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인간은 왜 남성과 여성인가?

여성신학 조회 수 4276 추천 수 68 2005.04.25 18:11:04
9장
인간은 왜 남성과 여성인가?
-성차별을 넘어 성의 현실로!-

지구의 생명 현상인 성(性)

만약 지구에 불시착한 외계인이 다른 것은 접어두고 인간의 성생활을 보았다고 한다면 어떤 생각을 할까? 지구 이외의 생명체들은 우리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후손을 번식한다는 사실을 전제한다면, 이런 추측은 당연한 건데, 그들은 인간의 성생활에 대해서 한편으로는 호기심을 갖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희한한 종자들’도 있다는 생각으로 자기들끼리 키득거릴 것 같다. 이만큼 성은 지구 안에 한정한 아주 특별한 생명 현상이라는 말이다. 물론 지구에만 있는 특별한 생명 현상*이 어디 성(性)만이겠는가? 생명의 생성이 가능할 수 있는 모든 조건들이 지구만의 특별한 것들이다. 산소, 탄소의 적절한 배합, 태양과의 적당한 거리, 달과 지구 사이의 중력으로 인한 판 운동, 그리고 식물, 미생물, 곤충, 채식동물, 육식동물, 인간에 이르는 먹이사슬, 그 이외의 모든 것들이 오직 지구만의 현상인데, 그 중의 하나가 곧 성 현상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구에서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가 아주 특이한 경우만 제외한다면 서로 다른 성의 상호 결합에 의해서 자손을 퍼뜨린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지구에서 벌어지는 생명 현상을 심층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한 기독교 신학의 근본도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학은 이 세상을 하나님이 ‘무로부터 창조’(creatio ex nihilo)했다고 믿을 뿐만 아니라 종말론적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며, 근본적으로 부활은 이 지구에서 경험하는 이런 생명의 전적인 변화이기 때문이다. 이 생명 현상을 이해하는 길은 대단히 포괄적이다. 기본적으로는 생물학과 물리학이 우리에게 그런 정보를 제공할 것이며, 문학이나 예술도 역시 우리에게 그런 것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할 것이다. 이런 통찰력은 단지 이 세상이 아름답다거나 신기하다는 인식에 머무는 게 아니라 존재론적 신비의 차원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요정이 등장하는 이유, 미야자키의 애니메이션에 현실과 비현실이 섞이는 이유가 바로 이 생명의 신비를 인식하기 때문이다. 생떽쥐베리의 <어린 왕자>는 이 세상을 고정된 선입관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는 세계관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예술가들과 인문학자들의 생명 이해 앞에서 신학은 어떤 대답을 주어야 하는지 신중하게 숙고해야만 한다.

이 지구 안에서 이런 성 현상이 왜 나타났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아는 바가 별로 없다. 성서도 역시 성의 기원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다. 창세기의 E문서는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다고 보도하고, J문서는 남자가 혼자 지내는 것이 좋지 않아서 여자를 만들었다고 보도하지만 이 보도가 성 자체에 대한 해명이 아니며, 설령 부분적으로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런 보도만으로 성 현상을 모두 해명할 수는 없다. 이 성서의 보도는 성이 인간의 구성 요소라는 것을 말할 뿐이지 지구 안에 성 현상이 발생하게 된 그 원인에 대한 설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는 오히려 진화론적인 설명이 훨씬 타당하다고 보아야 한다. 단세포 생물이 다세포 생물로 진화하면서 성의 분화가 시작되었고 그 분화가 후손 번식의 단초로 작용한다는 뜻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유전공학적 설명은 우리의 한계를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깊이 들어가지 말기로 하고, 다만 진화의 산물인 이 성 현상은 결국 생존, 또는 생명의 가장 원초적이고 본질적인 요소라는 점만 명확히 하면 될 것 같다.
물론 지구 안에서 벌어지는 이 성 현상을 생명 보존의 수단이나 과정으로만 본다는 것은 결국 성을 지나치게 진화론적, 또는 생물학적 차원으로 떨어뜨릴 위험성이 있긴 하다. 단도직입적으로 표현한다면 ‘여자는 곧 출산을 위한 도구가 되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우리는 뒤에서 이 문제를 기독교 윤리와 교의학의 관점에서 다루게 되겠지만 성 현상을 생존의 본질이라고 본다고 해서 성을 낮추어 본다거나, 더구나 여성을 차별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런 시각은 성 절대주의나 성 혐오주의에 치우치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성 현실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사안에 접근할 때 범하기 쉬운 오류는 한편으로는 기존의 고정된 생각에 묶이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 현대적 요청에 부응하려는 쪽으로 치우친다는 것이다. 성 문제를 다룰 때도 이런 오류의 가능성이 우리에게 나타난다. 어떤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왜곡된 성 의식에 묶임으로써 그것이 지향해야 할 어떤 방향을 놓쳐버리고 있으며, 또 다른 사람들은 성의 근원을 간과한 채 오늘의 요구에만 귀를 기울임으로써 성을 추상화한다. 성과 몸의 미학을 강조함으로써 성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성신학의 성 의식이 전진적이긴 하지만 그것이 성의 현실을 명확하게 포착해내고 있지 못할 가능성도 있다.
그래서 나는 성 문제를 다룰 때 그 무엇보다도 성의 현실성에 그 토대를 정확하게 설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록 성 현상이 인류의 문화 과정을 통해서 발전하기도 했고, 또는 왜곡되기도 했지만 여전히 그 현실이 상실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우리의 논의 중심에 놓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 현실은 곧 지구 안에 시작된 생명체가 그 생명 현상을 유지하기 위해서 선택한 하나의 방식이라는 것이다. 인류 조상이 이런 성 현상과 상관없이 후손을 번식할 수 있었다면 다르게 진화할 수 있었겠지만 우연하게, 또는 숙명적으로 그런 성 교환 방식으로만 이 지구에서 생존할 수 있었다는 그 사실이 중요하다.
우리는 이런 예상을 할 수 있다. 앞으로 1억 년 후에 이 땅에서 살게 될 우리의 후손들이 성 결합이 아니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예컨대 요즘 줄기 세포 연구에서 이루어지고 있듯이 각자의 세포를 통해서 후손을 번식하며 살게 된다면 오늘 우리가 알고 있는 이런 성 현상이 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미래의 일을 여기서 결정론적으로 예단할 수는 없지만 우리의 성 현상이 후손 번식과 깊숙이 연결되어 있다는 이 사실을 인정한다면 후손 번식의 방식이 달라졌을 때, 이것은 그럴 수밖에 없는 미래인데, 어떤 결과가 따라올는지 어느 정도 예측할 수는 있다. 물론 이런 생물학적인 연구와 발전에 대해서는 신학적인 검증을 끊임없이 내려야 하겠지만, 우리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인간의 현실과 미래를 예측하고 분석하고 비판하고, 때로는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어쨌든지 이제 인간의 성 현실을 좀더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인간의 성 현상이 반드시 후손 번식과 연결되어 있는지에 대해서, 혹은 거의 후손 번식과만 연결되어 있는 동물의 성 작용과 어느 정도의 유사성이나 차별성이 있는지 약간의 검토가 필요할 것 같다. 왜냐하면 동물들의 성과 인간의 성이 근본적으로 동일하다는 사실이 확인된다면 성의 현실성도 역시 인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성, 동물의 성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인간과 동물의 성 현상은 다르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같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일단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개나 침팬지 같은 동물과 비슷한 성 현상을 보인다고 생각하는 것은 받아들이기가 상당히 거북스러울 것이다. 우선 무엇이 다를까?
가장 우선적으로 인간의 일부일처제를 들 수 있다. 인간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한 가정을 이루어 성을 교환하지만 동물은 그런 틀을 전혀 갖추고 있지 않다. 티브이의 ‘동물의 세계’같은 다큐멘터리를 보면 한 무리의 사자 집단에서 수컷끼리 거의 목숨을 걸고 싸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들 중에서 승리한 수컷이 모든 암컷을 성적인 대상으로 독점할 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 그러다가 이놈의 힘이 빠지면 다른 수컷이나 또는 자식들에게 도전을 받고 밀려난다. 침팬지들에게도 역시 그런 경쟁이 있다. 가장 힘이 강한 수컷이 모든 암컷을 독점한다. 이에 비해서 인간들은 매우 지성적으로 성을 나누는 것처럼 보인다. 각자가 짝을 찾아 결혼해서 평생 동안 일부일처로 살다가 죽는다. 그런데 인간들에게도 약간의 차이는 있다.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일부다처 제도가 어느 정도 공인되어 있으며, 티베트 어느 지역에는 다부일처 제도가 운영된다고 한다. 그렇지만 대개 문명사회에서는 그런 과정을 거쳐서 결국 일부일처 제도를 정착시켰다. 이런 점에서 동물의 성생활과 인간의 그것이 다른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다. 지금도 사회의 틀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일부일처 제도가 최선이라는 생각에서 이를 받아들이는 것뿐이지 이 방식이 만족스럽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소위 혼외정사라는 것은 아주 부도덕한 사람들이나 신앙이 없는 사람들이 하는 짓이지 건전한 양식과 신앙을 가진 사람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로마 가톨릭의 사제들에게서 발생하는 아동 성추행 사건들이나 교회 목회자들에게서 벌어지는 스캔들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수컷 침팬지가 암컷을 차지하기 위해서 목숨을 담보로 싸우는 것은 곧 후손을 보존하려는 본능적 욕망의 오랜 진화의 과정에서 정착된 현상인데, 이것이 인간에게는 윤리와 종교의 가르침으로 인해서 표면화하지 않았을 뿐이지 무의식의 세계에서는 근본적으로 사라진 것은 아니다.
또 하나의 차이점을 이렇게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동물들은 무조건 본능적으로 짝짓기를 하지만 인간에게는 먼저 정신적인 사랑이 중요한 기능을 한다는 점에서 일단 구별되기는 한다. 즉 동물들은 암컷이 발정기가 되기만 하면 상대가 어느 수컷이든 상관없이 짝짓기를 하는 것을 보면 그들의 성이 마음과 전혀 상관없이 거의 충동적으로만 작용하는 것 같은데 반해서 인간은 두 사람 사이에 마음의 교환이 먼저 일어나고 육체의 결합은 그 정서적 합일을 뒤따라가는 경향이 있다. 인간의 성에 정신이 작용하는 크기를 측량하기는 거의 불가능하지만 매우 중요한 요인이라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사랑 없이 돈으로 성을 산다거나 아니면 성폭력을 당하는 것을 인간은 매우 모욕적인 행위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좀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이런 문제를 접근하면 인간의 성행위에 정신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는 쉽지 않다. 지난날 서로 얼굴 한번 보지 못하고 결혼한 남녀 사이에도 성적 욕망이 작용했다는 사실, 또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동남아도 ‘섹스 여행’을 떠난다는 사실을 보면 인간도 동물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고대사회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홍등가가 없던 시대나 사회가 없었다는 것도 이에 대한 또 하나의 증거 자료이다. 아마 여성신학자들은 이에 대해서 크게 분노하거나 비판할 것이다. 그런 게 다 가부장적이고 여성 차별적인 시각에서 형성된 문화의 부패한 요소라고 말이다. 성을 상품화하는 행위가 비인간적이라는 지적에 대해서는 인정할 수 있지만, 그것의 원인이 곧 가부장적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인정하기 어렵다. 여성이 사회활동을 마음대로 하기 어려운 사회적 조건 때문에 대개 여성의 성을 상품화하는 사람들이 남성이었지만, 오늘 사회 활동의 영역이 넓어진 다음에는 여성들도 역시 남성의 성을 상품으로 여기는 경향이 늘어나고 있다. 이런 문제는 남자이기 때문이라거나 여성이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인간이기 때문에, 즉 동물과 비슷한 성적 욕망을 구성하고 있는 인간이기 때문에 벌어진다는 말이다. 프로이트의 심층심리학은 이런 담론에서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준다.  

리비도

프로이트가 인간을 분석하는 가장 핵심적인 개념이 ‘리비도’인데, 여성신학자들이 이것마저 가부장적 분석이라고 비판하면 할말은 없지만 아마 그렇게는 하지 않으리라고 본다. 프로이트는 인간이 겉으로 드러난 의식보다 속으로 숨어 있는 무의식에 훨씬 많이 지배받는다는 사실을 매우 논리적이고 실증적으로 분석함으로써 인간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켰다. 인간의 무의식에는 본인이 기억하지 못하는 어릴 때의 충격적 사건이 잠재되어 있다가 어떤 계기가 되면 의식의 세계로 분출됨으로써 그 사람의 정신과 행동을 지배한다. 예컨대 어떤 여자는 성인이 되었는데도 남자를 남자로 느끼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공격적인 반응을 보였으며, 그런 일이 반복되면서 잠도 못 자고, 불안해하면서 신경 쇠약에 걸려 결국 일상생활을 포기할 정도까지 되었다. 정신과 의사의 분석에 의하면 이 여자는 어렸을 때 성폭력을 당했든지, 아니면 아버지에게 심한 학대를 받음으로써 남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강하게 가졌고, 그것이 무의식에 내면화한 것이다.
그런데 프로이트에 의하면 인간의 무의식 일반에 가장 중심적인 성격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게 곧 성적 경향성인 ‘리비도’이다. 인간은 누구나 성적인 경향을 보인다는 이론인데, 동양적인 사유방식에서는 이런 정신 분석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구석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그의 분석은 상당히 일리가 있다. 아주 어렸을 때는 입에서 성적 욕망을 느끼고 약간 자라면 항문을 거쳐서 성인이 되면 성기로 바뀌는데, 그런 일련의 자극은 인간이 기본적으로 성적 경향성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 리비도를 설명하기 위해서 그 유명한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오이디푸스를 예로 든다. 테베스의 왕 라이우스와 요카스타 사이에 태어난 오이디푸스는 출생할 때 자기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아내로 삼게 될 것이라는 예언자의 예언 때문에 버려지는데, 우여곡절 끝에 살아나게 되고 어른이 된 다음 상대가 누구인지도 모른 상태에서 아버지 라이우스를 죽이고, 적의 아내를 빼앗는다는 그 당시 관습에 따라서 실제로는 어머니인 라이우스의 아내를 자기 아내로 삼는다. 나중에 자신의 행위를 알게 되자 스스로 눈을 빼버리고 장님이 되어 방랑하다가 죽는다는 신화가 바로 오이디푸스 이야기이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인간은 누구나 어릴 때부터 동성의 부모를 경쟁의 대상으로 여기는 반면에 이성의 부모에게 호의적 감정을 보이게 되는데, 남자아이는 어머니에게, 여자아이는 아버지에게 그런 느낌을 갖는다고 한다. 물론 아이들이 노골적으로 어머니나 아버지에게 성적 감정을 느낀다기보다는 자신도 모르는 무의식인 감정과 태도에 따라 움직인다는 뜻이다. 그러다 정상적으로 정신이 발달하게 되면 이제 보모와의 정신적 유대관계는 해소되고 다른 이성을 찾게 된다.
우리는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나 리비도 이론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지만 인간이 본질적으로 성적 경향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남자와 여자의 관계가 반드시 정신적 합일이 전제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얼마든지 상호간에 성적인 관계를 나눌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성의 문제는 도덕, 습관, 종교 이전에 오히려 본능적인 것이며, 또는 더 나아가서는 생물학적인 어떤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관능적인 기질이 지나치게 강한 사람은 한 상대에 만족하지 못하고 여러 상대를 찾아다니며, 또 일반적인 사람이라 하더라도 어떤 특별한 상황에 빠지게 되면 매우 관능적인 태도를 보이게 된다. 간혹 대학교 선생들이 조교나 학생들에게 성희롱이나 성추행을 한다거나 성적 모욕감을 주는 행동을 할 때가 있다는 사실이나, 미성년을 대상으로 원조 교제를 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평소에는 매우 인격적인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도 역시 인간에게 성적 경향성이 얼마나 강렬한가를 확인해준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일은 남성들에게서나 발생하지 여성들은 절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고 싶을지 모르겠지만 근본적으로는 남성이나 여성이나 하등의 차이가 있을 수 없다. 물론 여성들은 자기의 본능을 억제할 능력을 상대적으로 많이 갖고 있을 수도 있고, 문화적인 풍토가 그런 경향을 부분적으로 막아줄 수 있긴 하지만 현실적인 인간이라고 한다면 남자와 거의 똑같은 강도로 이런 경향성을 보인다. 전문적인 바람둥이가 가능한 이유는 여성들에게도 남성과 똑같은 성적 경향성이 있다는 사실에 대한 반증이다.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조바니’에 수 백 명의 여성을 후린 세기의 바람둥이가 나오는데, 그 친구는 뻔한 거짓말을 통해서 순식간에 여성들을 유혹하는 능력을 가졌다. 이것은 돈 조바니에게 특별한 매력이 있다기보다는 여성들에게 유혹 당할 수밖에 없는 성적 경향성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내가 여기서 강조하려는 바는 남성과 여성 사이에 일어나는 수많은 성적 문제와 스캔들을 합리화하자거나 또는 거꾸로 그런 사람들을 쓰레기 취급하자는 게 아니라 인간에게는 남성이나 여성이나 가리지 않고 성적 소질이 인간 현실로서 주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인간의 성적 현실을 전제하지 않은 채 인간에게 일어나는 이런 문제들을 판단하다보면 한쪽으로는 지나치게 도덕적 엄숙주의에 빠지고, 다른 한쪽으로는 육체 지상주의에 빠짐으로써 건강한 인간 이해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우선 전통적 기독교 신앙과 윤리와 연관된 도덕적 엄숙주의에 연관된 문제들을 검토하고, 이어서 육체 지상주의로 인해 벌어지는 성의 왜곡, 나아가서 인간 이해의 왜곡을 다루기로 하자.    

도덕적 엄숙주의

기독교 전통에서는 성이 주로 부정적인 관점에서 이해되었다. 반드시 출산의 목적을 위해서만 성을 사용한다는 소종파의 극단적 입장으로부터 성을 발설하기조차 꺼림칙하게 생각한 정통교회의 입장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교회는 성에 대해서 소극적이거나 방어적으로 생각했는데, 이런 태도를 가리켜 우리는 일종의 ‘도덕적 엄숙주의’라고 불러도 괜찮을 것 같다.
교회가 도덕적 엄숙주의에 기울어지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무엇보다도 성서가 성을 부정적으로 가르친다고 생각했다는 데에 있다. 구약성서가 성을 반드시 부정적인 이미지로 다루고 있지는 않지만 인간의 죄를 다룰 때 늘 성적 타락이 언급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런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나님이 심판하신 소돔과 고모라의 상황은 동성애와 근친상간이 극에 달한 것으로 묘사되고 있으며,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경계해야 할 가나안 원주민들의 삶도 역시 문란한 성생활로 묘사된다. 종교사학적인 연구에 의하면 가나안 원주민들이 섬기던 바알은 먹을거리와 성의 풍요를 약속하는 신이었다. 가나안 원주민들은 추수를 끝내고 떡과 술을 빚어 축제를 열었다. 이런 축제의 끝은 젊은이들이 자유롭게 성을 즐기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자신들의 젊은이들이 가나안 축제에 참가했다가 그들에게 물들 것을 염려해서 가나안 사람들과는 결혼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아예 상종하지도 못하게 했다. 구약에서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는 가르침은 단지 바알이라는 신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바알을 정점으로 하는 풍요와 성적 쾌락을 좇지 말라는 경고였다. 그러나 적지 않은 이스라엘 젊은이들이 가나안의 자유로운 성문화에 호기심을 보였으며, 실제로 그렇게 따라가기도 했다.
신약성서도 역시 이런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예수님 스스로는 이런 문제에 대해서 직접 언급하신 적이 없지만 주로 바울은 상당히 금욕적인 태도를 보였다. 헬라 철학에 영향을 받은 그 당시 로마의 여러 도시가 성적으로 매우 개방적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바울은 기독교 윤리를 이런 시대정신과 대치시켰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매우 임박한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결혼 같은 일상적인 일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성적 욕망 때문에 힘들어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결혼하는 게 좋겠다는 입장을 보였다는 걸 보면 그가 성과 결혼에 대해서 얼마나 소극적이었는가 하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일련의 가르침들이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성에 대해서 일종의 엄숙주의로 흐르게 하는 원인이기도 하지만, 원칙적인 면에서 보자면 성서는 이런 엄숙주의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 이유는 성서의 관심이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바르게 사는 것이지 윤리의 구체적인 행동 지침을 제시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한국의 설교 명망가들이 이런 도덕적 엄숙주의에 기초한 설교를 자주 한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뜻과 윤리적 규범 사이에 혼란을 겪고 있다는 의미이다. 성서가 제시하고 있는 윤리적 규범들은 그 당시에 필요로 했던 원리들이었을 뿐이지 그것이 곧 하나님의 계시 자체는 아니다. 예컨대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는 구약의 가르침은 그 당시 유대민족들의 생존 건강을 위한 최소한의 안정장치였으며, 바울의 동성애 비난도 역시 그 당시의 일반적인 윤리적 규범에 불과했다. 성서시대의 사람들이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하고 그런 규범에 따라서 살았다는 건 옳지만, 오늘 우리도 역시 그들과 똑같은 기준으로 살아야 할 필요는 없다. 더구나 성서를 이렇게 규범으로 단정하는 태도는 이미 예수님이 모세의 가르침을 새롭게 해석했듯이 새로운 삶의 지평에서 해석되어야 한다는 해석학적 근거에서도 잘못된 것이다. 이런 규범의 강화를 기독교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이데올로기에 성서를 도구적으로 이용하고 있을 뿐이다. 성 엄숙주의에서 적용되는 이데올로기는 영육이원론이다.

영육 이원론  

구약성서는 인간이 육체와 영으로 창조되었다는 진술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영과 육을 이원론적으로 나누지는 않는다. 영과 육이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다른 요소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그 두 요소가 결합됨으로써 온전한 인격체가 된다는 말이다. 이에 반해서 헬라 철학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영과 육을 이원론적으로 나누고 있다. 특히 ‘이데아’의 세계를 순수하고 절대적인 것으로 설정한 플라톤 철학은 이 세상의 물질은 이데아에 비해서 형편없이 초라하고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가르쳤다. 특히 이 철학의 한 분파이면서 초기 기독교 시대에 매우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영지주의는 훨씬 엄격하게 이원론적 세계관을 전파했는데, 물론 초기 기독교도 이런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영육 이원론을 조금 더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인간의 육체는 누가 보더라도 유한하며 제한적이기 때문에 여기에 모든 생명의 토대를 놓는다는 것은 옳지 않다. 우선 인간이 7,80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있을 뿐만 아니라 온갖 질병에 시달리고, 더구나 육체적 욕망으로 인해서 괴로워하며 인생을 보낸다는 점에서 그 육체의 한계를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구원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육체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은 곧 영원한 생명의 본질인 순수한 영혼의 존재가 된다는 말이다. 육체는 곧 시들고 썩지만 영혼은 그 어떤 조건에서도 약화되거나 죽지 않는 영원한 존재다.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젊은이들을 위험한 사상에 빠지게 했다는 죄명으로 아테네 원로 회의에 의해 독약을 받아놓고도 친구에게 빌려온 닭을 갚으라고 태연하게 유언할 수 있었던 것도 하루 빨리 영혼의 감옥인 육체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참된 구원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교부 시대와 중세기까지 기독교는 이런 헬라 철학의 영육 이원론에 영향을 받아서 몸의 구체적인 삶은 무시되고 대신 영적인 삶만이 중요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것의 가장 단적인 예가 ‘영혼 불멸설’이며, 우리 한국교회의 표현을 빌린다면 ‘영혼 구원’이다. 많은 설교자들도 인간이 죽는다고 하더라도 영혼은 죽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간다고 주장하며, 기독교인들은 그런 가르침에 위로를 받는다. 사실 우리가 단순하게 생각하면 우리의 영혼이 영원히 존재한다는 가르침은 신자들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만약 죽는 순간에 우리의 영혼까지 죽는다고 한다면 사람들이 얼마나 절망하겠는가? 헬라의 영혼 불멸설이 기독교 교리로 자리를 잡게 된 것은 일차적으로 이런 현실적이고 목회적인 요청 때문이었을 것이며, 또 하나의 근본적인 이유는 그런 영혼 불멸설이 근본적으로 성서의 가르침과 대치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수님께서 육체만 죽이고 영혼을 죽이지 못하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 모든 것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으며(마 10:28), 육체의 눈이 죄를 짓거든 그것을 빼어버리는 게 지옥에 가는 것보다 낫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마 5:29). 구약성서가 영혼 불멸설을 구체적으로 가르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을 완전히 부정한다고 볼 수도 없다.
그런데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인 부활과 이 영혼 불멸설은 상호 충돌하면서 동시에 상호 보완적이라는 사실을 생각해야만 한다. 위에서 말했듯이 영혼 불멸설은 유한한 육체와 달리 영혼의 영원성을 전제하는 가르침인데, 이에 반해 부활은 인간의 전적인 죽음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영혼 불멸설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인간이 죽음과 동시에 구원과 저주의 심판을 받는다는 것과, 마지막 종말까지의 간격이 있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른 주장이다. 앞의 주장은 영혼 불멸설을 전제하는 것이며, 후자의 주장은 그것을 배제하는 것이다. 우리의 주제와 연관해서 설명한다면 전자는 원래 인간의 육체와 영혼이 이원론적으로 구분되어 있기 때문에 죽음으로 인해서 그것이 각각 다른 길로 간다는 뜻이며, 후자는 인간의 몸과 영혼이 이원론적으로 구분되지 않기 때문에 죽음은 인간의 모든 것을 파괴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서로 상반되는 두 사상이 기독교 교리 안에 자리를 잡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를 한편으로 곤혹스럽게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기독교 사상의 유연한 역동성을 감지하게 한다. 즉 기독교는 주변의 다른 사상과의 대화를 전진적으로 열어감으로써 기독교 사상을 풍요롭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영혼 불멸설과 부활론이 아직은 완벽한 조화를 이루지 못한 상태이지만 언젠가는 좀 더 명확한 관계가 설정될 것으로 생각한다. 어쨌든지 기독교가 헬라 철학의 영혼 불멸설을 받아들인 것까지는 좋지만 이로 인해서 인간을 영육 이원론적 시각으로 해석하게 되었다는 점은 반성해야 할 부분이다. 더구나 영혼 불멸설로 인해서 부활론까지 이런 이원론적 구도에서 인식되고 있다는 점은 반드시 교정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영육 이원론은 기독교인의 일상생활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침으로써 육체에 속한 일을 부정적으로 보고, 순전히 영적인 일만 소중하게 보게 되었다. 특히 육체의 가장 원초적 내용이라 할 성을 수치스럽고 악한 것으로 여기는 풍조가 만연하게 되었다. 이에 대한 세세한 예를 들출 필요도 없이 우리에게 확연하게 드러나 있는 현상만 확인해도 이것은 분명하다. 사제의 동정과 수녀의 처녀성을 강조함으로써 성생활을 하는 일반 사람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는 것만 보아도 된다. 성직자와 평신도를 구별하는 잣대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곧 성이었다는 사실은 그 시대의 교회가 인간을 영육 이원론적 시각으로 보았다는 증거가 된다. 지이드의 <여자의 일생>은 이런 분위기를 가장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소설이다. 사촌 제롬을 사랑하게 된 여자 주인공은 그런 마음을 불순한 것으로 여기고 괴로워한다. 이 소녀는 자신의 영혼이 구원받기 위해서 이런 이성을 향한 사랑을 포기했으며, 결국 죽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지이드는 여기서 교회가 기독교인들에게 영육 이원론을 강요함으로써 결국 인간의 삶을 파괴한다는 사실을 비판하려는 것 같다. 사제가 독신인 로마 가톨릭에 비해서 목사가 결혼하는 개신교는 약간 다르다고 볼 수 있지만 근본적인 점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 영국의 청교도들은 물론이고 독일의 경건주의는 한결같이 금욕적인 엄숙주의를 그 특징으로 한다. 오죽 했으면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목사인 까닭으로 어린 시절 목사관에서 살았던 니체가 기독교인들을 ‘가축떼’ 에 비유했겠는가! 니체의 눈에 비친 기독교인들은 도덕적 엄숙주의에 빠져서 생명의 에너지를 발산하지 못하고 자신들을 학대하거나 또는 위선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교회가 이런 모욕적인 비판을 받을만한 처지로 떨어진 이유는 어디에 있겠는가? 이론적으로는 헬라철학의 한 분파인 영지주의의 영혼 불멸설을 받아들임으로써 결국 인간을 영육 이원론의 구도에서 접근했다는 데에 근원이 있긴 하겠지만, 훨씬 세속적이고 현실적인 이유가 개입되어 있다고 본다. 그것은 곧 니체의 ‘가축떼’ 논리가 암시하고 있듯이 교회 스스로의 권위를 확대하기 위해 사람들을 도구로 다루었다는 데 있다. 가축은 스스로 자유롭게 살아가지 못하고 주인의 계획에 의해서 철저하게 양육 당할 뿐이다. 이처럼 교회가 신자들을 가축처럼 여기고 그들을 양육할 방법으로 채택한 것이 곧 ‘죄의식’이며, 마침 영육 이원론에 의해서 제시되었던 육체의 죄인데, 이 육체의 죄는 결국 성 문제로 집중된다. 교회는 신자들이 죄의식에 사로잡히도록 세뇌시켰으며, 특히 성욕을 가장 근원적인 죄로 가르쳤다. 이런 가르침이 먹히기만 한다면 교회는 신자들을 마치 소 떼 다루듯이 다룰 수 있다. 인간은 아무리 노력해도 성욕을 제거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것을 죄라고 인식하기만 하면 교회 앞에서 자신을 철저하게 낮출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신앙심이 깊은 여성들은 미사를 드리기 위해 성당에 나가서 고해성사를 하면서 꿈으로 꾸었던 성행위를 고백했을 것이며, 이렇게 약점이 잡힌 신자들은 주인에게 우유를 바치는 암소처럼 교회를 위해서 모든 노력을 바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성적 수치심을 자극함으로써 교회의 권위를 내세우려는 행위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마녀재판이라 할 수 있다. 마스터스(R. Masters)에 의하면 마녀재판은 악마와의 육체적 관계를 자백 받는 대목에서 절정에 달했다고 한다.(Eros and Evil: The Sexual Pathology of Witchcraft, New York, Julian Press, 1962. 구미정, 이제는 생명의 노래를 불러라, 131에서 재인용). 마녀재판에서의 이런 자백은 십중팔구 재판관들이 원하는 대로 나왔을 것이다. 왜냐하면 정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남자이건 여자이건 상관없이 간혹 꿈에서 그런 경험을 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 재판을 진행하는 사람들이나 참관인들이나 가릴 것 없이 거기에 관계된 모든 사람들도 마녀와 똑같은 경험이 있다는 사실 때문에 수치심과 죄책감에 싸일 것이다. 겉으로 자백한 마녀가 화형 당하는 장면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은 한편으로 훨씬 심한 정신적 분열 현상을 일으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경험했을 것이다. 어쩌면 14-17세기에 유럽과 북아메리카에서 자행된 마녀재판은 인간의 무의식적 성 욕망, 또는 사디즘을 해소하는 배설장치였는지 모르겠다.  

몸의 신학

이제 여성신학은 몸, 여성, 성을 차별하는 정통신학에 메스를 가해서 여성들에게 참된 생명을 경험할 수 있도록 시도한다. 기독교 신앙이 인간의 생명을 왜곡시킨 이유가 곧 영육 이원론에 근거해서 인간의 몸을 하찮게 여겼다는 데 있다면,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영육 이원론의 성서적 지평과 조직신학적 지평, 그리고 현실적 문제점을 짚어내면 될 것이다. 성서와 조직신학적 지평의 문제는 이미 앞에서 충분하지는 않지만 부분적으로, 아니면 최소한 암시적으로 제시되었다고 보고 간단히 취급하겠다.
성서의 인간 이해가 과연 영육 이원론에 입각해있는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논의는 그렇게 간단히 해결될 수 없다. 성서를 부분적으로 보면 그런 흔적이 발견되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그것을 뛰어넘기 때문이다. 성서가 한 저자에 의해서 일관성을 갖고 저술된 게 아니라 매우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한 상황에 따라서 전승되고 진술된 것이기 때문에 인간에 대한 것도 역시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히브리 사상이 근본적으로 헬라의 영육 이원론과는 다른 지평에서 인간을 이해한다는 사실을 전제한다면 성서에서 육체와 성을 낮추어보는 증거를 찾는 일은 무모하다. 더구나 창조론에 의하면 인간의 몸이 바로 하나님의 거룩한 창조 사건이라는 점에서 이 몸과 연관된 현상을 성속 이원론의 구도에서 판단할 수는 없다. 물론 우리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육체의 한계를 우리가 인정하지만 비록 흙으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우리 몸의 현실성이 보존되리라는 희망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더구나 부활을 희망하는 기독교인들에게는 변화된 몸이 현실의 몸과 신비한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오늘의 몸이 구성하고 있는 삶을 중요하게 생각해야만 할 것이다.  
더구나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이 세계와 인간의 관계를 깊이 있게 통찰할 수 있다면 인간의 몸이 얼마나 신비한 세계를 담고 있는지 인식할 수 있다. 생물학적인 차원에서 인간의 몸은 우주론적인 의미를 확보한다. 태양, 달, 지구의 모든 구성요소들, 더 나아가 우주의 별빛에 이르는 전체 우주의 활동이 우리 몸을 유지시키고 있다는 말이다. 비록 개체로서의 우리의 몸은 바닷가의 모래 한 알처럼 보잘 것 없지만 그것은 분명히 우주와 직간접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매우 위대한 사건이다. 또한 우리 인간 몸의 유전 구조를 밝혀주고 있는 현대의 생명공학은 인간 몸이 단지 단백질 덩어리가 아니라 영적인 작용과 더불어 매우 심층적인 생명의 세계라는 사실을 밝혀주고 있다.
다른 한편, 오늘 우리가 생명의 세계와 연결되는 통로가 오직 우리의 몸밖에 없다는 이 사실을 감안한다면 오늘 우리의 몸은 우리가 세계와 생명을 인식하는 데 절대적인 역할을 한다.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몸을 통하지 않고서는 그 어떤 생명 현상도 인식할 수 없다는 말이다. 우리는 철저하게 시간과 공간의 구조 안에서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사실 안타깝지만 그것이 바로 인간의 숙명이기도 한데, 우리는 우리의 몸을 매개로 해서 신학적 사유의 실타래를 풀어갈 수밖에 없다. 간혹 설교자들이 순수한 심령적 세계로 묘사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몸의 부활’에서 알 수 있듯이 몸이 배제될 수 없는 나라이기 때문에 오늘 우리는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안고 있는 몸을 통하지 않고서는 그것 너머의 세계와 연결될 수도 없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영육 이원론에 근거해서 몸을 낮추어보는 정통 신학을 이제 새롭게 몸의 긍정이라는 구도 속에서 개혁하고 새롭게 해석해내려는 여성신학자들의 노력은 우리가 높이 평가해야 한다. 손승희는 이러한 여성신학의 과업을 두 가지로 제시한다. 하나는 몸을 자각케 하는 일이며, 다른 하나는 몸을 인식의 매체로 이해하는 일이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영육 이원론에 근거해서 인간을 해석한 정통신학은 인간의 몸을 낮추어 보았으며, 결과적으로 이런 몸의 속성에 치우쳐 있는 여성을 차별하였기 때문에 이제 몸을 정당하게 해석해내는 일은 여성을 인간답게 끌어올리는 단초로 작용한다. 특히 여성신학은 여성의 몸, 생명을 준비하는 달거리, 성적인 욕구를 수치로 생각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사유의 틀을 바꾸는 데 노력을 기울인다. 우리는 여성신학의 이런 해석이 정당하다고 인정한다. 비록 우리 몸이 죽음 이후에 자연 속으로 해체될 뿐만 아니라 어떤 점에서 살아있는 동안에도 몸의 충동으로 인해서 우리의 정신적 상태가 혼란스러워질 때가 있지만 몸을 부정하는 신학으로는 그 어떤 대답을 찾기 힘들다는 점에서 ‘몸의 신학’*을 발전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 해방신학에서도 매우 중요한 해석학적 토대로 자리 잡고 있는 ‘몸의 신학’은 전통적 ‘영의 신학’과 대치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물(物)은 ‘하늘, 땅, 신성, 사멸할 자’라는 사중자(Gevierte)가 회집하는 곳이라는 하이데거의 사상에서 우리는 몸 신학의 영감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 주제는 신학적으로 좀더 연구되어야 할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오랜 전 상영되었던 ‘시티 오브 엔젤스’라는 영화의 원제는 ‘베를린의 천사’였다고 하는데, 어쨌든 남자 천사 세스로 분한 니콜라스 케이지와 여의사 메기로 분한 맥 라이언의 명연기가 볼만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영화 앞 부분에서 세스가 메기에게 사과 맛이 어떤 줄 아는가, 하고 묻는다. 그러자 메기는 달콤하고 시큼하다는, 매우 단순한 대답을 한다. 이것은 세스가 기대한 대답이 아니었다. 겉으로 드러나는 맛보다는 맛의 본질을 향한 질문이었다. 이 영화는 결국 세스의 사랑에 의해서 메기가 원초적 삶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는 줄거리로 진행된다. 출퇴근, 수술, 의료분쟁 등, 기계처럼 돌아가는 현대인의 형해화(形骸化)한 삶에서 이제는 온몸으로 삶의 쾌감을 느끼며 살아가는 삶으로 바뀐 것이다.      

손승희는 몸을 신학적 인식의 매체로 간주하는 데서 여성신학의 독특성을 확보하고 있다. “여성해방적 관점이란 여성의 해방을 주장하고 그 해방에 자신을 투신하는 그런 입장에서 실재를 인식하려는 관점이다. 이런 의미에서 여성신학의 인식론은 니체나 맑스나 미셀 푸꼬와 같이 이성의 중립성이나 객관성을 인정하지 않으며, 오히려 지식의 상황적 편견 혹은 인식자의 이해관계를 인식의 조건으로 전제한다. 좀더 나아가서 여성신학의 인식론은 단순히 실재의 지각에서 인식행위를 끝내지 않고 그 실재 변혁까지도 포함한다고 볼 수 있다.”(여성신학의 이해, 117). 이 진술에는 여성신학의 두 가지 특징이 있다. 한 가지는 여성의 몸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다는 사실이며, 다른 한 가지는 그런 인식론에 근거해서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교정해나갈 수 있다는 사실이다. 구미정도 신학의 미래를 이런 몸의 경험에서 찾고 있다.

대안적인 미래를 그려보는 데에 신학이 가장 적합하다면, 우리는 새로운 신학적 출발점을 명백히 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바로, 신학이란 몸으로 하는 ‘옴살스러운(holistic)’ 행위임을 천명하는 것이다. 몸이 빠진(disembodied) 신학은 정직하지 못하다. ‘몸-자아(body-self)’로부터 몸을 떼어내도 자아가 충분히 자족적으로 살 수 있을 것처럼 이야기하는 사이비 영성신학은 잘못된 것이다. 애초에 기독교야말로 ‘몸의 종교’가 아닌가?(이제는 생명의 노래를 불러라, 143).

세부적으로 보면 여성신학자들 사이에도 이런 주장에 대한 반응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하지만 큰 틀에서 보면 이런 두 가지 특성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미 성차별적 구조 안에서 형성된 도그마를 여성들에게 그대로 적용하기보다는 오히려 여성의 관점에서, 특히 여성의 몸으로 하나님을 경험하고 인식해야 한다는 그 주장은 일단 옳다. 성서는 좀 다르지만, 기독교 교리는 주로 남성과 기득권층의 의식 구조에서 형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 교리는 아직 완료된 게 아니라 종말까지 꾸준히 변화되어야 하기 때문에 여성의 몸을 통해 제시된 새로운 인식론이 하나님의 리얼리티를 훨씬 심층적으로 드러낼 수 있다면 바람직한 일이다.
‘몸의 신학’은 다만 여성신학의 주제가 아니다. 인간의 몸을 부정한 정통신학과 다른 인식론적 토대를 지향하는 모든 경향에서 중심적 화두로 등장하고 있다. 물(物)과 몸을 새로운 기독교적 영성으로 해석해내려는 이런 신학은 앞에서 잠시 언급한 것처럼 창조와 부활의 신학에서 간과될 수 없는 이 세계성(Weltlichkeit)과의 연관 속에서 이미 정통신학의 범주 안에 그 확고한 자리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도덕 엄숙주의에 의한 생명의 왜곡을 극복하려는 ‘몸의 신학’이 또 하나의 극단인 ‘육체 지상주의’로 흘러들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어야 할 것이다. 이미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삶의 현장에는 인간의 몸이 천박한 자본주의와 결합되는 조짐들이 등장하고 있다. 몸을 부정하거나 학대하는 태도가 참된 생명을 파괴하듯이 몸을 절대화하거나 또는 상품화하는 태도 역시 참된 생명을 파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몸의 신학’이 육체 지상주의라는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결국 몸을 상하게 할 뿐만 아니라 또 다른 차원에서 몸을 추상화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말이다.

육체 지상주의

기독교 안에서 인간의 성이 차별되고 왜곡되는 이유가 주로 ‘도덕적 엄숙주의’에 있다는 점을 앞에서 지적했으며,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여성신학이 제시하고 있는 ‘몸의 신학’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그런데 이 문제는 정통 신학에 내면화한 영육 이원론을 극복한다고 해서 완전하게 해결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사물과 존재의 비밀이 아직 온전하게 드러나지 않은 이 중간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어떤 결정론적 대답을 찾는 방식이 아니라 역사의 과정에서 주어진 대답의 한계를 꾸준히 교정해 나가는 방식으로 종말론적 대답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도덕적 엄숙주의가 파생시킨 우리 삶의 왜곡 현상은 해방신학과 여성신학에 의해서 어느 정도 밝혀졌다고 보고, 이제는 반대로 이런 몸 중심의 신학이 몸을 절대화함으로써 빠지게 될지도 모를 또 하나의 오류를 예방적 차원에서 검증하려고 한다. 해방이라는 주제가 해방신학과 정통신학이 더불어 풀어가야 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서로의 차이를 확인할 수 있는 영역인 것처럼, 육체 지상주의로 인해서 벌어지는 문제는 여성신학과 정통신학이 더불어 풀어가야 할 것이면서도 동시에 서로의 차이를 확인할 수 있는 교차점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이 논의가 진행되면서 저절로 해명될 것이다.
과거에는 기독교가 몸과 성을 억압했기 때문에 인간의 삶이, 특히 여성의 삶이 왜곡되었다고 한다면, 삶의 현장에서 물러난 기독교를 대신해서 인간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자본주의가 인간의 몸과 성을 상품화함으로써 그것이 단지 소비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어느 쪽이 여성의 삶을 더 심각하게 파괴시키는가, 하는 판단은 사람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오늘의 현상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가장 전형적인 현상은 한국 사회에 거의 병적인 증상으로 나타나고 있는 ‘성형수술’이다. 선천적이거나 또는 후천적으로 심하게 어긋난 몸의 한 부분을 교정함으로써 가능한 대로 정상적인 삶을 회복시켜주는 의료기술이 이제는 자신의 외적인 아름다움을 극대화하려는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 젊은 여성들이 쌍꺼풀 수술을 하고, 날씬한 몸매를 갖기 위해 지방 흡입 수술을 받는다든지, 모두들 전형적인 서구 여인의 미적 수준에 맞추어 살아가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는 것은 몸 지상주의가 빚는 오류가 아닐까? 여성들이 자신의 몸에만 생명을 걸어두고 살아가게 된 이유는 여성 스스로에게 확고한 의식이 없는 탓이기도 하겠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생명을 오직 상품 논리로만 접근하려는 후기 자본주의가 쳐놓은 그물에 그녀들이 걸려든 탓이 크다.
물론 이런 성의 상품화 현상은 여성신학자들이 비판하고 있듯이 근본적으로 가부장주의에 의한 결과라고 볼 수 있기는 하다. 구미정의 다음과 같은 분석은 일리가 있다.

이 시대의 여성들은 일찍이 터득해버린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외모가 우선이어야 한다는 것, 또한 그 외모는 이제 얼굴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몸매까지 포함한다는 것을. 그래서 시몬느 드 보부아르의 유명한 명제,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는 여전히 유효하다. 오늘날 여성들이 생존을 위해 자발적으로 몸매 만들기에 헌신하도록 유도하는, 그럼으로써 역설적이게도 자기 몸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게 만드는 외모 지상주의는 결국 상업주의와 낡은 남성중심주의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위의 책, 116,117).

가부장적 질서로 인해서 억압되었던 몸, 여성, 성의 해방이 ‘섹스어필’을 위한 외모 지상주의에서 실현되는 게 아니라면 어디서, 어떻게 가능한가? 가부장적 엄숙주의를 철폐하고 아프로디테의 에로티시즘을 삶의 중심으로 끌어들이려는 여성신학이 제시하는 참된 몸과 성의 해방은 어디에 있는가? 이 질문은 근본적으로 이렇게 다시 정리되어야 한다. 성이 가부장적 질서에 의해서 억압당하지 않으면서도 상품으로 도구화하지 않는 상태라는 것이 이 땅의 질서에서 실현될 수 있을까?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여성신학의 딜레마를, 또는 여성신학이 풀기 힘든 숙제를 확인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몸과 성은 가부장적이고 성차별적인 사회구조로 인해서 억압당하지 말아야 하지만 동시에 그런 가부장적 구조가 해결된다고 해서 그것이 왜곡되지 말라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일상을 예로 들어보자. 이혼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옛날 사람들에 비해서 오늘의 여성들은 매우 간단히 이혼한다. 어떤 점에서 여성의 경제력이 확보되고 여권에 대한 의식이 강해졌다는 증거인 이 이혼율의 증가가 여성 해방을 반드시 담보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결혼을 숙명으로 여기고 그 어떤 상황에서도 이혼하지 않고 살았던 옛날의 삶을 그대로 유지하자는 말은 결코 아니라 어떤 사회적 억압 구조를 바꾼다고 해서 인간의 역동적 삶이 기계적으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지적한 것뿐이다.
이 말은 곧 기독교는 이 세상의 진정한 변혁, 혁명, 해방은 사회과학적인 방식으로가 아니라 신학적으로 가능하다고 믿는다는 의미이다. 물론 사회과학과 신학이 근본적으로 다르거나, 또는 적대적이라는 뜻도 아니다. 오히려 사회과학적 통찰로부터 하나님이 지으신 이 세계와 하나님이 이끌어 가시는 이 역사를 배워야하고, 더 나아가서 어떤 구체적인 대안까지 제시할 수 있는 준비를 해야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여전히 계시론적이고, 종말론적인 전망에 자리를 잡아야 한다는 뜻이다.    

성의 현실성- 물의 영성화

우리는 지금까지 남성과 여성으로 구성된 인간 문제를 성의 계급(투쟁)적 관점으로 접근하는 여성신학의 주장을 좀 더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인간의 성 현상을 검토했다. 어떤 관점으로 접근하든지 핵심은 왜곡되고 억압된 성의 해방에 있는 셈이다. 필자의 생각에 따르면 성의 억압이나 성의 이상화가 아닌 ‘성의 현실성’ 확보가 바로 인간의 몸과 성을 바르게 이해함으로써 결국 성차별적 질서를 극복해나가는 길의 시작이다. 지난날 영육 이원론과 가부장적 질서에 의해서 몸과 성이 억압되었다면 오늘날 이것의 이상화로 인해서 몸과 성이 도구화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성의 리얼리티 확보하는 길밖에 없다는 말이다. 이것은 곧 몸과 성의 속성인 물(物)의 영성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영성화를 또 다시 물과 이원론적으로 구분되는 영의 세계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영은 기본적으로 생명의 힘이기 때문에 영성화라는 말은 사물을 생명 지향적으로 끌어낸다는 뜻이다. 과거의 성차별이나 성 억압은 인간의 생명을 파괴하는 쪽으로 기능했으며, 동시에 성을 상품으로 만든 오늘의 성문화도 역시 인간의 생명을 왜곡시키는 쪽으로 기능했기 때문에 양자 모두 영적이지 못하다고 보아야 한다.
이제 우리는 인간의 성을 영적인 차원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길에 대해서 질문해야만 한다. 소위 말하는 ‘성개방’이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을까? 부부들이 파트너를 바꾸는 ‘스와핑’이나, 성적 쾌감을 높이기 위한 포르노나 코카인 같은 약물 사용이 우리의 성을 해방시키는 것일까? 그런 도구들이 우리에게 성적인 자극을 주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으로 인해 우리의 내면적 만족감까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성의 문제에서 정신적인 차원까지 끌고 들어올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긴 하겠지만 아무리 몸의 쾌감이라고 하더라도 결국은 그것이 정신적인 만족감까지 제공해야만 생명 지향적인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몸의 쾌감이라는 것도 어떤 절대적인 기준에 도달해야만 주어진다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에 따라서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진수성찬이 놓여 있어야만 밥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사람보다는 된장국과 김치만 놓고도 얼마든지 맛있게 밥을 먹을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먹는 쾌감을 훨씬 깊이 안다고 말할 수 있다. 성을 단지 욕망의 차원에서만 접근한다면 끝없이 새로운 대상과 새로운 자극을 찾는 일만 하다가 인생을 끝낼 수밖에 없지만, 생명의 신비를 아는 사람이라면 된장국 하나만 놓고도 맛있게 밥을 먹을 수 있듯이 성을 그렇게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성을 생명의 신비 안에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성의 영성화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 기독교 신앙은 이 세상의 모든 사물과 사건을 이런 생명의 신비라는 차원에서 해석하고 참여하는 삶의 태도라 할 수 있다. 기독교의 창조론에 의하면 물은 단순히 정적인 상태의 어떤 것이라기보다는 영으로 존재하는 하나님이 개입하는 동적인 어떤 것이다. 이 세계가 끊임없이 진화하고 변한다는 점에서도 물은 폐쇄된 기계가 아니라 미래를 향해서 열려진 생명임이 분명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의 영성을 포착한다는 것은 단지 종교적 수사로서만이 아니라 진리의 토대와 연결된 작업이다. 이런 작업을 위해서 신학은 성서와 기독교 역사와 세계와 그 세계의 미래를 어떻게 인식하고 해석했는지 그 담론의 중심을 놓치지 말아야 하면, 동시에 오늘의 생물학이나 물리학, 그리고 전반적인 인문학과 보편적 대화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신학 주변에 있는 이런 학문과의 열린 대화를 통해서 물과 영이 얼마나 신비하게 결합되어 있는지 밝혀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묻는다. 인간은 왜 남성과 여성인가? 지구에는 왜 성(性)이 있는가? 이에 대한 나의 대답은 이렇다. 우리의 몸과 성이야말로 생명의 본질에 속하는 구성 요소로서 하나님의 궁극적인 생명이 완성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전혀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81 조직신학 20장. 종말과 역사 2005-11-23 9255
80 조직신학 19장 성서에 대해 [4] 2005-11-16 7766
79 조직신학 18장: 진아(眞我)를 찾아서 (11월10일) [3] 2005-11-06 7101
78 조직신학 17장: 교회란 무엇인가? [5] 2005-10-19 7887
77 조직신학 16장: 성령에 대해 2005-10-12 7307
76 조직신학 15장: 기독교 영성 [3] 2005-10-03 6223
75 조직신학 14장: 신앙론 [2] 2005-09-28 6350
74 조직신학 13장: 칭의와 성화 [7] 2005-09-22 8956
73 조직신학 12장: 은총론 2005-09-14 5858
72 조직신학 11장: 죄에 대해 [1] 2005-09-04 8105
71 조직신학 조직신학(2) 강의안내 2005-08-31 6712
70 조직신학 10장: 인간에 대한 물음 2005-05-25 6160
69 여성신학 12장: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에 관한 신학적 고찰 2005-05-23 5864
68 여성신학 11장 바울의 동성애 비난에 대해서 [4] 2005-05-23 7978
67 조직신학 9장: 하나님과 창조 [2] 2005-05-18 6683
66 여성신학 10장. 여성은 베일을 써야하는가? 2005-05-17 4510
65 조직신학 8장: 삼위일체에 관해서 [3] 2005-04-27 6895
» 여성신학 9장: 인간은 왜 남성과 여성인가? 2005-04-25 4276
63 조직신학 7장: 유신론과 무신론 2005-04-20 5573
62 여성신학 8장: 여성신학과 기독교 인간론 2005-04-19 5031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