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 44강입니다. 판넨베르크의 이 사도신경 해설의 성령론에 대한 대목을 하고 있는 중이예요. 판넨베르크 책으로만 보자면 여기에 11장이네요. 나는 성령을 믿습니다. 우리가 앞에서 두 번 정도 나누어서 봤구요. 이번에는 세번 째에요. 11장으로 보면 3번째보면 전체 사도신경해설공부로 보자면 44번째에 해당되겠습니다.

성령에 대한 이야기예요. 오늘은 성령에 대한 문제가 생물학적인 차원에 있는 문제들하고 연결되고 있습니다. 보통 성령이라고 하면 개인적으로 마음이 뜨거워진다고 하거나 아니면 특별한 은사를 받는다거나 이런 쪽으로 생각들을 많이 하지요. 그러한 것들이 완전히 틀렸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미 신약성서에 그러한 내용들이 제법 나오고 있어요. 사도신경은 물론이구요. 고린도서도 그렇구요. 곳곳에 성령의 체험, 방언이라든지 특별한 은사와 연관해서 설명하는 대목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본다면 오늘 한국 교회가 이 성령을 믿는 사람들의 은사중심의 체험이라든지 혹은 영적으로 뜨거워지는 것이라든지, 믿음의 확신이라든지 이런 쪽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잘못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그 안에만 머물러 있다고 하는 거죠. 성령의 의미를 대단히 협의로만 받아들이는 거죠.

우리가 공부하면서 앞에서도 나왔을 것이고 오늘도 좀 나오겠습니다만 성령은 바로 생명의 근원의 문제거든요. 이것이 구약에서 오는 성서 전통에서 중요한 대목인데도 우리는 그냥 포괄적이고 다층적인 생명의 근원에서 성령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개인적인 그러한 쪽으로만 이해한다고 하는 것, 그게 문제인거죠. 이게 다른 문제들하고도 연결되는 겁니다. 우리는 신앙을, 좀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기독교의 가르침을, 혹은 교리를 아주 실질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추상적으로 받아들이는 거죠. 그냥 어렴풋한 거죠. 그냥 들은 풍월로만 아는 거죠. 그냥 구원받는다고 할 때 이 말도 좀 더 정확하게 이야기를 해봐라. 판넨베르크 식으로 바꿔 말하하면 세계 현실성에 근거해서 이야기해봐라 하면 말하지 못합니다. 예수믿고 내가 죽어서 천당간다는 그러한 틀에서 더 이상 벗어나지 못하죠. 조금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살아서도 구원의 평화 그러한 것을 누리는 정도를 이야기할 뿐이죠. 이 구원이 생명사건이라고 하는 사실, 그리고 그것이 종말론적으로 열려있다고 하는 것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는 거죠. 이 구원문제가 하나님 나라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고 그것이 곧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문제이고 그런 것이 우리 칭의라든지 이러한 기독교 신앙 전반과 연관되어 있다고 하는 그러한 관점들을 우리는 대개 놓치고 있는 겁니다.

그러한 쪽으로 우리가 자꾸 생각을 좀 해야 되겠어요. 개인적으로는 생각을 한다고 해서 그러한 문제가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배워야 되는거죠. 바둑의 어떤 깊은 수를 알려면 우리보다 나은 사람에게서 배워야 되지 않겠습니까? 바둑만이 아니라 모든 것들이 그렇잖아요. 우리가 이제 그러한 신앙의 차원도 그런 배움에서 접근하는 그런 태도가 좀 필요하죠. 물론 배운다고 이야기 많이 합니다. 그런데 누구에게서 배우느냐가 문제거든요. 앞서 말씀드린 드린 바둑 예를 들면 그렇습니다. 우리가 아마추어라고 한다면 우리가 유단자들에게서 배우는 것이 좋고 급수가 있는 사람들은 누구한데 프로에게 배우면 좋고, 그런 사람들은 또 프로기사들에게 배우고 해야 되잖아요. 자기보다 실력이 나은 사람들에게 배우워야 되는 것이 당연하고 또 실력이 낫다고 하더라도 그냥 아마추어에 머문 사람보다 전문적인 사람에게서 배우는 게 좋습니다. 그건 뭐 두 말할 필요도 없는 거죠. 실제적으로 교회공동체안에서는 전문가가 드물다고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아 교회 목사가 다 전문가가 아니냐 말씀하실 지 모르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신앙과 기독교 영성과 신학 이런 것에 대한 전문적인 인식과 사유와 경험이 없이 교회만 잘 관리하는 방식으로 목사의 기능을 감당하고 있기 때문에 신자들도 사실은 신앙을 배우는 게 아닙니다. 그냥 주어진 작은 신앙의 내용들을 단순하게 반복하고 있을 뿐이지요. 신앙의 깊이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아직 그러한 얄팍한 신앙을 단순 반복 강화하는 차원에서 머물고 있습니다. 이런 것으로는 영성이 살아나지 못하는 거거든요. 그거는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자극적인 방식으로 영성이 깊어지지 못하는 한계들을 극복해보려고 노력을 하죠. 여러가지 교회안에서 펼쳐지는 프로그램들, 이벤트들, 그런 것들이 그러한 것으로 이용되는 것들이죠. 그러한 방식으로 과연 기독교신앙의 깊이로 들어갈 수 있느냐 그것이 아니라는 것은 다 아실 것입니다.

이 성령의 문제도 우리가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아주 개인적인 차원, 아주 주관적인 차원, 아주 주술적인 차원, 혹은 심리적인 정서적인 차원, 혹은 감정적인 차원으로만 좁혀놓고 있어서 실질적으로 성서가 말하려고 하는 생명의 영이라고 하는 그 차원을 따라가지 못하는 거죠. 이렇게 실질적으로 생각을 좀 해보십시오. 우리가 의지하고 있는 그 성령과 이 세계에서 벌어지는 생명 현상들이 어떻게 연관되는가 하는 그러한 문제들 말입니다. 그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세상에 있는 생명현상들은 그런 방식으로 자연안에서 돌아가는 거고 성령은 특별하게 다른 하나님의 영이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죠. 그렇지 않습니다. 고 두 가지가 굉장히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요. 오늘 우리는 판넨베르크 이야기를 통해서 그 부분으로 들어갈 겁니다. 이 책 171쪽 중간 밑에서 시작되는 패러그래프입니다. 이렇습니다.

구약성서에서 영은 결코 초자연적인 인식의 원천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모든 생명의 근원이었다. 여기서 이미 제가 앞에서 말씀드린 방향들을 찾을 수 있죠? 구약성서가 말하는 영은 성령을 받아서 어떤 초자연적인 것을 받아서 어떤 것을 알아낸다 그러한 것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이었다고 하는 겁니다.

여기서 영에 대한 표상은, 표상이라고 하는 거는 독일어로 포 스텔롱이라고 하거든요. 포라고 하는 전치사하고, 스텔롱, 스텔론이라고 하는 동사, 놓다라고 하는 동사에서 온 거예요. 앞에 놓는다고 하는 겁니다. 표상, 독일어로 포 스텔롱. 어떤 생각이라고 할 수 있는 거죠. 영에 대한 어떤 생각, 사유, 개념. 이런 것들은.. 이것을 왜 표상, 개념 이런 것들로 이야기하느냐 하면 그게 실증적으로 딱 눈앞에 떨어지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돌하면 이건 실증적인 거잖아요. 물질이 이렇게 시공간적으로, 가시적으로, 물리학적으로 결정되어 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영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아주 개념적으로 따라갈 수 있는 거죠.

영에 대한 표상은 바람, 공기, 그리고 숨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직접적으로 말할 수 없는거죠. 영이 뭐다 말할 수 없고 다른 것으로 비교해서 설명할 수 있는 거예요. 그것은 바람과 같은 거예요. 공기와 같은 것이고 숨과 같은 것이죠. 같다고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뜻은 아니구요. 그러니까 이런 거죠. 아주 실증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려면 결국 우리 앞에 있는 가시적인 것을 통해서 가능하잖아요. 바람, 공기, 숨 이런 것들은 아주 실증적인 것이니까요. 이런 것을 통해서 영에 대한 표상을 이해하는 거죠.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시편 104편은 하나님의 영이 어떻게 살리는 영으로 작용하는지 매우 인상 깊게 묘사하고 있다. 살리는 영, 거기서 피조물들은 야웨 창조주에게 의존해 있다고 진술된다. 그 시편 104편 29, 30절 인용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얼굴을 숨기시면 그들은 떨면서 두려워하고, 주께서 호흡을 거두어들이시면 그들은 죽어서 본래의 흙으로 돌아갑니다. 주께서 주의 영을 불어넣으시면 그들이 다시 창조됩니다. 주께서는 땅의 모습을 다시 새롭게 하십니다."(시편 104:29, 30). 고대 유대인들의 찬양인데요. 이런 것도 그냥 그러려니 하는 생각으로 읽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기에 고대인들의 독특하고 고유한 세계가 있는 거예요. 세상이 어찌되었던 하나님 믿고 구원받는다고 하는 열광주의적인 상태에 있는것이 아니라 이 세계 실체를 정확히 뚫어보고 거기서 하나님을 변증하는 거죠. 성서는 그런 점에서 대단히 리얼한 그러한 문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성서가 말하는 생명과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리얼리티가 우리들에게 잘 다가오지 않는 거죠.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와 문제가 있습니다. 일단 우리가 그런 방식으로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 신앙의 기초가 잘못되어 있는 거죠. 우리 기껏해야 늘 그런 생각이잖아요. 예수 영접했으니 예수 영접한 느낌을 놓치지 않는 여기에만 몰두하고 있는 겁니다. 특히 한국교회 신자들의 신앙이 굉장히 개인주의적이고 실존적이고, 뭐 좋은 뜻으로도 그렇지 않든 말이죠. 그리고 대단히 도덕적이고. 이게 좋은 쪽이든 그렇지 않든 말이죠. 거기에 머물러 있는 겁니다. 이 세상의 현실들과의 관계를 다 놓치는 거죠. 네. 설교를 여러분 들어보십시오. 늘 기도해라. 전도해라. 교회 중심적인 신앙생활에 어떻게 열정적으로 참여할 것인가에만 관심이 있는 거죠. 거기에만 몰입되어 있는 거죠. 그러니까 늘 이 세계를 자기중심적으로만 바라보게 되는 겁니다. 자기가 주인공이 되는 거죠. 그런 것들이 여러 가지 현상으로 나타나는데 그 중에 하나가 믿음일원론, 믿음지상 주의 같은 것들입니다. 믿음만 강조하게 되는 것이죠. 이미 바울이 산을 옮길만한 믿음도 상대적인거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우리는 믿음지상주의에 빠져있습니다. 믿음이 필요없다고 하는 것, 전혀 아니예요. 믿음이 왜곡된다고 하는게 문제인거죠.

이와 같은 기본적 관점이 제사문서가 말하는 창조기사의 배경이다. 시편 104편이 제사문서를 배경으로 하고서 기록된 시편인거같군요. 제사문서는 구약성서를 분류할 때, 문서특징들을 분류할 때 쓰는 전문적인 용어입니다. J문서가 있고 E문서, J문서 야웨, E문서 엘로힘, P문서 Priest 제사장이 쓴글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한 세 가지 문서중의 하나인 제사문서가 말하는 창조기사의 배경이다. 제사문서는 신적인 영의 태풍이 혼돈을 움직였다고 했다(창 1:2). 그리고 성서 두 번째 장에 있는 보다 오래된 창조기사에 따르면 흙으로 지음 받은 인간은 하나님이 그에게 생기를 불어넣음으로 생명체가 되었다(창 2:7). 이 생기가 바로 루아흐, 바로 성령이죠. 영이죠. 숨이고 바람이죠.

모든 생명의 근원으로서 신적인 영의 이러한 일반적인 작용으로부터 탁월한 (카리스마적인) 능력의 작용을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어떤 경우에 하나님의 영에 적용된다. 즉 여기서는 생명력에 대한 특별한 기준과 하나님의 창조적 영에 속한 특별한 작용을 필요로 하는 아주 탁월하고 비상한 능력과 업적이 핵심이다. 영웅과 예언자의 경우에, 또한 가수와 예술가의 경우에서처럼 그렇다. 이러한 모든 경우에 인간은 모든 생명의 근원인 이러한 능력의 특별한 작용과 관계된다.

조금 복잡한 설명이죠.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구약성서, 주로 P문서가 말하는 창조기사를 배경으로 하는 설명이예요. 예언자들도 다 포함해서 그렇습니다. 구약성서에서 영이라고 할 때 그것은 모든 생명의 근원을 이야기하고 있는 거란 말예요. 이건 처음에 나온 그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생명의 근원으로 활동하는 그 성령이 임하는 자에게는 탁월한 능력이 나타나게 거죠. 어떤 영웅이 할 수 있는 일들이 나타나게 되는 거죠. 예술가와 같은 그러한 일들이 그러한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거죠. 이것이 다 생명의 근원이 영이라고 하는 이 사실에서 부터 시작하는 성서의 가르침입니다. 이렇게 설명하면 성령이 상당히 보편적인 것으로 다가오죠. 우리는 그것을 마술적인 힘 같은 거로 생각하는데 물론 성서에 그렇게 특별한 능력으로 말하는 것이 있기는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성령이 생명의 근원이라고 하는 사실에 놓여 있다고 하는 겁니다. 아주 보편적인 그러한 생명을 일으키는 그러한 힘, 이것이 바로 성령이다. 그 이야기죠. 상당히 포괄적인, 근원적인, 보편적인 해석입니다.

이러한 성서적 사유와 달리 오늘날 우리의 신학이 성령론에 대한 성서적 진술의 넓이로부터 얼마나 먼 곳을 배회하고 있는지 자명하다. 성서의 성령이해로부터 우리의 성령이해가 상당히 멀리 떨어져 나와 있다. 좁아졌다 그 이야기죠. 아마 그 이야기는 제가 이 강의를 시작하면서 잠시 암시한 그 대목에 나와 있는 것입니다.

이제 생명의 생물학적 현상을 신학적으로 설명해야할 때가 온 것인지 모른다. 아마 이 말은 현대 생물학을 전제하고 하는 이야기겠죠. 현대의 생물학이 말하는 생명현상 앞에서 기독교가 책임성 있게 대답을 해야 하잖아요. 생물학이 발달하기 전에는 그러한 말을 하지 않아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죠. 다 일반세계가 하나님으로부터 창조 되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능력으로 살고 있다. 그러한 기독교의 주장을 우리가 받아들였고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딱히 아니라고 말하지 못한 거였 거든요. 자신들도 확실한 게 없었으니까 교회관점에 대해서 아주 노골적으로 반기를 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현대생물학에서는 전혀 상황이 달라지는거죠. 유전공학의 게놈지도 이런 것에 나오잖아요. 이러한 생물학이 말하는 그 생명의 역학적 구조, 기능들, 이런 것들이 만약에 그대로 옳다고 한다면 그렇다면 하나님이 창조했다고 하는 말을 그들에게 어떻게 이들에게 전할수 있겠냐고 하는데서 상당히 어려움이 생기는 거죠. 책임있게 신학적으로 말해야지. 어영부영하고 지나갈 때가 아니다. 그 이야기입니다.

생물학에 의해 연구된 생명현상과의 연관 속에서 모든 생명의 '영적인' 근원에 대해서 말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생명현상을 이해하려면 하나님의 영에 대한 언급이 필수적이라는 점을 지적해야만 할지 모르겠다. 우리 입장에서 인제 이런 이야기를 해야 되는 거죠. 그걸 인제 생물학과 물리학이 얼마나 받아들일는지가 관건이겠구요. 그걸 위해서라도 우리의 말이 설득력이 있어야 되겠죠. 그러한 설득력을 회복하는 것을 세상과 타협하는 것으로 보면 곤란합니다. 기독교, 성서적 신앙은 늘 보편적 진리를 추구했거든요. 우리 교회안에서만 통용하는 말로 끝나면 곤란합니다. 이미 지동설이 대세를 잡았는데도 천동설을 주장한다면 그건 참 이것은 신앙이 아니라 이건 고집인거죠. 진화론 문제도 마찬가지고요. 생명현상이 점점 더 오늘 생물학적인 차원에서 해명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런 것에 대해서 모르고 있을때 말하던 성령, 혹은 창조론을 새로운 방식으로 설명해야 되는거죠. 그런 일을 하지 않는다면 기독교 신앙은 결국 이 세계로부터 도태되고 말겁니다. 지금은 뭐 그런 염려를 안하실 지 모르지만 무책임하게 그렇게 있으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지금 무속신앙을 보십시오. 고대에서는 그것이 주류였어요. 그게 세상의 모든 삶들을 지배하는 진리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 세계의 발전과 더불어서 타당한 설명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제는 이게 완전히 이 세계중심으로부터는 밀려난 거죠. 그래서 인간에게는 본성적인 그러한 종교심이 있기 때문에 무당을 찾아가는 사람들이 사라지지 않는 거죠. 기독교가 그러한 신세가 된다면 천지를 창조한 하나님을 주장하는, 선포해야할 우리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거죠. 그것을 해야 된다 그 이야입니다.

따라서 우선 성령을 신학적으로 체계화하는 작업이 성서적 전승에 걸맞은 넓이에서 착수될 수도 있다. 참 놀라운 거예요. 성서가 기독교의 경전으로서 추호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고대인의 언어로 진술되기는 했지만 거기에는 오늘 물리학이 말하는 것에서도 합당하게 하나님과 하나님의 통치와 생명을 말할 수 근거를 확보해요. 성서적 전승의 어떠한 넓이, 그러한 깊이, 그러한 차원, 그런데서 성령을 실질적으로 체계화하는 작업이 필요한 거죠. 성령은 바로 생명의 근원이니까요.

물론 생명을 말하는 현대과학 앞에서 이러한 작업을 실행한다는 것이 어렵긴 하다. 왜냐? 다음에 설명 드리겠습니다. 어려운 이유가 뭐냐 하는 거죠. 어렵더라도 해야되는 거죠. 어려운 이유가 다음과 같습니다. 생물학은 생명현상을 내재적으로 살아있는 세포의 기능으로 이해한다. 고대 이스라엘은 생명의 근원이 생명체를 초월하는 생명력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우리가 신적인 영을 생각할 때 바로 이 문제가 핵심이다. 고 부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생물학과 성서가 말하는 생명현상에 대한 차이가 뭐냐는 질문앞에서 대답할 수 있는 근거가 바로 여기 있는 거예요.

생물학은 생명현상을 내재적으로 살아있는 세포의 기능으로 이해한다. 그 안에 있는 거예요. 그 안에. 민들레도 그 안에 자기 민들레의 생명현상이 들어 있구요. 이걸 연구하면 생명이 뭐냐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게 주장하는 거죠. 그런데 고대 이스라엘은 생명의 근원이 생명체를 초월하는 생명력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거잖아요. 초월한, 그 어떤 힘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생물학은 내재적이라고 한다면 성서는 초월적이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겁니다. 어느 것이 더 옳을까요? 서로 대립하는 걸까요? 말로만 보면 대립합니다. 그래서 현대과학앞에서 성령을 신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좀 어려운 문제긴 해요. 그러나 그것이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관점이 다를 뿐인데 그 다른 관점의 충돌되는 부분은 좀 줄여나가고. 네 줄여나간다고 하는 말이 적당한 것은 아닌데 충돌을 충돌로 이해하지 않고 일치되는 차원으로 나가는 길이 있는 거에요. 그걸 찾아야 되는 거죠. 우리 신학에서는 고걸 놓치지 말아야 됩니다. 초월하는 생명력, 이런 차원에서 오늘의 생물학과 신학이 대화할 수 있는가 이게 관건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성서와 생물학이 생명현상을 이렇게 명백하게 상반적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실제로 그 어떤 유비를 통해서도 이 둘 사이가 중재될 수 없는 것일까? 생물학은 생물학대로 신학은 신학대로 따로 따로 제 길을 가야되느냐는 질문이죠. 이 질문 속에는 그렇지 않다는 대답이 이미 들어있습니다.

생명현상에 대한 현대적 견해에 따른다면 생명체들은 그러한 생물학적인 견해를 뛰어넘는 현실성과 그 어떤 관련성도 없는 것일까? 생명체 내재 안에서만 있는 것이지 그걸 넘어서는 주변과의 관계성이 없는 것일까 하는 거죠?

뿐만 아니라 그 생명체들의 생명실행*을 위해서도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일까? 생명실행이라는 이 단어는 독일어로 레벤스폴죽이라고 하는 말의 번역이예요. 생명이 일어나는 것, 생명이 완성되는 것 그런 뜻입니다. 생명이 유지되고 살아가는데 생명체 바깥에 있는 어떤 힘들이, 현실성들이 필요 없는 것이냐 하는 거죠.

*생명실행(Lenensvollzug)은 생명체가 생명을 완성하기 위해서 실행하는 모든 것들을 뜻한다. 식물들의 탄소동화작용, 동물들의 숨쉬기와 먹기, 모든 동식물의 진화과정, 더 나아가 인간의 예술과 문화활동도 역시 이에 해당한다. 결국 모든 생명체는 궁극적 생명에 도달하기 위해서 미래로 나아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판넨베르크에 의하면 생명체가 보여주는 이런 생명실행의 차원에서 성령의 지평을 확대할 수 있으며, 또한 그러한 성령론적 생명이해를 통해서 현대 생물학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

분명히 이러한 비의존성이 존재한다. 각기의 유기체는 자기 생명실행을 위해서 일종의 독특한 환경을 필요로 하는데, 그 환경 안에서 유기체가 영양을 공급받고 전개되며 성장할 수 있다. 이 경우에 주변 환경은 자체로서 닫혀있는 게 아니다. 환경은 공간적으로 만이 아니라 시간적으로 구성된다. 환경, 주변, 어떤 그 생명체가 있는 주변을 이야기하는 거죠.

생명체가 환경에 적응함으로써 동시에 미래를 위해서 자신의 고유한 현존을 완성시키고 변화시켜나간다. 이런 종류의 환경들이 진화 과정과 연관된다면 무엇보다도 시간적인 순간이 중요하다. 따라서 각기 유기체는. 여기서 말하는 유기체라고 하는 것은 살아있는 생명체를 이야기합니다. 개구리나 토끼나 사람 등등. 모든 것들을 유기체라고 하잖아요. 각각 유기체는 그가 이미 존재하고 있는 그것을 뛰어넘어 생존해나간다. 진화도 이런 거죠. 결국은 그대로 멈추는 것이 아니잖아요. 시간적으로 주변과 계속 소통하고 있지 않아요. 시간적으로 주변과 계속 소통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야만 생존할 수 있잖습니까? 단절하고 자기만 머물러 있으면 그거는 곧 죽습니다. 주변과의 소통이 끊어지면 죽는 거잖아요.

인간의 세계 개방성은 모든 생명이 추구하는 이러한 자기초월의 한 새로운 단계만을 형성할 뿐이다. 이런 말들도 참 어려운 건데요. 뭐 일일이 다 설명하기는 좀 그렇군요. 확 들어오지 않아도 어렴풋이나마 들어오면 그냥 넘어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모든 영적인 경험의 무아적 본질은 다시 한 번 근본적 실질이 분명하게 확장됨으로써 모든 생명체들로 하여금 자기 생명완성의 현재를 오직 자기 초월로서 획득하게 한다. 이런 문장들도 또 설명이 필요하긴 한건데요. 요렇게 예를 들어도 되겠군요. ‘모든 영적인 경험의 무아적 본질’ 이런 표현 있잖아요. 자기를 넘어설 수 있는 어떤 경험들, 본질이라고 하는 건데요. 모든 동물들에게 있는 성적인 경험도 아마 이런 쪽으로 포함되겠죠. 육체적인 면에서는 그렇구요. 또는 ‘영적인 경험의 무아적 본질’이라고 하는 것은 그러한 성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우리가 예술적인 경험을 하는 것, 그거도 여기에 포함되겠죠. 어쨌든 무아, 자기자신이 사라지는 그러한 차원을 이야기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초월인거죠. 그렇게 초월함으로서만 생명이 유지되는 겁니다. 그런 경험들이 없으면 죽는 거죠. 자폐증 같은 것들이 자기 초월, 무아적 경험이 없고 계속 자기세계로 집착하는 것이잖습니까? 그건 죽음의 길이죠.

예술적 영감, 오랫동안 추구된, 혹은 놀랍도록 우연한 통찰을 통해 갑자기 다가온 깨우침, 개인의 도덕적 의지에서 발현되는 열정 등, 이게다 무아적 본질이죠. 이러한 것에서 모든 생명체의 특별한 현상형식이 보여주는 독특한 자기초월을 인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인간에게 그러한 요소들이 많습니다. 영적 경험의 가장 높은 형식에서 특별한 방식으로 살아 움직이는 이것이 바로 모든 생명의 특징일지도 모른다. 즉 모든 생명체는 이러한 생명의 특징들을 극복하는 현실성에 참여함으로써 살아간다는 말이다. 이 현실성은 앞으로의 개방성을 통해서 일종의 결정론적 고정화를 벗어나게 된다. 네. 개방성을 통해 결정론적 고정화를 벗어나게 된다. 세계와 소통함으로서 주변세계와 공명함으로서 생명체는 결정된 미래에 딱 그렇게 로보트처럼 되는 것에서 벗어나게 되는거죠. 인간의 미래도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모든 생명체가 그러한 결정론적 고정화를 벗어나온 과정이죠. 진화이기도 하구요. 진화를 기계적인 결정론으로 본다는 것은 잘못된 거죠. 이게 딱 기계적으로 생명체가 진화하지 않잖아요. 주변과의 관계에 따라서 그게 달라지지 않습니까? 달라지게 하는 더 근원적인 힘, 그걸 우리는 영적인 현실성이라고 할 수 있는 거예요. 그거를 우리는 성령이라고 말할 수도 있구요. 성령의 활동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거죠. 성령의 근원이 바로 성령이니까요.

이러한 숙고로부터 아마 영적인 것의 본질에 대한 새로운 견해가 열리게 될 것이다. 영은 여기서 인간의 의식이나 자기의식에 대한 주관성으로 이해되는 게 아니다. 주관성을 넘어서는 거라는 거에요. 영은 인간의 자기 자신에 대한 주관성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죠. 그건 바로 자기 자신을 초월하게 만드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는 거죠. 판넨베르크가 앞에서 지적했듯이 기독교가 그것을 주관적인 어떤 그 체험으로만 성령을 축소시켜 온 거, 그것은 잘못입니다.

*생명현실성 (Lebenswirklichkeit)은 말 그대로 생명의 리얼리티를 말한다. 현재의 인간은 모든 생명체들을 포함해서 아직 생명현실성을 완전하게 획득하지 못했다. 우리는 무엇이 궁극적인 생명인지 아직 모른다. 그것은 종말이 이르러야 완성될 세계다. 이는 곧 구원의 완성을 뜻하기도 한다. 물론 부활한 예수를 믿음으로써 이러한 생명의 세계에 참여하게 된다는 희망을 갖고 있지만, 그것이 곧 생명현실성을 이미 완료해 버렸다는 뜻은 아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는 생명지향적인 모든 인간행위에 대해서 종말론적인 방향성을 제시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 세계가 미래로 여전히 개방되어 있으며 현재적으로 은폐되어 있기 때문에 신학은 생명 현실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타학문과 대화를 계속해 나가야 한다.

이게 아니라 반대로 이 의식은 생명체가 영적 현실성에 참여하는 특별한 단계를 뜻한다. 자기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영적인 현실성에 참여하는 특별한 단계. 자기를 초월하게 하는, 그래서 생명으로 하여금 생명 되게 하는 영적인 현실성에 참여하는 특별한 단계가 바로 자기 의식이라하는 거죠. 제가 보기에는 판넨베르크의 설명이 바로 그것입니다. 정확하게 봤는지 모르겠지만요. 이어서 보겠습니다.

여기서 영적 현실성은 모든 살아있는 것의 자기초월과 더불어 작용한다. 다시 한번 읽겠어요. 영적인 현실성, 현실성은 독일어로 하면 드리클리카이트예요. 영어로 하면 Spiritual reality이구요. 독일어로 가이슬리세 드리클리카이트 이렇게 되어 있겠죠. 생명을 이렇게 우선적이고 구체적으로 영의 지평에서 이해하려는 시도는 비록 영과 의식에 대한 인습적인 일치에 너무 강하게 사로잡혀 있긴 하지만 떼이야르 드 샤르뎅에게서 발견된다. 이 이 떼이야르 드 샤르뎅은 로마가톨릭 진화론 신학자예요. 고생물학을 전공했고 가톨릭 신학을 전공한 석학입니다. 그 사람이 어릴 때 이런 경험이 있었다고 하죠. 아주 어렸을 때 어머니가 머리카락을 한웅큼 갖고 나와서 마당에서 불에 태웠다고 합니다. 그때 어린 이 샤르뎅이 존재혼란을 겪었다고 그래요. 바로 앞에 있었던 어머니 손에 있었던 머리카락이 몇 분후에 완전히 사라졌잖아요. 도대체 존재한다고 하는 것이 뭔가? 이런 충격을 받고 신학과 생물학 등등 철학등을 공부했다고 하네요. 천재네요. 어렸을 때 어떻게 그런 충격을 받는지 놀랍습니다. 이 떼이야르 드 샤르뎅에게서 이러한 생명을 영의 지평에서 이해하려고 하는 시도가 있었다고 하는 거예요,

이러한 시도는 영의 지평에서 오직 가능성으로만 제시된 생명에 대한 견해를 단도직입적으로 주장하기 이전에 이런 견해가 교정되어 온 오랜 과정과 이론적이며 경험적으로 관철된 과정을 우선적으로 고찰해야만 한다. 고대 이스라엘이 생명과 영에 대해 가졌던 견해를 생명현상에 대한 근대의 생물학적 연구가 설명하고 있는 조건에서 받아들임으로써 이러한 생명에 대한 견해를 펼쳐나갈 수 있다. 또한 이로써 성령에 대한 신학적 교리의 이해지평**을 제공할 수 있다.

요 대목이 오늘 우리가 같이 공부한 전체 이야기의 결론이 되겠군요. 성령을 개인의 주관적인 자기의식, 혹은 열광주의적인 은사주의에 머물지 않고 생명의 근원으로 이해한다고 하는 이 문제가 현재 새롭게 열리고 있는 생물학의 발전에서 어떻게 신학적 정체성, 혹은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느냐 하는 것에 대한 질문과 대답입니다. 그 결론이 바로 이건 거죠. 고대 이스라엘이 생명과 영에 대한 견해, 이거를 현대 생물학자의 연구의 조건으로 받아들이는 거죠. 이렇게 함으로서 생명에 대한 이해 견해를 신학적으로 펼쳐갈 수 있는 겁니다. 생물학자들이 그것을 받아들이겠느냐 아니냐 하는 것은 두 번째 문제구요.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신학이 보편 타당한 근거를 제공해야 되겠죠. 요 관점만 우리가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성령론이 얼마나 포괄적으로 우리가 따라가야 하는가 알 수 있습니다. 단순히 개인이 기도하고 뜨거운 경험을 했다는 차원이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 생명의 문제 인거죠. 생명현상에 대한 문제인거죠. 레벤스폴죽에 대한 문제인거죠. 그 생명현상은 생물학이 이야기하고 있으니까 우리가 그 생물학자들의 견해에 대해서 뭔가를 말할 수 있는 거죠. 있어야만 되는거죠. 말할 수 없다면 그 신학은 죽은 거겠죠. 그것이 바로 기독교 신학의 지평을 확대시키는 길이기도 합니다. 여태까지 2000년 동안 기독교는 그러한 일을 끊임없이 해왔습니다. 교부시대부터 계속해왔습니다. 중간 중간에 단절되는 시대가 있었지만 그러나 쉬지 않았습니다. 그거는 성서에서도 그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구요. 왜냐하면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이 세상을 다루거든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와 무관한 신학은 혹은 신앙은 가능하지 않는 겁니다. 요 대목에서 제가 역주를 하나 달았는데요. 판넨베르크가 말하는 성령론의 신학적 지평, 요거가 어떤 것이냐는 것에 대한 대답입니다. 역주를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판넨베르크가 생각하는 성령론의 지평은 성서적 생명 이해와 현대의 생물학적 생명 이해를 결합하는 데 있다. 딱 떨어지게 결합될 수 없는 거죠. 결합이라기보다 해석학적 연관성을 찾는 거겠죠. 성서는 생명을 생명 되게 하는 능력을 성령이라고 하며, 현대 물리학과 생물학은 그것을 진화적 과정이라고 한다. 성령은 생명으로 하여금 자기를 초월해 나가게 하는 능력이며, 성서가 말하는 성령이요. 또한 진화 역시 물질이 자기를 초월해나가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성령과 생물학의 접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문제를 간단하게 할 수 있다 없다 말하기가 좀 조심스럽습니다. 그게 계속 긴장관계는 있는 거예요. 생물학은 앞에서 이야기한대로 내재적 생명 가능성들을 주장하고 성서는 초월적 생명관계를 중요시하기 때문에 긴장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게 연결될 수 있는 어떤 선은 있습니다. 길은 있는 거죠. 생명의 본질이 뭐냐에 대해서 양쪽이 대화를 해나가면 그러한 길이 나오게 될 겁니다. 이런 점에서는 신학의 역할이 더 중요하죠. 생물학은 일단 자기 논리에 의해서 자기 길을 가고 있으니까요. 신학은 거기에 대한 대답을 갖지 못했습니다. 이제라도 그러한 시도를 해야 되겠죠. 21세기는 과학신학이 중요한 신학 이슈로 다가오게 될 겁니다.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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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6]병훈

2009.08.28 00:20:35
*.202.82.144

 오늘 사도신경해설 1강부터 정주행시작했습니다..

수련회 때나 설교시간때도 생각할 거리는 많이 생기는데 생각을 엮을 방법(방식, 마음가짐,or 기타등등)은 없어서 각자가 단편적인 지식으로 돌아다니고 있어서요..

아무래도 동영상강의 보다 텍스트가 더 편하더라구요..

프린트해서 읽고 있습니다..

선교사님의 노고 감사드립니다..

너무 날로 먹고 있어서 죄송한 맘이 크지만 앞으로도 부탁드려요..^^ <- 사실은 이말을 하려고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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