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십자가는 필연인가, 우연인가?

조회 수 12691 추천 수 0 2009.01.26 23:44:15
 

십자가(1)

-예수의 십자가는 필연인가, 우연인가?-


오늘 나는 자칫 시빗거리에 휩싸일지 모를 이야기를 잠시 해야겠다. 그것은 곧 예수의 십자가 사건에 관한 것이다. 이미 기독교인들에게는 예수의 십자가가 구원의 절대적인 사건으로 각인되어 있기 때문에 여기에 대해서 왈가왈부 토를 단다는 것은 신성모독처럼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근본에 대해서 정직하고 진지하게 질문하는 일을 포기하면 광신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도대체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왜 일어났는가?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 아니면 인류가 구원받지 못한다는 말인가? 전능하신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달리게 해야만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는 말인가? 만약 이 자리에서 “그게 바로 성서의 가르침이다.”라고 말하지는 마시라. 믿지 못할 일이라도 성서가 진술하고 있기 때문에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가 아직 하나님의 계시가 무엇인지 잘 모르고 있다는 증거이다.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 죽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나? 우리가 믿는 것은 예수의 십자가인가, 그의 부활인가, 그의 사랑인가, 그의 행위인가, 그의 가르침인가? 아니면 그의 인격과 그의 운명인가? 우리는 도대체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의 무엇을 믿는가? 이런 모든 것을 포함한 예수 자체를 믿는 것일까? 혹은 우리는 예수를 믿는 게 아니라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믿는가? 위에서 무질서하게 나열한 질문들의 무게는 여기서 해결하기에는 너무나 무겁다.

다시 우리의 관심을 십자가의 역사 문제로 돌리자. 예수의 십자가는 역사의 필연인가, 아니면 우연인가? 만약 예수의 십자가가 그렇게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될 필연의 과정에 불과했다면 그것은 인류의 구원할만한 사건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일종의 역사 결정론은 성서와 기독교 신앙에서 말석도 차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런 역사 결정론에 사로잡혀 있다. 모든 게 하나님이 계획한 대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기독교인들은 생각한다. 그런 걸 예정, 또는 섭리라고 부른다. 그러나 예정론과 섭리론은 역사 결정론과는 격을 달리한다.

내가 보기에 예수의 십자가는 역사의 우연이다. 여기서 우연이라는 말은 주사위처럼 여러 가능성 중에서 어쩌다 선택되었다는 게 아니라 역사를 열려진 사건으로 본다는 의미이다. 예수에게는 이미 출생부터 십자가가 결정된 게 아니라 열려져 있었다. 그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했다기보다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했다. 기독교 신앙을 설명할 때 이런 게 좀 까다로운 부분이다. 원칙적으로는 예수의 십자가가 인류를 구원하는 길이지만, 또한 예수의 십자가 사건으로 인해서 인류가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지만, 그래서 인류를 구원하실 하나님의 섭리가 바로 이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지만 예수의 십자가가 이미 필연적으로 주어진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만약 이 세상이 이런 필연의 과정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삶은 무의미하다. 우리는 오히려 우연 안에서 하나님의 개입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의 예측을 벗어나는 게 바로 우연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행위이고 능력이다. 이런 우연의 개입으로 인해서 우리의 삶에는 긴장이 작동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신비에 마음을 열고 살아가게 될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를 역사의 우연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도대체 오늘 우리의 신앙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것일까? 그건 단지 신학적 유희에 불과한 걸까? 이 문제를 좀더 실감하기 위해서는 2천 년 전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아무도 구원의 길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헬라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었다. 철저한 실패에 불과한 예수의 십자가가 바로 인류를 구원하는 길이라는 사실은 초기 기독교에서 매우 천천히 인식되고 고백된 것이다. 전혀 주목받지 못한 사건이, 더 정확하게 말해서 오히려 경원의 대상에 불과했던 사건이 인류의 운명을 결정짓는 사건으로 부각되었다는 이 역사의 신비 안에서 살아가는 기독교인은 오늘도 그런 일들이 어디서 일어나고 있는지 민감하게, 깨어있는 영성으로 살펴야만 한다. 이런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그만큼 기독교는 구원에 가까운 공동체로 자리를 잡아갈 것이다.

이렇게 말해도 아직 감이 잡히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내가 여기서 무엇을 더 설명해야하는가. 이왕 말이 나왔으니까 한 마디만 더 설명하자. 예수의 십자가를 하나님의 역사 개입인 우연이라고 아는 사람이라면 새 땅과 새 하늘이 열리는 종말이 우리의 예측을 벗어나서, 우리의 계획과 우리의 열정을 벗어나서,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시작된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그것을 기다릴 것이다. 초기 기독교가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예수의 십자가에서 인류 구원의 길을 발견했듯이 말이다.

  1. [2009/01/28] 속 빈 설교 꽉 찬 설교 by 이길용 (2829)

[레벨:16]안희철

2009.01.27 03:33:45

숫가락 하나 얹어도 될까요. 십자가(1)이시니 (2)에서 언급될수도 있는 내용이겠지만...
배고픈 자가 성급하게.

그런데 판넨베르크는 그 "우연"을 두가지로 나누어 봅니다. 잘 아시다시피 Zufall과 Kontingenz.
둘 다 우연입니다만 편의상 앞의 것을 우발, 뒤의 것을 우연이라고 표현하겠습니다.
우발은 판넨베르크의 표현대로 자의적 변덕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만약 신이 우발에 근거하여 세계를 창조했다면
약속이니 섭리니 하는 것들은 허무한 것이 되고 맙니다. 이것과 우연은 조금 다릅니다.
적어도 우연은 "가능한 것"입니다. 따라서 십자가 사건은 "가능한 사건"이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이 말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말입니다.
다만 자의적인 변덕에 의해 이랬다 저랬다 하는, 즉 저질렀다 뒤엎었다 하는 행위를 하나님은
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발이 아닌 우연으로써 행위하셨다는 신학적 설명입니다.

제가 감히 짐작해보건데, 판넨베르크는 두가지 점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하나는 세계가 결코 필연적으로 만들어져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즉 신의 "내적" 절대성을 인정하려 하였고
또 하나는 세계를 신께서 사랑하며 비록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지만
만들어진 세계를 그 창조의 완성(종말, 계속된 창조)에까지 그의 "영원한 창조행위"로써
이루어 가려 한다는 점, 즉 신의 사랑을 말하려 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두가지 지점을 조화롭게 만들기 위해서는, 그리고 납득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철학/과학적 용어였던(물론 신학적으로도 사용되긴 하였지만) "우연" 개념을 적극 사용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렇다면 십자가 사건은 목사님 질문에 대하여, 판넨베르크의 신학적 입장에 선다면 "우연한 사건"일 것이고
일반적 이해를 바탕으로 풀어 본다면 비록 우리 눈에는 "우발"로 보이는 사건이지만 그것은 "우연"이었으며
따라서 "우발"에 그친 것이 아닌 "필연"으로 고백되는 것이 십자가 사건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목사님께서 쓰신 글과 동어반복이지만, 제 말로 풀어 설명해 보았습니다.
셤 끝나고 머리가 아팠는데, 이 글을 읽으니 에너지가 솟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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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9.01.27 11:49:30

안 목사님,
설 명절 즈음에 시험이라니,
우리말로도 시험은 골치 아픈 건데
독일어로 해야 하니 그 머리가 오죽하겠어요.
수고가 많았군요.
우발과 우연의 구별이 재미 있네요.
Zufall은 우발로, Kontingenz는 우연으로 표기했군요.
우리말로 바꾸기가 쉽지 않으니 어쩔 수 없지요.
우발과 우연의 설명을 들으니
그 차이가 선명하게 들어오는군요.
개념이라는 게 늘 상대적인 거라서
판넨베르크가 하나님의 존재근거와 세계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서
그런 용어들을 빌려온 거겠지요.
잘 배웠어요.
내가 별로 생각하지 않았던 거라서 질문하는데요.
두 가지에요.
1. 우발과 우연을 구별할 수는 있지만 우발은 이미 우연 안에 들어가 있는 게 아닐까요?
2. Zufall은 우발로, Kontingenz을 우연으로 나누는 것이 가능한지요?
판넨베르크가 이 두 단어를 그렇게 엄밀하게 구별하고 사용하지는 않는 것 같애서요.
Zufall은 독일어이고,  Kontingenz는 라틴어에서 온 단어로 똑같은 뜻으로 알고 있었거든요.
위의 대글로 오늘 판넨베르크 신학을 다시 생각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수고.

이 대글을 읽은 다비안들을 위한 보충설명입니다.
위 안 목사님이 단 글에서
이 세계가 필연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신의 내적 절대성과 연결한 내용이 있어요.
우연성과 절대성의 관계이죠.
이게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알아야 위의 설명을 이해할 수 있어요.
이 세상이 우리의 예측을(필연성) 벗어난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인격적으로 이 세상을 통치, 섭리하신다는 증거라는 겁니다.
그게 하나님의 절대성이죠.
예컨데 컴퓨터가 있다고 합시다.
그냥 그것만 놓고 본다면 늘 기계적으로 작동합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컴을 만든 사람이 다른 프로그램을 깔아놓으면
그게 다르게 작동하거든요.
컴이 인간이고 자연이라고 한다면
컴 프로그램머는 하나님이죠.
새로운 프로그램이 전혀 다른 것 같지만
전체 과정에서 보면 일관성이 있는 거지요.
그걸 하나님의 섭리라고 말할 수 있어요.
여기서 중요한 건 모든 것이 완성된 마지막에 가서야
그 과정의 것들을 명백하게 인식할 수 있다는 거지요.
좋은 명절

[레벨:16]안희철

2009.01.27 19:30:13

독일어로 보는 그리스어 시험은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은 시험이예요.
하지만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한국에서 가르칠 희망으로
열심히 공부하려고 날마다 다잡고 있습니다.
두 질문에 부족하지만 답을 달아 보겠습니다.

"1. 우발과 우연을 구별할 수는 있지만 우발은 이미 우연 안에 들어가 있는 게 아닐까요?"
=> 백마다 말보다 그의 글을 좀 따오는게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er [ein Akt der Freiheit Gottes] ist nicht Produkt eines Zufalls, nämlich einer willkürlichen Laune, die gar keine Begründung im inneren Leben Gottes hätte."(STh II 55)
"in welchem [einem indeterministisches System] der Zufall regiert"(p. 137)
"Die Entstehung des Lebens und der menschlichen Lebensform sind nicht, wie man früher angesichts der Weite des Universums gemeint hat, belanglose Zufälle der Natur."(p. 158)
이상의 것이 2권에서 언급된 Zufall의 모든 것입니다. 첫번째 인용구는 명백히 Zufall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드러낸 것이고(아마도 독일어의 관용적 표현으로 쓴 것일테고 여기에 Kontingenz를 대체할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두번째 인용구도 앞뒤를 읽으면 더 자세하겠지만, "우발과 법칙성"(Zufall und Gesetzlichkeit)의 공동작용으로 생명의 발생이 이루어졌다는 생물학적 내용의 주석이고요, 세번째도 생물학과 연관되어 있는데, 생명의 발생이 중요하지 않은 자연의 우발들인 것은 아니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보통 생물학에서는 "우연" 혹은 "우발"로 한국에서 사용하고 있는 것 같고 이보다 더 정확한 표현은 "자연선택"이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Dennoch muß auch von Gott her der Ursprung der Welt als kontingent, weil aus der Freiheit des einen Gottes in seinem trinitarischen Leben entspringend, gedacht werden.(p. 23)
즉 세계의 기원은 "우연"으로써 생각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우연성에 대한 언급은 비교적 많은데요, 제가 2권을 읽은 바로 그는 결코 우발과 우연을 섞어 사용하고 있지 않고 있습니다. 뭐 여기까지는 원론적인 이야기고요, 질문에 답을 하자면, 판넨베르크가 사용한 "우연"은 그의 독창적인 신학적 표현이고 과학에서 말하는 "우발"과 "자연법칙", 그리고 "필연"을 모두 포괄하는 단어라고 저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왜 우발(우연)과 필연의 상대개념을 모두 포괄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동형식성", 양자역학에서의 미시적 단일사건들의 비파생적 성격 등이 고려되어 얻어진 결론입니다. 다면 여기서 두가지 우연의 특징을 반드시 언급해야 할 것 같네요. 하나는 "파생불가능성"이고 또 하나는 "미래의 힘"입니다. 모든 개별 사건들의 기원은 신으로부터 오는데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사건이라는 자체가 "우연"이라는 설명입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발생한 우연적 세계는 "파생이 불가능한", 쉽게 말해서 필요에 의해서나 이유나 원인이 있어서 발생한 것이 아니며, 이를 "가능성의 세계"인 미래로부터 "사실성의 세계"인 "과거로 드러나는 "미래의 힘"이 이 우연한 세계의 기원이 되는 것입니다(p. 121). 여기서 그는 "자기 맘대로의 우발"과 명백히 구별하고 있습니다. 그래야만 세계가 존속(Bestehen)할 수 있다는 신학적 설명(p. 35)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판넨베르크의 우연 개념은 전적으로 신학적 개념이고 이는 신의 세계에 대한 "행위"를 설명하는 용어라 여겨집니다. 우발이란 단어를 우연 안에 넣을 수 있느냐는 우선적으로 우발의 개념 정의가 필요한 것 같고 다시 말씀드리면 willkürliche Laune로써의 우발은 우연 개념에 들어오기는 힘들지 않나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신적 행위의 결과로써 세계는 우연적이기 때문입니다.

답을 달고보니 2번에 대한 답도 되는 것 같네요. 그래서, 우발과 우연을 구분해 내는 것이 제 논문의 작지만 중요한 한 타일이 될 것 같네요. 독일에 와서 보니 Kontingenz에 대한 연구가 모든 학문분야에 고루 깊고 넓게 연구되었었더라고요. 여기에 대해서는 저도 공부하는 중이라... 판넨베르크의 글을 먼저 번역하시거나 혹은 인용하여 설명하신 분들 대부분이 Kontingenz를 "우발성"으로 사용하고 계시더군요. 사실 전에 판넨베르크 논문 번역할 때 조금 고심을 했었습니다. 우발이나 우연이나 한국어로는 거의 같은 의미이고 용어 정리도 지금 되어 있지 않고... 이럴 때는 선점한 사람 맘인가요? 제게는 우연이라는 표현의 어감이 kontingent와 조금 더 어울린다는 느낌을 가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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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9.01.27 20:56:18

고전어 시험이었군요.
히브리어와 라틴어는 끝났어요?
고전 헬라 철학까지 공부를 열심히 한다니
앞으로 기대가 됩니다.
바쁜데도 위에서 원문 인용까지 하면서 친절한 설명을 해주어서
확실하게 배웠습니다.
나중에 한국에 나오면 한잔 살테니 기대하시구료.
박일준 선생이 번역한 <자연신학>(한국신학연구소)에서는
우연이 모조리 우발로 번역되었어요.
내가 번역한 몇 권의 책에서는
우발과 우연을 구분하지 못했구요.
나는 몽땅 우연으로 번역했어요.
안 목사님이 학위를 잘 끝내고 돌아오면
한국신학계에서 할 일이 정말 많을 것 같군요.
잘 해 봅시다.
다음의 문장만 질문할께요.
Darum fuert auch das Kontingenzargument von Leibniz nicht zu einer stringenten Demonstration des Daseins Gottes, sondern nur Zum Nachweis der Notwendigkeit, dass das menschliche Denken sich ueber die Zufaelligkeit alles Endlichen zum Gedanken eines durch sich selbst existierenden Ursprungs erheben muss.(STh 1, 106)
위 문장에 나오는 Zufaelligkeit 를 우발성으로 번역해야만 정확한 걸까요?
나는 그걸 그냥 우연성이라고 번역했거든요.
설명 부탁드립니다.

[레벨:16]안희철

2009.01.28 20:44:05

해당 문장 뿐 아니라 장 전체를 걸쳐 Zufall과 Kontingenz가 뒤섞여 있군요.
저 또한 지난번 번역시에 Zufall을 그냥 우연이라고 하였었습니다.
제가 위의 댓글에 우연과 우발로 나누어 표현한 것은 분명한 의미상 차이가 있다는 걸 드러내려 한 것 뿐이고
사실 한국어로는 구분이 안되기 때문에 모두 우연으로 번역한다 하여도 틀린 건 아닐 겁니다.
엄밀히 구분이 필요한 곳에서 독문표기를 하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차피 제대로 공부할 사람은 원문을 봐야할 테니까요.
뭐 그렇다 하여도 어쨌거나 인용하신 문장 자체는 의미상 우발이 아닌 우연성으로 번역해도 무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아래에 조금 더 설명을 달겠습니다.

"Vernunft, Kontingenz und Gott"란 책을 보니 목사님께서 언급하신 십자가의 우연성 개념 설명도 등장하네요.
십자가의 필연성을 강조함으로써 십자가 사건이 우연임을 피하려 했다는군요.
여기서는 우연을 bloße Zufälligkeit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해당 논문에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표현이 der bloße Zufall입니다.
순수 우연은 Kontingenz가 아니라는 것이겠죠(nichtbeliebig).
또한 판넨베르크 자신도 범용적인 의미에서의 Zufall을 Kontingenz와 비슷하게 사용하는 듯 합니다.
특히 과학분야에서 따올 때는 그런 것 같습니다.
위 댓글에서 Zufall에 대해 3개만 있다고 했는데 이건 레지스터에 나온 것 뿐이고
좀 더 찾아보니 대략 8군데에 등장하고 있는데요,
예를들어 슈뢰딩거의 이론을 설명할 때는 그대로 Zufall이라고 쓰고 있습니다(p. 84).
판넨베르크는 분명 Kontingenz개념을 둔스 스코투스 이래로 언급되어 온
신학용어로써 사용하려 한 것 같고(하나님의 행위를 위한 표현으로써)
일상적 독어인 Zufall과 어느 정도는 맞을 수도 있겠지만 신학적으로는 구분이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이것이 "우연성의 문화"(Kontingenzkultur) 속에 노출된 우리에게는 새로울 것이 없는 것으로 쉽게 읽혀버리거나
가벼이 생각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게다가 십자가의 우연성에서도 언급했듯이 "우연"이라는 단어에 대해 신학과 교회는
"거리낌"이 분명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래전부터 신학 위에서 논의되어 왔다는 사실은
놀랍기도 하고요. 고전역학의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아시겠지만 Zufall은 chance로 Kontingenz는 contingency로 각각 영문 번역되고 있습니다.
박일준 박사의 번역문을 한번 봐야겠지만 그 책에는 아주 적은 부분만 chance로 되어 있을 겁니다.
그대로 우발로 번역했는지 아니면 다른 대안을 찾아 기록했는지 집에서 좀 찾아봐야겠네요.

제 나름대로의 연구가 좀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워낙 복잡한 문제라. 답변이 부족하도 한잔은 꼭 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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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2]자유의꿈

2009.01.27 16:19:35

안목사님, 글 잘 읽었습니다.
정목사님의 글과 최근 질답란의 역사성 논쟁, 안목사님과의 대화 등으로 인해
최근에 관련 주제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배우고 정리해나가고 있습니다.

저도 정목사님과 비슷하게 우연과 우발에 대한 질문을 드립니다.
우연은 가능한 것이라고 하셨는데 그럼 우발은 가능하지 않은 것인가요?
가능하지 않은 이유는 하나님께서 의미없이 변덕을 부리시지 않기 때문인가요?
우연과 우발은 필연이 아니라는(예측하기 어려운) 점에서는 공통점을 가지지만
하나님의 뜻이 담겨있느냐 아니냐에서 구별이 되는 건가요?
즉, 같은 사건을 신자는 우연으로 무신론자는 우발로 본다는 말씀이시죠?

[레벨:16]안희철

2009.01.27 19:41:10

저 또한 열린 사고로 적극적으로 대화에 임하시는 자유의꿈님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일단, 제가 얼마전(12월) 번역해 올린 글을 찾아 읽어주세요.
그러고나면 위 질문 대부분은 저절로 풀리실 것입니다. 특히 과학분야 전공자이시니
오히려 쉽게 읽히실 수도 있습니다.

판넨베르크의 우연의 정의는 명백합니다. "가능한 것" 그러나 동시에 "실제인 것"
이 둘을 합쳐 "비필연적이지 않은 것"을 우연적인 것이라 말합니다.
제가 말씀드렸던 우발(Zufall)이란, 변덕에 의한 발생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가능하고 실제적인 것"일 수는 있지만 "힘"을 갖지는 못합니다.
또한 판넨베르크의 표현대로라면 우연적인 것은 또한 필연적인 것을 포함합니다.
자연과학의 모든 법칙들조차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개념인 것이지요.
미시세계와 거시세계의 관계를 상상해보시면 어떨까요.
오늘날의 자연법칙이라는 것은 그 근거가 미시세계의 불확정성에 터를 잡고 있다고 말이죠.
아마 이 부분에 대해서는 자유의 꿈님이 더 잘 설명해주실 수 있을 것 같네요.
그리고, 무신론자는 우연으로도 우발로도 보지 않겠죠. "존재하지 않았던 사건"이라고 우기는 사람도 있잖아요.
하나님의 뜻을 통한 구별은, 신학적으로 좀 더 고민해보아야겠지만 좋은 방법일 것 같습니다.

[레벨:7]시드니

2009.01.27 09:11:53

두분 신학자의 글을 보면서, 이 댓글 다는 것을 무척 망설였습니다. 감히 상대가 안되는 자가 끼어 드는 것 같아서~
그러나, 역시 인터넷은 대단한 공간입니다. 철학자의 논쟁에 초딩이 끼어 들 수도 있으니까요.

저의 질문은 복음서 저자(기자)들은, 분명하게 십자가의 필연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직접 자신이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대목이랄지... 이것이 복음서 기자의 신앙고백(창작)이라고 전제하여도, 그러면 왜
기자가 이 사건을 필연으로 표현하려 하였는가에 대한 의문은 남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굴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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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9.01.27 11:59:56

시드니 님,
설 잘 지내지요.
위 글에서 복음서 기자들의 신앙고백을 말하면
괄호 안에 창작이라고 쓰셨네요.
신앙고백은 창작이 아니랍니다.
오히려 역사해석이라고 봐야 옳습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당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것이 제자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었어요.
예수의 부활 현현을 경험한 뒤에
구약성서 등을 근거로
십자가 처형이 바로 인류를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구원섭리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거지요.
그 해석이 정말 옳은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냐, 하는 질문이 가능합니다.
그게 옳다는 것을 변증하는 것이 바로 신학이고,
교회 공동체의 삶이기도 합니다.
지금도 우리는 그런 변증의 길을 가고 있어요.

복음서 기자들과 서신서 기자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필연으로 주장한 근거가 무엇이냐고 질문했지요?
이건 그렇게 어려운 문제가 아니에요.
이미 위의 설명에서 어느 정도의 대답도 찾을 수 있구요.
지금 시드니 님이 다비아에 들어와서 이렇게 신학논쟁에 끼어들 수 있게 된 것은
우연일까, 필연일까요?
이미 이렇게 되도록 인생의 프로그램이 결정된 건 아니었지요.
시드니 님이 다비아를 발견하게 된 건 정말 우연이었겠지요.
제가 대구성서아카데미 운동을 시작하지 않았다면 이런 계기도 없었을 거구요.
그런데 지금 지내와서 보니 뭔가 필연인 거 같지 않아요?
신약성서 기자들은 예수의 사건을
이미 구약의 전체 역사에서 예정된 것으로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는 다윗의 후손으로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가 분명하다고 말입니다.
그들의 그런 해석과 신앙이 옳은니 아닌지는
앞에서 말했듯이 지금도 논쟁적이고, 논쟁적이어야 합니다.
신학은 늘 논쟁적이었어요.
진리론적인 차원에서 자기를 그 논쟁의 대상으로 올려놓는 거지요.
주의 은총이.

[레벨:7]시드니

2009.01.27 16:45:34

목사님, 댓글 감사드립니다.
저와 다비아와의 관계를 예를 드신 것은 이해가 됩니다. 저도 필연이라는 것을 이해하겠어요.
그런데, 예수님과 십자가에 대해서는 솔직히 아직 이해가 안 갑니다.
마치 재채기가 나올듯 말듯 하면서 코가 간질거리듯이, 머리속이 간질 거리기만 합니다. ㅎㅎ
밑의 유니스님 글까지 보니, 더욱 더 알듯 말듯합니다.
이게 그냥 제 수준인걸 인정하렵니다. 더 생각하고 공부하다 보면 이해될 날이 있겠죠. 감사합니다.
profile

[레벨:29]유니스

2009.01.27 15:27:32

목사님, 지난 대구오프때 여섯 다비안들이 2차갔다가
집에 오니 1시가 가까이 되었더랬습니다.
첫날처럼님께서 꼬마들에게 줄 마이쮸와 고래밥을 사던 길에
제가 좌표에 대하여 얼핏 얘기했더랬지요.

우리 각자에 대한 필연, 우연..등은 언급하지만
예수님의 사건은 결정, 필연, 예정으로 아예 문을 닫아두었습니다.
지금에야 이 단상을 열쇠 삼아서 열어보며,
앞에서 제가 '좌표'를 먼저 언급하였으니 다차원 상으로 얘기를 하겠습니다.

'점선을 따라 자르시오...'
이런 지시는 누구나 만나보았을 겁니다.
예수님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인생이 예정과 필연 상에 있다면
점선을 따르라는 지시를 좇아가는 것일 겁니다,
그 先점선을 그리는 절대자가 예정의 결정자이겠지요.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우연으로 열어두신 역사의 사건으로
예수님께서 어떤 좌표상에 있다고 생각해봅니다.
先점선조차 보이지않는 막막함 앞에서 절대자만을 향하는 것이
저에게는 더 절대적 반응이자 예수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한 좌표들이 연결되면서 궤적이 도출되지않았겠습니까?
우리는 이미 꿰어진 구슬을 보았기에 그것이 보배인 줄 아는 것이고,
예수의 행적의 좌표들이 이미 궤적화 된 것을 보았기에
구원이라는 삶의 방정식, 필연으로 결정해버릴 수 있을 겁니다.

옛 아담이 선악과와 생명나무 앞에서
선악과를 먼저 택한 것이 자유의지를 부여받은 인간의 필연으로 보이지만
이 또한 열어두고 본다면 그에게는 우연의 사건일 것입니다.
타락 전의 인간상이어서 예수의 입장과 같은 선상에서인데도 말입니다.

이 단상덕분에 확실하게 접어두었던 것까지 들추어서 생각해보게 되는군요.
필연이라고 할 만큼 주님 앞에 선한 우연들이 연결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9.01.27 22:22:37

아니 이럴 수가!
나를 쏙 빼놓고 자기들끼리만 2차를 갔군요.
유니스 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 안으로 점점 깊이 들어가는군요.
그것이 生氣(Ereignis)라는 사실을 느낄 수 있다면
전혀 새로운 신앙의 세계, 또는 차원이 열릴 겁니다.
다음에 2차에 나도 끼어주세요.
profile

[레벨:29]유니스

2009.01.28 14:05:18

목사님, 이러시면 안되시죠.
그날 저희들을 버리시고
먼저 가셨지않어요....emoticon
profile

[레벨:33]우디

2009.01.27 16:29:22

(창 45:5)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

야곱의아들 요셉이 형들의 질투로 죽을고비를 맞고 팔리우고 온갖 고난을 겪고 애굽의 총리가 되었던 스토리!

그리고 이렇게 정리를 해주시곤 했죠.
"요셉이 형들한테 팔리고 고난을 겪은 것은 다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하심이었습니다."

저는 결코 받아들이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제가 스스로 믿음없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어요.

그 모든 사건과 과정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시나리오라면 선악간에 판단할 필요가 없더라고요.
요셉의 형들도, 보디발의 아내도 다 아무 잘못없는 셈이 되는거죠.
그리고 우리 모두 결국 결정된 시나리오대로 살고 있는셈이고요.
참으로 허무할 수 밖에 없는 가르침을 진리라고 받아들일 수가 없었어요.

하나님께서 역사를 경륜해 가시는 데에 있어서
아무리 요셉 형들이, 보디발 아내가 등등이 돌발 변수를 일으킨다해도
하나님께서 결국은 악조건까지도 모두 신비롭게 선용해가며
역사를 경륜해 가신다는 것이야 말로
스스로에게 소망의 근거를 찾을 수 없는 우리에게는
참된 소망의 토대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입장에서는 지나온 세월을 돌이켜보니
하나님의 일하심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니니
(창 45:5)과 같은 고백이 나오게 될겁니다.
그 표현이 마치 역사의 필연처럼 들리기도 하는 것이겠지요.

이것을 필연적인 것으로, 역사결정론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더 닫게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냥 사는대로 살아도 결국 하나님 시나리오대로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지 않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의 주인이심을 믿는 것과는 다른 차원이겠지요.

십자가의 필연 또는 우연과 연관지어서 요셉이 떠올라서 잠시 적어봤어요.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9.01.27 22:27:55

우디 님이 정말 중요한 걸 짚었군요.
요셉 설화를 통한 하나님의 경륜이라!
역사 결정론이 아니라 역사 개방성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역동적인 경륜을 맛볼 수 있겠지요.
다음 주일에 만납시다.
좋은 밤.

[레벨:16]안희철

2009.01.27 19:55:47

만화 "타짜"에서 읽은 내용입니다.
불확정성의 원리니 불완전성의 원리니 양자역학이니 줄줄줄 언급하더니(도박만화에 무신???)
뱅기 안에서 여자를 꼬시며 그러더군요(정확한 단어들은 기억이 안나지만)

"지금 당신과 내가 뱅기에서 내려
XXX카페에서 만날 확률이 얼마일까요?
0% 이거나 0% 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만약 정말로 만나게 된다면?
그 확률은 100%가 됩니다!"

뭐 내용은 대강 그렇습니다.
우리의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도 다 그런게 아닌가 싶습니다.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도대체 5분전 제 의식이 5분후의 제 의식과 동일할 이유가 뭐가 있습니까?
제 신체를 구성하고 있는 분자들이 분열하지 않고 견고한 조직을 이어가리라고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요?
규칙과 질서를 통해 세상을 보존하시는 하나님의 끊임없는 창조행위에 감사를 드릴 뿐입니다.
그리고 이렇듯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이 우리 눈 앞에 벌어졌을 때
그것이 바로 성부 하나님의 섭리였다고,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나는 그렇게 신앙하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것이 성자 하나님의 십자가 사건을 바라보는 우리의 건전하고 올바른 자세일 것이고
또한 오늘의 일상을 경험하는 우리가 취할 마땅한 모습일 것입니다.
2000년전의 사건이 오늘 나의 사건이 되도록 경험하게 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힘은 어떻구요.

나를 여기 "있게" 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레벨:7]늘오늘

2009.01.27 22:28:47

 

변화의 물살 속에서,

이해는 못하지만, 감사한 맘으로,

예수의 십자가를 구원의 길로 고백합니다!!


그런데요,, 

물방울들의 고백/행동이 물줄기를 바꿀 수도 있나요?

... 바뀔지라도, 예측과 다르다면, 물방울들이 바꾼 것은 아닌 거죠?


그렇다면,, 

우리들의 고백이란,

우연한 태도의 하나인 거죠?

물줄기를 어쩌지는 못하지만, 다만 그것을 지켜보는,

거의 있을 법하지 않지만 여기 있는,(우연한), 하나의 해석학적 렌즈.. ^^


도도한 신의 자유.

역설적이지만, 물거품처럼 가벼운, 우리들의 자유. ㅋㅋ^^*


[레벨:13]콰미

2009.01.27 22:42:11

일단 좋은 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의 주제는  칼빈의 예정론과도 상당히 밀접하다고 느껴지네요

바로 칼빈신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것은  소위 말하는 칼빈주의자들의 고민입니다.

하나님의 필연 ((예정))의 한계에 대한 문제제기입니다.  그것은 분명 역사결정론과 다른 그 무엇입니다.

지금까지   하이퍼 칼빈주의나  신칼빈주의   모두 역사적 결정론을  나열하였습니다.

선택된 자와 유기된 자를 도식적으로 이야기 하게 되면서 인간의 삶을 기계와 같은 운명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즉 인간의 선택과 자유가 주어졌지만 그것은 명목이고 실질이 없어진 것이지요   하나님의 예정안에 인간의 선택과

자유가 유기되어 버립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자유도 아니고 선택도 아닐 것입니다.

제가 알기로 우리나라에서  칼빈을 제대로 이해한 몇 안되는 신학자이신 이광호 목사님은 이점을 지적하셨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정목사님 근처에 사시니까 만나 보셔요 ~ )

그렇다면 칼빈의 예정설에는 무엇이 남는가?   솔직히 남는게 별로 없습니다.

어쩌면 꽤나 새삼스러운 이야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바로 하나님은 선하심을 예정한다는 것입니다.

안목사님 말씀처럼 하나님의 시뮬레이션이  우발이 아니라 우연이 었으며  하나님 안에서 보다 근본적으로

접근한다면 그것 마저도 필연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필연성 안에 있으며  예정의 결정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의 선택과 자유를 통해서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profile

[레벨:23]모래알

2009.01.27 23:41:05

어려운 제목이라서 ..

지난 토요일에 영화관에서 "벤자민 버튼의 기이한 이야기"를 보았어요.
영화 속에서 아주 흥미로운 것으로 제게 기억나는 것  중 하나가
 마침 오늘의 주제와 일맥 상통하는 게 있어서 몇 자 적습니다.

교통 사고를 당하는 장면을 해석하면서
사고를 당한 사람과 또 사고를 일으키는 사람들에게
그 순간 직전에 일어났던 일들을 유추하는 것이었죠.

마침 목사님의 매일묵상 "하나님의 때"-크로노스와 카이로스-를 읽고 있었던지라
영화를 보면서도 가끔씩 그 매일 묵상에서 읽었던 것이 생각났어요.
시간을 뒤로 돌릴 수 있을까 하셨던 말씀 등--솔직히는 영어대사가 잘 안 들릴 때 ㅎㅎ-

예수께서 하나님께 순종함으로써 일어난 십자가 사건이 우연인지 필연인지..
우리들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이 우연인지 필연인지..
필연이라면 무의미한 걸까요?  이렇게 하든 저렇게 하든 일어날텐데??
제 머리 속에서 우연과 필연의 단어 정리부터 다시 해 보아야겠습니다. ^^

감사합니다.

[레벨:1]후울

2009.02.15 10:45:05

처음 인사드립니다. 저는 영국에서 성경적 세계관에 바탕을 두고 정치철학을 공부한다고 몸부림치고 있는 한 박사후보생입니다. 제 소개는 차차 글을 통해서 하면 좋겠고, 오늘은 목사님의 십자가 단상에 대해서 간단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마음이 앞서다 보니 내용으로 바로 들어 가겠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 우연인가 아니면 필연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목사님의 단상은 조금은 포인트를 빗나가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역사적 예수의 십자가가 역사결정론을 비판하고 역사개방성을 주장하는 사건으로 쓰여지기에는 그 의미가 너무나도 중차대하다는 것입니다. 역사적 예수의 십자가가 우연이었는지 필연이었는지 설명하는 일보다는, 그 사건이 우리의 구원에 충분조건인지 아니면 필요조건인지를 생각해 보는 것이 그 사건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에보다 더 알맞는 논점이라고 생각됩니다. 

김영봉 목사님은 그의 논문 "새 시대를 위한 구원론: 예수의 성령론적 구원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십자가는 대속의 효과로서 중요하기도 하겠지만, 그것보다는 성령론적인 구원의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하나의 상징으로서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의 [대속적] 구원론을 성령론적으로 수정하는 것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김영봉 목사님의 성령론적 구원론을 잘 이해해야 겠지만, 김목사님의 표현을 빌어 간단히 요약하면 "성령님의 다스림 아래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의 십자가가 갖는 역할은 빠져있고 예수는 단지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성령님과 함께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김영봉 목사님의 성령론적 구원론은, 제게 들리기는, 예수의 역사적 십자가 사건을 우리 구원의 필요조건, 즉 없으면 안되는 조건이 아니라 충분조건, 즉 있으면 반드시 결과가 이루어지는 조건 정도로 이해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의 십자가 지심은 우리 구원을 위해 없어서는 안될 사건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제가 제대로 이해했다면 예수의 십자가는, 김영복 목사님에게 있어서, 우리 구원의 견인차가 아니라 일종의 롤모델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저는 예수의 십자가는 우리 구원의 필요조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의 십자가가 우리 구원의 충분조건으로 이해되면 그것은 없어도 된다는 뜻이 됩니다. 하지만 저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일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굳이 없어도 되지만 있으면 큰 도움이 되는 정도의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의 십자가가 우리 구원의 필요조건이라고 말하는 것이 역사적 필연이라고 말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이미 결정되어 있는 역사의 필연이 아니라 우리 구원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조건으로서 개방된 역사내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뜻에서 '우연'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 보다는 우리 구원의 필요조건으로서 일어난 일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예수의 십자가에 대한 알맞은 논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뜸 댓글을 올려 뻘쭘하긴 하지만 앞으로 나누게 될 고민의 첫 발걸음이라 생각하고 '댓글 등록' 클릭을 합니다. 감사합니다.

[레벨:16]안희철

2009.03.26 06:48:28

수리논리학으로 이 문제에 접근하려 하시는군요.
왜 필연 대신 우연을 언급하셨는지 핵심을 이해하지 못하고 계시네요.
"조건문"으로 해결하려고 하시다니요.
필요조건이나 충분조건을 언급하신다는 자체가 이미 필연의 편에 손을 들어주고 계신겁니다.
그리고 제 중딩 집합명제 이해 수준에서는(제 수준이 비천하다는 말입니다),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혹은 제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겠군요.
전공자가 도움을 주면 좋겠지만, 제가 아는데로... 한번 봅시다.

기본적으로 "필요충분조건"을 말하기 위해서는 각각의 "명제"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양 명제간의 비교를 통해 조건문을 만드는 것입니다.
도대체 명제가 무엇인지요?
(참고로 명제 없이 단어만으로 조건비교를 할 수 없답니다.
술어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예수는 십자가를 지셨다"(p)와 "우리는 구원을 받는다"(q) 인가요?
"p면 q다"라는 명제가 틀렸다 이 말씀이신데요,
여기서 p와 q 사이에는 아무런 조건문도 성립할 수 없습니다.
두 명제 혹은 두 명제를 만족시키는 각각의 진리집합 간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한글 대입해서 생각해보세요. 다른 조건(첨언)이 반드시 필요할겝니다.
조건문은 관계를 기본으로 하고 있으니까요.
혹시 p를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우리가 믿는다"로 생각하고 기술하신 것이라도
문제는 또 남습니다.
(혹은 q를 "그 사건을 믿는 우리는 구원을 받는다"로 한다고 하더라도)
p를 q의 필요조건(q이면 p다)이라고 하셨으니까요. 필요조건이 더 큰 집합이지요?
아마도 십자가 사건이 "큰" 사건이라는 점을 말씀하시려는 것은 이해가 갑니다만,
표현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필요조건과 충분조건에 대해 잘못 이해하셨거나 잘못 기술하셨다고 하더라도,
혹은 제가 잘못 이해했거나 다른 의미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런 논리학적 접근 자체가 문제삼아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사건과 우리가 믿는 행위, 혹은 심지어 우리가 구원받는 것도
"의지"가 개입합니다. 여기서 상당히 복잡한 양상이 주어집니다.
예측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제가 이 글을 쓰고 '댓글 등록'을 누를까 누르지 않을까요?
이미 이 글을 보고 계시다면 눌렀던 것이지요. 그러나 제가 이 글을 쓰는 이 시점에서는
아무런 예측도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이 글을 보고 계시지요? 현실성을 확보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연입니다.
두 명제 간의 조건을 따지기 이전에
그 하나 하나의 명제가 과연 참인가, 혹은 어떻게 성립하는가를 따지는 작업이 우선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조건문도 다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를 믿는다고 다 구원 받습니까?"
아닙니다(오해하진 마세요). 구원은 하나님의 행위라면, 행위는 신적 의지의 결정이고 따라서 예측할 수 없답니다.
그럼 어떻게 이 진리명제를 주장할 수 있냐고요? 혹은 포기해야 하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약속을 지키실 테니까요.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을 지킨다는 것이, 저 진리문장을 아무런 조건이나 의지 없이 참으로 만든다는 말이 아닙니다.
의지 문제는 결정론의 대립적 요소지요.

[레벨:5]루이스

2012.07.09 14:57:11

하나님께는 필연

인간에게는 우연

하나님의 뚯 인류구원

예수님의 뜻 아버지 순종

이 모든것을 만족시키는  공집합. 십자가

미련하고 거리끼는 것

아무도 요구하지도 찾지도 원하지도 않았던

새생명 얻는 자궁에 들어가는 신기한  매카니즘

예수와 함께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계속 사는 것

선악과에서 꺽여서

생명나무에  접붙이는 것 붙어있어 열매맺는 것

우리가 죄인이 아니라면 우연도 필연도 일아날 수 없는 사건

 

 

[레벨:4]foragape

2012.07.10 10:58:31

머리가 아파오네요^^

보니까 3년 반전에 토론이 되었던 것이네요?

그때 토론 하셨던 분들이 자신의 글을 읽으며 혹시 추가하거나 달라진 생각이 있다면 써주시면 감사하겠어요.

너무 어려워요.

 

우리가 하나님께서 어떠한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 완전히 알 수 없기때문에,

하나님 관점에서 우연이냐 필연이냐를 말할 수는 없을 것 같구요.

 

어찌보면 우연이냐 필연이냐를 논하는 것은

그냥 토론하는 것일뿐,

십자가 사건이 우연이었든 필연이었든 상관없이(다 우연일지라도 결국은 많은 사건이 필연으로 결론을 맺게 될 것이지만, "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 뭐 이렇게 생각하고 싶은 일은 다 좋은 일이겠지요?^^)

우리는

십자가 사건이 있었고,

죄인된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였고,

부활한 예수님처럼 우리도 부활할 것이라는 소망을 간직하며 사는 것이

연약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싶네요.

 

솔직히 역사를 놓고 우연이니 필연이니 논할 능력이 저에게는 없다고 생각하기에

저는 그런 생각 안하렵니다.

이러면 맹목적으로 믿는 광신도가 되는 건 아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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