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장: 은총론

조직신학 조회 수 5858 추천 수 102 2005.09.14 13:26:45
12장
은총론
-율법과 복음-


솔라 그라티아

개신교 신자들 중에서 마틴 루터가 제시한 솔라 그라티아(sola gratia)라는 신앙 구호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참고적으로 루터는 그 이외에도 솔라 스크립투라(sola scriptura), 솔라 피데(soa fide)라는 매우 중요한 개신교 신앙의 특징을 제시하고 했다. 루터는 도대체 무슨 뜻으로, 즉 로마 가톨릭 교회와 어떤 차이점을 생각했기에 개신교 신앙이 솔라 그라티아에 놓여 있다고 생각했을까? 여기에는 로마 가톨릭 교회와 개신교의 서로 다른 구원론이 놓여 있다. 최근에 이런 차이를 좁혀내려는 신학적 시도들*이 양측에서 전개되고 있다. 이 문제를 일단 표면적으로만 본다면, 로마 가톨릭 교회는 인간 구원이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업적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보지만, 루터는 여기서 인간의 업적을 배제시키고 ‘오직 은총’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 문제는 사실 다음 장에서 다루게 될 칭의론과도 연결된다. 인간의 의로움이 인간의 행위와 전혀 상관없이 오직 하나님에 의한 사건인지 아닌지에 대한 입장의 차이가 로마 가톨릭교회와 개신교 사이에 있다. 이렇게 볼 때 은총론이나 칭의론 문제에서의 관건은 인간의 행위, 인간의 업적을 어떻게 판단하는가에 있다. 인간의 의로움과 구원 사건에 인간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 아니면 완전히 배제되는가의 문제이다.

* 1999년 10월31일 로마 가톨릭 쪽의 에드워드 카시디 추기경(교황청 교회일치위위원장)과 루터교 세계연맹 크리스티안 카라우저 감독은 독일 남부 도시 아우구스부르크에서 열린 예배에서 “기독교의 구원은 인간의 노력이 아닌 ‘신의 사랑’에 의해서만 정당화될 수 있다고 믿는다.”는 공동선언문에 서명했다. 이 공동선언문은 각기의 전통을 수호하면서도 서로의 신앙적 지평을 넓힘으로써 일치의 틀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동안 루터교회는 아우그스부르크 신조와 소교리문답서만을, 로마 가톨릭은 트리엔트 공의회의 결정만을 신앙적 기초로 주장했었다. 이제 이 공동선언으로 인해서 지난 5백년간의 종교적 갈등이 완전히 해소될 수 있을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 단초는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기상 2000년 1월호, 217 쪽 참조).

사실 이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게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총을 언급하기는 하지만 그 은총이라는 건 어떤 물건처럼 우리가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대상이라기보다는 이 세계와 우리 인간의 삶을 해석함으로써 간접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어떤 절대적인 힘이기 때문에 단정적으로 말하기 힘들다. 어떤 사람은 성서가 대답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겠지만 성서도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그런 불확실성 안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신앙고백일 뿐이지 우리에게 정답을 제공해주는 답안지가 아니다. 성서는 우리 개신교회가 주장하는 솔라 그라티아에 상응하는 부분도 있지만, 인간의 업적을 강조하는 부분도 적지 않았다. 가장 손쉬운 예로 야고보서는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까지 말했으며, 그 이외에도 기독교인의 행위를 강조한 성구는 비일비재하다. 비록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힘들지만 인간의 행위와 업적을 어떻게 평가하는가의 문제에서 루터가 말한 솔라 그라티아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시각을 제시해준다.
오직 은총으로 구원이 발생한다는 이 솔라 그라티아 개념은 기본적으로 구원 사건에서 하나님의 주도권을 절대화하는 입장이다. 여기에는 구원 개념의 심층적 이해가 토대하고 있다. 즉 구원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따라서 구원이 하나님의 배타적 행위인지, 그래서 오직 은총이라고만 말해야하는지, 아니면 인간의 업적도 필요한지에 대한 생각이 정리될 수 있다. 만약 우리의 생활습관을 고치는 것도 구원과 연결된다면 당연히 인간의 업적은 포기될 수 없다. 교회생활을 성실하게 하고, 이웃에게 봉사의 삶을 보여주는 것은 분명히 우리 인간의 업적에 속한다. 이런 일들은 곧 ‘율법’의 관심 사항이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규범이라 할 율법을 따르는 것은 곧 우리의 종교적인 삶과 세속적 삶을 함께 어떤 단계까지 끌어올리는 계기가 되기 때문에 인간의 업적에 속한다. 우리의 변화된 그런 모습들이 구원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런 율법적 구도에 의해서 성취된 인간의 업적이라는 건 아무리 괜찮은 경우라고 하더라도 늘 상대적인 가치밖에는 얻을 게 없다. 다른 사람보다 좀 더 도덕적이고 성실한 사람이 된다는 게 무의미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이건 곧 하나님의 구원을 일종의 ‘개량주의’ 안에서 이해하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가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구원은 곧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셨을까? 예수는 율법을 통해서 괜찮게 개량된 바리새인들보다는 그들이 죄인이라고 치부한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 먼저 들어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기본적으로 예수의 삶과 율법과는 어떤 방식으로도 연결시켜서 생각해볼 가능성은 전혀 없는 것 같다. 그렇다면 예수는 율법을 폐기한 것일까? 이미 예수 당신 자신이 율법을 폐기하러 온 게 아니라 그것을 완성시키러 왔다고 말씀하신 걸 보면 예수가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는 율법의 존속이냐, 폐기냐 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건이라고 보아야 한다. 예수의 가르침을 이렇게 생각해도 좋을까? 하나님 나라는 오직 하나님만의 배타적인 사건이지만, 그래서 인간의 업적인 여기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지만 구체적인 역사 안에서 살아가야 할 사람들이게는 일종의 과정과 수단으로써 그런 인간 삶을 규정해야 할 율법이 필요하다. 아직 우리는 정확한 대답을 끝내지 않았다. 이런 정도의 윤관만 갖고 율법과 복음의 관계, 즉 ‘은총론’의 문제 안으로 좀 더 깊이 들어가 보자.


은총 개념

위에서 말한 대로 은총론은 곧 구원론이라고 할 수 있으며, 동시에 인간론과도 매우 깊숙이 연관된다. 구원론, 인간론, 은총론은 인간 구원이 어떤 방식으로 발생하는가에 대한 견해를 다룰 때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신학개념을 언급할 때는 주변에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다른 개념들과의 관계를 충분히 고려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총(은혜)을 말한다는 것은 은총(카리스)이라는 언어가 가리키고 있듯이 인간 스스로 이룰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의 선물로 받는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 단어의 의미를 조금 더 확장시켜서 생각해본다면 다음과 같다.
1)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말한다. “여호와께서 그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 정권으로 만유를 통치하시도다.”(시103:19). 따라서 우리는 “보편적인 창조와 유지와 통치의 은혜”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 이런 사실은 우리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을 조금만 눈여겨보더라도 아주 확실하다. 예컨대 우리의 우주는 1조의 1조 배에 이르는 별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중에 지구와 같이 생명이 있을만한 별은 거의 무에 가깝다고 한다. 그러니까 지구의 생명 사건은 그 어떤 우연에 의한 사건이기보다는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 인격의 섭리에 의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120명의 연주자들이 자기 마음대로 소리를 내고 있는데 그 소리가 갑자기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교향곡’으로 울려 퍼질 수 있는 가능성을 생각해보라. 이 피조의 세계는 분명히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한 세계이다.
2) 하나님의 보편적인 은혜는 그의 선택과 약속의 은혜로 집약된다(사54:10참조). 우리는 구약성서를 통해서 하나님이 유대인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우리 인류 전체를 대표하는 유대인들은 그 어떤 업적이나 능력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과 약속에 의해서 특별한 은혜를 받은 이들이다. 이런 은혜는 오늘 우리에게까지 확장된다. 우리의 모습만 본다면 구원의 세계에 들어갈 수 없지만 우리가 알 수 없는 그 어떤 힘에 이끌려서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그런 약속 가운데서 우리는 살아간다. 이건 하나님의 은혜일뿐이다.  
3)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행위”, 곧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말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는 죄와 용서와 구원의 은혜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엡1:7). 기독교인은 위에서 말한 두 가지 은혜, 즉 창조 세계 안에 있는 생명의 영과 유대인들에게 임한 선택과 약속만이 아니라 더욱 결정적으로 역사적 실존인물이었던 예수사건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믿는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이제 일반적으로 포괄적이던 은혜가 구체적이고 확실한 은혜로 집중된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에 의해서 우리의 죄가 용서받게 되고, 예수의 부활로 인해서 그 사죄가 보증될 뿐만 아니라 궁극적인 생명 사건으로 끌려들어가게 되었다. 이것보다 더 위대한 은혜는 있을 수 없다.
4) 하나님의 은혜는 기독교인들에게 여러 가지 은사(카리스마)로 나타난다. 은사가 곧 은혜라고 할 수는 없지만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즉 은혜(gratia)는 은사(donum)으로 나타난다는 말이다. 이는 곧 구원받은 자는 그런 구원의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자가 있을 수 없듯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는 그에 해당되는 은사를 통해서 그 은혜를 증명하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은혜가 늘 우리가 예상하는 은사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어떤 도덕주의나 업적주의처럼 이런 은사를 은혜보다 상위에 놓으려는 생각은 은혜를 상대화시킬 염려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의 세계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그것을 증명할만한 은사가 뒤따른다고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기뻐하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 운다(롬12:15).
5) 그리스도를 뒤따름이 없는 은총은 값싼 은혜*에 불과하다. 그리스도를 뒤따라 피조물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값비싼 은혜이다. 본훼퍼는 이 값비싼 은혜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뒤따르도록 우리를 부르기 때문에 값비싸다. 그것은 인간의 목숨을 희생하기 때문에 값비싸다. 이리하여 그것은 비로소 생명을 선사하기 때문에 은혜이다. ··· 무엇보다도 은혜는 하나님에게 값비싼 것이었기 때문에, 그것은 그의 아들의 목숨을 희생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값을 비싸게 치르시고 여러분을 사셨습니다.’는 말씀이 있듯이 하나님에게 값비싼 것이 우리에게 값싼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에 값비싼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하나님에게 그의 아들이 우리의 생명을 위하여 그를 내어주었기 때문에 은혜이다. 값비싼 은혜는 하나님의 성육신이다.”(나흐폴게 크리스티, 15). 즉 본훼퍼가 말하려는 바는 하나님의 은혜를 단지 복 받기 위한 것이라거나 자기가 살아가는 수단으로 만드는 것은, 또한 종교적 위로를 받기 위한 것만으로 간주한다면 그것은 곧 값비싸게 치른 하나님의 구원행위를 값싸게 만드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전존재를 모두 던져 넣어야할 가장 궁극적인 사건이다.  (김균진, 기독교 조직신학 3권 참조).

*여기서 값싼 은혜라는 게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2년 전에 사랑의 교회가 새벽기도회 열풍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 “부모의 새벽기도 자녀의 평생축복, 자녀의 새벽기도 부모의 노후보장”(?)이라는 슬로건으로 이 새벽기도회가 치러졌다. 또 최근에는 서울 시청 앞에서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라이즈 업 코리아’ 대회에 5만 명 이상이 모였다고 한다. 이와 유사한 이벤트는 한국교회에 매우 익숙한 일이 되었다. 그렇게 모이기를 힘쓴다는 것, 그리고 그런 일들이 실제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그만큼 한국교회의 영적 에너지가 막강하다는 실증인지 모르겠지만, 그런 모임에서 과연 무슨 일들이 일어나는가에 대해서는 우리가 ‘값싼 은혜’라는 신학개념으로 심각하게 성찰해 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기독교 모임에 ‘라이즈 업 코리아’라는 슬로건을 내 건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과 국가 이데올로기를 동일시함으로써 어떤 종교적 성과를 얻어 보겠다는 의도이거나, 그게 아니라면 교회와 국가의 근본적인 차이를 간과한 신학적 미숙의 결과이다. 물론 그들은 청소년들이 신앙적으로 각성함으로써 코리아가 업그레이드 될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리고 그게 곧 기독교 신앙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것 자체가 매우 심각한 신학적 문제를 안고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곧 일종의 국가 종교, 일종의 시민종교로 전락할 위험성을 말한다.


은총론의 왜곡 현상

다시 하나님의 은총과 이에 직면해 있는 인간을 생각해보자. 오늘처럼 정치, 경제, 과학 등에서 거의 무한한 인간의 능력이 주창되는 이 시대에 우리가 여전히 하나님의 은총을 말한다는 것은 과연 어느 정도나 설득력이 있을까? 인간의 전능이 예찬되고 있는 오늘의 자리에서 우리는 이런 은총론의 자리를 좀 더 주도면밀하게 제시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게 되면 이 세계는 기독교의 가르침을 일종의 독단론으로 치부하고 말 것이다. 우선 우리는 이 은총이 몇 가지 부분에서 왜곡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선 살펴야 한다. 교회 안에서는 은총 편의주의가 진정한 의미에서의 은총을 가로막고 있으며, 교회 밖에서는 은총 무용론이 그렇다.

1) 은총 편의주의
오늘 교회 현장에서 일컬어지는 은총은 그야말로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이나, 아니면 자신이 감당하기 어려운 일 앞에서 그것을 쉽게 해결하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자기가 별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으면서도 사업이 잘되거나 자녀들이 잘되면 그게 곧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말한다. 물론 우리의 모든 삶이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점에서 이런 주장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현실의 무게를 은총이라는 말로 쉽게 벗어버리는 것은 올바른 태도라 할 수 없다. 일종의 요행주의와 다른 게 아니다.
앞에서 본대로 본훼퍼는 기독교인들이 자칫하면 ‘값싼 은혜’에 빠진다고 경고했다. 신앙을 단순히 하나님으로부터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삶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한 도구로 생각하다 보면 이 세상에서의 책임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게 마련이다. 따라서 세상과 교회를 이원론적으로 구분하고, 교회는 순전히 종교적인 관심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본훼퍼는 삶의 주변이 아니라 그 중심에서 초월적인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곧 그의 비종교적 해석이다. 요즘 기상 10월호에 새들백 교회의 릭 워렌 목사의 설교 비평을 게재했다. 그가 제시하고 있는 매우 실용적인 복음 이해가 바로 전형적인 종교적 해석이라는 점에서 복음이 도구화된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 졸고 안에서 본훼퍼의 비종교화 개념과 연결된 대목을 여기 인용하겠다.

내가 이렇게 설명해도, 아마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개인적으로 만나서 새로운 삶을 얻는 게 곧 구원 사건이며, 그것이 곧 복음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것이다. 옳은 말이다. 복음은 분명히 하나님 나라를 향한 개인의 결단을 요구한다. 이는 곧 복음 사건 앞에서 개인이 책임적인 존재라는 말이다. 그러나 복음은 ‘개인적’이지만 ‘사적’이지는 않다. 그 복음은 우리의 사적인 문제를 해결해주는 알라딘의 요술램프는 결코 아니라는 말이다. 이미 60년 전에 기독교의 비종교화를 주장한 본훼퍼는 이렇게 언급했다.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 세상에서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만 우리는 성실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라는 작업가설 없이 우리를 이 세상에서 살게 하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항상 그 앞에 서야 하는 바로 그 하나님이시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함께, 우리는 하나님 없이 산다.(옥중서간, 원래 이 책의 원제는 ‘항거와 순종’이다.).
내가 보기에 워렌은 본훼퍼가 지적한 하나님이라는 ‘작업가설’의 구도에 철저하게 묶여 있는 사람이다. 그의 설교에서 하나님은 자동판매기처럼 청중의 사적인 종교적 요구를 자동적으로 해결해주는 대상으로 전락했다. 이런 방식으로 그가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얻었을지는 몰라도 복음적인 설교자는 결코 아니다. 확실한 증거도 없이 이라크 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사람들의 고귀한 삶을 파괴한 미국의 부시를 적극적으로 지지해서 대통령 재선에 성공하게 만든 사람들이 바로 미국의 보수적 복음주의자들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에서도, 워렌도 물론 이런 유형의 목사인데, 우리는 복음을 사적인 차원으로 끌어내리는 설교의 위험성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저간의 문제를 야베스에 관한 워렌의 설교에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검토해보자.

2) 은총 무용론
다른 한편으로 세상 사람들은 이런 기독교인의 은총 편의주의와 대립적인 태도를 취하는데, 이 세상의 모든 문제를 자신들의 노력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전형적인 율법주의라 할 수 있다. 그들은 하늘로부터 오는 은총 따위는 거들떠보지 않고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원리에 최선을 다 하는 것만이 바른 길이라고 주장한다. 일종의 역사 진보주의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들의 이러한 입장은 외면상 매우 탄탄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은총편의주의처럼 부실하다. 일단 이런 은총 무용주의는 인간의 업적과 능력에 초점을 두기 때문에 인간 스스로 교만하게 되고 인간 사회를 오직 경쟁적인 구조로만 형성해나간다. 우리가 2001년 9월11일 미국 무역센터 테러 사건을 보았듯이 인간의 완벽한 시스템이라는 것이 일순간에 쓰레기로 변해버리는 가능성이 상존한다. 그런데도 인간은 위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생명의 영과 완전히 담을 쌓고 살아간다면 자기 혼자 애를 쓰다가 삶을 소진시켜 버릴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기독교는 은총의 본질을 올바로 해석하고 적용시켜서 그것이 교회 안에서만 일종의 비의(秘儀)적 도구로 사용되지 않도록 해야 하며, 더 나아가서 이 세상에서 보편적인 구원의 방편으로 이해되도록 해야 한다. 은총이 없으면 인간 구원도, 세계 구원도, 그 자유와 해방도 없다는 사실을 현실적인 지평에서 회복해야 한다. 이제 구원의 몇 가지 차원을 살펴보자.  


이원론적 은총과 일원론적 은총

전통적인 루터 교회의 구원론은 이원론적 형태를 보인다. 왜냐하면 율법과 복음, 하나님의 진노와 사랑이 대립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에게는 진노와 은총이 계시되고, 인간에게는 죄와 신앙이 계시된다. 이러한 이원성으로부터 이원론적인 칭의론이 발생한다. 이런 주장이 그렇게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다. 신구약성서 전체를 놓고 볼 때 하나님은 율법을 명령하기도 하며 복음으로 위로하기도 한다. 또한 하나님이 인간에게 진노를 내리며 동시에 죄를 없다고 인정하는 은총도 내려주신다. 율법과 진노는 우리에게 두려움을 통해서 죄를 멀리하게 만들고, 복음과 은총은 우리에게 믿음을 통해서 기쁨에 이르게 한다. 그러나 어쨌든지 루터교는 이런 이원론적 구도를 아주 명백히 함으로써 복음이 우리 삶을 전폭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 길을 저해했다.  
이에 반해 개혁주의 신학자인 바르트는 전형적인 일원론적 구원론을 대표한다. 이것은 곧 그의 계시 일원론에 의한 귀결이라 할 수 있는데, 이에 의하면 율법은 ‘복음의 형식’, 즉 복음의 구성요소이지 복음의 대립요소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은총이다. “하나님이 율법을 통해서 말씀하시든지 복음을 통해서 말씀하시든지, 하나님이 거룩한 분으로 말씀하든지 사랑하는 분으로 말씀하든지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Deus dixit!)는 사실은 ··· 이미 그 자체로서 은총이다.”
이 두 입장을 다시 요약하자면, 하나님의 은총은, 즉 그의 구원은 심판 없는 은총뿐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곧 일원론적인 이해이며, 심판과 은총이, 즉 율법과 복음이 변증법적으로 작용한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곧 이원론적 이해다.
우리의 삶에 나타나는 여러 현상들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이 도처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불행이라고 생각되는 사건이라도 다른 한편으로는 구원의 길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친다는 극단적인 표현을 빌리지 않더라도 고난과 시련이 오히려 생명과 의미에 집중할 수 있는 기회로 작용한다는 사실은 너무나 분명하지 않은가? 이런 점에서는 이 세상에 하나님이 진노와 심판이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의 의라는 것이 그냥 좋은 게 좋다는 식이 아니라 인격적인 성격을 담지하고 있기 때문에 심판을 병행하는 것으로 생각해야만 할 것이다. 성서의 하나님은 늘 인간의 역사에 개입해서 자신의 의지를 표현했다는 사실에서 볼 때 인간이 하나님의 의지를 거스르는 경우에 심판이 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우주적 은총과 개인적 은총
-만인구원과 개인구원-

하나님의 구원 은총이 개인적으로 임하는 것인지 공동체적으로 임하는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다. 마틴 루터는 개인의 구원을 우선적인 것으로 생각했으며 불트만도 역시 그렇다.
이에 반해 틸리히, 떼이야르 드 샤르뎅, 쉬츠 등은 우주적 구원론을 대변한다. 숄, 콕스, 메츠, 몰트만 같은 이들에게서는 우주적 구원론이 사회 혁명적 지평으로 발전했다.
이 문제는 만인구원인가, 아니면 선택구원인가에 연관된다. 인간이 구원받지 못하고 유기 당하게 되는 경우는 물론 인간의 책임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인간을 창조한 분이 하나님이라고 할 때 하나님의 책임도 간과될 수는 없다. 만약 하나님이 인간을 완벽하게 창조했더라면 죄, 멸망 같은 게 있을 수 없다는 주장이 가능하다. 완벽하게 창조하지 않은 상태에서 인간에게 책임을 묻는다는 것은 자기모순이라는 이런 논리에 대해서 우리가 무슨 답변을 제시할 수 있는가? 인간의 자유의지가 바로 이에 대한 해결책인가? 하나님이 인간을 인형으로 만들지 않고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결정할 수 있는 자유 의지를 제공했기 때문에 멸망의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는 말인데, 만약 하나님이 전지전능하다면 인간의 자유의지가 결국 불의하게 사용될 개연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했다. 이런 주장이 약간 억지스러운 논리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혀 터무니없는 말은 아니다. 아마 이런 문제는 우리의 인식이 닿지 못하는 그 어떤 은폐의 세계에 해당되는 것 같다.  
우리는 개인과 인류, 그리고 나아가서 생태계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가 총체적인 구원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사실과, 동시에 개인적으로 임하는 구원의 세계를 동시에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서 인간만의 구원이 아니라 자연에 이르기까지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구원을 포함해서 말이다. 물론 우리는 그 마지막 순간이 오기 전까지는 그 궁극적 비밀을 알 수 없지만, 개체와 전체의 상호 연관성 가운데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은총과 예정

은총이나 멸망까지도 이미 처음부터 확고하게 이중적으로 예정되어 있는가에 대한 질문은 칼빈의 이중 예정론으로 결집되어 개신교 신학에서 매우 격렬한 논쟁의 단초로 작용했다. 이 예정론은 원래 어거스틴에 의해서 체계화했다고 한다. 어거스틴의 주요 관심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활동하는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라 죄인이 은총의 역사를 통해서 자유인으로 변화되는 것에 있었다고 한다. 이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은총뿐이라면  그것은 곧 영원한 시간에까지 소급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바로 이 시초가 하나님의 선택인 것이다.
그런데 칼빈은 이 하나님의 선택을 훨씬 강조해서 이중 예정으로 발전시켰다. 그에 의하면 1) 예정은 인간의 공로에 대한 예지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적 목적에 있다. 2) 예정은 거룩하기 때문이 아니다. 3) 예정은 믿음에 의존하지 않는다. 4) 예정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따라 일어났다. 칼빈은 이중 예정론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반박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이 변론했다. 1) 선택론은 하나님을 폭군으로 만드는 게 아니다. 2) 선택론은 사람에게서 죄책과 책임감을 제거하지 않는다. 3) 선택론은 하나님을 편파적이게 하지 않는다. 4) 선택론은 고결하게 살려는 열의를 전적으로 말살하지 않는다. 5) 선택론은 모든 충고를 무의미하게 만들지 않는다.
개혁교회의 예정론은 칼 바르트와 에밀 부룬너에 의해서 자체적으로 수정되었는데, 바르트의 예정론에 의하면 영원한 예정은 “이중예정”이지만, 전통적으로 칼빈주의가 뜻한 대로 한 부류의 인류가 영원부터 선택되었고 또 다른 부류가 영원부터 버림받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비록 모든 인간이 예수가 없이 모두 버림받았지만, 예수 안에서 모든 인간이 선택되었다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예수는 유일하게 선택된 인간이요, 유일하게 버림받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브룬너는 이중예정을 배격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배치되기 때문이다. 역으로 만인 구원론도 하나님의 거룩함에 일치되지 않는다고 했다.
푈만은 이중예정 표상은 보편적 은총에만 배치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인 사랑에도 배치되기 때문에, 또한 비인간적인 방자한 신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비성서적이라고 비판했다. 예정은 결코 이중예정이 아니라 단지 구원을 위한 예정일뿐이라고 한다.


은총과 협동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배타적인 은총으로만 일어나는가, 아니면 인간의 어떤 협동이 필요한가 하는 문제는 기독교 역사에서 매우 오래되고 진지한 질문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루터 교회가 결정론을 대변하고, 가톨릭교회는 신인협동설과 반(半)펠라기우스주의를 대변한다고 비난하고 있지만, 그것은 여러 세기를 걸친 논의 과정을 통해서 고착된 비판으로서 일종의 왜곡이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총만으로 일어나지만 인간이 없이는 일어나지 않는다. 구원은 인간을 배제하지 않은 채 오로지 은총만으로 일어나지, 은총으로 그리고 인간을 통해서 일어나는 게 아니다. 또한 인간 없이 오직 은총으로만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우리에게 은총을 베푸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지만 우리가 구하지 않는데도 은총을 베푸는 것은 아니다. 오직 우리가 구할 때만 은총을 베푼다. 이로써 하나님은 우리들에 의해서 거부될 수 있는 모험을 기꺼이 감수한다.
물론 위에서 표현한 것처럼 일단 정리할 수 있긴 하지만 구원 사건에서 인간의 협동이 필요한가 아닌가 하는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게 끝장날 수 없다. 보는 관점에 따라서 약간씩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 인간의 협동이 없이 하나님이 단독으로 구원을 이루신다면 정말 인간은 무용지물에 불과하며, 인간의 협동이 필요하다면 하나님의 구원 능력이 충분하지 않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면 될 것이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선물이지만, 동시에 인간의 협동을 필요로 한다고 말이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이라는 말이다.  
예를 들어 물에 빠져 익사 직전에 있는 사람을 생각해보자. 그를 구하기 위해서 구명튜브나 밧줄을 던져줄 수는 있지만 그것을 붙는 것은 결국 그 자신의 몫이다. 이처럼 인간 구원에서도 역시 하나님이 주도권을 갖고 인간에게 접근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책임과 결단이 전혀 무시된다고 할 수는 없다. 예수가 문을 두드리지만 억지로 문을 열지 않고 그 안에서 열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신앙과 행위

구원 사건을 언급할 때 신앙과 행위의 문제는 위에서 다룬 협동 문제와 연관된다. 우리 종교개혁자들의 후예들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의로워진다는 명제를 철칙으로 받아들이고 있는데, 트리엔트 공의회는 이것은 방종주의적이고 반율법주의적이라고 매도했다. 요즘도 가톨릭 신학자들은 심심치 않게 “오직 믿음”을 오해하는 말을 한다. 후흐(Ricarda Huch)는 이렇게 말했다. “‘오직 믿음’이나 ‘오직 은총’이라는 말은 대개의 인간들이 기꺼이 선한 행위를 뿌리치고, 그러한 안심이 가져다 준 쾌감을 하나님의 은총으로 생각하게끔 만들었다. 그들은 매우 게으른 자의 품에 축복이 내려앉는 놀고먹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루터의 ‘오직 믿음’은 모든 인간의 책임을 방기하고 순수한 정신세계만을 추구하자는 게 아니다. 오직 믿음만이 의롭게 한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사랑을 배제하지 않는다. 신앙만이 의롭게 하지만, 이 은총의 상태는 열매를 보여주어야 한다. 푈만을 이렇게 말한다. 신앙은 구원의 사실근거(Realgrund)이고, 선한 행위는 구원의 인식근거(Erkenntnisgrund)다. 예수님도 나무와 열매의 관계를 통해서 존재의 변화와 행위의 결과에 대해서 언급하신 적이 있는 것처럼 존재와 인식은 같은 사건의 양면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이 두 가지가 늘 완전하게, 그리고 늘 동시적으로 발생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어디에 강조점을 두는가에 따라서 그 입장이 달라진다고 볼 수 있다.

앞서 은총론은 구원론, 인간론과 병렬 관계에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하나님의 인간 구원이 발생할 때 어떤 기준이 적용되는가 하는 문제가 여기서 다루어졌다. 인간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으며, 하나님의 은총으로 인간에게 구원이 주어진다. 구원의 또 다른 차원이라 할 칭의(Rechtvertigung)는 의롭다고 선포하는 것이면서(Gerechtsprechung) 동시에 의화(Gerechtmachung)이기도 하다. 그래서 칭의는 일회적인 행위이면서도 동시에 점진적인 과정이다. 이는 곧 은혜에는 은사가 뒤따른다는 말과 비슷한 차원이다. 여기서 루터가 말한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이라는 명제는 선험적 명제가 아니라, 오로지 후험적 체험 명제일 뿐이다. 즉 의인과 죄인이 존재론적으로 하나의 현상일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리스도는 단지 구원의 근거(Heilsgrund)만이 아니라 구원의 보화(Heilsgut)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생명을 충만하게 만드는 성령은 현존하는 그리스도다.


<부록> 설교 “카리스마 공동체” (롬 12:1-8), 2005. 8.21. 샘터교회          
  
몸의 예배
바울은 로마서 1-11장에서 하나님의 구원이 이방인들과 유대인 모두에게 임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지적했습니다. 그의 논리는 명백합니다. 선민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함으로써 이방인들이 오히려 새로운 이스라엘이 되었으며, 이런 사태에 시샘을 느낀 유대인들이 정신을 차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율법에 의해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구별되었지만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의해서 그런 구별이 철폐되고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신학적인 색채가 농후한 ‘칭의론’ 문제를 정리한 다음에 바울은 12장에서 참된 예배가 무엇인지에 관한 가르침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런 글쓰기의 순서는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기독교의 교리는 교리 자체를 위해서라기보다는 그런 교리를 배운 사람의 삶을 목표로 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의 삶은 바로 예배로부터 시작합니다. 예배는 개인의 문제이기도 하고, 교회 전체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개인도 예배를 드리고, 공동체 전체도 예배를 드립니다. 1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러분 자신을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실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이 드릴 진정한 예배입니다.” 공동번역은 ‘여러분 자신을’이라고 번역했지만, 이 단어는 원래 ‘여러분의 몸’을 가리킵니다. 2절에서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새 사람이 되라고 권면한 다음에 이어서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삶이 무엇인지 분별하라고 가르칩니다.
바울이 1,2절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결국 구원받은 사람의 삶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는 것이 곧 진정한 예배라거나, 새 사람이 된다거나, 완전한 것을 분간한다는 것은 모두가 바로 구원받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이런 가르침은 옳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단지 자신의 개인적인 영혼 문제에만 머무르지 않고 구체적인 삶, 특히 더불어 공동체를 꾸려야할 구체적인 삶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고전 4:20)는 바울의 주장은 옳습니다.
우리는 늘 이런 성찰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이 과연 실제적인 삶의 현장에서 능력으로 나타나는가를 말입니다. 단지 형식적으로 드려지는 이런 예배에만 만족할 게 아니라 우리의 삶 자체가 예배로 승화되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그런 증거들이 우리의 삶에서 체화되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이건 단지 종교적인 차원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학문도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여러분이 무슨 공부를 하셨든지 그것이 참된 진리라고 한다면 여러분의 삶에서 구체화할 것입니다. 음악을 전공한 사람은 그 음악이 자신의 삶에서 어떤 능력으로 나타나겠지요. 지금 우리의 모습에는 예배와 삶의 일치, 몸과 제물의 일치, 진리와 삶의 일치, 말과 행위의 일치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몸의 예배나 새 사람이라는 용어를 오해하기 쉽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칫 이런 성서 용어를 도덕적인 것으로 간주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경제 정의를 실천한다거나 노숙자를 돕는다거나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삶이 곧 구원받은 사람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삶의 모습들이 물론 가치 있는 것이긴 하지만, 우리는 지금 성서의 가르침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바울이 지금 그런 것들을 염두에 두고 말하는 걸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런 건 바울이 극복하려고 했던 율법주의에 가깝습니다. 그렇다면 몸의 예배라는 게 이런 율법이나 도덕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걸 말하나요?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여기에 바로 기독교 신앙과 삶에 긴장이 있습니다. 도덕주의나 율법주의는 아니지만 율법과 도덕을 폐기하지도 않는 ‘삶의 예술’이 바로 기독교인의 삶을 추동합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많은 평신도들만이 아니라 교회 지도자들이 길을 잃기 쉽습니다. 성서에는 도덕적이고, 율법적인 삶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는 부분도 있고, 그런 것이 완전히 무시되는 것처럼 보이는 부분도 있기 때문입니다. 성서는 이런 현상적인 것을 통해서 훨씬 근원적인 것을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런 훨씬 근원적인 것이 어떻게 설명되고 있을까요?

카리스마의 토대
3절 말씀을 읽어보십시오. “나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은 사람으로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과대평가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정도에 따라 분수에 맞는 생각을 하십시오.”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은총’을 받은 사람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6절에서 그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총의 선물이 있다고 했습니다. 3절에서 사용된 ‘카리스’라는 헬라어와 6절에서 사용된 ‘카리스마’라는 헬라어는 약간 구별됩니다. 은총이라는 뜻의 카리스는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베푸신 선물이라고 한다면, 은사라는 뜻의 카리스마는 개인들에게 특별하게 베푸신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카리스를 받았다고 한다면 그건 구원을 받았다거나 사랑을 받았다는 뜻이지만, 카리스마를 받았다는 건 설교의 능력이나 봉사의 능력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6-8절에서 일곱 가지의 구별된 은사를 나열하고 있습니다. 예언, 봉사, 가르침, 격려, 희사, 지도, 자선. 이런 카리스마는 각자의 취향이나 성향에 따라서 다르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들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은총과 은사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특히 오늘 바울이 강조하는 것에 따른다면 우리 모두는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선물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아마 이런 이야기는 여러분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주일학교 때부터 ‘달란트 비유’를 통해서 이런 은사의 쓸모에 대해서도 자주 들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사람에게는 더 많은 선물이 주어질 것이고, 그것을 묵혀두는 사람에게는 먼저 주어진 것마저 빼앗긴다는 식으로 들었습니다. 이건 옳은 말입니다. 수영선수는 매일 그 기술을 갈고 닦아야만 일류 선수로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학교 선생들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가르치는 내용이 계속해서 심화되어야만 그는 선생의 역할을 지켜낼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카리스마를 그런 정도의 생각으로 마무리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삶이 곧 하나님의 카리스마로 여긴다는 것은 이 세계를 근본적으로 새롭게, 또는 다르게 본다는 뜻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아주 간단한 말입니다. 카리스마는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입니다. 카리스마는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입니다. 카리스마는 근본적으로 나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 생각해보십시오. 내 소유가 아니니까 남을 위해서 봉사하라는 뜻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렇게 생각해도 좋지만, 한 걸음 더 들어가서 생각해보십시오.
그렇습니다. 카리스마는 그 토대가 하나님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모든 카리스마는 존재론적으로 동일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에게서 온 것인데, 좋은 게 있고 나쁜 게 있을까요?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더 좋은 게 있고 덜 좋은 게 있을까요? 그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에게서 온 것은 모두가 똑같은 정도로 가치가 있습니다. 이런 카리스마의 원리를 우리 삶과 연결시킨다면, 결국 우리의 삶은 결코 가치론적으로 구별될 수 없다는 말이 됩니다.
여러분은 모든 삶이 평등하다거나 인권이 천부적이라는 말을 평소에 자주 들었을 겁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런 말을 정보로 간직하고 있을 뿐이지 실제적인 삶의 능력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서울대학교나 이곳 하양에 있는 대구가톨릭대학교나 똑같다고 한다면 누가 곧이듣겠습니까? 사람들은 좋은 것과 나쁜 것, 가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명백하게 구분하는 데 익숙하기 때문에 모든 삶이, 모든 소질과 모든 재주가 결국 존재론적으로 똑같다는 말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마십시오. 학문적인 진지성이 무의미하다거나 삶에 대한 성실성이 무의하다는 뜻으로 이렇게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지금 우리는 우리의 삶에 개입되어 있는 하나님의 선물이 본질적으로 똑같이 귀하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을 뿐이지 그것에 대한 인간의 태도까지 똑같다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물은 우리 눈에 크게 보이든 작게 보이든, 가치 있어 보이든 아니든 전혀 개의치 않고 동일하게 최선이라는 뜻입니다. 화원에서 비싸게 팔리는 꽃이나 길가에 흔한 민들레나 그것들이 ‘꽃’이라는 점에서 똑같이 귀하다는 사실과 같습니다.
만약 우리의 삶이 바로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명백하게 인식하고, 그 근본을 깨우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이 세상을 전혀 다르게 살아갈 수 있을 겁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실체적으로 깨우칠 수만 있다면 우리는 분명히 전혀 새로운 시각으로 이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을 겁니다. 그 무엇을 부러워하지도 않을 것이며, 그렇다고 그 무엇으로 자랑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내가 자랑한 만한 것이나 내가 남에게 부러워하는 것이나 아무런 차이가 없다면 결국 우리는 그런 것에 집착하는 게 아니라 그것의 근원인 하나님에게 집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카리스마의 적용
아마 로마 교회에는 이런 카리스마의 문제가 심각했던 것 같습니다. 이방인 기독교인들과 나중에 합세한 유대인 기독교인들 사이에 교권이나 교회 행정 업무를 중심으로 다툼이 일어났을 가능성은 아주 높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잘난 척하고 떠들어대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그런지 바울은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과대평가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정도에 따라 분수에 맞는 생각을 하십시오.”(3b절).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게 바로 인간의 본성인지 모르겠습니다. 정치인들이 자기를 과대 포장하거나, 기업가들이 자기 회사를 과대 광고하는 것은 그러려니 할 수 있지만 교회와 신자들이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런 현상에 대해서 저는 이 시간에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대신 오늘 우리의 설교 주제와 연관해서, 왜 이렇게 자기를 과대평가하는 일들이 벌어지는가에 관해서 바울의 설명에 따라서 한 마디 짚겠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도 역시 오늘 본문과 거의 비슷한 구조로 교회와 카리스마를 설명했습니다. 그는 교회 공동체를 ‘몸’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몸에는 많은 지체가 있듯이 교회에도 역시 여러 카리스마가 있다는 것입니다. 4,5절 말씀을 보십시오. “사람의 몸은 하나이지만 그 몸에는 여러 가지 지체가 있고, 그 지체의 기능도 각각 다릅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수효는 많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고 각각 서로 서로의 지체 구실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비유는 매우 생생합니다. 손가락도 몸에 붙어 있고, 눈동자로 몸에 붙어 있습니다. 여기서 각각의 지체가 유기적으로 한 몸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이 말은 곧 손, 발, 심장, 귀 등등, 이런 모든 지체를 통 털어서 몸이라고 한다는 뜻입니다. 몸의 한 부분이 병들었을 경우에는 몸 전체가 이 병든 현상에 연루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요즘은 흔하지 않지만 옛날에는 손톱과 닿아있는 부분이 곪는 ‘생인손’이 많았습니다. 생인손에 걸려서 적시에 치료하지 못하고 덧나게 되면 밤잠을 잘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웠습니다. 우리 몸의 일부가 병들었지만 결국 몸 전체가 고통스럽습니다.
몸 전체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고 있는 사람들은 있겠지만, 교회 공동체, 더 나가서 사회 공동체도 역시 그렇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습니다. 예컨대 교회 안에서, 또는 사회에서 빈익빈부익부라는 양극화 현상이 심화되어도 우리는 아무런 고통을 받지 않습니다. 생태계가 허물어져도 자신의 집에 정수기와 공기정화기만 있으면 아무런 고통을 느끼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를 과대평가하기 위해서 온몸을 던지며 살아갈 뿐입니다. 이렇게 사분오열된 공동체는 결코 카리스마 공동체가 아닙니다. 카리스마 공동체가 아니면 결국 생명은 죽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생명은 오직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교회는 참된 의미에서 이런 유기적인 단일성을 회복하고 있을까요? 이런 카리스마 공동체 정신이 교회 안에서 확산되어가고 있나요? 더 나아가 기독교인들은 이런 카리스마 공동체의 의미를 이 세상에 삶과 몸으로 전달하고 있을까요? 여러분, 교회의 미래는 바로 이런 카리스마 공동체를 지향하는지 아닌지에 달려 있습니다. 왜냐하면 카리스마 공동체만이 생명 지향적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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