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장: 인간에 대한 물음

조직신학 조회 수 6162 추천 수 104 2005.05.25 18:15:27
10장
인간에 대한 물음

아래의 글은 졸저 <기독교를 말한다>(한들출판사, 2001, 207-222쬭)의 골격을 그대로 유지한 채 필요한 부분을 첨삭한 것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대답은 누가 던지거나 내릴 수 있지만 누구에게나 보편타당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대답이 주어진 건 아니다. 물론 인간에 관한 다음과 같은 정의는 우리가 자주 들었다. 호모 사피엔스, 호모 파베르, 코기토 에르고 숨,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다, 권력욕구의 동물이다, 인간은 성적인 동물이다. 이런 저런 정의들이 인간의 생물학적 차원, 심리나 무의식의 차원, 그리고 사회적 차원에서 연구되긴 했지만 사실 그런 모든 시도들은 인간 자체라기보다는 인간에게 나타난 부분적인 현상들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인간에 관한 질문에 관해서는 현대과학도 역시 무능력하다. 예컨대 현대 의학이 인공장기를 갈아 끼우거나 심지어는 인간복제*가 가능할 정도로 발전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실체를 밝혀냈다고 볼 수는 없다. 생각해 보라. 지금 이렇게 지구를 지배하며 (사실은 기생하며) 살고 있는 인간이 어디서 왔는지, 앞으로 어디로 갈지, 인간 기술의 발전이 무엇을 가져올지, 삶과 죽음이 무엇인지를,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문명을 열어가는 인간이 과연 개미들보다 훨씬 가치가 있는지 현대과학이 결정해 줄 수 있단 말인가. 인간이라는 종이 지구에서 인간적인 특성을 갖고 살아온 게 기껏해야 몇 십만 년 밖에 되지 않는데, 또한 어쩌면 그렇게 멀지 않은 시기에 지금껏 지구를 지배하던 수많은 생명체들이 멸종했던 것처럼 완전히 사라질 지도 모르는데, 우리가 인간에 대해서 무엇을 결정적으로 판단하고 확신할 수 있단 말인가. 더구나 인간이 다람쥐나 땅강아지처럼, 거의 그런 이들과 똑같이, 정말 똑같이 죽어서 사라진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비록 이성적인 존재로서 기술과 법과 예술을 발전시켰다 하더라도 그런 동물이나 곤충보다 나은 게 하나도 없는 셈이다. 존재의 지평에서는 하루살이나 인간이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인간에 대한 질문은 그저 지적인 호기심만을 채워주기 위한, 부질없는 작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최근에(2005년초) 서울대학교 황우석 박사에 의해서 줄기세포 연구가 작년에 이어 또 한 단계가 올라섰다하여 국내외적으로 관심이 증폭되고 있다. 그가 이번에 개가를 올린 연구의 핵심은 배아에서 줄기세포를 배양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이런 논리라고 한다면 난치병에 걸린 사람들이 난자를 구입할 수만 있다면 자기의 세포를 통해서 병든 장기를 생산해낼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난자와 정자가 결합된 배아를 생명체로 인정해야 하는가, 아닌가에 있다. 만약 이 배아를 생명체라고 한다면 그 배아에서 줄기세포를 배양시킨다는 것은 생명윤리를 파괴하는 길이다. 아무리 난치병의 치료가 시급하다고 하더라도, 다른 방식이 아니라 배아를 통한 줄기세포의 배양이라는 방법이 유일한 것인지 좀 더 심각하게 고민해야만 할 것이다. 더구나 이런 방식의 연구가 급기야 인간 스스로 인간의 생명을 조작해낼 수 있는 단계에 까지 이르게 된다면 인간이 결국 공장에서 생산되는 상품과 비슷한 상황에 떨어질지 모른다. 그렇게 까지 나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건강과 수명까지 경제력에 의해 좌우되는 세계가 오리는 건 불을 보듯 뻔하다. 어쨌거나 이제 판도라의 상자는 열렸다. 황우석 박사를 비롯해서 이런 줄기세포를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난치병 치료의 어려운 길을 뚫었다고 환호하겠지만 거기에 무엇이 나올는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소극적인 입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할 수는 있다. 인간은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고 질문하기 때문에 인간이라고 말이다. 물론 이 말은 인간이 그런 질문을 하기 때문에 다른 동물을 비롯한 모든 존재하는 것들 보다 우월하다기보다는 최소한 다른 것들과 구별될 수 있다는 뜻이다. 지구상의 모든 동물들은 자신의 정체에 대해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 모르긴 몰라도 대보름날 개가 달을 바라보면서 그 달과 자신의 실존적 관계가 무엇인지, 자신이 왜 이런 달 밝은 밤에 쇠사슬에 묶여 있어야 하는지 질문하지 않는다.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자연과의 친화력 가운데서 그저 그렇게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연으로부터 소외된 채 끊임없이 자기 정체와 실존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고 그 답을 모색한다. “내가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이러한 질문을 놓치지 않고 살아간다는 게 바로 인간의 본질이 셈이다. 물론 소유지향적인 삶이 극대화하고 있는 오늘날 과연 사람들이 자신의 정체에 대해서 심각하게 성찰하는지는 그렇게 확실하지 않다. 어릴 때부터 자연과 단절되고 문화적으로 자기를 성취하는 것에 일방적으로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인간 본질에 대한 질문은 거의 무의미해진 시대를 오늘 우리가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렇지만 물음의 강도는 약하더라도, 혹은 그런 물음의 시기가 늦추어진다고 하더라도 그가 인간인 한 인간학적 근본 질문을 회피해갈 수는 없다. 이런 질문이 망각되는 이 시대에 한 개인으로서나 인류 전체로서나 인간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늘 삶의 중심에 놓아두는 공부가 필요할지 모르겠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 신앙도 역시 예외가 아니다.

신앙과 인간학
포이에르바흐는 신학의 비밀이 인간학에 있다고 언급한 바 있으며, 소위 실존주의 신학자로 잘 알려진 불트만도 이와 비슷한 말을 이렇게 했다. “하나님의 존재를 설명한다고 할 때 역시 그것을 인간이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 핵심이기 때문에 신학은 인간론적이다.” 물론 이 진술이 신학을 순전히 인간론으로 축소시키거나 아니면 심리학이나 정신분석으로 대체하자는 것이라면 문제가 있겠지만 신학이 최소한 인간학적(인문학적) 이해를 전제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제시한 주장이라면 기독교 신앙을 풍요롭게 하는데 매우 소중한 시각임에 틀림없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구체적인 인간을 구원해야한다는 명제에 충실하려면 구원받아야할 그 인간 자체를 이해해야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교회 현장에서 볼 때 믿음이 좋다고 자부하는 신자들은 일반적으로 자신들의 신앙을 초인간적인 그 무엇으로 생각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예를 들어, 설교 행위도 역시 그런 틀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교회는 노조 활동을 하면서 인간다운 노동 문제로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 신자들이나, 통일 문제에 열정을 갖고 있는 신자들, 혹은 휴머니스트 신자들 앞에서 믿으면 모든 게 해결된다거나 회개하고 거듭나라고 아주 간단명료한 답변을 제시하며, 청교도적인 도덕규범을 모든 이들에게 적용시키는 일도 흔하다. 그러한 설교가 제공하는 구원의 틀은 너무나 도식적이고 천편일률적이고, 자아도취적이거나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으며, 더 나아가 철저하게 추상적이고 이원론일 수밖에 없다. 오늘의 설교가 제시하고 있는 삶의 무게가 점점 가벼워지고 있다는 사실은 결국 설교자의 인간 이해가 그렇게 가볍다는 의미이다.  
왜 이럴 수밖에 없을까? 왜 기독교는 인간의 삶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걸까? 우리는 왜 회개하고 구원받으라는 절대 명제만을 지루한 방식으로 반복하는 걸까? 왜 그렇게 공자님 같은 말만 되풀이하는 걸까? 그 답은 기독교 신앙에서 인간에 대한 이해보다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우선한다는 생각이 우리를 지배한다는 데에 있다. 이 말은 원칙적인 면에서 옳다.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믿음으로써 죄와 죽음의 질서를 극복하고 의와 생명의 세계로 들어설 수 있다. 바르트가 진술하고 있듯이 성서는 인간이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을 거는 것에 관한 텍스트라는 점에서 우리가 신학의 토대가 하나님이라는 말은 옳다. 그러나 하나님을 안다는 것, 혹은 믿는다는 것이 죄와 죽음, 의와 생명, 그리고 구체적인 삶의 문제에 대한 해답까지 자동적으로 제공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구체적인 삶의 내용에서 해석되고 적용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신학에서도 신학은 필수적이다. 인간학에 관한 관심은 곧 현실로서의 인간*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기도 하다. 우리 기독교 공동체가 진정으로 인간의 통전적 구원이 실현될 하나님 나라를 지향한다면 그 구원의 대상인 무신론자, 공산주의자, 무정부주의자, 동성애자들의 삶까지 나눌 준비를 해야 한다. 만약 교회가 하나의 틀로 주조된 바리새인들처럼 패거리 집단을 이룰 뿐이지 다층다기한 인간 삶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구원의 리얼리티는 그 토대를 잃게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신학은 어디까지나 인간론적이어야 한다.

*원래 그렇기도 했지만 최근에 들어서서 더욱 심화되고 있는 현상이 하나 있다. 일반서점에 진열되어있는 기독교 목사나 신학자의 책보다는 불교 승려들의 책이 훨씬 많이 읽히고 있다는 현상이 그것이다. 그 원인이야 여럿이겠지만 기독교 성직자들이 쓴 책의 내용에 인간론적 바탕이 너무나 부실하다는 것이 첫 이유가 아닌가 생각된다. 한국교회 신자들은 교회에 오래 다니면 다닐수록 인간미를 잃어간다는 소리를 많이 듣는데, 이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인간이기 때문에 겪게 되는 실존의 두려움, 존재의 무게, 그리고 이런 바탕에서 나오는 삶의 고뇌를 인정하지 않고 “믿고 구하면 해결된다.”면서 만병통치약을 던져주기만 한다. 이것은 곧 전존재의 차원에 속해야할 신앙이 삶의 편의주의에 함몰되어 버린 형국이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할 사실은 기독교 신앙은 어떤 추상적인 인간상을 그려놓고 그것에 짜 맞추어 살도록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로 예수님은 주변의 많은 사람들과 어떤 종교적 틀 안에서 만난 게 아니라 그저 있는 그대로의 인간으로 만났을 뿐이며, 바울이 제시하는 칭의론도 역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인간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신학과 신앙도 인간학적 토대가 확실해야한다면, 다른 영역이야 두말할 나위도 없다. 교육, 철학, 역사학, 예술은 물론이고 정치와 경제도 곧 인간론이며, 의학도 역시 그렇다. 물리학이나 화학 같은 자연과학은 그렇지 않은가? 인간론을 전제하지 않은 자연과학은 근본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현대물리학이 밝혀주고 있듯이 지금까지 자연과학의 원리는 반복실험에서 동일한 결과가 나올 때만 진리라고 보았지만 이제는 관찰자의 관점에 따라서 그 결과도 역시 달라진다고 한다.(이런 관점에 대해서는 김용준의 <사람과 과학>을 참조할 것). 그뿐만 아니라 자연과학의 쓰임새라는 점에서 과학의 책임의식이나 윤리의식은 더 말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 하이젠베르크의 다음과 같은 말은 옳다. “과학이라는 영역이 문화를 논하고 더욱이 철학과 종교를 논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과학이라는 하나의 방법을 통해서 얻은 지식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책임과 의무는 과학자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과학이 제시하는 지식의 축적이 오용되어 잘못을 초래하는 비극은 막아야 한다. 이런 뜻에서 과학은 분명히 인간론이며, 또한 과학적이라는 말은 바로 인간적이라는 말이라고 생각한다.”(부분과 전체). 결국 인간 행위는 예외 없이 인간론적이라는 사실이 분명하다. 이제 우리는 기독교적 인간론이 어떤 범주에서 어떤 관점으로 다루어지는지 그 가닥만이라도 살펴보도록 하자.

창조와 진화
기독교 신자들이 인간에 대해서 논하게 될 때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는 부분이 바로 진화론이다. 분명히 창세기에 하나님이 인간을 흙으로 창조했다고 기록되어 있고, 그런 전통이 수천 년 동안 불변의 진리로 고수되어 왔는데, 갑자기 자연법칙에 따라서 진화되었다고 하니 억장이 무너질 만하다. 1859년 발행된 다윈의 <종의 기원>은 격렬한 논쟁을 격발시켰다. 다윈의 진화론은 헉슬리와 후커 등의 지지를 받아 졸지에 학문 세계에서 대세를 이루게 되었다. 그 후로 여러 나라에서, 주로 기독교 문화가 지배하고 있는 나라에서, 학생들에게 창조론을 가르칠 것이냐, 진화론을 가르칠 것이냐 하는 문제로 논란이 분분했었다. 진화론자들은 과학적인 바탕에서 자신들의 주장을 강화시켰고, 창조론자들은 주로 성서에 근거해서 자신들의 주장을 확신했다. 과학과 종교의 싸움으로 비화된 이 논쟁은 진화론의 승리로 결말이 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과학은 객관적이고 보편적이지만 성서는 주관적이고 특수하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너무나 당연했던 성서의 창조론이 의심을 받게 되자 창조론자들은 급기야 “야, 이 자식들아, 인간이 원숭이의 후손*이란 말이냐?”라고 감정적으로 대처하기도 한다.

*창조론자 중에서 어떤 이는 이러한 반론을 펼친다. 동물원의 원숭이가 진화하지 않는 걸 보니 진화론은 잘못되었다고 말이다. 이 말에는 두 가지 점에서 오류가 있다. 하나는 진화라는 것이 일, 이 천년에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수 만, 수십 만 년의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동물원의 원숭이를 십만 년 동안 관찰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다른 하나는 진화론에 의하면 원숭이가 인간이 되는 게 아니라 원숭이와 (정확하게 말하면 침팬지) 인간이 공동의 조상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미 침팬지와 인간이라는 종으로 개체화가 이루어진 다음에는 이 개체들끼리 상호적으로 진화되는 일은 없다. 여기서도 열역학 제 2원리인 “불가역”이 통용되는 셈이다.

이제 진화론과 창조론 논쟁은 거의 사라진 것 같지만 그래도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에 의해, 예컨대 창조과학회류의 단체들에 의해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이들은 진화론의 허점을 과학적으로 짚어내고 성서가 오히려 과학적으로 타당성이 있다는 점을 조목조목 변호한다. 성서가 그 시대의 과학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과학적으로도 오류가 있을 수 없다는 주장이다. 이들은 노아 홍수 때의 방주를 찾겠다고 터키의 산골짜기를 헤매고 다니며 어떤 때는 방주에 사용되었던 나뭇조각을 찾았다는 해외 토픽에 해당하는 뉴스를 만들어낸다. 이스라엘이 아모리 민족과 전쟁할 당시 여호수아는 태양과 달을 잠시 멈추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해서 이를 성취한다는 구절이 나오는데(여호수아 10:12), 몇 가지 우주 물리학적 증빙을 통해서 이것도 사실이라고 주장한다. 이 얼마나 순진한 억지인가? 창조과학회의 전문적인 주장은 내 영역을 벗어난 부분이기 때문에 접어두기로 하고 성서관에 대해서만 한 마디 보태자. 그들이 알아야할 사실은 성서는 인간을 신학적으로 해석하는 것이지 생물학적(과학적)으로 접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현상의 근원과 실질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성서나 과학이 같은 목표를 갖고 있지만 그것에 접근하는 방법론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말이다. 따라서 신학적 사유와 과학적 증명을 혼동하지 않는 것이 창조론 과 진화론 논쟁을 해결하는 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가 과학적으로 틀릴 수도 있다는 말인가,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과 과학 중에서 무엇을 진리라고 생각하는가, 하고 질문하지 모르겠다. 나는 여기서 과학이 진리의 준거라고 생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과학 자체가 매우 추상적인 학문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을 밝혀야겠다. 과학은 과거에서 현재까지 밝혀진 원리에만 충실할 뿐이지 여전히 열려있는 미래 앞에서는 매우 불확실하다는 점에서 여전히 부분적인 인식론에 불과하다. 더구나 과학이 밝혀낸 사실들은 자연의 많은 세계 중에서 일부에 속한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아무도 과학을 절대적인 학문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자연과학만이 아니라 신학 자체로 역시 잠정적인 학문이기 때문에 그 어떤 것도 타학문을 좌지우지할만한 패권을 가진 학문은 없다고 보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자연과학이 언급하는 진화론을 잠정적인 조건으로라도 받아들여하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자연과학이 절대적인 학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에 대한 논리적 해명으로서 상당한, 혹은 최선의 방법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이제 기독교 창조론이 종말론적 관점에서 새롭게 해석되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아래와 같은 몰트만의 진술은 우리가 새겨들을만하다.

여기서 신학에 대하여 다음의 사실이 연역된다. 즉 신학은 태초의 창조에 대해서는 물론, 역사 안에서의 창조와 종말에서의 창조에 대하여, 다시 말하여 하나님의 창조의 전체 과정과 연관하여 창조에 대하여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의 총괄개념으로서의 ‘창조’는 태초의 창조, 역사의 창조들, 그리고 마지막 시대의 창조를 포괄한다. 창조의 개념을 태초로 위축시키는 것은 신학의 전통에서 ‘창조와 구원’, ‘자연과 초자연’의 분리를 초래하든지, 아니면 ‘첫 번째 창조와 두 번째 창조’의 분리를 초래했다. 이리하여 하나님의 창조의 연속성과 통일성이 스스로 의심스럽게 되었다. 그의 창조의 통일성 속에 있는 하나님의 통일성에 대한 생각은 오직 서로 연관되는, 종말론적 방향을 지닌 창조의 과정에 대한 생각을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것이 타당하다면 창조에 대한 인간의 위치도 달라진다. 이제 그는 더 이상 단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피조물로서 하나님이 지으신 다른 피조물에 대하여 그들의 주인으로서 대칭하는 것이 아니라, 이와 동시에 모든 다른 생물들과 더불어 아직도 개방되어 있고 완성되지 않은 창조의 과정의 되어감 속에 있다. 그렇다면 창조는 완료된 사실(factum)이 아니라 되어감(fieri)을 뜻한다. 이것은 창조 안에서 인간의 규정을 새롭게 해석하게 한다. “땅을 정복하라.”는 것이 그의 규정의 마지막 말일 수 없다.(몰트만, 과학과 지혜, 65).

이제 인간에 대한 질문을 우선 과학적 이해로부터 시작해서 신학적 해석으로 옮겨 가면서 풀어가도록 하자. 왜냐하면 과학은 그 과학자들이 인정하든 않든 상관없이 하나님이 창조한 이 세계의 규칙들을 이해하려는 최선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호모 에렉투스
몇 년 전 TV에서 방영된 생명의 신비에 관한 다큐멘터리 작품을 본 적이 있다. 진화의 과정에서 인간의 특질을 결정하게 된 요인이 무엇이겠는가 하는 점을 일목요연하게 풀어주고 있었다. 그 프로그램의 내용을 정확하게 기억할 수는 없지만 대충 다음과 같은 요지였다.
오래 전 아프리카 숲 속에서 다른 동물들과 더불어 나무 열매를 먹고 살던 인간 조상이 꼬리가 없어지는 1차 진화를 거친 후, 5백만 년 쯤 전에 현재에도 유전자의 99%가 동일한 침팬지와 공동 조상으로부터 다시 갈라져 나오게 된다. 그 후 나무를 오르고 내리는 과정을 통해서 보행에 필요한 근육이 발달하게 된다. 마침 지구의 지각 변동으로 인해서 아프리카가 동서 지역으로 구분된다. 숲이 그대로 보존되어 먹을거리가 풍성했던 서쪽 지역의 인간 조상은 침팬지처럼 여전히 나무를 기어오르내리면서 먹고 살게 되었지만, 숲이 사라지고 초원으로 바뀌어 먹을거리가 부족했던 동쪽 지역의 인간 조상은 먹을 것을 찾으러 이곳저곳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동쪽 지역의 인간 조상들은 앞서 발달된 근육 덕분으로 두 발을 사용하여 직립 상채로 초원을 누빌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직립 보행으로 인해서 인간의 뇌는 그 부피가 파격적으로 늘어났다. 그 이전에 땅을 내려다보고 걸을 때는 신체 구조상 무거운 뇌를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진화 순서는 인간의 본질을 말할 때 매우 중요하다. 즉 뇌의 발달로 인해서 직립하게 된 게 아니라 직립의 결과로 큰 뇌를 갖게 되었다는 그 순서 말이다.
또 다른 한편으로, 서쪽 지역의 숲 속에서는 맹수류들의 위험 없이 풍성한 열매로 양식을 삼을 수 있었지만 동쪽 지역의 초원에서는 다른 맹수류들과 살벌한 생존경쟁을 치룰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경쟁의 과정에서 인간의 손은 돌연장을 사용할 수 있도록 진화되기 시작했다. 지금도 침팬지는 엄지손가락을 거의 사용하지 못하는 반면에 인간은 특별하게 발달된 엄지손가락을 갖고 있다.
결국 2백만 년 전쯤에 인간은 직립 보행을 완성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성대가 발달하여 다양한 소리를 낼 수 있었다. 다른 동물이 흉내 낼 수 없는 우월한 언어 구사 능력이 주어진 것이다. 직립, 큰 뇌, 발달된 손가락과 성대를 갖춘 인간은 다른 동물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돌연장을 사용해서 맹수들과의 싸움에서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고, 뇌가 발달해서 종합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되었으며,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의미 있는 의사교환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들을 호모 에렉투스라고 일컫는데, 오늘의 우리 인류와 거의 흡사하다.
위의 내용에서 핵심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무엇보다도 인간이 지금과 같은 인간으로 진화된 단초가 직립 보행에 있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런데 그 직립 보행이 아프리카의 지각 변동이라는 우연한 사건에 기인했다는 사실도 역시 놓치지 말아야한다. 지구의 지각 변동으로 인해 숲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실락원) 생존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직립 보행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말이다. 만약 인류 조상의 발생지라 할 아프리카에 계속 숲이 유지되었더라면 인간 조상은 여전히 침팬지처럼 나무 위에서만 살았을지 모른다.
이러한 호모 에렉투스 논리를 절대적인 진리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상당 부분에서 일리가 있으며 소소한 부분에서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나름대로 과학적 설득력을 갖추고 있다면 우리가 인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다른 한편으로 기독교 신앙은 이 진화론을 타파해야만 진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신앙은 신앙이고 과학은 과학이다. 진화론은 과학적, 현상으로 진리일 뿐이고 기독교 신앙은 다른 지평에서 영적인 진리를 말한다. 과학이 모든 존재의 신비와 비밀을 풀어내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오히려 신앙적인 해석이 인간 본질을 더 정확하게 밝힐 수 있다는 점도 사실이다. 다만 어떤 방법을 선택했든지 독단론에 빠지지 말고 서로가 진리의 지평을 넓혀 가면 충분하다. 인간이 침팬지와 공동의 조상에서 진화되어 나왔다는 사실이 절대적으로 옳다 하더라도 성서의 인간 이해는 하나도 손상 받지 않는다. 성서를 귀중하게 생각한다면 과학적인 도그마로 덧칠할 생각을 말고 소박하게 신앙적인 눈으로 읽어야 한다. 그럴 때만 성서는 진화론을 뛰어넘는 위대한 신앙의 문서로 빛나게 될 것이다.

인간은 흙이다
성서는 인간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증언한다. 물론 인간만이 아니라 다른 생명체와 모든 사물과 우주까지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존재하는 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창조행위다. 그런데 인간 창조는 그 이외의 동물 창조와는 구별된다. 사람(아담)의 창조로 끝나지 않고 특별히 여자*를 창조한다. 물론 동물들도 암수로 구분되어 있긴 하겠지만 여자 창조만 구체적으로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창세기 2:18-25). 하나님이 아담의 갈빗대를 뽑아내어 이브를 만드셨다고 한다. 고대 성서기자들이 비록 갈빗대 설화를 통해서 여자의 종속성을 어느 정도 암시하고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여자도 역시 남자와 동일하게 인간이라는 점을 강조하려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인간은 남자만으로 되는 게 아니고 여자만으로 되는 것도 아니다. 성의 구별이 먼저일수 없고 그렇다고 인간보편이 먼저일 수도 없이 그것은 통시적이다. 지나치게 남성 중심적 사회구조를 인정해 버리고 만다면 인간 일반을 무시하는 격이 되어버리고, 지나치게 성의 구별 없이 인간일반만을 강조하면 그 인간은 실체를 잃어버린 추상이 되어 버린다. 인간은 남성과 여성으로서만 인간이며, 인간으로서만 남성과 여성이다. 약간 옆으로 지나가는 말이 될지 모르지만, 앞으로 먼 미래에 이런 성의 구별이 없어지는 시대가 올 가능성은 없지 않을까? 지금도 호모 섹셜리티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듯이 이성 사이의 성관계를 통해서만 후손을 언지 않을 수 있다면 성의 구별은 시나브로 줄어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인간은 남자와 여자라는 다른 성적 정체성을 갖는 존재들로서 인간으로 살아간다.

어쨌든 창조설화에서 일단 초점은 흙이다. 창세기 2장 7절(J문서)은 이렇게 진술하고 있다. “여호와 하나님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또한 3장 19절 말씀은 이렇다.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니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시편 90편 3절에도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인간이 흙으로 만들어졌다는 명제가 어디 성서만의 것이겠는가. 어떤 종교적, 철학적 개념 없이도 인간이 흙으로 달아간다는 사실은 엄연한 객관적, 생물학적 사실이다. 이러한 보편적 사유에 기초해서 고대의 히브리 성서기자들은 흙과 연관된 창조설화를 전해주고 있다.
인간이 흙으로 지음 받았다는 성서의 진술은 우리에게 생명과 흙의 연관을 깊이 통찰하도록 각성시킨다. 모든 생명의 근원은 흙에서 시작하며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 아무리 윤기 나고 탄력 있는 피부를 자랑하는 젊은 여인이라고 해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흙으로 변하게 마련이다. 참으로 신기하다. 모든 식물들을 보라. 뿌리를 흙에 두고 대기 중에서 탄소동화 작용을 일으키면서 생명을 유지해 나간다. 동물들은 이러한 풀이나 나뭇잎을 먹기도 하고 다른 동물을 잡아먹기도 하는데, 그들도 결국은 흙에서 난 것을 먹고 사는 것이다. 인간은 별 것인가. 쌀이나 밀이 몽땅 흙의 소산이고, 소고기도 역시 풀을 먹은 소의 살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렇게 열심히 흙에서 난 것을 먹고사는 모든 생명체는, 그것이 식물이든 동물이든 상관없이 죽어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 흙에서 나와서 주어진 것만큼 살다가 흙으로 돌아간다. 이게 생명의 순환이다. 물론 인간도 토끼나 다람쥐처럼 그런 생명의 순환*에 따라서 살다가 간다. 이런 점에서 구원은 모든 생명의 모태라 할 흙과의 연관에서 발생한다고 볼 수 있다. 흙의 구원론적 존재론이 오늘 우리가 회복해야할 인간론의 초보다.

*모든 생명체가 지구 위에 나타나서 잠시 살다가 죽는다는 점에서 인간은 다른 생명체와 하등의 차이도 없다. 비록 찬란한 문명을 꽃피우고 자신에 대해 질문하는 지성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삶과 죽음의 구도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게 실낙원 이후 현실에서 살아야 할 인간에 주어진 숙명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생물학적 생명만을 끊임없이 확장시키려는 현대문명의 노력에 기대어 사는 것 보다는 차라리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성서의 선언을 순순히 받아들이며, 또한 그런 인식을 훈련해 나가는 작업이 더 절실한 게 아닐까 생각한다. 결국 우리의 모든 행위는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자면 ‘세계내존재’라는 범주에서만 작동될 수 있다는 뜻이다.

스웨덴 여성학자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가 쓴 <오래된 미래>는 끝없는 생산과 소비의 악순환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현대세계가 어떤 미래를 희망해야하는지 그 대안적인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다. 그녀는 동양언어를 연구하기 위해 티베트의 한 고원 마을인 라다크를 방문했다가 그곳에 아예 눌러앉아 1975년부터 16년간 원주민들과 함께 살았다. 수천 년 동안 고대의 농경, 목축 방식대로 살아오는 라다크인들은 산업화나 현대 물질문명과는 단절된 채로 있었다. 소위 선진국 사람들의 기준에 의하면 라다크인들은 가난해서 불행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이 유지하고 있는 삶의 질은 그게 아니었다. 그들의 삶이야말로 현대문명이 되돌아가야 할 유일한 대안이었다. 예를 들자면, 라다크인들의 삶에는 자본주의 세계에서 사는 사람들이 매일처럼 경험하는 그런 류의 싸움이나 소유욕이 거의 자리하지 않았다. 얼굴에는 미소가 그치지 않았고, 죽음마저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서, 그저 있는 대로 자연과 하나가 되어서 살아갔다. 그들은 자신들이 땅을 지배해야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땅의 일부*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땅과 함께 살아가는 데 아주 익숙했다. 땅과 일치한 삶에서 구원을 경험한 이들이다.

*인간이 땅의 주인이라기보다는 그 일부라는 생각, 그리고 실제적으로 자연의 일부로서 살아가는 삶의 자세는 북아메리카의 인디언들에게서도 엿보인다. 인디안 추장들의 글과 연설을 모아놓은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라는 책을 보면 땅을 사고파는 백인들의 사고방식을 인디언들은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다. 어느 추장의 말이다. “어떻게 우리의 누이이며 형제인 땅을 사고 팔 수 있단 말인가?” 얼룩말의 땀과 인간의 땀을 같은 것으로 이해하는 인디언들은 백인들의 총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인디안 보호구역으로 쫓겨났지만 백인들보다 훨씬 거룩하게 살던 이들인 셈이다. 북아메리카 정복 당시에 기독교인, 특히 청교도들이었던 그들보다 그들의 눈에 미개인이며 이교도로 비친 인디언들이 훨씬 평화적이고 훨씬 생명 친화적이었다는 역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만 할지. 영화 「늑대와의 춤을」도 역시 백인들의 파괴적 문화와 인디언들의 평화 정신을 비교해주고 있다. 그 영화는 뭐니 뭐니 해도 들소 떼 사냥이 압권이다. 인디언들은 겨울철을 나기 위한 먹을거리용으로 들소를 사냥하지만, 백인들은 부인들의 핸드백이나 장식품용 가죽을 얻기 위해 들소를 잡아 껍질만 벗겨가고 뼈와 살은 들판에 내버려둔다. 생존을 위한 사냥과 사치를 위한 사냥 중에 어떤 행위가 도덕적인지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

오늘의 시대가 인간으로 하여금 가능한대로 흙과 먼지를 밟지 않고 사는 게 행복한 것처럼 강요하고 있지만 사실 이런 삶은 흙으로부터의 소외만 확대시킬 뿐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창세기를 새로운 시각으로 읽어야 할 것 같다. 흙과 하나가 되는 삶, 자연과 하나가 되는 인간론에 근거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신학적, 신앙적 논리도 그 기초를 잃어버린다. 땅이 거룩하다는(출애굽기 3:5) 성서의 증언도 이와 맥을 같이 한다. 결국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야 할 존재라면 살아있는 동안에도 흙과 가까이 지내는 것이 구원에 가까운 삶이 아니겠는가.

영적인 존재
창조 기사는 인간이 흙으로 빚어졌다는 사실과 더불어 인간의 영적인 본질을 증언하고 있다. 이에 해당하는 성서 본문은 이와 같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세기 2:7). 공동번역은 다음과 같다. “야훼 하느님께서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코에 입김을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 ‘생령’이라고 하든지 ‘숨’ 이라고 하든지 여기서 말하려는 것은 영성(靈性)이라는 점에서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구별된다는 점이다. 흙이 인간의 한계성을 말한다면 영은 인간의 초월성을 말한다 하겠다. 하나님의 형상(이마고 데이)도 역시 이 영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인간은 자연의 속성을 그대로 간직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뛰어넘을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는 셈이다.
인간의 이러한 속성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 정확하게 집어내기는 힘들다. 인간의 생명 본질이라고나 할지, 아니면 생명을 생명 되게 하는 능력이라 할지. 조금 더 일상적인 말로 하자면 이성이나 자유의지, 혹은 사랑의 능력 같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물론 동물들도 사랑의 능력을 갖고 있지만 그들의 사랑행위는 영적이라기보다는 자연적인 반면에, 인간은 자기를 초월하면서도, 혹은 자기를 부정하면서까지 사랑의 능력을 행사한다는 점에서 분명히 다른 동물과 구별된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이 흙과 생기, 몸과 영혼으로 구성되었다고 보는 성서적 인간론은 몸과 영이 이원론적으로 구분되어 있다고 보는 헬라인들의 인간론과 확연히 다르다. 성서적인 면에서 인간의 몸과 영은 통전적으로 인식되기 때문에 죽을 때 육체와 영이 함께 죽지만, 헬라적 사유에서는 인간의 몸만 죽고 영은 불멸한다. 따라서 기독교의 내세관은 완전한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이지만, 헬라인들의 경우에는 영혼불멸이다. 이런 점에서 교회에서 인간의 육체를 천히 여기고 영혼만 거룩하게 보려는 태도는 (소위 영혼구원) 기독교적이기보다는 오히려 헬라적인 태도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성서적 인간이해에서 물질(흙)과 정신(영)*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 것일까? 육체 없는 영혼만을 인간이라고 할 수 없으며, 영혼 없는 육체만을 온전한 인간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는 게 무슨 뜻인가? 도대체 이런 구성이 가능한 것일까? 이렇게 질문해보자. 인간의 영은 육체로부터 완전히 독립되어 있는 것인지, 아니면 종속되어 있는 것인지? 이런 궁극적 질문에 대해서 누가 정확한 답을 내릴 수 있단 말인가. 그저 우리는 몇 관점에서 추정해 볼 뿐이다.

*고대 헬라인들은 사물과 사물의 본질적 차이를 형상(에이도스)이라고 하였으며, 그 형상에 의해 한정됨으로써 사물을 이루게 되는 것을 질료(훌레)라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상과 질료를 철학적 의미로 적용시켰다. 예컨대 집의 질료는 목재이며, 형상은 집이다. 이런 개념에 따라서 볼 때 흙은 인간의 질료이며 영은 인간의 형상이라 할 수 있다.

고대로부터 인간이 동물과 구별되는 점은 사유 능력에 있다고 보았다. 비록 인간이 생물학적으로 다른 동물들보다 뛰어나지 못하다고 하더라도 생각할 줄 아는 능력으로 인해서 다른 동물을 지배하고 있다. 정확한 내용인지 잘 모르겠지만 다음과 같은 신화가 전해져온다. 하나님이 모든 동물들에게 각각의 능력을 선물로 주었다. 새에게는 나는 능력을, 물고기에게는 헤엄칠 수 있는 능력을, 사자에게는 강한 발과 송곳니를, 얼룩말에게는 달음질의 능력을 주었다. 가장 마지막에 찾아온 인간에게는 줄만한 것이 남아있지 않았다. 하나님은 생각하다 못해 사유할 수 있는 능력만을 허락하게 되었다. 인간은 자연 속에서 그 어떤 동물보다 무능력할 수밖에 없지만 이 사유의 능력으로 만물의 영장이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인간은 ‘호모 사피엔스’가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다른 동물이 흉내 낼 수 없는 문화까지 만들어냈다. (그런데 그 이성의 능력으로 인간은 다른 동물 보다 훨씬 파괴적인 동물이 됐지만). 이제는 호모 사피엔스인 인간이 하나님의 영역이라 할 생명의 본질에까지 도전하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이 결국 정신활동의 결과다 육체성을 초월*하는 인간의 이런 능력을 놓고 볼 때 정신과 영은 분명히 육체와 구별되는 요소라 할 수 있다.

*티베트의 승려들은 오늘의 자연과학자들이 이해할 수 없는 능력을 발휘한다. 이들의 특별한 정신훈련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고 한다. 겨울철에 젖은 천을 맨몸에 걸치고 정신을 집중시켜 그 천을 말리는 훈련이다. 또한 일 년에 한 번 씩은 한 겨울철 가장 추운 대보름날을 택해 산꼭대기에 올라가 홑으로 된 천으로 몸을 감고 밤을 새운다. 영하 2, 30도나 내려가는 상태에서도 그들은 거뜬히 하룻밤을 버텨낸다. 인간 정신이 육체를 초월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나마 반증해주는 현상이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생물학자들 중에는 인간의 정신활동을 순전히 생물학적 작용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칼 세이건과 그의 아내인 앤 드루얀은 <잃어버린 조상의 그림자>라는 책에서 인간의 모든 정신활동이 결국은 다른 동물들에게서도 나타날 수 있는 기계적 작용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논증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인간의 특성이라고 주장되는 모든 요소들, 즉 언어, 성, 사회성, 이성, 문화가 인간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침팬지 같은 동물들에게서도 나타난다고 한다. 이런 시각에 따르면 기독교에서 영성이라고 하는 요소도 역시 인간 뇌의 기계적 작용에 불과한 셈이다. 그냥 흘려 넘기기에는 그들의 과학적 근거가 매우 분명했다. 우리는 여기서 칼 세이건 같은 과학자의 주장을 무조건 동조하거나 배척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과학적 분석이 상당한 부분에서는 옳기 때문에 일단 수긍해야하며, 동시에 그런 시각이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신학적 재해석이 요청된다. 옳다는 것은 인간의 정신에 대한 현상학적 분석에 해당되며, 충분하지 못하다는 것은 그런 생물학적인 범주로서 해명할 수 없는 힘에 해당된다. 아마 이런 논쟁은 앞으로 과학자들과 신학자들 사이에서 끊임없는 담론으로 전개될 것이다.

인간과 불안
우리가 여기서 약간 시각을 돌려 인간의 실존적 특징이 불안에 관해서 한번 짚어볼 필요가 있다. 생물학자들의 주장처럼 인간의 정신적 작용이 뇌의 작용에 불과하다면 동물에게 없는 불안이 인간에게 나타나는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불안은 소가 도살장 앞에서 나타내는 그런 기계적인 행동이 아니라 인간에게만 있는 훨씬 심층적인 정신 작용을 의미한다. 만약 인간이 동물처럼 흙의 요소에만 지배를 받거나, 또는 천사처럼 영의 요소에만 지배를 받는다면 어떤 경우라도 하더라도 불안을 경험하지는 않을지 모른다. 이 말은 곧 인간이 한편으로는 철저하게 유한한 자연의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초월하는 영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런 심층적 불안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는 뜻이다. 이런 문제의 초점을 다시 우리 자신에게 돌려서,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시고 매우 좋았다고 말씀하셨다면, 흙과 영의 조화는 완벽했다고 보아야 하는데, 인간은 왜 현실적으로는 불안하게 살아가는 것일까? 하나님의 창조가 불완전하다는 뜻인가?  
성서는 이의 대답을 죄에서 제시한다. 키에르케고오르는 <불안의 개념>에서 인간의 불안과 죄의 관계를 심도 있게 묘사하고 있다. <죽음에 이르는 병>도 이런 연장선 속에 있는 책이다. 하나님이 아름답게 만드신 인간이 죄를 통해서 자기의 정체성을 상실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로 불안이라는 실존에 빠지게 되었다. 판넨베르크는 <인간이란 무엇인가>에서 이렇게 말했다. “자신을 자신 안에 가두는 자기 고집, 이것이 바로 죄다.” 인간의 모든 행위에서 노출되고 있는 자기 초월이 온 세계를 이끌어가고 통일시키는 그 힘(하나님)에게 나아가지 못하고 여전히 자기 자신에게 집착해 버림으로써 인간은 계속해서 불안하게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정신 심리학에서는 이런 불안의 문제를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죄라기보다는 인간 뇌의 생물학적인 작용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높다. 이미 오래 전부터 정신과 치료는 상담보다는 약물치료에 높은 비중을 두고 있는 실정이다. 이것은 곧 그들이 인간의 마음과 정신 문제를 초월적인 하나님과의 관계보다는 철저하게 인간 내부의 문제로 간주한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치료가 상당한 효과를 보이고 있기는 하겠지만 물론 뇌에 기계적인 작용*을 가함으로써 인간이 불안으로부터 벗어나게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것은 흡사 마약을 지속적으로 복용함으로써 불안의 현실을 망각하려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오랜 전에 본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라는 영화는 인간을 기계적으로 처리하는 정신병원에서 벌어지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정신과 의사들과 간호사들의 뜻대로 따르지 않던 주인공은 어느 날 강제적으로 사유능력을 무력화하는 수술을 받은 다음, 로봇처럼 순종적인 사람이 되고 만다. 이 주인공과 유일하게 인간적인 대화가 가능했던 같은 병동의 환자가 이를 지켜본 다음 창문을 부수고 병원을 탈출한다. 앞으로 이 세계는 모든 인간의 정신적인 문제들을 약물과 수술을 통해서 해결하는 방향으로 나가게 될 것이다. 아무런 근심도 고통도 느낄 수 없는, 그렇게 무병장수하는 게 진정한 행복이며, 그게 곧 인간의 미래라 할 수 있을까?
  
이제 그리스도교는 인간이 이 세상에서 실존적으로 감당해야 할 문제들을 생물학적 차원에서 해결하려는 과학자들과 경쟁 관계에 들어가 있는 셈이다. 이 구도를 좀더 정확하게 정리한다면, 기술 중심의 세계 앞에서 그리스도교가 제시해야 할 구원의 리얼리티에 관한 것이다. 인간의 기술이 세계와 인간을 구원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이 구원하는가? 또는 인간의 기술을 통해서 하나님이 구원하신다고 말해야 옳은가? 인간에게 내재적인 구원 가능성이 있는가, 아니면 다른 곳으로부터 개입하는 구원을 기다려야하는가? 이런 질문은 끝없이 이어질 수 있으니까 접어두고, 다만 우리 앞에 가장 확실한 구원의 실체로 인정받고 있는 인간 기술 문제를 잠시 검토하는 것으로 우리의 인간에 관한 질문을 정리하자.  

기술 너머의 세계
인간은 자연에 절대적으로 의존해서 살아가는 게 아니라 그것을 극복하고 활용하는 방식을 찾아 나섰다. 아마 최초의 문화적 도구는 돌칼 같은 생활 용품일 것이다. 그 뒤로 불을 발견한 다음에 유무형의 문명과 문화가 꽃을 피우게 된다. 그런데 이런 문화는 어쩌다가 이렇게 된 게 아니라 인간의 본질에 의한 결과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니까 동물의 세계에서는 아무리 오랜 세월을 기다려도 문화는 생산되지 않고 오직 인간 세계에서만 그것이 가능하다.
인간은 오늘 화려한 문명, 문화의 꽃을 만발하게 키웠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는 곧 인간이 이런 문화적인 차원에서 자기의 정체성을 확인한다는 것만이 아니라 이것이 곧 인간의 본질이라는 말이기도 한다. 문화가 없는 인간 사회는 이 지구상에 없다. 문학, 예술, 건축, 스포츠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온갖 문화는 인간이 자기 본질을 추구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어떤 문화가 이루어졌다고 해서 그것으로 완성될 수는 없으며 인간은 계속적으로 또 다른 것을 만들어나가려고 한다.    
특히 현대인은 기술 문명을 자기의 근거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가 매우 유의해야만 할 인간학적 토대가 바로 테크놀로지다. 물론 이 테크놀로지도 역시 문화의 한 분야이기는 하지만 20세기 후반과 21세기 초에는 그 이전의 기술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왔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의 속성을 좀 더 내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간의 기술은 처음에는 마성적인 자연을 극복하기 위해서, 즉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시작되었으나, 이제는 그런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아예 목적이 된 상태에 도달했다. 인간이 기술을 비해하는 게 아니라 그 기술과 기계가 인간과 인간의 의식*까지 지배한다는 말이다.

*언젠가 은행에서 경험한 이야기다. 두 청년이 시골집에 송금하는 중이었다. 한 친구가 송금을 끝내고 “좀 이상하다. 계산이 잘 안 맞는 것 같아!”라고 하자, 옆에 있던 친구가 하는 말이 이랬다. “이상하긴 뭐가 이상해. 맞을 거야. 기계가 계산한 건데!” 우리는 이제 사람의 말보다는 기계와 기술의 정보를 더 신뢰하고 살아가게 되었다는 말이다.

우리는 여기서 테크놀로지를 가치론적으로 논하자는 게 아니라 인간의 본질과 이것이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하는 점을 찾아보자는 것이다. 생존의 필요에 의해서 시작한 기술이 어느 사이에 인간이 자기 자신을 확인하는 목표로 변해버린 현상에 주의를 기울어야 한다는 말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아무리 인간복제가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경고해도 이런 기술을 그 자체가 이미 목표가 되었기 때문에 계속 그런 쪽으로 발전해 나갈 것이다. 어쩌면 원시인들이 유치한 기술을 통해서 자연을 극복하고, 나아가서 정복하면서 느꼈던 자기만족, 혹은 자기 정체성 확인이 오늘 우리에게도 그래도 적용되는지 모르겠다. 생명을 창조하겠다는, 인간의 유한성을 벗어나려는 욕구가 바로 끝없는 기술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는 말이다. 이런 자기 초월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는 과학자들과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이 더불어서 논의해야 할 주제이지 아직 끝난 것은 아니다.
기술 중심의 길로, 혹은 기술 지배의 길로 들어선 인류의 미래는 무엇일까? 자기를 구원하는 길이 열리는가, 아니면 자기를 멸망시키는 길이 펼쳐지는가? 한스 큉(H. Küng)은 인류가 이미 기술 중심의 세계 속으로 들어왔지만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공동체를 지향해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그것은 곧 ‘기술 너머의 공동체’(die matatechnologische Gesellschaft)이다. 인간성이 회복되고, 자연과 일치하며, 노동의 소외가 극복되는 그 인류의 미래를 향해서 나가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기술 너머의 공동체에 어떻게 동참할 것인지, 또는 이미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온, 이미 선취된, 그러나 궁극적으로 예수의 재림으로 성취될 하나님의 나라를 이 세계에 어떻게 구체적으로 제시할 수 있을 것인지 계속해서 질문해야만 한다.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은 곧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성서와 2천년 기독교 역사, 그리고 오늘의 인문학적 사유 안에서 심화하는 그 과정에서 차츰 그 모습을 나타낼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지만 ‘종말’(카이로스)에 이르면 얼굴을 맞대어 보듯이 그 모습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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