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제 쇼트로프

 

성서의 주인공은 평범한 남자다

성서연구, 레25:1-13

 

땅은 하나님께 속했다

<땅은 아주 팔아 넘기는 것이 아니다. 땅은 내것이요, 너희는 나에게 몸붙여 사는 식객에 불과하다.>(레25:23). 히브리 성서의 소위 성결법은 이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기록된 그대로 다음과 같은 걸 의미했습니다: 땅은 팔고 사는 대상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농민들은 나그네와 식객 처럼 그 땅에 붙어 삽니다. 그 땅은 그들에게 개인 소유로서가 아니라 그저 사용하라고 양도된 것 뿐입니다. 우리의 권리라는 면에서 인간은 개인 소유권을 가질 수 없습니다. 땅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에 매 7년 마다 안식년이 실행되어야 합니다. 이는 가을에 밭을 갈거나 씨를뿌리지 못하며 포도원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고, 가을에 수확을 거두어 들이지 못한다는 걸 뜻합니다. 지난 추수 때 밭에 떨어진 씨앗에서 보리와 밀 그리고 그 사이에 풀과 꽃이 자랍니다. 그 땅은 일년 내도록 휴식을 취합니다. <제 칠년 째에 그 땅으로 완전히 쉬게하라. 주님을 위한 안식이다.>(레25:4).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안식년에 야생으로 자라는 것을 먹고 삽니다(레25:6). 혹은 6년 째 배로 수확된 것을 먹고 삽니다(레25:20,21). 히브리 성서의 오랜 율법에서 이 안식년에 대해 설명하고 있듯이 가난한 사람들은 안식년의 소득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남는 것을 들짐승이 먹게 하라.>(출23:10-11).

<하나님을 위한 안식>, 땅의 휴식은 결코 방해받아서는 안됩니다. 땅은 거룩하며, 따라서 수단으로 전락되면 안됩니다. 땅은 모든 이들 앞에서 분명히 하나님의 소유가 됩니다. 모든 이들의 어린 시절에는 최소한 한번 쯤 씨뿌리고 거두는 생명의 리듬에 이르는 이런 깊은 단계가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 저의 눈에 안식년이 어떻게 비쳤을른지를 이제 상상해 보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저와 같은 세대의 많은 이들이 그런 것 처럼 저도 시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입니다. 제가 살던 그 마을의 토지는 아주 적은 부분이 대다수의 가난한 농부들의 것이었으며, 큰 부분이 한 사람에 의해 독점된 국유지였는데, 그 사람은 그 마을에서 국가사회주의를 포악스럽게 설립한 자였습니다. 그가 살고 있던 성(城)의 거실에는 많은 페르시아 양탄자가 즐비하게 깔려 있었습니다. 그가 독점하고 있던 국유지에는 안식년 제도가 실시되지 않았을테지만, 농부들은 땅과의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안식년이 저들의 전통이었다면 이를 위한 어떤 구체적 실천목표를 만들었들지 모릅니다. 농부들은 4,5 에이커에 이르는 땅의 주인행세를 하지 않고 그 땅의 한 부분으로 그것에 속했습니다. 감자밭 위에 가을 해가 떠오르게 되면 그 감자밭에 뜨거운 열기가 솟아오르게 되고, 부인들이 밭고랑에 엎드려 감자를 캐냈습니다. 그 여인들의 손은 마치 주름잡힌 삽 처럼 보였습니다. 평생 그들은 그 손으로 땅에서 일했습니다: 즉 땅의 한 부분으로 살았다는 말입니다. 안식년은 옛 이스라엘의 경우에 현실적인 제도였습니다. 땅 위에서 일하며 살아가는 모든 농사꾼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땅을 빌리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을 때 그 땅은 손상되기 때문입니다. 땅은 살아있는 존재로서 숨을 쉬고 증기를 내뿜고 휴식을 필요로 합니다: 땅은 하나님께 속했습니다. 다만 인간에게 빌려주었을 뿐입니다.

우리 시대에 눈부신 산업화를 통해 일대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그건 모든 인간의 삶이 몰락해 가는 혁명으로서의 변화라 해야 좋을 것 같습니다. 그건 바로 인간의 터전이 비참하게 발전해 가는, 일종의 몰락해 가는 삶의 변화입니다. 땅은 더 이상 하나님께 속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직 소수의 농부들만이 땅과의 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뿐이고, 대개는 거의 파산지경에 빠졌습니다.

땅은 이제 건축업자, 부동산업자, 지방정부, 가옥 소유자 -크고 작건간에-, 공장, 조합, 군대, 점차 증가하고 있는 미군 그리고 -잊혀지지 말아야 할 부분인데- 교회에 속합니다. 아직 농부들이 우리 주변에 있긴 합니다만 그들은 곡물생산을 위해 농업산업의 기업가로서 일하도록 강요받고 있습니다. 이 땅은 인간에 의해 잠식당하고 있습니다: 비대해져 가는 도시, 공단지역과 포장도로, 비행장, 군사시설, 쓰레기 하적장으로 말입니다. 점점 강력해져 가는 불도져와 크레인이 땅 위에 군림하고 있습니다. 이 땅은 더 이상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들이 관심을 갖는 건 평당 단위로 값을 매기고 콘크리트로 건축하는 일입니다. 아마 우리의 땅 위에 살고 있는 어떤 사람들은 산업적인 영향을 적게 받으며 살고, 또한 농업적으로 자급자족하며 살아갈지 모릅니다만, 그런 시간은 이미 지나가 버렸습니다. 저는 토요일마다 자주 우리 정원의 땅을 파곤합니다만, 그건 사실 정확히 말해서 순박한 향수병에 불과합니다. 저의 아들은 오스트리아에서 휴가를 보내면서 그곳에 있는 농촌의 농업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열심히 읽은 <땅은 주님의 것>이라든지, 혹은 보다 정확히 말해서 <땅은 하나님께 속했다>는 성경말씀은 무엇을 뜻하는 겁니까? 이런 명제는 별볼 일 없거나 이미 끝장나 버린 게 아닌가요? 우리가 이런 말씀을 성경에서 함께 읽어야만 하는 간단한 이유가 있습니다. 다름 아니라 우리 인간이 흙에서 나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첫 인간인 아담을 흙에서 만들었다는 사실에 마음을 쏟게 되면, 우리가 다시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것은 피치못한 사실입니다. 우리는 장례식 때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라고 말합니다(창3:19).

우리의 육체는 흙으로 빚어졌습니다. 하나님의 흙으로 지음받은 잠시 지나가는 빌린 몸입니다.우리가 죽는 존재이며 허무하게 지나간다는 것은 매우 잘된 일입니다. 우리 자신 하나님으로 부터, 하나님의 흙으로 부터 빌린 몸이라는 것을 아는 것은 자주 간과되곤 했습니다. 죽음이 우리 모두에게 매 순간 가까이 있다는 것을 누가 생각하려고 하겠습니까! 죽음 앞에서 인간은 두려워 합니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 여기서 정말 나에게 분명한 것은 내 앞에 놓여 있는 죽음을 생각할 때 이 땅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리고 살아있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는 점입니다. 유럽의 역사를 보면, 특히 16,17세기에 종교적 문화가 꽃피웠는데, 그것은 모든 인간이 분명히 확고부동하게 죽음을 기억하게 하려는 작업이었습니다. 당신은 죽어야 한다<memento mori>라는 말을 옷장이나 숟가락에 적어넣었습니다. <살아있는 우리 모두는 죽음에 휩싸여 있다>라는 말로 시작하는 노랫말의 고대 찬송가가 있습니다.(Ev. Kirchengesangbuch Nr.309). 죽음을 준비하며 살아가는 삶은 그만한 가치가 부가됩니다.

우리 사회 속에서 우리 모든 이들이 갖게 되는 삶의 인식은 전혀 다르게 조직되어 있으며, 우리는 더 이상 memento mori 밑에서 살지 않고, 대신 죽음에 대항하며 살아갑니다. 이런 현상을 확인할 수 있는 하나의 행태는 경쟁입니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스스로 젊고, 패기 있고, 사치한, 그리고 아름답고, 건강하며, 성공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느끼는 사람만이 필요한 대담성을 갖게 됩니다. 그런 이들에게서 죽음은 추방됩니다. 어느 누가 -제가 알고 있는 세 여자 친구 중의 하나 처럼- 암수술을 받은 다음에 다시 일터로 나갈 때, 이런 것들이 명백해 집니다. 그녀가 동려들과 사장의 악랄성을 다시 경험했을 때, 즉 그들은 마치 죽지 않을 것 처럼 살아가고 있다는 걸 보고 제 친구 중의 하나는 신기하다고 말했습니다. 힘을 행사하고 억압하는 행위를 볼 때 우리는 즉각적으로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흡사 우리가 흙에서 와서 깨지기 쉬운데도 불구하고 죽지 않을 육체를 갖고 있기나 한 것 같이 말입니다. 저는 이런 공동체성의 경험에서 제 친구 처럼 생각했습니다: 나만이 아니라 그들도 죽어야 한다는 건 좋은 것이라고 말입니다. 하루를 끝내면서 이게 나의 마지막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간혹 합니다. 내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인간들은 정말 값진 존재들입니다. <일반적>으로 저는 제 일상생활을 일끌어가고 있는 정돈되지 않은 침대와 널려 있는 양말, 그리고 그와 비슷한 시시한 것들을 봅니다. 만약 제가 죽는다면 그리고 죽을 때 그래도 기억할 수 있다면, 저는 분명히 산맥의 풀밭과 같은 아름다운 것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백리향, 라벤델(향료), 햇살을 생각하겠죠. 우리의 육체가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입니다. 그리고 흙이 하나님께 속했다는 사실도 놀랍습니다. 이 땅은 하나님으로 부터 빌린 것이며, 따라서 우리의 몸도 역시 하나님에게서 빌린 것입니다. 우리는 이 빌린 땅을 우리 후손에게, 우리의 아이들에게 물려주게 됩니다.

우리 세대는 이 땅에서 무엇을 만들어냈을까요! 오늘 이런 말을 하고 있는 우리 전체 세대는 우리 후손들에게 오직 말라비틀어진 땅을 물려줄 수 밖에 없습니다. 제가 생전 처음으로 중앙난방식 주택을 갖게 되었을 때 얼마나 놀라운 일들이 벌어졌는지 지금도 생각해 보면 그 놀라움은 대단했습니다. 작은 단추만 하나 누르면 더 이상 기름난로 때문에, 냄새나는 기름통 때문에 수고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 이전 까지 기름 한방울만 떨어져도 그 냄새가 지독하게 나빴습니다. 2차 세계대전 전후에는 나무와 조개탄을 사용했습니다. 가족 전체를 위해 방 하나만 난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경제와 산업의 ‘발전’이 우리 모든 세대들에게 찾아왔습니다. 몇년 전 제가 식기세척기를 사용한다고 저의 늙은 어머니가 잔소리를 하셨을 때 어머니도 이젠 늙었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만, 이제야 저는 어머니가 훨씬 지혜로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저와 저의 세대는 승리감에 도취되어 소위 개발과 발전이란 집을 땅 위에 세웠습니다. 세척기, 중앙난방, 화학산업, 군수산업, 소비성생산 등등, 저는 더 이상 이런 것들을 나열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세대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발전을 지켜내려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즉 우리는 그것을 당연한 사회적 시장경제라고 일컬었습니다. 자본주의라고 말하는 것은 금지되어 왔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소위 발전이라는 것에 댓가를 지불해야만 했습니다: 즉 조직화된 증오인 반공주의로 말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증오 없이는 발전이 가동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땅은 하나님께 속했습니다. 우리의 육체는 땅에서 왔습니다. 그런데 우리 시대는 우리의 후손들에게 말라비틀어진 땅과 조직화된 증오를 -이것은 참으로 기정사실인데- 물려줄 뿐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그렇게 열심히 읽는게 모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땅은 하나님께 속했다.>는 구절은 이미 우리와 상관 없는 말씀이 돼버렸는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이런 땅의 파괴에 직면해서 우리의 자녀들을 위해 무언가 변화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읽는 첫째 이유는 우리의 몸이 흙에서 왔다는 것이며, 둘째 이유는 우리의 몸이 하나님에게서 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안식을 땅이 실행해야하며, 또한 하나님을 향한 안식을 인간들이 실행해야합니다. 하나님이 인간과 어떻게 교제하시는지 우리가 유의해서 본다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성경에서 최선으로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 땅은 하나님께 속했고, 인간도 역시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속해 있다

땅은 하나님께 속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위한 안식을 실시해야만 합니다. 인간 역시 하나님의 소유물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위한 안식을 부여받고 있습니다. 일곱 째 날에 안식해야만 합니다(출20:8-11). 다른 육일 동안 아침 부터 저녁 까지 온 종일 계속되는 노동으로 부터의 휴식과 해방이 있어야 합니다. 일곱 번 째 해는, 인간을 위해서도 역시, 안식년이 되어야 합니다(출21:2-11, 신15:1-18). 노예상태가 끝장 나야 합니다. 소농들에겐 소작료나 세금으로 인한 채무가 늘어갔으며, 지주들은 자신들에게 유익하도록 거래했습니다. 결과는 소농들의 몰락일 뿐이었습니다: 불어나는 이자, 경작을 위해 필요한 대부금, 가족들이 최소한 먹고 살기 위해 빌려온 대출금 등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자기 땅을 잃어버리고, 종이 되고, 아이들이 팔리게 됩니다. 어린 딸들은 성의 도구로서 매매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안식이 이루어지는 모든 칠년 째되는 해는 역시 인간을 위한 안식이기도 했습니다: 즉 대부금은 면제되고 종들은 자유롭게 풀려나야 합니다. 모든 이들이 자기 가족과 함께 다시 한번 자기가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어느 누구도 종이 되면 안되기 때문에 모든 부채가 청산되어야 하고 누구에게 종속되는 일이 끝장나야 합니다.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난 다음 다가오는 희년(Jobeljahr)에 대해 레위기25:8-13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50년만이 다가오는 한 세대의 안식입니다. 이 때는 희년이라 불리우는데, 이는 루터가 나팔소리 울리는 해라고 번역한 것 처럼, 큰 소리로 외쳐 소식을 전하던 수양의 뿔이 환호성(Jobel)을 뜻했다는 데 연유합니다. 희년에 땅과 인간을 위한 안식이 동시에 이루어집니다. 땅과 그 터전은 원래 주인에게 돌아가야합니다. 희년법은 안식년법의 후기 변형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모든 사회법은 기본적으로 동일한 사고방식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즉 인간이 인간에 의해 노예화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다는 생각말입니다. 노예화의 도구는 대출입니다. 하나님을 위한 안식은, 부채는 상환되어야 하고 종들과 다른 종속된 것들도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걸 뜻합니다. 모든 칠년 째의 해나 오십년 째의 해에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이 법은 결코 한낱 종이 쪼가리(당시에는 물론 종이가 없었지만), 혹은 정의로운 세계를 위한 이상이나 꿈만이 아니었습니다. 이 법들은 악조건 가운데서도 역시 계속적으로 현실화 되었습니다: 성서는 신약에 이르기 까지 이 사실들의 실현에 대한 보도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제가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는 유대-기독교적 전통의 후계자로서 기독교적으로 확고부동하게 조직화된 구조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키워가고 있는 이런 전통의 후계자로서 무엇을 발견하고 있나요? 우선 안식일이 중요합니다. 일곱 번 째 날에 대한 보고입니다. 기독교의 주일은 일종의 후속적인 조치입니다. 모든 노동자들에게 일요일은 일주일 중 휴식을 취하는 날로 분명하게 자리잡았습니다. 그러나 이 휴식은 해방의 의미가 사라진 것에 불과할 때가 많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한 가족 끼리 이날 처럼 많이 다투는 날도 없을 겁니다. 노동하는 날들의 스트레스가 공허와 실망과 목표없는 분노를 남긴다는 사실을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노동현장의 수치감과 임원들의 불손함이 일요일을 망쳐 놓습니다. 다음과 같은 귀신이 등장하게 됩니다: 내 자식이 학교를 잘 마칠 수 있게 되며, 일자리를 발견하게 될까? 그는 머리 속에 그저 마약 같은 것만 생각하게 되는 그런 방탕한 젊은 놈들의 패거리집단을 결국 벗어나게 될까? 이런 걱정을 하면서 아버지는 그 아들에게 호통을 칩니다: 생각해 봐라, 나는 아무 것도 물려받는 게 없어. 아무런 짐도 지지 않으려하는 놈은 개와 같은거다. 이처럼 일요일은 귀신의 연습장이 되고 맙니다.

인간을 위한 안식년이라구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한번 쯤은 이런 상상을 해봐도 될 것 같습니다: 독일 재무장관이 소위 제 삼세계의 가난한 나라들에게 이자를 면제해 주도록, 즉 부채를 탕감해 주도록 제안했다고 말입니다. 오늘 이런 부채란 세계적 기준에서 볼 때 차관에 의해 작동합니다. 부채를 진 정부는 이를 갚기 위해 차관을 더 얻어다 쓰게 되는데, 이 돈은 저들의 권력과 사치품을 보충하는데 사용되는 자본주의 은행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결국 어느 시점에 이르게 되면 이 부채가 많아져서 전체 국민들을 파산시키고 정부를 몰락시킵니다. 아마 이들 중의 한 사람은 스위스 발리스주의 별장에 앉아서 쮜리히 은행통장을 만지작거리고 있으며, 다른 한 사람은 뉴욕 센트랄 파크 주변의 멋진 아파트에서 현대 예술품을 수집하고 있을 게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 국민들은 빚을 갚을 길이 없습니다. 땅과 터전을 잃는 일 역시 오늘날 분명한 표준에 이르는 길입니다. 모든 가난한 나라에서 농업 상품들이 과대한 소비적 경향의 부유한 나라에 수출되기 위해 생산되고 있습니다: 예컨대 커피, 바나나, 딸기, 꽃 등이 그렇습니다. 이런 가난한 나라의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는 동안에도 도시에서는 사치품들이 판을 칩니다. 이런 현실들이 역시 위선적인 정당성논리로 무장되기도 합니다: 이 가난한 나라 백성들이 도시의 환락을 통해 풍요를 조금이라도 맛볼 수 있다고 말입니다. 사실상 이런 데서 발생하는 이윤은 그 백성들에게 돌아가는게 아니라 그것을 소유하고 있는 외국의 다국적 대기업에게 돌아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하나님을 위한 안식, 모든 칠년 마다 혹은 오십년 만의 안식을 이렇게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재무장관이 가난한 나라의 부채를 탕감해 주자는 제안을 했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사실상 <우리 정부의 방침에 따라 권위주의적인 정치를 그저 답습하거나 앞서 가는 것으로 잘못 이해되지 말아야만 하는>(Frankfurter Rundschau, 1983년9월28일자) 우리의 정부는 아주 엄격한 이자조건을 고집하려고 합니다. 거의 매일같이 신문에서 이런 비슷한 조치들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 정부는 가난한 나라 백성들에게 등을 돌리고 있습니다. 소위 제 삼세계를 위한 안식년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성서에 터하고 있는 우리의 많은 자본주의적 국가들은 안식일에 담겨있는 아주 작은 숨결을 현실화 시키는 일에도 인색하기만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속했다는 사실에 대해 이기적이고 위선적인 태도를 보이는 기독교 사회는 이 세상에서 아무 것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저는 어느 날 요르단 페트라의 어느 폐허지역을 여행하면서 아콰바(Aqaba) 항구에서 큰 수치심을 느끼게 된 적이 있습니다. 그곳엔 사막전투를 위해 이라크의 군수물자가 화물선에서 무지하게 큰 화물운송트럭에 실리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 무기들은 그런 무기수출의 간접적인 덕분으로나마 제가 살아가고 있는 독일에서 생산해낸 것이었습니다. 4차선 도로 위로 화물트럭의 거대한 바귀들이 위협적으로 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누더기를 걸쳐 입은 깡마르고 작게 생긴 부인이 도로의 중앙선 위에 한 시간 여 쪼구리고 앉아 있었습니다. 저녁 때 까지 그녀는 그곳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녀는 자기가 손수 만든 체를 손에 들고 도로에 떨어져 있는 옥수수를 걸러내고 있었습니다. 곡물수송차가 지나가면서 화물칸의 틈새로 어쩌다가 약간의 옥수수 알이 떨어지는 걸 건져보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부인, 화물트럭, 그리고 필자: 세 세계, 분명히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제가 우리의 군수산업의 이득으로 살아가며 동시에 그녀에게는 매우 위협적이어서 나를 도와달라고 자주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으면 삶에대한 흥미를 잃어버리게 되는 그런 하나의 땅(eine Erde)이기 때문에 하나의 세계(eine Welt)입니다.

안식일, 안식년, 희년 - 이것은 정의로움에 대한 이스라엘의 투쟁과 고대 이스라엘의 율법수여에 담겨있는 포괄적인 핵심내용입니다. 모든 성서전통은 -신약성서나 히브리성서 모두- 인간에 의한 인간의 노예화에 대해 같은 음조로 말하고 있습니다: 즉 노예화는 하나님 앞에서 불의라고 말입니다. 율법, 예언자들, 예수와 바울에게 있어서 연속적인 핵심사상(roter Faden)이 있습니다: 인간의 현실성은 <높은 이들에서 부터>가 아니라 평범한 남자의 전망에서 -이 평범한 남자의 평범한 여자는 여기서 배경으로만 남아 있는데- 취급되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저는 이 점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율법과 예언자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 이 평범한 남자는 월급쟁이와 소농입니다. 그들은 그 사회에서 가장 약한 이들이며 우선적으로 노예화되고 끝장나며, 고향과 가족을 잃게 됩니다. 부농들이 노임을 착취하므로써 쥐꼬리만한 일당을 받고 살아가는 피고용인이 성경, 곧 신구약 전체 성경의 주인공입니다.

<너희 동족 가운데 누가 옹색하게 되어, 너희에게 의탁해야 할 신세가 되거든, 너희는 그를 몸붙여 사는 식객 처럼 불들어 주고 함께 데리고 살아라. 너희는 그에게서 세나 이자를 받지 못한다. 너희는 하느님 두려운 줄 알아 그런 동족을 함께 데리고 살아야 한다. 너희는 그에게 이잣 돈도 놓지 못하고, 그에게 양식을 장리로 꾸어 주지도 못한다. 나 야훼가 너희를 에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너희 하느님이다. 나는 너희에게 가나안 땅을 주어 너희의 하느님이 되리라.>고 성결법전이 오늘 우리가 다루고 있는 문제를 언급하고 있습니다(레25:35-38).

인간은 하나님께 속했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구원은 가난한 농부들과 아퀴바의 깡마른 작은 부인에게서, 예수가 축복한 가난한 이들에게서, 또한 예수 안에서 구원을 발견한 고린도의 항구잡역부들에게서 결정됩니다.

성서 전체를 흐르고 있는 이런 핵심사상은 멕시코의 푸에블라(Puebla)에서 1979년에 개최된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 이후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선택권>(Option für die Armen)이라고 일컬어져 왔습니다. 이런 명제는 자비, 혹은 <사랑의 실천>이라는 기독교 전통을 그 이상의 것으로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즉 모든 이들을 위해서 정의로움을 실현한다는 건 오직 낮은 자들로 부터 시작될 때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 세계의 구원은 수난받는 이들에게서 결정됩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선택권은 우리 처럼 부유한 이들의 회심을 의미합니다. 성전전통에 머무르려는 기독교인이라면 최소한 한가지 구체적인 점에서나마 분명하고, 일방적이고, 편파적이어야(eindeutig, einseitig, parteilich) 합니다. 우리 모두가 모든 불의에 대해 상세하게 인식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중에 한 가지만이라도 알고 투쟁하게 된다면, 이것 역시 세계적인 불의에 대항하는 하나의 싸움입니다. 남아프리카 정부가 종족분리정책을 포기하지 않는한 그 정부에 대해 경제적 압력을 가하라고 어느 한 여자가 독일은행의 주주총회에서 요구한다면, 이것이 바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선택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녀는 항상 매우 기분 나쁜 갈등에 빠져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이 편파적인 선택권은 바티칸과 교황에 의해 거부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가난한 이들을 위한 선택권이 사회정의에 대한 추상적 요청보다 훨씬 일방적이기 때문에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신학을 반대하고 있습니다. 정부와 기업가들에게 일반적인 요청을 하게 되면 대개는 심정적으로 수긍하게 됩니다. 물론 모두가 연대를 맺는 사회에 대해서도 찬성합니다. 모든 각자는 사회적인 정의와 평화를 위한 동등한 권리를 갖고 있다고 아주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이런 선택과 하층민들로 시작되는 관점이 기독교 신앙에서 다루어지게 되면 곧 거기에는 갈등이 생깁니다: 이런 발상은 막시스트적인 것이라고 매도됩니다. 이러한 비판으로 바티칸은 성서를 해방신학으로 부터 떼어내려고 합니다. 해방신학은 막시스트적이라서 성서를 잘못 해석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누구나 성서를 소박하게 읽으므로써 이 막시즘이 벌써 2천년 내지 4천년 이상 오래된 것이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저는 한나의 노래(삼상2:1-10)와 마리아의 노래(눅1:46-55)를 기억합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예수의 복음과, 또한 또한 히브리 성서가 저들의 백성과 함께 한 하나님의 역사를 다룬다는 점에서 볼 때, 바티칸 교회의 공식대표가 가난한 이들을 위한 편파적인 선택권에 반대하고 해방신학을 거부한다는 것은 일종의 신학적 스캔달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회심해야합니다. 교황이 라틴아메리카에 가서 해방신학을 반대하는 강론과 연설을 했는데, 도대체 어디에서 그런 에너지가 나오는지 묻고 싶습니다. 성서적 전통에서는 아닐 것입니다. 교황이 종교와 정치를 분리하려고 하고, 믿음과 가난한 이들을 위한 선택권의 현실화를 이원화시키려 한다면 많은 이단자를 만들게 될 것입니다. 해방신학은 성서적 신학입니다. 따라서 해방신학에 대한 투쟁은 역시 성서를 반대하는 것과 같습니다.

저는 개신교도로서 교회의 필수적 갱신이 카톨릭의 어떤 특별한 문제인 것 처럼 생각하는 그런 잘못된 고정관점을 갖고 싶지는 않습니다. 우리 개신교회도 똑같은 문제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도 똑같은 논평으로 해방신학을 반대합니다. 카톨릭에서는 그래도 해방신학에 대해 항상 분명하게 적극적으로 변호하고 있는 미국과 카나다의 주교들이 있습니다. 이런 정도의 분명한 언급을 우리 개신교회에서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선택권이란 경제적인 남-북-갈등에 대한 기독교적인 관점만은 아닙니다. 자본주의 국가들의 미래를 생각해 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유한 나라의 미래에 대한 미국과 카나다 카톨릭 주교의 분석에 따르면 이런 나라에서도 역시 국민들의 바닥공동체가 가난해진다는 것입니다. 멀지 않은 시일 안에 부유한 나라 국민의 삼분의 일에 달하는 숫자가 별볼 일 없는 일을 하게되며 따라서 가난해지리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습니다.

오늘은 아직 삼분의 일의 수준에 달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전혀 실업수당이나 정부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공식적으로는 드러나지 않은 장기실업자의 숫자가 늘어나는 속도가 이를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 성경공부에 참여한 모든 이들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빈민층의 숫자는 늘어나고 있으며, 그리고 얼마 후면 사라져버리게 될 장기실업자를 위한 임시조치가 아직은 유효하다는 점을 말입니다. 기독교인들에게 가난한 이들을 위한 선택권은 비록 부유한 나라에 살고 있어도 여전히 분명한 과업입니다.

 

수난자를 위한 변호

부모의 이혼으로 인해 생존조건을 잃어버린 이 어린 소녀는 마약으로 자신을 학대하면서, 시간당 7DM을 받고 이따금 남의 정원을 돌봐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녀는 아무런 전망도 없이 가난하게 살아갑니다. 이런 경우는 어쩌다가 생기는 게 아닙니다. 이런 저런 비슷한 경우에서 우리는 인간쓰레기, 이 사회에서 고철덩어리로 밖에 다루어지지 않는 인간을 생산해냅니다. 그들의 잘못은 그들 자신에게 있다고 우리가 그렇게 말할 수 는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기회를 갖고 있는데, 그들이 그 기회를 살리지 못했다는 말을 저는 듣습니다. 우리 모든 남녀 기독교인들은 이런 주장에 반대해야합니다: 그들 수난자들은 잘못이 없다고 반대해야합니다. 마약, 열등한 경쟁력, 뒤쳐진 학력고사, 무능력, 그리고 알콜에 이르기 까지 이 모든 것들도 수난자들의 불행이 그들 자신의 잘못이라고 주장하기 위한 논증이 되지는 못합니다.

 

누가 이익을 챙기는가

새로운 기술은 계속해서 보다 적은 사람을 통해서 생산을 가능케 합니다. 그러나 이윤추구는 대량생산을 불러오게 됩니다. 우리는 벌써 분명한 착취현상을 보게됐습니다: 어떤 이들은 점점 부유하게 되고, 그래서 경기가 좋아보입니다만, 실업문제에 있어서는 별로 좋아보이지 않습니다. 실업은 경기상승기에도 역시 높아갑니다. 기업가의 이윤은 확대되고 그 이윤은 세금부과도 적당하게 얼버무립니다. 기독교인은 누가 이익을 챙기는지 전체적인 안목으로 뚫어보는 걸 배워야 하며, 불의의 질서가 안개 속에서 대충 얼버무려지는 그런 정책을 알아챌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인들에 의해 수행되는 거대한 얼버무림은 -이것은 겉으로 볼 때 거의 얼버무림으로 느껴지지 않는데- 소위 저들이 말하는 분배입니다. 가장 전형적인 예는 한 부부가 각각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소위 이중수입가계(Doppelverdienertum)를 면할 수 있게 됩니다. 여기에는 여성 까지를 포함한 모든 인간의 일할 권리라는 논쟁에 근거하고 있는 기본적 생각이 작용하게 됩니다. 벌써 나치에 의해 이중수입가계라는 말로 여성들의 자치성이 위협을 받았습니다. 독일개신교 연합에 의해 선전된 <일자리를 가진 자들과 실업자들의 연대성>은 기업가들에게는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일자리를 가진 이들에게만 노동의 완전한 기본권리에 대해서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의 기본권으로서 노동권을 위한 진입

새로운 기술로 인해서 노동을 통해 공동체적 유익과 의미에 참여하려는 모든 이들을 위한 권리는 별로 신장되지 않을 것으로 내다보입니다. 인간 노동력이 점차 덜 필요하게 된다는 점은 비극적인 운명이 아닙니다. 모두가 그것에 순종해야만 할 운명이 결코 아닙니다. 모든 사람을 위한 일자리는 어딘가에 있습니다. 다만 예를 들어 새로운 기술에 높은 세금을 매기는 것에서 머물지 말고 노동이 다른 방법으로 분배되도록 싸워 얻어내야만 합니다. 기독교인은 실정법이 아니라 성서에 근거해서 인간의 기본노동권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소위 업적에 대한 논란

엘리트란 일종의 새로운 유행어입니다. 엘리트 계급에는 예컨대 의대에 입학해서 공부하고 임상실습을 하여 많은 돈을 벌게 될 의사들이 속합니다. 이들은 승용차, 별장, 멋진 여행, 교만하고 불손한 자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이 사회에서는 오직 이런 업적만이 그만한 댓가를 받습니다. 얼마나 많은 희생자들이 이 엘리트를 위해 길을 닦아야 하는지 모릅니다. 이 단어자체가 그것을 벌써 지시하고 있습니다. <선발된 이들>. 누가 과연 이런 사회에서 비엘리트로서 뒤쳐져 남아있으려 하겠습니까?

희생자를 찾아보자

1985년에 공식적으로 발표된 260만명의 실업자들은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공개적으로는 그들이 실재하지 않습니다. 장기실업자와 영세민보조를 받는 이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너무도 적은 담당 공무원들만이 그들을 사실상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인식하고 있는 유일한 빈민층은 여인숙 침대에서 뒹구는 이들과 종이상자나 쓰레기통을 뒤지고 있는 그런 이들입니다.

 

부르조아로서의 자기평가

우리는 이제 노동운동과 교회가 연결되는 어떤 전통도 갖고 있지 못합니다. 우리 세대의 교회는 비노동자들에 의해, 즉 도시의 중산계급에 의해서 운영되어 왔습니다. 저 역시 이러한 계급출신이며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전통의 경계선 밖으로 빠져나온다는 것은 매우 어렵지만 필요합니다. 기독교인은 오늘 마침내 노동조합과 연대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 기독교인은 사회정의실현을 위해 잘못된 실천전통을 갖고 있습니다. 이웃사랑, 연대성 그리고 가난한 이들의 복음은 우리들에게 가부장적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의 실천전통은 자선을 베푸는 것 뿐이었습니다. 우리는 부유한 이들의 관점에서 가난한 이들을 취급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선택의 실천

다행스럽게도 아직 살아 움직이며 점차 증가될 희망도 있는 기독교인들의 평화운동은 가난한 이들을 위한 선택에서 그 본래 국가 안에서 나름대로 실현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요청 앞에서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힘들게 행동하는가, 하는 점이 유감스럽게도 주당 35시간 노동이라는 논쟁에서 드러났습니다. 노조의 목표달성을 위해 교회의 협조가 너무나 적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성결법전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나의 종, 내가 에집트에서 이끌어낸 나의 종이다. 나 야훼가 너희의 하느님이다.>(레25:55).

저는 남녀 성도들을 위해 이처럼 많은 과업을 언급했는데, 과연 우리는 어디서 이런 용기와 힘을 부여받아야만 하겠습니까? 우리의 일상경험은 좌절과 억압과 고독인데 말입니다. 우리의 일상경험은 노예화입니다. 왜냐하면 억압과 좌절과 고독은 오늘 노예들이 쇠고랑에 묶이는 사슬이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노예일 뿐이지 사람의 노예로 팔린 것이 아니라고 사도바울이 이스라엘 백성을 에집트에서 해방시킨 하나님의 복된 소식과 연결시켜 주고 있습니다(고전6:13, 7:23). 저는 하나님의 소유물입니다. 그리스도는 나를 위해 대신 종의 몸값을 지불해 주셨습니다. 결코 독일 군수산업이 그런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직업을 가진 한 남자와 결혼한 여자로서 제가 직업을 포기해야만 한다고 누가 이의를 제기하드라도 저는 절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저는 일할 권리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하는 일을 용납할 수 없으며, 또한 내 형제와 자매들의 일할 권리에 대해서도 역시 이의를 달지 않겠습니다. 오늘날 노예의 발에 족쇄를 채우는 사슬들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발견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정부에 의해 무자비하게 팔리며, 우리 상호간 약하고 고독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노동세계에 관해서 말하자면 성서는 그 당시의 철저한 가부장제적 형태 안에서 남자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성서의 주인공들은 작은 평범한 남자들입니다. 이 작은 남자들의 작은 부인들은 숨어있거나 배경으로만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 작은 남자의 작은 여자를 향한 또다른 흔적이 성서 안에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노예상태에서 노예해방의 심볼이라고 하는 밝은 불빛 안에 놓여 있습니다. 한나, 유딧, 마리아, 그리고 그외의 많은 이들은 아무런 재미있는 일을 갖고 있지 못한 평범한 남자들의 평범한 부인들이었습니다. 그녀들 역시 남편들 처럼 똑같이 고된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 안에서 그녀들은 해방의 선구자요 여왕들이었습니다. 마리아는 노예해방을 위한 고대 한나의 노래를 새롭게 불렀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내 구세주 하느님을 생각하는 기쁨에 이 마음 설레입니다.

이는 그가 여종들의 파멸을 보시고

구하셨기 때문입니다.(눅1:46-48).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노래를 부른다면 이런 마리아 찬송을 불러야 합니다. 하나님은 좌절과 고독의 노예상태에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다른 세력이 우리를 옭아매어 무기력하게 하고 외롭게 텔레비젼 앞에만 앉아있게 하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내팽개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는 전쟁에 시달리거나 직업 없이 무미건조하게 살아야하는 소모품이 아니라 마리아의 행복이 수천 번 반복되어야 하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속한 남녀노예이지 노동시장과 산업현장의 노예가 아닙니다.

보라. 이제는 모든 이들이 나를

복되다 하리라.(눅1:48)

우리의 어머니 마리아, 옛 공산주의자, 해방의 여왕은 진작에 옳았습니다: 우리 세대도 역사 마리아를 행복하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녀는 아주 짧은 문장으로 요약해서 어떻게 하나님과 함께 하는가를 노래합니다. 즉 하나님은 불쌍한 자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전능하신 분게서 나에게 큰 일을 해 주신 덕분에,

주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그를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그의 자비가

대대로 있을 것입니다.(눅1:49-50).

 

자비, 동정, 선하심, 인내하심, 관용, 사랑 - 이것들은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하나님과 성서가 미국의 군사전략을 합법화 하기 위해 언급되어야 한다는 것은 일종의 신성모독입니다. 우리 독일교회가 그것에 대해 침묵한다는 것은 일종의 스켄달입니다. 자비에 대한 자비는 하나님의 중요한 일입니다. 인간이 고독과 좌절이라는 암 때문에, 혹은 화학산업이 아무 소리도 없이 살그머니 쏟아내는 암 때문에 죽어가는 것을 하나님은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자비의 흔적을 저는 제 곁에 있는 얼굴들에서 봅니다. 속이지 않고 기만하지 않고 사랑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때려부셔서 손에 넣을 수는 없으며, 우리 세대에 의해서도 그렇게 되면 안됩니다.

 

주님은 전능하신 팔을 펼치시어

마음이 교만한자들을 흩으셨습니다.

권세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보잘 것 없는 이들을 높이셨습니다.(눅1:51-52).

이 말씀은 성서 안에 한번만이 아니라 여러번 반복해서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조의 왕은 오직 하나님 뿐이며, 그는 우리의 불의한 왕들을 끌어내리십니다. 군림하는 이들은 교만하며, 파괴적이고 비인간적인 계획을 도모한다는 것이 성서 전체에 담겨 인간들의 경험입니다. 저 역시 제 삶의 경험에서 별로 내놓을만한 것이 없습니다. 저의 삶은 오랫 동안 히틀러의 후계자들에 의해 지배받아왔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때 민주적이기만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위해 투쟁해야만 했었습니다.

주는 배고픈 사람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요한 사람을 빈손으로 돌려 보내셨습니다.(눅1:53).

<그는> 굶주리는 자를 배불리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의 영상막 위에서 죽어가는 걸 보고 있을 뿐입니다. <그는> 부요한 이들을 빈손으로 떠나보내셨습니다만, 우리는 그들이 거금을 호사스럽고 사치스럽게 물 쓰듯하면서 활보하는 걸 볼 뿐입니다. 왜 마리아는 하나님이 간섭하신다고 노래합니까?

콜롬비아의 보고타 주변 들판에 화훼산업이 시작되었습니다. 비닐 하우스가 늘어서 있습니다. 그런데 그 비닐 하우스에서는 거의 여자들만이 노동하고 있습니다. 그 밭에는 독일의 바이어 레버쿠젠(Bayer Leverkusen)과 BASF에서 수입해 온 농약이 살포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일하는 여자들은 이런 맹독성 농약 앞에서 충분하게 보호되지 못합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다음에 어떤 결과가 나올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하게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분명한 건 이 화훼산업에 종사하고 있는 여자들에게서 유산의 수치가 올라간다는 점입니다. 이 화훼용 화학기업과 그 공장들을 향한 교회의 경고는 어디서 침묵당하고 있는걸까요? 이 꽃들은 미국과 유럽으로 수출됩니다.

<그는 배고픈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다>고 마리아는 노래하며, 그녀의 노래를 반복하는 모든 이들이 그걸 따라 부릅니다. 우리는 거의 피로 경작된 꽃(Blutblumen)만을, 즉 피로 된 카네이션, 피 국화, 피 장미만을 사고 팝니다. 우리는 남아프리카에서 온 과일인 인종차별이란 열매를 우리가 그런 열매의 종주국이라는 책임 때문에 잘 인식할 줄 모릅니다. 말하자면 피로 경작된 꽃이 무얼 의미하는지 구별할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는 배고픈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다>고 마리아는 노래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있음이 사실이라면 꽃을 재배하는 여자들의 피가 하늘에서 부르짖고 있음도 사실입니다. 우리 주위에 있는 이런 갈등을 우리가 짊어질 수 있는지 없는지 더 이상 묻지 맙시다. 우리는 정의를 부르짖어야만 합니다. 마리아의 노래는 심연에서 울려나오는 하나님 찬양입니다. 그녀는 하나님의 해방을 위한 여왕입니다. 그녀는 지금 비닐 하우스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저는 그녀와 나와 우리 모두를 위해 부르짖으며 기도할 수 있을 뿐입니다.

주님은 약속하신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의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습니다.

우리 조상들에게 약속하신대로

그 자비를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토록 베푸실 것입니다.(눅1:54,55).

이 자비로움에서 우리는 한 조각을 떼어냈습니다. 저는 그 한 조각을 신뢰할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소유물입니다. 희년을 선포하고 양각나팔 소리를 크게 울려 가르미쉬(Garmisch)로 부터 플렌스부르크(Flensburg)에 까지 모든 이들이 이 소리를 듣게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멋진 시간입니다.

 

부자들의 회개를 요청하는 십계명

첫 계명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그 당시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애굽에서 노예된 너희를 이끌어낸 너희 하나님 주(主)다. 너는 나외에 다른 신을 두면 안된다.>

하나님 혼자만이 참된 부자이시다. 왜냐하면 오직 하나님만이 충만한 생명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생명을 약속하시며 공급하신다; 이처럼 우리도 이런 생명을 서로 나누어야 한다.

우상도 역시 나름대로 생명을 약속하지만 죽음만 가져올 뿐이다. 이것을 오늘 우리는 우리의 죽어가는 숲에서 볼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기다림과 희망이 이루어지기 까지 부유한 세계에 속해 있다. 우리는 금송아지에게 기도하며 그에게 우리의 시간과 능력, 우리의 지성과 행운을 제사지내고 있다. 경제성장 처럼 우리에게 중요한 건 세상에 없다. 성서는 이윤추구를 우상숭배라고 한다(골3:5). 하나님은 오늘도 말씀하신다: 너는 내 곁에 다른 신들을 두어서는 안된다고.

둘째 계명

하나님은 그 당시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하나님은 수백 개의 이름을 갖고 있다. 우리가 그 이름을 찾으려고 할 때에만 우리는 생동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제 일세계를 위한, 그들의 부유한 생활과 그들의 군비경쟁을 위한 이데올로기로 사용한다. 모든 달러화에 이렇게 인쇄되어 있다. in God we trust. 모든 달러화는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다. 히로시마를 원폭투하 했던 조종사는 기도한 후에 그 일을 수행했다.

하나님은 오늘 말씀하신다.

너는 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셋째 계명

하나님은 그 당시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지켜라. 육일 동안 일하며 모든 노동을 해라; 그러나 칠일은 쉬는 날이다. 너의 하나님 주께 거룩함을 돌리는 날이다.>

하나님은 노동을 만드셨고, 사랑도 만드셨다. 노동이 충분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사랑이 충분하지 않다고 말했던 것 처럼 무신론적이다. 이 땅 위에서 할 일은 충분하다. 노동의 기본권을 우리는 대수롭게 않게 생각하고 있다. 모든 인간의 노동권을: 즉 여자들, 남자들, 터어키인, 독일인, 늙은이, 젊은이 모두가 갖고 있는 노동권을 말이다. 새로운 기술이 인간이나 일자리 보다 더 많은 보호와 명성을 누리게 해준다고 우리는 인정한다. 실직이라는 것이 병을 만들며 하나님의 안식일을 파괴한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그 실직에 대해 만족해 한다. 우리는 어느 누구에게도 채무를 면제해주지 않는다. 매우 가난한 나라에게도 그렇다. 우리는 이 땅의 휴식을 위한 안식년을 제공하지 않는다. 우리는 무엇이 휴식인지 우리 스스로 알지 못한다. 하나님은 오늘 말씀하신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지켜라.

넷째 계명

하나님은 그 당시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하나님은 성서에서 우리의 아버지라고, 또한 우리의 어머니라고 불리운다(사66:13). 우리 부자들은 가난한 늙은이를 일컬어 스스로의 잘못이라고 핀잔을 준다. 우리는 텔레비젼 프로그람에 어떤 할머니도 대담자로 내세우지 않는다. 우리는 늙은이들을 젊은 문화로서 소외시켜버린다. 우리는 45세의 사람들이 노동시장에서 더 이상 거래될 수 없다고 여긴다. 우리는 젊은이들에게 학습기회를 주지 않으며, 아이들을 낳아 세상에 보낸 아버지와 어머니들을 이와 비슷하게 나무란다. 우리는 자기의 아이들이 굶어죽어가는 것을 보는 수백만의 아버지와 어머니들을 돕는 대신 인공수정에 열을 올린다. 하나님은 오늘 말씀하신다:

너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다섯째 계명

하나님은 그 당시에 말씀하셨다:

<너는 살인하지 말라.>

하나님은 생명을 사랑하는 분이다. 우리 부자들은 불공정한 가격과 그 여파로 인해, 땅을 도둑질하고 군비를 확장하므로, 그리고 부자들의 경제를 오히려 도와주는 개발원조로 이 세상에 삼분의 이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매일 파괴하고 있다. 우리는 수출시장을 다지기 위해 종족주의자들과 테러정부를 뒷받침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에 의해 고혈을 흘리는 가난한 이들의 피를 모아 장사를 하며 가난한 나라의 엘리트에게 우리가 공급하는 무기로 장사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눈 앞에 전개되고 있는 시민학살의 책임자들이다. 우리의 후손들은 아연실색하여 우리가 저지른 일 앞에 서게 될 것이다. 마치 우리가 오늘 베르겐-벨젠(Bergen-Belsen) 사진 앞에 서있듯이.

하나님은 오늘 말씀하신다:

너는 살인하지 말라.

여섯째 계명

하나님은 그 당시에 말씀하셨다:

<너는 간음하지 말라.>

인간관계는 사랑과 존경으로 된 것이지 돈으로 된것이 아니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부유한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는 매음으로 가난한 이들을 사들인다. 우리는 섹스여행을 즐기고 있으며, 가족을 파멸로 이끄는 인종차별주의를 뒷받침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식들에게서 아기 낳을 용기를 빼앗는다. 어떤 이들이 더불어 살아갈 수 없게 만드는 외부적 요인으로서의 간통이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실직으로 위협받으며, 경쟁심과 질투심으로 교육받고, 또한 가부장제도라고 하는 그릇된 신들이 부부관계를 감옥으로 만들어 아내들이 거기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성장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오늘 말씀하신다:

너는 간음하지 말라.

일곱째 계명

하나님은 그 당시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도적질 하지 말라.>

하나님은 모두를 위해 생명의 풍요로움을 창조하셨다. 이 땅은 내 것과 네 것을 구별하지 않는다. 땅은 모두에게 생명을 공급한다. 우리 부유한 세계에 살고 있는 이들은 가난한 나라 백성들이 만들어낸 것을 도적질 한다. 우리는 그들을 욱박질러서 사치품을 수입하게 하고 대신 딸기 같은 걸 재배하게 하며 그들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재배하지 못하게 한다. 우리는 그들의 생산품과 토지가 쓸모 있는 한 그 땅을 도적질 하고, 또한 우리의 코카-콜라-문화와 고양이 먹이 구입, 그리고 세계의 군사기지화를 제공하고 대신 그들의 문화를 도적질한다. 우리는 가난한 이들을 착취하고 내어모는 놀이, 그리고 장물아비나 절도자 놀이를 즐기고 있다. 기업가의 이익이 올라갈 수록 새로운 빈곤의 위기가 상승한다. 이런 면에서 가난한 이들을 강압적으로 다스리도록 되어있는 한 개인소유는 도적질이다.

하나님은 오늘 말씀하신다:

너는 도적질 하지 말라.

여덟째 계명

하나님은 그 당시에 말씀하셨다:

<너는 네 이웃에 대해 거짓 증거로 말하지 말라.>

그리스도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우리의 거짓말로 질식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대중매체를 통해, 예컨대 군비확장에 대한 진실만이 아니라, 진리를 지켜나가겠다는 믿음 까지도 파괴하고 있다. 우리는 진리에 대해 침묵하거나 옆으로 비켜나간다. 우리는 우리가 군비확장을 위해 반공주의가 필요하므로 소련에 대해 거짓 증거를 한다. 우리는 검열이나 자신 스스로의 통제를 통해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진리증언을 벙어리 되게 한다.

하나님은 오늘 말씀하신다:

너는 네 이웃에 대해 거짓 증거로 말하지 말라.

아홉번 째 계명

하나님은 그 당시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하나님은 인간에게 거처를 만들어주신다. 우리 부유한 세계에 살고 있는 이들은 많은 이들의 노동할 권리를 빼앗으므로 그들의 거처를 파괴한다. 부패한 기독교 역사에서 보면 구제와 보살핌이 정의와 재분배를 대체하고 말았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여유가 없는 상품인 일자리를 두고 두 세계, 즉 직업을 가진 자와 실업자 사이에 좀더 확실한 분배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노동은 상품이 아니기 때문에 구제는 별로 도움이 안된다. 우리에게 있어서 부자들은 일자리를 없애고 삶의 질을 떨어뜨릴 힘을 갖고 있다. 우리는 과연 무엇이 이 사회에 있어서 살아가는데 중요한 일인지 다시 새롭게 정립해야 한다. 인간이 사는 집에는 물과 공기, 휴식과 교육, 문화와 공동의 책임이 속해 있다.

하나님은 오늘 말씀하신다:

너는 네 이웃 집을 탐내지 말라.

열번 째 계명

하나님은 그 당시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 이웃의 아내, 남종, 여종, 가축 혹은 거기에 있는 것들을 탐내지 말라.>

하나님은 인간을 매우 존중하셔서 서로 사랑할 수 있다고 믿으신다.

부한 세계에 사는 우리는 이윤추구라는 우상을 숭배하며 우리의 이웃, 여자, 남자, 어린이, 동물의 생명을 끊는다. 이 나라와 다른 나라에서.

우리 역시 소시민들로서 우리 이웃 나라의 원자재와 삶의 질, 부유함과 힘을 탐내는 자본주의적 속성을 우리 안에 갖고 있다. 이러한 잘못된 기대들이 불의한 제도를 간과하게 하며 우리의 이름으로 발생한 것들을 침묵하게 한다. 이것은 죄다.

하나님은 오늘 말씀하신다:

너는 네 이웃의 아내, 남종, 여종, 가축 혹은 거기에 있는 것들을 탐내지 말라.

하나님은 그 당시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다. 아비나 어미의 죄를 삼 사대 까지 내려가 나를 미워하는 이들의 자손에게 갚는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고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의 자손들에게는 수천 대에 이르기 까지 은혜를 배푸느니라.>

부유한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 역시 하나님의 분명한 뜻을 알아 그 뜻대로 살아갈 수 있다. 하나님의 자비는 우리의 죄보다 훨씬 크고 강하지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오늘 말씀하신다:

이 세상과, 그 안에 가득한 것이 모두 여호와의 것, 이 땅과, 그 위에 사는 것이 모두 여호와의 것이다.(시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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