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증나는 설교

조회 수 12042 추천 수 181 2006.11.09 23:47:29
짜증나는 설교

위에서 나는 교회에서 받는 이질감의 원인을 두 가지로 설명했다. 하나는 열린예배가 주는 경박성이며, 다른 하나는 행사중심의 교회 구조가 압박하는 영적 피로증이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세 번째의 원인이 나온다. 그것은 설교 문제이다. 오늘의 목사는 설교 이외의 일에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기기 때문에 설교를 준비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확보할 수 없다. 또한 목사는 교회 행사를 잘 꾸릴 수 있는 행정가로 활동하거나 아니면 신자들의 생활을 잘 관리할 수 있는 상담가로 활동하면 충분하기 때문에 굳이 설교에 비중을 두지 않아도 된다. 물론 목사들이 표면적으로는 설교에 마음을 두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마음이 별로 없으며, 마음을 두고 싶어도 그럴 수도 없다. 구조적으로도 그렇고 자신의 내면적인 욕구에서도 역시 그렇다. 다른 일에 모든 영적인 에너지가 소진되고 고갈된 영혼이 어찌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 영적인 촉수(觸鬚)를 예민하게 작동시킬 수 있으며, 그런 설교가 어찌 청중들에게 생명의 충만감을 제공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설교는, 좀 거칠게 말해서 우리의 영혼을 짜증나게 할 뿐이다. 짜증나는 설교! 이런 표현이 독설처럼 들려도 어쩔 수 없다. 그게 내 솔직한 심정이니 말이다.
아주 우연하게 내 딸들이 보는 시트콤을 나도 옆에서 힐끗거리는 경우가 있다. 다른 때는 몰라도 이럴 때만은 내 딸들이 나를 몹시 싫어한다. 그네들의 기분을 내가 망쳐놓기 때문이다. 저게 말이 되나, 말과 표정이 따로 노네, 필요 없는 멘트군, 하는 나의 촌평이 되게 듣기 싫은 모양이다. 요즘은 내 입이 근질거려도 좋은 아버지로 기억되기 위해서 참는다. 시트콤이야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거나 아예 티브이가 없는 곳으로 피신하거나, 또는 내 딸들처럼 한번 웃고 지나가면 그만이지만 인간 삶의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의 욕구와 연관된 설교가 바로 그런 시트콤이나 삼각관계를 다루는 멜로드라마 수준이라고 한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정색하고 따질 수밖에 없지 않은가.
내가 보기에 영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영적이지 않게 선포하고 있다는 사실이 오늘 우리 강단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이다. 설교가 영적이지 않다는 말은 여러 관점에서 설명되어야 하지만, 일단 한 마디로 정의를 내린다면 다음과 같다. 내가 경험한 오늘의 설교는 생명의 깊이를 열지 못하고 있었다. 기껏해야 모이면 기도하고 헤어지면 전도하자는 수준의 설교에서 우리가 생명의 충만감을 느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위에서 언급한 시트콤, 신파조 멜로드라마, 또는 피라미드 사업설명회, 노인을 대상으로 하는 건강식품 설명회, 조금 더 나아가서 주부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양강좌, 또는 유학, 이미, 진학설명회나 신입사원 강연 비슷한 열정과 내용을 담고 있는 설교에서 어떻게 생명의 신비와 희망을 발견하겠는가.
이들의 설교가 영적이지 않다는 말을 조금 더 신학적으로 정리한다면, 하나님 나라가 설교에서 완전히 배제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나는 하나님 나라, 그 통치를 성서 텍스트와 오늘의 세계 현실에 근거해서 설교하는 사람을 거의 볼 수 없었다. 하나님 나라가 실종된 설교에서 내가 어떻게 영적인 에너지를 공급받을 수 있단 말인가? 물론 하나님 나라만이 설교의 모든 것이라는 말은 아니다. 창조와 종말, 칭의, 그리고 정의와 평화라는 성서의 모든 주제들이 설교의 중심이 자리해야 한다. 특히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은 모든 성서 주제의 초석이기도 한다. 다만 이런 모든 것들은 하나님 나라에 연관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중심으로 하는 설교를 할 수만 있다면, 그 설교는 건강하다고 보아야 한다.
헬무트 틸리케는 이미 오래 전에 독일교회의 강단이 무기력증에 빠져 있다고 진단한 적이 있다. “종교개혁의 완성인가, 재(再)가톨릭화인가?”라는 글에서 그는 예배의 중심이 아니라 하나의 부수적인 요소로 전락하고 있는 설교의 문제를 매우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의 비판이 오늘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보고, 여기 몇 대목을 인용하겠다.

이것에 반해서 우리들은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점점 더 말씀으로부터 물러 나와서 의식 안에 있는 쓰레기들을 말하고 있다. 우리가 설교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설교가 마치 수다처럼 되는대로 지껄이는 것 같고, 또 틀에 박힌 상투어들이 자동기계장치 속에서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는 것 같다는 말이다. 위임된 말씀의 선포하는 무거운 짐을 아직도 지고 있는 분들, 그리고 충성스럽고 경건하게 그것을 견디고 있는 분들, 아무쪼록 나의 폭언을 용서하기 바란다. 설교자들 중에는 “거룩한 남은 자”도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매도한다는 것은 부당한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전반적인 경향은 말씀으로부터 도피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설교자가 더 이상 말씀을 대담하게 추구하지 않고 있어서 목적 있는 행위나 성례전 안에서 말씀이 발견되지 않는다. 이렇게 성례전이나 의식적인 형식의 세계가 새롭게 발견되는 것은 신앙적이고 좋은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말씀이 의식 속에 살아있지 않는 한, 그 음색은 단순히 음악에 불과할 뿐이다. 아마도 들리는 소리는 후퇴나팔 소리에 불과할 것이다.(149)

틸리케는 독일교회에서 설교가 수다로 변질되었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있다. 상투적인 종교 언어가 아무런 제어장치 없이 반복되고 있는 그 현상을 가리키고 있다. “우리는 설교를 마치 일간의 편집기자마저도 그렇게 하지 않는 그런 경멸하여 마땅한 잡문으로 만드는 것이다.”(150) 이런 결과를 빚게 되는 근본적인 원인은 교회행사와 성례화이다. 목사들은 말씀소명을 진지하게 짊어지지 않고, 교회행사와 의식(儀式)으로 도피하고 만다. 이런 문제들은 내가 앞에서 지적한 우리 한국교회의 문제들과 일치하고 있다. 틸리케가 말하는 성례화는 일종의 볼거리에 치중한 열린예배와 다를 게 없다. 소위 “경배와 찬양” 유의 예배, 대형 프로젝터를 비롯한 최첨단 시청각 기기를 통한 예배는 설교의 중심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일종의 도피로와 같다. 교회 행사의 과부하는 두 말할 것도 없다.
목사가 설교의 짐으로부터 도피하지 말고 그 중심으로 용감하게 들어가야 한다는 틸리케의 충고는 단순히 목사의 능력개발이나 자만심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참된 설교의 회복은 하나님의 약속이 제시하고 있는 압도적인 능력을 두려워하는 데서 시작된다. 그의 진술을 다시 들어보자.

“나는 지금 단순히 ‘설교의 용기’를 북돋으려고 애쓰는 그런 평범한 것을 주장하고 있지는 않다. 내가 관찰한 바에 의하면 어떤 사람들은 너무 많은 용기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너무 많은 부도수표를 강단에서 남발하고 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오히려 설교에 대한 그릇된 낙심이 올바르고 적절한 낙심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또한 낙심이 인간적인 슬픔에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슬픔으로 변혁되는 것이다. 이런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슬픔을 어떻게 가질 수 있을까?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에 압도적인 능력을 진정 두려워할 때이다. 그러면서도 그 약속의 강력한 능력 아래에서 우리의 입이 열려서 말하게 되는 때이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먼저 하나님의 역사의 도구로서, 또한 전달자로서의 소명 앞에 바쳐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그때 어떻게 우리의 입술이 권위 있는 말을 할 수 있을까?”(156)

나는 틸리케의 진단과 충고가 오늘 우리에게 여전히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수다, 부도수표 남발, 상투성이 지배하고 있는 오늘 우리의 강단을 향해서 영혼의 귀를 기울일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들은 우리의 설교를 듣기 싫어한다. 아멘을 연발하며 앉아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그런 포즈를 취할 뿐이지 마음은 이미 딴 곳에 가 있다. 억지로라도 앉아있는 사람은 특별히 인내심이 많거나 아니면 앉아있는 것이 자신의 이해타산과 연결되어 있지 않겠는가. 체면이든지, 명예심이든지, 심지어는 교회공동체를 통해서 경제적인 이득을 얻는 사람들이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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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1]새하늘

2007.08.09 19:25:31

목사님, 무더운 여름 어떻게 지내시지느지요?
부안군 위도로 교회 하계수련회를 갔다 왔습니다.
수련회에 초빙된 부흥사님을 듣다가, 몇번이고 졸고, 어린 딸 아이를 핑계 삼아 바깥으로 몇번 돌다가 그냥 숙소로 갔습니다.
아침과 저녁에만 실시하는 부흥회에 왜 이렇게 힘들고 도망치고 싶은지 모르겠습니다.
아직 영적으로 미성숙해서 그런가 봅니다.
수련회에 돌아와, 다시 이 글을 읽으니 영적인 나태함에 제 스스로 경각심을 줍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레벨:0]이반

2007.08.23 12:44:23

이렇게 된 원인은 목회자들이 성경의 구속사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성경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하나님은 일관된 논리를 갖고 성경 저자가 하나님이라면
인류의 구속을 성취하고 완성하고자 일하십니다.
이런 논리적인 흐름과 그 흐름에 따라 역사상 나타난 수많은 사건들 사이 관계를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이 사건들은 성경에서 서술문 형태로 기록됩니다.
이 서술문들의 내용은 하나님은 누구이며 무엇을 행하였는가 그리고 이에 대한 해석입니다.

여기서 교회와 성도는 믿음의 근거를 찾습니다.
물론 이들 서술문들의 시제는 과거입니다.
즉 우리들의 믿음은 하나님의 과거 행하심에서 찾아집니다.

이들 서술문들은 앞에서 말하듯이 하나님의 일관된 논리적인 흐름을 반영합니다.
이런 흐름을 우리는 조직신학과 성경신학의 도움으로 알아낼 수 있습니다.

이런 흐름에 따라 설교하여야 하지만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이를 모르기 때문에
첫째, 서술문보다 명령문으로 표현된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여 설교합니다.
그렇게 율법주의적인 설교를 하게 됩니다.
윤리도덕이 설교의 주제가 되는 이유입니다.
이게 더 목회자에게 간단하고 쉽기 때문입니다.
둘째, 성경 본문을 짤라서 독립시켜 놓고 제 마음대로 해석합니다.
즉 성경이 스스로 성경을 해석하도록 하라는 원칙을 무시합니다.
그렇게 성서 인물을 영웅시하며 지혜자로 취급합니다.
여기서 기복주의적인 형통과 성공신학이 나왔습니다.
주제설교와 제목설교의 원인입니다.
이들의 특징은 형평성을 잃은 치우친 설교들입니다.
성도들의 신앙 삶이 잘못된 쪽으로 치우치게 만들어 성숙한 신앙 삶과 인격을 방해합니다.

어떤 원인이든지 목회자들이 성경 묵상에 소홀한 결과입니다.
프로그램 목회가 성경 묵상보다 더 쉽기 때문입니다.
성숙한 인격을 위한 노력보다 보이는 목회가 더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목회자는 좀 게으를 필요 있습니다.
성경 묵상은 좀 넉넉한 시간을 요하기 때문입니다.
성경 묵상은 깊은 생각을 요하기 때문입니다.

*다비아의 '죽비'에서 '사복음서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라는 글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레벨:0]gaedener

2007.09.27 13:36:07

"속빈...꽉찬..."를 감명깊게 읽고 이곳을 찾았습니다. 제가 여러 목사님들의 설교에서 느끼는 불만 중의 가장 큰 요소는 설교 중 적용 단계의 말씀을 주실 때 본문 이외의 말씀을 인용하여 근거를 제시하여야 하는데 대부분의 목사님들이 다른 곳의 말씀인용은 없이, 평신도들이 큐티를 하다가 느끼는 나름대로의 의견을 제시하는 것 같아 교회 좀 오래 다녔다는 사람들은 은혜받기가 어렵습니다. 설교하시는 분이 목사님이시라면 성경의 전문가이신데 주장의 근거로 성경 한두절 쯤 인용하면 권위가 있을 것입니다. 물론 관주식 설교를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평신도는 목사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고 있는데 상식에 머무는 주장으로 결론을 내린다면 과연 그 설교에 영적 감동을 받을 수 있을까요? 성경적 근거에 더하여 본문에 대한 유명한 주석가나 신학자의 의견을 인용한다면 그 말씀에는 신뢰감이 높아질 것이라는 의견을 감히 제시해 봅니다.
성경에 대한 지식 수준이 낮은 성도들에게는 별 문제가 없겠지만 좀 안다는 성도들은 본문만 나오면 어떤 주제로 설교할지를 예상하고 그 설교가 옳다그르다를 판단합니다. 이런 분들에게 어필하기 위해 많은 목사님들께서 성경에 대해 독창적인 접근법을 구사하여 설교를 하시고, 일부 그런 분들이 인기를 얻고 있는 실정입니다만 아무리 독창적이라할지라도 하나님 말씀의 근거가 없으면 영적 파워를 느끼기가 어렵습니다.
좀 더 쉬운 말로 해서 설교하시는 목사님이 설교 도중에 성구를 고개 숙여 읽지 않고 성도를 향하여 똑바로 바라보며 일반 성도들에게 친숙한 성경 구절을 줄줄이 외워 나갈 때 성도들은 "이 설교의 말씀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구나!" 하는 감동을 받는다고 저는 느끼고 있습니다.
신학을 공부하지 아니한 평신도의 의견이라 잘못이 있으면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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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참앎삶

2008.06.28 14:54:42

짜증나는 설교를 들으며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사람들을 매도한 듯 싶습니다. 그들이야말로 진정 교회공동체를 사랑하는 사람들 아닐까요?

[레벨:1]인봉

2008.08.20 13:21:33

좋은 지적에 많은 분들이 댓글을 다셨군요.
쉬운 이야기를 다들 어렵게 신학적 용어를 사용하며 말씀들을 하십니다.

저는 잘 모르는 사람입니다만, 짧은 시간에 느낀 제 소감은 그것이 성경의 로고스나 바울의 논리가 되었든 신학적 고담준론이든 칭의가 되었든 짜증나는 설교가 되는 이유가 죽은 말들을 사용한다는 겁니다.
성경의 말씀들이 힘과 능력을 갖는 이유는 그것들이 다 생명이요 빛으로 살아있기 때문인데 세계적인 흐름도 그렇지만 한국 기독교도 대부분의 설교가 죽은 말씀이 되게 하거나 그것이 아니면 무당 푸닥거리식의 예배 형식을 띤 제사를 행한다는 것이겠지요.

성도들도 짜증나는 설교가 한둘이 아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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