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일조와 면죄부

조회 수 12080 추천 수 95 2007.04.07 19:23:25
십일조와 면죄부

어제 어떤 여자 분에게서 전화를 받았습니다.
물론 저는 전혀 모르는 분입니다.
그분이 전화한 이유는
자기 남편과 십일조 문제로 인해서 갈등 때문이었습니다.
평소에 남편이 십일조 헌금에 대해서
조금 불편하게 생각하다가
어디선가 대구성서아카데미 소식을 듣고
십일조에 대한 저의 글을 읽은 뒤에
아내에게 “거 봐, 내 말이 맞잖아.” 했나봅니다.
다비아에는 저의 글만이 아니라
신완식 목사님의 글도 있는데,
그분이 그것까지 읽었는지는 모르겠군요.
그 남편은 아내에게 다비아에 들어가서
글을 읽어보라고 했다네요.
이 여자 분은 지금 혼란하다고 합니다.
자신은 지금까지 십일조 헌금에 대해서
조금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드렸는데,
그런 게 아니라고 하니 정신이 없을 수도 있겠지요.
만약 십일조 헌금을 드리는 게 마음이 편하면
계속 드리라고 했더니,
남편과 의견이 충돌한다고 하네요.
그렇다면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도
십일조 헌금을 드리지 않는 게 좋다고 했지요.
십일조 헌금을 드리지 않아도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한 게 아니며
드린다고 하더라도
물질적인 축복을 받는 게 아니니까
크게 신경을 쓰지 말라고 했습니다.
저에게 이런 말을 듣고 싶었는지
아니면 십일조에 대한 나의 글이
그런 뜻이 아니었다는 말을
바꿔 듣고 싶어서 전화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분은 일단 찜찜한 태도로 전화를 끊었습니다.
저는 십일조 헌금이 한국교회 신자들에게
예상 외로 심각할 정도로 왜곡되어 있다는 생각이 다시 들었습니다.
아, 전화 한 분이 한 말 중에서 한 가지를 빠뜨렸군요.
십일조 헌금이 신앙적으로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 하더라도
교회에서 활동하려면 어쩔 수가 없다고 합니다.
집사가 되거나 권사가 되려면
십일조 헌금은 필수라는 거지요.
교회활동의 현실을 무시할 수 없는 처지에서
십일조 헌금을 무조건 드리지 않을 수 없다는 겁니다.
십일조 헌금 없이 발 부칠 곳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군요.
십일조 헌금은 오늘의 교회에서
신앙의 본질 차원이나 구조의 차원에서
기독교 신자라고 한다면 벗어날 수 없는 쇠사슬인 것 같습니다.

1517년 마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 문 위에 걸은
95개 조항의 신학논제는
주로 두 가지 문제로 집중됩니다.
하나는 교황 무오설의 문제점을 짚은 것이며,
다른 하나는 면죄부의 신학적 오류를 짚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종교개혁의 가장 원초적인 동기는
면죄부 판매였습니다.
오늘 개신교 신자들은 면죄부가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그것도 신학적인 정당성이 있습니다.
연옥 교리로부터 시작됩니다.
구원받지 못했지만 지옥으로 떨어지지 않고
연옥에서 기다리고 있는 가족을 위해서
면죄부를 사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연옥도 성서에서 근거를 대기 시작하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이렇게 신앙문제에서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조항들은
사실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어쨌든지 실제로는 베드로 성당 건축비를 모금하려는 것이었지만,
연옥에 간 신자들의 구원 때문이라는 신학적 명분도
말이 안 되는 논리가 아니라 말이 되는 논리입니다.
물론 그 논리라는 게 해괴하기는 하지만요.
이왕 죽은 영혼의 구원문제는 우리가 정확하게 알 수 없는 것이라면
현재 살아있는 후손들의 정신적인 안정을 위해서라도
면죄부 제도를 실시하는 건 크게 잘못이 아닙니다.
목회공학적인 발상으로만 본다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더구나 그 돈으로 로마의 베드로 성당을 완공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고 아닐까요?

오늘 개신교회에도 이런 식의 제도가
중세기 로마가톨릭교회보다 많으면 많았지 적지 않습니다.
우리도 성직 매매를 합니다.
속성으로 신학공부를 시키고 목사 안수를 주는
군소교단이 많습니다.
작년에 전화를 건 어떤 분은
고등학교 교사를 하면서
3천만원을 들여 목사 안수를 받았다고 하더군요.
그 정도의 돈만 더 내면
신학박사 학위를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정통교회에서 장로 장립 받는 분들과
권사 취임 받는 분들,
안수집사를 받는 분들이
일률적으로 돈을 내더군요.
성직 매매이겠지요.
그런 관례를 깨는 교회들이 있긴 하지만
많지는 않습니다.
일천번제 역시 그 종교적 동기라는 점에서 면죄부와 다를 게 없습니다.
생일이나 무슨 사업을 시작하면서도
감사헌금이나 서원 헌금 같은 걸 냅니다.
도대체 교회가 이래도 되는 걸까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모든 헌금의 중심이라 할 십일조는
일종의 면죄부와 비슷한 기능을 합니다.
신학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지만
그렇게 훈련을 받으면 신앙이 좋아진다는 논리가 먹히고 있습니다.
그런 논리는 면죄부를 통해서
연옥의 조상이 구원받는다는 중세기 로마가톨릭의 논리와 다를 게 없습니다.

부활절 전 토요일에
많은 분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글인지 모르겠군요.
그럴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교회를 꾸려가야 할 목사님들이 먼저
신앙의 중심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말이 나온 김에,
각종 절기를 교회 재정 확보의 기회로 삼는 건 아닐까 모르겠군요.
부활절의 충격적인 기쁨이 기껏 부활절 헌금을 드리는 날이 되고 말았다는 건
기독교 신앙의 타락입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은 한번 생각해보시지요.
이번 부활절에 감사헌금을 드려야 하는지를 말입니다.
그래, 당신은 이슬 먹고 사냐,
도대체 십일조 헌금 없이 교회의 살림살이를
어떻게 꾸려가야 한단 말이냐, 하고 걱정하실 분들이 있겠군요.
교회 살림살이에 대해서는 이 자리에서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런 건 율법으로 변질된 십일조 제도가 아니라
최소한 합리적인 방식으로도 해결할 수 있을 겁니다.
노파심으로 다시 말씀드립니다.
저는 신자들이 헌금을 드리지 않아도 좋다는 뜻으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닙니다.
더불어 공동체를 꾸려가면서도
얌체처럼 헌금을 하지 않는 신자들을 역성드는 게 아닙니다.
십일조가 아니라 더 큰 헌금도 드릴 수 있어야겠지요.
문제는 십일조가 지금 한국교회에서
중세기의 면죄부처럼 운용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차원의 헌금제도가 시급히 요청됩니다.
그런 준비가 없으면
한국교회의 물적 토대를 강화시킨 십일조 제도가
자칫 한국교회 자체를 붕괴시킬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레벨:2]소나기

2007.04.07 20:17:40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이렇게.ㅋ

누군가를 대하는데 있어서 당근과 채찍이 필요하게 된건.
세상이 이상해졌기 때문입니다.
당근이나 채찍은 말 잘 듣는 말을 키울 때 필요한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주로 모시는 것입니다.
헌금이 축복을 보장하는 당근이나 채찍이 되어선 안될 것인데.

하나님이 그렇게 치졸하신 분이 아닌데.ㅋ
상벌로 사람 조작하는 분이 아닌데.ㅋ
잘했다고 금따위로 칭찬하는 분이 아닌데.ㅋ
나는 그냥 하나님이 좋은데.ㅋ

우리교회 유치부 아이 하나가.
떡을 먹는 도중에 한 손에 떡을 꼭 쥐고는
먹지 않는 것입니다.ㅋ
'왜 그래? 이거 선생님 줄꺼야?'
대답도 없고. 떡도 안주더니.ㅋ
시간이 꾀나 흘러 장년 예배를 다 드리고
아이의 아버지가 내려왔습니다.
그제야 아이는 손을 피고 아버지에게 떡을 먹이더군요.ㅋ
그게 뭘로 보상이 됩니까?
그게 얼마로 가격이 됩니까?ㅋ
아빠는 아이가 얼마나 사랑스러웠을런지.ㅋ
애를 키우고 볼일 입니다.ㅋ

헌금. 헌심. 헌신.
그 모든 것은.
하나님과 나의 관계.
하나님과 나의 비밀~ㅋ

헌금봉투에 이름 좀 안썼으면 좋겠네요.ㅋㅋㅋ

핑안~ㅋ

[레벨:0]無名齋

2007.04.07 22:19:49

십일조는, 제정일치 시대의 세금 제도일 뿐입니다.
지금 그것을 종교에서 계속 유지하고 있다면,
그것은, 자신이 속한 종교 단체의 회원으로서,
단체의 운영비를 감당할 의무가 있다는 차원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의무'는 중요하고,
더욱이, 이 단체가, 하느님을 예배하는 모임이기에 더욱 중요하겠습니다만,
이제, 이런 부분들은, 정직하게, '탈신화화'해야 마땅하다는 생각입니다.

하느님의 거룩하신 이름은,
도깨비방망이가 아닙니다.
많은 부분에서, 비신앙인처럼, 무신론자처럼 살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profile

[레벨:17]바우로

2007.04.08 01:37:31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는 글을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고 문익환 목사님이 그러셨다지요..개신교가 로마가톨릭같고, 로마 가톨릭이 개신교 같다고...

빈의자

2007.04.08 02:49:48

저도 정목사님의 생각에 몰표를^^
이것두 펌해갑니다~
복된 부활주일을 복되신 주님과 함께^^
profile

[레벨:3]수우

2007.04.08 08:49:39

목사님의 말씀을 저는 이해 를 합니다만
그러나 궁금한 점은
왜 ? 교회에서는 십일조를 드리지 않으면
하나님 것을 도덕질 하는 것이라고 하고
드리면 축복을 받는다고 구약성서를 대면서 강조 하는데
그 논리가 사실이 아니다는 것을
정목사님깨서는 설명으로만 할것이 아닙니다.
구약성경 말라기 에 나오는 말씀의 해석도 더불어 해야 하며
또한 그 귀절이 십일조 와 상관 이 없다는 자세한 설명을 하셔야 합니다.
이렇게 막연이 십일조는 축복이나 죄와 상관이 없다고만 말 하면
이미 교회에서 쇠뇌 교육이 된 성도들은 어안이 벙벙 해 집니다.
사이비 아닌가 라고 의심도 하게 됩니다.
십일조 는 아주 정통교리 처럼 절대 의무가 된 한국교회 아닌가요?
예수님의 말씀 보다 더 완고하게 교리화 된 십일조 문제를
구약성경의 배경 해석도 없이
그냥 이렇게만 설명 하시면 오해 받기 쉽습니다.

[레벨:11]QED

2007.04.08 21:00:20

어느 종교건 경제적인 문제가 없을 순 없겠지요?

솔직히 정목사님께서 '강조하시는' 대림절이 뭔지 전 정목사님 책을 통해 처음 보았던 것 같은데, 아니면 어릴적 들었더래도 잊어버렸던지요. 그러나 분명한건 헌금낼 절기는 아닌 것은 분명한 것 같군요(표현이 심했다면 용서를).

찾아보니 대림절 기간이 대략 추수감사절로 시작해서 성탄절까지 정도의 기간으로 보이는군요. 그래도 시와 종에서 절기헌금을 내는 것으로 대림절의 시종을 지키는 것으로 보이네요. 근데 제가 기억하지 못한 절기가 있다니 참 난감하기 그지 없습니다.

교회에서 절기를 지키는 것이 많은 경우 헌금이 항상 동반되니 절기=헌금이 성도들의 뇌리를 항상 무겁게 또는 즐겁게 자극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재미있게도 어젠 교회에서 친한 분들과 모임이 있었는데, 십일조 얘기가 나왔는데, 십일조가 무엇을 기준으로 하느냐가 하나의 얘기거리가 되었드랬습니다. 세금 전이냐 세금후냐? 자신의 부채를 뺀 나머지냐 아니면 운용할 수 있는 현금이냐? 등등 많은 얘기가 오고 갔습니다. 아마 교회 좀 다니신 분들은 이 논쟁을 한 번 쯤은 격어셨을 겁니다. 저 역시 어제가 처음은 아니고 여러 주장들을 들었습니다.

좀 오래다니신 분들과의 대화에서는 안내면 어때? 라는 과감한 주장을 하시는 분은 뵌 적이 없구요. 나이 어리거나 생활이 어렵다거나 교회다니신지 얼마되지 않는 분들은 주일헌금은 어떻게 하겠는데 십일조부터 절기헌금, 감사헌금은 꼭 해야하냐고 묻기도 합니다.

대림절도 모르는 제가 뭐라고 해야할까요?
그냥 내키면 하세요. 안 내키면 하지 마시구요.(저희교회 목사님이 들으셨다면 뭐라 하실지 상상이 안갑니다:-|) 그러면서 예수께서 이 상황을 교묘히(?) 빠져 나갈 수 있도록 예화를 성경에 적시하고 있음을 다행스레 여기며, 과부의 동전 한 닢의 예화를 통해 연보의 마음에 무게를 두시는 예수님을 생각하라고 권합니다.

이래저래 돈은 모든 종교의 아킬레스 건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레벨:0]無名齋

2007.04.09 01:35:55

imprimatur님 말씀이 맞습니다. 절기란, 헌금 내라고 있는 '껀수'가 아니죠.
대림절이란, 교회력의 1년, 즉 '전례주년'의 시작으로서,
성탄절에 오시는 주 예수님을 맞기 위해 소망 중에 경건과 절제로 기다리는 시간입니다.
헌금 내는 그런 때가 아닙니다.
개신교가, 종교개혁으로 분가하면서,
기존의 교회 전통으로 지켜 온 교회력도, 축일, 절기들도
성서에 안 나온다고, 쓸데 없다고 폐기하더니,
정작 교회력의 절기, 축일도 아닌, 미국 풍습인 추수감사절을 가장 중요한 절기로 지키지를 않나,
(우리 민족의 추석이 있는데, 왜 추수감사절을 도입하나 모르겠습니다.
추석 때 다들 고향에 가시는 점이 걸린다면,
그 다음 주일을 감사주일로 지켜도 되지 않을까요?)
그것도 모자라, '맥추'감사주일이라는 것까지 만드니, 참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솔직히 깨놓고 말해서, 이거, 헌금하라고 만든 날 아닙니까?
이 두 날은, 교회력에 없는 절기입니다.
교회력이란, 전례주년이란, 주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된 교회가,
우리 예수님을 본받아 살기 위해, 예수님의 생애에 맞춰,
1년의 달력을 짜놓고, 그 사이 사이에 축일도 만들어 놓은, 그런 겁니다.
그래, 이것 쓸데 없다고 폐기한 개신교가,
지금에 와서, 교회력의 취지와 정신과도 거리가 먼 절기들을 만들어서,
헌금 걷는 명목으로 '운용'하고 있으니, 이걸 어찌 평해야 할까요?

[레벨:2]나이스윤

2007.06.10 22:46:26

더두 덜두 말구 대구성서아카데미(다비아쩜넷)가 네이버만큼만 알려져서 두루두루 읽혀졌으면 합니다...-.-
아울러 조성기 목사님의 "십일조을 넘어서"라는 책도 권해봅니다.

[레벨:0]섬돌

2007.04.09 22:56:19

제 짧은 생각엔,
10의 1조가 아니라 10의 10조라도 드려야 하는거 아닌가 생각되네요.
청지기라고 생각한다면요. 다 주의 것이 아닌가요...
적어도 자신의 삶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물, 영적 예배로 드린다는 믿음이 있다면은요.
그것이 시간이던... 물질이던...
사실,,,
결코... 쉽지 않은 고백이라는 것을 밝힙니다....
다만 교회의 필요와 자신의 형편에 따라서 지혜롭게 해야겠지요.

이문제를 죄와 연관해서, 성도들을 실족시키는 교역자들은 회개를 많이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만....
profile

[레벨:8]김민욱

2007.04.10 11:48:08

수우님 코멘트처럼, 또는 정목사님 코멘트에서도 있었듯이,
헌금(하나님께 바치는 것)에 대한 축복의 의미가 있는 성경구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 지 좀더 명확하게 알고 싶습니다.
십일조, 헌금에 대해 뭐가 맞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헌금을 한다고해서 돈이 하늘에서 떨어진다는 것을 신뢰하지도 않지만,
마음 한켠에서는 내가 감당해야할 의무처럼 느껴지기도 하고요.

목사님, 신앙심 깊은 집사님들이 헌금 잘해서 축복받은 예화를 들면
속으로 '그런게 어딨어?' 하는 반발감이 들면서도,
교회에 큰 돈 들어갈 일 앞에서 이런 말을 듣고
없는 상황임에도 건축헌금이다 뭐다, 큰 돈을 헌금으로 내는
믿음 좋은 부모님, 집사님을 보면 '그렇게 순수하시나...'
좀더 노골적으로는 '그렇게 잘 넘어가시나...'합니다.

헌금문제가 신앙생활에 중요한 가치관을 형성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에 맞게 배우고, 알고자 노력하지 않은 것에 반성하면서,
목사님의 다른 코멘트도 계속 기다리고, 또한 배울꺼리를 찾아봐야겠습니다.

noa

2007.04.10 18:10:25

고린도후서9장7절의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것이요,인색함으로나 억지로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내는자를 사랑하시느니라" 란 말씀을 생각해보게 됩니다.
위에 성경구절을 인용한다면 중도 보수론자쯤의 십일조에대한 견해라고 봅니다. 싸움에 휘말리고 싶지 않거나
은혜에 깊이 함몰되어 세상과 나는 간데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는 둘중 하나의 상태일테지요.
걸리는 대목이 즐겨내는자를사랑하시고
즐겨내지않으면 미워하시는가의 아동틱(?)한 궁금증이 하나 있겠는데요.
누구나 하나님의 기쁨이길 소원하는데
바로 저 대목에 대한 바른 해석이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말라기서의 흔히들 인용되어지는 십일조또한
하나님이 책망하시는 의도로 제사장들에게 국한되어졌음이 설명되어야 겠지요.



성도들의 성경말씀이해수준이 좀더 끌어올려져야된다는 부분과
설교자들 또한 본문의 배경과 더불어 텍스트의 심도깊은 연구없음이 안타깝다는 생각입니다.
(대안을 저또한 모색중입니다만...)

신학적인 정확한근거및논리도 중요하겠지만
성령께서 마음에 감동을 주심으로 내는 헌금이라면
언제 어느때 무슨명목으로 얼마를 내던지 관계있겠는가 !라는 것입니다.
단, 짚고 넘어가야할점은
감동의 기복이 심해선 안되겠죠.
어떤주일은 아침에 기분좋아 수십만원 연보하고싶어해서 했지만,
어떤날은 기분이 썩안좋아 목사님 설교도 그렇고해서 돈한푼이 아까워 내고싶지 않다면 말이죠.ㅎㅎ
성령의 감동이심인지 내감정 변덕의 죽끓음인지 영적구별을 해야겠구요.
(그순간 알지못하면, 시간이 흐른후 반추해볼때 자신만이 알수있는듯 합니다. )

"최소한의 헌금기준점이 십일조"란 어떤 교수님의 십일조 설명을 들었던 기억이 나는군요.
십일조에 부정적이던 제게
다시금 생각하게끔 되었답니다.
하나님께선 내게 최소한의 헌금기준점을 제시해준건 아닌가 해서입니다.
(물론, 내사업이 한달총수입이 1억인데 1천만원을 낼수있겠느냐?
물어본다면 당연히 그럴수 없다고,하나님이 어떤분인데 내게 그런 돈벼락을 주시겠냐고 하겠지만요.ㅎㅎ
생각해보니 그것도 걱정이겠네요.
이 대목에선 적당히 수입원을 허락해주시고 적당한헌금을 내도록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최소라는 단어를 써서 최소인십일조는 물론이고 그보다 많은헌금을 하라는 말뜻은 아니고,
현시대에서 율법과십일조의 연속성과불연속성의 해석학적또는 분석학적관점으로 바라다본다면.
어떤부분이 단절되었고 어떤부분에 연속성이 있는것인지도
명쾌한 답변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솔직히 잘 몰라서..)


저또한 다시금 뚜렷한 대안과 결론없이 원점으로 돌아가나봅니다.
고후9장7절로....(각자 그 마음에 정한대로~~)
단지,
십일조 찬미론자가 아닌,그렇다고 거부론자도 아닌입장에서
각자 나름대로의 헌금과십일조에대한 기준점은 있어야된다는것을 말씀드리고자 한것뿐입니다.


[레벨:3]김경태

2007.04.11 01:23:23

정목사님의 글을 읽으면 우선, 하고 싶은 말씀을 다 서두와 중반부에 하시고(기껏 감사헌금을 드리는게 부활절이 아니다 등...물론 기껏 감사헌금을 드리는게 부활절은 아니죠. 그런데 드림으로 더 풍요로워지는 것 역시 말이 되지요.) 후반부에 대안을 생각해 보자고 하시는 것으로 글을 맺으시는데 그런 문제제기는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구체적인 대안에 대해 방향이라도 정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십일조의 대안이 무엇인가요? 십일조는 그 의미가 퇴색되었더라도 드려야 하지 않습니까? 대안이 없으면 우선 계속 드리자구요. 열심히.

[레벨:0]無名齋

2007.04.11 03:56:59

김경태님의 말씀 잘 들었습니다.
그런데, 외람됩니다만, 정용섭 목사님의 말씀을 굳이 그렇게 읽으실 필요가 있을까 싶습니다.
정 목사님께서는, 십일조를 없애자는 말씀은 하지 않으셨는데요?
정 목사님의 말씀인즉, 헌금에 깃든, 한국 교회의 왜곡된 공로주의,
다시 말해, 그리스도교 신앙의 훼손을 지적하고 계신 겁니다.
인간의 공로로 구원의 가능성이 높아지거나, 상급이 커지거나, 그런 식으로 나가버리면,
이건, 이미 그리스도교가 아닙니다. 굳이 예수를 믿을 필요 없으니, 그만 두는 게 좋을 겁니다.
헌금은 필요하죠. 어느 집단, 기관이든, 그 구성원들이 운영비를 충당해야 됩니다.
그러니, 성실히 납부해야 맞다고 봅니다. 그러나,
십일조를 믿음의 척도니, 축복의 특효약이니, 이런 식으로 허황된 신화를 확대재생산하는,
이런 타락의 행태를 "우선 계속, 열심히" 해야겠습니까?
부활절 감사헌금을 드림으로써 더 풍요로워지는 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부활절의 뜻을 왜곡하고 훼손한다고는 생각되지 않으세요?
주님의 부활절을, 봉투봉투 열렸네~ 따위로 격하시키는 신성모독이,
괜찮다고, 풍요로운 거라고 보세요?

[레벨:3]김경태

2007.04.11 21:50:46

무명재님, 평상시에 님의 글 읽으면서 많은 공감을 해 왔습니다. 또 제 글에 자세한 비판과 문제제기 역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물론 공감하는 부분이 있지만 몇가지 더 이야기하고 싶은 부분이 있어서 이렇게 글을 씁니다.

‘그리스도교의 신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서로의 입장이 다르리라 생각됩니다. 원론적으로 그리스도교는 온전한 모습의 교회는 초대교회 때부터 없었잖아요? 그리스도교 신앙의 훼손을 걱정하시면 너무 힘들고 피곤하실 것 같아요. 정목사님의 십일조 및 각종 헌금에 대한 비판은 교회가 잘못 강조하는 것 중에 한 극단적인 면이 아닌가 싶습니다. 십일조 뿐만 아니라 모든 헌금, 아니 교회가 하는 일에는 양극단과 그림자가 있지요. 그런데 그런 그림자 때문에 실체를 버릴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그러니까 ‘십일조(또는 각종 헌금)를 열심히 내라, 그 의미를 분명히 알고서!’ 이 정도면 어떨까요?

기왕에 시작된 대화이니 한 두가지만 더 말합니다.
1. 십일조를 내고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바란다면 타락입니까?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복이 무엇인지 이야기 할 여지는 있습니다만, 물질적인 복을 바란다면 타락입니까? 저는 그것 역시 좋은 신앙이라 생각됩니다. 개인적으로 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매번 기대합니다. 무명재님, 복을 받기 싫다고는 하지 마시기 바래요. 만약 무명재님이 복을 바라지 않는다면 내 논리가 무너지니까요. 그리고 성경의 하나님은 복 주시기 원하시는 하나님 아닙니까? 무명재님도 복 많이 구하고 받고 누리세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바래도 타락이라고 보지 마시기 바래요. 이쯤에서 이렇게 말하면 무리일까요? (무명재님이 조금이나마 복을 받기 원한다는 가정 아래)“내가 바라면 괜찮고 다른 사람이 바라면 타락입니까?”

2. 물질 있는 곳에 마음도 있다는 말씀을 근거로 한 말씀 드립니다(사실 이 말은 부흥사님들이 잘 쓰시는 표현이긴 해요.). 내가 관심 갖는 것에 대해 물질을 쓴다면 그 의미는 분명히 있습니다. 굳이 ‘봉투봉투 열렸네.’ 라고 표현 안하셔도 될 듯합니다. 개인적으로 절기 헌금을 많이 했을 때와 적게 했을 때 분명 그 절기의 의미가 차이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면 그만큼 가두어 놓은 틀에 얽매인 결과로 말씀하실 수도 있겠네요. 실제로 제가 그 틀 안에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죠.(그 틀을 깨고 자유해야 하는데!!! 걱정하실지도 모르겠네요.) 사실 저는 갈등 중에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그런 갈등은 신앙생활에 필요하다고 보구요. 또 한편으로는 무명재님이 그 틀로 들어와서 많이 드리시고 큰 의미를 발견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내용자체가 중요하지만 때로는 형식이 내용을 그대로 드러내지요. 부활의 감격을 어떻게 표현하시겠습니까? 감사하는 마음에서 드리는 물질로 표현하면 어떨지요!! 더 좋은 표현방법이 있으면 알려주시구요. 표현할 필요가 없다면 다른 문제가 되겠네요.

[레벨:2]솔나무

2007.04.12 01:05:42

정목사님,
드디어 5월 둘째주일에 부족한 사람이 안수집사 임직을 하게 됩니다.
위에서 말씀하신 내용들중에 저는 특별히 하는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지난 과거 10년정도를 너무 험하게 사업을 하다가 보니 제정적으로 너무 힘이들었죠.
4-6학년 아이들을 20년을 가르치며 평교사에서 부장집사로 섬긴지 10년입니다.
우여곡절을 격고 지난 선거때 안수집사로 피택이 되었답니다.
죄송한 일이지만 큰 험금 제대로 해본 경험이 없는 사람이 되었네요. 단, 교회학교부서에 형편되는데로
아이들 먹을거리 감당하고 부서 섬기는 정도였습니다.
이제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이죠. 앞으로 한달...
교회로 부터, 장로님들로 부터 은근히 압력을 받고 있습니다.
"이번 임직자들이 임직식때 교회에 어떻게, 얼마만큼의 물질을 올려들리지 상의를 하셔야 할텐데..."
저는 미안하지만 이런일에는 너무나 편한 마음으로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제가 한 말,
"오히려 교회에서 임직받은 분들에게 일을 평생동안 시킬텐데, 구두 한 켤레씩이라도 권하면서 열심히
교회와 성도들을 섬기라고 잔치와 상을 내려야 하는 것 아닌가요?" 했더니...
아무리 그래도 또 물질로 섬기고자 하는 사람이 있을 터이니 자연스럽게 상의를 좀 하랍니다.

각자 마음에 감동되는 목적헌금, 강사목사님 사례비, 담임목사님 사례비 및 양복(사모님), 행사비...

"저는 알아서 할랍니다. 그리고 행사비의 엔분의 일은 합니다."
더이상의 강요를 하지 마시라고 말씀을 드리긴 하였으나 영 편한마음은 아닙니다.

미안하지만, 김경태님의 글에 적게했을때와 많이 했을때의 절기와 행사의 의미가 차이가 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때문에 오히려 더 몹쓸 사람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김경태님 오해는 마시고요.
그런 적고 많음에 자기의 마음이 움직인다면 별로 건강하지 아니한듯하여서...

이런일에 저희의 선배들도 이런 일에 강요를 받아서 일을 치렸던 분들이 이제와서
"앞으로는 이런식으로 교회의 행사를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라고
그 일의 총대를 후배들에게 넘기고 있는 실정이랍니다.

이번의 임직행사가 지나가면,
다음 행사때부터는 죽기살기라도 룰을 만들어
임직하는 일은 교회의 큰 행사로 교회에서 섬기는 직분자들을 위해서
진지하게 잔치를 감당하게되길 의견을 올려가고자 합니다.

교회의 많은 절기에 절기를 음미하기 보다는 교회의 생활을 꾸려가기 위한 수단으로 많이 변형되어
있습니다.
고난주간의 특별 심야기도회는 어쩐지 눈물흘리지 아니하면 아니되는 상황으로 인위적 연출...
다음날 사용할 부활달걀을 포장하며 잊혀진 시간을 달려갑니다.
주일이 된면 당연히 부활의모드로 언제 고난주간이였는지... 그리고 내년에도 또...

이런 일들에 우리는 너무 많이 길이 들여진 상황이라서, 앞으로 '오토메틱'입니다.

모든일이 인위적이지 아니하고 자연스럽게 이끌림 받는 신앙생활이 이렇게 어려운가봐요?
깨우칠 만큼 잘 가르치는 교회가 이땅에 찾아 보기 힘이드니...
미아리 무당들 찾아 점치고 복체 받고, 복체 주는 수준의 신앙...찜찜한 것보다는 좋탄다...
1000원짜리 점보다는 1000만원짜리 점을 보고 왔으니...신통하겠다고...

매점매석하는 직분은 절대로, 못결딜정도로 불편하여서 확 불을 질러버릴까? 하는...

이런 마음을 알아서 제 처와 장모님...일주일 금식기도 할 수도 있답니다.ㅎㅎㅎ

강요와 선동에는 절대로 움직이지 아니하도록 '다비아'의 특수훈련을 받았으며...
게다가 순교의 피가 흐르는 '산정현교회'에서 이런 일이...
어림도 없는...

그러나,
여러 임직자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게되면 이마음 흔들릴까봐 쬐끔 걱정입니다.
'행사비 엔분의 일'은 감사히 한다니까요...
이것도 못한다고 하며 기념품에 제 이름 석자를 뺀다고 할까봐 겁나서리...

정말 행복한 교회, 건강한 교회에서 생활하는 이땅의 성도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사람의 가르침, 교회 전통의 가르침은 교회 노예를 만들기에...주님의 가르침이 살아있는 교회로...

[레벨:0]無名齋

2007.04.12 01:54:32

김경태님, 저의 다소 격앙된 어조의 댓글을 좋게 받아주셔서,
감사하고, 또 죄송합니다^^
물론, 현실의 누군가 내지 교회의 모습을 부정하는 식의 비판은 곤란합니다.
그 나름의 걸어온 궤적의 결과물이, 지금의 모습일테니까요.
그래서, 비판은 늘 조심스러워야 하는 것이겠죠.
더욱이, 그 대상을 부정, 말살하려는 게 아니라, 개선하기 위한
충정의 발로로서의 비판이라면 더욱 그래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리스도교 신앙이란,
인간의 실존적 한계상황(원죄) 앞에서,
인간은 이 한계의 초극(구원)을 위해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라는
절망에서 시작된다고 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 2천년 역사상,
인간이 하느님과 모종의 '쌤쌤'의 거래를 하려는 시도는
늘 이어져 왔습니다.
미사를 많이 바치고, 선행을 열심히 하고,
헌금 많이 낸다고 은총이 더할 리가 있을까요?
천주교의 경우, 그리스도의 목회(사목)적 대리자인 사제 앞에
고해성사로 죄를 다 털어 놓았으면, 그 회개로 죄 용서를 받은 것이고,
'보속'이란, 단지, 목자인 사제가, 그의 신앙적 진보를 위해 내주는 숙제에 불과한데도,
죄를 지었으니, 보속으로 벌충한다라는 심대한 오해가 널리 퍼져 있고,
한국의 개신교는, 헌금의 액수에 따라 축복이 더하고 덜하다는
일종의 미신이 굳게 자리잡고 있는데,
저는, 이같은 오해를,
인간의 실존적 한계성(죄인됨)과,
십자가의 의미, 하느님의 하느님 되심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반그리스도교적인 발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러한 대중적 인식들은 현실이고,
그 나름의 연원이 있겠지만,
과연 이러한 근본적 오류까지 좋게 봐줘야 합니까?
그렇게 호의적으로 평가할 여지가 있습니까?

물질적인 복을 받기 싫은 인지상정과,
그것이 내 실존과 구원의 본질은 아니라는 각성은,
전혀 별개의 문제입니다.
인간의 자아지향성은, 인간의 연약함으로 이해해야겠지요.
현실의 교회와 목회(사목)의 상황에서,
따뜻한 시선으로, 그러려니 묵과할 부분도 클 것입니다.
그러나, 대놓고 인정하라는 것은 전혀 다른 얘기죠.

그리고, 제가 저 위의 댓글에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교회의 달력(교회력, 전례력)에 따른 축일, 절기는,
헌금 내고, 그런 식으로 지키는 날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그렇게 지키는 문화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한국 개신교 특유의 왜곡된 인습이라고 생각합니다.
감사하게도, 제 글을 평소에 봐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만,
저는, 가톨릭적 전통(꼭 천주교가 아니라) 가운데서 신앙생활을 해왔고,
사유하고 있으며, 전통의 중요함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교회 문화에서, 헌금의 액수 다소 여부로,
절기의 의미가 차이가 나느니, 그런 개념 자체가 없습니다.
그리고, 설령, 김경태님께서,
절기 헌금의 다소 여부에 따라
절기의 의미가 차이나는 것을 '경험'하셨을지라도,
그것은 김경태님의 '경험'일뿐,
그 경험이, 일반화, 보편화될 수 없음은, 김경태님 또한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구약성서에서, 내가 뭐가 답답하고 배가 고파서
소고기와 피를 요구하겠느냐?라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셨죠?
액수에 따라 은총도 다르다면,
그 하느님이 과연 성서가 증언하는 하느님일까?
물론, 김경태님께서는,
액수는 마음의 표현이라는 발로에서 이같이 말씀하신 줄 짐작합니다.
하느님 앞에서 인색하고 아낀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자기지향성이라는, 근본적 원죄겠지요.
그러나, 이것은, 헌금을 많이 내는 그런 식의 결단으로 초월하기보다는,
예수님을 닮으려는 실천적 차원에서의 하느님과의 일치에서 구현될 수 있다고 봅니다.
김경태님의 충정은 저 또한 이해합니다만,
이같은 발상에서 필연적으로 비롯되는 은총의 물화, 계량화라는,
반복음적 모순이라는 폐해는, 그 충정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큽니다.

[레벨:0]섬돌

2007.04.12 13:00:28

솔나무님 축하드려요 짝짝짝^^

교회를 섬기는 님의 한결같은 마음이 느껴지는군요.
그 세월의 무게와 더불어서요.

장로직에 선출되고 나서 얼마나 감사하고 기뻐햇을지 조금 짐작이 갑니다.
그런데, 그 기쁨이 채 가시기 전에 부담이 다가오니 좀 안타깝군요.
지혜롭게 대처하실 줄 믿습니다.

그러고 보니, 다음 주 토요일은 매형과 누나가 각각 장로와 권사직임을 받는군요.
그 기뻐하시던 모습이란.... 전화를 통해서 들려오는 소리만 들어도 느껴지더라구요...
한결같은 봉사와 헌신에 대한... 교회의 격려이자, 그 증거일거 라고 생각해 봤습니다.

힘들면 힘든 가운데서도, 지치면 지친 가운데서도, 한결같이 동행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만든 ...
신앙여정이기에...
늘 기뻐하고 감사하려고 노력하는 두 분의 모습이 님의 모습과 겹쳐지는군요.

다행히... 물질적인 부분에서 압력은 받지 않은 거로 전해들었습니다. 행사비 일부 정도에 감사헌금 하는 정도로 생각하시더라구요.

직임식때 꼭 내려오라고 압력을 주는데... 전 그게 걱정이군요 ㅎㅎ

[레벨:2]솔나무

2007.04.12 16:09:25

섬돌님,
글을 읽으시고 축하를 해주시니 감사하네요.
그러나 원해서 된 피택이 아니고 어쩌다보니 된 피택이며 임직입니다.
지금까지 교회의 제도와 권위에 항거하는 저의 모습을
윗 어른들(지도자)은 좋게 보지 아니하지만, 그래도 앞으로는 젊은 사람들이 교회를 책임지라는
일반 성도들의 표가 모여서 이렇게 이끌려 갑니다.
지금까지 교회의 교사로 섬기며 걸었던 그 길을 걸어갈 것입니다.
옳음과 그름에 대답하며 질문 할 사람으로 말입니다.
앞으로는 말이 아닌 행동으로 답을 해야 할 책무를 느끼며 제게 맡겨진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름이...
지난 신앙생활과 이곳 다비아의 가르침과 배움이 잔잔히 섬기는 교회에서도 회복되어지기를...
암튼 부담되는 일에 축하를...
묵묵히 감당하며 일하렵니다.
격려와 기도부탁드립니다.

[레벨:3]김경태

2007.04.12 23:30:07

무명재님의 말씀 거의 대부분 동의합니다. 물론 오해될 부분은 있지만 또 다른 오해를 불러 일으킬까봐(괜한 글로 자꾸 피곤하게 할까봐) 생략하구요,지난 글에서처럼 한두가지만 짚겠습니다.

우선, 제가 아는 한 십일조를 포함한 대부분의 헌금은 보상심리가 전혀 없지는 안겠지만(그것은 말씀하신대로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욕망 때문으로 미룰 수 있겠구요.), 더 중요한 헌금의 의미는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표현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제 주변에는 다행인지 이런 시각으로 헌금 생활하는 분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액수에 따라 ‘주시는 은총’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은총에 따라’ 액수가 조정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마리아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조심스럽게 인용해 봅니다. 식사를 초대한 시몬과 그 자리에서 향유를 부은 마리아의 사건에서 예수님은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눅 7장).' 하고 말슴하셨는데 이것은 절대적인 액수 자체를 가지고 판단해서는 안되겠지만 분명히 드리는 정도의 차이는 곧 은혜와 연결된다고 해석해도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바울도 ‘내가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는 고백을 하는데 이것 역시 받은 은혜는 물질과 행위로 드러난다고 봐도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불필요한 논쟁을 줄이기 위해: 은혜받은 것 또는 사랑받은 것에 대한 표현이 꼭 물질이어야 하는가?의 문제는 또 다른 각도에서 이야기 해야 할 것같구요, 적어도 헌금을 드리는 정도는 받은 은혜와과 연결된다고 봅니다.)

또 한가지 무명재님이 구약을 예로 말씀하셨는데 이사야에게 또는 예레미야에게 하신 말씀은 결국 ‘가져오지 말라는 게 핵심’이 아니라, 부정한 예물 또는 정성이 없는 예물에 대한 비판이었다고 보구요. 구약성서에서 모세에게 명하신 율법에는 ‘빈손으로 오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 것이라는 차원에서 볼 때 구지 하나님께는 필요한 것이 없다고 해도 맞는 말씀이듯이, 우리가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으로는 물질을 가지고 가는 것 역시 맞지 않나 생각합니다. 물론 이 물질이 어디에 쓰이는 지는 또 다시 이야기 해야 될 부분이구요(이런 표현법은 정목사님께 배웠습니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은 '헌금의 쓰임새'가 문제 된다거나 또는 '잘못된 강요'와 '강조'를 너무한다고 해서 내가 해야할 믿음의 고백 또는 감사의 표현이 생략되어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제 소견으로는 십일조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믿음의 고백이며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구체적인 감사행위요, 이것은 많은 오해와 의도적인 왜곡, 그리고 잘못된 강요/강조에도 불구하고 지켜야할 신앙인의 자세라 생각합니다.

정목사님이 말씀하시는 새로운 차원의 헌금제도는 무엇인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그것 역시 '제도'라면 똑같은 왜곡과 강요가 곧 있게 될 것이고, 그렇다면 계속해서 또 다른 차원의 헌금제도를 말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새로운 차원의 헌금제도를 이곳 다비아나 또 다른 개혁적인 곳에서 나오고 정해진다면이야 다시 생각해볼 문제이지만 그전까지는 계속 정성 다해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레벨:0]유종호

2007.04.13 01:10:33

처음으로 글 남기네요... 헌금에 대해서 전부터 생각했던 것인데...

성도가 하나님께 감사하고 은혜받은 것을 표현해야 함은 당연한것데... 신약의 교회가 성도의 감사의 표현을 직접적으로 수급할 권리를 가지고 있나요? 교회가 성도에게 가질수 있는 권한이 어느정도인지, 그것이 구약의 성전과 일치되는지, 그렇지 않다면 성도의 감사표현이나 하나님께 대한 물질적 헌신이 왜 교회라는 기관으로 모아져야 하는지요...

제 생각이 맡는지는 모르겠는데요... 구약에서 십일조를 내서 성전을 지탱하는 것이나, 여러가지 예물을 드리는 것등은 당시에는 모두가 스스로 하나님을 예배하지 못하고 성전이라는 것을 통해서 예배하기에 그런 제도가 필요한 것이고, 신약에서는 각자가 하나님을 직접 예배하기에 어떤 드림이나 예물의 개념은 각자의 예배적 삶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닌지요... 지금 신약시대에 내것의 어떤 부분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개념이 있을수 있는지.. 제가 생각하기에는 내것을 따로 때어서 하나님께 드린다는 생각이 개념과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성소가 된 사실과 일치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냥 우리 각자가 성소로서 살아가는게 하나님께 드리는게 아닌지요..
교회에 헌금하는 것은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보다는 복음전도와 구제라는 사랑을 실천하고 공동체를 이끌어 갈수 있도록 각자가 책임감을 가지는 정도인거 같은데... 제사가 없는 이시대에 뭘 어떻게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인지 잘 모르겠네요...

이렇게 생각해도 되는지 궁금해서요...
profile

[레벨:8]김민욱

2007.04.13 02:07:50

십일조, 헌금...
누가 좀 도와주세요~~~
읽어도 정리 안 되는 머리 둔한 학생입니다....

[레벨:20]신완식

2007.04.13 08:21:15

김민욱 님~~~

<베낀글> 제 119번을 클릭하시면 '온전한 십일조란?' 이라는 제목의 펌글이 있습니다.
A4로 편집하면 약 17페이지 분량이 될 것입니다.

제가 그 때 퍼올 때는 저자가 확인이 되지 않았는 데 이후에 어느 분께서 제게 제보를 해 주셨어요.
그 글을 쓰신 분은 지금 부산에서 목회하고 계시는 분이신데 실명을 밝히는 문제는 본인의 양해를
구하지 않은 상태라서......김민욱 님의이해를 구하는 바입니다.

하지만 최근에 저는 그 분과 개인적으로 한 차례 소식을 주고 받았어요. 십일조를 이해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profile

[레벨:8]김민욱

2007.04.13 21:16:01

여기 또 목사님의 자상함이 있네요.
고맙습니다.
안 그래도, 목사님이 올리신 그 글을 낮에 읽었더랬습니다.
확실히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목회공학이라는 용어까지는 아니더라도,
신앙생활하는데, 이상한 원리가 많이 작동하는 것 같습니다.
눈 크게 뜨고, 지나치게 확신에 빠지지 않고, 마음을 열고,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잘 알아가도록 노력해 나가야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레벨:0]求道者

2007.04.13 21:26:39

민욱님! 반가워요.
지난해 가을이던가요?
'정모 후기는 이렇게 쓰는 것이다'를 보여 주셨던 공학도..
자주 좀 오세요~^*^
profile

[레벨:8]김민욱

2007.04.14 13:23:41

칭찬 고맙습니다.^^
기억해주시니 또한 고맙습니다.
자주 와서 배우고 갑니다.
특히 구도자님의 글을 통해서 많이 배웁니다.
몽매한 제게 道를 많이 전해주세요~

[레벨:1]구원

2007.05.12 22:52:46

안녕 하세요? 반갑습니다..
저는 주로 신완식목사님 방에만 댓글을 쭉 올리고 있었습니다....아마 시간적으로나 개인의 이유가 있어 그렇지요? 그러나 십일조에 대한 문제가 제게 상당히 충격적으로 다가 오길래 도움을 받고자 들렀습니다.
'온전한 십일조'의 글을 복사해서 아내에게 보여주고 다른이들과 토론하기 위해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예수님도 가난한 과부의 헌금이 가장 많이 하였다고 한 장면이 떠올라 아내에게 말했지요?
십일조라는 제도보다 그 마음중심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바울의 말과 같이 이를 지키는것도 지키지 않는것도
다 주를 위해 판단하는것이니 합당히 하나님께서 알아 주실것이라...말이죠...
한국교회의 현실에 대해 이토록 고민하고 많은 생각을 가지신 목사님도 계시다는 사실 자체가 정말 위로가
되고 감사가 되고 있습니다.
소망까지도 생기거든요? 시간적인 여유가 조금 더 생긴다면 목사님께 많은 도움을 받고 싶습니다...
자주 들러 보겠습니다...
profile

[레벨:4]푸른숲

2007.06.18 02:10:50

헌금의 액수와 받은 은혜의 표현과의 상관관계, 그리고 정성스러운 예물과 헌금의 액수와의 상관관계......
참 어렵네요..^^*
많은 분들이 다양한 생각과 또한 신앙관을 가지고 계시는 군요.
저는 잘모르겠습니다. 아직 사유가 부족한지라..ㅠ 답답하기만 하네요..ㅠ

[레벨:0]폴김

2007.06.20 17:17:20

저는 김경태님의 견해에 동의합니다.
참으로 균형잡힌 생각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논리를 세우기 위한 비판이 아니라 주님을 향한 사랑의 그 마음이 느껴집니다.

우리는 목욕물을 버리면서 아기까지 버리는 우를 범해서는 안됩니다.
십일조를 오용하는 인간들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지 십일조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십일조는 드려도 되고 안드려도 된다는 식의 논리는 지극이 인간 중심의 논리입니다.
주님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23:23)
십일조를 드리는 인간에게 문제가 있어 그 십일조가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것이 되지 못한 것이지,
십일조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십일조는 반드시 드려야 합니다.
다만 십일조를 구원론과 연결시켜 성도들을 위협하는 일은 비판받아 마땅합니다.
십일조 드리지 않는다고 하여 그것이 우리의 구원을 취소시키지는 못합니다.
뿐만 아니라 십일조를 내지 않는다고 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해주시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하나님의 입장을 오용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리고 내가 얻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인정한다면,
어찌 십일조를 기쁨으로 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십일조를 내지 않아도 된다는 식의 논리는 결국 내기 싫다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닐까요?
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굳이 십일조를 내라는 말에 신경이 거슬릴 이유가 없습니다.
십일조를 감사함으로 내는 사람들은 십일조에 대한 설교에 상처받지 않습니다.

정목사님의 말씀대로 우리는 십일조가 면죄부처럼 오용되는 부분에 대해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차원의 헌금제도가 십일조를 대신하는 그 무엇이라면 저는 반대합니다.
그것은 세월이 지나면 더 큰 문제점을 야기할 것이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입니다.

[레벨:0]kantique

2007.07.14 00:51:25


가톨릭 공동체에서는 전혀문제가 되지않는 이슈들(십일조를 비롯한 금전문제 등등)이 왜 그렇게 개신교에서는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지 안타갑군요. 본질적인 것도 아닌것을 가지고 온갖 용어들을 동원하여 논쟁을 일삼는 것같이 느껴집니다.
정목사님 책을 읽고 이곳에 왔습니다. 그런데 여기 역시 너무도 개신교적인 소모적 논쟁들에 질려 버리겠네요. 우리 크리스쳔들은 30대의 활력이 넘치는 멋진 예수님을 있는 그대로 정말 멋지게 세상이 느끼게 해드려야만 할것같은 데요.
"그리스도라 불리는 예수, 그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앞에 담백하게 서 있어야 하지않을까요.

[레벨:7]늘오늘

2007.07.14 02:15:42

가톨릭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개신교 자체에 대해서도 워낙 아는 게 없다는 것을,
이곳 다비아에서 확인하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모태신앙의 자긍심(?) 때문인지,
누가 목청 높여 뭘 가르치면, 금새 삐집니다. ㅋㅋ

님께서 조금씩조금씩 콩나물시루에 물 주듯,
가톨릭에 대한 이야기, 결국
우리 기독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주시면,

kantiqu님께 들은 이야기를, 어느 날, 마치
늘오늘이 원래 알고 있던 것인양, 누군가에게
떠벌이는 것을 발견하게 되실 거에요. ㅋㅋ^^

kantique 님, 반갑습니다. ^^

[레벨:1]angelleaf

2007.09.15 10:08:26

십일조를 꼭 내야한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같은 공동체에 존립하기란 정말 쉽지 않은것 같습니다. 그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빨리 십일조 문제가 해결되었으면 좋겠네요..ㅎㅎ아니 빨리가 아니라도 천천히라도 개선이 많이 되었음 하는 바램입니다. 어찌되었든 현제 십일조를 안내면 이상한 사람보듯 하는게 요즘 교회 현실이니까요

[레벨:0]징검다리

2007.09.19 00:10:32

헌금을 제대로 하지 않는 성도는 항존직에로의 진출을 위한 집사,권사 후보선정의 기준 미달로 보아 후보로 선정하지 않기로 한것은 적정한가? 성서적인가? 그리고 "제대로" 란 개념은 객관성이 있는가? 이는 집단이기주의 의 한 단면이 아닌가?

[레벨:0]징검다리

2007.09.19 00:16:18

교회재정을 위한 중심이 되는 헌금을 "감사헌금" 으로 하고 십일조란 명칭의 헌금은 없애면 어떨른지요? 감사함 없이 의무적인 헌금은 비 복음적이란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은 한 두렙돈을 칭찬 하셨는데 교회는 그렇질 않군요...예수님을 우롱하는 처사로 여겨집니다. 그 판단도 주관적 이구 말입니다.

[레벨:20]신완식

2007.09.19 07:19:42

징금다리님~~~
과부가 두 렙돈 드린 기사는 오세용 목사님께서 쓰신 다음의 글을 읽어보시면 큰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과부의 두 렙돈 기사는 헌금강조용인가? > (오세용 목사님 75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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