자연적인 현상이었는데 고대인들에게 그게 초자연적으로 보였을 수도 있어요. 『성경은 무엇을 기적이라 부르는가?』(알폰스 봐이저, 분도)라는 책을 한 번 보세요. 대구성서아카데미 사이트 알림판에 추천 도서 목록을 올려놓았는데, 찾아보세요.

예수님이 눈먼 자를 눈뜨게 한 것이 사실이냐 아니냐에 관심을 갖지 마세요. 그런 일을 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메시아인 것은 아닙니다. 그런 일은 흔한 거예요. 거기에 관심을 갖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근본이 아닙니다. 호기심일 뿐이죠. 그보다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가르침, 심판, 재림 등에 귀를 기울이세요. 대답이 되었는지 모르겠네요. 앞으로 차츰차츰 더 이야기하도록 하죠.

 

신학적 사유에 대해

오늘 강의는 처음에 올라온 질문이 없어서 제가 다른 이야기를 하려고 준비를 했는데, 말하는 중에 질문들이 올라와서 거기에 따라가다 보니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중심으로 죽음의 문제를 좀 더 말하려고 했어요. 기독교적으로 죽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고, 죽음 이후의 영원한 생명, 즉 부활을 생각해 보려고 했는데요. 죽는다고 할 때 육체만 죽는 것인지, 영혼은 불멸하는 것인지, 하는 문제들을 다루려고 했는데, 시간이 다 돼서 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이런 문제들은 사실 단답식으로 대답하기가 어려워요. 앞서 부활에 대해서 말할 때도, 부활은 예수님을 통한 새로운 생명 현현의 경험으로서, 구약성서에 근거해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 의해서 새롭게 해석되었다고 했는데요. 그것과 마찬가지로 이 영과 육의 문제도 딱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역사가 진행되면서 계속 새롭게 해석되어 왔습니다. 그 중간 중간에 헬라철학이나 자연과학의 도움을 받기도 하면서, 기독교가 말하려고 했던 인간, 구원, 생명의 문제들이 풍부한 내용을 갖게 되었죠. 그런 점에서 볼 때 오늘 우리가 알고 있는 기독교의 교리나 가르침도 아직은 완료된 것이 아닙니다. 종말론적으로 열려 있는 거예요. 그건 굉장히 중요한 신앙의 관점이기도 하고, 신앙의 기본 토대이기도 합니다. 또한 우리 인식의 한계인 동시에 인식의 방향이기도 하고, 진리의 어떤 속성이기도 합니다. 열려져 있다고 해서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게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역사적인 것이 단절된 것은 없어요. 종말까지 열려 있으니까요. 기독교의 가르침이라고 해서 역사적 맥락과 단절된 채 어디에서 툭 튀어나온 게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이 시간 역사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책임이 중요한 거예요. 루터는 500년 전의 그 역사 안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던 거고요. 그로 인해 기독교 신앙이 건강해질 수 있었으니까요. 우리가 지금 어떠한 역사적 자리에서 어떤 역할을 감당하느냐에 따라 한국교회가 더 건강할 수도 있고 타락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역사란 것이 중요한 거예요. 중요하지만 절대적이지는 않고, 절대적이지만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역사의 속성입니다. 그 말은 곧 종말론적으로 열려 있다는 뜻이고요.

오늘 중요한 것 하나를 이야기하고 끝내야겠네요. 우리가 이런 공부를 하는 것은 기독교의 가르침에 대한 정보들을 많이 확보하기 위한 게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책 한권을 읽으면 끝나는 문제예요. 중요한 것은 그 생각입니다. 그런 쪽으로 생각할 줄 아는 게 어려워요. 생각한다는 것, 아주 중요합니다. 신학대학을 졸업해도 생각하지 않아요. 저보다 뛰어난 다른 신학자들이 아주 많습니다. 사실 저는 신학자의 반열에 서지도 못해요. 그러나 신학적 사유의 끄나풀이라고나 할까요? 저는 그런 걸 조금 맛보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비록 평신도지만 그 안으로 들어가게 하려고 제가 노력하는 거예요. 제가 여러분에게 전하는 기독교의 정보는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난 2천 년 기독교 역사에서 축적된 것이 얼마나 많겠어요? 이걸 다 이야기할 수도 없을 뿐더러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그것을 생각할 수 있는 신학적 사유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자는 거죠. 전문적인 신학자가 아니어도 그건 가능하니까요.

교회 안에서도 신자들은 별로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걸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요? 오해하지 마세요. 신학은 고상한 사유에서 비롯된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신자들이 생각하지 않는 이유는 세상살이가 고달프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비겁하기 때문입니다. 비겁하다는 것은 사실에 직면할 용기가 없다는 말이에요. 두려운 거죠. 하나님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없다는 방식으로 이 세상을 통치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어요? 하나님의 능력만 생각하는 사람이 십자가에 달린 절대 무능력한 모습의 하나님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그건 두려움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세계 속으로 들어가기를 원하지 않아요. 좋은 것, 잘되는 것, 성공하는 것, 능력 받는 것들이 늘 우리를 자극하고 있으니까요. 세상 사람이나 신앙인이나 좀 더 깊숙이 들어가면 그 모티브가 똑 같잖아요. 창피한 이야기이지만, 형식은 종교적인데 내면으로 치고 들어가면 일반 보험회사 직원이나 회사 운영자와 다른 게 없어요. 다 그렇다는 건 아니에요. 대다수의 신자들이 기독교 신앙에 대한 사유의 세계로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사유를 영성과 똑같이 생각하면 돼요. 주먹구구식으로 잘 믿고 감성적으로 따뜻하게 위로 받는 센티멘털리즘, 즉 자기가 좋아하는 거 다하면서 가볍게 살아가겠다는 태도에서 벗어나자는 겁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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