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장. 여성은 베일을 써야하는가?

여성신학 조회 수 4510 추천 수 81 2005.05.17 18:35:35
10장
여성은 베일을 써야 하는가?
-사도 바울을 변호한다-

여러분이 늘 나를 기억하고 내가 전해 준 전통을 그대로 지키고 있으니 정말 잘한 일입니다. 모든 사람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아내의 머리는 남편이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알아두시기 바랍니다. 남자가 기도를 하거나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서 전할 때에 머리에 무엇을 쓰면 그것은 자기 머리, 곧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자가 기도를 하거나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서 전할 때에 머리에 무엇을 쓰지 않으면 그것은 자기 머리, 곧 자기 남편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머리를 민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만일 여자가 머리에 아무 것도 쓰지 않아도 된다면 머리를 깎아 버려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머리를 깎거나 미는 것이 여자에게는 부끄러운 일이니 무엇으로든지 머리를 가리십시오. 남자는 하느님의 모습과 영광을 지니고 있으니 머리를 가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여자는 남자의 영광을 지니고 있을 뿐입니다. 여자에게서 남자가 창조된 것이 아니라 남자에게서 여자가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천사들이 보고 있으니 여자는 자기가 남편의 권위를 인정하는 표시로 머리를 가려야 합니다. 주님을 믿는 세계에서는 여자나 남자나 다 같이 상대방에게 서로 속해 있습니다. 그것은 여자가 남자에게서 창조되었지만 남자는 여자의 몸에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다 하느님께로부터 왔습니다. 여자가 머리를 가리지 않은 채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 여러분은 잘 생각해 보십시오. 자연 그 자체가 가르쳐 주는 대로 남자가 머리를 길게 기르면 수치가 되지만 여자의 긴 머리는 오히려 자랑이 되지 않습니까? 여자의 긴 머리카락은 그 머리를 가려 주는 구실을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딴소리를 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나 그런 풍습은 우리에게도 하느님의 교회에도 없습니다. (고전 11:2-16).

차도르의 정체
우리는 바울이 이 본문에서 여자에 대한 어떤 선입관을 갖고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의심할 수 있다. 아내의 머리가 남편이라는 주장은 아무리 선의로 받아들인다고 해도 여자에 대한 성차별적 해석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따라잡기 힘든 영성에 대한 깊은 체험이 있는 바울이 이런 인간적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일까? 우리는 일단 성서 기자들이 인간 삶의 모든 부분에 대해 정확하게 통찰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전제해야만 한다. 흡사 모차르트가 음악의 세계에서만 천재였지 사회과학이나 문학에서는 별로 뛰어나지 못한 것과 같다. 바울이 그 당시 성차별적 여성관을 완전하게 극복할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그가 해명하고 있는 신앙의 세계가 설득력을 잃는 것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신앙은 그 시대의 풍습과 가치관에 지배받는 게 아니라 그런 요소들이 의존해야 할 어떤 절대적인 세계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자들이 머리를 가려야 한다는 그 시대의 풍습을 바울이 왜 그대로 수용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서 신학적이고 인문학적인 차원에서 논의하는 것이 바울의 진술 자체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보다 훨씬 바람직할 뿐만 아니라 훨씬 본질적인 접근이다.
바울이 고린도에 편지를 쓰던 그 당시의 고린도에서 여성들이 베일을 쓰고 다녔다는 사실, 그리고 이슬람 문화권에서 살아가는 여자들이 지금도 여전히 차도르를 걸치고 다닌다는 사실, 우리의 경우에도 그렇게 먼 옛날로 올라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양반집 규수들이 머리로부터 허리까지 내려오는 천을 뒤집어쓰고 외출했다는 사실은 무언가 비슷한 배경을 전제한다. 물론 오늘 우리의 기준으로만 본다면 그런 모습들이 우스꽝스럽거나 또는 여성 차별적인 풍경이라고 여겨질지 모르지만 인간의 문화라는 게 단지 그런 방식으로 처리될 수 없다는 점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좀 극단적인 예를 하나 들어보자. 우리나라에도 옛날에는 고려장 제도가 있었다고 한다. 일정한 정도의 나이가 되면 자식들이 부모를 깊은 산속에 유기하는 풍습이었다. 아직 살아있는 부모를 그런 식으로 처리한다는 건 도저히 용납할 수 있는 행동이라고 단죄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들이 왜 그런 방식으로 노인들을 처리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약간만 깊이 생각한다면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다. 아마 그들은 살아있는 사람의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노인들을 고려장으로 처리하는 게 어린생명을 구하는 첩경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린이와 노인 중에서 한쪽을 선택해야 한다면 미래를 위해서 마땅히 어린이를 살려야 할 것이다. 지금도 유목생활을 하는 몽고의 어느 소수 민족은 죽은 때가 임박한 노인을 며칠 동안의 먹을거리만 주고 광야에 남겨둔 채 다른 곳으로 떠난다고 한다. 다시 돌아왔을 때 살아있으면 먹을거리를 주고 죽었으면 장례를 치른다고 한다. 끔찍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들은 그런 방식이 아니면 생존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것을 선택했을 뿐이다. 노인을 살리다가 종족이 멸절하는 것보다는 고려장이 종족의 생존*을 위해서는 훨씬 바람직한 선택이었다는 말이다.
암 사마귀는 짝짓기를 끝낸 다음에 자신의 몸속에서 자라게 될 새로운 생명체의 영양 공급을 위해서 수사마귀를 잡아먹는다. 왜 그들이 그런 방식으로 후손을 번식시킬 수밖에 없는지 우리의 입장에서는 아무 것도 할말이 없고, 다만 적자생존의 진화론적 원리에 따라서 그런 끔찍한 방식을 선택했을 것이라는 추측만 가능하다. 기본적으로는 인간도 여기에 예외가 아니다. 모든 종족들은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 따라서 생존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을 찾아서 진화, 발전해왔다. 이런 점에서 인간의 윤리도 유대인들이 돼지고기를 불결한 먹을거리로 생각했던 것처럼 이런 생존의 과정에서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행동을 가치론적으로 합리화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이런 논리가 극단화하면 게르만 민족의 탁월한 혈통을 만들어가기 위해서 지체장애인, 동성애자 같은 사람들을 거세하려 했던 히틀러의 계획도 나름으로 정당성을 주장하게 된다. 여기서 내가 말하려는 요지는 한 종족, 그 문명에 자리하고 있는 삶의 모습*들을 판단할 때는 최대한으로 복합적인 관점을 충분하게 검토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고려장처럼 끔찍한 풍습도 역시 그 시대의 사람들이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던 특별한 생존조건을 염두에 두지 않는 한 무조건적으로 매도되고 말 것이다.

*서로 다른 문명이 근본에 대한 이해 없이 그 차이를 적대적으로 접근하게 될 때 벌어지는 문제점을 명확하게 정리하기 위해서 여기서 한 가지 예를 더 들자. 티베트 승려들은 화장(火葬)하는 한국의 승려와 달리 지금도 조장(鳥葬) 풍습을 지키고 있다. 죽은 승려의 몸을 토막 내어 독수리들이 먹을 수 있게 하는 이 조장이 우리 눈에 낯설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건 다만 풍습의 차이에 불과하지 문명의 높고 낮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죽은 사람을 불에 태워 보내거나 아니면 땅에 묻거나 새들의 먹이가 되게 하거나 차이는 하나도 없다. 땅속에 묻는 방식이 우리의 눈에 익숙하기는 하지만 땅속에 묻혀도 결국 땅속 벌레나 박테리아가 뜯어먹는다는 점에서는 새들을 통해서 해결하는 조장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러나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고려장이나 여성의 베일 의무를 바람직한 풍습이라는 의미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다. 우리가 과거의 풍습을 비판할 때는 거기에 담긴 역사적 배경을 충분하게 고려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지적하려는 것이었다. 특히 성서의 전통에 대한 비판은 훨씬 심사숙고해야만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에 우리는 성서의 존재론적 계시능력을 훼손하게 될 뿐이지 결코 바람직한 결과를 도출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에는 여성에게 베일을 쓰라고 권면한 바울의 가르침도 포함된다. 과연 그는 여성신학자들에게 비난받아 마땅한 여성 차별적인 사람이었을까? 그렇지 않다면 무슨 이유에서 그렇지 않은가?
우선 이 문제의 성격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 성서 자체보다는 현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이슬람 사회의 특수한 형태에 대한 고찰로부터 시작하려고 한다. 그것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일부다처제이며 다른 하나는 차도로 착용이다. 즉 “한 손에 코란을 다른 손에 칼을!”이라는 구호를 마음에 새기며 세력을 확장해야만 했던 이슬람교도들이 처한 삶의 자리를 약간만 들여다보면 이들의 괴팍한 풍습을 이해할 수 있다. 이들은 늘 죽이느냐, 죽느냐(소위 제로섬 게임) 하는 생존의 경계선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그들의 윤리도 역시 이런 생존이라는 한계 상황 속에서 자리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 전쟁으로 인해 과부들이 늘게 되고, 그게 사회 문제로 대두되니까 일부다처제를 통해서라도 이 문제를 해결했던 것과 같다. 여성의 입장에서 볼 때 일부다처제를 받아들이는 것과 그냥 청상과부로 사는 것 중에서 어떤 게 바람직할까? 물론 이런 일부다처제가 전쟁이 없는 시대에도 여전히 악용되는 경우가 있다는 점에서 늘 정당한 것은 아니지만 그 제도가 출현하게 된 동기에서 보면 그런 대로 이해될만한 부분이 있다는 뜻이다.
우리가 어떤 사태의 근본으로 들어가려면, 특히 우리가 지금 논의하고 있는 성, 가족윤리에 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려면 지난 9장 “인간은 왜 남성과 여성인가?”에서도 한번 지적한 것이지만, 일부일처제가 만고불변의 절대적 규범이라는 생각을 일단 접어두어야 한다. 고대사회는 일부다처가 일반적인 결혼제도였으며, 지금도 티베트의 어느 종족이나 몰몬교도들은 일부다처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으며, 거꾸로 몽고의 어느 종족은 일처다부 제도를 유지하고 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자신과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적대시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슬람교도들의 일부다처제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많은 여성학자들이 차도르를 여성학대의 상징처럼 간주하는 것 같다. 무더운 여름에도 겨우 눈만 보일 정도로 차도르를 뒤집어쓴다는 것은 이 문명 시대에 야만적인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파리의 패션모델의 복장만 여성의 여성다움을 살린다는 주장도 옳지 못하다. 여성의 몸을 상품화하는 그런 방식의 패션 문화를 기준으로 이슬람의 차도르를 비난한다는 것이야말로 미몽의 전형적인 태도이다. 해방 이후 얼마 동안도 한국의 젊은 여대생들은 흰 저고리에 검은 치마를 입고 다녔다. 지금도 북한의 젊은 여성들과 일본의 조총련 계열 중고등학교 학생들은 그런 복장을 한다는데, 내가 보기에 조선의 미를 마음껏 발산하는 복장이 바로 그런 흰 저고리에 검은 치마가 아닐까 한다. 오늘 세계에서 한국 사람만큼 복장의 중심을 잃은 민족도 없을 것이다. 말이 약간 옆으로 빗나갔지만, 이슬람 여성들의 차도르를 단지 서양의 시각으로 성차별 문화라고 비난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사실을 지적하려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런 방식으로 자신들의 민족을 지켰으며, 이런 점에서 너무 비약이 심한지 모르지만 차도르도 역시 그들 여성들을 보호하는 하나의 방식이었을지 모른다. 전쟁을 일상처럼 치르던 그들의 세계에서는 여성을 차도르로 감추는 것만이 그들을 성폭력으로부터 보호하는 유일한 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다.

전쟁의 원초적 폭력성
전쟁 중 가장 피해를 많이 보는 대상은 직접 전투에 참여하는 군인들보다는 오히려 부녀자들이라고 한다. 물론 전쟁의 성격에 따라서 그 결과는 다르겠지만 어떤 전쟁이라고 하더라도 민간인, 그 중에서도 여자들의 희생은 우리의 예상을 훨씬 웃돈다. 그 이유는 우선 전투라는 것이 직접 상대방과의 접촉에서만 벌어지는 게 아니라 한 지역 전체가 이런 전투에 휩쓸리게 됨으로써 그 지역에 있는 민간인들이 피해를 당하지 않을 수 없다는 데에 있다. 그런데 이 피해라는 것이 직접 전투와 연관된 것만이 아니라 전쟁이라는 상황이 몰고 오는 인간의 심리작용과 밀접하게 연관된 것이 적지 않다. 스포츠나 취미생활이 아니라 자기 생명을 담보하는 전쟁에 가담하게 되면 사람들은 평소와 다른 행태를 보이게 된다. 개인의 도덕심이나 사회 윤리적 가치관은 거의 실종되고 자기의 생존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행동을 할 수밖에 없다. 이로 인해서 결국 전쟁 중에 많은 여성들이 성폭력을 당하게 된다. 월남 전쟁에 참가한 우리 군인들이 전쟁과 별로 상관없는 베트남 여성들에게 가한 성폭력은 잘 알려진 바 있는데, 이런 현상은 모든 전쟁에서 벌어지는 일상적인 것이다.
왜 인간은 전쟁이라는 극한상황에 빠져들면 그렇게 비인간적이고 폭력적으로 변하는 것일까? 특히 직접 전투와 상관없는 여성들에게 폭력적인 태도를 보이는 원인은 무엇일까? 이에 대한 전쟁 심리학이 무언가를 말하고 있긴 하겠지만, 나는 그런 분석과 별개로 두 가지 원인만 상식적인 차원에서 제시하려고 한다.
첫째, 전쟁은 인간의 원초적 심리를 자극하는 가장 강렬한 사건이다. 생명을 담보하고 벌이는 이런 경쟁에 휩쓸림으로써 평소에 묻혀 있던 원초적 에너지가 발산된다. 만약 그런 원초적 에너지가 발산되지 않는다면 전쟁을 수행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 원초적 에너지에는 성적인 욕구도 포함된다. 물론 전투가 벌어지는 순간에는 그런 욕구가 발동하기 어렵지만 이미 원초적 심리가 작동한 상태이기 때문에 그런 전투 순간이 약간만 지나게 되면 성적 욕구가 자기도 모르게 흘러넘치게 된다. 우리는 평범한 가장이 일정한 기간 집을 떠나 있을 때 외도하는 일들이 많다는 사실에서 이와 비슷한 현상을 확인할 수 있다. 평소에 가족과 사회공동체의 윤리에 묶여 있다가 그 공동체를 떠남으로써 그런 윤리의식이 해체되는 것이다.
둘째, 앞의 경우와 연관되는 부분인데, 전쟁은 인간에게 죽음을 아주 가깝게 느끼게 함으로써 어떤 점에서 생명의 연장이라 할 성적 욕구를 강하게 느끼게 만든다. 바로 한 시간 후에, 또는 내일 죽을지 모른다면 절박한 상황 가운데서 무의식적으로 그런 욕망이 작동될 수 있다는 말이다. 물론 죽음의 위협을 느끼는 순간에는 성적 욕망이 극도로 억압되겠지만 전쟁의 과정에서 죽음의 위기가 일상으로 자리를 잡게 되면 평시보다 훨씬 강렬한 성적 욕망을 갖게 될 것이다.
인간의 성적 욕망이 가장 폭력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그 전쟁 상황에서 여성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이슬람 사회가 선택한 풍습이 바로 차도르 착용이라고 할 수 있다. 차도르 착용이 모든 성폭력으로부터 여성들을 보호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상당한 효과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아마 어떤 사람들은, 주로 극단적인 페미니스트들이겠지만, 그런 야만적인 방식으로 여성을 보호하겠다는 그 발상 자체를 문제 삼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전쟁 상황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차도르를 착용하게 한다는 것은 성차별적 억압임에 틀림없다. 문제를 일으키는 쪽은 남자인데 그 문제 해결을 여성에게서 찾으려는 것 자체가 성차별이 아닌가, 하는 반론도 역시 옳다. 그렇지만 우리는 지금 정상적인 사회윤리가 작동되지 않는 전쟁이라는 상황을 전제하고 이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 차도르 착용이 자리를 잡을 수밖에 없었던 그런 상황 말이다. 물론 그런 특별한 상황과 그런 특별한 시대의 필요에 따라서 등장한 비정상적 풍습을 일상에까지 그대로 적용시키는 것은 근본적으로 잘못이다. 다만 우리는 성폭력은 엄연한 현실이며, 그것이 여성의 복장과 어떤 관련성이 있는지에 대해서만 보충적으로 설명해보려고 한다. 왜냐하면 성폭력이라는 현실을 인정해야만 그런 행위의 피해자인 여성들을 보호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이 제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거론하기 전에 노파심으로 한 가지 점만 더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자. 우리가 여기서 여성의 복장과 노출 문제를 다룬다고 해서 사회 문제의 뿌리가 여성에게 있다거나 여성들을 도구적인 대상으로 취급하려는 음모가 있는 것은 아니다. 남성이 여성을 향해 행사하는 여러 종류의 폭력이 단지 가부장적 의식에 근거한 여성차별에만 기인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런 제도와 풍습 이전에 (성)폭력의 심리구조가 작동되는 상호연관성을 주의 깊이 들여다보자는 것이다.

노출미학에 대해
우선 내가 담임 목사로 시무하던 현풍제일교회 소식지에 실렸던 나의 짧은 칼럼 한편을 여기에 다시 인용하겠다. 이 칼럼이 오늘 우리의 생각을 전개하는데 약간의 도움을 줄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최근 몇 년 동안 일부 젊은 여성들이 배꼽을 드러낸 티셔츠를 입고 다녔다고 해서 단속 대상이니, 아니니 하는 의견이 분분했던 적이 있다. 그런 여성들을 직접 보진 못했지만 모습을 그려보면 재미있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해괴하게 여겨진다.
배꼽은 태아가 어머니 뱃속에 있는 동안 생명의 영양소를 공급받던 탯줄을 출생 시 의사가 잘라낸 흔적이다. 인간이 세상에서 제일 처음으로 칼 맛을 보는 자리이다. 두 주일 동안 배꼽의 상처를 잘 아물게 해야지 자칫 파상풍이라도 걸리는 날이면 심한 고생을 하게 된다. 요즘 태어나는 아이들이야 모두 옴폭하게 생긴 예쁜 배꼽을 갖고 있지만 내가 어릴 적만 하더라도 어떤 아이들의 배꼽은 툭 불거져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곤 했다.
자신의 배꼽을, 경우에 따라서는 세로로 찢어진 모양으로 성형수술을 해서까지 예쁜(?) 배꼽을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어 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그 이유를 사회심리학적으로 탐색해볼 만도 하지만, 이 자리에서 배꼽 노출에만 한정해서 생각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배꼽 티만이 아니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현대 여성들의 패션이 노출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배꼽 티도 기본적으로는 아름다움을 찾아보려는 미학적 심리일반이기 때문이다.
분명히 노출미학(美學)은 존재하다. 위대한 화가들이 나체를, 주로 여성을 대상으로 했는데, 그렸다는 것은 가려지지 않은 몸의 아름다움을 전제한다. 실제로 우리와 같은 비전문가들에게도 그런 그림들은 정서를 풍성하게 만들어 준다. 또는 바이올린이나 피아노 독주회에서 여성 연주자가 앞가슴과 등이 훤히 내다보일 정도로 노출이 심한 연주복을 입고 있어도 그렇게 야하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연주회장이라는 특수한 상황 가운데서는 음악과 노출이 우리를 보다 승화된 정신과 예술세계로 이끌어주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여기서는 어떤 특별한 상황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의 노출을 말하고 있다. 우선 단도직입적으로 질문해보자. 어느 정도의 노출이 아름답게 보일까? 아름다움의 기준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엄청나게 다르기 때문에 노출의 한계에 대한 대답을 찾는 일보다 어리석은 것은 없다. 예컨대 아프리카 원주민들의 경우에 모든 여성들이 젖가슴을 드러내 놓고 살아가지만 아무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반면에 50년 전만 하더라도 우리의 여성들은 대개 전신을 가리는 한복을 입었다. 여대생들도 검은 치마에 흰 저고리를 입었고, 신여성이라는 이름이 붙은 여자들도 역시 무릎 밑을 한참이나 내려가는 양장을 입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가능한 대로 노출을 많이 해야만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따라서 노출의 절대적 기준을 찾는 헛수고보다는 오히려 여성 옷차림의 아름다움 자체에 대한 질문이 더 요긴하다. 아름다운 여성이란 그 나이와 사회적 위치와 장소에 따라 적합한 복장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한다. 스무 살 안팎의 젊은 여성들이 아주 짧은치마를 나부끼며 대도시의 번화가를 활보하는 모습은 나름대로 도시의 활기와 잘 어울린다. 그러나 마흔 살 전후의 여성들이 스무 살 여성들처럼 달랑 들어올려진 치마를 입고 다닌다면 아름답다고 생각되기보다는 격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될 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약간 방향을 바꾸어 이 문제에 접근해보자. 얼마 전 신문 해외 토픽 란에 클린턴 대통령의 부인 힐러리 여사의 앉은 모습이 실렸다. 짧은치마를 입어서 그랬는지 다리 사이로 팬티가 보이게 찍혔다. 그 사진을 브라질의 속옷 회사에서 광고용으로 내보냈다. 이렇듯 짧은치마는 행동거지를 매우 불편하게 함에도 불구하고 굳이 나이든 여성들이 그런 복장을 하고 다니는 이유는 여성들의 노출 심리일반에서 찾아볼 수밖에 없다.
다른 한편으로 인간은 일종의 관음증(觀淫症)을 갖고 있는 동물이다. 이는 상대성을 가진 사람의 은밀한 곳을 향한 호기심으로써 사실은 은연중에 이 관음증이 영화나 일반 상품 판매와 경영에도 이용되고 있다. 요사이 컴퓨터 통신의 발달로 선정적이고 퇴폐적인 영상이 청소년들에게 거의 무방비로 제공된다고 하여 학부모들의 염려가 많긴 하지만, 이는 결국 모든 인간의 심리적 기능인 관음증의 문제이다. 인간 본질이 바뀌지 않는 한 이런 사회문제는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없다.
이와 반대되는 현상이 앞에서 언급한 노출증이라 할 수 있다. 간혹 스트리킹이라고 하여 벌건 대낮에 벌거벗고 뛰어 다니는 사람들의 돌출 행동이 있기도 하지만, 이는 인간 의식의 깊은 곳에 그런 노출 욕구가 자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관음증과 노출증의 상호작용으로 인해 여성들의 과다한 노출현상이 두드러지게 되었는데, 한편으로 이런 심리적 현상들이 사회적으로 적절하게 제어되거나 승화되지 못해서 성폭력 사건이 늘어나는 면도 있다고 생각된다.
이 자리에서 여성들의 노출을 비난하자는 것은 결코 아니며, 더구나 21세기를 눈앞에 둔 오늘의 여성들에게 이런 말은 사실 가당치도 않을 것이다. 짧은치마나 배꼽티를 입고 거리를 활보하는 여성들이 온몸을 어두운 색깔의 천으로 감싸고 사는 이슬람권 여성들보다 부도덕하다고 말할 수도 없다. 다만 그가 어떤 옷을 입고 다니든지, 어느 정도의 노출을 하든지 단순히 첨단의 유행을 무의식적으로, 무비판적으로 뒤쫓아 다니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을 지적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옷은 나름대로 그 사람의 인격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옷은 그것을 입은 사람의 언어이며 존재이다. 이런 점에서 육체의 미학은 노출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절한 은폐에 있는 것은 아닌지 한번 생각해 볼일이다(1995년 11월26일).

위의 글에 대해서 분노하는 여성들이 적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 분들은 아마 여성의 노출을 인간의 감각적 본능으로 간주함으로써 그것에 상응하는 남성의 폭력성을 합리화하려는 의도가 이 글에 함의되어 있다고 여길지 모르겠다. 즉 서구의 기독교 역사에 담겨 있는 여성에 대한 매우 부정적인 관점이 이 글이 담겨 있다고 말이다. 창세기가 묘사하고 있는 것처럼 뱀의 유혹을 받은 이브는 남자보다 훨씬 감각적인 본성을 갖고 유혹에 넘어가기도 하고 또한 남자를 유혹하기도 한다. 이렇듯 남성이 가까이 하다가는 자칫 위험에 빠질 수도 있다는 기독교 전통의 여성관으로 인해서 가장 전형적인 여성은 순결하고 거룩하고 모성애로 가득 찬, 그야말로 인간이지만 거의 신성에 가까운 모습의 성모 마리아였다. 이런 관점에 묶여 있는 한 현대 여성들에게서 일상적으로 나타나는 약간의 노출이나 자기 꾸밈은 일탈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잣대로 세상과 여성을 보고 있다는 것은 결국 기존의 가부장적 여성 이해에 불과한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선입관 없이 단지 노출증과 관음증의 상호 연관성을 제기했을 뿐이다. 더구나 이런 노출과 관음 현상 자체를 무조건 매도하는 게 아니라 인간 종족의 보존을 위한 구성 요소로 본다는 점에서 그들의 문제 제기는 나의 생각과 관점을 달리한다. 나는 그렇게 비판하고 싶은 사람들의 입장과 생각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동시에 공연한 논쟁은 피하고 싶다.

머리에 베일을 써야 할 이유
이제 우리의 주제로 돌아와서 여자들이 교회에서 머리에 베일을 써야 한다는 바울의 가르침이 과연 가부장적인 질서와 여성 차별적 사고방식에 근거한 것인지, 더 나아가 그것을 고착화하는 데 일조한 책임이 있는지에 관해서 조금 더 직접적으로 검토해야겠다.
바울의 관심은 그 시대의 여성관을 강화시킨다거나 또는 그것을 철폐하는 것에 있지 않고 인간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계시를 해명하는 작업에 있었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 그런 시대적 가치들을 받아들이거나 또는 변형시켰다. 따라서 우리가 바울의 편지를 읽을 때 관심을 기울여야 할 부분은 그가 어떤 관점에서 기독교 윤리 문제에 접근했는가에 있지 그가 언급한 몇 가지 구체적 사안에 있는 것은 아니다. 여성들이 베일을 써야 한다고 가르친 이유는 남성과 여성의 왜곡된 관계를 그대로 수용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남성과 여성으로 구성된 교회 공동체 안에 하나님의 뜻이 바르게 인식되어야 한다는 요구가 훨씬 강했기 때문이다. 여성이 베일을 쓰는 것과 하나님의 뜻이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두 가지 관점에서 해명하고자 한다.
첫째, 성윤리의 현실주의적 이해가 이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다. 여성들이 교회에서 머리에 베일을 써야 한다는 바울의 주장은 여성을 혐오한다거나 비하하는 게 아니라 인간의 성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현실적으로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앞서 한번 지적한 대로 고린도에서는 여성이 머리를 베일로 가리지 않고 거리를 다니는 경우에 창녀처럼 행동하는 것이었다고 한다(데일리, 59). 데일리가 인용하고 있는 이런 고린도의 풍습이 얼마나 정확한 것인지는 내가 판단하기 어렵지만 가능성은 열어두어야 한다.
창녀들의 외적 모습이 하필이면 머리를 그대로 노출시키는 것이었을까? 모르긴 몰라도, 그 당시에는 여성의 머리가 성적 매력을 나타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매개였을 것이다. 물론 오늘 우리의 감수성으로 비쳐보면 이상할지 모르지만 그들의 성적 습관을 우리의 잣대로 판단할 수는 없다. 어느 민족은 여성의 발뒤꿈치에서, 또는 여성의 목에서, 엘리자베쓰 1세가 다스리던 영국에서는 여성의 종아리에 그런 성적 충동을 느꼈다고 한다. 성적 매력을 어디서 느끼는가 하는 문제는 종족과 시대에 따라서 천차만별이니까 고린도 사람들이 여성들의 머리에서 그걸 느꼈다고 해서 별종들이라고 할 수는 없다. 우리가 여기서 간파해야 할 요점은 여성의 복장과 에로티시즘이, 수컷매미를 부르는 암매미의 관계와 비슷하게 상호적이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남성들의 성적 충동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있는 머리를 베일로 가리고 예배를 드리라는 바울의 충고는 기독교인이 아무리 신앙 훈련을 충분하게 받았다고 하더라도 상황에 따라서 얼마든지 성적 충동에 사로잡힐 수 있다는 판단에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에 반론이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것은 접어두고, 왜 여성을 그렇게 성적인 각도로만 보려고 하는가, 있는 그대로의 인간으로 봐야지 왜 이성으로, 특히 성적인 대상으로만 보는가, 그게 바로 남성중심적인, 남근중심적인 사고방식이 아니냐, 하고 따질지도 모르겠다. 옳은 지적이다. 그러나 성적 충동이라는 것은 인간에게 구성적인 요소이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 왜곡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은 문제가 되겠지만 그것 자체를 근본적으로 문제 삼을 수는 없다.
인간의 성충동에 대한 현실주의적 입장에 의하면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그런 충동이 작동될 개연성은 항시 열려 있다. 미국의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사제의 어린이 성추행 사건이 사회적인 충격을 줄 정도로 부각되었다. 교회 당국에서는 사건의 무마를 위해서 피해 당사자들에게 수천만 달러의 배상금을 지불했다고 한다. 들리는 말로는 우리나라 가톨릭교회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났으며, 일부의 피해자들이 로마 교황에게 탄원서를 제출하기에 이르렀다. 개신교에서도 크고 작은 이런 일들은 수 없이 많다. 결국 남녀가 함께 모이는 공동체에는 불미스러운 스캔들이나 적절하지 못한 사건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제도나 의식의 차원에서 가능한 그런 상황이 벌어지지 않도록 사전에 차단하는 게 가장 바람직한 해결 방법일 것이다. 어떤 사람은 그런 모든 문제가 믿음이 없어서 일어나는 거 아닌가, 하고 반론을 제기할지 모르겠다. 그런 생각이 바로 신앙적 현실주의와 대립되는 이상주의이다. 그런 이상주의는 말 그대로 이상일 뿐이지 실낙원 이후의 현실에서는 전혀 정당성이 없는 주장에 불과하다.
이런 성 현실주의를 고린도 교회에 적용시킨다면, 그 당시 남성 일반이 여성의 머리에서 성충동을 느끼니까 그것을 베일로 가리라고 가르치는 일은 정당하다. 물론 여기서 왜 그런 풍습을 여자에게만 적용시키는가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주제가 되기 때문에 길게 말할 것은 없지만, 그런 경우가 남자들에게도 있다면 남자에게도 역시 똑같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원칙만 말하는 것으로 정리하자.

둘째, 기독교 윤리의 종말론적 성격에서 바울을 변호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다른 대답을 찾아볼 수 있다. 근본적으로 바울의 관심은 여자가 머리에 베일을 써야 하는가 아닌가에 있는 게 아니라 종말론적 공동체를 규정해나가는 작업에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바울에 의하면 이 세상의 일들은 무상하고 제한적이고 잠정적인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영원한 것을 추구하며 살아야 한다. 예수의 부활에 의해서 선취된 참된 생명을 경험하고 그것이 완성될 재림을 기다리며 현재의 삶을 나그네처럼 살아가는 이들이 곧 기독교인이다. 바울의 신앙에 의하면 결혼도 절대적인 게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독신이 절대적인 것도 아니다. 국가도 그에게는 마찬가지이다. 바울이 로마서 13장에서 정부의 권위에 복종하라고 권면하는 이유도 그런 정부와 국가가 절대적인 기구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에 의해서 규정될 뿐인 그런 잠정적인 습관과 질서 앞에서 기독교인들이 취해야 할 태도는 그런 것들과 불필요한 충돌로 인해서 참된 신앙이 소진되거나 훼손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이다. 그래서 로마 황제를 ‘퀴리오스’로 섬기지는 않지만 그들이 제정한 세법을 준수하는 게 기독교인들에게는 지혜로운 일인 셈이다. 훨씬 본질적인 영적 싸움을 강력하게 수행해나가는 게 중요하기 때문에 사소한 일에까지 시시비비를 가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여성들이 머리에 베일을 쓰는 습관은 바울 시대의 세속적 윤리에 불과했지만 그것이 기독교 신앙을 근본적으로 훼손시키지 않는 한 그대로 따르는 것도 괜찮은 일이었다. 물론 오늘 페미니스트들이 주장하는 수준에서 가부장적이며 성차별적인 사회 인식과 구조를 바울이 미리 꿰뚫어보지 못한 한계가 있긴 하지만 그 책임을 굳이 바울에게 물을 것까지는 전혀 없다. 오히려 바울의 그런 충고가 기독교의 진리를 역사 안에 착상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옹호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아도 로마 문명과 투쟁해야 할 근본적인 문제들이 많은 마당에 이런 작은 풍습에 관한 것까지 시시비비 따졌다면 기독교의 토대마저 위협을 받았을지 모른다. 기독교가 그 시대정신과 어떤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훨씬 많은 논의가 필요하지만, 우리가 지금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여자의 베일’ 문제에 한해서만 본다면 사회의 풍습을 그대로 용인한 것은 매우 잘한 선택이다.

바울의 논점
비록 바울이 여성의 베일을 교회의 전통으로 가르치고 있지만 그것이 곧 여성을 낮춘다거나 가부장적인 질서의 강화라고 보기는 힘들다. 다른 편지에서도 바울의 그런 입장을 확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오늘의 본문에서도 역시 그런 입장이 아주 확연하게 드러난다. 11,12절 말씀은 이렇다. “주님을 믿는 세계에서는 여자나 남자나 다 같이 상대방에게 서로 속해 있습니다. 그것은 여자가 남자에게서 창조되었지만 남자는 여자의 몸에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다 하느님께로부터 왔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로마 남자가 이런 바울의 편지를 읽게 된다면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댈 것이다. 도대체 남자가 여자에게 속했다는 게 말이 되는가? 기껏해야 인간의 몸을 만드는 질료에 불과한 여성에게 남자가 속했다는 바울의 이런 말은 망발에 가깝다. 그렇지만 바울은 그 시대의 세계관과 윤리관을 충분히 헤아리면서도 더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뜻에 충실했던 사람이다. 그는 분명히 창세기 전승에서 여자가 남자의 갈비뼈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모든 인간의 생명을 가능하게 하는 여성의 출산 사건을 명시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이것은 곧 여성의 출산과 연관된 현상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던 그 시대정신에 얽매이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여자는 남자에게 속하고, 남자는 여자에게 속했다. 이런 정도의 혁명적인 인식을 2천년 전 바울에게서 발견할 수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남자는 여자의 몸에서 태어났다.”는 바울의 언급은 그의 여성관을 읽을 수 있는 결정적인 대목이다. 여자의 몸은 하나님의 창조가 계속될 수 있는 공간이다. 남자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든 하나님의 창조 사건은 한번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여자의 몸에서 남자가 나오는 창조는 여전히 계속된다는 말이다. 여자의 몸을 단지 애기 낳는 기계로만 보는 게 아니라 인간의 삶에서 후손을 번식한다는 것보다 더 위대하고 거룩한 일이 없다는 점에서 여자의 몸을 거룩하게 본다는 뜻이다.
물론 같은 편지에서 전혀 다른 말을 하기도 한다. “여자들은 교회 집회에서 말할 권리가 없으니 말을 하지 마십시오. 율법에도 있듯이 여자들은 남자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알고 싶은 것이 있으면 집에 돌아가서 남편들에게 물어 보도록 하십시오. 여자가 교회 집회에서 말하는 것은 자기에게 수치가 됩니다.”(고전 14:34,35). 신약 학자가 설명해야 할 부분일지 모르지만, 내가 보기에 이런 표현들은 분명히 고린도 교회의 특별한 ‘삶의 자리’를 배경에 두고 읽혀져야만 한다. 바울이 이런 여성차별적인 언사를 일반적인 것으로 쏟아낼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아마 고린도 교회에서 여성들의 활동이 교회 공동체의 질서를 훼손하는 방향으로 흘러갔을지 모른다. 빌립보 교회에서도 문제를 일으킨 여성들이 적지 않았다. “유오디아와 신디케 두 분에게 나는 간청합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한 마음이 되십시오. 나와 한 멍에를 멘 내 진실한 협력자에게 부탁합니다. 이 여자들을 도와주십시오.”(빌 4:2,3). 여성의 정서적 특징을 감안한다면 초기 기독교 안에서 열광주의적 형태를 보이는 여성들이 제법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요즘도 열광적인 종교 현상을 보이는 이들이 대개 여성이라는 점에서도 이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반드시 여성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은 아니며, 더구나 그것에 대한 가치론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도 아니다. 다만 여성과 남성 사이에 어떤 심리적, 정서적 차이, 또는 특성으로 인해서 종교적인 열광이 주로 여성들에게 나타날 수 있다는 말이다. 어쨌든지 바울이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비록 여성 차별적인 진술이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과는 전혀 차원을 달리하는 절대적인 세계, 즉 하나님이다.
우리는 “그러나 모든 것이 다 하느님께로부터 왔습니다”(12절 후)는 바울의 이 결정적인 진술에서 그의 입장을 확인할 수 있다. 남자인가, 여자인가 하는 성의 특성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근원이, 즉 이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이 중요하다. 갈라디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는 이런 신앙적 인식이 훨씬 구체적으로 기독론적인 토대에서 해명되고 있다. “유대인이나 그리스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가 아무런 차별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은 모두 한 몸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에게 속했다면 여러분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따라서 약속에 의한 상속자들입니다.”(갈 3:28,29). 이런 인식과 신앙에 근거해서 바울은 경우에 따라 여성을 남성의 질서 밑에 두기도 하고, 또는 동일한 차원에 두기도 했다. 물론 바울의 진술에서 남성을 여성의 질서 밑으로 끌어내리는 경우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데, 그것은 보기에 따라서 바울의 한계이기도 하고 또는 별로 문제가 될만한 사안이 아닐 수도 있다.  

베일 이후
지금까지의 논의에 따르면 여성이 교회에서 베일을 써야한다는 사도 바울의 주장은 그 당시로서는 설득력이 있지만, 그런 요구가 오늘 우리에게까지 규범적으로 무조건 강요될 수는 없다. 오늘의 여성들은 당연히 베일을 벗어야 한다. 왜냐하면 성서윤리는 우리에게 절대적 규범으로 작용하는 게 아니라 절대자인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이 감당해야 할 삶의 형식들이라는 점에서 끊임없이 변형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첫째, 성서 윤리는 끊임없이 ‘해석’되어야 한다. 둘째, 오늘의 시각으로 성서윤리를 비난할 수 없다. 그렇다면 결국 우리의 시각으로 베일을 쓰라는 바울의 가르침을 비난하지 말아야 하며, 더 나아가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고, 종말론적 공동체인 교회의 교회다움을 유지시켜나가기 위해서 오늘의 여성들이 베일을 써야 할 필요는 전혀 없다는 말이 된다. 가능하다면 여기서 우리는 베일의 상징성을 훨씬 깊이 있게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베일을 벗어버린 여성의 삶이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 오늘 우리의 신학적 이슈로 부각되어야 할 것이다. 이는 곧 바울을 비난하지는 말되 그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이 바로 ‘베일을 벗은 여성’의 삶을 전진적으로 풀어내는 데 있다는 뜻이다.
‘베일 이후’에 관한 논의는 한 두 마디로 끝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여성이기 때문에 짊어져야 했던 모든 겉치레와 굴레를 벗어버리는 것이 곧 베일 이후를 의미한다고 볼 수는 없다. 앞으로 유전자 공학이 배아줄기만으로 완전한 후손을 만들어낸다면 여성들은 결국 열 달 동안의 임신과 출산의 고통을 벗어나게 될지 모르겠다. 지금도 상당히 진행된 일이기는 하지만 집안일을 완전히 기계가 대체할 수 있다면 여성들은 가사노동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질 것이다. 이런 문제는 남성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더 이상 인간의 노동력이 필요 없는 시대가 된다면 남자나 여자, 모든 인간들은 여행, 오락만으로 인생을 보낼 것이다. 평균 수명도 2,3백년 정도로 늘어날 수도 있을지 모른다. 분명히 현실로 다가오게 될 그 미래가 우리에게 빛일지 아니면 어둠일지 아무도 예단할 수 없다. 그러나 자연 안에 들어가 있는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벗어난 그런 세상에서 행복할 수 없다는 사실은 불을 보듯 뻔할 뿐만 아니라 비록 그런 세상에서 인간이 견뎌낼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이제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닌 다른 종으로 진화해버릴 것이다. 흡사 인류의 조장이 호모 에렉투스에서 호모 사피엔스로 진화했듯이 말이다.
그렇게 먼 미래는 접어두고 오늘과 짧은 미래에 한정해서 ‘베일 이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건 다름이 아니라 사회화의 과정에서 왜곡된 여성의 삶이 본연의 삶으로 해방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 회복이라고 말해도 좋고, 인간다운 삶이라 불러도 좋지만, 거기서 핵심은 생명의 영이 가득한 삶으로 들어갈 수 있는 구체적인 결단과 투쟁이 우리 모두에게 요청된다는 사실이다. 이런 결단과 투쟁을 위해서 우리는 두 가지 해석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하나는 생명을 창조하고 보존하고 완성하시는 하나님의 통치가 무엇인지에 관한 신학적 해석학이며, 다른 하나는 이 세계와 역사 자체에 대한 사회과학적 해석학이다. 전자는 기다림의 해석학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참여의 해석학이다. 기다림과 참여의 긴장, 그 변증법을 우리의 신학적 사유에서 정확하게 풀어낼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남자와 여자로 존재하는 인간을 구원의 세계로 끌어낼 수 있는 영성이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81 조직신학 20장. 종말과 역사 2005-11-23 9254
80 조직신학 19장 성서에 대해 [4] 2005-11-16 7766
79 조직신학 18장: 진아(眞我)를 찾아서 (11월10일) [3] 2005-11-06 7101
78 조직신학 17장: 교회란 무엇인가? [5] 2005-10-19 7887
77 조직신학 16장: 성령에 대해 2005-10-12 7307
76 조직신학 15장: 기독교 영성 [3] 2005-10-03 6223
75 조직신학 14장: 신앙론 [2] 2005-09-28 6350
74 조직신학 13장: 칭의와 성화 [7] 2005-09-22 8956
73 조직신학 12장: 은총론 2005-09-14 5858
72 조직신학 11장: 죄에 대해 [1] 2005-09-04 8105
71 조직신학 조직신학(2) 강의안내 2005-08-31 6712
70 조직신학 10장: 인간에 대한 물음 2005-05-25 6160
69 여성신학 12장: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에 관한 신학적 고찰 2005-05-23 5864
68 여성신학 11장 바울의 동성애 비난에 대해서 [4] 2005-05-23 7978
67 조직신학 9장: 하나님과 창조 [2] 2005-05-18 6683
» 여성신학 10장. 여성은 베일을 써야하는가? 2005-05-17 4510
65 조직신학 8장: 삼위일체에 관해서 [3] 2005-04-27 6895
64 여성신학 9장: 인간은 왜 남성과 여성인가? 2005-04-25 4274
63 조직신학 7장: 유신론과 무신론 2005-04-20 5573
62 여성신학 8장: 여성신학과 기독교 인간론 2005-04-19 5031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