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인가, 선동인가?

조회 수 10477 추천 수 141 2007.01.10 18:57:50
설교인가, 선동인가?
-한겨레 21 기고문-

요즘 대중 설교자들의 설교를 검토하면서 필자가 그들에게서 느낀 가장 큰 문제점은 그들이 성서 텍스트에 관심이 없다는 사실이다. 형식적으로는 성서를 근거로 설교하는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자신의 주관적인 신앙체험만을 청중들에게 강요하고 있었다. 다른 영역에서도 비슷하겠지만, 종교생활에서 체험은 옳고 그름을 차치하고 매우 특별하게 기능한다. 설교자의 체험이 보편적인 타당성을 확보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청중들은 그것을 그대로 믿고 싶어 한다. “나는 어젯밤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라거나 “심장에 구멍이 난 사람을 내가 안수하고 기도했더니 수술하지 않고도 치료되었습니다.”, 또는 “십일조 헌금을 드렸더니 사업이 번창하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나는 천당에 갔다 왔습니다.” 하는 식의 간증들이 한국교회 강단에 흔한 이유는 청중들이 그런 것에 열광적으로 반응한다는 데에 있다. 그런 유의 신앙형태들이 설교강단에서 반복적으로 강화하는 과정에서 신자들은 설교자가 “팥으로 메주를 쑨다.”해도 “아멘!”으로 받아들인다. 일종의 종교적 세뇌인데, 프로이드는 그것을 가리켜 “집단적 노이로제” 현상으로 보았다. 이런 작업을 직업적으로 잘 하는 사람들이 바로 사이비 교주들이다.
한국교회를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는 분들의 체험 중에서 아주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것 중의 하나가 공산주의에 대한 것이다. 신도 수 10만 명을 상회하며, 작년 여름에 세계감리교대회가 열렸던 금란교회의 김홍도 목사는 설교 시간에 아래와 같이 술회한 적이 있다. “저희 형제자매들은 6.25동란으로 피난 다니면서 별별 고생을 다 했습니다. 보릿겨, 쌀겨도 먹고 술 찌끼미도 물에 풀어먹고 구호물자, 밀가루, 옥수수가루를 먹으며 연명해왔습니다. 좌우간 사업하는 것도 없고 직장도 없는데 아홉 식구가 죽지 않고 살았다는 것이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보호해주셨던 것입니다.”(2006년 10월15일)
필자는 다른 분들에게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김 목사의 그런 체험에 나름으로 진정성이 있다고 본다. 가족과 친지가 인민재판으로 잔인하게 처형당하는 장면을 직접 몸으로 겪고, 북한 지역에서 기독교가 완전히 해체되는 현장을 목격한 사람들이 어떻게 북한 정권을 용서하고 신뢰할 수 있겠는가. 북한은 원수이며, 따라서 북한에 온정적인 세력은 모두 친북좌파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깊은 정신적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김 목사는 오늘도 이렇게 설교한다. “우리나라의 형편이 월남이 망할 때와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미군이 철수하면 남한도 틀림없이 적화통일 되고 천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대학살을 당하거나 보트피플이 되고 말 것입니다.”(2006년 10월22일) 이런 체험과 현실인식은 반공학습을 통해 상당히 많은 분들에게 오늘 이 시간까지 이어져왔으며, 때로는 확대 재생산되었다. 흉측한 체험의 역사화이다. 말하자면 “예수천당, 불신지옥” 패러다임이 개신교 신자들에게 구조화된 것처럼 반공주의도 구조화되었다는 말이다.
북한, 공산당, 좌파를 향한 이런 적개심은 부흥사 유의 김 목사만이 아니라 프랑스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교수를 하다가 현재 한국을 대표하는 교회 중의 한 곳인 새문안교회에서 목회하는 이수영 목사의 설교에서도 그대로 표출된다. “공산주의는 역사상 가장 현저한 하나님의 반대자이고 적그리스도입니다. 그들의 이론 바탕 자체가 무신론이며,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가장 철저하게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했고 그리스도인들을 말살시켰습니다.”(2004년 3월21일) “동양의 예루살렘 같았던 북한 땅에서 하나님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교회들을 압살했으며 그리스도인들을 박멸한 공산당과 그 수괴 김정일이 이 땅에까지 인공기 휘날리며 나타나는 것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2004년 9월12일)
미국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총신대학교 교수를 거쳐 현재 대구동신교회의 담임 목사로 있으며, 평소에 기독교 영성에 깊이 천착하는 설교자로 이름이 난 권성수 목사도 북한 문제에서만은 설교자가 지녀야 할 평상심을 잃은 모습을 보였다. 그는 작년 북한의 핵실험 이후 행한 설교에서 북한 정권을 깡패, 강도 집단으로 규정하면서 “김정일과의 평화 협정은 의미가 없다.”고 하고, 자신은 북한 정권을 도와주는 금강산 여행을 안 간다면서, 남한 주민의 안보불감증을 도덕적 해이와 연결시키고 있었다.(2006년 10월15일) 지금 ‘뉴라이트’ 운동을 솔선수범하시는 김진홍 목사도 이런 부분에서 결코 뒤지지 않는다. 여당 국회의원 중에 주체 사상가들이 있다거나, 현 정권은 왼쪽으로 치우쳤으므로 2007년에 교체해야 한다는 발언(2005년 10월9일)은 그의 설교에서 흔하게 발견된다.
필자는 지금 설교자들의 정치 이념적 소견이 옳은가, 그른가를 평가한 게 아니라, 설교가 성서텍스트의 중심으로부터 벗어나서 설교자의 주관적 신념이 설파되는 기회로 왜곡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은폐의 방식으로 담지하고 있는 생명의 비밀을 풀어내고 해명해야할 설교 시간에 정치학자들도 단정적으로 언급하기 힘든 이슈들을 칼로 두부 자르듯이 청중들에게 강요하는 것은 설교가 아니라 선동이며, 성서해석이 아니라 정치공학에 가깝다. 물론 삶과 역사에는 정치적으로 작동되는 영역이 크기 때문에 구약의 예언자들도 정치적인 발언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오늘 교회강단에 넘쳐나는 정치설교는 그것과 차원을 달리한다. 말꼬투리 잡기에 능한 정당 대변인이나 극단적인 이데올로그가 쏟아낼 만한 아래와 같은 진술들을 보라. “청와대를 비롯하여 정부 요직에 북한의 간첩과 친북 공산주의 주체사상을 찬양하는 빨갱이들이 차고앉아서”(김홍도, 2006년 10월15일) “김일성, 김정일 부자를 영웅으로 숭배하며 주체사상을 신봉, 선전하고 북한체제를 찬양하며 학생운동을 주도하던 세력들이 지금 정부여당, 정보 및 사정기관, 방송언론과 학교, 노동계와 문화계, 심지어는 군과 교회에까지 구석구석을 장악해가고 있습니다.”(이수영, 2004년 3월21일) 하기야 평양의 봉수교회를 가짜라고 주장하는 목사도 있는 실정이니 더 말해 무엇하랴.
북한정권에 대한 기독교의 체험이 아무리 고통스러웠다하더라도 이제 전쟁이 끝난 지도 50 여년이(희년) 지났고, 공산주의 이념도 퇴색해버린 이 마당에 여전히 1960-70년대의 냉전적 사고방식으로 설교한다는 것은 우리 설교자들이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외면하고, 지나간 험악한 시절에 받은 트라우마(trauma)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의 반증이다. 임상치료가 필요한 대목이다. 그러나 필자는 한국교회에 절망하지 않는다. 적개심과 분노에 가득한 설교보다는 드러나지 않지만 한민족의 평화와 상생을 지향하는 설교가 훨씬 많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비록 지금은 그들의 목소리가 밤꾀꼬리 노래처럼 작다하더라도 언젠가 천둥처럼 큰 함성으로 울려나지 않겠는가!    
(한겨레 21, 643호, 2007년1월16일)

[레벨:0]명경지수

2007.01.11 11:56:37

'한 민족의 평화와 상생을 지향하는 설교'라...
이 또한 설교자의 신념 표출이 아닐까요? (선동까지는 아니더라도 설득의 모습을 한)
무슨 말씀이신지 알면서도 궂이 말 꼬투리를 잡자면 그렇다는 얘기지요.

평소에 존경 비슷한걸 해왔던 목사님들이 정치판에 뛰어든 모습들을 보면서 많이 속상해 했는데,
그 분들의 배경설명을 듣고보니 이해에 도움이 되는군요.
이해는 하지만 수용하기엔 거부감이 너무 큽니다.

[레벨:28]첫날처럼

2007.01.11 15:43:49

단순히 정신적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PTSD)만이라면 그래도 치유를 받아야 할 순수한 피해자분들이랄 수 있겠지만, 솔직히 말해서 설교를 들어보면 대부분은 소극적으로는 정치 발언을 통해서 교회 내의 목사의 권위를 시위하면서 교인들을 통제하려는 독재본능의 표출로 부터, 김진홍 목사나 서경석 목사 등의 경우처럼 적극적으로는 정치적인 야망을 그런식으로 표출하는 모습까지 보이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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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서범기

2007.01.12 01:47:32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새해 인사가 늦었네요~ 교수님 2007년 새해에도 좋은 일 많이 하시길 바랍니다.
아울러 '신학과 철학' 후한 점수 또한 감사하구요.^^

[레벨:4]봄볕/ 정대진

2007.01.12 23:34:53

오늘 한겨레 21 구입했습니다. 이렇게 핑계삼아 종종 읽을 때마다
이 시대를 치열하게 고민하는 이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어
많은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한국 교회의 온전한 회복을 기대하며 또한 기도합니다

[레벨:1]택견

2007.01.16 13:35:29

설교와 선동에 대한 생각은 수년전부터 해 오고 있었습니다.

사이비성이 높은 분들의 사력을 다하는 설교!

그러나 이런 설교에 신도들은 열광하지요.

아래 글은 좋은 참고가 되기 때문에 제가 소장해 오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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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②/이성을 무너뜨린 선동의 드라마

파시즘②/이성을 무너뜨린 선동의 드라마
양극단의 초인과 군중이 엮어낸 파시즘… 감정적 도취를 위한 복제예술 난무

(사진/군중과 함께 만들어내는 대형 스펙터클. 히틀러의 선동은 군중들을 기마민족의 청동시대로 끌고 들어갔다)

“숭고는 설득하지 않는다. 그것은 도취시킨다.” 수사학에 관한 롱기누스의 저서 <숭고론>에 나오는 말이다. 실제로 고대의 정치는 ‘말’로 이루어졌다. 그 시절 정치가들은 대중들을 한곳에 모아놓고 단상에 올라 현란한 말솜씨로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제 편으로 끌어들이곤 했다. 가령 시저가 피살된 후 행해졌다는 브루투스와 안토니우스의 연설을 생각해 보라. 언제부터인가 ‘수사학’이 문체에 관한 학문이 되었지만, 원래 그것은 말하는 기술, 즉 말로써 대중을 열광의 상태에 빠뜨려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기술이었다. 물론 오늘날 ‘수사학’이란 말엔 늘 경멸이 붙어다니지만 이를 꼭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고대 직접민주주의 시대에 수사학은 참정권을 가진 시민이라면 누구나 배워야 할 교양이었다.



집단적 환각, 그들은 청동시대로 갔다

“설득하지 않는다. 도취시킨다.” 이것이 바로 수사학의 힘이자 동시에 함정이다. 즉 논리적 설득을 바탕에 깔지 않고 감정적 도취로 논증을 대신하는 순간, 수사학은 곧바로 대중선동의 기술로 전락한다. 파시스트들은 이를 알고 있었다. 가령 무솔리니는 마치 로마의 위대한 장군(=두체)을 연상시키는 제스처와 어법으로 집회장의 대중을 도취시켰다. 이 집단적 환각상태 속에서 그는 대중을 그 찬란하고 영광스러웠던 고대 로마로 되돌려 보냈다. 히틀러 역시 그 신경질적인 연기로 집회장에 모인 대중을 위대한 북방 기마민족의 정복신화라는 가상현실 속으로 몰아넣었다. 뜨거운 감동은 합리적 논증을 간단하게 압도하는 법. 도취의 뜨거움 속에서 인류가 어렵게 쌓아온 냉철한 합리성은 한순간에 무너지고, 이때 인류는 졸지에 공격적 리비도로 가득 찬 청동시대로 시간여행을 하게 된다.

말의 힘, 그러니까 ‘도취’가 그 자체로서 나쁜 것은 아니다.

이미 고대인들은 진정한 ‘웅변가’(orator)와 고약한 ‘선동가’(rhetor)를 구별할 줄 알았다. 가령 집회장에 모인 대중 앞에서 “I have a dream”이라고 차별 없는 세상의 꿈을 노래하던 마틴 루터 킹과, 유대인에게 증오와 경멸과 저주를 퍼붓던 히틀러. 이 두 사람의 연설은 모두 대중의 마음을 휘저어놓았으나, 우리는 이 연설 사이엔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알고 있다. 그 차이는 어떤 것일까? 한마디로 진정한 ‘웅변가’는 결코 논증을 배제하지 않는다. 단지 그는 행동의 힘이 결여된 차가운 논증에 그것이 마땅히 가져야 할 에너지를 되돌려주려 할 뿐이다. 반면 ‘선동가’는 논증을 싫어한다. 그는 정서적 감동으로 논증을 대신한 뒤 그걸로 곧바로 대중을 움직이려 든다.



하지만 이 차이보다 더 재미있는 것은 아마 20세기가 낳은 위대한(?) 두 선동가의 차이일 것이다. 히틀러 독재 시절, 나치들이 사용하는 어휘의 변화를 일기 형식으로 분석한 <제3제국의 언어>라는 책으로 유명한 빅토르 클렘퍼러에 따르면, 무솔리니는 제법 수사학적 기교도 있고 최소한 ‘문장’을 만들 줄 아는데, 히틀러의 연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욕설과 고함소리로 가득 차 있어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기 힘들었다고 한다. 즉 무솔리니의 연설이 그래도 ‘말’처럼 들린다면, 히틀러의 연설은 ‘말’이 아니라 히스테리 환자의 발작처럼 들린다는 것이다.

그래도 무솔리니에게 문학적 소양이 있었다면, 히틀러는 애초에 문학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연설은 ‘언어적 현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연극적 현상’이었다. 연단 위에 선 그는 1인극을 하는 연극배우에 가깝다. 실제로 그는 바이로이트 바그너 축제를 할 때 직접 무대연출에 간섭하기까지 했다. 어쩌면 그가 굳이 독일어를 사용하지 않았더라도, 대중은 그의 요란한 몸짓과 현란한 제스처만 보고도 열광을 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클렘퍼러가 길바닥에서 흘러나오는 히틀러 연설의 중계방송 속에서 알아들을 수 있었던 것은 몇개의 욕설과 거기에 응답하는 대중의 함성뿐이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언어의 정서표현적 기능이 반(反)합리성, 비(非)논리성의 극단으로까지 흐르다 보니 논리를 담는 매체인 언어 자체가 사라지는 ‘언어 파괴’ 현상이 일어났던 것이다.



무솔리니의 문학과 히틀러의 종합예술


고대 수사학의 전통을 물려받은 무솔리니의 선동이 문학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면, 히틀러의 선동은 종합예술, 즉 군중과 함께 만들어내는 대형 스펙터클이었다. 가령 한밤중에 거대한 스타디움 벽의 둘레에 설치된 탐조등들이 일제히 하늘을 향해 빛을 쏘아올린다. 그러면 그 빛의 기둥들에 둘러싸인 대중은 마치 대리석 열주가 늘어선 고대 신전 안에 들어온 듯한 환영에 빠지게 된다. 또 그 빛기둥이 스타디움 안의 대중을 그 밖의 잡종들로부터 구별해주면, 이 선민들은 하늘로 뻗어올라가는 그 빛기둥들 안에서 하늘에 있는 신적인 것과 직접 연결되는 접신(接神)의 체험을 하게 된다. 이런 식의 군중 스펙터클을 만들어내는 데에는 물론 여러 유능한(?) 전문가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가령 올림픽 스타디움, 총통관저, 나치당사, 집회장 등 고대의 로마를 옮겨놓은 듯한 이 거대한 세트를 만드는 데에는 슈페어와 같은 건축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선동’하면 생각나는 사람은 물론 이 모든 정치 스펙터클을 총지휘했던 선전상 괴벨스다. 재미있게도 그는 독일의 영화제작자들에게 에이젠슈테인의 영화를 보여주며, “그것을 보고 좀 배우라”고 했다 한다.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영화라는 미디어 그 자체에서 혁명적 가능성을 본다. 원작 없이 무한히 기술복제가 가능한 영화는 예술에 늘 따라다니던 종교적 흔적, 즉 예술작품의 아우라(신비한 광휘)를 파괴하므로 그 자체로 진보적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소비에트의 혁명적 영화, 가령 트레차코프의 영화 실험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일 게다. 하지만 그는 이 매체가 가진 또다른 가능성을 보지 못한 듯하다. 사실 영화만큼 파시즘의 대중선동에 긴요하게 사용된 매체도 없을 것이다. 생각해 보라. ‘아우라’를 파괴한다는 이 복제예술이 나치 독일에선 외려 지도자에게 정치적 아우라를 씌우는 수단으로 적극 활용되지 않았던가.

대화와 지성을 외면한 파시즘의 초상

가령 오늘날 감탄과 파시스트 육체미학이라는 비난을 함께 받고 있는 레니 리이펜슈탈. 오늘날 스포츠 기록영화에 사용되는 기법은 대부분 이 여인이 제작한 베를린올림픽 기록영화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데, 실제로 그의 영화를 보면 선수들의 육체를 얼마나 완벽하게 이상화했던지 대체 기록영화인지 예술영화인지 구별이 안 갈 정도다. 그 완벽한 이상화의 기법은 물론 지도자에게 초인의 아우라를 씌우는 데에도 적합하였다. 가령 히틀러가 오픈카를 타고 연도의 군중을 사열할 때, 그는 카메라를 군중의 등 뒤에 위치시킨다. 그러면 차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군중의 머리 위로 불쑥 솟아오른 지도자의 상반신만이 (마치 여호와의 신이 수면을 운행하듯이) 군중의 숲을 헤치고 앞으로 조용히 미끄러져 나간다. 군중집회 때엔 운동장 정면에 걸린 거대한 나치 깃발 뒤에 숨어, 고공촬영으로 좌우 양편으로 도열한 군중 사이로 외롭게 걸어오는 천재의 모습을 잡는다. 딱딱하게 굳어버린 군중의 숲속에서 유일하게 움직이는 지도자. 마치 좌우로 갈라진 홍해 바다를 건너는 모세처럼 보인다. 민족의 구세주….
‘얼굴 없는 군중 대 극성스런 초인의 콘트라스트.’ 이것이 파시스트 선동의 기본구도다. 이 초대형 키치예술은 파시스트 독재의 미학적 이미지, 즉 “지도자는 번거로운 의회의 매개 없이 군중의 의지를 직접 대변한다”는 생각의 그림이다. 또 그것은 “진리는 지도자의 입에서 군중에게 직접 전달된다”는 파시스트 반지성주의의 그림이기도 하다. 원래 군중과 천재의 굳건한 결합 속에는 대화(=의희)와 지성(=지식인)이 끼여들 자리가 없는 것이다. 얼굴 없는 군중과 극성스런 천재, 극단적 몰개성과 극단적 초개성, 마조히스트 군중과 사디스트 초인의 이 행복한 결합. 그것이 바로 파시즘의 초상이다.

진중권/ 자유기고가

[레벨:0]의연이

2007.01.27 18:52:55

가끔 케이블TV의 기독교 방송을 보면 제가 혹 착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고 느낍니다. 왜냐하면 저런 설교를 하는 목사에게 많은 신자들이 모이고 열광하는 것을 보면 진리인가, 아닌가를 넘어서 나도 저렇게 따라가야 하는 것 아닌가하고 말입니다. 이것이 위의 글, 히틀러의 선동적 언어와 행위처럼 이런 이유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봅니다. 이렇게 설교하는 사람은 많은 데, 진정한 설교는 없는 현실에서 보면 참 내 머리가 혼란스럽습니다. 열광하는 신자들을 보고서 은혜받았다고 믿는 목사들입니다.

동기 목사들, 목사된지 얼마되지 않는 신참 목사들끼리 만나면 종종 이런 얘기를 합니다. 목사되고 보니, 정신 질환자들이 목사들 중에 제일 많다고. 정신치료 받을 목사들이 많다고. 그만큼 인격적, 적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선포하며 신자들을 참된 영성으로 이끄는 목사에게 요구되는 인격에는 많은 문제가 있다고 나름대로 목회현장에서 느끼고 있나봅니다. 목사가 아닌 다른 직업으로 살아가는데는 별 문제가 없을 것 같은 사람이지만 목사이기 때문에 문제가 많다는 것입니다. 물론 저역시 그 범주에 듭니다만.....

이것은 신학교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봅니다. 신학생 시절부터 신학을 신학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감정적이거나 자신의 경험과 함께 유비시키는 학생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물론 신앙적 경험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경험만이 절대적인 것인양 생각하는 것이 문제이겠죠. 이런 학생들 중에는 졸업 때까지 성서와 신앙에 진리의 눈을 떠는 학생들도 있지만 그 신앙형태를 그대로 갖고 졸업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또 이들이 목사가 되고 또 그런 신앙적 형태에서 설교를 하고.... 계속 반복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저런 것들을 보면 설교비평에 나오는 많은 설교가들은 너무나 쉽게 우리 주위에서 볼 수 있는 그런 목사들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이 없는 설교가 대부분입니다. 어디 설교 때문에만 문제가 됩니까? 이런 설교를 하는 목사들에게 목사로서의 인격, 덕성, 사랑이 부족한 것이 더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내일 주일을 앞두고 설교 준비하며 답답해서 올립니다.

[레벨:23]브니엘남

2007.02.13 18:43:55

설교
1. 생명의 흐름이 있어야 한다. 이는 마치 우리가 포도나무의 가지인 것과 같다. 포도나무 안에 있는 수액의 흐름으로 가지가 사는 것 같이 그 안에 성령의 흐름이 없는 것은 생명이 없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이 아니다. 작금의 설교는 대부분 설교자 자신의 카리스마로 하는 대중 연설일 경우가 태반이다.
2. 성경에 대한 명확한 자기 이해가 있어야 한다. 성경은 마치 퍼즐 게임을 하는 것과 같다. 신 구약을 망라해서 그 의미를 잘 알고 잘 연결해야 올바른 해석을 할 수 있다. 신학적인 이해가 부족한 사람들이 자신에게 필요한 부분만 떠내어서 그것이 모두 진리인양 전부인양 전한다면 그것은 설교가 아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자는 당연히 하나님께 받아 말해야 한다(벧후 1:21).
오늘 좋은 설교를 듣기 위해 이 곳 저 곳 다녀 보지만 또한 영적인 아비를 만나기 위해 다녀 보지만 그런 분을 만날 수 없다는 게 참으로 안타깝다.
오호 통재라.
오호 애재라.

[레벨:2]시월생

2007.02.17 16:28:12

교회에 나가는 신도는 아니지만 김홍도목사님의 설교를 티비에서 몇번 봤는데요(특히 북한에 관한..) 왠지모르게 벌벌몸이 떨릴만큼 소름이 끼쳤던 기억이 있습니다 ..가슴이 저릴만큼 아 정말 저건 아닌데 싶은 그런 느낌..

[레벨:0]

2007.03.02 10:52:36

설교인가, 선동인가? 설교는 기본적으로 선전이고 선동이어야 한다고 봅니다.
무엇을 위한 무엇의 선전이고 선동이냐가 요점이지요.

[레벨:2]소나기

2007.04.04 15:59:05

설교는 하나님의 임재. 일하심. 그 자체이라는 생각이...
적당한 빛은 보이게 하지만.
정말 밝은 빛은 눈이 머니까.
하나님은 엄청.ㅋ 빛나셔서.
직접보면 눈이 머니까...
설교자는 글라스...
하나님의 빛이 그저 우리를 통과할 뿐..
설교자도 등을 보이고 겸손히 섰을 뿐...
그 다음...
성도와 하나님의 만남...
그것만으로 글라스는 충분히 감격이 되지 않을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그 장엄한 순간을...
그것을 어찌 눈으로 확인치 못할까...
설교자도 성도인 것을.

다만.
오히려 눈이 멀길... 저는 기도할 다름입니다.
핑안.

[레벨:0]엔학고레

2007.04.11 11:07:31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어느 새벽 설교를 듣는 중에 요즘 목사님들이 말씀과 견해를 구분 못한다는 생각이 들어 메모를 한적이 있습니다. 청중들은 설교 중에 견해를 말하면 말씀으로 알아듣습니다. 회개해야할 중요한 부분입니다.

[레벨:6]月光

2007.05.10 17:53:12

저는 설교를 들을 때에 가장 안타까운 것 중의 하나가 목사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다고 하는데 결국은 자신의 목회방침을 강요하는 것을 들을 때 입니다. 분명 자신의 견해임에도(솔직히 말하면 목사님의 견해인지도 의문이지만요) 하나님이 그 말씀을 자신에게 들려주셨다는 식으로 마치 계시처럼 선언하지요. 그리고 아멘을 강요합니다. 설교시간에 열린 설교로 성도들의 견해를 묻는 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제 이름을 호명하며 아멘을 강요당하면 그냥 노멘이라고 외치고 나가버리고 싶습니다.

[레벨:1]섬에서

2007.05.28 18:50:35

교수님, 옥의 티네요. 반증이라는 말보다, '증거'라고 하는 것이 옳은 표현입니다요.
" - 여전히 1960-70년대의 냉전적 사고방식으로 설교한다는 것은 우리 설교자들이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외면하고, 지나간 험악한 시절에 받은 트라우마(trauma)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의 반증이다."


반ː증反證 [명사]
1. [하다형 타동사][되다형 자동사]어떤 주장에 대하여 그것을 부정할 증거를 드는 일, 또는 그 증거.
¶ 반증을 들다.
2. 어떤 사실이나 행동이 어떤 일에 대하여 반대가 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
¶ 입대를 앞두고 외국 국적을 취득한 것은 국방 의무를 다할 생각이 없다는 반증이 아니고 무엇인가?
3. 민사 소송법상 상대편이 신청한 사실이나 본증을 반박하기 위한 증거.
4. 형사 소송법상 사실의 부존재(不存在)를 증명하는 재료.
↔본증(本證).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7.05.29 00:10:34

진리 님,
그렇군요.
그런데 어떤 분께서 힌트를 주시기를,
반증은 때로 반영하여 증거한다는 뜻도 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반증을 위의 글처럼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좀 그렇지요?
어떤 분은 방증으로 쓰기도 하더군요.
고맙습니다.
profile

[레벨:100]이길용

2007.05.29 06:23:44

반증에는 "어떤 사실을 반영하여 나타냄"이란 뜻도 있습니다.
따라서 위의 인용구처럼 써도 크게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다만 그런 표현 자체가 자연스러운 우리말이라고 보기는 어렵겠죠.
보다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글이 되려면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의 반증이다."
보다는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그러면 되겠죠.


[레벨:1]섬에서

2007.06.02 16:35:24

사부님(정용섭 교수님, 제가 사부로 모시기로 했습니다)께서 직접 답을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반증'이라는 말에 '반'자 反이고, 반영(反映)이라고 할 때도, 反가 되므로, '반증'이라는 말이 '반영하여 증명하다'라고 말하는 것은.... 좀 억지스럽다고 느껴집니다. 사부님, 책에서 간혹 '반증'이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증명'이라고 다 고쳐놓았는데....

이 말은 내가 잘 난 척 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반증'이라는 말을 흔하게 잘못 사용하고 있다고 '바른 말 고운 말'에선가(?) 그래서 알게 되었고.... 옥에 티라 생각하여 외람된 말씀을 올린 것입니다.
바른 말은 바른 신학의 초석이라.... 목사들 말, 어법에도 안 맞게 하는 것 보면 마음이 아프거든요. 그래서리... 잘 난 채 아닌 잘 난 채했슴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레벨:8]김인범

2007.06.02 19:26:21

진리 님의 댓글 밑에 제가 아래한글 사전의 반증의 두가지 의미를 올렸는데
여기가 아니었나, 아니면 지워진건가 모르겠네요.

아무튼 아래한글의 한글 사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반ː증
(反證)【명사】【~하다|타동사】
1. 어떤 사실이나 주장에 대해 증거를 들어 그것을 부정하는 일. 또는 그 증거.
¶ 허위 보도라는 것이 ∼되다.
2. 어떤 사실을 반영하여 나타냄.
¶ 그것은 당신이 떳떳하지 못하다는 ∼이다.

그러니 두가지가 다 맞는 말입니다.
고로 문장과 문맥을 통해 이해해야 할 겁니다.

[레벨:1]섬에서

2007.06.04 14:04:04

'그래요, 저도 아래 한글 사전을 종종 이용하긴 한답니다. '반증'이라는 말이 '한자'인데, 그 말 때로 반대로 증명함이라는 말이 아닌가요. 그것을 사전이 그렇게 말하다고 해서, 그렇다면, 모든 책이 말하는 것이 옳다고... 적어도 그 사전의 권위를 모두 믿어야 한다는 것인지요?

그렇다치더라도, 그 예문으로 든 문장을 보면,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보지는 못했나요. '반증'이라는 단어의 한자의 표현을 그래로 이해를 해야지, 그것은 반영하여 이라는 말을 넣어야 한다면, 반영증이라 해야지 않겠나요. 반증이라는 말과 반영하여 증거하다는 말은 너무나 다른 말이지 않습니까?

반영이라는 말은 무엇인가가 반대로 비춰진... 마치 거울에 비춰진 모습이 반사되어 나타나듯이 말입니다.

반ː영
(反映)【명사】【~하다|자동사·타동사】
1. 빛이 반사하여 비침.
2. 어떤 일에 반사적으로 일어나는 영향을 드러냄.
¶ 개혁 의지를 ∼하다/ 민의를 ∼시키다/ 요구 조건이 임금 인상에 ∼되었다.

반증이라는 말과 반영이란 너무나 다른 말인데, 그 의미를 한 단어가 '반대되는 개념'을 담고 있다면, 그렇다면 사람들과의 말이 어떻게 소통이 되겠습니까?

[레벨:8]김인범

2007.06.04 14:24:02

이런 글이 여기 있어야 되는지 모르겠지만
저도 제가 글을 쓸 때 반증이란 말의 의미를
위의 글의 두번째 것과 같이 써왔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말은 정 목사님도 말씀하셨듯이
얼마 전에 한번 짚고 지나간 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상당히 집요하게 따지시는군요.
그런데 예문을 들어 부정적으로 사용했다라고 하시는데
첫번째 것은 완전 반대의 의미이고
두번째 것은 부정적이지만 증거라는 것으로 사용하고 있지요.
부정적인 것이지만 서로 다르게 사용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제가 알기로는 그렇게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고
분명 저도 그렇게 사용했는데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문맥과 문장을 보고 이해해야 할 것이라고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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