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Wolfgang Huber의 “교회의 미래”

교회와 사회 조회 수 3580 추천 수 24 2008.07.22 13:38:06
8장 Wolfgang Huber의 “교회의 미래”
-in: 교회, 한국신학연구소, 177-218-

1) 세상 안에 있는 그리스도교

<약속과 미래>
1530년 제정된 아우그스부르그의 고백신조에, 따라서 모든 시대마다 복음이 순수히 선포되고 성례가 복음에 따라 집행되는 모든 신도들의 모임으로서 하나의 거룩한 그리스도의 교회가 존재하고 존속할 것이다. 교회는 두려움이 아니라 희망을 더 강하게 갖는 이들의 친교, 즉 희망의 친교이다. 이 교회의 희망은 나사렛 예수의 선포와 생애, 죽음과 부활로 부터 연유한 화해와 해방의 사건에 대한 회상에 의해 항상 거듭 갱신된다. 이런 면에서 교회는 회상의 친교이다. 교회의 미래는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는 것이지 스스로의 조직 확대나 인간의 미래에 의존해 있는 것이 아니다.
<세계 속의 그리스도인의 수>
세계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숫자는 분명히 소수에 속한다. 만약 유럽만을 생각한다면 다르겠지만 세계 안에서 볼 때 그렇게 높은 수치를 나타내지 못한다. 이것은 앞으로 더 진행할지도 모른다. 명목상이 아니라 실질적 종교인의 숫자, 실질적인 그리스도인의 숫자가 기술문명위주의 세계 속에서 점차적으로 축소되어가리라는 예상을 충분히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시아와 아프리카나 라틴아메리카에서 복음주의적 교단이나 오순적 계통의 교회가 부흥하고 있다는 통계도 있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인 전체의 숫자는 증가하지만 그 중에 유럽 그리스도인이 차지하는 비율은 낮아지고 있다.
<현대의 그리스도교>
오늘 만이 아니라 중세기 때도 마찬가지로 교회가 갖는 사회적 영향은 별로 강하지 못했다. 프랑스의 역사가 장 텔루모(Jean Delumeau)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1450년과 1650년 사이에 농민들의 세계와 대립했던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자들, 카톨릭 주교들과 설교자들은 이 세계가 그리스도교적인 지식을 결하고 있었고 이교적 ‘미신들’에 깊숙히 빠져 있었음을 알았다. 그들이 볼 때 높은 곳에서 크게 설교되던 그리스도교는 평범한 일상수준에서는 전혀 실현되어 있지 않았다. (Stirbt das Christentum?, Olten 1978, 32.)

이러한 실질적 그리스도교의 약화는 오늘에 이르러 더 한층 심화되었다는 점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오늘날 복음의 소식에 대한 깊은 무관심은 다양한 형태로, 그리고 공공연하게 혹은 숨겨진 형태로 나타난다. 이제 교회는 잘된 일인지, 못된 일인지는 차치하고 윤리적 차원에서 자기의 존재를 새롭게 규정하고 강화시켜 나가고 있음이 사실이다.
오늘의 여러가지 교회와 시대정신 상황에 따라 교회의 미래를 의존시킬 필요는 없을 것이다. 교회는 여전히 복음과 성례전적 전통 가운데 서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다.

2) 종교의 미래

그리스도교는 아무리 그 독특성을 강조한다고 하더라도 세계의 종교 속에 포함되어 있음이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에 종교의 미래를 다루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교의 미래를 말하는 것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또한 이 문제는 아무도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다는 한계를 안고 있다. 그것을 말하는 사람이 어떠한 종교개념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서 다른 답변이 주어질 것이다.
<종교의 종말>
아우구스트 꽁트
우리의 지식의 모든 분야는 필수적으로 신학적 혹은 허구적 단계, 형이상학적 혹은 추상적 단계 및 학문적 혹은 실증적 단계하는 세 가지의 연이은 이론적 단계를 밟을 수 밖에 없`다는 점은 인간 정신의 본성에 기초되어 있다.(Rede über den Geist des Positivismus, Hamburg 1956,)
칼 막스,
막스 베버
꽁트가 종교의 개념을 허구의 요소와 결합시켰고, 청년 막스가 종교의 개념을 환상적 특징와 결합시켰다면, 베버는 놀랍게도 그와는 반대로 종교의 개념을 합리성의 개념과 연결시켰다.
<종교의 발전단계?>
종교를 신화적, 혹은 허구적 세계이기 때문에 오늘날과 같은 세속성과 기술문명과 합리주의와 실증주의가 지배하는 세계 속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고 주장할 수 있을른지는 모르지만, 오늘날에도 역시 인간의 종교적 삶의 현실이 남아있으며, 뿐만 아니라 더욱 확장될 수 있는 징조 마저 보이고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들의 주장이 그렇게 확고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기계문명이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거기서 인간은 다시 종교적 요청으로 향하게 될 것이다. 물론 그 종교라는 것이 중세기적 형태를 갖는 것은 아닐지라도 인간의 영성을 제고할 수 있는 형식을 필요로 한다는 말이다. 토인비도 인간의 미래를 종교에 두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질은 세상이 어떻게 변한다고 하더라도 그대로 존속하는 것이며, 그 인간의 본질은 결국 구원론적 지평을 요청하게 된다는 점에서만이 아니라, 현대 기술문명이 인간구원의 메시야적 사명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Postmodernism은 기독교의 위기가 아니라 근대과학주의의 한계와 실증적 사고의 한계라는 면에서 오히려 종교성의 부흥을 통한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이제 교회는 자기 조직의 확대개편이라는 도식적 구도로 부터 벗어나 전통과 갱신, 보존과 변화의 옷을 입고 진정한 의미에서 세계구원의 종교로서 자리매김을 해야할 것이다.
<종교와 신앙>
칼 바르트는 종교사학파와 같은 사고에 대해 대단히 위험시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교회 밖의 진리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의 예언의 표징과 증언으로서 비록 여기로 부터 나오기는 하지만 그 자체로서 우리가 들어야 할 참된 말씀을 세속적인 섹계사 안에서도 들을 각도가 있어야 한다.”KD4/3,1.Hälfte,S.122ff.
기독교적 전통에서는 마음 아픈 일이라 하더라도 교회가 세상의 진리에 대해 경청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인정할 준비를 빨리 갖추어야 할 것이다. 이제는 종파 끼리의 적대감을 불식시키고 하루 빨리 세계의 종교성에 상응하는 자세를 견지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을지 모른다. 말하자면 거대한 구조와 조직 보다는 쌕트화된 종교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같은 말은 아니라 해도 이미 호켄다이크가 ‘흩어지는 교회’에서 피력하고 있는 점도 이와 유사하다. 결국 해방시키고 화해시키는 복음의 말씀은 ‘진지하게 그리스도인이 되려는’ 소수를 위해 준비될 것이다.
W. Pannenberg는 이런 점에서 ‘역사의 하나님’을 일찍 부터 제창하고 있다. 그 역사신학은 세계를 하나의 역사이며 보편적인 역사로 이해하려는 사고이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할 때 교회의 미래는 다음과 같은 성찰로 부터 숙고되어져야 한다. 즉 교회의 약속은 교회의 존립에 대한 염려 보다 더 강하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교회 안에서는 자유에의 용기가 위기의 경험보다 더 강하다. 교회 안에서는 희망이 두려움보다 더 강하다.

3) 도전받는 신앙

볼프강 후버는 종교의 미래가 열려 있다고 말하면서(교회,206) 근세의 합리성을 둘러싸고 있는 진보정신이 이중성에 빠져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교 신앙과 교회 앞에 도전과 기회가 놓여 있다고 진단한다.
<진보의 양면성>
진보개념은 인간들에게 무한한 생산과 삶의 팽창을 기대하게 했지만, 그 진보는 또한 인간에게 그 한계와 그 무의미성과 그 파괴성도 경험하게 했다. 여기서 기독교의 메시야적 희망은 영속적인 가치와 인간 삶의 본질적 근거를 제공한다. 역사의 미래를 진보개념이 무조건 약속할 수 없다는 것을 지성적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라면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 개방된 역사의 미래를 교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리고 죽은 자로 부터의 부활이라는 그 종말론적 희망을 통해 진정한 희망을 제공할 수 있다. Walter Benjanin의 다음과 같은 적절한 표현이 있다.

알겔루스 노부스라고 불리는 클로버 그림이 있다. 한 천사가 그 위에 앉았는데, 그는 자신이 응시하는 것을 막 떠날 것 같이 보인다. 그의 눈은 떠 있고 그의 입은 열려 있으며 그의 날개는 펼쳐져 있다. 역사의 천사는 분명히 그렇게 보일 것이다. 그는 과거의 용모를 갖고 있다. 일련의 사건들이 우리 눈 앞에 나타날 때, 그는 쉬지 않고 높히 쌓이고 자신의 발 앞으로 굴러 떨어지는 하나의 비할 나위 없는 재앙을 본다. 그는 사실 더 머무르고 싶고 죽은 자들을 살리고 깨어진 것들을 함께 맞추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의 날게 안에서 휘몰아 치는 바람이 낙원으로 부터 불어 오는데, 이 바람은 너무 강하기 때문에 천사는 더 이상 날개를 접을 수 없다. 이 바람은 끊임없이 그가 등을 돌리고 있는 미래로 내몬다. 그러는 동안에 폐허더미는 그 앞에서 하늘 까지 높아간다. 우리가 진보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이 이 바람이다.(Geschichtsphilosophische Thesen, in:ders., Zur Kritik der Gewalt und andere Aufsätze, Frankfurt 1965, 84f.

교회는 개개인의 실존적 한계를 위로하는 일과 구조적 개혁을 위해 투쟁하는 일 사이에 갈등을 일으킬 필요가 없다. 이 양자는 공히 메시아적 희망의 차원 안에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위기경험>
오늘의 시대적 위기는 여러 측면에서 대두되고 있다. 제1세계와 3세계 사이의 구조적 경제불균형, 예컨에 예외규정 없는 관세철폐 등이 과연 선진국들과 후발국 사이에 정의로운 질서라고 할 수 있는가? 이미 공정하게 경쟁할 수 없는 실력차이(?)가 놓여 있는 마당에 말이다. 한 국가 안에서도 고용의 문제, 생태계의 문제 등으로 인해 현대인은 위기를 경험하고 있다. 특히 한국은 남북대치가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에 이러한 위기를 더욱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
<하나의 세계 안의 에큐메니칼 교회>
세계가 하나로 지향되는 것 같지만 내면적으로 보면 오히려 불일치의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는지 모른다. 국가 이기주의가 오늘의 세계가 갖고 있는 특징 중의 하나이다. 이미 이데올로기가 여러 국가를 연결해 주던 시기가 지나갔으며, 오직 자국의 경제적 이윤만을 행동의 기준으로 삼고 있을 뿐이다. 여기서 그리스도교 교회는 세계의 일치를 내다보며, 또한 오늘의 세계가 당면한 위기를 짊어질 사명을 생각하며 부단히 교회일치성에 밀착해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라는 그리스도교회의 전통적 신학 앞에 서는 일이다. 이러한 에큐메니칼 교회는 획일적인 양식으로 존재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지역적 특성에 따라, 그 삶의 자리에 따라 여러 양식의 교회가 존재할 수 있으며, 당연히 그래야 한다. 이러한 다양성 가운데 풍부한 그리스도적인 교회의 자산이 보존되고 개발될 것이다.(참조, H. Küng, die Kirche; Projekt Weltethos).
중요한 것은 어떤 유형의 교회이던지 ‘교회가 자신의 활동의 능력을 자기 자신으로 부터 얻는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자기전달로 부터 얻는다는 사실’이며, 또한 ‘교회가 자신의 활동의 원천인 희망을 자기신뢰로 부터 길러내는 게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약속으로 부터 길러낸다는 사실’이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101 신학과 철학 5장 아리스토텔레스와 기독교 신학 2009-03-27 4828
100 신학과 철학 4장 플라토니즘과 기독교 2009-03-20 6261
99 신학과 철학 3장 철학과 신학의 관계 유형 2009-03-13 4064
98 신학과 철학 2장 하이데거의 사유, 언어, 세계 [7] [1] 2009-03-13 4316
97 신학과 철학 1장 철학적 사유와 신학적 사유의 기초문제 [6] 2009-03-03 5371
96 신학과 철학 강의 안내 [2] 2009-03-03 4216
95 교회와 사회 13장 에큐메니칼 운동의 역사 [1] 2008-07-22 4239
94 교회와 사회 12장 종교사회주의 2008-07-22 3937
93 교회와 사회 11장 신의 현존 2008-07-22 3691
92 교회와 사회 10장 신의 현실성 2008-07-22 3770
91 교회와 사회 9장 세계 안에서 신을 어떻게 말할 것인가? 2008-07-22 3816
» 교회와 사회 8장 Wolfgang Huber의 “교회의 미래” 2008-07-22 3580
89 교회와 사회 7장 세계 속의 그리스도인 2008-07-22 3455
88 교회와 사회 6장 義認과 法 -칼 바르트 2008-07-22 3963
87 교회와 사회 5장 마틴 루터의 두왕국론 2008-07-22 6871
86 교회와 사회 4장 교회와 사회의 관계유형 2008-07-22 4271
85 교회와 사회 3장 세상을 위한 교회 2008-07-22 3916
84 교회와 사회 2장 교회론의 제지평 2008-07-22 3562
83 교회와 사회 1장 한국교회의 자리매김 2008-07-22 3987
82 교회와 사회 &lt;교회와 사회&gt; 강의 계획서 2008-07-22 4732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