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넨베르크 사도신경해설 제26강-제5장 하나님의 외아들 우리주를(3)

네 안녕하세요. 제5장 하나님의 외아들 우리의 주의 항목, 오늘 마지막 시간이군요. 우리의 강의 번호로 따지자면 26강입니다. 스물 여섯 번째네요. 세월이 참 빠릅니다. 시작한 게 정확하게 작년 9월 첫째 주인가요? 야심만만하게 시작했는데 전달능력이 좀 부족해서 그렇게 충실하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도 워낙 이 판넨베르크의 책이 출중하기 때문에 제 설명이 부족한 부분이 있더라도 충분히 여러분들이 한번 들어볼만한 내용으로 손색이 없다고 봅니다.

26강인데요. 오늘 이렇게 주욱 이야기하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 정확하게는 하나님의 외아들이라고 하는 이 초기 기독교의 예수님에 대한 타이틀, 칭호 이것에 얽힌 신학적 배경들 그것입니다. 우리가 몇 번 하기는 했습니다만 그래도 어떤 흐름을 더 따라간다는 차원에서 한두 마디로 요약을 한다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용어가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초자연적이라는 성격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받아들여지지만 실제적으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죠. 오히려 예수님의 지상적 삶에 대한 더 정확하게는 예수님의 이 땅에서의 있었던 그 일에 하나님의 통치가 나타났다고 하는 사실을 말하려고 하는 거죠. 지난번 강의에 마지막 문단에, 그 마지막 문장에 그것이 다시 한 번 재확인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 경우에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우리에게 더 이상 초자연적이고 신적 세계의 자명한 형태가 결코 아니라, 예수의, 인간 예수의 인간적 현실성을 해석하는 연관 가운데서만 오늘의 이해에 적절하다는 것을 가리킨다.

네 그거죠. 외아들이라고 하는 이것을 초자연적인 성격 그것으로만 넘겨버리지 말고 예수님의 인간적 현실성. 인간적 현실성이라고 하는 것이 인간적 모습이다 그런 것이 아니라 예수의 인간적 삶에 나타난 예수님의 그 인간적 삶에 있는 정말 알짜배기. 이런 것들을 인간적 현실성이라고 그러거든요. 그걸 해석하는 연관에서 하나님의 외아들이라고 하는 이 말을 오늘 관점에서 우리가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고 하는 겁니다. 핵심적인 거는 그거예요. 어쨌든 이 용어가 초자연적 성격으로부터 시작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 오히려 예수님의 삶에 확실하게 드러난 하나님의 구원통치를 그 당시의 방식으로 표현했다고 하는 그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우리가 외아들이라고 하는 말을 초자연적이라고, 아 하나님의 아들 거기에 들어있는 뉘앙스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 쪽으로만 자꾸만 전자에 놓고 접근하게 되면 우리는 이 말의 신학적 의미를 전혀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이죠. 예수님에게 신적인 초자연적인 그러한 본질 그런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 도달하게 되는 과정, 그것을 충분하게 이해하지 않으면 오늘의 현실 이해에서 이렇게 설득력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하는 거죠.

그 다음에 전체적인 것을 정리를 하면서 5장을 정리하면 하나님의 외아들 문제를 우리의 주라고 하는 것하고 연관시켜서 판넨베르크가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외아들이고 우리 주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연관되는가 하는 것이죠. 이게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요. 고거는 우리가 강의에 들어가면서 더 보겠습니다. 고 두문제가 연결되는데 결국 고 두 문제를 연결하는데 또 하나의 중요한 개념이 있습니다. 그게 계시라고 하는거예요. 계시, 고 문제는 이에 앞단원에서도 계시라고 하는 단어를 제가 각주로 설명을 했습니다. 책의 90쪽 밑에서 다섯째 줄부터 시작되는 문장이 이렇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인해서 이러한 알림은 신의 최종적인 자기계시일 수 없다. 잠정적인 그러한 성격으로 인해서 최종적인 자기 계시 일 수 없다. 그 문장에서 자기계시라는 단어를 각주로 좀 설명했습니다. 요걸 제가 다시 여러분들에게 집는 것으로 오늘의 강의에 연결시킬 수 있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이 계시라고 하는 단어가 반복해서 나오고 하나님의 외아들, 우리 주라고 하는 이 문제의 연관성도 근본적으로 계시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계시라고 하면 보통 우리는 그냥 교회에서 사용하는 것으로는 기도를 많이 했더니 어떤 깨달음이 왔다 그런 쪽으로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런 것은 계시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인식 깨우침이라고 하는 그런 정도죠. 물론 그것을 절대적으로 계시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없는 겁니다. 그렇게 말할 수는 없겠죠. 그 계시가 부분적으로 우리의 삶에 연결되구요. 아 이게 정확한 표현이 아닌데...

그래도 좀 더 해보겠습니다. 이러한 표현들이 굉장히 다층적이기 때문에 제가 딱 단정적으로 이야기하지 않고요. 사실은 단정적으로 이야기하고 넘어가도 되지만 그러나 여러분들이 신학의 개념안에 들어있는 의미들을 이렇게 좀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훈련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제가 이런저런 여러 가지 각도로 풀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자기가 기도를 많이 하는 가운데 아니면 성경을 읽어가는 가운데 어떤 깨우침이 왔다고 하는 그것을 계시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고 한 거예요. 그러나 그것이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없는 이유도 있다고 하는 거죠. 그것은 우리의 삶 전체를 끌어가는 힘이 성령이시잖습니까? 진리의 영이구요. 생명의 영이구요. 창조의 영이고 종말의 영이신 삼위일체의 한 위격인 그분, 그분이 우리를 끌어간단 말 이예요. 성령과의 관계에서 이제 우리의 영성이 심화되고 하는데요. 우리가 기독교 진리를 깨달아가는 것도 성령의 도우심이라고 할 수 있거든요. 이런 말 이예요. 성령도 삼위일체의 한 위격이라고 하는 점에서 성령과 우리의 소통 그것이 하나님 계시의 부분적인 어떤 현상일 수 있다고 그걸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하다고 하더라도 신학적인 차원에서 인간들의 인식들을 계시라고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계시 받았다고 하는 이런 말은 허풍인거예요 아무리 그것이 진정한 경험이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계시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기계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기서 자기계시라는 말을 이해하셔야 되요. 독일어로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게시스트 오펜바론 자기계시예요. 낱말 뜻이야 어렵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낱말 뜻 너머에 어떤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계시란 곧 하나님의 자기 계시이다라고 하는 이 말의 뜻은 계시가 곧 하나님이시다라는 뜻입니다. 계시는 하나님의 자기 노출이지 다른 게 아니라고 하는 것이죠. 이 말은 곧 방금 말씀드린 대로 계시가 곧 하나님입니다. 다른 신학개념하고 연관시켜서 설명드린다면요.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님의 통치고 그것이 곧 하나님인 것처럼요. 하나님의 계시가 곧 하나님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계시를 받았다고 하는 그 말은 하나님을 받았다라는 말과 똑 같은 거예요. 그 말이 되지 않지 않잖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받아요. 어젯밤에 내가 기도하다가 어디 가서 선교하라고 하는 깨달음을 얻은 것을 하나님을 받았다고 말할 수 없잖습니까? 하나님의 뜻일 수도 있는 거죠. 그것을 넓은 의미에서 간접적으로 그것이 계시가 아니다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지만 그러나 계시는 신학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드러내는 사건이기 때문에 우리의 몇 가지 신앙생활의 과정에서 경험하게 되는 깨우침 이런 것들을 계시와 일치시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기계시 그것이 곧 계시다.

다시 정리하면요. 하나님이 곧 계시인거예요 아무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아무도 계시를 본 사람이 없는 거예요. 부분적인 하나님 경험은 있는 거죠. 아주 정말 코끼리의 털 하나 정도의 경험들은 다 가지고 있습니다. 성서에 나와 있는 하나님에 대한 경험에 대한 진술도 그것에서 더 나아가지 못합니다. 아주 일부 아주 부분적인 그러한 경험을 갖고 그러니까요. 코끼리의 털 하나를 경험하고서 이게 코끼리다 이렇게 말할 수 없잖아요. 코끼리의 정말 수억 분의 1 그런 정도의 경험인데 그런 것을 두고 코끼리가 나타났다. 코끼리를 실체적으로 만났다. 계시를 받았다는 차원이죠. 그렇게 말한다고 하는 것은 뭘 모르는 이야기인거죠. 고걸 전제하고 이 책 내용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이 계시라고 하는 말이 그렇게 우리의 종교적 경험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체의 드러남이라고 하는 그 문제 말이죠.

하나님의 자기계시:(Selbstoffenbarung)라는 용어는 헤겔 이후로 기독교 신학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이 되었다. 기본적으로 기독교 신학에서 계시는 하나님 자체로 인식된다. 하나님이라는 주체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면서 계시 현상이 나타나는 게 아니라 계시 자체가 바로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또한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가 다른 게 아니라 일치된다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로 존재한다고. 판넨베르크의 경우에 이 계시는 보편사적 개념으로 파악된다.

기왕 말이 나왔기 때문에 한마디만 더 하면 전체 역사가 계시인거에요. 종말에 가서야 바울이 표현한 대로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볼 정도로 모든 실체를 이해하게 된다는 게 아니겠습니까? 실체가 드러난다는 말이고요. 하나님의 계시이구 하나님 자체의 드러남이지요. 그때 가게 되면 모든 것 비밀들이 다, 지금은 다 비밀이고 은폐되어 있는 것이지만 그때가면 확 드러나게 되는 거죠. 거기까지 계시 개념을 정리하구요 오늘 강의 안으로 좀 들어가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계시자인 예수는 ‘아들’이며, 또한 그는 우리가 하나님의 신성을 인식하는 일에 매우 밀접하게 관계되어있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의 신성을 예수와 분리해서는 실제적으로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하나님의 계시자인 예수. 이게 예수님이 하나님의 계시인거죠. 계시를, 바로 앞에서 제가 말씀을 드렸잖아요. 하나님의 자기 계시라고요. 하나님의 자기 노출이라고요. 예수님이 그게 다 기독교 신앙이 다 그것에 기본적인 토대를 하고 있습니다. 외아들이라고 하는 것도 바로 그러한 고백이구요. 예수의 그 삶의, 인간적 현실성에 하나님이 계시되었다고 보는 거잖아요. 하나님의 자기노출, 자기와 하나가 되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계시자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거죠. 그가 몇 가지 특별한 일을 했다고 해서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 증거가 뭐냐? 어떻게 우리가 예수를 하나님의 계시자,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라는 그것은 똑같은 건데요. 어떻게 말할 수 있느냐 증거가 뭐냐 아마 여러분들이 답을 알고 있을 겁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예수님, 죽었던 예수님을 부활현현으로 경험한 거거든요. 부활경험인거죠. 생명사건이기 때문에 그 경험으로 초기 기독교인들에게는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계시자로 이렇게 인식된 겁니다. 그것을 난 믿지 못하겠다. 그러면 기독교 신앙하지 않으면 되죠. 그렇게 무책임한 말을 하지 말고 믿을만한 증거를 좀 대라. 부활이 뭐냐 초기 기독교인들이 부활현현에 대한 경험이 확실하다고 하는 증거가 뭐냐 그런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건 조금 뒤에 가면 조금 더 나오겠죠. 천천히 가겠습니다. 우리가 한 발짝 한 발짝 나가야지 모든 것을 다 한꺼번에 두드려 잡듯이 해결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외아들이라고 하는 칭호에 담긴 초기 기독교인들의 예수 경험 그것을 이야기 하는 거죠. 그것이 단순히 예수에게 초자연적 어떤 능력이 있었다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 현실성의 하나님의 구원통치, 그것을 계시라고 말할 수 있겠죠. 그것을 말하려고 하는 거죠. 네 지금 문장이 다 그겁니다. 하나님의 신성을 예수와 분리해서는 더 이상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그가 메시야이거든요. 하나님이 그에게 드러난 거죠. 그 다음 문장입니다.

하나님의 미래가 예수를 통해서 현재적 현실성이 된다는 말이다. 이런 말들이 신학적 용어라서 좀 까다롭죠. 처음 읽으면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합니다. 그거는 차근차근히 신학적인 term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거예요. Terminology라고 할수 있어요. 용어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그 용어들이 엮여서 만들어내는 신학적 현실안으로 우리가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게 일반신자들이 신학 책을 읽을 때 넘기 힘든 한계, 고개라고 할 수 있어요. 이게 쉽게 극복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사도신경해설에 대한 저의 강해를 꼼꼼히 귀담아 들은 분들은 귀가 좀 열릴걸요. 공부 다 끝난 다음에 다시 한 번 이 책을 읽어보십시오. 그리고 처음 이 책을 대했을 때 하고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을 보세요. 아마 그건 큰 차이가 있을 겁니다. 그만큼 여러분들이 신학적인 세계 속으로 발을 디뎠다고 볼 수 있는 거예요.

방금 읽은 문장도 그런 거예요. 하나님의 미래가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이면 하나님이지 하나님의 미래가 뭐냐 일반신자들은 이런 신학적 용어들을 많이 접해보지 않고 생각을 안했기 때문에 이게 너무 뜬구름 잡는 식으로 들릴 수 있는 거예요. 그러나 이게 정확하다는 것을 아시겠죠. 하나님의 미래, 미래에 가서 완전히 드러날 하나님의 종말론적 성격 이런 것들을 이야기합니다. 이 미래가 예수를 통해서 현재적 현실성이 된단 말이죠. 네 종말에 가서야 하나님의 실체가 드러날 텐데 예수님을 통해서, 그는 바로 역사적 인물이었으니까요. 우리와 똑같은 현재의 시간과 공간 안에서 우리와 똑같은 방식으로 전재하셨던 그분, 그 분 안에서 현재적 현실성, 독일어로 어떻게 썼는지 모르겠어요. 게겐베피티 현재 드리키르가이 현실성, 하나님의 미래가 예수를 통해서 역사 안에 선취되었다 그 뜻이기도 합니다. 현재적 현실성, 더 부연 설명이 나옵니다. 그의 사명으로 인해서. 예수님의 사명이요. 임박한 하나님나라가 선포하고 그 안에서 살아야 되고 그것을 실행해야 된다고 하는 그 사명으로 인해서 하나님은 자신의 본질을 드러내는 사랑을 증명한다. 예수에게서 그러한 사랑을 증명하는 거죠. 이런 한에서 예수 자신은 그가 세계와 인류역사의 과정에서 상당히 늦게 출현했음에도 불구하고 기원 고 시대에 태어났으니까 기원 이전보다 훨씬 후잖아요. 분명히 영원한 하나님의 신성에 속한다. 시간을 뚫고 올라가서 선재한 존재로 인식이 되고 그렇게 존재하게 되는 거죠. 하나님의 신성에 참여한 자, 혹은 하나님의 신성이 그에게 임한 자 그래서 비록 역사의 한 시기에 살았지만 영원한 신성과 일치된 분, 이렇게 초기기독교에서 예수님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습니다. 그런 와중에 외아들, 주 이런 칭호들이 예수님을 부르는 호칭이 된 거죠.

이 인간 예수가 하나님의 영원한 신성에 속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가 갖는 선재성을 뜻한다. 선재성, 처음부터 있는 자의 자격을 얻게 되었다고 하는 거죠. 그건 말이 안된다. 생각하시죠? 그게 솔직한 겁니다. 그건 말이 안 되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인간으로 있는데 백 년 전에 내가 있는 거처럼 말할 수 없잖아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서 내가 있는 것으로는 안되잖아요. 그러한 시간을 거스릴 수 있는 존재는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그게 신성이거든요. 신성은 시간과 공간이 허물어지는 방식에 절대적인 존재자라고 할 수 있는데요. 예수님이 우리와 똑같이 역사적 한계 안에 사신 분인데 선재한다 신성에 참여한다. 이런 말들은 조금 이해하기 힘듭니다. 이러한 말들은 가능합니다. 이러한 문제들을 시간적인 계산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습니다. 기원전 한 3년, 4년에 태어나서 한 30년 사셨던 그분의 시간들을 어떻게 선재, 영원한 것과 연관시킬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시간을 이렇게 크로노스의 방식으로 이해해서는 불가능한 거예요. 카이로스죠. 다른 차원의 시간입니다. 이런 차원인 겁니다. 예수의 인간적 현실에 하나님이 계시되었다고 하는 이것을 전제할 때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드러난 거니까요. 계시는 하님의 자기노출이잖아요. 그렇다면 역사적으로 그 당시에만 있었지만 이미 거기에 신, 하나님이 자기계시가 정말 실제적으로 일어났다고 하는 것을 전재한다면 그것은 시간을 뛰어넘는 거죠. 선재한 자죠. 그 문장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이 인간 예수가 하나님의 영원한 신성에 속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가 갖는 선재성을 뜻한다. 바울은 이미 이 사실을 로마서 8장3절과 갈라디아서 4장4절에서 언급하고 있다. 만약 하나님의 계시, 계시가 계속 나와요. 그래서 제가 강의 시작전에 설명을 좀 했어요. 만약 하나님의 계시라 할 예수가 하나님의 본질에 속한다는 것이 틀림없는 사실이라면, 그는 이런 측면에서, 그리고 하나님과의 일치라고 하는 측면에서 인간으로 출생하기 이전에 당연히 하나님의 본질에 속하는 것이 틀림없다. 논리적으로 맞는 이야기죠. 예수가 하나님의 본질에 속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한다면, 본질적으로 일치된다고 한다면 역사안에 출현하기 전에 이미 그때부터 이미 하나님의 본질에 속해 있는 거죠.

따라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선재한다는 언급은 하나님의 계시에서 하나님과 예수가 일치한다는 사실로부터 나온 일종의 귀결이다. consequence 귀결이다. 이 계시에서 예수가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하나라는 것은 완결되었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은 예수 안에 있는 자기 계시에서 하나님 자신으로서 계시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예수가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일치한다고 하는 것은 그가 인간적으로 유한하며 우리 모두처럼 시간적으로 제약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영원성에 참여한다고 하는 것을 뜻한다. 네 지금까지 설명은 크게 무리가 없습니다. 아마 기독교 신앙을 갖지 않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이 논리자체는 크게 부정하지는 않을 거예요. 예수, 하나님의 계시자인 예수 그냥 예수라고 해도 좋습니다. 앞에 있는 단서들을 빼고요. 예수의 본질이 하나님의 본질과 일치한다고 한다면 그가 역사안에 드러나기 이전에도 이미 신성, 신적인 본질을 갖고 있는 자라는 것은 당연하지 않느냐 하는거죠. 그게 당연하지 않는가요? 당연하지요. 제가 더 설명을 해야 될까요? 뭐 그런 정도로 하지요. 그 다음에 다른 설명도 있으니까. 진도를 좀 나가겠습니다. 요기까지 고걸 전제하면서 다음의 주, 우리의 주라고 하는 것하고 어떻게 연관되는가? 이어집니다.

예수에게 ‘主’ 칭호가 부여됨으로써 그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본질과 하나라는 특징이 매우 확실해진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이 주라고 하는 칭호를 통해서 확실해 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그런 것이요. 주는 통치하는 것, 진정한 통치자죠. 하나님은 통치자이시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다면 당연히 통치자가 되어야 된다고 하는 거죠. 그게 주라고 하는 칭호가 갖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초기 기독교인들의 예수님의 본질을, 아까 여기는 귀결이라고 했는데 그렇게 논리적으로 확장시켜 나가게 된 거죠. 그런데 이러한 설명을 듣고 아 예수는 원래 그렇게 있었던 분이 아니라 초기 기독교인들에 의해서 그렇게 의미가 부여되고 확장된 것에 불과하구나. 결국은 사람들이 어떻게 보느냐 그게 중요하구나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건 오해입니다. 그런 과정을 거치기는 했지만 그것은 초기 기독교인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은 아니에요. 초기 기독교인들의 고유한 인식과 경험들이 작용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없는 것을 만들어 내는 듯 한 그러한 인식이나 경험들은 아닙니다. 그것은 아주 명백한 어떠한 사실들, 아주 명백한 사건, 사실이라기보다 사건이라고 해야 되겠군요. 사건들, 경험들에 근거해서 또는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발전해 나간, 혹은 심화 확대해나간 그런거죠. 네.

이러한 특징적 표현, 주라고 하는 칭호, 이러한 특징적 표현은 원시 기독교 전승이 견지한 고대 기독교의 고백양식이 담고 있는 내용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3절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성령으로 감동하지 않고는 아무도 ‘예수는 주님이시다’ 하고 말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시다. 예수는 주님이시다. 이게 성령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고백할 수 없다고 하는 겁니다. 이런 말들을 여러분들은 그냥 상투적으로 듣지 않습니까? 아 예수는 주님이라고 하는 뜻이구나. 그렇게 듣지 않습니까. 성령, 진리의 영의 도움이 아니면 그러한 존재론적 진리의 영의 활동이 아니라면, 누구도 예수를 주님이라고 고백하기 힘들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건 말이 되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것은 더 근원적인 세계에 대한, 사건에 대한 아주 실질적인 경험이 없는 한 가능하지 않는 거니까요. 예수에 대한 아주 실질적인 경험들이, 그런 것이 있었던 겁니다. 그 핵심에 부활이 있는 거죠. 부활로부터 차근차근 예수님에 대한 정체성과 본질이 초기 기독교인들에 의해서 이해되는 거죠.

主, 즉 퀴리오스(Kyrios)라는 단어는 구약성서를 헬라어로 번역할 때 경건한 유대인이 직접 부르기 힘든 야훼라는 구약의 하나님 이름을 바꿔 쓰기 위해서 사용된 것이다. 부활 이전의 예수는 단순히 의례적인 대화의 차원에서 ‘주’라고 불렸을 가능성이 있다. 의례적으로, 관용적으로요. 후에 이런 습관은 결국 하나님의 이름을 바꿔 쓴 ‘주’라는 단어의 중요한 의미로 용해되었다. 왜냐하면 헬라인들은 퀴리오스라는 단어를 그와 같이 두 가지 의미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저도 요걸 새롭게 배웠네요. 두 가지의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하네요. 하나는 의례적으로 주라고 하는 것이 있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이름을 직접 부르기 힘드니까 바꾸어서 주라고 이렇게 사용했다고 하는 거죠.

실제적으로 이런 과정과 또한 이런 과정에 근거해서 결과적으로 도출된 예수에 대한 언급은, 즉 예수를 신적인 의미에서 主라고 한 언급은 의례적인데서 신적인 의미의 차원으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된 이러한 언급은 예수가 종말론적으로 보냄 받은 자로서, 그리고 하나님의 계시자로서 하나님의 아들이며 따라서 하나님과 하나라는 사실을 통해 정당화되었다. 그냥 부르는 선생님 선생님하던 의례적인 차원의 명칭이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헬라적 표기에 그 의미로 이렇게 바뀌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그냥 인간적인 선생님, 존경하는 선생님 이런 정도에서 하나님인 바로 그 선생님, 바로 그 주님 이렇게 용해, 용해라고 되어있죠. 그렇게 해석 된거다. 네.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고 문장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제가 말을 하다가 조금 흐름을 놓쳤어요. 실제적으로 이런 과정과 또한 이런 과정에 근거해서 결과적으로 도출된 예수에 대한 언급은, 즉 예수를 신적인 의미에서 主라고 한 언급은 의례적인데서 신적인 의미의 차원으로 옮겨가는 차원에서 예수가 종말론적으로 보냄 받은 자로서, 그리고 하나님의 계시자로서 하나님의 아들이며 따라서 하나님과 하나라는 사실을 통해 정당화되었다.

원시 기독교의 역사에서는 하나님의-아들-칭호보다 퀴리오스라는 칭호가 훨씬 분명하게 예수와 하나님의 일치를 상위적인 개념으로 결정하고 있는 표현방식이다. 아 이거는 정말 까다로운 거구요. 하나님의 아들 칭호보다는 퀴리오스라고 하는 칭호가 예수님과 하나님의 일치를 더 근원적인 것으로 말하는 표현방식이다라고 하는 거죠. 이 퀴리오스라고 하는 단어가 더 중요하다. 예수님의 신성을 이야기할 때 더 핵심적 이였다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칭호로 더 정당화 되는 거죠. 아마 이거는 그런 거 같네요.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초자연적인 어떤 그러한 성격이라기보다도 어떤 신적인 위탁을 받은 자의 개념을 갖고 있다고 하는 점에서 고런 정도라고 한다면 퀴리오스는 바로 주라고 하는 단어는 야훼라고 이름을 직접 부르기가 힘드니까 바꿔 부른 거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이게 더 엄청나게 신적인 본질을 담고 있는 거죠. 그런 면에서 하나님과 예수의 일치, 핵심인겁니다. 초기 기독교에서 예수와 하나님의 일치의 관건이 되는건데 고러한 신앙의 세계로 들어갔다고 하는 것이 핵심인데요. 여기 그러니까 당연히 야훼라고 하는 이름의 헬라어 번역이 퀴리오스 이것이 훨씬 더 예수와 하나님의 일치를 이야기할 때 우선적인 거다 하는 거죠.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이어서 나오는 거군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는 유대적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의 수하에 속하는 하부구조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재미있는 이야기이군요. 하나님의 아들은 유대인의 관점으로 보면 하나님 보다는 하부구조로 들어가게 되는데 주라고 하는 점은 정말 일치라고 하는 관점에서 상위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상을 통치하는 하나님의 대리자가 갖는 기능은 피조성의 한계를 벗어나야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주로 헬라 영역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신적인 본질로서 이해되었다. 복잡한 거군요. 헬라지역, 유대지역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개념들이 서로 좀 다르고 퀴리오스라는 이름이 다양하고 그런 가운데서 초기기독교가 굉장히 엄밀하면서 포괄적인 그러한 개념으로 예수님을 이해하게 된 것 같애요.

이미 언급했듯이 이러한 이해가 바울에게서 항상 발견된다. 여기서 예수에게 속한 하나님의 아들됨에 대한 사상, 이것은 퀴리오스라는 칭호가 뜻하고 있는 하나님과의 일치와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만약 예수에게 속한 하나님의 아들직, 혹은 아들됨이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자기 알림을 뜻한다면 이러한 인식의 발전은 분명히 실질적으로 정당하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이 하나님의 자기 알림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의 최종적인 성격에 의해 본질이 결정적으로 성취되는 순간을 의미한다. 네 계시죠. 조금 복잡한 문제이긴 했네요. 재미있기도 하지요. 초기 기독교 안에서 이렇게 예수님에 대한 칭호문제로 여러 가지 흐름들이 작용했다고 하는 사실이 흥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해가 어느 날 갑자기 뚝딱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을 두고 초기기독교 공동체에 의해서 마치 연금술사들의 그러한 작업처럼 창조적인 이해로 나갔다고 하는 것이죠. 이런 점에서 기독교 신앙을 이야기할 때 유대교적인 배경, 헬라적인 배경 이런 것들은 놓칠 수 없습니다. 그 연관 속에서 예수님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으니까요. 네 그러한 모든 연관성들이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다는 것은 아니고, 그리고 그런 것들을 채용해서 초기기독교인들이 새로운 종교를 만들어 낸 것은 결코 아니고요. 그러한 논리들이 나올 수밖에 없는 더 원천적인 경험이 있었던 거예요. 물론 그것은 핵심적으로 부활입니다. 그러한 경험으로 인해서 예수님에 대한 인식의 흐름들이 점점 확대되면서 유대고의 헬라에 의한 이해들, 그런 것들이 일종의 지평융해라고 할까요. 그것이 들어와서 기독교적인 고유한 신앙의 형태를 갖추게 된 겁니다. 크리스톨로지죠. 기독론이 그렇게 완성되는 거죠. 예수에 대한 이해가 그렇게 역사적 과정을 통해서 형성된 것입니다.

네 이러한 형성과정을 우리가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다면 오늘 우리가 성경을 근본으로 해서 전하는 설교는 자칫 아전인수로 빠질 수 있고 아니면 근본을 놓친 채 변죽만 울릴 수도 있어요. 그런 세계에 들어가지 못하게 될 때 위험성들이 지금 말한 몇 가지 그런 것과 더불어서 신학의 중심에서도 마찬가지로 작용하게 되는 건데 신학이 도구적인 차원으로 떨어질 가능성도 있습니다. 정확한 표현인가요? 이렇게 신학이 소유격 신학으로 떨어질 수 있다고 하는 겁니다. 무엇 무엇의 신학, 민중의 신학, 정치의 신학, 여성신학 예를 들자면 생태의 신학 이런 것처럼 말이죠. 그러한 부분들이 다 필요한 부분들이고 검토되어야 할 것은 분명하지만 그런 식으로 신학이 사용되어 버린다고 하면, 소비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도구화되는 그러한 염려가 있습니다. 이 말은 이런 것에 대한 위험성이죠. 네. 신학은 기본적으로 기초신학이어야 하는데 그것을 놓치고 기초가 아니고 기초 근본 Fundamental 독일어로 훈다멘탈 티올로기 이렇게 하는데요. 지금 말하고 있는 것들이 다 훈다멘탈한거예요. 신학의 뿌리예요. 이런 것들에 대해 성찰을 놓고 오늘 기독교 신학이 나아가야 될 방향을 찾아야 되는 것에 그런 것에 대한 성찰은 전혀 없이 오늘 청중들이 원하는 것에 눈높이 식으로 어떤 대안들을 제시하는 방식의 신앙과 신학은 건강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네 그렇구요. 지금 고기까지 했습니다. 하나님의 외아들과 우리의 주라고 하는 두 가지 칭호가 서로 연결되면서 핵심적으로 예수와 하나님이 일치한다고 하는 사실을 변증해 보려고 했었던 거예요. 그것이 유대교적인 어떤 전통과 헬라적인 전통에서 약간 다른 해석이 있었지만 그것이 기독교 신앙이라고 하는 그 틀 안에서 융해되어서 고유한 기독론이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 패러그래프요. 95쪽 밑에서 다섯째 줄입니다. 천천히 5장이 정리되는 것 같습니다.

결과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主라고 믿는 고백은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다는 것과 내용적으로 밀접한 관계에 있다. 여기서 이 두 언급, 예수를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다는 것하고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다고 하는 이 고백은 언어적 강조점에 따라 사용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직접적으로 제시하기도하며, 반대로 서로 다른 의미를 제시하기도 한다. 성서에서 그렇게 나타난다. 이러한 의미는 그것의 전승사적인 유래로부터 도출된다. 전승 즉 흘러내려온 것을 이야기하거든요 독일어로 위버히에롱 흐름 그런 것을 따라가는 방식으로 그것을 우리가 밝힐 수 있는 거죠. 네. ‘하나님의 아들’ 칭호는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예수의 입장을 오직 세상과의 대립적인 위치에서 우선적으로 그리고 명시적으로 직접 파악한다는 특징을 갖는다. 두 가지 칭호가 다르게도 비슷하게 통합적으로 비슷하게 상충적으로 통합적으로 사용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결국은 그것이 다 예수와 하나님과의 일치를 말하는 것인데 언어적인 차이점이 있다고 하는 거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칭호는 하나님아버지에 대한 예수의 입장 이예요. 하나님 아버지라고 불렀잖아요. 예수의 입장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할 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전승사적으로 가능한 거구요. 또 바꿔서 퀴리오스, 즉 主라는 칭호는 우선적으로 세상과의 관계가 통치적 의미에서 표현되는 것처럼 보인다. 앞에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입장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의미한다면 이 퀴리오스라고 하는 것은 세상과의 관계에서 통치한다. 통치적인 차원에서 세상과의 관계에서 예수님이 보여주신 또 그에게 나타난 세상과의 관계를 말하는 거죠. 네 재미있는 표현이죠. 정확한 설명이기도도 하구요.

하나님과 예수의 일치, 즉 하나님을 향한 예수의 입장이 이 칭호에서 오직 비명시적으로 결정되고. 왜 비명시적으로 이야기했을까요? 예수님이 스스로 나는 하나님과 하나다 이야기하지 않았잖아요. 미명시적으로 결정되고, 또한 그 출생에서부터 고유한 그의 의미를 생각함으로써 형성되어가는 중에서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외아들이며 우리의 주라고 언급하는 것을 보면 전승사적인 과정속에서 사도신경이 결국 예수님을 하나님의 외아들이며 우리의 주라고 같이 언급하잖아요. 이런 것을 보면 사도신경은 이미 이 두 칭호를 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해석학적인 역사를 담고 이 두 용어를 쓰고 있는 거죠. 말하자면 아들 칭호에 따르면 하나님에 대한 예수의 위치가 설명되는 것이고, 주 칭호에 따르면 우리와 세계를 향해서 그 칭호에 토대를 두고 있는 예수의 위치가 설명되고 있는 것이다. 앞에 나와 있는 이야기를 보충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예수의 위치, 주는 예수와 세상과의 위치, 결국 두 가지가 다 예수님과 하나님의 일치라고 것을 말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로서 예수는 초기 기독교회의 신앙에서 헬라 세계가 알고 있던 여러 종류의 ‘主들’과 관계된다. 한편으로는 헬라 식으로 퀴리오스라는 칭호로 불리운 로마의 카이저, 시저가 있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밀의종교에 볼 수 있는 신적인 것들이 있었다. 그 모든 것들에 대립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참된 퀴리오스로서, 세계의 참된 주로서 세계를 참되게 통치하는 자로서 선포되었다. 이게 사도신경에서 해석된 주칭호의 도입과 연관된 전승사적인 맥락인거죠. 그에게는 모든 것이 지배당해야만 했다. 이에 따라서 특별히 교회의 선교적 사명은 예수님이 퀴리오스라는 징표에 담겨있다. 그렇잖아요. 예수님이 명실상부한 주, 통치자라고 한다면 그 사실을 온 세상에 알려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이런 이유로 인해서 초기 기독교 이래로 主라는 칭호는 그리스도를 우주론적이고 보편적인 진리의 차원에서 선포해야 한다는 특징을 갖게 했다. 주는 통치자거든요. 일부분만이 아니라 온 세계 통치자이기 때문에 그 분을 변증하려면 밀의 종교방식으로 안되고요. 어떤 한부분에만 통용되는 그런 방식으로서가 아니고요. 보편적인 우주론적인 그러한 진리론적인 차원에서 선포되어야 되어야 된다. 보편적 진리의 차원에 예수가 퀴리오스라고 하는 사실이 변호되어야 된다고 하는거죠. 그러한 요청을 받은 거죠. 당연한 결과로서 점점 더 한 발짝 나가면서 그러한 요구를 초기 기독교가 받았고 그러한 일을 했습니다. 실제적으로요. 헬라철학과의 대화도 계속했구요. 보편적 진리로서 그 차원에서 예수님을, 혹은 예수님의 복음을 선포하려고 했었죠. 그러니까 이 말은 믿어라 믿어라 이렇게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믿을만한 보편적인 우주론적인 진리의 근거를 대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통 이러한 특징은 오늘까지도 여전히 유용한 거거든요. 21세기 새로운 시대에 이때의 보편적인 진리가 무엇이냐 하는 것들을 우리가 봐야 되는 거죠. 자연과학이 새롭게 부각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변증을 자연과학적인 관점으로도 당연히 해야 된다는 거죠. 보편적 진리의 차원이 있어야 되니까요. 그게 아니라 단순히 인간의 심리차원, 어떤 감수성 차원, 종교적 본능차원 이런 쪽으로만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한다고 한다는 것은 초기 기독교부터 있었던 보편적 진리차원에서 요청된 선교라고 하는 점에서도 불합리하다. 부족하다. 그 근본을 우리가 놓쳤다 이러게 이야기할 수 있겠죠. 마지막 문장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진리는 모든 다른 진리를 지양*할 수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 진리로 증명되는 그것이다.

독일어 aufheben은 일반적으로 ‘지양한다’로 번역되고 있지만, 잘못하면 이것이 무언가를 거절하고, 포기하고, 중지한다는 뜻으로만 받아들여질 위험이 있다. 이 단어는 그런 뜻만이 아니라 ‘위로 올리다’, ‘보관하다’는 등 여러 의미로 사용된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의 主칭호가 다른 진리를 지양할 수 있다는 이 문장의 의미는 다른 진리를 제거한다기보다는 우주론적 기독론 가운데서 변증법적으로 살려낸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오늘 기독교는 타종교나 여타의 진리실행들에 대해서 적대감을 보일 게 아니라 생명의 세계에 이르도록 대화하고 연대해나가는 게 옳을 것이다.

다른 모든 진리를 지양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을 통해서 진리로 증명되는 그것이다. 말이 좀 까다롭죠. 간단하게 하면 이 보편적이고 우주론적인 진리차원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모든 진리들을 지양시킬 수 있는 것이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지양이라고 하는 것은 보통 우리가 일반적으로 쓸 때에는 좀 부정적인 의미예요. 지양하고 지향하자 반대적인 의미인데 신학과 철학의 용어에서 특별히 독일어에서는 지양이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변증적인 의미가 있는 거예요. 정반합이잖아요. 아우프해붕. 아우는 위로, 헤붕 위로 끌어올리는 것인데 그러니까 어떤 명제들을 지양한다고 하는 것은 완전히 부정한다는 것이 아니라 더 고차원적인 진리로 가기 위해서 그것을 부정하면서 끌어올리는 것을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기독교의 복음 이거는 다른 모든 여타의 진리들, 여기는 생물학 물리학 사회학 인간모두에 걸친 고고학까지 포함에서 이런 것들이 진리 아니겠어요. 그런 것들을 지양하는 것으로서의 진리여야 된다고 하는 거죠. 그런 것들을 다 지양, 끌어올려서 새로운 진리가 되게 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통해서 참된 진리로 증명되는 것이다. 신학이 가야될 길, 그런 것도 여기에 들어있습니다.

여기까지 인제 5장이 마쳤어요. 어떻게 보면 길다 느낌을 받았어요. 초기 기독교에 있었던 복잡한 논의의 과정을 우리가 따라가다 보니까 완전히 딴 세계에 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기분이 들 정도로 먼 길을 왔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이건 단순히 신학적인 정보를 얻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성이 심화되는 작업은 이 방식이 아니면 없습니다. 결국 우리의 뿌리가 뭐냐 하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니까요. 그러나 그 뿌리라고 하는 것이 딱 멈춰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현실로 새롭게 해석되어야 할 그러한 근원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주님이시기기도 하고 하나님의 외아들이십니다. 그 분은 바로 하나님과 하나이시죠. 그분에게 하나님의 자기계시가 일어났습니다.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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