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차례, 머리말 (외)

땅은 하나님의 것이다 조회 수 3353 추천 수 0 2009.04.01 11:08:27
 

<아래의 글은 루이제 쇼프토프와 도로테 죌레가 한 강연을 번역한 것입니다. 그 강연은 1985년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열린  "선교대회"(Kirchen Tag)에서 행한 것입니다. 해방신학, 생태신학, 여성신학적 관점에서 접근한 그들의 성서연구는 우리에게 새로운 영감을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시간이 주어지는대로 한편 씩 올리겠습니다. 역자 정용섭 주>


땅은 하나님의 것이다
-여성을 위한 성서연구-


도로테 죌레, 루이제 쇼트로프 공저
정용섭 번역



이 책에 대해서


로마가톨릭교회의 중요한 이슈가 해방신학이라고 한다면, 독일 개신교회에서는 여성신학이 바로 그것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이 바로 핵심이다!

<성서의 주인공은 평범한 남자다. 그런데 이 평범한 남자의 아내는 별로 등장하지 않으며, 기껏해야 조연급으로만 등장할 뿐이다. 그러나 이 평범한 남자의 평범한 아내에 대한 또 다른 흔적이 성서 안에 남아 있다. 이것은 노예상태로부터의 해방이라고 하는 상징으로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한나, 유디트, 그리고 마리아와 같은 여자들과 그외 많은 여자들은 아무런 즐거운 일들을 갖고 있지 못한 평범한 남자들의 평범한 아내들이다. 그녀들은 남자와 같이 힘들고 고된 노동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녀들은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해방의 여왕들이며 선구자들이었다.>


도로테 죌레와 루이제 쇼트로프는 독일 중부에 있는 뒤셀도르프에서 개최된 개신교 선교대회(Kirchentag)에서 성서연구를 맡게 되었다. 이것은 하나의 특권이라 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지금 까지는 거의 남자들이 그런 순서를 맡았기 때문이다. 이 성서연구는 사회역사적인 방법으로 접근되는 바, 이는 바로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즉 그들은 성경이 쓰여진 시대의 여자와 남자들의 구체적인 경험에 대해 빈궁과 부요함, 전쟁과 평화, 억압과 해방, 채무와 실업의 문제에 대해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최초의 희생자들은 여성들이었다는 말이다.

이 책은 성서연구와 더불어 기도, 현대 성도들의 이야기, 부자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십계명, 그리고 다른 예전적 문서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 책은 해방신학을 위한 작업인데, 이 해방신학 안에서 전통적인 주제들, 즉 죄와 용서, 창조에 대한 믿음, 이 세상에 깃든 하나님의 내재성, 오늘의 경험과 상황 속에서 갖게 되는 그리스도의 의미 등이 새롭게 해석되고 있다.


도로테 죌레(Dorothee Sölle)는 1929년에 출생, 함부르크에 거주하며 1975년 부터 뉴욕 유니온 신학대학에서 강의하고 있으며, 수많은 책을 집필한 바 있는 독일의 대표적 여성신학자의 한 사람이다.

루이제 쇼트로프(Luise Schottroff)는 1934년에 출생, 마인쯔 대학교 여성 신약학자다.



Originalausgabe

Redaktion Ingke Brodersen

Veröffentlicht im Rowolt Taschenbuch Verlag GmbH,

Reinbeck bei Hamburg, Mai 1985.

원제: Die Erde gehört Gott.

-Texte zur Bibelarbeit von Frauen-



 

차례


서론: 성서연구방법


하나님의 두 번째 창조
<노아와의 계약>


루이제 쇼트로프

     노아와 맺은 하나님의 계약

도로테 죌레

     지구는 감미롭게 돈다
   
 죄의 고백과 사죄

도로테 죌레

   한 성도 이야기: 로버트 알드리지
  
우리가 맺은 계약


땅의 안식, 인간의 안식
<안식년>


도로테 죌레

     해방의 해(年)

루이제 쇼트로프

   성서의 주인공은 평범한 남자다
  
부자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십계명

도로테 죌레

   한 성도 이야기: 펠립과 메리 바레다
  
기도문


형제이신 하나님
<골로새서의 그리스도 찬가>

도로테 죌레

   신비와 항거

루이제 쇼트로프

   골로새서의 그리스도 찬가
   중보기도문

루이제 쇼트로프

   한 성도 이야기: 릴리 야나쉬
  
신앙고백문

참고문헌

역자후기

서론: 성서연구방법

우리는 오늘날 “해방신학”이라고 규정되고 있는 기독교인의 전세계적 운동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책을 쓰는 동안에도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신학은 바티칸에 의해 심하게 비난받고 있습니다.

해방신학을 지지하는 페루 출신의 주교 마테오 칼데론이 1984년 9/10월 로마에서 열렸던 주교단 회의에 대해 보고한 바 있는데, 이 회의에는 물론 페루 주교단도 참석했습니다. 해방신학에 호감을 갖고 있는 주교들은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우리는 가난하지만 신앙이 돈독한 우리 백성들이 당한 참담한 경험에서 시작하려는 것이었지, 이데올로기적인 관심에서가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입장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우리를 공박했습니다. 우리와 페루의 해방신학이 막시즘에 의해 오염되었다고 말입니다. 그 순간 우리 중 한 사람이 일어나서 동일한 것을 의미하고 있는 두 개의 문서를 읽은 후 거기 모인 주교들을 향해 물었습니다: 당신들은 이 두 문서가 같은 내용을 갖고 있다고 동의하십니까? 이에 대해 거기 모인 주교들은 모두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이 사람이 무엇을 의도했는지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그는 흡사 수수께끼 같은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모두에게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읽은 문건 중에서 앞의 것은 여기에 모인 대다수 여러분이 만든 것이며, 뒤의 것은 그 유명한 ‘Santa-Fe-Papier’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이는 바로 레이건 행정부의 라틴 아메리카 정책에 대한 방향 지침으로서 해방신학의 투쟁을 불온시 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들도 이데올로기에 물든 것이 분명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제라도 여러분은 그것에서 돌아설 수 있을 것입니다! 그가 이렇게 말을 끝내자 거기 모인 모든 주교들이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습니다.>1

해방신학은 세계 모든 곳에서 똑같은 논평으로 공격당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안에서도 그렇고 교회 안에서도 그렇습니다. 해방신학에 대한 비판은 서독의 경우에 여성신학에 대한 비판과 직접 관련되어 있습니다. 여성과의 협력관계는 인정할 수 있으나 동등성은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이 동등성에 대한 비방이 얼마나 심각하게 일반화 되어 있는지 모릅니다. 사실 교회의 구성원은 대개가 여성인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남자들에 의해 주도적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삶에 대한 우리의 경험과 상황은 우리가 거쳐온 방해와 모욕과 배척이라는 특징에 나타나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우리는 보다 강력한 연대성의 경험을, 특별히 여성 연대성을 만들었습니다. 흡사 집토끼처럼 여성을 꼼짝달싹 못하게 하는 남성지배의 긴 행렬을 그저 멍하니 바라만 보는 게 아니라, 다른 이들과 함께 여성해방의 길을 가야겠다는 사실을 우리는 배웠습니다. 이 길은 온 세계에 퍼져 있는 정의와 평화의 길, 바로 그것이며, 많은 남성들 역시 우리와 함께 이 길을 가고 있습니다.

이 책은 뒤셀도르프에서 1985년6월5일-9일에 열린 제21회 독일 개신교 선교대회를 위해 준비된 성서연구의 결과물입니다.

우리는 이 책을 공동으로 구상했으며, 공동으로 본문을 연구하고 편집했습니다.

우리가 취한 성서연구의 기본 입장은, 전문용어로 말한다면, 다름이 아니라 하나의 해방신학적 해석학입니다. 즉 해방신학과 여성신학이 함께 연관되어 있는 역사 신학적 방법입니다. 성서는 그리스도인들의 해방운동 안에 있어서 중심적 역할을 했습니다. 이것은 해방신학적 해석학으로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산을 옮길 수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배우려는 현대인들에게 성서 안에 말씀으로 기록된 인간의 상황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는 각기의 공동체가 갖고 있는 상황을 나타내고 설명하기 위해 사회역사적으로 전개됩니다. 다음에 다루어지게 될 해석학적 고찰은 오늘날 오랫동안 검토된 것으로서 정당하다는 사실이 판명되었습니다. 성서말씀은 자신들의 상황에 대해 꾸밈없는 진리를 말하고, 또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희망이 실제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며, 일상생활에 있어서 해방되어가는 일들이 신앙과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를 분명하게 하려는 이들의 증언이며 고백입니다. 오직 무(無)시간적인 것만을, 즉 가능한대로 함축적인 용어로서 표현하려는 성서해석의 유착으로 말미암아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이 갖는 삶의 상황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서를 해석하는데 있어서 두 가지 컨텍스트를 계산에 넣어야 합니다: 하나는 본문말씀 그 자체이며, 또 다른 하나는 성서에 말씀으로 등장하는 인간의 상황입니다. 이 두 컨텍스트의 유지를 위해 신앙은 일상생활로 부터 유리되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상황은 일상적인 일로 부터, 경제, 정치, 군대 등을 통해서 무자비한 폭력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골방에서 외롭게 기도하는 이에게, 그리고 죽음의 침상에 누워있는 병든 자에게 신앙의 본보기를 보여주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노동시장에 있는 실업자들과 굶어 죽어가는 어린아이들, 또한 자신의 희망 찬 미래를 위해 일하고 있는 행복한 어머니들 모두는 저들이 당면하고 있는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기독교적인 믿음을 지켜야 할 주체자들입니다. 따라서 정치, 사회적 관계들은 신앙에 의해 언급되어지는 곳에서 다루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당한 상황뿐만 아니라 성서에 나타난 인간의 상황이 연구되어 질 때 성서해석의 이러한 방법에 대한 길이 발견될 수 있습니다. 이 연구작업은 학문적인 <엘리트> 신학 전문가들에게만 일방적으로 주어진 일은 아닙니다. 물론 그들은 모든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만, 성서해석은 어떤 뿌리에서 신앙이 출발하며, 어떻게 신앙의 선조들이 저들의 희망을 실제적으로 구체화했는가, 하는 것을 알려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문제입니다.

오늘 특별한 상황에 대해 연구한다는 것은 이와 비슷한 상황 속에 있었던 사람들의 경험과 함께 하는 연대성, 그리고 <하층계급>에 속했던 사람들과 함께 하는 연대성에 전적으로 달려 있습니다. 즉 당시의 역사적 상황에 대한 연구는 유사한 연대성을 전제로 합니다.

서구 기독교인의 성서해석은 수백 년 동안 유대인에 대해 적대적이었습니다. 예수는 율법적이며 형식-종교적 유대교의 정복자로, 또한 그것 보다 좋은 복음의 전달자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아주 점진적이나마 많은 도전을 받고 난 후, 아우쉬비츠 이후로 이런 해석전통이 극복되어야 한다는 생각들이 늘어나고 있으며, 또한 예수의 행동은 역사에 대한 평가절하 없이 자신의 백성, 그리고 인류와 함께 하는 하나님의 역사를 발전시킨다는 사실이 인식되고 있습니다. 수백 년 동안 성서해석의 전통은 여성에 대해 적대적이었습니다. 여성들은 전혀 관심 밖이었습니다. 기껏해야 여성들은 바람직한 여성의 역할 안에서만 언급되어집니다. 즉 애기를 낳고 인내심을 키우며, 남자의 시중을 드는 것 말입니다. 성서 안의 여성들이 이와 아주 다른 모습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이런 성서해석전통이 은폐했습니다. 또한 수백 년에 걸쳐 이런 성서해석으로 말미암아 가난한 이들도 그저 돌봐주어야 할 대상으로서만 다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왕권이 부여되는 가난한 사람들이야말로 으뜸이라고 말하는 성서본문은 추상적, 상징적 차원으로 왜곡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가난하다는 것을 신자들에게 무(無)시간적 의미로 가르쳤고, 이로 인해서 결국 가난한 이들을 착취하게 되는 도구가 되어버렸습니다.

성서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에 대한 지침을 요약해서 말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성서 문문의 구체성을 추상화 하는 습관을 깨닫고 그것을 고쳐야 합니다. 즉 성서가 가난을 말할 때 그 가난을 비유적인 의미에서의 가난으로만 읽으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2. 눌린 자, 노동자, 실업자, 유대인, 여성, 어린이, 병자 ‥‥ 이들은 더 이상 무시되어서는 안 되며, 침묵을 강요당하거나 일방적으로 소외당해서도 안 됩니다.

3. 가능한대로 인간에게 있는 삶의 현실성을 파악하는 일은 필수적인 것입니다.

4. 필요한 정보를 제공받기 위해서도 성서주변의 다양하고 방대한 문서를 읽는 것이 필요합니다. 성서는 그 자체가 하나의 특별한 사회역사적 자료입니다. 만약 앞에서 말한 것을 염두에 두고 복음서 한권을 택해서 처음부터 끝가지 통독할 수만 있다면 여성들과 노동자들, 혹은 병자들의 상황에 대해 매우 정확하게 말할 수 있으며, 또한 부활에 대한 신앙이 인간에게 있어서 사실상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보다 확실하게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서 안에 있는 인간의 상황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성서 외적 자료들이 있습니다. 이런 자료에서 나오는 사회역사적 보충정보들은 일반적인 경우에 유용가치가 있으며, 또한 역사적 연구를 위한 시간과 기회를 갖고 있습니다. 이 자료들은 그것들에 대해 멀리 떨어져 있는 독자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5. 현재 당면하고 있는 상황에 대해 우리가 취하는 성서적인 신앙과 삶의 역사에 따라오는 실존적 귀결은 추상적 관념 안에 존재하는 신앙을 위해 나타나는 게 아니라, 그 당면한 상황이 더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다루어질수록 신앙이 보다 명확해집니다. 어떤 고유한 관심, 그리고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예견과 선택권을 자신과 남에게 드러내는 것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대화하는 이들이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 또한 상황이 어떤지에 대해 전혀 말하지 않고 그저 신학적인 이야기만 나눈다는 것은 존재하지도 않는 중립성으로 스스로를 위장하는 것입니다. 성서적 전통과의 토의에서 나타나는 실존적 귀결은 당파성(Parteilichkeit)이 없을 수 없습니다. 부유한 산업국가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저는 우리의 풍요가 소위 제3세계의 원자재와 생산품의 불공평한 착취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면할 때만 무엇이 기독교적 신앙이냐, 하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 수 있다고 봅니다. 우리가 뿌리박고 있는 구조적 불의에 대해 개혁하려는 노력이 없을 때 우리의 기독교적 신앙은 잘못된 것입니다. 모든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이 파당성은 우리를 행동하는 믿음으로 인도합니다. 우리는 성서 안에서 구체적인 상황 가운데 있는 성도들의 행위와 희망에 대해 읽습니다. 당시의 행동하는 신앙을 우리가 오늘의 상황 안에서 해석하는 것은 비슷한 입장의 인식을 통해서만 가능해집니다. <솔렌티나메 농부들의 복음>이라는2 책이 갖고 있는 설득력은 바로 솔렌티나메의 농부들과 초기 기독교인들, 즉 이 농부들이 저들의 상황과 비교되어질 수 있는 복음서의 초기 기독교인들과 거의 같은 신앙으로 살았다는 점에 있습니다. 수천 년이라는 역사적 간격은 사정에 따라 당시 인간들 사이에 있는 사회적 간격보다 오히려 상대적으로 적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오늘의 그 농부들이 초기 기독교인들에게서 느끼는 간격은 산업국가 안에 사는 백인 중산엘리트 집단에 대해서 느끼는 간격보다 적습니다. 사회적 간격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복될 수 있습니다. 산업국가의 기독교인들이 성서적 전통과 그것의 파당성이라는 정신에서 평화와 공의의 길에 이르도록 우리 자신을 이끌어 감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성서말씀은 인간에 대한 신앙역사의 산물로 이해되기 때문에, 성서해석방법을 논의하게 될 때 그것의 학문적인 작업은 다름이 아니라 바로 앞서 제기된 지침이 역사적 비판이라는 것을 의미하게 됩니다. 이 역사적 비판은 (신학에 대한 오늘날의 습관과는 다르게) 도대체 어디에서 연대성의 질문이 해결될 수 있는가, 하는 사회사적 관점을 포함합니다. -사회사를 물론 <상층부로 부터> 추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학문적인 성서해석은 이미 굳어진 의미에서 보조역할에만 머물게 됩니다.

우리는 본문을 마틴 루터의 번역판에서 세 군데를 선택했습니다. 창세기 8:20-9:17, 레위기 25:1-13, 골로새 1:15-23이 그것입니다. 우리는 여러 다른 번역판을 인용하고 비교했으며, 기회가 닿는대로 루터번역판을 비판적으로 다루면서 연구했습니다. 우리가 루터번역본을 본문으로 택한 이유는 이 번역이 항상 언어적, 신학적으로 최고라고 할 수 있으며, 더구나 독일어권에서 볼 때 현재에 이르기 까지 큰 영향력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대어를(헬라어와 히브리어) 모르고 성서를 연구하려는 이들을 위해 서로 다른 번역판을 견주어 읽는 방법은 추천할 만합니다. 유일한 번역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번역은 이미 일종의 해석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서의 권위는 말씀 안에서 자신들을 나타낸 이들이 갖고 있는 신앙의 권위입니다. 저들의 증거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가 죽음의 권세로 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는 분이라는 사실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서전통에 대한 연구는 우리에 앞서 자신들의 상황 속에서 믿음을 갖고 살았던 이들과의 대화입니다. 우리는 -비록 그들과 역사적, 사회적으로 큰 간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됩니다. 바울 시대의 기독교인들이 저들의 <연약함> 속에서도 어떻게 새로운 삶을 실현하려고 했는지, 저들이 죽음의 권세로부터 어떻게 해방을 경험했는지, 이런 것들을 배우게 됩니다. 이런 두 가지 상황, 즉 성서의 상황과 오늘의 상황을 진지하게 고려함으로써만 이 역사적 간격과 또한 상이한 사회정치적 상황 아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상으로 부터 배워서 그걸 우리 앞에 놓인 현장에 적용시키는 일이 가능해집니다. 우리는 신앙을 번역해야만 합니다. -즉 성서의 상황에서 우리의 상황으로 말입니다. 만약 이 두 상황에 대해 눈을 감아버린다면 성서는 성서가 말하는 사회적 질문을 포기하고 그저 단순히 개인적 신앙에 머무는 책이 되고 말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실 예수는 오늘 우리 상황의 중심에 들어 있는 핵무기에 대해 아무 것도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3


주:

1. Aus: En camino‥‥ Unterwegs mit Christen hier und daheim, Pastoral-Team Pucará/Peru, Rundbrief Nr6, Dez. 1984, Missionsgesellschaft Bethlehem, Immensee/Schweiz, S.10.

2. Ernesto Cardenal, Das Evangelium der Bauern von Solentiname, 2Bde., Wuppertal 1976/1978.

3. Vgl. L. und W. Schottroff, Die Parteilichkeit Gottes, München 1984.


profile

[레벨:11]이방인

2009.04.01 11:45:06
*.118.129.226

일전에 민중신학을 비판하시는 글을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민중신학은 해방신학 (혹은 여성신학)과 비슷한 맥락에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도 하는데요. 주류 혹은 정통신학이 아닌 비주류/대안신학이라는 점에서요. 그리고 민중신학은 해방신학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민중신학을 비판하신 목사님께서 해방신학은 수용하시는  것은 어떻게 이해되야 할까 하는 질문이 들었습니다..제가 너무 도식적 접근을 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9.04.01 22:19:39
*.139.165.30

이방인 님,
정확한 지적입니다.
비슷한 맥락의 두 신학에 대한
저의 태도가 다르게 느껴지요?
그걸 설명하려면 좀 긴데요.
간략하게만 말씀드릴게요.

1. 민중신학 자체를, 또는 전체를 제가 비판하는 게 아니랍니다.
민중 메시야니즘을 문제 삼은 거지요.

2. 민중신학과 해방신학은 약간 다릅니다.
민중신학은 민중 자체가 신학적인 주체로 부각되지만
해방신학은 해방 개념을 더 상위로 받아들입니다.
물론 양쪽 모두 사회적 마이너리티, 가난한 자를 향한
하나님의 편애를 강조하긴 하지만요.
해방신학은 신학적 형이상학을 갖추고 있는 반면에
민중신학은 주로 성서신학적인 관점에 치우쳐 있습니다.
그냥 거칠게만 말한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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