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세계 안에서 신을 어떻게 말할 것인가?

교회는 궁극적으로 신에 대해서 진술하고 그 진술 내용에 따라 살아가는 이들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신문제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숙고해야할 본질적 주제이다. 이미 신문제가 끝났다고 생각하여 그 주제를 도외시한다면 경우에 따라 교회의 가르침이 그 기초를 상실당하게 될 위험성이 없지 않다. 교회 안에서는 자주 신앙이란 단순히 믿는 행위이지 인식론이 아니라고 주장되지만 이미 계몽주의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이 시대 속에 살아간다는 것을 전제한다면 끊임 없이 자신들이 신앙하고 있는 그 분에 대한 현대적 표현과 해석학적 변론을 수행해야할 것이다.
우리가 “교회와 세상”을 동시에 언급해야 한다면 어디서 그 출발점을 삼아야 하는가? 선교학적인 관점이나 교회의 실천적인 관점 등 교회의 실용적인 기능이나 이 세상의 현상을 분석하는 일에서 부터 시작할 수도 있지만 결국 가장 중요한 문제는 교회존재의 근거인 신진술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교회가 말하는 신존재의 형식에 따라서 세상을 향한 교회의 입장도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이 어떻게 변했는가의 문제 보다는 교회의 신이해가 무엇인가의 문제가 더 우선되는 요청이다.

1. 신진술의 불가능성과 가능성

칼 바르트는 기본적으로 인간이 신에 대해 언급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서 말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인간의 영역 안으로 한계지을 뿐이지 하나님 자신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바르트에게 하나님은 “은폐”(Deus absconditus)를 그 속성으로 갖는다. 그는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속하지 않으셔서 우리가 범주와 언어로 표상할 수 있는 대상에 속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러한 범주와 언어로써 남들에게도 대상에 관하여 유의시키며, 우리가 그 대상들과 다른 사람들을 범주와 언어로서 관계시킬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연적인 사물도 정신적인 사물도 아니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에 대하여 논할 수는 없다. 우리가 그 분께 관해서 말하는 것은 더 이상 ‘그분께’ 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다.(KD1/2)

그렇다면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길은 전혀 없다는 것인가? 바르트는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에 대해서 말할 뿐이라고 한다. 하나님은 스스로 자기를 계시하는 분이지 인간이 인식론적인 노력을 통해서 알려질 수 없는 분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스스로 자기를 노출시킬 때만 그 분은 드러나는 분(Deus revelatus)이다.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 언급한다는 것은 그 분의 자기계시인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그것을 전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불트만은 “하나님에 관하여”(von Gott)와 “하나님에 대하여”(über Gott)을 구분하여 설명한다. 그가 의미하는 바는 인간이 객관적으로 하나님에 대하여 말할 수는 없고 실존적인 관점에서만 그 진술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사양하셨다. 그 나라, 바로 그 분은 우리의 인식이나 표현양식 안에 들어올 수 있는 분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가 말하는 신진술은 하나님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가 아니라 일종의 개념, 이 과목과 연결시켜 말하자면 ‘하나님의 세계관계성에 대한 개념적 이해’라고 할 수 있다.

2. 세계 속의 하나님

1) 세속성의 성격
a. 잠정성 - 잠정성이란 영원성과 대립되는 개념으로서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가리킨다. 이 세상에서 인간이 실행하는 모든 일들은 잠정적인 성격을 갖고 있음에 틀림없다. 이 말은 전통적으로 그리스도교회가 이 세상 보다는 저 세상, 그리고 그 영원성을 강조하는 것과 대립되어 있다.
b. 종교적인 것과 대립되는 그 무엇 - 그리스도교회를 포함한 종교는 거룩한 것과 세속적인 것을 구별하였는데, 세속성은 거룩한 것들과 다른 것들을 가리킨다. 이 세속적인 것들은 매일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정치와 예술, 교육과 오락에 이르는 모든 이 세상적인 것들을 말한다.
c. 인간의 노력에 의해 얻어지는 것 - 세속주의자들은 종교적인 삶을 타율이라 생각하고 자율적인 인간을 주창하였다. 인간의 이성적인 기능과 통찰력을 기초로 하여 인간의 삶을 확장한다는 말이다. 계몽주의 이후로 인간의 자율은 그 중요성이 현저하게 상승하였다. 특히 물리학을 중심으로 한 자연과학은 이러한 인간의 자율적 사고에 의한 업적이라 할 수 있겠다.
d. 자율적인 인간성 - 세속적인 인간이해는 인간이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자율적인 인간성이다. 인간이 최고의 가치를 갖고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여 그 외의 것을 상대화 시킨다. 이에 해당하는 이들은 사르트르와 같은 실존주의자들과 휴매니스트들이라 할 수 있다. 폴 틸리히는 인간은 세 가지로 구분하였다. 첫째는 자율적 인간(autonomy), 둘째는 타율적 인간(heteronomy), 셋째는 신율적 인간(theolomy)이다. 물론 틸리히는 신율적 인간을 그리스도적인 인간이해라고 주장하고 있다.

2) 세계 속의 하나님
아무리 세속성이 때로 반기독교적인 형식으로 드러난다고 해도 그리스도교회는 이 세계를 부정하거나 도피할 수 없다. 여러 형식의 세속주의는 기독교가 간과했던 이 세상성을 우리에게 일깨워준 이들이기 때문에 그들과의 대화를 부단히 유지시켜야만 한다. 그렇다고 교회가 세상 속에 매몰 될 필요가 없으며, 그렇게 될 수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신앙하는 하나님을 세상적인 언어로 진술할 준비를 해야하며, 그럴 때만 우리는 그리스도교회가 전통적인 도그마로 간직한 “경륜적 삼위일체”에 충실한 교회로 남을 것이다. 요3:16절에 기록되었듯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항상 기억해야만한다.
이러한 당위론적인 접근에 앞서 우리는 다시 한번 하나님과 세상과의 관계를 정리해야한다. 하나님이 이 세상 안에 있다는 사실은 그의 초월성을 제거하여 결국 범신론에 떨어지는 일인지, 아니면 여전히 하나님의 초월성이 유효한지에 대한 질문이다.
그리스도교 전통이 지나치게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계몽주의 이후로 인간은 그것으로 부터 벗어나려고 하였고, 교회도 역시 하나님의 역사 내재성을 역사철학적 세계이해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하였다. 하나님은 인간과 그 인간의 역사, 그리고 자연과 우주 전체에 내재해 있는 분이라는 범신론적 신이해, 세계내재적 신이해가 18-19세기에 주류를 이루었으며, 1960년대의 소위 ‘세속화신학’도 역시 이러한 경향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을 도대체 알 수 없다는 엄연한 현실, 그리고 확실한 것은 이 세상의 것이라는 현실 앞에서, 뿐만 아니라 인간의 이성과 자율이 무한대로 확장된 이 세계 앞에서 하나님을 초월자로서 논증한다는 것은 거의 난망하다 볼 수 있다.
로빈슨 주교는 폴 틸리히와 불트만, 본훼퍼의 영향을 받아‘신에게 솔직히’를 썼다. 바르트는 로빈슨 주교를 가리켜 ‘세 종류의 좋은 독일산 맥주를 혼합하여 거품을 잔뜩 만들어 냈다.’고 혹평한 적이 있다. 로빈슨은 결국 내재적 하나님만을 주장하기에 이르게 되고 만다. 그가 틸리히로 부터 존재자체를, 불트만에게서 실존적 신이해를, 본훼퍼에게서 세상성을 추출하여 냈는데, 그가 세 신학자들이 근본적으로 사유하고자 했던 본질에 접근했는가는 의문스럽지 않을 수 없다.
골비쳐와 브라운의 신존재 논쟁은 신의 초월성과 내재성의 문제이다. 브라운은 ‘동료성’(Mitmenschlichkeit)에서 신존재를 찾았으며, 골키쳐는 바르트의 영향 아래서 계속하여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였다.
‘세상 속의 하나님’이라는 표제가 뜻하는 바를 위에서 언급한 로빈슨이나 브라운 처럼 철저한 이 세상의 내재성에서 찾으려고 한다면 기독교의 전통으로 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회항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렇다고 타계적인 신앙의 세계로 돌아가야한다는 주장도 전혀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하나님의 하나님 됨과 하나님의 이 세상성을 어떻게 종합하며 결합하느냐가 중요한 과업이라 하겠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 가운데서 초월자인 하나님을 찾는 자들인가, 아니면 영원의 세계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그 구원을 위하여 세상 안으로 들어가는 자들인가? 우리는 아무도 이 두 사이를 명확하게 구분할 수는 없다. 이 차이란 다만 인식한다는 점에서 차이이지 본질적인 차이는 찾아볼 수 없다.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이 세상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절대 타자로서만 생각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역으로 하나님을 단순히 이 세상의 윤리나 어떤 사물과 조직으로만 생각할 수도 없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사랑이 곧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세상을 정확하게 인식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절대적으로 중요한 일이며, 동시에 그것의 잠정성과 그 한계성을 보는 일도 역시 중요하다. 하나님은 세상 안에 있으며 동시에 세상 밖에 계시다고 표현한다면 바르티안적인지 모르지만, 그러한 변증적 방법 이외에 우리가 어디서 하나님과 이 세상성과의 관계를 설명할 수 있을까? 존 마쿼리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그 목적이 이 세계를 초월하는 데 까지 나간다고 하더라도, 그 목적에 까지 이르는 길은 역시 이 세계를 통과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이 세계의 현안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전 인류의 선한 의지를 규합하려면, 먼저 크리스쳔은 피상적인 세계와 거룩한 세계 사이에 구별을 가능케 하는 은혜의 깊은 차원을 그의 봉사와 증언을 통하여 자기 자신과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하여 알려주어야만 할 것이다. (神과 世俗, 86)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인간적인 삶의 현실을 붙드는 일에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 “예”와 “아니오”를 결정해야지 무조건 반대하거나 무조건 찬성하지 말아야 한다. 이 세상에 적극적인 것은 좋으나 그것에만 머물러 있다면 그리스도적인 것은 아니다. 운동권이나 재야와 이 나라의 정의와 평화를 위한 선한 일에 공동 투쟁할 수 있지만 그들을 향해서도 “아니오”라는 말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바라보는 이 세계는 종말론적으로 갱신되어야 하는 것이지 어떤 이념의 설계 안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 세상이 중요하지만 결정적인 것은 아니며 하나님 나라가 본질적인 것이지만 그것이 비세상적인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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