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신비와 항거

땅은 하나님의 것이다 조회 수 3323 추천 수 0 2011.01.31 11:52:05

형제인 하나님

골로새서의 그리스도 찬가

골1:15-23, 새번역

(15)그 아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며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분입니다.

(16)그것은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 왕위나 주권이나 지배나 권위나 모든 것이 그의 안에서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만물이 그를 통하여 창조되었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

(17)그는 만물이 있기 전에 계셨고 만물은 그의 안에서 함께 유지되는 것입니다.

(18)그리고 바로 그가 그의 몸인 교회의 머리입니다. 그가 근원이시며 죽은 자들 가운데서 제일 먼저 살아나신 분이십니다. 그리하여 그는 만물 중에서 으뜸이 되셨습니다.

(19)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뻐하시는 뜻대로 그의 모든 충만하심을 그 아들 안에 머무르게 하시고

(20)그의 아들의 십자가의 피로서 평화를 이룩하시고 그를 통하여 만물을 자기와 화해하게 하셨습니다. 땅에 있는 것이나 하늘에 있는 것이 다 아들을 통하여 자기와 화해하게 하신 것입니다.

(21)여러분도 전에는 하나님을 멀리 떠나 마음으로 그의 원수가 되어 악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22)그러나 지금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의 육체의 죽음을 통하여 여러분을 자기와 화해시키셔서 거룩하고 흠이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사람으로 자기 앞에 서게 하셨습니다.

(23)그러므로 여러분은 믿음의 터 위에 굳게 서서 믿음을 지켜가며 여러분이 들은 복음의 희망에서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이 복음은 하늘 아래 있는 모든 피조물에게 선포된 것이며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군이 되었습니다.

 

도로테 죌레

 

신비와 항거

성서공부, 골1:15-23

 

거룩에 대한 인식

지금 우리가 함께 생각해 보려는 본문의 내적인 통일성은 얼듯 보아서 쉽게 이해될 수는 없습니다. 이 땅을 더 이상 홍수로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노아와 맺으신 하나님의 약속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을까요? 인간의 노예화에 대한 안식규정과 골로새서의 그리스도찬가는 상호간 어떤 관련성을 갖고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저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생명의 성화(聖化), 노아계약에 들어있는 땅의 성화, 안식년에 들어있는 시간의 성화,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의 성화입니다. <땅과 그곳에 충만한 것과 세상과 그것에 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다.>(시24:1). 창조는 한 무더기의 재료들 처럼 간단하게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대되어지고 희망적이며 우리 어머니 하나님으로 부터 생겨나게 됩니다. 우리가 <창조>를 말하고 아주 간단히 <자연>을 말하지 않을 때, 그때 우리는 존재와의 관계성에 대한 어떤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지구는 부드럽게 움직이며, 고래는 바다물 속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즐기고 있고(시104:26), 산비탈의 풀밭은 어떤 의도도 없이 봄꽃을 활짝 피우며, 그리고 간혹 우리가 음악을 들을 때 형제인 불과 자매인 물 없이 살아갈 수 없는 한 어머니의 자녀이며, 또한 생명에 대한 두려움 없이 충만한 헌신의 친구들이며 형제자매라는 걸 알게 됩니다.

저는 언젠가 아이들과 부활미사에 참석해서 <그리스도의 빛>으로의 초청이 라틴어로 <lumen Christi>라고 선포되는 걸 본 기억이 있습니다. 우리가 미사를 끝내고 나왔을 때 왜 거기서 <그리스도의 꽃>만 찬송되는지 우리 딸이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런 정도로 멋있게 <그리스도의 여우들>을 초청할 수 있도 있을텐데! 그리스도의 생쥐들도 어린아이들에게는 어울리는 표상입니다. 그리고 밤에 길거리에 서서 모든 아이들이 더 많이 혹은 적게 그레고리안식으로 이렇게 외쳐댈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돌-그리스도의 튜울립, 그리스도의 등불‥‥ 이런 모습은 우리가 알며지내던 것들의 이름을 부르고 어떤 관계를 갖고 싶어하는 것 처럼 우리를 사로잡는 하나의 익살스럽고 경건한 열광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거룩함에 대해 너무 멀리 있는 것으로 여기거나 어떤 특별한 것으로, 혹은 엄숙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이제 말씀을 계속하려고 합니다.

<너희 하나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레19:1)는 말씀은 우리가 참여한 이번 성경공부에서 놓치지 말아야할 핵심입니다. 골로새 교회에 보낸 바울의 편지는 <거룩한>이라는 단어를 반복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는 <거룩하고 신실한 형제들에게> 그리고 골로새에 있는 자매들에게 쓰고 있으며(골1;2), 골로새 교인들이 <모든 성도들에게 보여준> 사랑을 기억하며(골1:4), 그들을 하나님 <자신 앞에 세우신, 즉 흠이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성도들>이라고 부릅니다(골1:22). 그는 또한 그들을 <빛 안에서 성도들에게 주어질 상속의 분깃을 받을> 자들이라고 일컫고 있습니다.

그곳에는 약간 열광적인 자기확신에 찬 목소리가 담겨 있습니다. 빛 안에 있는 성도들의 <유산>은 하나님 안에 존재한다는 확신입니다. 무엇에 대해 말하고 있는지 이해하기 위해 인간의 참된 상황을 우선 직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느 누구를 대표할 수 없는 사람들의 작은 집단이 거대한 제국에 살고 있는데, 그 나라 안에는 압제와 터무니 없는 세금, 감시와 위협, 그리고 -최소한의 항거가 있을 때- 고문해서 제거해 버리는 것이 일상적인 일로 되어 있었습니다! 탈무드에 이런 언급이 있습니다! <인류 중에 세 계급은 지옥의 얼굴을 보면 안될 것이다: 즉 빈곤의 고통에 있는 자들, 창자의 질병 밑에 있는 자들, 그리고 로마정부의 압제 밑에서 시달리는 이들이다.>1 로마 시민이 아닌 사람들에게 로마정부 밑에서 당하는 고통이란 오직 지옥과만 비교될 수 있었다는게 공공연한 사실입니다. 군사식민지에서 시민들은 자기들 나라와 정부와 생산에 대해 아무 것도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부과된 노동과 세금으로 착취당했습니다. 그들은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종속되어 있던 소시민들, 즉 옷 만드는 수공업자, 양치기, 직물업자, 염색업자, 개인노예 그리고 이 모든 이들 밑에 있는 최하급의 여자들에게 상황은 더욱 나빴습니다. 당시 소아시아, 그리고 로마의 지배 아래 살고 있던 여러 사람들의 생활경험이 땅위와 하늘 아래 자리잡고 있는 마귀와 같은 권세, 즉 그리스도예찬 가운데 언급되고 있는 <왕위나 주권이나 지배나 권위>(골1:16)에 대한 신앙에 의해 규정되었다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러한 권세를 영적이며 신적인 힘을 가진 자로 상상했으며, 사람들이 무자비하게 그들에게 내맡겨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질병, 불행, 잔혹한 날씨, 자연능력인 흉년 그리고 마음대로 값을 조정하고 상업관계를 처리하며 법을 주무르는 경제적, 정치적 주권 - 이 모든 역사적 권세들은 신약성서가 마귀라고 사용하던 단어들입니다: 말하자면 마틴 루터가 번역하고 있는대로 왕권, 주권, 귀족의 직분, 특권 등입니다. 그것들은 하나의 같은 내용을 갖고 있습니다: 즉 인간을 핍박하는 폭력으로서, 이 낱말들은 항상 피와 관련됩니다.

오늘 우리가 구조적 폭력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울이 편지를 쓴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 인간의 생명을 거스려나가는 초인간적 위력으로서 늘 인간의 삶 한 가운데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오늘의 이 테크노크라시(기술지배, Technokraten)의 언어로 바꿔 말하면, 이 폭력과 권세의 위력은 거의 <물적 강제>(Sachzwänge)라고 하는데, 이는 바로 하나님에 대한 불신의 표현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그렇게 살면 안됩니다. 그 이유는 이러한 사고방식에 젖어 있는한 귀신에게 지배받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감옥에서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이들 공동체는 내일이나 모레 그들도 바울 처럼 같은 신세가 될 수 있다는 걸 예상해야만 합니다: 그들도 역시 쫓기고 수배당하고 체포당하고 구속당하고 심문당하며, 어느 날에는 구형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과테말라에 있는 교회를 생각하고 그들이 무얼 예상하고 있는지 분명히 알게된다면 좀더 현실적인 접근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교회에 대한 해괴한 소문, 의심, 사찰, 경찰보고 및 신고, 안기부에 의한 구금, 납치, 실종, 고문, 살인 같은 것들입니다.

초대 기독교인들은 어떤 정신착란적인 자기확신을 갖고 있었을까요? 바울은 자기보다 더 좋은 어떤 것을 기대할 수 없었던 그 공동체를 <빛 가운데서 성도의 상속을 분깃으로 받도록 하나님에 의해 권리를 부여받은 이들>(골1:12)이라고 했습니다. 무엇을 그는 증거로 삼고 있나요? 어디서 그는 그런 능력을 받을까요? 빛 안에 거하는 성도의 확신은 무엇입니까? 어디서 바울이 말하는 그 빛이 비추고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신약성서의 대답은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이 노아를 통해서 그리고 시내산에서 이스라엘백성과 약속을 맺으셨는데, 그 백성의 연대공동체는 오늘 더 이상 유지되고 있지 못합니다. 또한 땅의 기초경제의 조직상태가 상실됐기 때문에 안식년이 더 이상 유지되지도 않습니다. 모든 것을 지배하고 관리하는 로마의 위력이 또 하나의 다른 역사적 시간을 만들어냈습니다. 이제 이 시대는 이 백성의 성화와 이 땅위에 사는 생명체의 성화에 대한 위대한 비젼의 약속을 필요로 합니다. 하나님과의 계약체결, 해방의 해, 그리고 토라는 하나님이 택하신 옛 길입니다만 봉쇄되었기 때문에, 이제 새로운 길이 발견되어야 할 것 처럼 보입니다. 새롭지만 오래된 이 길은 이방인들을 유대인이 되게 하고 이로써 하나님과의 계약에 동참케하는 그리스도입니다.

일종의 기독교적인 반유대주의가 있습니다. 이 반유대주의 안에서 하나님과의 계약 가운데 기초한 상이점이 유대인들에게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 가운데서 실행된 기독교 선교는 이런 잘못된 신학의 결과입니다. 그리스도는 제국주의의 상징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계약을 맺는 모두를 향한, 오늘 권력자들이 마음대로 휘두르는 구조 가운데 내맡겨진 모든 이들을 향한 갱신된 하나님의 초청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에 대해 두 가지 중요한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창조 중에 첫번으로 나신 분(Erstgeborene)이며(골1:15), 죽은 자 가운데서 첫번으로 나신 분입니다(골1:18). 모든 창조의 첫번으로 나신 분으로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인 아담과 이브 같으십니다. 우리가 볼 수 없는 하나님은 자기의 인간성 안에서 자기를 보이십니다. <첫번으로 나신 분>이라는 묘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므로 하나님과 같아지는 많은 형제와 자매들을 암시하며, 그 형제와 자매들은 고대권리법에서 적용되는 것 처럼, 예컨대 상속법에서 처럼 보다 확실한 우선권들로 자신들을 구별합니다. 인간은 <첫번으로 나신 분>인 그리스도가 권력 앞에서 등급이 매겨지고, 그 권력자들이 그리스도를 따라 창조되어 있는 동안(롬8:29)에도 권력자들에게 굴복당합니다. 항상 <많은 형제들 가운데서 첫번으로 나신 이>(롬8:20)라는 표현은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의 하나됨을 강조합니다: 즉 우리는 모두 남자와 여자로서 하나님의 형상(창1:29)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겟세마네를 연기할 수 없다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외적인 부분에서 부터 본질적 근거에 이르기 까지 다양한 견해가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다시 한번 우리가 논의하는 거룩성이라는 점에서 과연 형상성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 집중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는 곧 하나님이 거룩하니 우리도 거룩해질 수 있다는 견해입니다(레19:2). 탈무드는 말하기를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은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너희는 주님 뒤에서 너희의 하나님에게로 나와야한다.>는 말씀은 무얼 의미하는 걸까요? 그 대답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과 비슷하게 닮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벌거벗은 이를 옷입히시듯이 그리고 아담과 이브가 낙원에서 쫓겨난 후 그들에게 옷을 만들어 입히신 것 처럼 우리도 벌거벗은 이들에게 옷을 입혀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굶주린 자를 먹이시는 것 처럼, 예컨대 까마귀를 시켜 엘리야를 먹이신 것 처럼 우리도 역시 굶주린 자를 배부르게 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고 하는 표현의 가장 심원한 의미는 우리가 하나님을 닮아갈 수 있으며 하나님 처럼 창조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는 데 들어있습니다. 즉 우리의 노동과 우리의 사랑 안에서 말입니다. 우리가 정의를 행하고 서로 사랑한다면 우리는 창조자로서 행동하는 것입니다. 신약성서는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을 그 중심내용에 두고 있는데, 특히 원수사랑의 계명에서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산상수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고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히 대하고, 무례히 행하는 자와 박해하는 자를 위해 빌라. 그래야만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그의 햇빛을 주시고, 의로운 자에게나 불의한 자에게나 비를 내려주시기 때문이다.>(마5:44이하). 이 계명의 배경은 바로 기독교인들이 초대교회시대에 미움을 받고 핍박을 받고 업신여김을 받고 박해를 받았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들이 그런 박해를 받은 이유는 그들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반대해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군복무를 하지 않고 개인소유를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사용했습니다.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이 모든 갈등을 회피하고 어느 누구와도 가깝게 지내지 않으며 집안에 들어앉아 평화를 만들고 비정치적인 말만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정치적인 반대자들을 진심으로 받아들여서 그들이 돌아설 것을 믿어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햇빛과 비를 우리와 같은 모든 이들에게 주신다는 것과 같습니다. 원수사랑은 그것이 적대심이 없는 사랑이라면 바로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적대자 중에서도 친구를 만들며, 원수 가운데서도 동료를 만듭니다: 이렇게 우리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적개심이 없는 사랑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적대자들과 동료가 되는 길을 발견하게 됩니다. 악한 이들과 선한 이들 모두에게 햇빛을 주시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산다는 것은 오늘 제 삼세계의 입장에서 식수개발을 위한 소련-미국 연구프로젝트를 세우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귀신에게 지배받는한 하나님을 닮아갈 수 없습니다.

공의와 사랑의 행동은 새로운 것이 탄생하고 떨어져나간 파편들이 재건되고 권리가 생수처럼 솟아나는 행동입니다. 우리가 인간실존의 -노동과 사랑- 기본조항을 진지하게 대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에 부분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에 따르면 일한 능력과 사랑할 능력 안에 건강하며, 또한 신경증적이지 않은 인간존재가 들어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다른 이들과 함께 창조의 과정에 동참하므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실현하게 됩니다: 에르네스토 카르데날(Ernesto Cardenal)의 <Evangelium der Bauern in Solentiname>에서 한 대담자가 말하고 있듯이 노동자는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세상권세가 복종해야할 첫번으로 나신 이인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어떤 존재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며,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도 역시 그의 형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말씀은 하나님의 형상인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갖는 관계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피조된 세계, 우주에 대한 관계 까지도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만물 보다 앞서 계시며, 또한 만물은 그분 안에서 유지됩니다.>(골1:17). 또한 다른 번역은 이렇습니다. <그는 만물 보다 오래된 권리를 갖고 계시며 만물은 그분에게서 유래합니다.>(J. Zink). 그리스도가 만물에 <앞서> 계시다는 말은 시간이나 서열상의 차원만을 뜻하는게 하니라, 그리스도가 만물 안에 존재하며, 만물을 견인하며, 만물 뒤에 숨어계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의 가장 작은 형제에게 한 것이 바로 나에게 한 것이다.>(마25:40)는 마지막 심판비유에서 말하고 있듯이 우리가 만나는 모든 이들이 그리스도입니다. 옛 러시아 격언은 말하기를 <다른 이를 위로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입이다.>라고 했습니다. 어린아이들 처럼 내가 흡사 생전 처음으로 대하는듯 보고 있는 꽃들과 등불은 <그리스도의 꽃>입니다. 모든 것은 그분 안에서 유지됩니다. omnia in ipso constant. 찢겨지고 무감각해진 세상에서 내 삶의 경험은 나를 자주 파괴하고 조각나 버리게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 생명의 경험은 관계성을 유지하며, 나에게 사명감을 주어 창조과정에 참여하도록 부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얼마나 필요한 존재가 되는가 하는 점을 알게되며, 또한 실직의 가장 큰 불행은 그것이 인간에게‘너는 쓸모 없는 존재다’라고 암시한다는 사실이라는 것을 자주 생각합니다. 우리는 어떤 이가 우리를 필요로 할 때 우리 자신에 대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나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필요로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이들을 필요로 합니다.

이런 언급들이 신비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사실 본문말씀이 신비적입니다. 좀더 정확히 말해서 그것은 만유재신론적(pan-en-theistisch)인데, <모든 것이 하나님 안에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이 본문은 여자노예들을 <빛 가운데 있는 성도>로 만들며, 폭력의 세계주의적 권력을 갈릴리에서 온 작은 남자 밑에 굴복시킵니다. 바울은 이 세상을 어떤 초월적 창조자에게 지배당하는 세속적 창조물로서 생각해서 하나님과 대립되어 있다고 여기지는 않습니다. 바울은 오히려 이 세계가 우주적 그리스도와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가 하는 점을 중요시합니다. 이 자연은 그리스도와 아무 상관이 없는게 아니며, 자연은 연관성 없이 독자적으로 자신 안에서 휴식만 취하지 않고, 일치를 이루려고 맹렬히 돌진합니다. 자연이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에 대해 성서전통이 어떻게 보고있는가 하는 점을 말해보라면, 자연은 그저 세속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룩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번 모임의 주제로 삼고 있는 <지구는 하나님의 것>이란 명제만 보더라도 자연이 우리 인간에 의해 아주 간단히 소유당하거나 사용되어질 재료가 아니라 것을 뜻합니다. 자연은 자연이 찬양하고 있는 창조자와 아주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으며, 또한 거대한 고독에 대항하여 자연이 돕고있는 동료창조자와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만물은 불가시적 하나님의 형상인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연관을 발견하며, 또한 만물은 그리스도 안에서 존립근거를 갖고 있습니다. 머리와 몸이 함께 속해있듯이 바로 그리스도와 만물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고난과 죽음의 극한 상황 가운데서도 우리는 생명의 뿌리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황홀경과 행복의 극한 상황 가운데서 우리는 생명의 일치성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가시권에 들어온 하나님의 사랑으로 부터 그 무엇도 우리를 끊어낼 수 없습니다. 그 사랑은 세상만물 가운데서 스쳐지나가 버릴 수 없는 것이며, 그 사랑은 모든 세계와 그것이 내는 음악소리 속에 그리고 부드럽게 돌고 있는 우리의 작은 행성인 지구 안에 살아움직이고 있습니다.

저의 한 여자 친구가 매우 당혹한 모습으로 신비한 경험을 털어놓았습니다. 금식과 명상을 한 뒤에 그녀는 눈앞에 펼쳐진 환한 빛을 보았으며, 이전에 한번도 알지 못했던 어떤 확증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진리다. 하나님은 거기 계시다. 정확히 말해서, 한분 하나님이 계시다! 그가 여기에 나와 함께 하신다는 말로서는 오히려 충분하지가 않다. 그리스도가 말씀한 모든 것, 즉 복받을 자에 대한 말씀은 정말 진리이다. 내가 어떻게 그것을 의심하거나 하나님과 나 자신에 대해 미혹당하겠는가.> 이 여자는 매우 합리적이고 생각이 깊었으며, 내가 이제 커다란 확증이라고 부르고자 하는, 그것은 일반적으로 최고의 확증이라고 하는 것인데, 그 어떤 것을 그녀가 찾는다는 걸 내가 정확하게 느끼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이와 비슷한 걸 나에게 한번도 설명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인 이 확신은 간혹 인간에게서 나와서 불처럼 비추는데, 이것은 희미하게나마 우리 모든 이들 안에 숨어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 모두는 신비주의자입니다. 퀘이커교도들은 모든 인간 속에 불꽃으로 내재해 있는 이것을 네 속에 있는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것>(das von Gott)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모든 이에게 있습니다. 저는 언젠가 한번 제가 가르치는 여학생들에게서 매우 날카로운 비판을 받고 공격을 받았는데, 여기에는 퀘이커 여신도들도 합세했습니다. 그들은 제가 그 여학생들 안에 있는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것>을 못보는게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나는 사실 그때 상당히 부끄러웠습니다.

하나님은 시간의 세 가지 상이한 형태 가운데서 우리와 만나십니다. 우선 우리는 우리보다 앞선 살았던 이들이 경험한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전승을 오늘 다시 필요로 합니다. 이 역사는 없어서는 안되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성서를 필요로하게 됩니다. 우리가 성서를 항상 기록할 수 있는게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읽게됩니다. 한때 한 작은 종족이 군사강국에서 탈출해서 자유를 찾았다는 것, 즉 노예라고 해서 영원한 노예는 아니라는 것과 빚진 자를 탕감해 준다는 것, 눈먼 자는 보는 것을 배우고, 독일은 평화를 위해 일하기 시작한다는 것들은, 이런 것들을 제외한다면 제가 단 하루라고 살아있기를 원하지 않는 기적의 역사입니다. 이것들은 저를 지탱해주는 하나의 전통을 세워놓습니다. <당신이 뿌리를 지탱하는게 아니라, 그 뿌리가 당신을 지탱한다.>고 바울이 말합니다(롬11:18). 둘째로 하나님은 우리와 -그리고 이것은 전통의 다른 한 차원인데- 계약으로서, 그리고 미래에 대한 약속으로서 만나십니다. 언젠가는 군사적 세력과 자연을 파괴하는 마력들이 끝장날 것입니다. 인간은 영원히 고통당하고 속임을 당하도록 창조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부르시고 초청하시고 요구하시는 하나님, 우리 자신을 측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바로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연속적 관심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바로 하나님이 오신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소원과 두려움을 바꿔보려고 서로 기도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미래를 우리에게 보다 가까이 이끌어오게 됩니다.

그뿐만 아니라 셋째로 우리는 과거와 미래 곁에 하나님의 현재, 즉 그분의 여기 우리와 함께 하심을, 연기되어질 수 없는 그분의 현재를, 그 신비한 지금(das mystische Nun)을 필요로 합니다. 이러한 신비한 지금 없이 첫번으로 창조되고 첫번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본문말씀은 이해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뻐하시는 뜻대로 그의 모든 충만하심을 그 아들 안에 머무르게 하셨습니다.>(골1:19). 하나님은 모든 충만함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가 모든 충만한 것과 큰 것과 넒은 것 그리고 모든 세계의 비밀을 감싸안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이 말이 실제로 체험적으로 이해될 수 있을까요? 생명의 충만, 전체, 신비적 현재라는 말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려는 걸까요?

저는 두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1970년 초가을에 제가 속해있는 에큐메니칼 그룹이 쾰른 돔성당에서 밤을 보냈습니다. 우리는 사형선고를 받은 몇몇 바스커족 투사들을 위해 기도하려고 했습니다. 우리는 저녁 때쯤 성당 안으로 들어가서 시편을 중심으로 기도했으며, 스페인에서 발생한 일들에 대해 전해들었고 성당문을 닫을 때 까지 그 안에 머물렀습니다. 그러자 수석신부의 대표자와 부주교가 와서 우리에게 나가달라고 강력히 요청했습니다. 다른 날 다시 와서 기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들의 생명이 지금 놀이개감이 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주교는 우리에게 한달에 한번 있는 기도의 날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때 우리와 함께 했던 하인리히 뵐(Heinrich Böll)이 한 말을 저는 잊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주교님, 게세마네 동산은 연기할 수 없지 않습니까!” 게세마네 - 이것은 현재입니다. 그리스도 - 그분은 여기에 있었습니다. 이 <지금>은 혹독하게 추운 밤에 현재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형수들은 이틀 후에 사면받았습니다.

다른 예는 괴테의 친구인 칼 필립 모리츠의 18세기 독일소설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성서에서 생명의 신비가 어떻게 불려지고 있는가에 대한 불가사의한 암시입니다. 이 책의 주인공인 안톤 라이저는 감수성이 예민하고 상처를 많이 받는 청년으로서 삶의 공허를 자주 느끼곤 합니다. <자기 존재 속에서의 외로움, 자리멸렬 그리고 소외가 항상 짜증스러움과 권태를 그에게 일깨우곤 했습니다.> 신비주의적 용어로 말하면 그는 <공허와 무의미>를 느꼈다는 것입니다. 그는 티셔라는 이름의 한 늙은 사람을 알게 되었는데, 그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정다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 경건한 사람과 어떤 곳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그것을 신비적 언어로 말하고 있습니다. 널리 뻗친 마당과 나선형 층계를 지나 <길로 향한 어두운 출입구>에 도달할 수 있었고, 놀라 당혹스러워하고 있는 젊은 안톤에게 신비스럽게 보이는 출입구인 한 층계가 나타났습니다. 잠시 후에 멀리 떨어진 창문을 통해 적은 빛이 들어왔습니다. 역시 이 노인의 방 안에 노을이 가득 찼습니다. 안톤 라이저는 <정말 이상할 정도로 행복한 몇 달 동안> 이 남자를 방문합니다. 티셔는 <모든 것! 모든 것! 모든 것!>이라는 말과 함께 죽습니다. 이 말들은 자기 삶의 모토로서 벌써 죽음 앞에서 기도를 드리거나 휴식을 취할 때 여러번 들었던 것입니다. 나중에 젊은 라이저는 이 신비한 말들을 기억하게되며, 이 말들은 그의 삶에 반대주제가 됩니다. 그에게 <모든 것! 모든 것! 모든 것!>은 찢겨져버렸고 거절되었으며 조각나 버렸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택한 본문인 골로새서는 이 <만물>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터 위에서 창조되었고(골1:16), 십자가의 보혈로 용서함을 받았습니다(20절). <만물! 만물>이라는 말은 거듭 반복되어 나옵니다. 이 본문은 일종의 찬가며 찬양이고, 신비주의자가 애타게 찾고 있는 하나님 사랑에서 나오는 말씀들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에 빠져있게 되므로써 하나님은 이 서신의 기도자와 기자에게 <모든 것 가운데 모든 것>이 됩니다. 사랑은 그 어느 것으로도 나뉘지 않고 분리되지 않습니다. 이 세계의 나뉨은 극복되어집니다. 그리고 안식일이 평등을 이루어놓은 것 처럼 바울도 역시 <모든 - 그리스도 안에 있는 - 모든 것>의 찬양에 압도당하고 있습니다. <창조자의 형상에 따라 새로운 인식을 갖게되는>(골3:10) 새로운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시민적, 종족적, 계급적 구분은 극복되어집니다: 즉 <헬라사람이나 유대사람이나 할례자나 무할례자나, 미개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의 구별이 없고, 오직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가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골3:11). 이 역시 신비주의적 경험에 속한 말씀입니다. 쓸쓸하고 감미로운 영역이 따로 없습니다. 고통스러운 영역과 평화로운 영역도, 나의 영역과 그것에서 구분되어있는 너의 영역도 따로 없습니다. 아시시의 프란시스가 그리스도의 성흔(聖痕)을 받았을 때 말하기를 <슬픔과 행복의 일치>를 맛보았다고 했습니다. 아무 것도 자기 곁에 머무르지 않았으며, 아무 것도 자기를 위해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어느 것도 그 자기 스스로만의 사실이 아니며, 모든 것은 함께 오가고 있으며, 어느 것도 버려지지는 않습니다. 성 클라라에 대한 프란시스의 태도가 어떤 것인가를 묘사한 한 다른 역사에서 이르기를, <그리고 그들은 더 이상 나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생명의 단일성으로 부터, 그리고 하나님의 내재성으로 부터 바울은 지금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의 세계이해는 하늘과 땅 사이에서 자신의 비실재를 벗어나려고 폭력을 휘두르는 악마적 힘에 의해 규정됩니다. 이것들은 모든 다른 것을 폭력의 기초법칙에 던져 굴복시키고 인간으로 하여금 그것들을 섬기게 강요합니다. 모든 이들을 폭력사용으로 몰아넣고 아주 새로운 교권제도와 억압대상을 생산해내며 그리고 한 사람이 좌지우지하는 그런 억압적인 법률을 만들어내는 일은 바로 권력의 이러한 제도가 갖는 폭력과 잔인성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바울이 편지를 쓰고 있는 골로새 교회 안에서 하나의 논쟁이 공공연히 시작됐습니다. 한 집단은 세상의 현실성을 지배하고 있는 악마적 힘에 대해서 기독교인도 역시 순종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생각에 대해 <주의하시오>라고 바울이 경고하고 있는데, <어느 누구도 여러분을 철학이나 무모한 거짓말로 인간전통의 통치 밑으로 이끌어갈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주권 대신에 세상권력의 주권 밑에 거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의 충만함이 살아 거하기 때문입니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골2:8,9). 바울은 기독교인이 그리스도 이외에 다른 권력과 그 이데올로기를 인정할 수 있기라도 했던 것 처럼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권력들은 이미 볼장 다 보았으며, 분리와 적대감과 우리 육체에 대한 증오라는 그들의 지배는 이제 바울이 <교회>라고 의미하는 우리 공동체 안에서 극복되었습니다(롤1:18). 우리는 이제 종족주의와 혹사시키는 계급지배와 군국주의와 가부장적 성차별주의에 돌아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무지막지한 힘은 우리에게 더 이상 지배권리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벌써 공동체 안에서 노예해방(골4:9)과 여성해방(골4:15)이 현실화되었습니다. 여성들은 원시공동체에서 가정교회와 그 모임을 이끌어갔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가슴과 머리를 혼란하게 만드는 구조적 폭력과 그 이데올로기를 뛰어넘어 계신 주님이십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살아있는 존재를 대량학살키 위한 무기를 준비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할 그 어떤 강제적인 것도 없습니다. 이윤추구가 바로 만족스러운 경제를 운용하는 유일한 요소라는 이유로 가난한 이들을 혹사시키는데 군림하는 지배권이나 위엄, 경제질서나 카르텔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어둠의 정부>로 부터 구원하셨습니다(골1:13). 그런데 구원했다는 말의 의미가 그가 우리를 이 세상 이외의 어떤 다른 장소로 이끌어가려고 했다는 것이 아니라 어둠의 지배 밑에서 우리에게 가능했던 그런 항거와 다른 삶으로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신비, 그것은 곧 하나님을 향한 가장 내적인 확신이며 약한 자의 능력이고, 가슴의 어둠 가운데 있는 빛입니다. 그런 면에서 신비와 항거는 서로 관련되어 있습니다.

 

항거와 부활

바울이 쓴 본문말씀을 숙고할 때마다 이 말씀이 오늘에 대단히 시급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 우리에게 이 성경말씀이 -첫번 창조되시고 첫번 부활하신 이라는 이 말씀- 이렇게도 긴박하게 필요한 것일까요? 그 이유는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왕권과 폭력의 마성 안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살고 있는 이 어둠의 정부는 빛의 나라로서, 기독교 국가로서, 민주주의 국가로서 자신을 선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든 악의 원인을 알고 있다고 말하며, 그래서 절대적인 악을 단칼에 없애버릴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귀적인 세력과 폭력, 이는 곧 과학-군사-산업복합체라 할 수 있는데, 그런 것의 독재 밑에서 우리가 지배당하고 자비심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군사요새화계획에 굴복당하지 않는 모든 작은 나라는, 바로 얼마 전에 뉴질랜드가 시도했던 것 처럼, 본보기로 처벌받게 됩니다. 세계시장의 완전석권은 이미 실현되고 있으며, 거기서 벗어나려는 시도는 엄청난 처벌로 군사적 압력을 받게됩니다. 이 세계는 온통 군사적 전진기지화 되고 있습니다. 세계지배가 강대국의 노골적인 목표가 되고 있다는 점이 점점 분명해 집니다. 현대 미디어와 그 미디어를 통해 가능해진 확신의 조작으로 오늘 우리의 상황은 <로마의 평화>(pax romana)라고 불리운 세계질서 밑에서 살아야만 했던 초기 기독교도인 보다 더욱 희망이 없어 보입니다.

우리는 이제 원시기독교의 현실성에 더욱 가까이 살고 있습니다. 무엇 보다도 마성과 폭력 밑에 내맡겨졌던 고대인들 처럼, 오늘 무지막지한 권력에게 우리가 내맡겨져 있는 이 상황에서, 우리는 기독교인으로서 하나님에 대한 뚜렷한 확신 안에서 난폭한 권력에 대항하며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절감할 수 있습니다. 발전만능주의가 우리를 미혹케하던 긴 세월이 지난 오늘날 이제 우리는 바울과 그의 공동체가 부활 아래서 무엇을 이해했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죽은 자 가운데서 첫번으로 나신 이라고 본문이 말합니다(골1:8). 여기서 그리스도를 우리와 구분하여 경계선을 긋는데, 그리고 그를 또 다른, 도달되어질 수 없는 위치에 올려놓는 데에 본문의 관심이 있는게 아니라 그와 우리를 함께 보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늘로 올라가시듯 올리우시면 안됩니다. 이것은 오래 전에 발생했던 일입니다. 대신 우리가 올리워야 합니다: 우리는 결국 무지막지한 권력의 독재 밑에서 무기력하게 사는게 아니라 진정한 삶을 영위해야 합니다. 본문말씀은 부활이 오늘 현재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사건이라는 점을 전혀 의심할 여지 없이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죽은 다음에 부활할 때 까지 기다리면 안됩니다! <여러분은 세례를 받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게 묻혔고 동시에 그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와 함께 다시 살게 된 것입니다.>(골2:12). 우리가 무지막지한 권력에 복종하는 한, 우리가 우리의 삶을 마귀적 세계권력인 돈과 폭력, 자본주의와 군사주의에 내맡기게 되는한 우리는 죽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매일마다 대략 4만명의 인간이 포악한 권력에 의해 생명을 요구받는 이런 상황을 우리가 인정해 버린다면, 그리고 우리 자신을 지배당하게 하고 다른 이들을 파괴하는 데에 여전히 계속 동참하게 했다면 우리는 죽은 거나 진배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가까이 계시지 않고 우리가 하나님을 일종의 운명과 바꿔치기해 버렸기 때문에 우리는 이미 죽은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 것도 희망하지 않았고, 또한 아무도 알고지내지 않았기 때문에 죽은 것인데, 이는 곧 희망이 약한 이들의 상호협동 가운데서 발생한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는 걸 뜻합니다. 우리는 아무런 목표도 갖고 있지 않았으며 또한 이로 말미암아 우리의 사랑이 성장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시들어갔기 때문에 죽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삶을 얻었으니 위에 있는 것들을 추구하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오른 편에 앉아 계십니다. 여러분은 땅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지 말고 위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시오.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골3:1-3). 우리의 죽음은 우상숭배, 즉 가공할만한 권력에 대한 아부인데, 여기서 우상숭배라 함은 재물에 대한 욕망이라 불리우는 탐욕입니다(골3:5). 죽음이 생물학적인 종말에서 일어나듯이 생명도 그렇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죄 가운데서 죽었었고 또 육체의 할례를 받지 않았다는 데서 죽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주셨습니다.>(골2:13). 우리가 반드시 치루어야하고 우리 삶의 형태와 함께 필수적이게 될 죽음으로 부터 부활한다는 것은 일종의 시간내적 사건인데, -이는 종교적 전통의 다른 위대한 상징인 엑소더스, 즉 에집트의 노예로부터 해방되는 사건에 못지 않은 것입니다. 엑소더스와 부활은 아주 긴밀히 연관되어 있는데, 이는 해방을 일컫는 두 방법입니다. 우리는 이것들을 서로 분리해서는 안되며, 또한 한 백성에 해당되는 하나의 외적, 정치적, 경제적 사건으로서의 엑소더스를 한 개인에게 해당되는 피안적, 내적인 사건으로서의 부활로 부터 구분해버리면 안됩니다. 우리가 에집트로 부터의 엑소더스를 기억하여 간직하지 않는다면 죽음을 넘어서는 개인적 사건으로서의 부활에 대한 신앙이 본래 바울이 말하고자 했던 것과 상관 없게 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구조적 폭력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로 생각합니다. 이 승리의 결과로 그리스도는 이 권력들의 완전한 무장해제를 앞서 실행해 나가십니다: 팬타곤과 크레믈린의 모든 관료들이 어떻게 무장해제를 당하는가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인간을 향한 강제적 명령이 없으며, 자신들의 미디어로 새로운 적대감을 생산할 가능성도 없고, 강국으로서의 지위와 돈을 그리스도의 승리를 위한 일련의 조치와 공공연하게 병행해 나가는 일이 없게 되는 것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때가 되면 힘과 권세로서는 어느 누구도 더 이상 놀라게 하지 못하며, 또한 저들이 우리의 아들들을 더 이상 대학입학과 특권으로 미혹할 수 없으며, 우리의 딸들이 무기를 만들고 폭탄을 조작하는 손들에 의해 더 이상 뜨개질만 하도록 방치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활이란 과거 역사에 한번도 없었던 사건으로서, 백성의 피를 빨아먹는 마귀를 극복하는 승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활은 마지막 원수, 즉 죽음으로 부터의 해방입니다.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됩니까? 언제 이 권력들이 그 힘을 잃고 용서받게 될까요? 언제 폭력적인 죽음이 사라지고, 언제 우리는 결국 더 이상 살인자, 흡혈자, 이 땅을 욕보이는 폭력사용의 놀이를 하지 않게될까요?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 마음으로 그의 원수가 되어 악한 일을 하던 너희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하셨습니다‥‥>(골1:21). 죽음의 관제탑 속에서 단추를 누르는 권력 엘리트를 해방시킬 뿐만 아니라 마귀에게 끌려다니면서 로마의 평화와 그리스도의 평화를 교묘하게 연결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그리스도에게 속하며 동시에 <여전히>(Noch) 무사안일에 머무르고 있는, 그래서 마치 우리가 오랫 동안 존재하지 않던 위협을 <여전히> 어떻게해서라도 산상수훈과 연결시킬 수나 있을듯이, 그리고 우리가 <여전히> 그리도와 이윤추구의 신들을 겸하여 섬길 수 있을듯이 생각하는 우리 모든 동조자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그리스도는 얼마나 강해져야 할른지!

오늘 죽음에서 첫번으로 나신 이가 권력에 대한 항거와 자유 안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작년에 저에게 또 다시 이런 상황이 주어졌습니다. 2차세계 대전의 대중살해 후 40년이 지났는데도 그것으로 별로 교훈을 얻지 못한 우리 백성들에 대한 회의, 그리고 부유한 산업국가의 중산층을 향한 희의가 내 온몸을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누가 과연 이 죽음의 육체에서, 우리 사회의 육체에서 나를 구원하게 되겠습니까? 누가 불의를 행하라는 이 강제로 부터 나를 자유하게 할까요? 마귀들에 의해 농락당하고 저들의 토크쇼에 의해 부끄러움을 당하고 저들의 거짓말로 현혹당해서 어느 한가지도 분명히 알지 못하며, 앞으로도 뒤로도 오갈 수 없는 내 영혼을 누가 구원하게 되겠습니까? 그리스도는 평화를 심으시고 땅에 있는 것이나 하늘에 있는 것이나 모두를 용서하십니다. 이것은 무자비한 권력자들 앞에 선 우리를 꽃병 받침대 같은 것으로 우리를 보호하시는 내적인 평화만이 아니라, 전쟁의 힘과 관계되어 있는 사실적인 평화입니다. 왜냐하면 이 평화는 그런 권력자들에 대한 복종을 거절하기 때문입니다. 폭력은 굴복시키는 힘입니다. 우리들은 일반적으로 생각하기를 지배적인 불의 아래 굴복하는 것은 폭력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폭력의 다른 한면만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지배하는 폭력, 즉 동조하는 것의 부정적인 면을 비폭력성이라고 혼동해 버리면 안됩니다. 폭력으로 부터의 참된 자유는 그 폭력에 대한 항거, 거부, 비협조에서만 오직 가능합니다; 참된 자유, 그리스도의 자유는 스스로 폭력 밑에 빠져들어가는 것에 놓여있지 않습니다. 오늘 대량학살무기를 실어나르는 차량의 길을 가로막는 젊은이들은 구속당하고 전과자가 되므로써 경력과 직업교육의 기회를 잃어버리게 되지만, 그들은 권력의 지배력으로 부터 자유해 있습니다. 부활은 항거와 나뉘어질 수 없습니다.

 

1. A. Cohen, Everymen’s Talmud, New York 1975, S.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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