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유신론과 무신론

조직신학 조회 수 5573 추천 수 59 2005.04.20 18:14:21
7장
유신론과 무신론

인간은 모든 중요한 질문에 대해서 ‘하느님이라는 작업가설(作業假設)’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 해결할 줄 알게 되었다. 과학적 질문이나 예술적인 질문이나 윤리적 질문에 있어서까지도 그것은 자명한 것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사람들은 거기에 대하여 다시는 왈가왈부하는 모험을 별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대략 백 년 전부터 그것은 점점 더 종교적인 질문에 대해서도 그렇게 되어버리고 말았다. 하느님 없이도 모든 것이 잘 되고 그 이전처럼 아무 탈 없이 되고 있음이 드러났다. 과학적인 영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일반적인 인간계에서 하나님은 자꾸만 삶의 영역에서 쫓겨나서 그만 발판을 잃어버렸다.(D. Bonnhoeffer, 옥중서신, 1944년 8월6일자).
오늘날에는 결코 복음을 선포할 때 마치 그 선포를 듣는 사람이 하나님의 존재를 자명한 것으로 전제하거나 혹은 하나님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선포해서는 안 된다.(H. Ott, 신학해제, 97).

논쟁의 단초
우리는 하나님을 부정하는 이 세상의 여러 주장과 입장을 비난하거나 그들과 논쟁하기에 앞서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생각마저 별로 설득력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게 좋을 것 같다. 특히 교회 현장에서는 하나님에 관한 질문이 근본적으로 폐쇄된 채 신앙적 열광주의가 일방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형편이다. 당연히 교회는 신학적 담론을 전개하는 신학대학교가 아니기 때문에 본격적인 신론에 관한 전문적인 논의를 무분별하게 전개할 필요는 없지만 생명의 신비 앞에 직면하는 사람으로서 제기해야 할 최소한 질문마저 막아버리는 태도는 우리가 그 부분에서 그만큼 자신감이 없다는 증거다. 내 생각에 따르면 하나님을 향한 진리론적 질문을 토대에 두지 않는 한 교회의 활동과 선포는 어쩔 수 없이 인간적 욕망*에 부응하는 방향으로 흘러나간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라도 하나님에 관한 질문을 그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신자들이 하나님에 관해 진정한 의미에서 관심을 갖도록 끌어가기 위해서 일단 우리 스스로 근본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에 관해 질문해보자.  

*지난 1년 이상 교회 분규로 몸살을 앓고 있는 광성교회 사건이 급기야 티브이 뉴스 공중파를 타고 전국적으로 알려졌다.(2005년 4월 하순). 담임 목사 측과 반대 측이 심한 몸싸움을 벌이면서까지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키려 했다는 것은 결국 인간적인 욕망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만약 그들이 평소에 하나님에 관한 질문을 토대에 놓고 신앙생활을 했다면 이런 이전투구 식의 일들을 일으킬 수 없었을 것이다. 추대를 보임으로써 한국교회의 얼굴에 먹칠을 하고 있는 광성교회만이 아니라 하나님에 관해 진지하게 질문하는 방식으로 참된 영성에 천착하지 않는 교회라고 한다면 결국 이런 사건에 휩쓸린 위험성에 노출되고 말 것이다.

도대체 하나님(神)은 있는가? 아니면 기독교가 말하는 하나님은 유한하고 허무한 자기 실존을 절대화해보려는 인간의 욕망이 투사된 것에 불과한 것일까? 신론은 고난의 현실을 극복하려는 민중의 의식을 잠재우는 아편인가? 신은 죽었나? 이런 많은 무신론적 도전 앞에서 기독교는 여러 차원에서 신 존재를 증명하려고 시도한 바 있다. 물론 안셀름이나 아퀴나스 같은 사람들의 증명 방식은 기독교의 신론에 대한 근대의 본격적인 비판이 있기 전에 제시되었다. 예컨대 토마스 아퀴나스의 다섯 가지 존재 증명 중에서 첫 번째로 제시된 운동 개념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감각적으로 이 세상의 사물이 운동에 의해서 유지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운동이라는 것은 그 운동을 일으키는 원인에 의해서 야기된다. 이런 논리를 따라가면 결국 최초의 운동을 야기한 존재를 만나게 되는데, 그가 곧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즉 하나님은 부동(不動)의 동자(unmoved mover)로서 이 세상의 모든 운동의 단초라 할 수 있다. 이런 논리가 아무리 그럴듯하더라도 현대인의 모든 궁금증을 해결할 수는 없다. 모든 것이 운동으로 존재한다면 결국 하나님도 운동으로 존재해야만 하는데, 그가 그렇다면 결국 하나님도 역시 다른 힘에 의해서 존재할 수밖에 없다.
임마누엘 칸트는 초감각적인 하나님을 순수 이성으로 증명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최고 존재자 개념은 여러 면에서 매우 유익한 이념이다. 그러나 그것은 순전히 이념뿐이기 때문에 그것만 가지고는 존재하는 것에 관하여 우리의 인식을 확장시킬 능력이 전혀 없다.” 대신 실천 이성의 차원에서만 하나님이 요청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도덕적 요청으로서의 하나님이라는 칸트의 신 존재 증명은 일반인들을 만족시키지 못할 뿐만 아니라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도 역시 충분하지 못하다.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은 인간의 도덕적 동기의 근거라기보다는 훨씬 심원한 존재의 토대이기 때문이다.
신이 없다는 주장도 역시 그 토대는 매우, 훨씬 더 부실하다. 쉽게 말해서, 감각적으로 확인되지 않는 존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이 세상을 몰라도 한참이나 모르는 사람들의 의식에서나 인정될 수 있다. 이 세상에는 기체, 액체, 고체의 형식으로 존재하는 사물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전파도 있고 광선도 있다. 때로는 그것이 입자로 나타나기도 하고, 파동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양자의 세계에 들어가면 우리가 생각하는 물질은 경우에 따라서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만약 우리가 감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만 존재한다고 주장한다면 이 세상 자체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현재의 사물이 얼마나 깊은 존재론적 특성을 갖고 있는지 우리가 모를 뿐만 아니라 그것은 우리 인식의 방향에 따라서 가변적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아직 세상의 종말이 오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의 실체를 알지 못하며, 따라서 신이 없다는 주장도 역시 확인된 것은 결코 아니다.
유신론과 무신론의 중간쯤 되는 입장은 범신론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들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인격적인 유일신, 더 정확하게 말해서 삼위일체 하나님이라는 존재에 대해서는 부정하지만 만물에 신성이 내재한다는 차원에서는 인정한다. 이런 범신론적인 착상은 노장 사상이나 불교의 입장과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기독교의 창조론에서 볼 때 이런 만유재신론을 무조건 백안시할 것까지는 없지만, 그대로 받아들일 수도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자연의 관계를 창조자와 피조물로 구분하고 있는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신과 자연의 동일시는 곧 무신론과 다른 게 아니기 때문이다.  
유신론이나 무신론*이 아직은 증명될 수 없는 논리라고 한다면, 지금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존재문제와 연관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자연과학자들이 과학의 성질을 파악해나가듯 기독교인들이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존재 방식인 계시의 세계를 부단하게 해명해나가는 작업이다. 이는 다만 하나님의 존재를 사람들에게 인식시키려는 우리의 호교론적 노력일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론적 특성에 상응하는 우리의 신앙적 태도이기도 하다. 아무리 자연과학이 발달했고 앞으로 발달한다고 하더라도 자연과학의 세계가 우리에게 여전히 숨겨져 있듯이 하나님의 존재도 역시 우리에게 숨어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를 인식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인식론적 노력만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규명해낼 수 있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하나님은 은폐의 방식으로 자신을 계시하시기 때문에 그 은폐와 계시의 변증법적 긴장을 파악하고 있기만 하다면 우리는 조금씩 하나님의 존재 안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김균진은 대표적인 무신론을 세 가지로 구분한다. 첫째, 과학적 무신론 이 세계가 물리적 질서 이외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과학이 미래의 세계까지 재단할 수 있는 진리라기보다는 지구와 우주에서 지금까지 일어났던 것에 관한 질서를 해명하는 한정적인 학문이라는 점에서 무신론이 확증될 수 없다. 둘째, 인간의 자유와 자율성을 위한 무신론은 뒤에서 다루게 될 니체가 대표적 인물인데, 인간의 생명을 파괴하는 신이 없어야만 인간의 생명력이 살아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니체는 그 당시 교회가 선포하던 신을 부정한 것이지 신 자체를 부정했다고 볼 수 없다. 셋째, 저항적 무신론은 무죄한 자의 고난을 주제로 하는 ‘신정론’과 연관되는 주장이다. 인류가 당하는 불가해한 고난과 불의 앞에서 정의와 사랑의 하나님을 인정할 수 없다는 주장은 나름의 설득력이 있다. 무죄한 자의 고난 문제를 신론에서 기계적인 방식으로 쉽게 해결할 수는 없지만 그 고난과 불의를 하나님이 당한다는 십자가 신학에 근거해서 어느 정도 해답을 제공할 수는 있다.
    
많은 사람들이 무신론을 무조건 반기독교적인 사상이라고 매도하고 있지만 그런 태도는 그렇게 옳은 것만은 아니다. 무신론적 주장이 없었다면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관한 깊은 성찰도 불필요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한 철학자를 중심으로 유신론과 무신론의 문제 속으로 좀 더 깊이, 구체적으로 들어가려고 한다. 근대 유럽 사상사에서 니체만큼 이 문제를 철저하게 다룬 학자도 드믈 것이다. 아래 니체 항목은 판넨베르크의 <신학과 철학>을 요약한 것이다.  
  
니체(Friedrich Wilhelm Nietsche, 1844-1900)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목사였던 니체가 인류 역사상 가장 노골적으로 기독교를 비판한 탓인지 기독교 안에서 니체에 대한 평가는 좋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의 주장이 상당한 정도로 왜곡되거나 그의 인격에 대한 악의적 소문도 적지 않았다. 심지어는 니체가 말년에 정신병에 걸려 죽은 것이 기독교를 비판한 결과라고 주장할 정도이다. 그의 개인적인 운명이 아무리 불행했다고 하더라도, 또한 삶의 과정 자체나 인격적인 부분에서 괴이쩍은 요소가 많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한 인간 전체를 매도하는 일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는 니체의 발언을, 사실 그가 집필한 주요 저작들은 시적인 운율로 되어있기 때문에 따라잡기가 쉽지 않지만, 일단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이 말은 형식적으로 기독교를 비판하고 있지만 그 내면에는 다른 생각이 있을지 모른다는 의미이며, 또한 설령 비판이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정당하다고 한다면 우리는 당연히 그것을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의미이다.
니체가 주장하고 있는 핵심은 무엇인가? 그는 기독교 사상으로 토대가 잡힌 유럽의 모든 정신과 문화를 해체(postmodernism)하기 위해서 신과 이성을 부정했다. 이런 점에서 그의 사상은 일종의 무신론이며 동시에 허무주의인데, 이 두 가지 특징은 공속적인 관계에 있다. 모든 존재와 체제의 최상에 자리를 잡고 있는 신을 부정할 수 있다면 그 신에 의해서 구성된 사회질서도 역시 해체될 수밖에 없다. 신의 죽음은 결국 허무주의로 진행되는 단초인데, 여기서 말하는 허무주의는 그렇게 부정적인 의미라기보다는 새로운 세계질서를 세우기 위한 계기를 마련한다는 점에서 긍정을 위한 부정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니체가 신을 부정했다는 사실을 두 가지 관점으로 나누어 해석할 수 있다. 하나는 이미 그 당시에 기독교의 신론은 그 정당성을 상당히 상실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니체는 그의 선구자라 할 수 있는 포이에르바흐가 기독교의 신관을 이론적으로 파괴한 것을 매우 명백한 역사적 사건으로 인식했다. 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계몽주의와 칸트의 이성 비판을 통해서 하나님과 형이상학은 증명할 수 없는 대상이 되고 말았다. 신의 자리를 이론적으로 유지할 수 없었던 그 시대적 변화를 니체는 확신하고 있었다. 그래서 결국 미친 사람을 등장시켜서 이렇게 외친다. “하나님은 어디로 갔는가? 그는 소리쳤다. 나는 당신들에게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살해했다. 당신들과 내가! 우리 모두는 하나님을 살해한 자들이다”(Die fröhliche Wissenschaft, 1882, 125).
다른 하나의 관점은 이렇다. 그는 신이 없다고 주장한 게 아니라 우리가 그를 죽였다고 말했다. 무신론은 아예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지만 니체는 그런 입장이라기보다는 인간에 의해서 신이 폐기처분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는 곧 신에 대한 근본적인 부정이 아니라 기독교에 대한 비판이라고 보아야 한다. 과연 18,19세기의 기독교가 쇼펜하우어, 니체, 프로이트, 마르크스 같은 사람들에게 혹독한 비판을 받아야할 만큼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보는 관점에 따라서 약간 차이가 날 수는 있겠지만 위에서 잠간 언급했듯이 계몽주의, 프랑스 혁명, 진화론 같은 격변기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퇴행적인 모습을 보였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교회가 여전히 선악 이원론에 머물고, 기독교 신앙을 도덕주의와 동일시한다거나 외적인 권위주의에 안주하는 등, 성숙의 시대에 접어든 세상에 비해 정신적으로 미숙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이러한 여러 요소들 중에서 니체가 집요하게 문제를 삼은 것은 교회의 도덕주의였다.
니체는 1887년 여름에 집필한 한 논문에서 기독교의 도덕은 세 가지 관점에서 허무주의로부터 인간을 지킨다고 피력했다. 첫째, 기독교 도덕은 인간에게 절대가치를 주었다. 둘째, 기독교 도덕은 세계에 완전의 성격을 부였다. 셋째, 기독교 도덕은 인간에게 절대가치를 알게 했다. 이를 통해서 기독교 도덕은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무시하거나, 반(反)생명의 입장을 취하거나, 깨달음에 대해서 의심하는 것을” 막아냈다는 것이다.(Nachgelassene Fragmente 5, 71). 사실 니체의 지적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기독교가 성숙한 세계 앞에서 도덕적 가치를 수호하는 기관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미 칸트가 신의 자리를 윤리적 실천에서만 가능하다고 본 것과 같다.
그런데 문제는 기독교 안에서 이런 도덕의 강조가 결국 인간의 자학으로 이어졌다는 데에 있다. 신성(神性)에 대립해 있는 죄책감은 기독교적인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정점에 달했다.(도덕계보학 1, 20). 또한 이것은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 하나님에게 충실하려는 전제조건으로서 자학에 대한 의지와 연결되어 있다. 니체에 따르면 바로 무신론이 이러한 종교적 ‘노이로제’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킨다는 것이다(도덕계보학 2, 20). 기독교인들이 도덕심과 그것의 불가능성 사이에서 일종의 노이로제 현상을 보인다는 것은 나름의 정당성이 있다. 성적 욕망과 자학 사이에서 파괴되어가는 여성들의 삶을 다루고 있는 <좁은 문>이나 <여자의 일생> 같은 소설에서 우리는 그 당시 교회가 강요하는 도덕심과 인간의 구체적인 삶 사이에서 벌어지는 모순을 발견할 수 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라는 작품에서 둘째 형인 이반의 입을 통해 그 당시 러시아 정교회의 문제를 예리하게 짚어내고 있다.

*필자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은 게 벌써 30년 전이라서 그런지 기억이 또렷하지는 않다. 그렇지만 몰트만도 이 작품을 주제로 신학적 아티클을 쓴 적이 있고, 한스 큉도 다룬 적이 있기도 하고, 여기저기서 이에 대한 촌평들을 접했기 때문에 그나마 약간의 내용은 기억에 남아 있다. 삼형제 중에서 둘째인 이반과 셋째인 알료사가 그 작품에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다. 불가지론적 무신론자인 이반은 어느 날 수도원 견습생인 동생 알료사에게 ‘대심문관’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재림한 예수가 초림 때와 마찬가지로 민중들의 삶에 깊이 개입하자 러시아 정교회에서 그를 구속했다. 어느 날 밤에 최고 승정이 아무도 몰래 예수를 찾아온다. 당신의 나라는 이 땅이 아니라 하늘이니까 빨리 돌아가라고. 그렇지 않으면 내일 민중을 시켜 당신을 죽이겠노라고 한다. 인간학적 인식이 매우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있던 19세기의 기독교는 퇴행적인 종교로 간주되었던 것 같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반을 통해서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나는 그 때문에 나의 입장권을 반납하려고 서두르고 있는 거야. 내가 성실한 인간이 되기를 바란다면 이 일을 될 수 있는 한 빨리 해버리는 것이 나의 의무겠지. 그래서 나는 결국 반납하겠다는 거야. 알료사, 난 하느님을 거부하는 게 아냐. 하느님에게 나의 입장권을 공손하게 되돌려드리는 것뿐이야.”
  
니체는 이 문제를 <도덕계보학> 세 번째 논문에서 금욕주의와 연결해서 설명하고 있다. 즉 기독교의 금욕적 이상은 생명과 적대적이라는 말이다. 특히 현재의 삶을 부정함으로써 피안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하는 성직자들의 생각에 이런 금욕적 이상이 두드러진다. 여기서 성직자는 신자들의 죄책감을 공격함으로써 사죄의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니체는 이런 금욕적인 이상이 고통을 감내할 수 있는 힘을 부여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요소가 있기는 하지만 금욕적 이상은 결국 허무주의적이라고 한다. “인간적인 것에 대한 증오, 더 나아가 동물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에 대한 이러한 증오는, 또한 감각에 대한 혐오와 이성에 대한 혐오, 그리고 행복과 아름다움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모든 외면, 변화, 진행, 죽음, 소원, 욕구를 멀리하려는 요구, 이런 모든 것은 무에 대한 의지를 달성하고 반생명적인 의지를 달성하려는 것을 의미한다.”(도덕계보학 3, 28). 우선 니체의 논리는 크게 잘못이 없다. 어떤 점에서 인간의 생명 의지라 할 수 있는 열정과 욕망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기독교의 가르침이 신자들에게 자학과 금욕의 방식으로 접근되었다는 점에서 결국 허무주의적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창조론과 구원론과 종말론은 결코 인간의 삶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훨씬 역동적으로 끌어올린다는 점에서 니체의 기독교 비판은 그 당시의 역사적 교회나 그와 비슷한 교회에만 해당된다.
그가 분석한 “신은 죽었다”, 또는 “무에 대한 의지”는 모든 근원을 허물어버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런 허무를 통해서 훨씬 긍정적인 세계를 추구한다. 하나님 대신 초인을, 불멸의 영혼 대신 영원회귀를, 선과 참 대신 권력에의 의지를 생명 긍정의 근거로 삼았다. 도대체 허무주의가 어떻게 생명을 긍정한다는 말인가? 이렇게 정리하면 이 문제가 해명될 것이다. 니체의 허무주의는 기성질서의 몰락을 촉진시키고 권력의지를 통해서 그것을 극복하는 적극적인 계기를 그 속에 지니고 있다고 말이다. 이런 점에서 그가 사용하는 ‘허무’는 양가(兩價)적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부정적인 의미로서 기독교의 도덕주의적 체계의 해체이며, 다른 하나는 긍정적인 의미로서 새로운 생명의 건설이다. 판넨베르크는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니체가 무신론으로 돌아섰다는 것은 그가 프로테스탄트의 참회적 경향을 혐오했다는 사실을 가리키는데, 이 사실을 직시해야만 니체가 자신의 지적인 의심의 날카로움을 단 한 번도 근대 무신론을 증명하는 작업이나 또는 그 사회적 조건들을 향해서 시도하지 않았다는 불가사의한 현상이 이해될 것이다. 그가 그렇게 자랑해마지 않았던 정직의 덕은 그에게 사실상 매우 일방적으로, 또한 부분적으로 추구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바로 앞서 암시되었던 것처럼 설명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니체가 기독교에 대해서 비방했던 그 거울이 비록 깨진 것이라 해도 감사해야만 한다. 기독교는 기독교의 종교적 경건성이 그릇된 방향으로 발전했다는 충고에 대해서 눈감으로면 안 된다.”(신학과 철학, 385).

하나님을 살해한 자들!
니체의 기독교 비판이 그렇게 근거가 없는 게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하며, 또한 니체에 의해서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자극받았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유신론과 무신론 문제에서 니체의 등장이 기독교에 끼친 영향이 심각하다는 점에서 위에서 아주 짧게 인용되었던 니체의 언급을 좀 더 길게 읽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이 인용은 에벨링의 <신앙의 본질> 89-90에서 받았다.  

너희는 저 미친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는가? 그는 대낮에 등불을 켜들고 시장으로 달려가서 끊임없이 소리를 질렀다. 나는 하나님을 찾는다! 나는 하나님을 찾는다고! 그때 그곳에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많이 모여 있었다. 그는 그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도대체 저 사람이 돌았나 하고 한 사람이 말을 하기 시작했다. 이어서 다른 사람이 저 사람은 애들처럼 길을 잃었나 하고 말했다. 사람들은 그는 어디 숨으려는 것이 아닌가? 아니 우리를 무서워하는가? 고향을 등지고 배를 탔었나? 사고무친한가? 이렇게 말하면서 제각기 소리치고 웃고 떠들었다. 그 미친 사람은 그들에게 둘러싸여 그들을 뚫어지게 보면 소리쳤다. 하나님은 어디로 갔는가? 내가 너희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그것이다. 나와 너희들, 우리가 모드 그를 죽인 거야. 우리는 모두 하나님을 도살한 자들이야.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그런 짓을 했을까? 우리는 어떻게 바다를 마셔버리는 것 같은 그런 짓을 했을까? 누가 우리에게 모든 수평선을 지워버릴 수 있는 해면(海綿)을 주었는가? 우리는 무엇으로 이 지구를 태양의 궤도에서 탈선시킬 수 있었을까? 지금 지구는 어디를 향해 달리는가? 우리는 지금 어디를 향해 갈리는가? 태양의 궤도를 벗어나서 우리는 계속 추락 상태에 있지는 않는가? 앞으로, 뒤로, 옆으로 엎치락뒤치락하지 않는가? 아직도 위와 아래가 있는가? 영원한 무(無)를 통해 우리는 방황하는 것이 아닌가? 빈 공간이 우리를 호통 치지 않는가? 점점 몰인정해만 가지 않는가? 계속되는 것은 밤뿐이고 어두움은 더 깊어만 가지 않는가? 대낮에 초롱불을 켜야 하게 되진 않았나? 하나님을 장례 지내는 요란한 소리밖에 아직 들려오는 것이 없지 않는가? 냄새로 하나님의 썩는 냄새밖에 아직 없지 않은가? 신들도 썩는다! 하나님은 죽었다! 하나님은 영원히 죽었다! 우리가 그를 죽인 것이다. 살인자 중의 살인자인 우리를 위로할 수 있을까? 세상이 지금가지 쌓아올린 것 중 가장 거룩하고 가장 세력적인 것을 우리가 칼로 쓰러뜨린 것이다. 누가 이 피를 우리에게서 씻을 것인가? 우리를 깨끗이 씻을 물은 어떤 것인가? 이를 위해 어떤 속죄제물, 어떤 성스러운 종교의식을 창안해 내야 할 것인가? 이 범행은 우리 힘을 넘지 않는가? 이 범행을 보상하려면 우리 스스로 신이 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보다 더 큰 범행은 없었다. 이 범행 때문에 우리의 후예는 지금까지의 모든 역사보다 더 큰 역사 계열에 속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그 미친 사람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구경꾼들을 둘러보았다. 그들도 말없이 기이한 듯이 그를 보고만 있었다. 마침내 그는 자기의 초롱을 땅에 던졌다. 초롱은 산산조각이 났고 불은 꺼져 버렸다. 그러나 그는 말을 이었다. “나는 너무 일찍 왔다. 내 때가 아직 아니다. 이 무서운 사건은 아직 도상에 있다. 진행 중에 있다. 아직 사람들의 귀에까지는 오직 않은 것이다. 천둥과 번개도 시간이 필요하다. 별빛도 시간이 필요하다. 범행도 시간이 필요하다. 저지른 후 보이고 들리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 범행은 그들의 귀와 눈에서 아직 까마득하게 멀다. 아주 멀리 있는 별보다 멀다. 그러나 그들도 똑같은 일을 범했다!” 그 후에 소문이 떠돌았다. 그 미친 사람은 같은 날 여러 교회에 들어가서 죽은 하나님을 위해 진혼곡을 불렀다고. 그리고 그를 끌어내어 말을 시켰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되풀이해 물었다고. “교회가 하나님의 묘표와 묘혈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Die fröhliche Wissenschaft, 1882, 125)

교회가 하나님의 묘혈이 아닌 적이 없었다는 니체의 고발은 단지 불행하게 최후를 마친 천재 철학자의 광기로만 돌릴 수 없다. 교회 자체를 확대하고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하나님을 이용함으로써 결국 청중들의 삶을 왜곡하고 파괴하는 일들이 니체 시대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 시대의 교회 안에서도 비일비재하다. 형식적으로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우리가 이단이라고 단죄하는 집단과 우리 정통 교회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를 찾아보기 힘들다. 사람들이 교회에서 은혜 받고 변화되는 걸 보면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게 분명하다고 주장하지만 그런 현상들은 이 세상의 모든 종교에서 일반적으로 일어나는 것들에 불과하다. 결국 우리의 신앙이 참된 것인지 아닌지에 관한 진리론적 논의를 그치지 않는 것이야말로 교회가 생명력을 유지하는 정도이다. 그런 진리론적 논의는 신학을 통해서 전개될 수밖에 없는데, 일반적으로 교회는 그런 신학을 거부하고 있다는 데서 교회의 구원 가능성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건 그렇다 치고, 니체의 신(神)죽음 신학 앞에서 우리는 어디서 그것에 대한 대답을 찾아야 하는가? 니체는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라거나, 심지어는 하나님이 그를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일방적인 주장으로는 아무런 대답이 되지 못한다. 우리는 신죽음, 신없음이라는 이런 상황에서 그 없음(無)을 신학적으로 지양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이미 ‘십자가의 신학’이 곧 하나님으로부터의 유기라고 한다면 무신론은 하나님이 존재하는 또 하나의 다른 방식이 될 수도 있다. 즉 여기서 말하는 있음과 없음은 단지 어떤 실체의 있고 없음이라기보다는 궁극적 리얼리티이며, ‘모든 것을 규정하는 현실성’인 하나님의 존재방식을 일컫는 우리의 인식론적 그릇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대목을 필자 개인의 실존론적 경험과 연관해서 설명해보자.    

무(無)경험으로서의 하나님 경험
어쩌다 한낮 의자에 앉아서 깜빡 졸다가, 다시 잠에서 깨는 그 순간에 아주 이상한 느낌에 사로잡히는 경우가 자주 있다. 아마 꿈과 현실의 중간쯤 되는 의식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그 짧은 순간에 내 의식은 영원과 현재 사이를 수없이 오간다. 천년 전과 천년 후, 그리고 그 사이에 작은 티끌로 존재하는 내가 있는 셈이다. 아! 시간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그 시간 안에서만 존재하고 있는 사물과 나는 도대체 무엇일까? 이런 생각과 더불어 시간과 존재의 신비 속으로 끝없이 빨려 들어가곤 한다. 이런 경험이 단지 낮잠을 깨는 흐릿한 의식의 순간에만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어느 집 담 밑을 걷다가 그 집 안에서 흘러나오는 꽃향기, 또는 된장찌개 냄새를 맡을 때도 내 의식은 아찔하다. 어디 그것뿐이랴. 내 몸이 지구의 중력을 느낄 때, 신학생들에게 강의하는 어떤 순간에, 먹구름을 보거나 쏟아지는 빗줄기를 보고 그 소리를 듣다가 나는 현실을 망각하고 어떤 아득한 세계와 그 힘에 휩싸이곤 한다. 이런 아득한 경험을 언어로 규정할 수 없기 때문에, 즉 내 인식의 범주를 뛰어넘기 때문에 나는 어둠이라고 부르고 싶다.
하나님 경험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를 읽거나 또는 그 하나님에 대한 해명인 신학 공부를 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명백하게 인식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 이유는 성서의 증언이라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모든 것이 아니라 거의 무시해도 좋을 만큼의 작은 것이기 때문인데, 신학도 여기서 예외가 아니다. 흡사 호랑이가 남긴 몇 가닥의 털만 보고 그 호랑이를 인식해야 하는 경우처럼 성서의 증언은 우리가 하나님을 인식하기에는 턱없이 빈약하다. 더구나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은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이라기보다는 간접적인 경험이기 때문에 그 자료만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정확하게 인식할 수는 결코 없다. 여기서 간접적이라는 말은 인간이 하나님을 직접 경험할 수 없다는 뜻이다. 간혹 구약성서에서 야훼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말씀하셨다는 예언자들의 진술을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일종의 문학적 수사일 뿐이지 사실 관계에 대한 직접적인 서술은 아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직접 경험할 수 없는 이유는 이 양자의 존재 양식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데에 있다. 우리는 철저하게 시간과 공간이라는 범주에서 인식하고 경험할 수 있는데 반해서 하나님은 그런 범주를 벗어난다는 말이다. 노자가 말하는 ‘道可道 非常道’라는 개념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의 언어와 개념 안에 들어가 버린 도라고 한다면 것은 참된 도가 될 수 없듯이 우리의 직접적인 경험에서 파악된 존재라고 한다면 그것은 결코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없다.
성서가 이미 이런 사실을 증거한다. 욥기서는 믿음이 좋았던 욥이나 욥과 논쟁을 벌였던 친구들의 모든 논리가 인간의 인식론적 한계를 담고 있기 때문에 부질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확증한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해석하고 있는 예언자들이 증언하려는 바도 자신들의 역사에 개입하는 야훼의 힘 앞에서 입을 다물라는 것이지 야훼 하나님을 자신들이 파악했다는 게 아니다. 자신들의 인식론적 범주가 형편없다는 사실을 오랜 역사 경험에서 깨달은 구약성서 기자들은 결국 인간의 역사를 초월하는 새로운 역사가 도래해야만 구원이 완성된다는 묵시사상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있는 신약성서도 역시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이 아니다.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에게 일어난 모든 사건들은 그 당시 사람들의 인식에서 벗어난 것들이었기 때문에 놀랄 뿐이었다. 부활과 승천, 그리고 재림의 약속으로 인해서 예수 사건은 결정적으로 우리의 인식을 뛰어넘는 사건이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성서가 하나님을 증거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하나님이 성서 기자들의 인식 안에 제한 받지 않으며, 따라서 우리가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이지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거나 간과하는 것은 아니다. ‘그 말이 그 말’ 아니냐, 하고 따질 분이 있겠지만, 분명히 그 말이 그 말 아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과 그분의 본질을 규정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성서는 하나님의 존재를 주장하기 위해서 부분적으로 본질을 언급했을 뿐이며, 그 본질이라는 것도 인간의 인식을 뛰어넘는 속성으로 해명되고 있다. 아래와 같은 하나의 비유를 들어보자.
유치원에서 아이들에게 아빠에 대해서 설명해보라고 했다면, 아마 업어주는 분, 과자 사 주는 분, 대충 이런 대답이 나올 것이다. 이런 대답이 이 아빠라는 존재의 정체와 본질을 모두 해명해주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그 아빠가 철학자이거나 예술가이거나 시인이라고 한다면 그 대답은 그 유치원 아이의 작은 경험에 불과하지 실체적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이 아이의 대답에는 아빠라는 존재에 대한 확실한 경험이 담겨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진리, 정확하게 말하자면 부분적인 진리이다. 이 아이의 생각이 깊어진다면 아빠의 세계가 자기의 경험을 훨씬 뛰어넘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런 깨달음이야말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 인간이 가져야 할 가장 근본적인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식론적 범주를 뛰어넘는 그 신비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분이기 때문에 그 분을 생각할 때마다 우리는 어둠에 휩싸인다. 이 어둠은 내 인식이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존재의 힘 앞에서 느끼는 일종의 무(無) 경험이다.
무신론의 무(無)를 필자 개인의 실존론적 경험 범주 안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해명하는 하나의 개념으로 끌어내보았지만 이것으로 우리가 무신론을 지양할 수 있다거나,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최종적으로 증명했다거나, 또는 이것이 곧 기독교의 정통적 하나님 개념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우리가 그 어떤 철학적, 인문학적, 신학적 논리를 끌어들임으로써 이런 무신론적 도전에 나름의 대답을 제공할 수 있겠지만 결국은 성서의 하나님 해명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다. 물론 그 성서의 하나님 해명도 역시 자명하지 않기 때문에 또 다시 우리는 철학적, 인문학적, 신학적 해석학을 필요로 한다. 아직 이 세계의 끝에 도달하지 않은 우리는 성서와 2천년 역사, 그리고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삶의 자리를 변증법적 방식으로 다룸으로써 하나님을 이해하고 변증하는 길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길에서 만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하나님 개념은 곧 ‘인격성’이다.      

하나님의 인격성
우리가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야”라고 할 때 일반적으로 떠올리게 되는 하나님 상(像)이 있다. 어린아이의 머릿속에는 하나님이 인간과 비슷한 외형을 가진 분으로 그려질 것이다. 우리처럼 희로애락을 모두 겸비한 어떤 인간적 성품의 존재쯤으로 여긴다. 이를 가리켜 ‘신인동성동형론’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불렀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예수님의 아버지 호칭은 하나님을 두려운 심판자로만 생각한 유대인들의 생각을 근본적으로 바꾼다는 데에 초점이 있는 것이지 하나님을 우리 인간 삶에서 확인될 수 있는 그런 아버지와 아들 관계로 설명한 것은 결코 아니다. 하나님의 인격성을 이렇게 외형적 모습으로 생각하는 경향은 아마 초기 기독교가 헬라철학의 ‘실체론적 형이상학’에 영향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즉 하나님이 어떤 실체(Substanz)로 존재한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시공간 안에 살고 있는 우리는 감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만을 확실한 것으로, 즉 리얼리티로 여기기 때문에 하나님도 이런 범주 안에 놓고 싶어 한다. 실체론적 형이상학의 근거가 사라진 지금도 여전히 그런 정도의 수준에서 하나님을 이해하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면 자신의 신앙적 수준을 심각하게 성찰해야만 할 것이다.
어느 정도 인식론적 훈련을 거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인격성을 ‘대화’에서 찾으려고 할 것이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대화가 가능하다는 사실이 곧 하나님의 인격성이라고 말이다. 이런 주장은 성서의 관점에서도 그 정당성이 보장된다. 우리는 성서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말을 걸고, 이삭, 야곱, 요셉에게 말을 걸며, 모세를 불러 바로와 싸우도록 말씀하시는 장면을 자주 목도할 수 있다. 그 이외에서 구약의 모든 예언자들은 바로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과 대화를 나눈 영적인 지도자들이었으며, 신약성서는 구약과 약간 다른 형식이긴 하지만 원칙적으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는 말씀이다.
하나님과 인간이 대화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당신’으로 부를 수 있다는 의미이다. 비록 그 하나님이 우리의 생각 안에 갇혀 있는 분은 아니지만 여전히 우리의 생각 안으로 들어오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인격적인 ‘당신’이라고 부른다는 말이다. 마틴 부버도 <나와 너>라는 책에서 하나님을 이런 인격적인 분으로 서술했으며, 하인리히 오트 역시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책에서 ‘유신론 이후의 신학자들’에게 하나님을 당신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인격적인 존재로 해명했다. 아래의 인용은 오트의 언급이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 무한한 인격에 대하여 ‘당신’이라고 말하는 것은 비본래적이고 부적합한 형식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즉 ‘···인 것처럼’ 하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적합하고 정확한 것이다. 하나님은 비록 더 높은 다른 뜻으로 인격이지만, 우리에게 그래도 참으로 정말 ‘당신’이 되시고, 우리의 ‘당신’을 통하여 상달될 수 있는 분이시다. 우리가 ‘당신’이라고 부르는 것은 허공을 향한 것도 아니고, 공연히 하는 것도 아니다. 도리어 ‘무한한’ 인격이신 하나님께서 들어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개인적인 관심거리에 마음을 쓰고 계신다.(77쪽).

여기서 하나님과 대화를 나눈다는 말은 양측의 자유가 보장되었을 때 가능하다. 만약 한쪽에서 일방적으로 말을 하고 다른 쪽에서 일방적으로 듣기만 한다면 그것은 대화가 될 수 없다는 점에서 양측의 자유는 전제 조건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인격성이 대화에 있다고 보는 주장은 성서의 하나님, 더 정확하게 말해서 복음서의 예수가 말씀하신 하나님을 설명하는 데 결정적인 개념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과 대화한다는 게 무엇인지 그 의미를 충분하게 해명해야만 한다. 위에서 언급한대로 이 대화 구조가 여전히 신인동성동형론적인 사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인간의 자유를 확보하려다가 오히려 하나님의 신성을 초라한 지경으로 끌어내릴 수 위험성이 있다. 또한 계시론적 차원에서 본다면 성서는 인간과 하나님의 대화라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Dominus dixit)이라는 점이다. 즉 성서는 대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함과 인간의 들음이라고 보는 게 성서의 계시론적 의미에 부합한다. 그래서 칼 바르트는 성서 안에서 인간이 무엇이라고 말하거나 무엇이라고 생각했는가를 찾지 말고 하나님이 무엇을 말했는지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에게 기도드릴 수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즉 그는 인격적인 존재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인격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의 생각을 좀더 넓혀보자. 하나님이 인격적이라는 말은 두 가지 차원에서 설명되어야 한다. 하나는 그분의 고유한 존재양식이며, 다른 하나는 그분의 고유한 행동양식이다. 우선 존재양식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인간의 인격이 아니라 하나님의 고유한 인격으로 존재하신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나님의 고유한 신격(神格)이라고 해야 하지만, 우리의 이해를 위해서 하나님의 인격이라고 부를 뿐이다. 만약 하나님을 인간의 인격적 범주 안에 가두게 되면 다음 장에서 자세하게 다루게 될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도저히 설명해낼 길이 없다. 정용섭의 인격은 정용섭 하나일 뿐이지 정용섭의 인격이면서 동시에 또 하나의 다른 문혜숙의 인격이 될 수는 결코 없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인격을 벗어나 있기 때문에 ‘삼위일체’로 존재하실 수 있다. 본질로는 하나이지만 세 위격으로 존재하신다.
다른 하나는 인격으로서의 하나님은 자신의 고유한 자유 안에서 활동하기 때문에 우리 인간의 판단과 예상을 벗어난다는 사실이다. 만약 이 세계가 고정된 길을 따라서 진행된다면, 즉 우리의 예상 안에 한정되어 있다면 이 세상을 끌어가는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런데 생물학이나 물리학, 또는 역사학에서 볼 수 있듯이, 뿐만 아니라 개인들의 인생살이에서 볼 수 있듯이 모든 역사의 흐름은 예정된 길을 벗어난다. 그것을 가리켜 ‘우연성’이라고 하는데, 이 우연성이 곧 하나님의 고유한 인격성을 증명하고 있다. 그래서 칼 바르트는 신학자의 실존을 가리켜 ‘놀라움’으로 설명한 적이 있다. 자신의 고유한 인격 안에서 활동하는 하나님을 진술한다는 것은 일종의 두려움이 아닐 수 없다는 말이다.

무신론 논쟁 이후에 우리는 더 이상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유신론을 주장할 수 없게 되었다. 전통적 의미에서의 유신론은 전지전능, 무소부재, 유일무이, 영원불변, 절대초월, 지고지선 같은 속성으로 자리 잡은 하나님 개념이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존재자가 바로 유신론의 토대라고 한다면 우리 앞에 직면해 있는 이 세상의 모순, 부조리도 역시 해결될 길이 막힌다. 절대적 존재인 하나님이 다스리는 이 세상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이 모순은 곧 무신론을 불러들인다는 말이다. 따라서 유신론과 무신론 논쟁은 상대방을 굴복시키기보다는, 특히 기본적으로 유신론의 입장에 서 있는 신학으로서는 지금까지 주장했던 여러 형이상학적 논리를 무조건 강화하거나 혹은 열광주의적 믿음의 확산으로 무신론을 굴복시키기보다는 유신론적 하나님 이해의 지평을 심화하는 방식을 선택해야 할 것이다. 유신론와 무신론 사이의 부질없는 논쟁을 극복할 수 있는 신학적 길은 다음 장에서 다루게 될 삼위일체론적 구도에서 하나님 이해를 심화하는 데 있다. 삼위일체론은 자칫 또 하나의 현학으로 떨어질 개연성이 없지 않지만 본래의 신학적 착상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하나님 인식에 전혀 새로운 지평을 허락할 것이다. 이러한 신학 작업을 펼쳐야 할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는 다음과 같이 두 가지가 아닐까 생각한다. 첫째,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하나님을 표상하기보다는 인격적으로 우리를 만나기 원하는 그 하나님을 열린 마음으로 기다려야 한다. 둘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기노출을 인식할 수 있도록 영적인 감수성을 예민하게 작동시켜야 할 것이다. 일종의 대림절 신앙인 기다림의 신학과 성령론적 신앙인 영성 신학이 조화를 이룬다면 우리는 무신론 논쟁을 뛰어넘어 하나님을 바르게 변증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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