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강 녹취록 - 제12장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인 (기독교적인) 교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2)

 

오늘 판넨베르크 책공부 48강이 되겠습니다.

47강 공부할 때 조금 애매하게 처리한 대목이 있어서 오늘 그거를 좀 정리하고 이 텍스트를 좀 나가보겠습니다. 애매한 부분이라고 하는 거는 우리말 사도신경과 연관해서 나온 문제예요. 우리말 사도신경이 교회에 대한 부분을 이렇게 진술하고 있어요.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이거에요. 이 두개를 믿는다는 뜻이거든요. 고 앞부분에는 성령을 믿사오며 이렇게 되어있어요. 이어서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이렇게 나갑니다. 여기서 특별히 거룩한 공회라고 하는 말이 정확하게 우리들에게 와 닿지 않을 수 있는 거죠. 그냥 얼핏 생각하면 거룩한 교회 이렇게 생각할 수 있어요. 교회의 거룩성 이렇게 애기할 수 있지요. 그런데 공회라고 하는 거는 그냥 교회가 아니라 공적인 교회거든요. 보편성을 이야기하는 거죠. 로마가톨릭교회에서는 이것을 공번.. 뭐라고 하던 가요. 이런 표현이 있던데요. 거룩한 공회와 이 말은 거룩하고 보편적인 교회와 이런 뜻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공회라고 번역했는지 그게 좀 의아한데요. 최근에 번역한 사도신경은 이것을 깔끔하게 정리했나요. 나중에 제가 기회가 닿으면 이거를 한 번 확인해 보겠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이 교회에 대한 이 성격 규정이 두가지로만 나온 거죠. 거룩성과 보편성이예요. 그런데 이 보편성도 이 번역만 갖고는 눈치채기 힘듭니다. 그냥 거룩성만 나온 것 같애요. 그냥 교회가 거룩하다. 그런 뜻으로 말이죠. 우리가 47강에서 교회 문제의 관계에서 배운 네가지 특징 있잖습니까? 거룩성, 단일성, 보편성, 사도성이예요. 이 네가지가 우리말 성경에는 두 가지로만, 그리고 또 보기에 따라서는 한가지로만 나온 것으로 보이기도 하는거죠.

다시 정리하겠습니다. 이 네가지 콘스탄티노플 공회에서 정리된 교회의 네가지 본질과 특징 이런 것이 우리말 성경에는 두가지로만 나와 있는거예요. 독일어 사도신경에는 세가지로 되어 있습니다. 단일성이 더 들어가요. 그 판넨베르크 원서에 그대로 나오거든요. 아이네 하일리게, 알게마이네(크리스트리게), 케르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아이네가 나와있습니다. 이거는 하나의 라는 뜻입니다. 하나의 거룩하고 알게마이네 보편적인 교회라고 하는거죠. 그런데 우리말 번역으로 사도신경이 단일성, 요거를 빼 놓은 거는 실수인가요? 아니면 우리 말의 어쩔수 없는 한계인가요? 영어, 독일어, 불어 등은 관사라고 하나요? 단수와 복수, 부정관사죠. 그게 거의가 다 들어가는데요. 우리말은 거의 그런 것 쓰지 않습니다. 습관적으로 언어구조상 그런 것을 쓰지 않기 때문에 여기에서 그걸 뺐는지 어쨌는지 모르겠습니다. 요 부분도 다시 번역된 사도신경에서 처리가 되었는지 그것도 나중에 확인해 보겠습니다.

판넨베르크가 네가지를 설명하면서 앞의 세가지 거룩성, 단일성, 보편성 이거는 사도신경에 나오지만 사도성은 나오지 않는다고 이야기를 했잖아요. 제가 그 대목을 설명하면서 좀 혼란을 겪었어요. 이 네가지가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공회에서 나온 거지 사도신경에는 아무것도 없다 이런 식으로 제가 이야기를 얼핏 했던 것 같애요. 고거는 지금 수정합니다. 판넨베르크의 말이 맞은 거예요. 이 세 가지가 사도신경에 나오고 있습니다. 단일성, 거룩성, 보편성이예요. 자연스럽게 우리가 판넨베르크의 책으로 들어갈 수 있는데요. 이 세가지는 사도신경에 나오는데 반해서 사도성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 대목을 앞서 공부에서 마지막에 우리가 확인한 거예요. 예. 그러니까 교회의 모든 성격, 본질, 이런 것들은 다 사도적 사명하고 연계되어 있다고 하는거죠. 이 사도적 사명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시겠죠.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는 것, 단순히 교회를 확장한다고 하는 차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한다고 하는 거예요. 이러한 사도적 사명에서 이제 앞에 나와 있는 그러한 교회의 본질들, 그런 것들이 실제적인 의미를 확보하게 되고 그리고 판넨베르크가 그 부분에서 강조한 것에 따르면 세계 변화와 교회변화가 가능하다. 그 역동성이 가능하다고 하는 겁니다. 우리가 지난번 공부한 단락의 마지막 두 문장을 보면 이렇습니다.

이럴 경우 인류에 대한 기독교적 사명에서 '세계'만이 아니라 교회의 변화를 위한 일종의 역동성이 발생한다. 이처럼 교회의 정체성과 변화는 사도적 사명을 수행하는 과업과 상호 연결되어있다.

교회가 이 문제는 로마가톨릭교회와 어떤 연관성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교회가 영구적인 제도와 체제이냐? 아니면 변화가 가능한 역동적 공동체냐 하는 그러한 차이이죠. 물론 로마가톨릭교회라고 해서 이렇게 고립적이고 배타적인 그러한 자기중심적인 교회관에 무조건 묶여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만 그러나 16세기초에 마틴 루터와 종교 개혁자들에 의해서 제시된 그러한 교회의 근본적인 변화라고 하는 점에서 개신교와 크게 대립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교회론에서는 여전히 로마가톨릭교회와 개신교와는 차이가 있는거죠. 오늘 우리가 읽어가면서 본문에서 나올는지 모르겠는데요. 로마가톨릭교회는 여전히 교회가 사제중심이라고 할 수 있어요. 성직자 중심이죠. 그러나 개신교에는 만인제사장직에 근거해서 성도의 모임인거예요. 여기에는 큰 차이가 있는거죠. 성직자 중심주의와 회중중심의 그러한 특징이 있는겁니다. 그냥 하나의 특징으로서만 아니라 교회가 뭐냐라고 하는 점에서도 차이가 있는거구요. 네. 사도적인 사명이라고 하는 점에서 이 교회는 자기체제, 제도 이런 것을 역동적으로 변화시켜 나갈 수 있다고 하는 거죠. 그러한 사도적 사명을 망각하는 훼손하는 질서라고 한다면 당연히 그것은 변화, 바꿔져야 하겠죠. 이 사도적 사명이라고 하는 이 교회의 특징이 두가지의 어떤 변화, 가능성, 혹은 대상을 갖고 있는 겁니다. 하나는 세상이고 하나는 교회인거죠.

네. 조금 정리가 되었습니다. 제가 지난 번 강의를 할때는 그거를 좀더 명확히 알지 못하고 강의 준비가 좀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하다보니까 혼란이 생기는데 이제는 좀더 잘 정리가 된 것 같습니다. 그런 것이 강의준비가 소홀한 탓도 있지만 우리말 사도신경이 명확하지 않다고 하는 그런 것하고도 연결이 되네요. 제가 미리 미리 살펴보았으면 그런 착오가 없었을텐데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48강으로 넘어가게 되겠어요. 진행이 많이 되었습니다. 전체적으로 14장까지 있어요. 우리는 지금 12장의 두번째 단락을 보고 있습니다. 188쪽 새로운 패러그래프입니다. 읽겠습니다.

교회의 다층다기한 '속성', 즉 거룩성, 단일성, 카톨릭성, 사도성은 그 본질에서 이미 완성되거나 상존하는 기구의 특성들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가 그 안에서 자신의 본질을 현실화시키려고 노력해야할 선교 운동의 시금석이다.

정확한 진술이죠. 앞에서 나온 사도적 사명과 연관되는 겁니다. 이 네가지 개념은 여러분들 머리속에 넣어두세요. 거룩성, 단일성, 가톨릭성, 사도성이예요. 요 것도 좀 순서를 지켜서 아는 게 좋겠습니다. 거룩성, 세상으로부터 분리되는 거룩성, 하나님이 그렇게 구별하여 세웠다는 거룩성, 그 거룩성에 근거하여서만 온 교회가 단일성을 확보할 수 있고 교회는 교회 자체로만이 아니라 세계 전체로서의 구원이라고 하는 점에서 보편성을 갖고 있으며 그리고 개교회만이 아니라 전체교회가 교회라고 하는 차원에서 보편성이 있고 이 모든 것들은 다 사도적 사명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혹은 그 토대가 가능하다는 사도성입니다. 거룩성, 단일성, 보편성, 사도성이예요. 이런 것들은 이미 그 본질적으로 완전하게 끝난 특성이 아니라 교회가 자신의 본질을 그안에서 현실화시키기를 노력해야할 사도적 선교, 그러한 사명운동에 바로미터, 준거, 시금석이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교회가 뭐냐 라는 그러한 질문을 할때는 이 네가지 특징들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겁니다. 거룩하냐? 단일하냐? 보편적이냐 사도적이냐 이런 겁니다. 더 나가겠습니다.<!--[endif]-->

여기서 말하는 본질은 교회를 결정짓는 요소다. 오늘날 교회의 고유한 본질은 각기의 시금석을 통해서 이미 남김없이 진술되고 있는가? 더구나 교회는 이미 거룩하고, 하나이며, 유니버설하고 사도적인 사명에 따라서 자신의 운명을 적용시켜야 할 어떤 것을 전제하고 있는 게 아닐까? 이미 고대교회 시대 때 교회개념을 조명해야할 사명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요 표현이 중요하군요. 고대교회때 교회개념을 조명해야할 어떤 필요성을 느기고 있었다고 하는 말은 그러한 문제들이 아직 정확하지 않아서 중구난방 여러가지 이야기들이 많이 나왔다고 하는거죠. 교회의 정체성 문제를 다루지 않으면 안될 만큼 상황이 되었다고 하는 건데요. 그거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교회 본질이 흐려진다고 하는게 하나가 있을 수 있구요. 교회가 이제는 더 이상 이심전심으로 이해하고 넘어가는 정도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확장되었다고 하는 그러한 이유도 있겠죠. 하여튼 여러가지로 고대교회 교회 개념을 정리해야할 필요성이 있었다고 하는 겁니다.

사도신경에서는 이 의미가 '성도의 교제'라는 단어와 연결되어 있다. 이 부가어는 우선 4세기 말 쯤에 세르비아 지방에서 발견되며, 갈리아(고대 프랑스 지역, 역주)에서도 사용되었고, 결국 로마에서도 고대 세례고백과 연결되었다. 이 의미가 오늘날에는 대단히 불명확하게 되었다. 이에 대한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네 여기서부터 교회의 본질에 대한 또 하나의 설명이 시작되는 겁니다. 그거는 성도의 교제라고 하는 개념이예요. 우리말 사도신경에도 보면요. 앞서 제가 한번 읽은대로 두가지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거룩한 공회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이거를 생각하지 않고 암송하는 사람들은 오해할 수가 있겠어요.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제하는 것을 믿는다는 식으로 말이죠. 그거 아닙니다. 거룩한 공회. 딱 끊어지는거예요. 이거는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인 교회, 그거를 믿는다는 것으로 끊어지고.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 교통하는 것, 성도끼리 하는 것, 성도의 교제이죠. 우리말 성경도, 사도신경도 우리말 구조가 이런 면에서 조금 명확성이 떨어질 수 있어요. 그건 어쩔 수 없어요. 다만 번역을 정확하게 한다거나 끊고 맺는 것, 이런 부호표시를 정확하게 해서 독자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하는게 최선이겠죠. 지금 거룩한 공회에 대한 설명은 많이 한겁니다. 네가지 특징을 통해서 이야기한 거에요. 거룩성, 단일성, 보편성, 이 세가지가 사도신경에 있는데 니케아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통해서 사도성이 더 들어오게 되구요. 교회가 과연 뭐냐를 이야기할 때마다 시금석으로 작용하게 된겁니다. 이러한 교회의 본질이 더 해명되어야 될 필요가 있었다고 하는거죠. 고대교회의 그러한 필요성이 제시된 거죠. 그 흔적이 바로 성도의 교제라고 하는 겁니다. 네 그 다음 보겠습니다.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는 16세기 이래로 성도의 교제를 가리키기도 하는 성도라는 단어를 신약성서가 사용하는 언어방식에 따라서(롬 1:7, 고전 1:2, 고후 1:1, 엡 1:1, 빌 1:1, 골 1:2, 등) 주로 기독교인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따라서 성도의 교제는 기독교인의 교제를 의미했다. 그리고 교회개념은 사도신경에서 볼 수 있는 대로 역시 기독교인이 상호간 교제를 나눈다는 사실을 통해서 성격화되었다. 1530년 아우그스부르크 신조

개신교가 로마가톨릭교회와 분리되면서 자신들의 신앙의 정체성을 정리한 신조예요. 아우그스부르크, 아우그스부르크에서 모인거죠. 스위스쪽에 있나요? 이 도시가 어디에 있는지 왔다갔다 하는군요. 어쨌든 아우그스부르크에서 모인 그 중요한 회의에서 결정된 신조입니다. 1530년 아우그스부르크 신조에서는 이에 근거해서 교회개념의 기초를 결정했다. 즉 교회는 성도의 회집(congregatio sanctorum)이라고 말이다. 루터나 다른 개혁자들에게 이런 표현은 신자들의 회집(congregatio fidelium)과 동일한 의미였다. 아우그스부르크 신조의 진술을 상술한 독일어 판에서는 교회를 '신자들의 모임'(CA Ⅶ)이라고 했다. 아우그스부르크 신조에 나온 그 뒤의 항목에서도 역시 교회는 '모든 신자들과 성도들의 모임'이라고 언급되었다.

네 여기까지 이해하기에 어려운 큰 문제는 없죠? 아우그스부르크 신조에서 교회개념을 성도회집, 혹은 신자들의 회집, 신자들의 모임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하는 겁니다.

'성도의 교제'라는 어법의 근원적 의미는 물론 다른 것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신자들이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 자기들 끼리 모였다기보다는, 오히려 이미 현재 신적인 구원이 완성된 하늘에 참여해 있는 거룩한 순교자들과 교제를 나누기 위해 모였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이를 통해서 모든 기독교인들도 역시 미래에 그 구원에 참여하도록 약속되어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이 표현양식은 기독교인을 영원한 구원과 연결시켜주는 예전, 즉 '상타'(sancta)로 이해되었다. 이는 곧 고대 교회에서 행한 예배생활의 핵심인 성만찬을 염두에 두는 것이다. '성도'*이라는 단어가 순교자를 뜻하기도 하고 성례전을 뜻하기도 한다는 두 해석은 근본적으로 동일한 무게로 다루어져야 한다. '성도의 교제'라는 부가어는 교회를 기구로서 자리매김한다. 그 기구 안에서 구원을 중재하는 신적 신비에 참여하고 이미 구원 얻은 순교자들과의 교제를 획득하게 된다. 종교개혁자들이 교회를 설명하면서 표현하고 있듯이, 코무니오 상토룸(성도의 교제)에 대한 궁극적이고 인격적인 의미가 모든 기독교인에게 확장되었다는 것은 바울이 말하는 신학적 특징과 신앙고백양식과의 연결을 통해서 모든 기독교인을 '부름 받은 성도'라고 일컬음으로써 확대 재생산된 신앙 고백적 구조라 하겠다.

네 여기서 성도라고 하는 단어가 단순히 신자라는 뜻만 아니라 순교자라는 뜻도 있다고 하네요. 재미있죠? 그리고 그것은 성례전을 뜻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이게 다 중요하다고 하는 겁니다. 그 단어가 독일어로 하일리게, 라틴어로 상타죠. 거기에 대한 저의 주를 좀 보겟습니다.

독일어 Heilige는 성자라는 뜻으로도, 성도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사도신경에 진술된 '성도의 교제'라는 표현은 말 그대로 성도의 모임과 친교라는 뜻이긴 하지만 이미 구원받은 하늘의 성자들과 교제한다는 뜻도 포함하고 있다. 판넨베르크의 설명에 따르면 아우그스부르크 신조가 교회의 본질을 설명할 때 사용된 성례전 집행이라는 표현이 바로 성자의 반열에 참여한다는 고대적 표현양식을 받아들인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곧 사도신경에 대한 기독교의 신앙고백적 전승사가 심층적으로 작용한 증거들이라 할 수 있다.

네 지금 우리는 성도의 교제, 우리 말 사도신경으로는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에 대한 설명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그것이 단순하게 성도들끼리 교회에서 코이노니아를 나눈다는 것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가 확인할 수 있었어요. 이런 점에서는 신학공부가 참 중요하죠. 이런 판넨베르크의 설명을 몰랐다고 한다면 우리는 일차원적인, 표피적인 그러한 의미만 알고 사도신경을 암송하는거죠. 여기는 더 큰 의미가 들어있지 않습니까? 이거는 신자들끼리만의 교제가 이미 죽어 하나님 나라에 가있다고, 초기 기독교로부터 내려온 모든 기독교 전통이 믿고 있는 성자들, 더 나아가서 순교자들과의 영적인 교제를 표현하고 또 성만찬이라고 하는 교회의 예전을 통한 성자들과의 영적인 교제를 포함한다고 하는 거죠.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사도신경을 외우면서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그 부분에서는 늘 지금 바로 설명한 것을 기억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중요한 이야기죠. 사도신경뿐만 아니라 예배전체가 다 그 순간에 드리는 그 사람들만의 제사행위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2천년 기독교역사 전체와 연결되는 거예요. 그 안으로 우리가 들어가는 거죠. 거기에 참여하는 거죠. 하나님의 거룩한 시간안에 뛰어드는 겁니다. 신비로운 교제, 코이노니아라고 할 수 있는 거죠. 이런 것들을 알고 인식하고 그 안에 더 깊이 들어가는 사람과 전혀 그런 것이 없는 사람하고는 성만찬이나 예배나 사도신경이나 이런 것에 대한 태도가 크게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네 그 다음입니다. 190쪽 새롭게 시작하는 패러그래프예요.

예전을 실행함으로써 성자들의 반열에 참여하게 된다는 사상은 종교개혁자들의 교회이해에서도 역시 사실상 단숨에 사라지지는 않았다.

고대교회에 있었던 신앙이었는데 이러한 내용이 종교개혁자들에게서도 여전히 남아있었다고 하는 거죠. 계속하겠습니다.

아우그스부르크 신조는 교회를 성도들(혹은 신자들)의 모임이라고 성격화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나아가서 이렇게 생각했다. 요기서 부터 중요한 대목이예요. 로마가톨릭과 크게 대별되는 대목입니다. "이와 더불어 복음이 순수하게 선포되며, 거룩한 예전이 복음에 따라 충실히 실행된다." 종교개혁 정신에서 복음 설교와 예전실행을 통해 바로 "성자들의 반열에 참여하게 된다."는 고대양식이 출현했다. 즉 신자들이 구원에 참여하게 된다는 말이다. 개신교적인 교회론 신앙론 이런 것들이 특징적으로 드러나는 대목이예요. 로마가톨릭교회에서는 이런 부분에서는 차이가 있는거죠. 말씀중심의 교회, 혹은 예배 이러한 성격들을 아우구스부르크 신조에서부터 확정하게 된겁니다. 복음선포와 예전, 성찬, 거룩한 예전, 세례와 성찬식을 이야기합니다. 거룩한 예전은 두 가지예요. 로마가톨릭교회는 일곱가지라고 하는 것을 여러분들이 아실 거구요. 개신교에서는 두가지입니다. 세례와 성만찬이예요. 이게 교회의 본질인거죠. 개신교가 볼때 그런겁니다. 로마가톨릭교회하고 좀 차이가 나는 거예요. 두가지, 복음 선포와 거룩한 예전 실행입니다. 이제 이 부분이 또 만인제사장, 혹은 목사가 누구냐 하는 문제에서 연관되어 있어요. 교회가, 개신교회에서는 이 두가지 특징을 갖고 있는데 이게 목사에게 부여된 은사로 이해가 되는거죠. 그렇게 보면 개신교회가 만인제사장직을 로마가톨릭교회와 구별되게 유지하면서도 여전히 목사의 질적이라고는 할 수 없구요. 기능적인 면에서라도 어떠한 특수한 위치를 인정한다고 봐야죠. 물론 오늘에야 어떤 새로운 대안적 교회와 좀 진보적이고 대안적 신학쪽에서는 이것마저도 열어야 된다고 주장하고 있죠. 설교와 거룩한 예전도 목사만을 통해서가 아니라 일반 신자들에게까지 열어야 된다고 하는 것 같애요. 여기에도 조금씩 차이가 있기는 있습니다만 하여튼 그렇습니다.

예전적 교제의 고유한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참여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세례와 마찬가지로 성찬식을 통해서 중재된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연결된 사람은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에서 발생한 구원에 참여할 것을 희망하다. 종교개혁자들의 이해에 따르면 인간을 그리스도와 교제하게 하고 그에게서 발생한 구원과 중재하는 것은 교회의 과제다. 교회는 이에 덧붙여 설교와 예전으로 섬긴다. 이런 점에서 종교개혁은 고대교회와 일치한다. 놀랍게도 아우그스부르크 신조의 형태가 사도신경과 다른 점이 있다면 오직 설교가 예전과 더불어, 혹은 그에 앞서 명쾌하게 거론된다는 것뿐이다. 여기서 분명한 바는 종교개혁교회가 특별한 방식으로 말씀의 교회로서 이해된다는 점이다.

네 여기서도 우리가 중요한 부분을 공부한 겁니다. 개신교의 신앙도 결국 고대교회의 전통을 그대로 가지고 온다고 하는거죠. 교회가 하는 이 일이 사람들을 그리스도와 교제하게 하고 구원받게 하는 그러한 일이니까요. 다만 개신교회 교회관에서 차이가 있다면 말씀 선포, 이것을 강조하는 거죠. 말씀의 교회라는 그러한 특징을 갖는거죠. 정리가 되었죠? 그다음.

다른 한편 고대교회의 신조에서 주목될만한 것은 오직 예전만 언급하고 있는 대목이라 하더라도 예전의 개념이 그 당시와 중세기까지 그리고 오늘보다 훨씬 확대된 의미로 다루어졌다는 것이다. 이 경우에 분명한 교회 의식(儀式)만이 핵심적으로 여기서 의식은 예전의 형식을 의미합니다. 작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高중세기까지 신앙의 전체 내용이 예전의 개념, 즉 '신적인 신비'로 요약될 수 있었다. 12세기에 후고 폰 생 빅토르는 파리에서 <기독교 신앙의 신비에 대해서>(De sacramentis christianae fidei)라는 제목으로 교의학을 출판했다. 이 책에서 교회법은 구원사적 신비의 연관으로 표현되었다. 하나님은 이 구원사적 신비를 통해서 인류의 구원을 이루신다. 성도의 교제라는 것은 신적 구원신비와 교제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류에게 가능한 일이 되었으며, 그것의 고유한 의미가 그와의 친교를, 그리고 그를 통한 하나님과의 친교를 가능하게 했다.

네 좀 까다로운 내용들이 여기서 반복되어서 나오죠. 아우구스부르크 신조에서 말하는 교회가 뭐냐는 것에 대한 정의들과 연관해서 설명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기도 제가 보충해서 설명하지는 않겠어요. 필요하기도 하기는 한데 그래도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느정도 짚었다고 보니까요. 지금 우리가 무엇을 따라가고 있는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앞에서 교회의 네가지 특징들을 설명했습니다. 그런 것으로 사도신경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교회의 개념을 더 보충해야될 필요성이 있었던 거예요. 거기서 나온 것이 바로 성도의 교제,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 그 이야기였습니다. 그 성도의 교제. 이것이 사도신경에 있으면서 꾸준하게 교회안에서 중요한 교회를 이해하는 개념으로 자리를 잡았거든요. 개신교에서도 여전히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고 하는 겁니다. 아우구스부르크 신조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다른 것들은 비슷한데 좀 구별된다고 한다면 복음선포와 거룩한 예전 실행 이런 건데요. 이안에 이미 그러한 성도의 교제라고 하는 개념이 다 들어있다고 하는 겁니다.

여기서 말하는 성도의 교제라고 하는 것이 코이노니아가 아니라 이미 죽어서 하나님 나라에 가 있는 순교자들, 성자들, 그들과의 교제까지에 이르는 전반적인 그러한 교제를 이야기하는 거거든요. 그러한 개신교의 교회론적인 특징을 말하는 아우구스부르크신조도 결국 고대교회의 그러한 특징들을 그대로 담고 있다는 겁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말씀의 교회에 대한 강조이거든요. 이거는 당연히 개신교회가 하나의 의식으로서의 교회보다도 말씀을 증거한다는 특징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하고요. 저는 그것이 오히려 앞서 판넨베르크가 지적을 했다시피 교회의 특징들도 결국은 사도적 사명에서만 의미와 토대를 갖는다고 하는 점에서 볼 때도 잘된 결정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사도적 사명에서 굉장히 사명에서도 굉장히 중요한 요소였잖아요. 그것이 교회 본질안으로 들어왔다고 하는 것은 굉장히 잘한거죠. 네 어쨌든지 간에 여기서 그러한 특징을 가지면서도 개신교회가 사도신경의 전통들, 이것은 고대교회의 신조라고 할 수 있는데 그대로 이어받았다고 하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고 하는 점, 이게 중요한 겁니다. 성도의 교제라고 하는 것이 결국은 거룩한 예전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교제까지 하게 되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친교까지 가능하게 하는 그러한 영적인 시각을 포함하는 거죠. 중요한 이야기죠. 그렇습니다. 네 조금만 더 보겠습니다. 성도의 교제를 좀더 설명하는 부분이예요. 제가 갖고 있는 책 191쪽 중간 패러그래프입니다.

'성도의 교제'라는 표현에 대해 우리가 지금까지 전개한 논의는 교회를 우선적으로 그리스도와의 교제로서, 즉 선교와 교회의 일을 통해서 중재되는 그리스도와의 교제로서 이해하게한다. 이러한 교회의 일은 개개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보장한다. 우리가 이런 점에서 교회 공동체에 속해 있는 것은, 즉 교회 공동체의 멤버로서 한 지체가 된다는 것은 소중한 거예요.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교제에 확실하게 들어가게 되는 거죠. 아 무슨 말이냐? 구체적인 교회아니라고 하더라도 혼자라고 하더라도 얼마든지 사도적인 일을 할 수 있고 그러한 예수님과 영적으로 하나가 될 수 있다. 그렇게 주장할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혼자서 성만찬하나요? 혼자서 자기에게 셰를 주나요? 예를 들자면 교회가 행하는 세례와 성만찬, 말씀 선포 이런 것들은 단순히 형식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일치까지 나간다고 하는 놀라운 신학적 영성이 있는 거예요. 이런 것들은 당연히 구체적인 교회 공동체안에서 가능한 거죠. 네 그 다음이요.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하게 하는, 그리고 그를 통해서 성취된 구원에 참여하게 하는 중재자라는 일반적인 이해는 종교개혁자들이 교회를 신자들의 모임이라고 한 특징과 연결된다. 이러한 특징은 특별히 프로테스탄트적이라 할 수 있다. 교회를 구성하는 것은 다른 그 무엇 보다 주교들과 교직자들을 중심으로 한 교권주의가 아니라, 모든 신자의 모임이라는 명제가 근본 의미이기 때문이다. 신자들의 만인제사장직은 그 토대다. 물론 교권에 대한 루터의 이해에 따르면, 즉 하나님에 의해 정초된 설교권이라는 이해에 따르면 사도시대 이후로 있어왔던 것처럼 신자들의 공동체를 회집할 필요가 있다(CA Ⅴ). 이를 통해서 신앙이 발현된다. 교회행정은 그리스도와의 친교를 중재하는 데 필요하다. 그리고 그리스도와의 친교를 통해서 신자들은 다시 한 번 상호간 친교적 관계를 이루게 된다. 그리스도와의 친교와 신자들 상호간의 친교는 불가분리의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

네. 성도의 교제가 갖는 신학적 의미를 설명한 대목입니다. 중간에 있는 것은 좀 놓쳐도 되요. 결론적으로 마지막에 읽은 대목 그것만 기억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성도의 교제라고 할때 단순히 친목모임, 신자들끼리의 코이노니아가 아니라 확장된 의미라고 하는 겁니다. 그리고 말이 나온 김에 한 마디해야 되겠군요. 이거 단순한 친교가 아니라고 하는거예요. 같이 놀러가고 대화하고 경조사 챙기고 무의미한 것은 아니지만 그런 차원이 아닙니다. 참된 친교라고하는 것은 성만찬을 통해서 주어지는 거니까요. 그리스도와의 일치, 여기에 우리가 다 각기 참여함으로서 결국은 신자끼리의 일치도 가능하게 되는 거거든요. 네 그런 차원을 늘 놓치지 말아야 되는 겁니다. 그리스도와의 친교와 신자들 상호간의 친교는 서로 불가불리의 관계로 연결 되어있다. 성만찬적인 공동체안에서 우리는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네 이 패러그래프에서 강조되는 부분은요. 성도의 교제라고 할때 개신교입장에서 볼때 신자들의 모임, 모임이라고 해서 다시 반복하지만 무조건 친목모임이라는 뜻이 압니다. 모임, 에클레시야. 콩그레가치오. 그런 뜻입니다. 그 모임, 신자들의 모임입니다. 이게 로마가톨릭교회는 달리 주교, 교직자와 같은 성직자 중심의 그러한 차원이 아니라 모든 신자들이예요. 그러니까 교회의 본질이라고 하는 점에서는 목사를 비롯해서 모든 사람들이 다 신자일 뿐입니다. 만인제사장직인거죠. 그러한 신자들이 모임이 교회인거죠. 성도의 교제라고 하는 겁니다.

네 오늘 우리는 중요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그 중요한 이야기가 사도신경에 단 두마디에 들어있는거예요.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요거에요. 요거에 대한 설명이었습니다.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이 두마디에 얼마나 많은 기독교 역사가 들어 있는 지 모르겠습니다. 많은 신조들이 그것을 이야기했구요. 그리고 로마가톨릭교회하고 개신교의 차이도 여기서 찾아볼 수 있구요. 이거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교회가 뭐냐라고 하는 그러한 질문에서 논의되어야 될 그러한 문제입니다.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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