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해방의 해

땅은 하나님의 것이다 조회 수 3292 추천 수 0 2011.01.31 11:40:28

땅의 안식,

인간의 안식

안식년

<성경본문> 레25:1-13, 공동번역본

 

안식년

야훼께서 시나이산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일러 주어라. ‘너희는 내가 주는 땅으로 들어 가서 야훼의 안식년이 되거든 그 땅을 묵혀라. 너희는 육년 동안 밭에 씨를 뿌리고 육년 동안 포도순을 쳐, 그 소출을 거두어라. 칠년 째 되는 해는 야훼의 안식년이므로 그 땅을 아주 묵혀 밭에 씨를 뿌리지 말고, 포도순을 치지도 말라. 너희가 거둘 때 떨어진 데서 절로 자란 것을 거두지 말고, 순을 치지 않고 내버려 둔 덩굴에 절로 열린 포도송이를 따지 말며 땅을 완전히 묵혀야 한다. 너희 땅을 묵히는 것은 너희 뿐 아니라 너희 집에 머무는 너희 남종과 여종과 품꾼과 식객까지 모두 땅에서 나는 온갖 소출을 먹고 살 수 있을 것이다.

희년

너희는 또 일곱 해를 일곱 번 해서, 안식년을 일곱 번 세어라. 이렇게 안식년을 일곱 번 맞아 사실 구년이 지나서 일곱째 달이 되거든 그 달 십일에 나팔 소리를 크게 울려라. 죄벗는 이 날 너희는 나팔을 불어 온 땅에 울려 퍼지게 하여라. 오십 년이 되는 이 해를 너희는 거룩한 해로 정하고 너희 땅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해방을 선포하여라. 이 해는 너희가 희년으로 지킬 해이다. 저마다 제 소유지를 찾아 자기 지파에게로 돌아가야 한다. 오십 년이 되는 해는 너희가 희년으로 지낼 해이니, 씨를 심지로 말고 절로 자란 것을 더두지도 말며 순을 치지 않고 내버려 두었는데 절로 열린 포도송이를 따지도 말라. 이 해가 희년이니, 이 해를 거룩하게 지내야 한다. 너희는 밭에서 난 소출을 먹고 지낼 수 있을 것이다. 이 희년에 너희는 저마다 자기 소유지로 돌아가야 한다.’”

 

도로테 죌레

해방의 해

성서연구, 레25:1-13

 

안식

우리는 노아를 통해 우리에게 창조의 기억을 불러일으킨 하나님의 계약에 대해 지금 껏 이야기했습니다. 또한 우리는 우리의 무력감과 약속 받지 못한 고독에 대해 하소연 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해방을 뜻하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운명의 잘못된 숭배로 부터 서서히 벗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주신 거대한 계약을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리가 사실적 역사로 움직여 가는 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모세와 시내산에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기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말하여 가르치라고 했습니다: 내가 그대들에게 줄 땅에 들어가게 되면 그 땅으로 주님에게 안식일의 축제를 드리게 하라.(레25:1이하).

안식일의 축제 때는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나야만 합니까? 십계명은 온세계의 언어로 번역되었습니다. 이 세계 언어들은 “하늘”과 “땅”, 그리고 “형상”, “하나님”에 해당하는 단어들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계 다른 어떤 말로도 번역될 수 없는 한 단어는 안식일(Sabbat)이란 말인데, 이는 노동하는 육일이 지난 이후 휴식하는 날, 축제를 여는 날을 뜻합니다. 아마 유대인이 모든 인류에게 물려준 가장 큰 선물은 이 안식일이라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현대 유대인 신학자인 헤쉘(Abraham Joshua Heschel)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안식일이란 무엇인가? 모든 인간의 왕됨에 대한 기억, 주인과 종, 부자와 가난한 자, 성공과 실패의 구별에 대한 지양이다.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문명과 사회와 업적과 공포에 대한 우리의 마지막 독립성을 경험하는 것이다. 안식일은 모든 인간이 동등하며 인간의 이 동등함이 불공평을 없앤다는 믿음에 대한 실체적 체험이다. 인간의 가장 큰 죄는 인간이 왕의 아들임을 망각하는 것이다. 안식일은 영혼이 우주 보다 더 크며, 따라서 재물로 부터의 자유가 구원이라는 사실의 확증이다. 우주는 육일 동안 창조됐는데 창조의 정점은 일곱 째 날이었다. 육일 동안 창조된 것은 좋았지만, 일곱 째 날은 거룩하였다. 안식일은 시간 안에 들어온 신성이다.>1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안식일을 축복하사 <거룩케> 하셨다는 게 바로 창세기 기자의 설명입니다(창2:3). 육일 동안 일한 다음 한 날이 일상적 경험으로 부터 중단되고 거룩해진다는 것, 이는 곧 인간의 삶과 사회적 비젼에 대한 전체 계획의 내적인 핵심인데, 이 핵심은 우리가 필요로 할 뿐만 아니라 우리 삶의 뿌리가 놓여 있는 그것이기도 합니다. 거룩해져야 한다는 말씀의 내적인 핵심은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대로 안식년, 희년, 속죄년이라는 단계로 발전합니다. 성서에 따르면 우리는 안식일과 안식년과 속죄년을 거룩하게 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간을 해방의 시간으로 만들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거룩하게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자들은 이 시간 이후가 아니라 이 시간 안에서 활동해야합니다. 예컨대 가혹한 봉건영주 체제 시대인 중세기 때 많은 성자 축일이 바로 민중을 위한 안식일의 한 조각이었습니다. 종교개혁이 여러 지역의 성자들을 정리하고자 했을 때 이것은 바로 자유의 니쉐(Nische, 꽃병 따위를 올려좋기 위해 만들어 놓은 벽의 오목한 부분, 역자주)를 깨부순 것이며 민중적인 노동의 정열을 무자비하게 파괴시킨 행위였습니다. 인간은 생산과 재생산을 위한 다른 시간이 필요합니다; 즉 시간 안에서 거룩해져야 합니다.

유대인들의 삶 가운데는 일한 다음에 갖게 되는 휵식의 축제가 놓여 있습니다. 창조에 대한 기억과 하나님이 만드신 것을 음미하고 기억할 수 있는 축제가 있었습니다: 안식일에 하나님의 약속은 갱신됩니다. 요리하지 않아도 먹을 수 있는, 함께 살아가지는 않지만 사랑이 생성되는 축제의 중심에, 그 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약속은 이 땅과 함께 갱신됩니다. 인식년 계명의 원전은 이렇게 말합니다. <매 칠년 마다 땅을 경작하지 말고 쉬게하라. 그것으로 백성들의 가난한 자들이 거기서 양식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나머지는 들짐승들이 먹을 것이다.>(출23:11). 우리의 본문에서 땅의 휴식기가 주로 생태학적으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땅은 하나님의 안식에 포함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 보다도 중요한 것은 많은 전승 가운데서 인간의 일, 땅에 대한 존경, 사회적 태도와 하나님의 축복 사이에 있는 관계성을 파악하는 것입니다. 노동법, 생태학, 정치적 경제학과 신학은 상호관련되어 있습니다. 안식일과 안식년을 우리는 이렇게 이해하고 거룩하게 지켜야 합니다. <그 땅으로 여호와 앞에 안식하게 하라.>(레25:2). 안식년은 땅을 보호하는 장치이며 땅에서 살아가는 조치입니다. 두 다리, 혹은 네 다리 가진 동물, 식물과 물, 공기와 모든 것들은 휴식, 멈춤, 사색의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가 땅을 위해 하나의 안식을 바라는 뜻에서 우리의 화학공업을 일년간 정지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멋진 일이 되겠습니까. 끔찍한 생산품을 최소한 한 순간만이라도 멈추고 정지시키려는 많은 평화주의자들의 시도는 생명에 대한 이해가 우리와 비슷한데서 시작되고 있습니다.

성서는 근본적으로 안식에 대해 다음과 같은 입장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즉 땅의 현재 소유주는 역시 그 땅의 주인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시편24:1). 땅은 그 땅을 사서 자기 이름으로 등기한 자의 것이 아니라, 다른 소유주가 있는데 그는 벌써 오래 전에 거기 있었고 다음 세대에도 역시 땅에 대해 책임을 지시는 분입니다. 안식년의 실행에 대해 우리가 선택한 본문말씀의 같은 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 터와 땅은 언제나 매매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땅은 내것이며, 너희는 나와 함께 하는 나그네며 손님이기 때문이다.>(레25:23).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하는 모든 토지거래 행위는, 땅은 하나님께 속했다는, 기초원리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개개 가족들과 그 후손들은 잃었던 토지를 다시 되돌려 받으려고 요청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설령 잘못으로 그 땅의 사용권을 잃었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정당한 소유주로 남아 있었습니다. 여기서 “땅은 하나님께 속했다.”는 문장은 두번 째의 기본적 생각과 관련됩니다. 하나님이 이 땅의 소유주이기 때문에, 인간들은 수고와 염려로 소비할 피요가 없습니다. 대신 쉬고 안식의 자유를 즐길 수 있습니다. <염려하지 말라!>라고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해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왜냐하면 생명이 음식보다, 몸이 의복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눅12:22이하). 이 염려에 대한 금지명령은 땅이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안식년이 와서 일년 동안 땅을 묵혀두더라도, 육년 동안 이 땅이 충분한 결실과 충분히 배부를 수 있을 만큼 수확을 거두어 들였기 때문에 얼마든지 다음 수확 때 까지 먹을 수 있습니다. 물론 집짐승이나 들짐승을 위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르조아 신학과 해방신학

이제 잠시 우리의 주제를 바꿔 이번 선교대회의 표어에 대해 무언가 말씀해 보고자 합니다. <땅은 주(主)께 속했다.> 제가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 하나님에 대한 표시로서 주<Herrn>라고 칭한 것이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보다 덜 성(性)적으로 표현해야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땅은 우리의 어머니인 하나님께 속했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다른 이유로 해서 저는 이번 표어가 마음에 들었으며 자랑스러웠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편벽스러운 생각을 가진 어느 누구라도 땅이 하나님게 속했다는 신학적 문장을 비정치화 할 수 없으며, 또한 무미건조한 개인주의적, 그리고 피안적 기독교 건설을 위해 왜곡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늘은 하나님의 것이란 말을 공산주의자들이 한번도 문제 삼지 않았다는 걸 기억하십시요! 땅이 하나님께 속했다는 말은 모든 진지한 신학적 문구와 같이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의미와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만약 우리가 거기서 결과만을 취해서 그것을 오직 경건한 생각으로 평가절하 시킨다면, 그것은 건강하지 못한 신학입니다. 즉 말씀과 전통에 위배되는 신학으로서 산상수훈을 사적인 것으로 축소시키고 평화정치적인 폭발력을 제거시킨 우리의 왕궁신학자의 시도와 같은 것입니다.

오늘 두 가지 신학이 존재합니다. 좀더 정확히 말해서 두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그 신학들은 더 이상 기독교인들이 카톨릭적이거나 개신교적이라고 규정하던 16세기의 신앙고백 속으로 숨어들어갈 수 없습니다. 오늘날에는 부르조아 신학과 해방의 신학이 있을 뿐입니다.

부르조아 신학은 무엇 보다도 그들의 개인주의에서 그 특징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신학은 인간을 믿음 안에서 위로와 영적인 평화를 발견하는 개인적인 존재로 간주합니다. 그들에 의하면 현대의 삶은 우리를 매우 피곤하게 만들며, 스트레스와 경쟁과 인간의 고독은 무시무시할 정도로 거대하다고 합니다. 바로 이런 면에서 기독교는 -죄로 부터 용서받음으로써- 위로와 구원을 가져온다고 주장합니다. 결국 하나님 나라는 이런 개인구원이라는 작은 테두리 안에 갇히게 됩니다. <악에서 구하소서>가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 보다 더 중요하게 됩니다. 이 양측의 기도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에도 말입니다. 부르조아 신학은 백인의, 상대적으로 많은 걸 갖고 있는, 남성들에 의해 규정된, 즉 남성중심적으로 생각하며 살아가는 중산층의 산물입니다. 그들은 빈민 대중에 대해 모른체 했습니다. 굶는 사람들은 기껏해야 선행을 베푸는 대상으로 등장하게 될 뿐입니다. 이 신학에서 그외에는 성적인 문제나 죽음에 대한 문제가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문제 보다 훨씬 중요하게 작용합니다.

그러나 지난 20년간에 걸쳐 또 하나의 신학이 등장하게 되는데, 그 신학은 백인이 아니며 상대적으로 부유한 이들이 아니고 남성중심적이지도 않은 이들에 의해 움직여지는 해방신학입니다. 그 신학에서 신앙이란 무엇 보다도 평범하거나 저속한 인생들에게 다가오는 위로가 아니라, 오히려 살아가고 희망하고 행동하는 일종의 방식으로 느껴집니다. 여기서의 신앙이란 인간의 가슴으로 부터 나오는 일종의 혁명을 의미하는데, 대충 말하자면 예수님이 오랫 동안 앉은뱅이였던 사람에게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일어나라! 너의 자리를 들고 가라!>(막2:9). 그리스도는 위로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우리의 삶을 변화시켰습니다. 가난하고 무식하던, 그들 중 많은 수가 역시 여자들이었던 예수님의 첫 제자들에게서 보는 것 처럼 오늘도 역시 신앙의 바닥공동체에서 이런 형태로 서로 살아가고 서로 교제를 나누고 조직하고 서로 축제를 열고 투쟁하게됩니다. 새로운 삶이라 할 이런 방법은 여러 경우에서 기독교인들이 멸시당하고 거리낌이 되고 또한 직업적인 불안정 가운데 빠져들게 합니다; 즉 제삼세계에서 신앙적으로 살려고 하다보면 핍박받고 고문당하고 심지어 죽음에 이르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해방신학은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시작됩니다. 남아프리카의 난민, 엘살바도르의 피난민지역, 스리랑카의 방직여공들로 부터 시작됩니다. 그렇다고 해방신학이 우리에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삼분의 이에 해당되는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는 심각한 궁핍 속에 살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이 문제점의 한 부분에 속합니다. 국제회의, 예컨대 UNCTAD 같은 국제회의에 참석하는 우리 대표들은 원칙상 미국 대표들의 회유에 말려들어, 가난한 나라들이 경제정치적 상태를 변화시키려는 주장을 반대합니다. 우리는 구경꾼이 아니며, 우리는 희생자가 아니며, 오히려 우리는 심각한 궁핍을 유발시키는 행위자들입니다. 그러므로 해방신학은 우리가 협조하거나 아니면 방임해도 좋을 어떤 신학적 유형이 아니라, 이는 해방을 누리고 있는 제 일세계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제공해 주신 신앙의 표현인데, 우리가 누리는 이 해방은 무죄한 이들을 심각한 궁핍 속에 빠뜨리고, 어린 아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으며, 가난한 이들의 희망을 경찰정부와 군사독재와 공공연한 전쟁으로 말살시켜 버리는, 그런 두려운 역할에 의해 주어진 해방입니다. 해방신학은 가난한 이들이 스승이라는 기본명제를 타당하게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가장 소중한 것을 가난한 이들로 부터, 가난한 이들을 통해 배웁니다: 기술과 지식은 아니지만 믿음과 희망을 배웁니다.

서구라파에 의해 지배받은 백성이 어떤 상태에 있는가 하는 문제를 주제로 대화하는 중에 한 젊은 스위스 교사는 내게 짧막하게 질문했습니다. 어디서 그런 희망을 얻을 수 있는가라고 말입니다. 우선 그에게 대답해 주고 싶은 바는 이렇습니다. <눌림받은 한 백성을 군사적 강권 밑의 노예상태로 부터 구출하신 적이 있는 하나님을 향한 나의 신앙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이 신앙은 나를 이끌어가는 <나의> 신앙이 아니라 그것은 정말 포기하지 않는 가난한 이들의 신앙이요, 희망이라는 사실이 저의 가슴에 충격적으로 와 닿았습니다. 그들이 의심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 한, 그리고 그들이 그걸 계속 유지하는 한, 돈과 군사무기나 계산하고, 그러나 핍박받는 자들의 긍지심과 투쟁의지를 인정하지 않는 분석방법을 갖고 우는 모양과 기가 죽어 있는 자세로 다음과 같이 말할 최소한의 권리 조차 우리는 갖고 있지 못합니다: 인간은 무능력하다! 이제 저는 남아프리카의 용감무쌍한 여성인 위니 만델라(Winnie Mandela)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녀의 남편 넬슨 만델라는 흑인 해방운동의 유명한 지도자인데 20년 이상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남아프리카의 무시무시하고 잔인한, 그리고 수십 년 계속되어 온 흑인들의 투쟁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희망을 가르쳐 줍니다. 가난한 이들은 정말 우리에게 스승입니다!

부유한 제 일세계에 있는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세계가 하나의 단절을 완성시킨다고 생각합니다. 자신들의 가치와 척도로, 또한 그들에게 있는 삶의 적응력으로 그 단절을 없앤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라도 신뢰 하나로는 부족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혁명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성서를 이해하려고 한다면 성서를 가난한 이들의 눈으로 읽어야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만약 오늘 우리가 여기에 이처럼 “땅은 하나님께 속했다”는 슬로건으로 모였다는 사실을 제 삼세계의 형제와 자매들이 알게된다면 아마 그들은 놀라움과 감사의 환호를 질렀을 것입니다. 그들은 절실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땅은 United Fruit Company에게 속한 것이 아니며, 또한 Standard Oil 회사에 속한 것도아니고, Somosa-Clan사에 속한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땅은 하나님께 속했다”는 명제의 의미는 그들에게 있어서 이 땅 위에 있는 인간 역시 하나님께 속한 것이지 노예주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듯이

저는 여기서 우리의 성서본문으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안식일의 성립에 대한 세번 째 범주에는 속죄년, 희년, 해방의 해가 있습니다. 이것들은 법전으로 규정되는데, 그런 법전은 이스라엘 경제구조에서 시작하여 가난한 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우선적 사랑을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서, 1979년 푸에블라에서 개최된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가 주창했던 것 처럼 <가난한 이들을 위한 하나님의 우선적 선택>입니다. 저는 여기서 경제적 요인의 네 가지 근본적인 결정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바로 해방의 50번 째 해에 합당한 결정들입니다. 모든 노예들은 해방되어져야 하며, 땅의 소유권은 본래의 소유주에게 돌아가야 합니다. 경작지는 안식년 처럼 묵혀야 하며, 잘못을 저지른 모든 이들은 무죄한 것으로 속죄를 받아야 합니다.

이런 법규정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이중의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첫째 기능으로, 이 규정들은 원래 땅을 갖고 있었지만 채무자 신세가 된 빈농들을 그 채무로 부터 해방시킵니다. 둘째 기능으로, 이 규정들은 백성들 중에서 극빈한 이들과 최저생활자들을 보살폈습니다. 이 규정들은 그런 가난한 이들을 보호하고 그걸 위한 사회적 장치를 만들어내게 했습니다. 물론 이 사회조치법이 일관되게 적용되었는지, 혹은 다만 유토피아적인 희망 사항으로만 남아 있었던 건 아닌지에 대한 논의의 여지가 있긴 합니다. 이런 규정들이 실제로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는 역할을 감당했을까요? 이 사실, 즉 이 규정들이 이스라엘의 경우에 헌번의 기초로서 존재했으며, 거룩한 전통의 부분들이고 또한 그렇기 때문에 오늘 여기서 우리에 의해 읽혀지고 논의되고 있다는 사실은 현실적 세상과 관계 없이 만들어질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이런 전통이, 신학자들이 <종말론적>이라고 부르는, 그래서 모든 역사적 시간이 마지막에 이루어지는 보다 아름다운 유토피아적인 환상에 기인한다고 아무도 우리에게 말할 수 없습니다. 성서의 큰 환상들, 즉 노예들이 풀려나고 칼로 보습을 만들고 사자가 어린양 곁에서 운다는 성서의 위대한 환상 처럼, 이런 법규정과 형식이 사실적 관계성 없이 진술된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보다 나은 질서를 위한 구체적이고 사회역사적인 시안들이 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이러한 사회법은 오늘 우리가 평화운동 안에서 활성화 시키고 있는 점진적인 군축계획들과 유사한 것으로 재분배를 위한 현실적인 제안들입니다. 궁핍에 대한 관심은 이스라엘에 있어 순전히 개인적인 행위만은 아닌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위급한 상태에 놓여 있는 가난한 이들과 과부들과 고아들은 그 공동체에 의해 보호받을 권리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듯이 그들은 스스로 과오를 저지른 이들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맺은 약속의 경제질서, 그리고 안식일에서 현실사회적 모습을 취하는 약속의 경제질서는 필요와 소유의 분배에 있어 동등성에 기인합니다. 하나님이 광야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먹이신 만나에 대한 이야기에서 매우 분명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에게 양식을, 즉 하늘로 부터 내려오는 떡을 공급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키는대로 하였다. 많이 거두어 들이는 사람도 있었고 덜 거두어 들이는 사람도 있었으나, 오멜로 되어보면 많이 거둔 사람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사람도 모자라지 않았다. 결국 저마다 먹을 만큼씩 거두어 들였던 것이다.>(출16:17이하).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사람들은 필요한 만큼 양식을 갖게 됩니다. 사실적인 비상사태는 이와 같은, 말하자면 필요가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경제구조에서, 예컨대 대재해를 통해 공동소유의 동등한 혹은 올바른 분배가 파괴되었을 때 발생합니다. 혹은 질병이나 죽음과 같은 개인적인 불행을 통해서 그렇게 되었을 때도 발생합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책임은 특권층에게 있었지 가난한 자들 자신에게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노예로 부터 구해냈듯이, 그 백성들의 경우에도 사회적으로 강한 자들이 약한 이들에 대한 책임을 가져야만 합니다.

저는 불공평하게 혜택을 받고 있는 사람의 조합공동체 형태에 대해 언급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는 이 조합공동체가 깨어져 버린 시대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산업국가 안에서 살아가는 실업자들, 교육을 못받은 사람들, 별로 똑똑하지 못한 사람들이 당하는 가난의 행렬에서 참으로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출현하게 되는데, 그것은 유대-기독교적 책임감 있는 공동체 전통이 마지막에 처했다는 걸 의미합니다. 가난한 이들, 특히 미국과 프랑스에서 아주 분명하게 언급되고 있는 이 가난한 이들은 스스로의 잘못으로 그렇게 됐다고 하는 것입니다. 부자들은 불안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의 호화로운 생활은 확실한 선이며 경제적 발전입니다. 부자들을 위한 감세를 통해 그들은 더욱 부유해 집니다. 빈익빈부익부 현상은 갈수록 확대되고 있으며, 이건 그렇게 나쁜 일이 아닙니다. 부자들은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을 별로 갖지 않으며 그저 힐끗 쳐다보며 살아갈 뿐입니다. 가난한 이들은 대중매체에 의해 사회적 주제로 부터 숨겨집니다.

로날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점점 상태가 불량해 가는 미국의 가난한 이들에 대해 말할 때, 자신의 대답에서 소위 가난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대신 부유하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이 언어적 유희는 제가 주장하려는, 즉 가난한 이들을 더 많이 의식해야 한다는 사실성에 대한 부정을 뜻하고 있습니다. 흡사 가난한 이들이 우리에게 속하지 않은 것 처럼, 그들이 전혀 다른 종족이었던 것 처럼, 즉 그들을 동물원 안에 있는 희귀한 동물 처럼 여기게 되는 그런 종족인 것 처럼 말입니다.

전환기에 선 오늘의 국면에서 우리가 성서에 대해 생각하고, 무엇을 그리고 어떻게 성서는 사람에 대해 말하고 거기서 부터 해방의 전통이 어떤 것이었나를 기억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봅니다. 안식년과 속죄년은 이스라엘이 만든 사회적 안전장치의 한 부분들인데, 이 장치는 인간의 필요에 있어서 기본적으로 평등을 출발점으로 삼습니다: 모든 사람은 이슬을 피하기 위해 저당잡히면 안되는 겉옷이 필요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일용할 양식과 집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땅과 양식의 공의로운 분배를 주장하는 일은 불행과 범죄를 방지하기 위해서도 항상 다시 시도되어야 합니다: 시기에 따라 새롭게 분배되는 일은 자유방임적 상태에서 곧잘 파괴되어버리는 공의에 대한 분명한 요청입니다. 바로 이해되었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자유는 우리가 만들어가는 억압과 포로됨으로 부터 다시 회복되는 해방인 것 처럼, 평등은 하나님 앞에 있는 모든 인간의 평등에 대한 균등화입니다. 모든 이들은 공기와 물이 필요합니다. 모두에게 하나님이 햇빛을 비춰주십니다. 모두는 일하고 사랑하기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안식의 비밀은 이렇습니다: 거듭해서 모든 일곱 째 날, 모든 일곱 째 해 그리고 일곱 째 해의 일곱 번 째 되는 해에는 평등이 다시금 건설되어야 합니다.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과 그것의 기회를 평등하게 나누어가져야 한다는 주장은 사실적이어야 하며 거듭해서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주장들은 금세기 이후 최근의 이데올로기적 관점에서 <평등을 강제로 만들려는 행위>라는 누명을 썼습니다. 성서가 말하는 평등이 다시 한번 공산주의적인 것으로 내몰렸습니다. 4천년의 오랜 전통이 이렇게 어처구니 없는 것으로 평가받았으며, 대신 성서가 자본주의와 동화되기도 했습니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같이 섬기지 못한다!(마6:24). 이 성서말씀에서 우리는 질문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평등을 강제로 만들려는 행위>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가 가난한 이들과 궁핍한 이들에 대한 책임을 희생자들에게 맡겨 버릴 권리를 갖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이유에서 특권 엘리트 집단이 우리에게 피해자들을 돌보고 가난한 이들에게 경제적 힘을 실어주는 책임과 사회조합계약의 해약을 통지하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사회구조와 질서를 평등하게 잡아나가려는 사회법은 오늘 우리가 국제적으로, 그리고 점차 세계적으로 가난한 이들과 부한 이들이 투쟁하며 살아가고 있는 이 와중에서 문제를 풀어가기 위한 필수적인 조치입니다. 이 말씀을 여러분들이 단순히 유토피아적이라거나,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생각한다면, 성서가 이렇게 말씀하는 걸 들어야 합니다. 너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며 해방의 해를 거룩하게 하라! 또한 솔로몬의 잠언에 보면 환상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고 했습니다(잠29:18). 우리가 우리의 바램과 희망을 더 이상 생각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천하지 않는다면, 또한 우리가 그것을 정치적, 경제적 그리고 사회법적인 차원으로 성문화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기포기입니다.

저는 오늘 절실한 구체적 요청을 궁핍이란 점에서 한 예를 들어 설명해 보려고 하는데, 이것은 바로 얼마 전에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가 말했던 그것입니다. 그는 비난하기를 니카라과는 혁명을 수출한다는 점에서 이웃 나라에 일종의 위험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카스트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 삼세계에 속한 나라들의 <혁명 유발요인>은 국제통화기금(IWF)이 펼치는 정치인데, 말하자면 지나치게 불어난 외채, 고율의 이자, 성장의 하락, 가난, 산업의 보호무역주의, 혹사 등이라고 말입니다. 이러한 요인들은 인간이 견딜 수 없는 상태를 만들어낼 것이며, 그런 문제를 조정하지 않고는 정치적 안정을 찾을 수 없습니다. 제 삼세계의 부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카스트로는 이렇게 제의했습니다. 이런 나라들 중에서 가장 문제가 심각한 나라를 그 채무에서 벗어나게 하며, 나머지 나라들에게도 역시 상당한 채무를 변제해 주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선진국의 경제는 이 채무의 한 부분씩을 스스로 감당할 수 있을 정도는 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AFP, 1985년1월13일).

제가 이 내용을 읽었을 때 왜 교황이나 우리의 기독교 정부가 이런 성서적 제의를 선듯 받아들이지 않는가, 하는 점에서 매우 의아하게 생각됐습니다. 왜 성서의 멧시지를 제가 공산주의자에게서 들어야만 할까요? 극빈한 자들을 그 채무로 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이 바로 성서가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할 때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즉 우리가 하나님께 저지르는 무례에 대해 용서를 빌 때, 우리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듯이>(마6:12)라는 부분을 덧붙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기도를 드리면서 우리에게 돈을 빚진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단 한번이라도 이 기도를 진지하게 드리고 우리의 경제와 정치의 희생자들을 생각했다면, 우리는 우리의 채무자들에게서 그 짐을 벗겨주려고 노력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눈 앞에 벌어지는 일은 극빈한 나라들에게 우리의 경제정치적 억압을 통해 그들의 목을 조이는 것입니다; 사회적 조치의 관심으로 쌀과 콩을 도와주었던 나라들은 이런 차고 넘치는 사회적 배급을 줄여나가야 한다는 압력을 받고 있다는 말입니다.

성서의 빛, 성서의 선명성, 성서의 순박한 아름다움, 그것의 꾸밈 없는 진리가 이제는 더 이상 부강한 나라에 사는 기독교인들에게 남아 있지 않은 것 처럼 보일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성서말씀을 읽기도 하고 해석하기도 하지만 구체적으로 실천하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영적으로 우리는 문맹자들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 하나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가 성서를 진지하게 대하려면 우리는 그것을 가난한 이들의 눈으로 읽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유일하게 정당한 성서해석은 희생자의 해석입니다. 제가 느헤미야 5장에서 소작농들이 채무자가 되었고 그들의 아이들은 노예로 팔려갔으며, 그들의 딸들이 부자들의 노리개감으로 되어버렸기 때문에 하나님께 어떻게 호소했는지를 읽었을 때 오늘 인도네시아와 타이완 그리고 여러 나라들에서 발생하는 일들을 생각했습니다: 농촌의 소녀들이 간혹 어린 아이일 때 이미 부유한 나라의 기생관광을 위한 노예로 팔리웁니다. 우리가 우리의 경제, 군사정치로 만들어 놓은 우리 세계의 이러한 사실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성서를 바르게 이해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땅이 없는 이들과, 채무자들, 그리고 동냥으로 먹고사는 이들의 궁핍을 목전에 바라보고 계십니다. 욥기서에 다음과 같이 극빈자들에 대한 묘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먹지 못해 굶주려 말라 비틀어지고

메마른 흙이나 씹으며 거친 들을 파먹고

덤불 속에서 자라는 짠나물과

대싸리 뿌리로 겨우 연명하며

“도둑이야” 하는 고함소리에 쫓기는 도둑처럼

인간세상에서 쫓겨 나던 그들,

급류에 팬 골짜기 벼랑에나 몸을 붙이고

땅 굴이나 바위 틈에 숨어 살면서

떨기나무 속에서 울부짖고

가시나무 밑에 웅크리고 있던

이름도 없는 바보 같은 것들,

회초리에 몰려 제 고장에서 쫓겨나더니(욥30:3-8)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의 약속과 안식으로 부르시는 세상의 모습입니다. 우리를 위한 안식, 땅을 위한 안식, 가난한 이들을 위한 안식 말입니다.

 

영의 양식

우리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인생의 시간을 거룩하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본문은 소위 성결법과 상관관계 안에 들어 있습니다(레17-26장). 이 성결법의 뿌리는 모세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있습니다: <이스라엘 어린 백성 모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거룩하라, 왜냐하면 너의 주 하나님 내가 거룩하기 때문이다.>(레19:2) 하나님은 <너희는 경외심으로 꿇어 엎드리라. 왜냐하면 내가 거룩하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지 않고, 너희는 거룩해져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먼지와 티끌에서 나온 인간존재가 어떻게 거룩해 질 수 있습니까? 아브라함 헤쉘이 대답하기를 인간이 하나님의 행위를 실천하므로, 그의 명령을 완성하므로 그렇게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사야서에 의하면 <거룩하신 하나님은 공의하심으로 거룩해진다.>(사5:16)고 했습니다. 우리는 선한 행위가 비밀스러운 하나님의 거룩성을 나타내주는 증거에 의해 살고 있습니다. 그의 빛은 우리의 이성을 뛰어넘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의지를 뛰어넘지는 않습니다. 선한 이들의 행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을 나타내는 것은 우리의 능력 안에 놓여 있습니다. 마치 하늘을 비추는 물과 같이 말입니다.2

하나님은 공의로우심으로 거룩해집니다. 하나님께 도달하는 또 다른 길은 없습니다. 저는 안식일 속에 표현되어 있는 생명의 거룩을 하나님의 내재성이라고 부르는 테마 밑에 놓아두려고 합니다: 이는 곧 우리 시대의 하나님의 존재이며, 우리 삶 속에서 누리시는 하나님의 안식입니다. 저는 안식일의 내용을 설명해 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그 형태를 파악해 보려고 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삶을 즐기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거룩하게 만들고 있습니까? 어떻게 우리는 우리 인생의 기능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안식일이 유대인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며, 안식일이 얼마만한 정도에서 하나님이 우리와 세우신 계약의 핵심인가 하는 점을 살펴보려고 할 때 오늘 기독교회가 지키고 있는 일요일(주일)로 부터 시작하는 것이 별로 의미가 없다는 사실은 저의 마음에 걸림돌이 됩니다. 우리의 일요일이란 다른 날 보다 좋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날들은 시달린 노동력의 재생산을 위해 기능화 되어 있을 뿐입니다. 그날들은 거의 모두에게 균형잡는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사실상 별다른게 하나도 없습니다. 일요일이라고 하는 단어는 우리의 평상언어 속에서 점차로 주말이란 말로 대체되고 있습니다. 유대 전통에 따르면 안식일이란 창조, 그리고 노예로 부터의 구원에 대한 기억에 바쳐진 날이기 때문에 요즘의 일요일이 차지할 공간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 영적으로 미숙한 나라에 살고 있는 셈입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이런 현상을 감지하고 있으며, 또한 굶주림의 한 형태 속에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굶주림이란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데, 우리의 젊은이들이 지금 영적 양식에 굶주려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보석과 과자를 찾지 않습니다. 그들은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영성을 찾습니다. 경건성, 명상, 직관력을 찾습니다. 그들은 삶의 무미건조한 흐름 앞에서 위협을 느낍니다: 교육, 직업, 경력 그리고 가족 자체가 가치있는 목적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러한 현실적인 가능성의 결핍, 즉 실업으로 인해 의미를 상실합니다. 인간의 자기확인, 자신이 되는 일은 더 이상 직업적인 일 보다 소중한 것으로 인정받지 못합니다. 종교적인 면에서 많은 이들이 영적인 미숙성에 머물러 있어서 존재와 논리의 위기에 빠져 있습니다. 흡사 우리가 안식일과 그것에 대한 기억과 그것의 약속을 축하하는 걸 배우지 못했던 것 처럼 우리는 그것에 대해 말하고 표현하는 걸 잃어버렸습니다.

모두가 점점 비슷해져 가고, 점점 강력하게 스스로 반복적으로 살아가므로써 우리의 삶은 무미건조하며 진부한 가운데 종말을 향하고 있다: 항상 경직되고 닫혀진 생각만 하고 있다: 함께 어울리던 사람들 하고만 어울리고 있다. 오직 그들 하고만: 이미 갖고 있는 정형화된 태도로만 행동한다. 이런 삶은 다른 이에게서 간섭당하지 않는 반복과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계속성으로 이루어진다. 인간이 만든 집은 점점 좁아지고 좁아져서 결국에는 자기가 누울 관이 되고 만다.3

너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라(출20:8)고 성서가 우리에게 안식일에 대한 기억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이런 명령은 삶의 경직성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이며, 또한 길들여지는 것과 균일화되는 것에 대한 비판입니다. 노동이 사물화 되고 우리 스스로 노동을 돈받는 것과 동일시 했기 때문에 노동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잘못되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자유시간이 안식일로 승화되지도 못하고 회상되지도 못하며 희망을 불러오는 어떤 형태를 만들지도 못했기 때문에 우리의 자유시간도 역시 잘못되었습니다. <안식일을 회상하는 것>은 당연하게 진행되는 일에 대한 거부를 뜻합니다. 안식일이란 자신을 중단하는 하나의 거대한 몸짓입니다.

저는 이제 안식일이 동유럽의 유대교적 전통의 쉬테틀에서 어떻게 실행됐는가 하는 점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이곳은 상상할 수 조차 없는 극심한 가난과 추함과 추위와 굶주림과 궁핍에 찌들린 마을이었습니다. 그러나 여왕이라 할 안식일이 찾아오자 일상적인 것들과 일반적인 일들이 중단됐습니다. 흰 식탁보가 가장 작고 더러운 오막살이에 펼쳐졌으며, 안식일 초에 불이 당겨졌습니다. 여자들은 비상시에 저당잡히곤 하는 장신구를 걸쳤습니다. 그 가난한 사람들은 이 땅위에서 걱정할 게 하나도 없는 부자처럼 행동했습니다. 천한 일을 하는 사람들, 특히 그런 여자들은 그런 일상적인 일을 그만 두었습니다. 그리고 쉬면서 인간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회상했습니다: 시편기자의 말 처럼 가장 높은 자의 아들과 딸들, 하나님 보다 조금 못한 자들, 존경과 보석으로 관을 쓴 자들(시8:6)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안식일을 지킨다는 건 축제로서 자신의 일상적인 관계를 중단하며, 또한 이로써 강제된 순화과정으로 부터 벗어나는 걸 뜻합니다. 여기서 중단이란 자신이 반복되는 작업에 대한 항거를 말합니다.

경건성이 무엇인가 하는 점을 보다 실감있게 표현해 보면 한 인간이 자신에게 집중하는 것만이 아니라 자신 스스로에게서 부터 벗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인간이 하나님께 속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실을 어떻게 감지할 수 있을까요? 우리와의 단절은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납니다. 한편으로 경건성은 자신의 악함으로 부터, 그리고 자기 폐쇄성으로 부터의 탈출입니다. 저는 단순히 작동하는 기계가 아니라 내 형제를 지키는 여자가 되기로 작정했습니다. 제 주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다시 한번 증명하겠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파괴하는 것들, 분노를 유발하는 것들, 광란하는 것들을 보게됩니다. 저는 그들과 의형제를 맺어 그들의 누이가 될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저는 의심하지 않고 살겠습니다. 저는 저의 훈련된 일정표를 찢어 없애겠습니다. 저는 저 자신을 기억하고 저 이상인 그 무엇을 발견키 위해 저 자신 안으로 들어가고자 합니다. 저는 <안식일을 기억>하고, 거기서 저의 고유한 슬픔 보다 더 위대한 어떤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저는 전통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아마 저는 성서를 읽고, 아마 기도하고, 아마 편지 한통을 쓰게 될 것입니다.

제가 여기서 피력하려 했던 점은 자신의 내부로 들어가는 길 그 이상입니다. 저는 저 자신에게만 속한 게 아닙니다. 자신의 폐쇄성으로 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알고 깨닫는 것으로 충분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자기중단은 하나의 형태를 필요로 합니다. 상호간 절망에서 헤쳐나오려는 말과 몸짓과 법칙, 그리고 그러한 시도를 필요로 합니다. 여기에 종교적 전통이 저들의 자리를 갖고 있습니다. 종교적 전통은 우리에게 우리의 기대와 두려움을 구체화 하도록 요청합니다. 또한 어떻게 인간이 보다 빨리 자기 중심의 순환과정을 깨뜨릴 수 있는가, 하는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기억하고 회상하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아주 간단하게 자신의 자유의지를 내동이쳐 버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의 능력 밑에서, 즉 객관적인 악과 주관적인 비극의 숙명적인 혼합 밑에서 자신의 자유의지는 더 이상 우리를 도와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외면적으로 우선 멈춰야 할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다른 이들과의 만남, 제가 다른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 책과 시편, 그리고 어떤 것을 유발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떤 존재가 되기 위해서라도 제가 참여하게 될 평화를 위한 침묵의 모임과 같은 집합물일지도 모릅니다. 저는 <땅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팻말을 만들어 군사훈련장 앞에 세워두겠습니다. 그런 훈련장은 바로 땅이 짓밟혀 뭉게지는 곳입니다. 저는 또 제가 거룩하게 만들어야 할 아주 작은 공간을 찾아내 보겠습니다. 한송이 꽃이나 제 아이의 사진을 걸어놓아 둘, 대량학살 무기고의 몇 미터 쯤 되는 철조망을 찾아보겠습니다. 저는 침묵 속에서, 상호간의 호흡 속에서, 꿈 속에서 다른 이들과 함께 시간을 거룩하게 만들어 보겠습니다. 저는 땅에 속했으며, 땅은 하나님께 속했다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저는 약속을 세웁니다. 저는 죄를 고백하며 하나님의 약속에 귀를 기울이겠습니다: <나, 너희 하나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해져야 한다.>(레19:2).

안식일은 유대교의 한 제도며 질서입니다. 한 날은 거룩해져야 하며 자신의 반복이 철회되고 일상성의 습관으로 부터 자신을 해방시켜야 합니다. 하나님의 내재하심은 내 형제의 웃음 속에서, 내 누이를 껴안아 줌으로써 가시적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그렇다면 경건성은 제도화 되어야 할까요?

제도화의 각 형태에 대한 두려움은 자신을 벗어나려고 연습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려 하는 우리에게 매우 강렬합니다. 제도 앞에서 갖게 되는 두려움은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노동의 분업, 습관과 순식간에 등장하는 전제주의와 그것의 군림을 두려워 합니다. 따라서 교회의 제도에 의해 수 세기 동안 정말 상처받은 여성들은 그들의 법칙과 그런 규칙적 질서를 배격합니다. 구조화된 종교는 여성들에게 부정적입니다. 차라리 저들은 자신의 자유의지를 신뢰하고 있습니다.

저는 자유의지가 우리의 영적인 공백상태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없다는 것에 두려움을 갖습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여 특별한 날로 만들라는 안식일에 대한 기억은 영적인 훈련을 위한 일종의 제안입니다: 즉 특별한 시간에 함께 모이고, 공동언어의 특별한 단어를 반복하고, 기대와 두려움을 서로 나누고, 빵과 포도주를 함께 먹고 마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행위가 없을 때 우리는 자기반복에 머물러 있게 됩니다. 우리는 안식일을 필요로 합니다. 창조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회상을 필요로 합니다. 이번 선교대회 기간을 커다란 안식일로 만들도록 합시다. 그 안식일에는 <나, 너희 하나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해져야 한다.>(레19:2)는 말씀이 놓여 있습니다.

1) A. J. Heschel, God in Search of Man. A Philosophy of Judaism, New York 1978.

2) A. J. Heschel, God in Search of Man. A Philosophy of Judaism, New York 1978. 290

3) Fulbert Steffensky, Feier des Lebens. Spiritualität im Alltag, Stuttgart 1984,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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