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넨베르그 사도신경해설 31강

7장: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묻히셨으며(3)

안녕하세요? 판넨베르그가 쓴 사도신경해설, 오늘 우리가 같이 공부하게될 내용은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고 단락에 대한 해명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읽으면요. 판넨베르그가 쓴 7장의 제목인데요.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묻히셨으며’ 고난, 십자가 처형, 장사지냄 이 세 단계의 예수님에게 일어난 일들에 대한 해명입니다. 예수님의 죽음, 여기에 대한 책임이 누가 있느냐 그러한 논의도 여기에 필요한 거구요. 예수님이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꼭 그렇게 죽어야 될 필요도 있었는가? 그러한 질문도 여기에 해당됩니다.

이거는 조금 어린아이 같은 질문인지는 모르지만요.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라면 굳이 외아들을 이 땅에 보내서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는 방식으로만 인간을 구원하셨겠느냐 하는거죠. 전능하다면 그러한 방식이 아니라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듯이 말씀으로 인간구원 이런 것도 가능하지 않느냐 하는거죠. 엄격하게 말하면 이건 틀린 점이 아니죠. 하나님은 모든 것이 가능하니까 말이죠. 그런데 굳이 십자가의 죽음, 아들을 십자가에 죽게 하느냐 하는 그러한 방식은 이거는 풀기는 쉽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그냥 기독교 교리니까, 그렇게 성경에 그렇게 쓰여져 있으니까 믿고 받아들이면 되지 않느냐 말할 수는 있죠. 그게 대답이기는 대답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시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태에서 다른 방법으로는 안되고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인간을 구원하셨다. 그것이 곧 죽은 예수 그리스도를 삼일 만에 살리셨다. 뭐 그러한 내용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우리의 가장 밑바탕에 있는 가르침인데요. 그 자체를 알고 있다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냥 공식이니까요. 그거가 왜 그럴 수밖에 없는가? 거기에 어떤 타당성이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해야 되는 거죠. 기독교 교리를 따지고 들려는 것이 아니죠. 믿을 수 없으니까 이거는 다 무조건 해체해야 된다거나 다른 방식으로 정리를 해야 된다거나 그런 뜻도 아닙니다. 기독교 교리를 사람들에게 진리론적인 차원에서 해명해야 될 책임이 있다고 하는 거죠. 기독교 교리가 진리라고 한다면 진리는 이거 저거 두 개 세 개 여러개 있는 것이 아니잖습니까? 진리는 바른 건데 옳은 건데 그렇다면 하나죠. 기독교적인 진리가 따로 있고 물리학적인 진리가 따로 있고 과학적인 사회학적인 진리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형태는 다르죠. 접근하는 방법은 다르죠. 진화론이 이야기하려는 그러한 생명진화의 실체들 그런 것들이 하나님이 세계를 말씀으로 창조했다는 그런 것과 다른 진리는 아닙니다. 물론 접근하는 방식은 다르죠. 그러나 하나의 진리입니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가 자기를 독단적으로 전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일반적인 보편적인 그런 진리 차원에서 설명해야 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가 진리라고 한다면 말이죠. 당연히 진리인데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전해야 되는 거죠. 2천년 기독교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부들로부터 시작하여 더 올라가면 바울과 사도들과 속사도 중세기를 거치는 지금까지의 모든 신학의 흐름이라고 하는 것은 기독교의 가르침을 보편적인 진리의 차원에서 해명, 변증해보려고 하였던 그러한 시도였다고 할 수 있죠,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았다고 하는 이러한 사도신경에 나와 있는 중요한 신앙고백들이 어떠한 타당성이 있느냐 그런 것들을 찾아보려고 하는 거죠. 판넨베르그는 그것을 여기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여기서는 유대인들과의 관계가 있잖아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였다고 한 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거기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러한 역사만이 아니라 그 이 외에 다른 요소들이 많이 포함되고 있긴 있지만 예루살렘이라고 하는 지리적 상황과 종교 지도자의 관계, 이러한 차원에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십자가의 죽음으로 내몰렸다고 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거든요. 거기에 본디오 빌라도가 포함되었구요. 본디오 빌라도하고 산헤드린 종교지도자들과의 관계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하고는 조금 다른 대목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아니구요. 예수님의 죽음에 유대인들이 크게 연관되었다고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네 우리가 오늘 113쪽인데 이야기를 좀 풀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지난번 책 내용의 마지막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한 산헤드린, 유대종교지도자들의 대표자들에게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이야기죠. 지난 2천년 유럽역사가 유대인들을 예수 죽인 민족이라고 하는 그러한 관점으로 미워하고 따돌림 당하게 하고 그러한 것들은 잘못이다. 그러한 이야기였습니다. WCC하고 2차 바티칸 공의회 카톨릭이요. 한 쪽은 개신교는 WCC구요. 로마 가톨릭 바티칸 공의회인데 양쪽이 다 유대인에 대한 예수 죽인 책임, 여태까지 덮어씌운 것을 다르게 설명했습니다. 그걸 짚은 거예요. 본문을 좀 읽어보겠습니다.

오늘날 예수의 십자가로 인해서 유대인과의 연대성이 훼손되었다는 주장만이 교정되어야하는 것은 아니다. 그거는 교정되어야 하는데 그것만이 아니다. 그 십자가는 사실 에베소서 2:14-16에 따르면 유대인과 이방인을 화해시켰다. 그렇죠. 이게 유대인과 기독교인 사이가 벌어졌다고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그걸 인제 교정했잖아요. 사실은 성서에는 그런 훼손되었다고 하는 점만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유대인들의 책임만을 묻는 것이 아니다. 그 이야기죠. 오히려 유대인과 이방인을 화해시켰다. 오늘날 기독교인과 유대인의 대화를 위해서, 유대인들이 역사적 시공을 초월해서 그 당시 행정 당국자들의 행위와 일치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예수 죽임의 책임이 유대인 전반의 책임인 것이 아니다. 이에 근거해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선언문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유대 당국이 그 추종자들과 함께 그리스도를 죽음으로 몰고 갔을지라도 이 수난 사건을 아무 구별 없이 그 당시 모든 유대인들에게, 또한 오늘의 유대인들에게 짐을 지을 수 없다." 2차 바티칸, 1961년인가 2년인가부터 시작해서 한 3,4년동안 바티칸 2차공의회에서 나온 문건이었어요. 바티칸 공의회가 중요합니다. 로마 가톨릭교회가 에큐메니칼 정신을 더 발휘하게 되고 그리고 여러 가지 면에서 개혁적인 조치를 취했어요. 미사도 라틴어로 드리지 않고 자국어로 드리게 되며 우리 개신교를 향해서도 형제라고 부르게 되구요. 그 외에도 상당히 많은 신학적인 대개혁의 노력들이 세계에 있었습니다. 거기서 유대인과의 문제도 전형적으로 풀어갑니다.

물론 이 문장은 예수 수난의 책임을 개인적인 관점에서만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이 문장은 따라서 그 당시 그 사건과 직접 연관이 없는 개인들과 유대인의 후손들에게 예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면제해주고 있다. 예수 죽음에 대한 책임이 그 당시 그 일을 행한 개인들에게 있다고 보고 그렇기 때문에 역사 시공간을 초월해서 오늘 유대인들에게까지 책임을 묻는 것은 잘못이다. 그런 쪽으로 제2차 바티칸문서가 이야기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지만 전통적인 이해에 기초하고 있는 질문, 즉 유대민중의 이름으로 예수공판에 관여한 유대정권이 어느 정도의 범위에서 행동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좀 복잡한 문제네요.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유대민중의 이름으로 예수공판에 관여한 유대정권이 어느 정도의 범위에서 행동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유대 정권, 산헤드린 공회죠. 그걸 말하는 겁니다. 대표하는 종교권력기관이구요. 종교만이 아니라 그 당시 유대사회야 종교와 일반 삶이 따로 구별되지 않았기 때문에 산헤드린 공회가 전권을 갖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겁니다. 그들이 예수의 공판에 어느 정도 참여했느냐? 적극적으로 예수를 죽이도록 압력을 넣었는지 아니면 예수를 방어해주었어야 했는데, 같은 유대인이니까요. 방어하지 못하고 그냥 방관했는지 그런 것에 대해서 정확하지 이야기하지 않고 있다고 하는 겁니다.

판넨베르그가 볼 때 그것이 중요하다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결정적인 요인이다. 한편으로 좀 더 정확하게 지적한다면 그 당시 유대정권이 개인으로서만이 아니라 유대민중의 공식적 대표자들로서 예수공판에 관여했다는 사실에 관련된 문제는 예수 죽음의 대리적 의미가 그를 재판한 이들만이 아니라 전체 민중과 또한 그들을 뛰어넘어 전체 인류에게 해당된다는 것이다. 판넨베르그의 지적이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예수 죽임의 대리죽음의 의미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예수 죽음을 단순히 개개인의 문제로 돌려서는 좀 곤란하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그런 문제에서 신학적 토대가 약하지 않느냐? 그러한 지적이에요.

이는 곧 궁극적으로 말해서 이 사건이 로마의 대리자인 빌라도의 관여에 머무르지 않고 이를 뛰어넘어 로마정권의 국가적 통치에까지 이르는 것과 같다. 결국 빌라도가 예수를 사형선고를 내렸다고 한다면 이건 빌라도라고 하는, 사적인 개인적인 문제라기보다 로마제국의 중심부와 연관된 것처럼 같다고 하는거죠. 결국 예수 죽음에 유대 전체가 참여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가 죽은 자로부터 부활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판결의 합법성만이 아니라 선민의 이름으로 판결을 내린 유대 재판관들의 적법성도 역시 부정될 수밖에 없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모는, 십자가에 의한 예수님의 죽음은 결국 부활사건을 통해서 그들이 행한 모든 조폭성 이런 것들이 부정될 수 밖에 없다. 이런데 설명을 더하지 않았죠. 따라서 이런 결론이 나온다. 즉 예수 죽음의 대리적 의미가, 대리적 의미를 말하려고 위해서 그의 죽음에 관여하는 사람들을 사인, 개인으로 생각하지 말고 유대의 종교나 권력, 로마제국의 권력, 이런 쪽으로 보아야 된다는 것이죠. 예수 죽임의 대리적 의미가 유대민중과, 또한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인류와 상관이 없다면 결국 예수를 재판한 이들의 적법성은 이스라엘의 권위적인 상속자의 주장으로, 그리고 이에 근거해서 예수를 초월하는 유대민중들의 본질적인 전승의 주장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복잡합니다. 이 문장이. 번역을 이렇게 길게 했을까요? 지금 같으면 짤라서 들어서도 알기 쉽게 했을 텐데요. 장황하다는 느낌이 들죠.

다시 그 문장을 보겠습니다. 저도 읽으면서도 확 들어오지 않네요. 예수 죽음에 대한 책임과 예수님 죽음의 대리적 의미 이런 것들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는 거죠. 이런 결론이 나온다고 하는 거죠. 예수 죽음의 대리적 의미가, 대리적 의미는 우리를 대신해서 속죄, 죽으셨다. 대리적 의미가 유대인들과 또한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인류와 상관이 없다면 상관이 있죠. 그 문장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결국 예수를 재판한 이들의 적법성은 상관이 없는것이 아니라 상관이 있죠. 제가 여기 번역을 잘못한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을텐데요. 고 문장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결국 예수를 재판한 그들의 적법성은 이스라엘의 권위적인 상속자의 주장으로, 그리고 이에 근거해서 예수를 초월하는 유대민중들의 본질적인 전승의 주장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원서를 잠간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요부분은 확 와닿지 않기 때문에, 생각하고 있는 것하고는 다른 의미 같아서요. 제가 잘 이해를 못했었는지도 모르고 오역일지도 모를 텐데 제가 원서를 잠깐 보도록 하겠습니다. 잠간만 기다려 주세요. 책을 좀 가져오도록 하겠습니다. 네. 이 책인데요. 보여드릴까요. 찾기가 쉽지 않을텐데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찾아보겠습니다. 86쪽 부터인가요.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그 패러그래프가 긴 대목이에요. 고거를 찾기도 쉽지 않는데 안되겠습니다. 한번 보겠습니다. 대충 어디 부분인가 감을 잡아야 하는데요. 하나 둘 셋 넷 다섯, 원서로 보면 하나 둘 셋 넷 다섯, 다섯 번째 패러그래프는 찾았습니다. 여기서 이런 결론이 나온다 고 부분을 찾으면 되겠군요. 못 찾았습니다. 다시 한 번 번역을 해보나요. ... 하이고 참 복잡하네요. 안되겠습니다. 갑자기 이걸 해보려고 하니 더 복잡해지네요. 그만 두어야 되겠습니다. 나중에 제가 시간 좀 넉넉할 때 꼼꼼하게 보고 확인해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요 부분이 상당히 까다로운 부분이에요. 진행하겠습니다. 뒤로 가게 되면 더 내용이 파악될 수 있겠죠.

유대민중이 선택되었다는 것은 예수의 부활을 통해서 오히려 하나님과 연결되어서 증명된다. 이 하나님은 재판관들이 예수를 정죄한 것과는 달리 그를 부활시킨 분이며, 예수가 이미 앞서 그 하나님을 도래할 나라의 하나님으로 선포한 분이다. 유대인도 역시 부활절 사건의 불빛에서 예수에게 한때 내려졌던 판결을 정당하지 못한 것으로, 그리고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민중의 합법적 대리행위가 아닌 것으로 교정할 수 있다. 이 문제는 이러한 교정이 명시적으로 기독교 부활절 신앙의 기초에서 발생하고 있는지 아닌지, 또는 유대전승을 보다 잘 이해하는 데서 발생하고 있는지 아닌지에 달려 있는 건 아니다. 이 경우에 예수에 대한 유대적 판결을 교정할 가능성은 하나님의 백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지, 어떤 개인을 예수에 대한 판결의 책임에서 벗어나게 하는 문제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아 조금 복잡합니다. 판넨베르그가 로마 가톨릭의 2차 바티칸 공의에서 나온 새로운 정의의 한계를 짚은 것이죠. 모르는 것은 덮고 그냥 넘어가야지요. 명쾌하지 않아도 어쩔 수 없습니다. 나중에 제가 더 검토해갖고 기회가 있으면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이러한 판단에는 예수의 죽음에 담긴 대리적 의미가 이미 전제되어있다. 여기서 대리적 의미가 핵심이에요. 이 대리적 의미는 앞서 발생한 모든 것들이 부활 사건에 대한 전망에서 새로운 각도로 제시되고 있다는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 하나님 스스로 예수의 요청에서 자신을 알렸다. 이 예수는 모세의 권위에 맞서 있었기 때문에 율법적인 유대인들에게는 신성모독자처럼 보일 수 있었다. 예수의 부활로 인해서 예수의 수난에 관여한 이들의 입장이 뒤바뀐 것으로 판명되었다. 뒤바뀌었다 말하는 것이죠. 하나님이 스스로 예수에게 자신을 계시했다. 이 예수를 신성모독자로서 판결한 그 사람들이 신성모독자로 드러나게 된다. 이처럼 예수는 엄밀한 의미에서 그들을 위해서, 그들을 대신해서, 즉 재판관들이 판결을 통해서 덮어씌운 신성모독의 죄 때문에 죽었다. 재판관들이 고립된 개인으로서만이 아니라 민중의 당국자로 처신함으로써, 민중 전체를 대표함으로서, 예수가 당한 십자가의 죽음이 갖는 대리적 능력이 그들 집단을 뛰어넘어 전체 민중에게, 더욱이 전체 인류에게까지 이르게 된다.

전체 인류가 예수님을 죽인 몇몇 당국자를 넘어서 유대인 전체 더 나아가서 인류 전체가 예수를 신성모독자로 죽였다고 하는거죠. 예수님 속죄의 대리적 의미가 거기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죠. 그 이유는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유대민중들이 하나님 앞에서 전체 인류를 대신하기 때문이다. 예수 죽음의 대리적 능력에 대해 기독교가 주장하는 실질적 기초는 이런 상황에서 이해되어야한다. 예수님 죽음의 대리적 의미를 지금 설명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그의 죽음에 모든 인류가 관여되어 있다고 하는 사실이 여기서 핵심입니다. 그게 왜 대리적 의미와 연관되는가 하는 것은 좀 더 생각해 보아야 하겠죠. 판넨베르그가 어떠한 흐름을 통해서 그것을 연계시키는지 말이죠. 일단 우리가 고 관계는 책에 나온 것으로만 보면 이런거죠. 예수님의 죽음이 어떤 한 두 사람의 잘못과 책임으로가 아니라 그를 넘어서 유대인과 인류 전체가 연관되어 있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모든 인간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에 책임이 있기도 하고 연관되었다. 그러한 사실에 근거해서 인간구원도,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인간 구원도 모든 인류에게 해당된다. 그러한 논리죠. 고런 정도로 정리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예수 부활로 인해서 빌라도와 그를 통한 로마의 관여가 확연하게 드러났으며, 또한 로마를 통해 당시 세계에 구체화된 정치 세력이 예수의 죽음에 관심을 가졌다고 하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 경우에 예수의 복음선포와 정치 세력의 요구 사이에 있는 갈등이 그 배경으로 놓여있다. 사실은 이러한 갈등은 예수가 유대인들로 하여금 로마의 식민 통치 권력에 대항하도록 부추겼다고 하는 이유에서 내려진 정죄가 어떻게 자신의 논리성을 주장했는가 하는 방식에 놓여 있는 것은 아니었다. 번역이라서 금방 들어오지 않죠? 나가보겠습니다. 그러나 예수가 도래할 하나님의 통치와 인간에 대한 그 통치의 전권을 선포함으로써 로마 제국주의의 정신적 근본이 허물어졌다. 이것은 확실히 다음 세기에 걸쳐서 기독교인들이 로마 황제들에게 신성한 경배와 희생을 바치지 않았다는 것과 같은 지평의 사실, 관점이다. 예수님의 죽음과 그리고 부활, 그리고 그의 선포 이런 것들이 로마 제국의 결국은 근본적 정신 그런 것들을 허물었다고 기독교인들이 신앙고백을 한 거죠. 세상 사람들이 그걸 인정하든 안하든 그건 두 번째 문제구요. 그들은 그런 방식으로 예수님을 이해한 겁니다. 더 이상 로마황제에게 경배를 드릴 수가 없는 겁니다. 그당시 로마황제는 신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는 거잖아요. 하나님과 같은 존재이지 않습니까? 그를 숭배할 수 없는 거죠.

예수가 배타적으로 이해한 하나님의 권세는, 이거는 어떤 세력과 힘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비교할 수 없는 그러한 권세이거든요. 하나님의 권세를 배타적으로 이해했다고 하는 겁니다. 다시요. 예수가 배타적으로 이해한 하나님의 권세는 인간의 삶을 절대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정치적 통치 질서의 명령을 거부한다. 네. 하나님과 세상권세를 겸하여 섬길 수 없는 거죠. 하나님의 권세는 어떤 비슷한 추종을 불허하는 그러한 힘이죠. 그렇게 기독교인들이 이해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을 하셨고 그렇게 이해를 하셨구요. 이러한 날카로운 충돌, 어떤 충돌요? 예수님이 배타적으로 이해한 하나님의 권세, 로마 황제의 권세 양쪽에 있는 충돌은 콘스탄틴 황제 이후로 황제의 통치를 하나님 통치의 지상적 모형으로 이해하려는 고대의 기독교 전통을 통해서 약화되었다. 콘스탄틴, 포스트 콘스탄틴이었죠. 그 이전까지는 갈등 충돌이 심했는데 그 이후로는 황제의 통치가 하나님의 지상적 통치로, 하나님이 한분이신 것처럼 이 지상에도 황제가 하나다 이런식으로 충돌과 분쟁이 약화되었다고 하는 것이죠.

그러나 원래는 이와 달리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권세와 정치적 권세가 전반적으로 날카롭게 충돌한다. 이게 십자가 신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 세상의 권력을 절대화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 부활이 신적인 통치방식이라는 점이 분명해짐으로써, 이런 경향이 변증적 관심에서 나온 기독교 전승에 의해 일찍이 억압되었을지라도 그에 대한 판결행위는 바로 존엄의 죄(crimen laesae majestatis)에 해당된다. 콘스탄틴 이후로 이러한 십자가 신학이 약화되기는 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배타적 권세를 부정하는 상대하는 것들은 판단하는 것들은 바로 십자가의 판단과 마찬가지인데요. 하나님의 통치를 배타적으로 선포했고 하나님의 나라에 전적으로 순종해서 살았던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했다는 것은 바로 존엄의 죄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로마의 대리자는 이 존엄 때문에 예수를 자칭, 혹은 거짓 선동가라고 처형했다. 로마의 대리자는 황제죠. 황제를 대리하는 로마 총독은 빌라도죠. 그들은 예수를 거짓 선동가로 처형했습니다. 사실은 여기서 손상된 존엄은 자기들의 존엄은 아니죠. 그들은 예수가 그렇게 한 것처럼 말하지만 하나님의 존엄이지 더 이상 로마 황제의 존엄은 아니다. 따라서 예수의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존엄을 손상시키고자 한 정치적 통치가 그 경향을 드러내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곧 정치적 통치가 절대적인 구속력을 독점하려는 모든 곳에서 작동하는 경향이다. 네 까다롭죠. 그런데 뭐 그렇게 까다로운 것은 아닙니다. 제가 까다롭다고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은 이런 쪽으로는 우리가 전혀 생각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이게 좀 낯설다고 하는 뜻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하면 우리 때문에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 처형당하시고 또 우리를 구원하실 바로 그 일이다. 십자가가 아주 개인의 감수성, 낭만적인 감수성, 죄를 용서받는다고 하는 그런 쪽으로만 이해가 되고 있어요. 이게 로마권력과의 어떤 관계까지 연관된다고 하는 것은, 가장 절대적인 권세를 갖고 있는 것이 로마 황제였으니까 황제 권세를 인정하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 예수님이 선포한 바로 그것이 충돌할 수밖에 없는 것이거든요. 이러한 충돌과 긴장들이 십자가형의 밑바탕에 있는 것인데 로마의 공인을 받고 더 나아가서 로마의 국교가 된 다음부터는 이런 것들이 약화되기는 했다 그점을 지적하는데요.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이러한 충돌이 어느 곳에서나 드러난다. 왜냐하면 서로 절대적인 권력 힘 이런 것들을 주장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동시에 십자가에 달린 자의 부활이라는 불빛에서 분명해진 것은, 십자가를 이야기하면서 자꾸만 부활의 불빛 이런 것을 이야기하잖아요. 십자가로만 끝나 버렸다면 더 이상 이야기가 안됩니다. 부활사건 때문에 기독교 십자가를 새로운 차원에서 이야기하게 되잖아요. 그걸 연관해서 설명하고 있는 겁니다. 인간이 이러한 정치적 통치의 요구를 양심적인 차원에서까지 의무적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정치적 통치, 로마황제를 중심으로 한 정치 경제 이것이 억압하고 있는 세계 질서, 이런 것들을 어쩔 수 없이 우리가 그 안에서 묶여 살기는 하지만. 반드시 돈없이 못살잖아요. 아주 깡촌에서 혼자 농사를 짓고 살수는 있겠지만 어쨌든 여기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호적과 주민등록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살아도 다 연결, 사회시스템 안에 들어와 있어야 되는데요. 우리가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살기는 하지만 영혼에 대한 양심, 이런 것까지 그런데 완전히 지배당하는 것은 아니다.

일 세대 기독교인들이 황제제의를 반대함으로써 확증했던 것처럼 말이다. 끊임없이 황제제의에 대한 반대, 초기 기독교의 신앙적 전통을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모양은 달라지지만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살리신 하나님에게만 절대적인 권세가 있다고 하는 이 사실을 놓칠 수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자의 부활을 통해서 개개인은 사회가 요구하는 절대적 구속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그 말이죠. 정말 신학적인 해명만이 아니라 설교적인 차원에서도 굉장히 중요한 문제죠.

다시 문장을 읽겠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자의 부활을 통해서 개개인은 사회가 요구하는 절대적 구속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여호와의 증인 같은 사람들이 군대 가지 않는것, 감옥에 간다고 하더라도 군대 가지 않는 것은 신앙의 원칙이라고 하는 점에서는 높이 평가해야 하는 거예요. 황제숭배라고 하는 절대 따라가지 않겠다고 하는 거죠. 구속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고 하는거죠. 이게 쉽지 않습니다. 호적에 빨간 줄 들어가고요. 전과가 되는건데, 그리고 나중에 취업하는데도 힘들고 말이죠. 그런 불이익을 당하면서도 군대가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기독교의 자유의 깊은 차원을 몸으로 실천하는 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정치적 통치가 항상 유죄판결을 받는 것만도 아니다. 정치적 통치, 정치의 행위는 하나님이 십자가에 달린 자를 다시 살림으로써 정치적 판결을 허물어뜨린 그 권위에 굴복 당하게 되며, 이 굴복을 받아들인다는 조건 하에서 자유로워진다.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판단에 맡기면서 그 안에서 정치적인 자유 이런 것들이 가능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차원에 근거해서 예수의 십자가처형이 갖는 대리적 기능이 언급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대리적 기능, 나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심으로서 하나님이 그러한 이세상의 모든 악한 권세를 허물어뜨렸다고 하는 그러한 신앙, 그러한 관점이라는 뜻입니다.

정치가인 빌라도는 하나님과 맞서 예수를 판결함으로써 예수가 짊어져야만 했던 존엄의 죄에 대한 징벌을 받았다. 예수를 황제라고 하는 존엄에 대한, 존엄한 존재에 대한 문제를 일으킨 자로 판단했는데 오히려 빌라도가 존엄의 죄의 징벌을 받았다고 하는 겁니다. 이는 하나님이 그의 판결을 예수의 부활을 통해서 불의한 것으로 만들어버렸다는 사실에서 지적된 바와 같다. 판넨베르그에게 이 부활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부활신앙에 의해서 십자가도 가능한거구요. 종말신앙도 가능한 겁니다. 종말에 부활이 완성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의 부활을 통해서 빌라도의 판단을 잘못된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 따르면 대리의 동기는 물론 예수의 부활을 통해서 담판하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인식, 그리고 모든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 연결되어 있다. 또한 무엇보다도 대리와의 유비를 통해서, 대리와의 유비? 대리한다. 계속 대리적 개념들이 나오고 있어요. 골치 아프게 하는데. 이게 왜 골치 아픈 것을 왜하냐? 왜하는 것은 아닙니다.

두 가지 의미로 이런 것을 자꾸 붙들고 생각하는 이유를 설명해야 되겠습니다. 하나는 이게 중요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대리적, 대리, 속죄 대리한다고 하는 것 이게 기독교 신앙에서 매우 중요한 거죠. 어쨌든 이 문제를 풀어야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두 번째는 이 대리적 의미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고 하는 거죠. 아니면 다른 말로 한다면 사람들에게 설득력 있게 다가가기가 어려운 교리라고 하는 거죠. 제가 강의를 시작하면서 말씀드린 대로 왜 하나님이 굳이 그런 방식으로 하냐? 쉽게 한 두 말씀으로 다 인간을 구원하고 못된 사람들 좋게 만들고 죽음으로부터 이길 수 있게 하시고요. 우리가 모든 구원을 파괴하는 그러한 우리의 삶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잖습니까? 그런 것들을 순식간에 할 수 있는데 왜 대리적인 죽음을 통해서 인간을 구원해야 되느냐 이런 것들이 그렇게 모든 이들에게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이 문제를 씨름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무엇보다도 대리와의 유비를 통해서 그 적합성이 획득된다. 이 대리, 대신한다고 하는 의미의 대리는 예수의 부활이라는 시각에서 예수가 유대 재판관들과 맺는 관계에서 읽혀져야만 하는 그것이다. 어떤 한 사람이 이미 실효되어버린 징벌을 감당하는 경우에는 이 대리라는 말이 아무 의미가 없다. 없어져 버린 증거, 그거는 대리가 아니죠. 오히려 이를 통해서 훨씬 심각한 파멸이 초래될지 모른다. 왜냐하면 분명한 징벌이 보상되지 않고, 또한 그 죄책이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대리적 의미는 예수 공판 과정에서 있었던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의 처지를 바꾸어 놓았다.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예수의 복음 선포에 따라서 모든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용서가 임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예수의 복음 선포, 사신은 곧 하나님의 통치를 제시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이들을 위한 그의 죽음은 신성모독의 징벌을 감수했을 뿐만 아니라 그가 그 징벌을 제거했다고 볼 수 있다. 고대 이스라엘의 大사죄일에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은혜로운 명령에 따라서 민중들의 죄를 짊어져야할 숫염소를 광야 길로 내보내는 것처럼 하나님은 예수를 세상의 죄를 없이할 어린양의 길로 내보냈다. 기독교 전통은 성만찬 예식을 거행하면서 이 사실을 노래했다. 성만찬 노래에 수 염소를 보내듯이 예수를 죄없는 어린 양 보내듯이 보냈다. 이러한 예수의 죽음과 대리적 이런 것들은 깊은 구약적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겁니다. 네. 이런 대리적 죽음이 까다로워서요.

이제 두 쪽 정도 남았는데 제가 이제 설명하지 않고 쭈욱 읽는 것으로 이 장을 마쳐야 되겠습니다. 다음부터는 새로운 장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이러한 숙고를 통해서 전제되는 바는 인간 사이에서도 대리 같은 어떤 것이 주어질 수 있으며, 특별히 인간적 죄책의 영역에서도 역시 대리가 가능하다는 점이다. 교회의 대리론* 혹은 대리론, 속죄론이라고 할 수 있겠죠. 대리론은 은 16,17세기의 소치니주의자**들 이래 꾸준하게 비판을 받았고 논쟁거리가 되었다. 여기서는 특별히 도덕적 죄책에 대한 대리 가능성이 문제가 되었다. 일종의 금전적 과실은 나에게 그 어떤 다른 것으로 지불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일종의 도덕적 과실은, 그것과 관계된 자가 갚지 않을 경우에 결국 갚지 않은 것이 된다."(D.F. 슈트라우스). 파우스토 소치니는 하나님이 죄 있는 자 때문에 죄 없는 자를 벌주었다는 것은, 특히 죄 있는 자들이 죄 없는 자의 권한 밑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불의하게 하는 것일지 모른다고 보았다. 이러한 논증은 신성모독이라는 비난 앞에서 예수의 '죄 없음'이 부활을 통해서 결정되고 증명되었기 때문에 바로 앞서 제시된 사상적 과정과 비교해볼 때 빈곤하다. 특별히 도덕적 죄책에 대한 개인주의적 개념 역시 의문의 여지가 많다. 이 개념은 소치니주의적 비판에 근거하고 있는 그것이다. 인간 현존의 사회적 성격에는 모든 개인이 다소간 외부의 것들과 연관된 책임감에서 구체적으로 행동한다는 사실이 기초하고 있다. 개인은 자신의 행동에서 자신이 살고 있는 공동체에 연루되어 있으며, 또한 다른 이들의 행동에 참여하게 된다. 이처럼 사회적 삶에서는 대리가 바로 일종의 보편적 현상이다. 이렇게 저렇게 연관되어있으니까 결국 어떤 행위든지 대리적 의미가 있다고 하는 거죠.

*대리론(Stellvertretungslehre)은 말 그대로 예수가 우리를 대신해서 죄의 징벌을 받았다는 의미다. 일명 대속론(代贖論)이라고도 한다. 판넨베르크는 도덕적 죄책에 대한 개인주의적 개념에 근거해서 이를 비판하는 학자들의 논리가 매우 빈약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오늘 인간 삶의 현실에서도 여전히 이런 대리적 기능과 효과가 확실하다는 것이다. 결국 예수는 인류 전체를 대신해서 신성모독의 징벌을 받았지만 부활을 통해서 그것을 극복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인간으로 하여금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은 셈이다. 기독교의 대속론은 예수를 통해 인류의 구원이 가능한 토대를 제공한다.

**이탈리아의 법률가였던 소치니(L. Socini, 1525-1562)와 그의 조카 파우스토 소치니(F. Socini, 1539-1604)는 전통적 삼위일체론을 반대했다. 이들의 주장에 동조한 이들을 가리켜 소치니주의자라고 하며, 오늘의 유니테리안주의가 이와 맥을 같이 한다.

이미 직업적인 면에서의 노동구조는 대리적 성격을 갖는다. 직업을 가진 자는 그 안에서 그가 봉사하는 전체와 상대하는 것이며, 그는 아주 특별한 행위에 의지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이 특별한 행위는 다른 이들도 역시 나름대로 호의를 베풀고 있는 바의 그것이다. 개인이나 부분적 집단에 속해있는 선한 자와 악한 자의 입장이 전체를 대리해서 수행될 수 있다는 사실은 아주 분명한 시대에서 경험된다. 이것은 독일 국민들에게 특히 동독인들의 망명을 통해서, 그리고 독일의 분단을 통해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이 분단은 완전히 다른 기준에 놓여있는 독일 국민의 한 부분으로 하여금 전쟁의 결과를 짊어지게 했다. 전체로서의 한 공동사회에서 일어나는 많은 것들은 특별한 방식으로 개개의 구성원들을 대표하는, 혹은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 전체 사회를 대표하는 한 부분과 상관된다. 윤리적 책임감의 개인주의는 인간 삶이 갖는 현실성과의 연관을 배제하지 않는 한 이러한 연루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반대로 인간의 공동 삶에 대한 대리가 일반적 의미를 갖는다는 전제 가운데서만 예수가 당한 죽음의 대리적 의미가 의미심장하게 논의될 수 있다. 인간의 공동 삶에 있는 대리의 보편적 현상 없이는 예수 죽음의 대리적 능력에 대한 기독교적 교리는 무의미한 주장이 될 수도 있다.

예. 그렇죠. 이것이 계속 문제가 된다는 거예요. 대리적, 잘못하면 이게 좀 고대신화적인, 오늘 우리들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로 떨어질 수 있는 거예요. 이러한 기독교의 속죄론, 혹은 대리론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면 이거예요. 판넨베르그는 중요한 점을 지적한 겁니다. 인간 공동 삶, 같이 더불어 누리고 있는 삶에 있는 대리적 보편적 현상이 없이는 판명이 안된다는 겁니다. 물론 대리하는 보편적 현상이 있는 거죠. 판넨베르그의 공동 삶에 대한 설명이여서 그렇습니다. 이렇게 교리에 대한 보편적 해명 이런 것들이 판넨베르그 신학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 다름 패러그래프는 하나 뛰어넘구요. 마지막 패러그래프를 읽음으로서 마치겠습니다.

(뛰어넘은 패러그래프) 예수 죽음의 대리적 능력은 우선 위에서 밝혔듯이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임한다. 그러나 이미 상황은 다음과 같이 발전했다. 즉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의해 모든 인류를 위한 대리자로 선택되었으며, 더욱이 예수의 십자가 사건에 빌라도가 관여했다는 것은 예수 죽음이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모든 인류를 위한 대리적 의미를 띠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예수 죽음의 구원론적 의미에 담긴 보편타당성은 물론 모든 인간이 자기 삶 가운데서 각기 하나님에게 적대적이라는 사실과 연결되어 있다. 그 하나님은 자신의 재판관들을 통해서 예수를 판결함으로써 드러나는 분이다. 이런 점에서 바울은 인간의 보편적 죄성을 모든 인간을 위한 예수 죽음의 구원론적 의미에 담긴 조건으로 제시할 수 있었다. 모두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모두가 신성모독의 현존적 상태에서 살기 때문에, 즉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백성의 주도적 역할로 인해서 예수가 신성모독자로 판결을 받았다는 상태에서 살기 때문에 예수는 유대 민중들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들을 위해서 신성모독의 징벌을 대리적으로 수행한 것이다. 죄의 보편성은 구원의 보편성을 가능하게 한다(롬 11:32, 3:21 이하). 그러므로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그의 백성들에 의해 예수가 버림받음으로써 세계가 용서받게 된다,(롬 11:15) 이것은 바울에게서 일종의 보편적 주장으로 남아있을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작용하여 세계를 변화시키는 능력이 되었다. 왜냐하면 율법의 이름으로 예수를 거절함으로써 율법의 세력이 제거되었으며, 또한 율법 없이 예수를 통해 구원받는다는 바울의 사신을 가능하게 했기 때문이다.

예수 죽음의 대리적 능력이 의미하는 명백한 사실은 예수가 우리를 위해서 죽었기 때문에 더 이상 어느 누구도 죽지 말아야한다는 것이 아니다. 이 능력은 이제부터 어느 누구도 더 이상 (중요한 거예요) 혼자 죽으면 안 되고 오히려 죽음 가운데서 예수의 죽음과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우리의 인간적 죽음이 예수의 죽음과 일치한다는 것은 예수 죽음의 대리적 의미에 담긴 기본적인 내용이다. 예수가 우리의 죽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우리에게 임하는 죽음의 성격이 바뀐다. 예수와의 일치에서 절망은 사라지게 되었으며, 이미 예수의 부활에서 드러난 생명을 통해 극복되었다. 신성모독자, 즉 하나님과의 모든 일치가 차단된 자의 죽음을 예수는 확실하게 물리쳤다.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인간이 생명의 신적 근원으로부터 차단된다는 확증이 바로 죽음이라고 한다면 모든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과의 이러한 분리는 죽음이 불러오는 궁극적인 가혹성이다. 예수의 죽음 이래로 예수와 일치하고 그에 대한 신뢰 가운데서 살고 죽는 자는 어느 누구도 이렇게 죽을 필요가 없다. 예수가 하나님의 확증을 받게 된 그의 죽음과 일치함으로써 우리는 죽음의 절망을 벗어나서 그 희망을 향하게 된다.

예수는 우리를 대리해서 죽음의 가혹성을 물리치신 분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그분을 믿고 있기 때문에 죽음을 더 이상 하나님과의 완전한 단절이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된겁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고 그 분을 통해서 우리는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네 어려운 부분들이었었는데 중요한 내용이었죠. 다음에는 책에 있는 것으로 8장 ‘지옥에 내려가시고’를 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마치겠습니다.


[레벨:2]아이작

2010.01.28 13:45:17
*.120.39.252

대리론(Stellvertretungslehre)은 말 그대로 예수가 우리를 대신해서 죄의 징벌을 받았다는 의미다. 일명 대속론(代贖論)이라고도 한다. 판넨베르크는 도덕적 죄책에 대한 개인주의적 개념에 근거해서 이를 비판하는 학자들의 논리가 매우 빈약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여기서 판넨베르그가 어떤 논리로 지적을 하는지 이해가 잘 안갑니다. --;;

 

판넨베르그는 중요한 점을 지적한 겁니다. 인간 공동 삶, 같이 더불어 누리고 있는 삶에 있는 대리적 보편적 현상이 없이는 판명이 안된다는 겁니다. 물론 대리하는 보편적 현상이 있는 거죠. 판넨베르그의 공동 삶에 대한 설명이여서 그렇습니다. 이렇게 교리에 대한 보편적 해명 이런 것들이 판넨베르그 신학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게 그에 대한 설명인 것 같기도 한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ㅠㅠ

이 부분을 조금만 더 쉽게 풀어주시면 안될까요...

인문학적 소양이 별로 없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에 대해 좀 더 이해해보고 싶어서 질문드립니다.

도와주세요 ㅠㅠ

 

질문은 두가지입니다.

 

1. "도덕적 죄책에 대한 개인주의적 개념에 근거해서 이를 비판하는 학자들의 논리"를 판넨베르크는 어떻게 반박하는지..

 

2. 삶에 있는 대리적 보편현상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이라는 교리가 현대에 적합하다는 적실성(?)의 근거가 될 수 있는지... 

 

조금만 더 쉽게...ㅠㅠ

부탁드립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10.01.29 15:10:52
*.120.170.243

아이작 님,

나도 좀 애매하다고 생각했던 대목이었는데,

그걸 설명하라니, 난감하군요.

그냥 읽고 느낀대로,

이해가 안 가면 안 간대로 받아들여주시면 안될까요? ㅎㅎ

상식적으로만 대답합니다.

대속론, 또는 대리론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근거하는 논리는

(판넨베르크의 설명에 따르면) 개인의 도덕적인 책임입니다.

도덕적인 잘못은 본인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거지요.

아들이 잘못했는데 아버지가 대신 벌금을 낸다고 해서

그것이 완전히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죄를 지었는데

예수가 십자가에 달린다고 해서 죄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라는 거지요.

이런 논란은 실증적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거는 아닙니다.

누가 더 보편 타당한 논리를 제시할 수 있느냐에 따라서,

그리고 그런 논의가 계속 진행되면  판단될 수 있을 뿐입니다.

이런 진행 과정이 진리의 속성이기도 하구요.

판넨베르크는 이 세상에서도 대리의 보편적 현상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건 당연한 거지요.

반장은 반 학생들 전체를 대리해서

선생님에게 말을 할 수도 있고,

책임을 질 수도 있는 거지요.

예수는 바로 인류를 대리한다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보편적 현상과 기독교 교리의 연결은

이미 부활을 말하는 바울에게서도 볼 수 있어요.

그는 보편적인 부활이 없다면 예수의 부활도 없다고 했어요.

이런 점에서 역사는 하나님의 계시가 일어나는 자리이면서

계시 자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주의 은총이.

[레벨:2]아이작

2010.01.31 14:10:33
*.137.101.218

답변 감사드립니다.

대리론을 어떻게든 이해해보고 싶은데 좀 어렵네요. ^^

 

혹시 도움이 될만한 책이나 논문 있으면 소개좀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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