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장: 죄에 대해

조직신학 조회 수 8105 추천 수 86 2005.09.04 18:54:14

11장
죄에 대해

신학의 다양한 주제 중에서 죄만큼 설교에 흔하게 등장하는 주제도 별로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 종말, 창조, 계시 같은 주제들은 일반적으로 주마간산 격으로 다루어지는 반면에 ‘죄’ 만큼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한국교회 설교 현장*에서 자주 다루어진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일까? 물론 기독교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죄를 언급할 수밖에 없다고 대답할 수 있다. 흔히 ‘탕자의 비유’로 일컬어지는 예수의 비유에서 볼 수 있듯이 인간이 죄로 인해서 상실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게 곧 복음이라는 말이다. 이런 주장은 큰 틀에서 옳다. 그러나 뒤에서 충분하게 다루겠지만 기독교 복음에서 죄가 독립적으로 다루어질 수 없고 오히려 사죄와 은총 안에서 다루어진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즉 죄 문제는 어떤 근원적인 사태를 설명하려는 인식론적 통로이지 그것 자체가 기독교 복음을 구성하는 요소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교회 현장에서 죄 문제가 정도에 넘칠 정도로 자주, 그리고 비신학적으로 다루어진다는 이 현상의 이면에는 어떤 목회적인 의도가 숨어 있다고 볼 수 있다.

* ‘기독교 사상’에 “설교비평”을 연재하기 위해서 그동안 여러 설교자들의 설교를 검토했다. 대략 15명 정도의 설교자를 다루었는데, 그 중에 이 죄 문제를 가장 노골적으로 접근한 설교자는 대구동부교회 김서택 목사와 열린교회 김남준 목사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두 목사 모두 합동측에 속했다. 그들은 매우 자극적인 방식으로 신자들의 죄를 공격하고 있었다. 김서택 목사는 부부가 포도주를 마시는 것도 죄라고 정죄했으며, 김남준 목사는 예배에 흐느낌이 없다면서 자주 울먹이고 간혹 통곡하는 일도 있었다. 나는 경우에 따라서 신자들의 죄 문제를 설교의 주제로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이들 두 목사에게서 발견할 수 있듯이 모든 설교를 죄와 회심의 문제로 몰아가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 그들이 아무리 닦달한다고 하더라도 신자들의 삶이 근본적으로 바뀌는 것은 하나도 없으며, 대신 죄책감과 불안감만 조성될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게 괜찮다는 식으로 설교하라는 말은 아니다. 성서가 말하는 죄는 막연한 죄책감을 자극한다기보다는 구체적인 것을 다룬다. 특히 구약의 예언자들에게는 개인적인 죄만이 아니라 사회적인 죄도 역시 중요한 문제이다. 그런데 한국교회 목회와 설교 행위에서 가장 심각한 것은 이 죄에 대한 공격과 그것으로 인한 신자들의 심리적인 죄책감 및 그것의 카타르시스가 반복된다는 사실이다. 인간 실존의 가장 내밀한 문제인 죄 마저 이렇게 일정한 정서적 구도에서 반복됨으로써 결국 기독교 신앙이 끝없이 가벼움의 극치를 달리게 된다.

한국교회 설교에 죄가 강조되는 이유는 청중의 죄의식을 강조함으로써 모든 인간의 주체성을 폐기하려는 것이다. 만약 청중들이 죄를 강조하는 목사의 설교에 의해서 자신을 철저하게 부정할 수밖에 없다면 그는 교권이 아무래 난폭하게 작동된다고 하더라도 아무 소리를 하지 못할 것이다. 이는 흡사 교주가 절대적인 존재로 부각되어 있는 이단 소종파의 구조와 비슷하다. 사이 이단의 교주와 일반 추종자들 사이에는 아무런 민주적 절차나 관계가 없이 오직 수직적인 관계만 남게 된다. 이들 사이에는 어떤 진리의 힘이 작용하는 게 아니라 자신을 극단적으로 억압하고 폐쇄하는 피학대증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는 곧 추종자들이 심리적으로 약점이 잡혀 있는 현상과 비슷하다. 어떤 인격체 안에 죄인이라는 인식이 일방적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면 상대방에게 무조건 복종할 수밖에 없는 심리상태로 변하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이런 죄 문제가 훨씬 강압적인 교리로 자리하게 된 이유도 역시 로마 황제와 교황의 절대화에 직간접적인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소위 ‘죄론’이 과연 기독교의 근본적인 가르침인가에 대해서 질문하려고 한다. 만약 근본적인 가르침이라고 한다면 그것의 의미는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역시 질문해야 할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죄론이 기독교인들의 영성을 죽이는 교리가 아니라 생명의 지평으로 견인해나가는 교리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포착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기독교 신자들이 죄 문제와 연관해서 가장 연상되는 문제로부터 시작하자. 그것은 소위 ‘선악과’로 불리는 에덴동산 사건과 연루된 ‘원죄’ 개념이다. 성서와 기독교는 도대체 무엇을 원죄라고 하는가? 그 원죄라는 게 과연 타당한 주장일까?
원죄 개념을 직접 다루기 전에 잠시 우리가 죄를 구분하는 일반적인 구도에 대해서 검토하자. 보통 우리는 죄를 원죄와 자범죄로 나눈다. 원죄는 모든 인간에게 유전을 통해서 이전되는 죄의 존재론적 근원이며, 자범죄는 인격으로서의 인간이 구체적으로 저지는 행위로서의 죄를 가리킨다. 우리가 되에서도 언급하겠지만 죄를 원죄로 자범죄로 나눈다는 것은 우리가 여전히 죄의 본질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모른다’는 말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실제로 겉으로 드러나는 죄의 행위와 한 개인을 초월하는 죄의 힘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죄를 다스리기도 하지만 그렇지 못할 때도 많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시대에 마녀사냥이 거세게 몰아쳤다는 사실을 우리가 어떻게 해명할 수 있단 말인가? 인간이 시대를 읽을 능력이 부족한 탓이었나, 아니면 인간에게 존재론적으로 죄의 피가 흐르기 때문인가? 다른 하나는 약간 윤리적인 차원에 속하는 관점으로서 우리가 규정하는 죄라는 게 그렇게 정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복잡한 삶의 자리에서 기독교는 원죄와 자범죄를 구분함으로써 그 죄를 훨씬 총체적으로 인식해보려고 노력했다.  


원죄와 인간의 책임

원죄(原罪) 개념은 단어의 뜻 그대로 인간에게 숙명적으로 주어진 사건으로서의 죄를 가리킨다. 이 원죄의 근원을 우리는 일반적으로 아담과 이브의 선악과 사건에서 찾는다. 최초의 인류인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의 명령을 위반하고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로 그들의 죄가 이후의 후손들에게 유전된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원죄 개념에 의하면 인간이 실제로 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역시 죄와 연루될 수밖에 없다.
이런 원죄 개념 앞에서 우리는 몇 가지 어려움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만약 인간이 죄인으로 태어난다고 한다면 살아가면서 스스로 행한 죄의 책임을 인간에게 묻는다는 건 불가능하다.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숙명과 그 책임의 딜레마에서 우리가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이다. 이렇게 예를 들어보자. 먼 미래에 배아 조작을 통해서 인간은 아니지만 인간과 아주 흡사한 또 한 종류의 인간이 만들어졌다고 하자. 그 인간은 현재의 인간과 거의 똑같기 때문에 자기들 끼리 후손을 번식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런 새로운 종의 인간에게 다섯 사람 이상만 모이기만 하면 서로 싸우는 유전자가 주입되었다. 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다섯 사람 이상 모이는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이 싸우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 책임은 새로운 종의 인간들에게 돌아가는가, 아니면 이런 종을 만든 생물학자에게 돌아가는가? 약간 극단적인 비유를 들긴 했지만 원죄 개념을 단지 우리 인간에게 유전되는 숙명으로만 해석하는 경우에 이런 모순이 벌어진다는 점에서 이 비유는 그렇게 틀린 말은 아니다.
이 원죄 개념이 우리에게 제기하는 또 하나의 문제는 다음과 같다. 스스로 죄를 짓지 않은, 즉 죄 인식이 싹트기 이전의 어린아이들에게도 죄가 작용하는 것일까? 만약 피를 통해서, 중세기의 어느 신학자는 남편과 아내의 성행위를 통해서 죄가 유전된다고 말했지만, 죄가 유전된다면 어린아이라고 하더라도 당연히 죄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오늘 우리는 이런 주장에 동의하기 어렵다. 이런 주장에 따른다면 태어나자 곧 죽은 아이들은 모두 구원받지 못한다는 말이 된다. 어린아이들에게는 아직 죄에 대한 인식이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연적 존재라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물론 이 문제는 훨씬 근원적인 차원에서 분석되어야 할 인간론에 속하기 때문에 여기서 간단하게 처리할 수는 없다. 원죄 개념을 모든 사람, 모든 사람의 상황에 일괄적으로 적용시키기에는 인간 삶이 지나치게 다층적이라는 사실만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푈만이 거명하고 있는 몇몇 현대 신학자들의 새로운 문제 제기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는 소위 신학적 인격주의로 대표되는 세 명의 신학들을 소개하고 있다. (이하 <교의학> 235 쪽 이하 참조).

1) 알트하우스
알트하우스는 원죄론의 ‘역사화’를 배격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원죄론은 어버이로부터 자녀들에게 죄가 이어진다는 점에서 죄의 역사화이다. 알트하우스는 이 문제를 이렇게 설명한다. 아담이 죄를 지었듯이 우리도 죄를 짓는다는 명제만 타당한 게 아니라, 아담이 죄를 지었기 ‘ 때문에’ 우리도 죄를 짓는다는 명제 역시 타당하다. 그러나 이 ‘ 때문에’는 “우리가 첫 인간과 관련되어 있다.”는 뜻이지, “아담이 죄의 창시자이다.”라는 뜻은 아니다. 즉 그가 말하려는 핵심은 인간은 죄라는 사태에서 하나를 이루고 있을 뿐이지 역사적인 족보로 하나를 이루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최초의 인간들과 지금의 우리, 그리고 마지막 인간들은 죄 안에서 한 인간으로 ··· 하나님 앞에 서 있다.” 그리고 “타락은 역사 속에서 출현하지만 역사 속에 자리할 수는 없고, 항상 현재하며 동시대적이다.” 이런 점에서 알트하우스의 경우에 아담은 역사화할 수 없다. 아담은 인간이라는 종의 명칭이고, 인류의 집단적 개인으로서 인류가 집단적으로 죄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따라서 “만약 우리가 아담을 역사화하고 타락을 시간적으로 소급해서 계산한다면 우리의 죄과는 우리의 죄과가 아니게 될 것이며, 원죄는 우리에게 잘못을 지우지 못하고 그 잘못을 면제*해 주게 될 것이다. 만약 우리의 죄가 아담의 죄와 한 가지가 아니라 아담의 죄의 인과적 원격작용으로 간주된다면, 우리는 우리의 죄에 대해 아무런 책임을 질 수 없게 될 것이다.”(푈만, 236).

*오늘 한국교회의 죄 문제에서 이런 경향이 매우 강하게 나타난다. 죄를 심각하게 공격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그저 아담의 죄가 우리에게 내려온 결과라는 점에서 숙명으로 작용할 뿐이지 실제로 그 죄에 대해 책임적인 자세가 매우 부족하다. 원죄론의 숙명주의와 그것의 역사화로 인한 무책임성이 우리 기독교인의 특징으로 나타난다는 말이다. 모든 문제를 이런 구도로만 설명할 수는 없지만, 모든 교회당과 기도원에서 그렇게 많은 죄에 대한 설교와 기도와 눈물이 넘쳐나지만 실제로 이 사회가 윤리적으로 변화되고 있다는 실증은 별로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교회 안에 죄에 대한 자책감은 많지만 그것의 구체적인 책임감은 현저하게 축소되고 있는 형편이다. 이런 문제는 알트하우스만이 아니라 바로 아래서 제기될 브룬너도 정확하게 뚫어보고 있다.

2) 브룬너
브룬너는 기본적으로 죄를 자질이나 실체가 아니라 오히려 행위라고 보았다. 따라서 “원죄론으로 인해 생리적인 죄론으로 빗나간 교회의 가르침은 죄의 이러한 지속적인 행위성을 간과했거나, 그 생리적 해석으로 인해 희미하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마치 아버지가 파란 눈을 가졌기에 그 자녀도 파란 눈이 ‘되는’ 것처럼, 죄인이 된다는 것에 똑같은 존재양식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이렇게 진술한다. “원래 인격적 성격인 죄가 ··· 순전히 자연적인 사실, 즉 생리적인 유전의 탓으로 돌려졌다. 우리는 우리가 행위로 가담하지도 않은 것에 대해 잘못의 책임을 떠맡아야 한다.” 결국 원죄의 역사화는 우리가 저지르지 않은 잘못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비인격적인 사태를 만들었으며, 또한 동시에 우리의 잘못을 아담에게 소급시키는, 또는 그의 책임으로 돌리는 변명의 수단을 만들게 된 것이다. 물론 브룬너는 이런 숙명적인 원죄 개념만을 비판하지 않고, 거꾸로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에 악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도덕주의도 비판한다. 결국 죄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행위’이며, ‘자신에게 책임이 돌아가는 숙명’이며 ‘영속적 혁명이다.’

3) 고가르텐
브룬너는 죄의 인격적인 측면과 존재의 측면을 동시에 긍정한 반면에 고가르텐은 주로 인격적인 측면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만약 내가 아담의 혈통으로 인해, 즉 유전을 통해 죄인이 된다면 나는 내 죄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없게 된다.” 그에게 원죄 개념은 오늘 계몽주의 이후의 시대에 사는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힘든 신화적 사고에서 유래한다. 그에 의하면 우리가 주체적으로, 그리고 개인적으로, 즉 내면성과 개별성의 매개를 통해서 받아들일 수 있는 것만이 우리에게 현실적인 것이 될 수 있다. 그래서 결국 죄는 “오직 개별성과 주체성 속에서만 오늘 우리의 사유에 받아들여질 수 있다.” 최소한 합리적인 생각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고가르텐의 이런 주장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푈만은 이 세 신학자들의 주장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비록 원죄 개념이 알트하우스와 브룬너가 시도한 방식으로 탈(脫)신화화해야 하겠지만, 고가르텐은 죄의 전(前)인격적, 초(超)인격적 측면에 더 이상 주목하지 못한 것 같다. 만약 죄의 초인격적 특성이 사라진다면, 죄가 펠라기우스*적으로 피상화하는 것이 아닐까?”(237). 푈만이 세 명의 신학자들을 구별하고 있긴 하지만 이 문제는 그렇게 중요하는 것은 아니다. 푈만 까지 포함해서 이들 네 명의 신학자들이 원죄와 인간의 주체성, 혹은 인격성의 관계를 약간의 다른 시각에서 설명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에 누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여기서 훨씬 본질적인 문제는 성서와 기독교 역사가 왜 원죄 문제를 거론할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한 인간학적 요청을 검토하는 것이다. 만약 이런 문제가 어느 정도 해명이 된다면 죄가 인간에게 숙명적으로 작용하는 데 중심을 두어야 하는지, 아니면 인간의 책임에 중심을 두어야 하는지, 또는 그것의 변증법적 관계에 두어야 하는지 밝혀질 수 있을 것이다.

*원죄 논쟁은 교리사적으로 볼 때 펠라기우스에게서부터 출발한다. 펠라기우스는 원죄설을 논박하거나 약화하는 모든 신학적 방향과 사상의 태두라 할 수 있다. 펠라기우스에 의하면 인간은 선을 행하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또한 그런 능력이 있기 때문에 선을 행해야 한다. 그가 볼 때 “누구나 선, 또는 악을 행할 자유가 있다.” 그러나 오트의 설명에 따르면 펠라기우스는 “자유가 윤리적인 삶과 관계하여 선이나 악을 위한 자기규정으로서, 즉 삶 전체를 포괄하는 방향설정이나 통일적인 성향으로 표현되고, 이것을 통해서 모든 개별적 행위의 방향이 개별적 행위의 형식적 자유와 관계없이 규정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따라서 펠라기우스는 죄 이전에 인간이 갖고 있는 죄 된 상태를 생각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즉 펠라기우스에게 죄는 본성의 잘못이나 위반이 아니라 의지의 잘못이니 위반이기 때문에 죄는 다만 개별적인 의지의 행위에서만 성립된다는 것이다. 그에게는 죄는 유전으로 전해지는 게 아니라 모방으로 뒤따라가게 된다. 즉 그는 인간에게 죄가 없다기보다는 인간이 죄가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할 뿐이다. 이런 관점에서는 결국 원죄론은 그 자리를 잃게 된다.


죄의 현실

기독교 신앙이 늘 종교 권력에만 치중한 게 아니라 오히려 진리를 지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설령 그걸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기독교의 가르침을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죄의 뿌리를 규정하고 있는 원죄 개념이 비록 생물학적인 유전의 구조에서 주장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근원은 전혀 다른 것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곧 성서와 기독교 역사가 인간 개인과 사회 안에 죄가 매우 집요한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눈여겨보았다는 것이다. 이를 우리는 죄의 현실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인간 삶에 죄가 구성적인 요소라는 사실에 대해서 성서가 어떻게 접근하고 있는지 우선 창세기에 진술되어 있는 두 설화를 잠시 검토하자.(이하, 졸저 <기독교를 말한다> 223 이하 참조).  
하나는 선악과 사건(창 3장)이다. 하나님이 아담과 이브에게 에덴동산에 심겨 있는 모든 실과는 먹을 수 있지만 선악과만음 먹지 말라고 명령했다. 뱀이 이브를 유혹했고, 이브는 아담을 설득해서 아담과 이브는 결국 선악과를 취했다. 그러자 눈이 밝아져 자신들이 벌거벗었다는 현실을 확인할 수 있었고, 이때부터 부끄러움을 알게 되어 둘이 함께 숲속에 숨었다고 한다.
다른 하나는 카인의 아벨 살해사건(창 4장)이다. 형제인 카인과 아벨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그런데 하나님은 농사를 지어 추소한 농산물을 하나님께 드린 카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고, 양을 쳐서 양을 바친 아벨의 제사만 받으셨다. 이에 화가 난 가인은 동생 아벨을 들판으로 데리고 가서 돌로 쳐 죽인다. 하나님이 가인에게 동생이 어디 있느냐고 묻자 그 유명한 답변이 아래와 같다. “내가 내 동생을 지키는 자입니까?”
이 두 설화 이외에도 창세기의 원(原)역사(1-11장)의 나머지 부분은 거의 인간의 죄에 대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하나는 노아홍수 사건이며, 다른 하나는 바벨탑 사건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스라엘의 부족들이 등장하기 이전인 보편역사는 일부를 제외한다면 모두 인간의 죄에 대한 보도인 셈이다. 하나님의 창조가 아름다웠다는 진술에 이어서 그 창조에 위배되는 죄가 인간 현실에 등장했고 보도한다는 것은 곧 구약성서가 이 죄 문제를 얼마나 심각하게 생각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신약성서는 어떨까? 로마서는 인간 현실로서의 죄를 준엄하게 추궁하고 있다.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롬 1:29). 그뿐만 아니라 바울은 이렇게 진술하고 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야고보서는 죄를 욕심이라고 했다.(약 1:15). 참고적으로 어거스틴은 죄를 휘브리스(교만)이라고 했고, 아퀴나스는 아모르 수이(자기 사랑)이라고 했다.
성서와 기독교가 말하는 이 죄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 성격으로 규정된다. 하나는 ‘보편성’이며, 다른 하나는 ‘과격성’이다. 전자는 죄가 어떤 한 두 개인에게만 한정되는 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universal) 적용된다는 의미이다. 후자는 죄가 우리의 몇 가지 윤리적 행동에 한정되는 게 아니라 우리의 인격 전체에 극단적으로(radical) 적용된다는 의미이다. 이런 보편성과 극단성이 결국 기독교 신학자들이 원죄 개념을 언급하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든 단초라 할 수 있다.

예수는 이런 문제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예수와 죄 문제를 연결해서 생각하기는 그렇게 쉽지 않다. 물론 예수가 하나님의 나라, 더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의 통치가 가까이 임했다는 사실을 전하면서 “회개하라”고 말씀하시긴 했지만 그것은 우리가 요즘 생각하는 그런 종류의 죄를 회개하라는 뜻은 아니다. 더구나 예수님은 공생애에 주로 죄인들과 함께 어울리셨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에게 핀잔을 들을 정도였다. 당신은 죄인, 세리와 함께 먹기를 즐기고, 포도를 자주 마신다는 핀잔이었다. 모르긴 해도 예수가 죄인들을 향해서 “당신들은 죄인들이야!”라는 식을 말씀하신 적이 없을 것이다. 그냥 현실의 인간들과 함께 어울리시면서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하고, 이미 그 통치가 현재하고 있듯이 행동하셨을 뿐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예수와 죄 문제를 직결해서 생각할 수는 없다.
다만 기독교의 원죄가 주로 성욕과 연관되고 있다는 점에서 일단 여기에 한정해서 예수의 가르침을 검토하자. 예수의 공생애에서 이 문제는 두 번에 걸쳐 언급된 것 같다. 하나는 현장에서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에 관한 것이다. 율법에 따르면 이 여자는 돌에 맞아 죽어야 했다. 우리 식으로 한다면 멍석말이를 당해야만 했다. 그러나 예수는 평소에 원수 사랑을 가르쳤다. 그렇다면 이 여인을 어떻게 처리해야한다는 말일까? 돌로 칠까요, 말까요? 이렇게 밀고 들어오는 군중을 향해서 예수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죄 없는 자가 먼저 이 여인에게 돌을 던져라.” 어찌된 영문인지 그렇게 흥분해서 달려들었던 군중들은 나이 든 사람부터 차례대로 물러갔다고 한다. 이 사건은 탈출구가 없는 함정에서 빠져나온 예수의 기지를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예수의 말씀은 죄 없는 자가 없다는 선언이다.
예수는 율법을 새롭게 해석하는 과정에서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한 자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지 말고 살아야 한다는 윤리적 가르침이 아니다. 이런 구도에서 벗어나는 사람이 없다는 준엄한 선고이다. 물론 여기서 음욕을 무엇으로 해석하는가에 따라서 또 다른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일단 모든 인간에게는 이렇게 성적 욕망이 작동한다는 의미로 새겨도 크게 잘못을 아닐 것이다.
이 두 가지 사건에서 우리는 예수의 죄 이해가 어떤 것으로 생각해야할까? 예수는 결코 인간을 추상적으로 생각한 적이 없다. 아무리 하나님 나라를 비유적으로 말씀하시는 경우라고 하더라도 철저하게 이 땅에 두 발을 딛고 사는 인간을 전제한 말씀하셨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예수는 성적 욕망을 인간의 현실로 생각하신 게 틀림없다.
죄가 인간의 현실이라는 게 무슨 의미일까? 일반적으로 많은 종교와 윤리적 가르침은 이런 죄의 현실을 인간으로부터 벗겨내는 데에 초점을 두고 있다. 이를 위해서 세부 규정을 만들고, 법을 만든다. 그것이 강력하게 유지되는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 그 법을 범하는 사람에게 일정한 형벌을 가한다. 유대인들의 율법도 이런 구도 안에서 움직인다. 인간의 세세한 행동 규정까지, 먹는 문제와 앉아야 할 자리, 여성의 달거리에 이르기까지 모든 삶을 규정함으로써 인간을 죄로부터 떼어놓으려고 했다.
중세기의 기독교는 이런 가르침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청교도들이라 할 수 있다. 아래는 김남준 목사의 설교에 대한 졸고 “청교도 신앙의 영적 결벽증”에서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기독교 사상 2005년 9월호).

다른 목사들의 신앙과 세계관에도 여전하게 나타나는 현상들이지만 기독교 신앙이 자칫하면 순수주의에 함몰됨으로써 오히려 현실로서의 인간을 잃어버릴 염려가 많다. 인간에게 있는 짐승으로서의 삶이 부정되면 보기에는 그럴듯할지 모르지만 그건 이미 인간이 아니다. 우스갯소리로, 서양에는 남녀의 성행위에서도 ‘청교도 자세’가 있다고 한다. 성마저도 그런 엄숙주의가, 그런 순결주의가 지배하는 삶이 건강한 것일까? 밀란 쿤데라는 그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이런 순수주의를 다음과 같이 ‘키취’로 설명했다.
여기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존재에 대한 정언적 동의의 미학적 이상은 똥이 부인되는 세계, 모두가 거기에서는 마치 똥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는 세계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미학적 이상은 키취(저속)라고 일컫는다.(송동준 옮김, 305쪽).
자신들의 신앙적 절대명제를 합리화하기 위해서 불결하거나 불쾌한 것들은 아예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이런 키취가 기독교 신앙 안에도 적지 않다. 이미 앙드레 지이드는 <좁은 문>에서 인간에게 있는 에로스와 섹셜리티를 죄라고 부정함으로써 결국 한 여자의 삶이 파괴되었다는 사실을 고발하고 있다. 현실 사회주의가 극단적 순수주의에 빠짐으로써 실패한 것처럼, 내가 보기에 도덕적 허무주의가 우리 사회를 혼란하게 만들 수도 있고 개인의 인격을 파괴할 수도 있지만, 청교도의 도덕적 순수주의도 역시 이에 못지않은 위험성이 있다. 더구나 아무리 좋게 보아도 2,3세기 전에 영미 사회에서 일시적으로 필요했던 신앙적 정서에 불과한 청교도들의 영적 결벽증을 나사렛 예수의 복음과 연결시킨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인간에게 죄가 구성적이라는 사실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무지가 죄라는 헬라 철학자들의 주장보다는 모든 인간이 총체적으로, 근본적으로 죄에 기울어졌다는 성서와 기독교의 주장에 훨씬 타당한 근거가 있다. 이미 오래 전에 에릭 프롬이 <인간은 파괴적인 동물인가?>에서 이런 문제를 다각도로 분석했는데, 그 책을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따라서 약간 씩 다른 결론에 도달할 수 있긴 하지만 인간에게 파괴적인 경향이 존재론적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이 부정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이런 죄의 현실이 현대 신학자들에 의해서 어떻게 규명되고 있는지 검토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여러 학설
(이 항목은 주로 오트의 <신학해제> 166 쪽 이하 참조)

1) 쉴라이에르마허: 신의식이 무력성
쉴라이에르마허는 그의 신학적 착상이 ‘절대의존 감정’에 근거하고 있듯이 죄 문제도 이런 구도에서 다룬다. 하나님을 향한 절대의존 감정을 방해하는 것이 곧 죄라고 할 수 있다. “마음 상태 안에 함께 주어진, 혹은 어떻게든지 덧붙여진 신(神)의식이 우리의 자기의식을 불쾌(不快)로 규정할 때마다 우리는 죄의식을 가지게 되며, 이에 따라 우리는 죄를 육이 영을 거스르는 적극적 저항으로 파악한다.” 여기서 신의식의 자유로운 발전을 저해하는 죄는 그리스도께서 간과하신 것을 갈망하는 것으로써, 아직 발전되지 않은 신의식에도 불구하고 세계의식의 자기 활동 안에 근거하고 있다. 덧붙여 나타나는 신(神)의식은 방해되지 않고 그 의식과 일치되는 상태가 가진 배타적인 우월성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 이러한 통찰과 그 통찰로 말미암아 규정된 의지력의 불균등한 발전은 죄를 자연의 파괴로 파악하게 한다. 이렇게 파악하면 죄를 피할 수 있다고 보고 죄의 죄책적 성격을 이해하였다.

2) 바르트: 자신을 계시하는 하나님에 직면한 우리 실존의 진실
바르트는 쉴라이에르마허의 죄론을 이렇게 비판했다. “그는 기독교적으로 경건한 의식의 역사학적-심리학적 현실을 절대적으로 설정하여 그 한계 안에서 도달할 수 있는 죄의 이해를 현실적인 죄의 이해로 생각했다.” 그뿐만 아니라 초월이 의식의 내재 속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내재는 전적으로 초월에 대하여 닫혀 있다고 하는 점이 잘못된 생각이다. 바르트에 따르면 인간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식할 수 있는 근거는 인간이 죄인이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예수를 인식하는 것뿐이다. 결국 바르트의 죄론은 여전히 기독교론적인 구도로 전개되는 셈이다. 그에게는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은 인간 실존의 불완전이 아니라 예수를 인식하는 것뿐이다. 이런 점에서 바르트에게 죄론은 독립된 어떤 도그마가 아니라 화해론에 포함된 도그마일 뿐이다. 이 화해는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인식함으로 일어나는 사건이다. 그래서 바르트가 말하는 회심 사건도 역시 기독론적이다. 그는 이렇게 진술한 적이 있다.

이렇게 질문해봅시다. 우리가 인간으로 살아가면서 “멈춰! 앞으로! 이런 하나님의 명령을 따를 수 있는” 길의 출처는 무엇일까요? 이렇게 대답해야만 하겠지요.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려면 성령의 능력 안에서 이제 우리를 초월해 계신 한 분으로부터 “멈춰!, 다시 앞으로!”라는 말씀을 들어야만 합니다. 그분은 우선 하나님에게서 이런 명령을 받으신 다음에 그것을 우리에게 즉시, 그리고 완전하게 실현하십니다. 이런 일은 사실 그의 삶과 죽음에서 이미 실현되었습니다. 그는, 그리고 실제로 오직 그분만이 하나님의 “멈춰!, 앞으로!”라는 말씀을 듣고 실천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또 이렇게 질문해봅시다. 인간을 성취시키는 그 운동은, 즉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이 살아나는 극단적 논쟁에 이르는 그 운동은 어디서, 그리고 언제 일어납니까? 이 운동은 어디서 살아있는 사건이 됩니까? 이렇게 대답해야만 하겠지요. 그 운동은 오직 예수에게서만, 그의 삶에서만, 참된 하나님과 그 참된 하나님의 아들로서 행하신 그의 순종에서만 일어납니다.
또 다시 이렇게 질문해봅시다. 우리가 참된 회심에 이르렀다고 말씀하신 그 사람은 누구인가요? 이렇게 대답해야만 하겠지요. 그 사람은 실제로 오직 그 분입니다. 즉 그분은 자신을 사람들에게 계시하십니다. 그는 그런 사람들 없이는 그분이고자 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이런 모든 이들의 머리이십니다. 또한 이들의 토대이고 근원이기도 합니다. 그는 바로 그분이고, 오직 그분이어야만 합니다. (Richard Grunow 편, Barth Brevier, EVZ, 1966).

3) 틸리히: 소외
인간은 자신의 참된 존재에 대해서 낯설지 않다. 인간이 속해 있는 무한성에 대해 질문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은 유한한 인간이 무한성과 본질적으로 합일되어 있는 동시에 실존적으로 분리되어 있다는 것에 대한 징후이다. 인간이 무한성에 대해서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에 나타나는 것은 인간이 무한성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전제 아래서 틸리히는 죄 문제를 발전시켜나간다.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이지만 그 인간의 자유는 유한하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나갈 가능성이 있다. 아직 완전하지 못한 자유의 본질로 인해서 인간은 이중적인 불안을 안고 산다. “자기실현을 통해서 자기를 상실할까 불안해하고, 실현시키지 못해서 자기를 상실할까 불안해한다.” 어쨌든지 인간은 자기를 실현하기 위해서 본질로부터 실존으로 떨어지게 되는데, 이것은 실존자체의 성격이다. 그런데 틸리히의 주장에 따르면 본질에서 실존으로 옮겨가는 것은 자유와 비극적 운명에 뿌리하고 있다. 결국 이 과정에서 인간이 자기 소외에 빠지게 되는 것을 죄라 말할 수 있다. 인간의 실존은 그 자체로 소외된 실존이다. 인간은 실존적으로 자기를 실현하는 가운데 세계와 자기 자신에게로 항하고, 세계와 자기의 근거와 본질적으로 통일되어 있는 일치성을 상실한다. “하나님과의 본질적 일치성을 파괴하는 것이 곧 죄”다. 따라서 죄는 우리가 하나님과 맺는 관계의 문제인 셈이다.

4) 라너: 색욕(色慾)
위에서 몇 신학자의 주장을 통합해서 본다면, 죄는 자신의 존재가 자신의 존재에 거슬러서 설정해 놓은 모순이다. 쉴라이에르마허는 이 문제를 이렇게 해결한다. 신의식은 통찰과 의지로서 인간 안에 불균등하게 나타난다. 사실은 균등한 방향에서 불균등하게 나타난다. 이 균등성은 양심의 균등성이다. 양심의 균등성 때문에 우리의 행위가 죄가 된다. 이에 반해 바르트는 이렇게 이해했다.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도록 창조되었고, 이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그렇게 되어야할, 이미 그렇게 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증인이 되었다. 틸리히에 따르면 실존 자체가 소외이다.
그런데 라너는 우선 색욕을 “가치와 선에 대하여 의식적으로 취하는 모든 반동적 입장”이라고 보고, 자연동력에 근거하여 자발적으로 의식하는 사람에 대한 행위, 혹은 계속적인 능력이며, 이러한 사람은 인간의 인격적인 자유의 결단에 의한 필연적인 전제라고 보았다. 신학적인 의미에서 색욕은 “인간의 자발적인 욕구이다. 즉 그것은 인간의 자유결단에 선행하고, 이에 거슬려 굽히지 않는다는 뜻에서 그렇다.” 여기서 인격은 자연을 완전히 따라가 붙잡지 못한다. “인격은 자기규정에서 자유보다 먼저 주어져 있는 자연의 저항을 받는다.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모든 것, 즉 현실과 표현이 자기의 인격적 핵심에서 인간이 자기를 이해하는 것으로 되도록 할 만큼 인격이 결코 남김없이 달성하지 못한다.”


죄는 숙명인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인간에게서 죄가 현실로 자리하고 있다면 인간은 숙명적으로 죄에 사로잡혀 있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기독교 신앙의 한 복판에 똬리를 틀듯이 자리하고 있는 숙명주의적 죄론은 성서의 확고한 주장이라기보다는 중세기의 역사적 상황이 생산해낸 교리에 불과하다. 말하자면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받은 후 기독교가 로마 정치와 맞물려 돌아가면서 적지 않은 교리가 그런 위계질서를 유지하는 쪽으로 강화된 교리일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간단한 답이 나온다. 황제나 교황의 권위가 유지되려면 민중들의 절대적인 순종을 받아내야 했다. 이를 위해서는 원죄보다 더 긴용한 방도는 없을 것이다. “너는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야. 너는 황제와 교황의 말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야만 구원받을 수 있어. 네 마음대로 생각하거나 행동할 능력이 근본적으로 없는 거야.” 어릴 때부터 이런 윈죄론에 의해 교육받은 사람들은 혁명을 일으킬 수 없다. 북아메리카에 이민 간 청교도들이 아프리카의 흑인들을 노예로 부리면서도 역시 흑인은 원래부터 열등한 종족이고 죄인이기 때문에 백인들의 말에 절대 복종해야 한다는 식으로 원죄론을 적용시켰다. 인간을 노예화하는 구실로 삼은 셈이다. 인간 역사에서 인간성을 파괴하는 모든 권위적 질서는 민중들의 이런 열등감에 기초해서 유지된다. 여성, 장애인, 어린아이들도 역시 이런 대상들이다. 여자니까 어쩔 수 없다거나 너는 어려서 아무 것도 모르니까 내 말을 무조건 들어야 한다는 억압 구조가 고대, 중세 사회의 동서양을 막론하고 철저하게 지배하고 있었던 것처럼 기독교의 숙명론적 죄론도 이런 흐름과 맥을 같이 한다. 니체가 기독교를 가축 떼 윤리로 비판한 근거도 바로 여기에 있다. 프로이트는 종교를 가리켜 집단적 노이로제라고 낙인찍었다.
독실한 기독교인들의 의식도 대개 이런 방식으로 작동된다. 교회는 툭하면 회개하라고, 툭하면 죄* 때문이라고 가르친다. 지난날의 부흥회만이 아니라 요즘의 세련된 중산층 교회의 설교나 영적 각성대회에서도 역시 이런 죄의식을 공격하는 설교가 적지 않다. 어렸을 때 남의 집 과수원에 들어가 사과 서리 한 것을 회개하고, 음욕을 회개하고, 심지어는 술 마시고 담배 피운 것을 회개하라고 목청을 높인다. 아래는 김서택 목사의 설교에 대한 비평인 졸고 “종교적 모범생 콤플렉스에 의한 복음의 훼손”의 일부이다.  

* 백번 양보해서 김 목사가 청중들을 용서의 기쁨과 구원의 세계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죄와 심판을 강조했다고 인정하더라도 도저히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문제가, 훨씬 본질적인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다. 그의 설교가 지적하고 있는 죄는 도대체 무엇일까? 그의 아모스 강해설교를 꼼꼼히 읽었지만 아직도 죄가 무엇인지 손에 잡히지 않는다. “당신들은 죄의 세력 안에 들어있다.”는 그의 고함소리는 내 귀에 쟁쟁한데 그 죄의 실체는 오리무중(五里霧中)이다. 그는 이렇게 언급한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진짜 무서운 죄가 바로 성적인 문둥병입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밤새워 인터넷 뒤지고 비디오 보고 성인용 프로그램을 찾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불심판을 부르는 짓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것을 굉장히 무서워해야 하며, 작정하고 끊어 내야 합니다. 음란한 내용이 실린 책들이 있으면 치워 버리십시오. 음란한 비디오테이프가 있으면 태워버리십시오. 아이가 위험한 사이트에 드나드는 것 같으면 컴퓨터를 없애 버리십시오. 컴퓨터에 좀 무식해지는 것이 영적인 문둥병에 걸리는 것보다 낫습니다.(헐고 다시 세워라, 120).
김 목사는 인간의 성적 방종에 대해서 진저리를 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성에 대한 지나친 욕망이 바로 그가 말하는 기독교의 죄라는 말인가? 성서를 본문으로 삼아 설교하는 목사라고 한다면 성적 문란 상태를 묵과할 사람은 하나도 없지만, 목사는 청중들을 음란물로부터 보호해야 할 훈육 선생들이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음란물을 치우라고 아무리 설교 시간에 외쳐봐야 별로 실효성도 없다. 서울의 S 교회 오 아무개 목사는 청소년을 위한 ‘라이즈업 코리아 2004’라는 집회에서 청소년들이 음란물의 죄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던데, 이런 사실을 보면 설교자들의 인간 이해가 어느 정도로 가벼운가를 알만 한다. 설교를 복음의 차원으로부터 교양의 차원으로 끌어내리면서도 그 사태를 파악하지 못한 채 대단히 복음적인 설교가인 양 착각하고 있는 이 현실 앞에서 나는 절망한다. (서울 S 교회, 왕년에 신학대학교수였다는 김 아무개 목사는 한술 더 떠서 주례사 같은 설교를 자주하시더군.) 한 대목 더 인용해보자.
진정한 회개는 하나님께 미안해하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눈물 흘리는 것도 아닙니다. 눈물 흘리지 않아도 지금 잘못 살고 있는 것을 바꾸는 것이 회개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물건을 치우는 것, 떼어먹은 돈을 돌려주는 것,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거래는 손해를 보더라도 끊어 버리는 것, 구조적으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직업이라면 포기하고 영광스러운 실업자로 사는 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313).
김 목사는 떼어먹은 돈을 돌려주는 것이 진정한 회개라고 한다. 그는 이미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물건”이 무엇인지 ‘족집게’처럼 알고 있다는 듯이 그것을 치우는 게 회개라고 자신 있게 설교한다. 파렴치하게 살지 말고 건전한 윤리의식으로 살아야 한다는 이 지당한 말씀을 내가 반박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런 언급은 상식에 속한다는 사실만 지적하고 싶다. 이런 삶의 기준은 상식적인 판단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충분히 알고 있는 것에 불과한데도 불구하고, 인문학적 토대도 전혀 없는 목사가 단지 자신의 주관적 신앙경험과 교양에 근거해서 주일 공동예배 때 선포한다는 사실이야말로 한국 설교의 위기라 할 수 있다.(기독교 사상, 2004년 12월호).

죄가 기독교인들에게 숙명적으로 작용하게 될 경우에 구약성서가 제시해주고 있는 정의로운 세계는 우리와 상관없게 되고, 악이 교묘하게 준동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죄론이 은총론을 말살시킨다는 점에서 매우 위험하다. 수년 전 한국의 가톨릭교회가 ‘내 탓이오’ 운동을 전개한 적이 있다. 일견 기독교적인 덕목이 물씬 풍기는 것 같기도 하고, 대단히 보편적인 가치로 인정받기도 했지만, 또한 우리 한국 사람들이 너무 남의 탓만 하기 때문에 그런 사고방식을 뜯어고치자는 생각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여기에는 함정이 있다. 모든 게 내 탓이라는 말속에는 모든 게 네 탓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다. 이 구호가 실제로는 그렇게 작용한다는 말이다. “나만 잘못했나? 너도 그런 것 아니냐?”는 식이다. 생각해보라. 강도 사건이 벌어졌다고 하자. 강도당한 사람이 ‘내 탓’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그의 개인적인 덕으로 가능하긴 하겠지만 사회가 건강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런 사회에는 무책임이 지배하게 된다. 강제적인 방법으로라도 강도를 잡아 그만한 대가를 치르게 해야 할 것이다. 동시에 그런 파괴적인 일들이 발생하지 않도록 개인적인, 사회적인 상황을 바꿔나가야 할 것이다.


죄와 죽음

어떤 점에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죄의 현실 앞에서 딜레마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어느 누구도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이 현실과 숙명주의에 안주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 사이에서 길을 잃을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다. 자유주의신학자들의 주장처럼 인간의 죄가 단지 인간 의지의 차원이거나 교양의 차원으로 보고 어지간하면 해결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면 결국 죄 낙관주의에 빠질 것이며, 그렇다고 해서 죄 문제는 우리가 빼도 박도 못하는 숙명의 차원에만 집착하게 된다면 죄 비관주의에서 헤어날 수 없을 것이다. 어떻게 우리는 죄가 우리의 의지와 결단을 뛰어넘는, 초인간적인 힘일 뿐만 아니라 결국 기독교 신앙 안에서 해결될 수 있는 세력이라는 점을 상호적으로, 변증법적으로 풀어낼 수 있을까? 이를 위해서 기독교의 근본으로 돌아가는 게 가장 지혜로운 태도일 것이다.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인간을 죄의 숙명주의에 묶어놓지 않으며, 죄를 단지 윤리적으로 해결하지도 않고, 오히려 훨씬 근원적인 차원에서 접근한다. 그것은 곧 하나님과의 분리가 곧 죄라는 뜻이다. 자기집착으로 인해서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과 분리된 인간의 삶을 정확하게 꿰뚫어보는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와 자기집착의 상태가 인간에게 너무나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이 율법을 지키거나 교양인이 된다거나 어떤 단체에 가입하는 것으로 죄의 상태가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 바로 여기에 이 죄론의 핵심이 있다.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과의 단절 말이다. 이로 인해서 인간은 자기를 상실하고, 결국 죽을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죽음*은 곧 죄의 결과이면서 동시에 인간이 죄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도 하다. 인간은 결국 죽지 않으면 죄에서 벗어날 길은 없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여전히 죽지 않았다. 이게 바로 우리 인간이 처해있는 출구 없는 방인지 모른다. 기독교 신앙은 우리를 대신해서 이 죽음을 당하신 분으로 인해 우리가 아직 죽지 않았지만 이미 죄가 끝장나는 죽음을 선취(先取)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예수가 바로 그분이다. 그분의 십자가의 처형으로 인해서 우리는 죄가 개입할 수 없는 죽음을 미리 당하게 된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곧 세례이다.

* 바울이 로마서 6장 7절에서 이렇게 진술하고 있다. “죽은 사람은 이미 죄의 세력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이 진술에는 두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하나는 죽은 사람은 이 세상에서의 생명이 끊어졌기 때문에 당연히 죄와 상관없다는 뜻이며, 다른 하나는 인간이 죽기 전에는 결코 죄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다.

우리가 다음에 ‘성례전’ 문제를 다룰 때 세례에 대해서 충분하게 논의할 수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더 이상 깊이 들어갈 필요는 없다. 다만 세례가 왜 죄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통로인지에 대해서 그 방향만 정리하도록 하자. 인간에게 죄는 원죄 개념을 통해서 설명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하게 작용한다는 점에서 인간 스스로 그것을 해결할 수 없다. 우리의 노력은 우리의 근본을 새롭게 한다기보다는 단지 겉모양만 그럴듯하게 만들 뿐이다. 여기서 해결책은 그 어디에도 없다. 죽지 않는다면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죄 문제는 삶과 죽음의 근원이신 하나님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의 말씀에 완전하게 순종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를 믿는 사람들에게 이 죽음으로만 벗어날 수 있는 죄의 세력을 벗어날 수 있게 하셨다. 실제로는 죄가 있지만 없다고 인정하심으로써 우리는 근본적으로 그 죄의 세력을 벗어난 것이다. 이것이 곧 구원이며, 그것의 징표가 곧 세례이다.
과연 이런 기독교의 교리가 사람들에게 설득력이 있을까? 이게 바로 우리의 숙제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이런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지만 세상 사람들에게도 이것이 타당한 가르침으로 다가갈 수 있기 위해서 우리가 충분한 해석학적 논의를 진행시켜야만 한다. 이를 위해서 인간의 죄 문제를 훨씬 심층적으로 다루어야 하며, 인간의 자기 자신만의 노력이 아니라 다른 근본적인 힘의 개입으로만 이런 죄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인간이 자기 자신의 노력으로 죄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만 조금 더 논의하자. 죄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게 곧 자유라고 한다면 우리 인간의 삶이 기본적으로 자유를 신장하는 쪽으로 진행되어야만 했을 것이다. 문명의 발전, 의식주의 해결, 인권의 신장 등등, 인간의 자유라고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요소들은 놀랍도록 확장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자유가 근본적으로 확대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이게 바로 인간 자신의 한계이다. 우리는 무슨 방식을 통해서도 생명의 영역을 새롭게 하거나 확대시킬 수 없다. 예수님도 우리가 아무리 염려한다고 하더라도 키를 한 치도 크게 하지 못한다고 했다. 판넨베르크에 의하면 “서로 다른 인간들이 자기를 확장시키려고 하기 때문에 상호간 충돌하게 될 뿐만 아니라 이런 요청들이 기대한 만큼의 만족이 아니라 단지 대용품만을 획득하게 되며, 따라서 당연히 인간으로 하여금 생명을 진실하게 성취할 수 있는 기회를 강탈해 간다.”(209). 따라서 참된 자유는 사람들에게 우선 선물로서 주어지는 것이 틀림없으며, 순간적으로 상상의 필요성이나 자기에게서 이미 이루어진 것과는 달리 외부로부터 열려야만 한다. 이런 것은 오늘날의 영적인 상황에 대한 거대 담론만이 아니라 이미 전체 근대에서 다루어진 질문이기도 하다.


죄와 은총

이제 우리는 죄 문제를 정리할 차례가 되었다. 기독교의 죄는 인간의 삶을 파괴하려는 것이 결코 아니며 오히려 생명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가르침이라는 사실을 일단 명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이 말은 곧 기독교가 죄를 언급하는 이유는 그것이 이미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이미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사실을 전하려는 데에 있지 죄 자체를 규정하려는 데 있는 게 아니다. 그렇다면 결국 죄론은 은총론의 하부구조이다. 죄는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나게 하는 가르침이지 인간을 주눅 들게 하는 가르침이 아니다. 오트는 이 사태를 이렇게 진술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적이고 신학적인 죄의 개념은 화해와 구원으로부터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그리하여 ‘율법’의 개념은 실제적인 죄의 인식의 시금석으로 의심스럽다. 신적 도덕법적으로서의 율법이 고정된 율법규정의 나열로 되어 있다는 것은 사실상 생각할 수 없다. 물론 사람들은 자신의 생동에 구체적인 거점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특정된 계명의 형태로 표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규정목록을 도출해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하나님 앞에 선 존재’의 공간은 역사를 통하여 무한히 풍부하고 다각저기기 때문이다.(174).

이런 점에서 판넨베르크도 역시 마찬가지로 생각한다. 판넨베르크에 따르면 죄의 용서는 참된 자유에 대한 보증이며, 또한 이로써 확보된 인간의 휴머니티에 대한 신뢰이다. 이것은 곧 신앙에 근거한 자유는 인간을 멀리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인간을 향한다. 이런 점에서 “죄의식은 자기 부정이거나 반생명적인 표현이라기보다는 반대로 자기 왜곡 앞에서 생명을 긍정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174). 그의 진술에 좀 더 귀를 기울이자. 그는 죄와 사죄 문제를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한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책임적인 존재가 됨으로써 자신과 일체가 된다. 따라서 자유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그러나 어떤 생명계에 대해서, 그리고 그에게 발생하거나 간과되는 모든 것에 대해서 책임질 준비가 되어 있는가의 기준에서 측정된다. 왜냐하면 인간은 고립된 개체로서가 아니라 사회와 인류의 구성원이라는 점에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생명계 안에 있는 과오에 대한 죄책을 다른 이들에게서 찾는 것만이 아니라 그 죄책과 책임감을 스스로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획득한다. 이 안에서 그는 자기의 생명 영역과 일치하며, 또한 자신을 향한 개혁의 과업을 받아들인다. 이런 점에서 분명히 죄의 고백은 용서를 통해서 극복되어야 할 부자유를 가리키는 것이 결코 아니다. 부자유는 오히려 자기의 죄와 공동책임을 배제하고 거절하는 데서 나타난다. 자기의 죄에 대한 분명한 인식은, 이것이 자기 자신을 극단적으로 의심하는 경우가 아닌 한 용서에 대한 확신에서 가능할 뿐이며, 또한 이 인식은 죄의 용서로 인해 드러날 그 자유가 무엇인지 매우 분명하게 깨닫게 한다.(212).

이제 우리는 분명한 결론에 도달했다. 기독교가 말하는 죄, 죄 인식, 용서 구함, 사죄 확신은 인간을 죄의 구조 안에 가두는 게 아니라 참된 자유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가르침이다. 오늘의 한국 교회 안에서 죄의 현실이 얼마나 실질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의 용서에 대한 신학적 해명이 얼마나 정확한지, 궁극적으로 그런 과정을 통해서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자유롭고 책임적인 인간이 되었는지 성찰해 볼 때이다.  


<부록: 설교>
“죄를 어찌할 것인가?”
마 18:15-20, 2005. 9.4. 샘터교회

죄란 무엇인가?
요즘 한국교회 안에 ‘사형제도’ 문제로 시비가 분분합니다. 그 시비의 빌미는 한기총(한국기독교총연합회)이 먼저 제공했습니다. 그들은 사형제도가 성서에 근거한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이에 맞서 KNCC(한국기독교협의회)는 사형제도가 기독교 정신에 위배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아마 여러분이 이들의 주장을 각각 들어보면 모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어린이 유괴 살해범은 완전하게 사회와 격리시켜야 한다는 주장에도 일리가 있고, 아무리 그렇지만 인간의 생명을 끊는다는 것은 그것 자체가 폭력이라는 주장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사형제도를 반대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완전히 매도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사회와 역사를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진정한 대화가 불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서로 얼굴 붉히고 대립적으로 투쟁하기보다는 각자의 주장에 합리적인 근거를 제시하는 과정을 통해서 자연스러운 결과를 끌어내는 게 훨씬 효과적일 것입니다.
사형문제에 관한 논의는 ‘죄’를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도대체 인간은 왜 죄를 짓는 걸까요? 아니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죄라고 생각하나요? 인간은 원죄에 숙명적으로 물들어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죄를 짓게 되는 걸까요? 아니면 우리의 의지가 박약하기 때문에 죄를 짓게 될까요? 이런 신학적이고 철학적인 차원까지 나갈 것도 없이, 그냥 우리의 일상에서 이 죄가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 그리고 우리가 그것에 어떤 방식으로 대처하고 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잘못을 축소시키고 남의 잘못은 확대합니다. 예컨대 부동산 투기는 사회를 병들게 하는 잘못이라고 말을 하지만 실제로 그런 기회를 적절하게 이용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교회에 다니거나 다니지 않거나 이런 문제에서는 거의 차이가 없습니다. 저는 그런 분들의 삶을 따라가고 싶지도 않고,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근본적으로 인격이 왜곡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죄 문제는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양심적으로 사는가, 또는 조금 더 윤리적으로 사는가의 차원에 속한 게 아니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 죄는 훨씬 근원적인 문제입니다. 그것을 놓친다면 우리는 서로를 향해서 적대감만 품을 뿐이지 실제로는 죄의 결과라 할 수 있는 생명의 파괴를 막지 못합니다. 죄가 왜 법이나 사회윤리의 차원보다 훨씬 근원적인 차원인지 오늘 마태가 전한 예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봅시다.

죄, 혹은 죄인 앞에서
15절 말씀을 보십시오. “어떤 형제가 너에게 잘못한 일이 있거든 단 둘이 만나서 그의 잘못을 타일러 주어라. 그가 말을 들으면 너는 형제 하나를 얻는 셈이다.” 본문은 두 사람의 관계에서 벌어진 문제를 거론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잘못한 일이 있습니다. 사회적인 범죄 행위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두 사람 사이에 벌어진 잘못입니다. 아마 어떤 분은 예수님께서 뭐 시시하게 이런 문제를 거론하실까 하고 시큰둥하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것보다는 세계 평화를 파괴하는 로마의 시저가 저지르는 만행을 언급하셨어야 마땅하다고 보시나요? 요즘도 그런 논란이 많습니다. 사회정의, 국제평화 문제에 투신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도 그런 유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사회정의나 세계평화보다는 더 결정적으로 중요한 문제는 자기의 구체적인 일상에 대한 우리의 태도입니다. 재미있는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경제정의와 지속가능한 생태보존을 위해서 투쟁하는 진보적 목사와 지성인들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자기 집에서 매우 노골적으로 가부장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이게 인간의 한계인지 모르겠습니다. 멀리 있는 불의에 맞설 수는 있지만 자기 안에 있는 불의는 보지 못하는 것 말입니다. 오늘 성서 본문은 매우 시시한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이런 게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어떤 형제가 나에게 잘못한 일이 생겼을 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오늘 본문은 네 단계로 대처 방안을 제시합니다. 첫째는 개인적으로 충고할 것이며, 둘째는 한 두 사람을 증인으로 데리고 가서 충고하고(신 19:15), 그래도 해결이 안 되면 교회에 알리고, 교회의 공식적인 충고마저 거부하면, 마지막으로 그를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기라고 했습니다. 이 방식은 부분적으로는 구약과 연결되지만 근본적으로 그것을 뛰어넘습니다. 몇몇 증인을 내세우는 중간 단계에서 구약과 일치하지만, 그 결과에서는 전혀 다릅니다. 구약은 죄 문제를 기본적으로 이렇게 처리합니다. “그런 자는 애처롭게 여기지 말라. 목숨은 목숨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갚아라.”(신 19:21). 그러나 오늘 본문은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기라고(17절) 가르칩니다.
이방인과 세리처럼 여기라는 이 말씀은 해석하기가 간단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의 흐름으로만 본다면 이방인과 세리처럼 여긴다는 게 일종의 징벌처럼 생각됩니다. 그러나 복음서에서 이방인과 세리는 그렇게 나쁜 뜻으로만 나오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가까이 하신 사람들은 세리와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본문이 말하는 이방인과 세리를 호의적인 사람들의 표본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본문 자체만으로 해석이 충분하지 못한 경우에는 그것 전후의 문맥을 살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이어지는 21,22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자비한 종의 비유’(23-35)의 결론도 역시 형제에 대한 용서입니다. “너희가 진심으로 형제들을 서로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실 것이다.”(35절).
이런 문맥을 고려한다면 이방인과 세리처럼 여기라는 가르침은 결국 그들이 잘못을 깨닫고 그것을 인정하든 않든 상관없이 용서하라는 뜻으로 새길 수 있습니다. 이 상황을 좀 면밀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나에게 잘못한 형제가 자신의 잘못을 깨달으면 나의 형제가 되고, 깨닫지 못하면 이방인과 세리처럼 될 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죄 지은 형제가 어떤 태도를 취하든, 그 결과가 어떻든지 그에 대한 나의 일관된 태도입니다. 나는 그를 용서할 따름입니다.
사형 제도를 다시 한 번 더 말씀드려도 괜찮겠지요. 사형제도가 성서에 근거한다는 한기총의 주장은 구약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른 것입니다. 죽을죄를 지었으며 죽어야 한다는 논리가 구약의 가르침입니다. 그런 사람을 죽여야만 사회가 안전하게 작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이스라엘은 가나안 사람들을 악으로 정죄하고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복음은 죄를 그렇게 폭력적으로 다루지 않습니다. 용서하는 게 바로 악에 대한 예수님의 대처 방식이었습니다.

땅과 하늘
여러분은 예수님의 이런 처방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과연 이런 방식으로 이 세상에 폭력이 종식되고 진정한 평화가 실현될까요? 기독교의 이런 용서 행위, 궁극적으로 원수 사랑이라는 이런 행위는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이런 ‘나이브’ 한 방식 때문에 오히려 이 세상에 악이 준동하는 게 아닐까요?
예수님은 순진하기 때문에 죄 지은 형제를 무조건 용서하라고 말씀하신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죄를 훨씬 심층적인 세계에 뿌리를 둔 세력으로 보셨습니다. 그 심층으로부터 접근하지 않는 한 인간의 죄와 악은 결코 극복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18절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여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려 있을 것이다.” 즉 땅의 문제는 하늘과 직결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어서 19,20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다시 말한다. 너희 중에 두 사람이 이 세상에서 마음을 모아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는 무슨 일이든 다 들어 주실 것이다. 단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무슨 일’은 곧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송사문제(고전 6:1)를 의미합니다. 기도하면 이런 송사 문제가 해결된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이는 곧 옳고 그름의 판단은 하나님에 의해서 판단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조금 복잡한 이야기가 이어졌습니다. 이 말씀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얽히고설킨 문제는 어떤 율법적 규정을 적용하는 데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구체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풀어나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앞에서 한번 언급했듯이 이 땅에서 벌어지는 그 모든 것의 뿌리는 하늘, 즉 하나님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래도 죄의 뿌리가 하늘에 있다는 말을 좀 더 설명해야겠습니다. 예수님은 그냥 마음이 착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잘못을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게 아니라는 사실은 앞에서 제가 지적했습니다. 그것을 다시 기억하시면서 설명을 들으십시오. 우리가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야 할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야 할 이유는 인간은 늘 그렇게 잘못을 저지르며 살아가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죄는 우리의 실존이라는 말씀입니다.
기독교가 인간에게 원죄에 물들어 있다고 가르치는 이유도 역시 여기에 있습니다.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서 이 세상에 죽음이 들어왔고, 그의 죄가 후손들에게 유전된다는 이 원죄 개념은 인간의 실존에 내재하고 있는 그 죄의 깊이를 성찰한 데서 나온 결과입니다. 저는 여기서 인간이 얼마나 악한지, 얼마나 죄의 경향성에 쉽게 노출되는지에 대해서 자세하게 거론하지 않겠습니다. 사회에서 벌어지는 권모술수, 인간의 이기심, 파렴치한 행위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우리는 그런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만 볼 것이 아니라 그것의 뿌리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실제로 파렴치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비교적 교양이 있다고 자부하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작용하는 그런 악한 힘입니다. 저도 여전히 자기중심적이고, 나를 성취하기 위해서 교묘하게 자기를 합리화할 때가 많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죄 숙명주의를 옳다고 생각하는 게 아닙니다. 인간이 근원적으로 부패했기 때문에 아무리 노력해도 죄를 범할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그래서 결국 죄의식 가운데서 불안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을 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모두가 죄의 뿌리를 갖고 있으니까 다른 사람의 잘못에 대해서 입 벙긋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도 아닙니다. 우리는 가능한대로 개인윤리와 사회윤리의 새로운 지평을 구체화해 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건 그것대로 구체적인 대안들을 찾아나가야 하겠지만 이 문제의 근본을 훼손시키지는 말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땅에서 푸는 기도
우리가 무슨 일이 있어도 훼손시키지 말아야 할 근원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죄를 범하는 사람들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핵심이고, 그것에 대처해나가야 할 당사자들에게도 역시 하나님과의 관계가 핵심입니다. 죄를 짓는다는 건 구체적으로 이웃을 향한 것이지만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을 향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실정법에 위반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생명을 파괴하는 행위는 결국 죄입니다. 이런 잘못의 피해를 받는 우리가 그들을 향해서 구체적으로 책임을 지울 수 있겠지만 그런다고 해서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만 죄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있습니다. 사람의 속을 인간이 어떻게 판단할 수 있습니까? 그 죄의 여파가 어디까지 이를는지 인간이 어떻게 판단하겠습니까? 이런 점에서 죄의 판단과 징벌은 곧 하나님의 몫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원수 갚는 일은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게(롬 12:19) 옳다고 말한 것 같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정도 안에서 충고할 수 있으며, 그것이 받아들여지든지 않든지 상관없이 용서해야 합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마십시오. 모든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악을 그냥 모른 척 하고 묻어두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을 따른다고 하더라도, 사람들 앞에서 밝힐 건 밝혀야 합니다. 그리고 용서하십시오. 그게 땅에서 우리가 풀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리고 그를 이방인처럼, 세리처럼 여기십시오. 그것이 용서하는 길입니다. 그런 용서가 안 된다면 기도하십시오. 두 세 사람이 함께 기도하면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실 겁니다.

[레벨:5]블루군

2013.03.09 16: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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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답 게시판에 글을 올렸으나 답이 없어 원문에 다시 올립니다.

로마서 6장 7절의 해석과 관련하여 죽은 자들을 실제로 육체적으로 죽은 자들이라고 하는 해석을 보았습니다. 
구절주의(요절주의)에 의하지 않고서는 그렇게 해석하기 힘들 것 같은데 왜 그렇게 해석했는지 궁금합니다.
참고로 제 생각은 아래와 같습니다.



로마서 6장 1~15절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1. 로마서 6장의 흐름
로마서 6장 1절에서 15절은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지는 단락으로서 15절의 결론을 내기 위한 논리전개의 흐름입니다. 5장까지 사도 바울의 논리전개는 죄는 율법이 나오기 전에도 있었다.=> 율법을 온전히 지킨다면 구원에 이를 수 있지만 사람인 이상 그건 불가능하다 => 구원은 오직 주 예수를 믿음으로 그분의 의의 전가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 그렇다면 주 예수를 믿으면 우리는 죄인이 아니기에 맘 놓고 죄를 지어도 되는가? =>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죄에 대하여 죽는다는 것을 의미(방향성의 의미)하기 때문에 그 방향성이 다시 죄쪽으로 흐른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과 같이 갈 수 없다.라는 식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6장의 앞부분은 여기서 마지막 부분인 그 방향성을 다시 죄쪽으로 돌리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같이 갈 수 없다고 밝히는 부분입니다.
 
 

2. 6장 7절의 해석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이 구절은 전체적인 문맥상으로 파악하면 전혀 어려울 것이 없는 구절입니다.
2절에서 밝힌 ‘죄에 대해서 죽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한 것이고, 또 7절로 이어지는 6절에서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에서 말하는 죽은 자입니다.
7절은 이 6절에서 이어지는 ‘죽은 자’입니다. 즉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우리의 죄의 몸이 죽는 행위 이고 그 결과 (죄의 몸에서) 죽은 자는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는 논리의 흐름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구절에서 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는 죄라는 방향성에서 하나님을 향한 방향성으로 바뀐 것이기에 그 사람이 죄로의 방향성을 계속 유지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방향성이 형성된 것이 아니다. 즉 예수님을 통해 의를 입게 된 자들은 죄로의 방향성을 가지면 안된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물론 육체를 지니고 있기에 육체적으로는 죄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를 통해 하나님을 향한 방향성을 유지해야 한다라고 이야기 하고 있구요.
 

 
3. 죄에 대하여
 
원죄란 하나님과의 일치가 깨진 그 상황을 말합니다. 즉 아담과 하와로 대표되는 인간이 어떤 유형의 죄를 지었다는 것이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담과 하와의 행위로 인해 우리와 하나님과의 일치성이 깨졌다는 것이 원죄라고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또한 (자범)죄란 하나님과의 분리가 심해져가는(하나님이 아닌 다른 곳으로 방향성이 굳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원죄론은 동정녀 마리아에 대한 설화가 4복음서 중 두군데나 기록 될만큼 초기 기독교에서도 주요한 주제였던걸로 생각됩니다. 원죄론에 대한 인식의 문제가 없었다면 굳이 두군데나 기록하여 원죄론에 대한 해명을 할 필요가 없었을테니까요.
 
원죄에 대한 부정은 ‘인간이 원래부터 죄를 가지고 태어났다면 자신의 의도나 행위와 관계없는 일로 심판을 받는 것이 정당한가?’의 문제에서 시작합니다. 다섯명이 모이면 싸우게 프로그램 되어 있는 유전자 조작 인간의 싸움에 대해서 심판하는 것이 정당한가의 문제라고도 볼 수 있겠네요.
 
 
하지만 제가 생각하는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원래 사람은 하와이에만 살고 있는데 그 하와이의 법을 어긴 사람은 그 자손까지 한국으로 영원히 추방된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한국에 추방된 사람은 또 한국에서 군락을 이루며 살아갈겁니다. 그렇게 몇 대가 흐른 뒤에 그 자손들은 선조가 하와이에서 법을 어긴 것에 대해서 자신과는 무관한 일이다라며 하와이로 가고자 하지만 이미 선조의 위법으로 인해 갈 수 없습니다. 
 
이것은 어찌 보면 부당한 일입니다. 선조의 잘못으로 인해 내가 피해를 봐야 한다는 거니까요. 하지만 하나님과 인간의 완전한 일치성이 깨진 것이 선조의 잘못이라면 그 깨진 것은 특별한 방법 없이는 온전히 회복하기가 불가능하기에 인간은 하나님과의 일치가 깨어진 상태에서 태어난다는 것이 원죄론입니다.

현실세계로 돌아와서 내가 기아로 굶주리는 북한이나 아프리카에 태어나지 않고, 내가 한국에 태어난 것이 하나의 복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분명히 더 많은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이죠. 만약 아프리카에서 태어난 누군가가 이건 불공평하다며 주장해서 다시 태어날 때부터 부귀의 차이가 없는 상태에서 시작하자고 해도 이미 인간이라는 사회에 속해 있는 이상(인간으로서의 삶이 모여 만들어진 사회에 산다는 것이 바뀌지 않는  이상) 인간세상에서 불공평하게 태어나는 것은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불평등이 하나님이 잘못 창조한 잘못일까요? 제 생각에 그렇게 불평등하게 된 것은 인간이 살아오면서 쌓인  행동들의 결과물이지 하나님이 결점을 가진 인간으로 잘못 창조하였기 때문은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예로 돌아와서 마찬가지로 하와이가 아닌 한국에서 태어나는 것은 받아들여야 할 숙명같은 겁니다. 이것은 어떤 잘못을 저지른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일치가 깨어진 상태를 말하는 겁니다. 이후의 죄란 그 분리가 심화되는 걸 말하는 거구요.
 
물론 구원은 하나님의 문제이기 때문에 갓 태어난 태아의 경우도 원죄 때문에 구원을 못 받는다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 구원에 대해서 하나님의 방식으로 역사하실 것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4. “죽은 사람은 이미 죄의 세력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이 진술에는 두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하나는 죽은 사람은 이 세상에서의 생명이 끊어졌기 때문에 당연히 죄와 상관없다는 뜻이며, 다른 하나는 인간이 죽기 전에는 결코 죄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다. 에 대한 생각.
 
(1) 죽은 사람은 이 세상에서의 생명이 끊어졌기 때문에 당연히 죄와 상관없다는 뜻에 대하여
앞서 살핀 것처럼 문맥을 읽어보면 여기서 죽은 사람은 육체적으로 실제로 죽은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죄의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우리가 죄에서 죽은 것을 말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죄에 대해서 하나님과의 분리라고 할 때 죄와 상관없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분리가 회복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사람이 육체적으로 죽는 일이 하나님과의 분리의 회복이 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만약 사람이 육체적으로 죽은 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다고 주장한다면 모든 사람은 다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과 일치하는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겁니다.(실은 신정통주의적 신학내용을 보면 이런 보편적 구원론이 바탕에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도식화 하자면 다음과 같이 주장하는 겁니다.
죄 = 하나님과의 분리
죄와 상관없음 = 하나님과의 분리와 상관없음 = 하나님과의 분리의 회복
죽음을 통해 죄와 상관없음 = 죽음을 통해 분리가 회복 = 죽음은 모든 이들의 구원의 행위
 
아니면 죽은 사람이 죄와 상관이 없다는 것은 죽음 이후에는 하나님과의 분리 여부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으로 해석 될 수도 있는데, 이 경우도 마찬가지로 죽음으로 하나님과의 분리가 회복된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은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의미일테니까요.
 

(2) 인간이 죽기 전에는 결코 죄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뜻에 대하여
마찬가지로 앞서 설명한 것처럼 여기서 죽은 사람은 육체적으로 실제로 죽은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죄의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우리가 죄에서 죽은 것을 말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도 문맥상의 의미를 무시하고 단순히 문장으로 생각해 봐도 고려할 만한 것이 많은 표현입니다. 물론 기본적으로 육체적 인간이기에 육체적 한계로서 죄성을 벗어날 수 없다라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로마서 6장에서 이야기하는 것 중 중요한 내용 하나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한 의의 전가로 인해 인간인 우리도 육체적 죄의 상태에서 의의 상태로 변화되게 되었다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 내용과 연계해서 생각한다면 죽기 전에 죄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주장은 인간이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를 통해 죄에서 의로 바뀌는데 하필이면 그 시점이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 되는 시점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으로 방향성이 바뀐 시점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 된 이후 육체적으로 죽는 시점이라는 겁니다. 즉 뭔가 이상한 결론이 나오고 맙니다.
 
도식화 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 = 죄에서 의로 바뀜 = 하나님을 향한 방향성을 가지게 됨
죽기 전에 죄에서 벗어날 수 없음 = 죽기 전에 죄에서 의로 바뀔 수 없음 = 죽기전에 하나님을 향한 방향성을 가질 수 없음 = 죽기 전에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 될 수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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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조직신학 9장: 하나님과 창조 [2] 2005-05-18 6682
66 여성신학 10장. 여성은 베일을 써야하는가? 2005-05-17 4508
65 조직신학 8장: 삼위일체에 관해서 [3] 2005-04-27 6895
64 여성신학 9장: 인간은 왜 남성과 여성인가? 2005-04-25 4274
63 조직신학 7장: 유신론과 무신론 2005-04-20 5571
62 여성신학 8장: 여성신학과 기독교 인간론 2005-04-19 5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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