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윤리는 가능한가?

조회 수 10792 추천 수 111 2007.08.07 11:09:46
기독교 윤리는 가능한가?

교회를 향한 비판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말과 실천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지만 실제로 사랑을 실천하는 기독교인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하나님의 평화와 정의를 기도하지만 실제로 평화와 정의를 실천하는 기독교인들이 많지도 않다. 물론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기독교인들보다 사랑과 정의의 실천에서 더 뛰어난 것도 아니다. 이런 윤리적 실천의 문제는 기독교 신앙의 유무에 상관없다. 거의 모든 부분에서 그렇다. 성윤리에서도 그렇고, 경제윤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강남지역에서 아파트 투기하는 분들 중에서 기독교인들이 제법 많을 것이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기독교인이라고 한다면 기독교인답게 살아야 하는 건데, 신앙이 실제 삶과 연결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뼈를 깎는 심정으로 반성해야 할 질문들이다. 이런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목사들은 신자들에게 윤리에 중심을 둔 설교를 하고, 그런데 중심을 둔 목회를 꾸린다. 기독교인답게 정직하고, 정의롭고, 희생적이어야 한다고 다그친다. 약간 접근 방식이 다르기는 하지만 보수적인 목사나 진보적인 목사의 관점이 모두 비슷하다. 전자는 주로 개인윤리에, 후자는 사회윤리에 천착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들이 그렇게 설교하고 가르치는 이유는 그것이 바로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일 뿐만 아니라,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더 문제가 심각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들의 문제의식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인정하고 싶지도 않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그들이 아무리 도덕과 윤리를 강조하더라도 사람들의 삶이 바뀌지 않는다. 물론 일시적으로는, 표면적으로는 바뀔 수 있다. 줄담배 피우다가 담배를 끊고, 놀음으로 밤을 지새우다가 손을 씻고 몰라보게 새로워진 사람들을 교회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소위 제자훈련을 통해서 매일 자신을 신앙적으로 성찰하면서 착하게 살아가는 사람도 제법 많다. 우리가 복음서에 등장하는 바리새인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듯이 사람은 노력으로 어느 정도로 세련된 교양인이 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런 변화는 존재의 차원이 아니라 단지 무늬의 차원에 머물 가능성이 아주 높다.
여기서 우리는 윤리가 교양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인식해야 한다. 물론 교양은 필요하다. 교양이 있는 사람과의 대화는 편한 반면에 교양이 없는 사람과의 대화는 짜증스럽다. 종교적 교양이 있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와 전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모인 교회를 비교해보면 그 차이가 드러난다. 그러나 그런 교양은 그렇게 결정적인 게 못된다. 그것은 삶의 능력으로 작동되지 않는다. 오늘 중산층 교양인들이 모이는 교회가 한국사회의 변혁을 주도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자세히 살펴보라. 별로 기대할 게 없을 것이다.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아무리 예수를 믿는 사람답게 살아보려고 노력한다 하더라도 별 효과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둘째, 복음은 윤리 너머의 차원이다. 기독교 신앙의 토대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 사건, 즉 그의 십자가와 부활이다. 십자가는 일종의 윤리라 할 율법에 의한 역사적 예수의 죽음이며, 부활은 인간의 종교적 업적과 윤리적 행위와 전혀 상관없는 하나님의 배타적 생명사건이다. 이 사건이 복음인 이유는 우리의 어떤 노력이나 능력과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선물로 주어졌다는 데에 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선물이다. 말하자면 복음은 메타-윤리적 차원이다.
복음의 메타-윤리적 차원이 기독교 영성의 자리이다. 음악경험을 비유적으로 들어보자. 어떤 사람이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술피리>에 나오는 아리라 “밤의 여왕”을 노래했다고 하자. 그는 그 노래를 부르면서 음악과 존재론적 일치를 경험했다. 그 순간에 그가 얼마나 윤리적인 사람인가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윤리적인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음악의 원초적 세계에 들어가는 게 아니면 윤리적이지 않은 사람이라고 해서 온전한 음악경험을 못하는 것도 아니다. 음악은 순전히 음악의 세계일뿐이다. 복음도 역시 그렇다. 여기에는 죄인이냐, 의인이냐 하는 차이가 없다. 바울은 오히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 넘친다고까지 말했다.  
기독교 신앙이 윤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기독교 윤리는 신앙에 의한 하나의 귀결이다. 신앙의 중심은 존재론적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사건이며, 윤리는 그 사건에서 창조적으로 발생한다. 그래도 이 땅에 두 발을 딛고 살아가는 한 구체적인 윤리적 지침, 규범들이 필요하지 않느냐, 하고 주장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교회 지도자들이 초등학교 선생님들이 아이들에게 구구단을 가르치듯이 신자들에게 일일이 살아가는 방법까지 지시하곤 한다. 그런 것들은 신앙 이전에 상식이며 교양이다. 기독교 신앙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최소한 인간답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누구나 생각해야 할 대목들이다. 상식과 교양을 복음인양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기독교 윤리의 근거는 자기 안에 놓이는 게 아니라 복음에 종속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 윤리는 불가능성과 가능성 사이에 놓여 있는 셈이다.

[레벨:1]한결같이

2007.08.07 17:40:38

외향적인 모습(교양, 언어, 규범준수)은 혹은 내면적인 것(온화함) 그것은 단지 인간의 덕목이나 윤리정도이지 그것으로 참그리스도인이다 혹은 아니다,신앙의 정도를 구분 짓는 기준이 될수 없음을 깊이 인식합니다.아울러 우리가 무엇을 선포해야 함을 일깨워 주심에 감사합니다. 잘하기 보다 바르게함을 말하며 구도자 정신으로 비본질에서 본질을 고민케 하시고 깨닫게 하시니 늘 감사함으로 글들을 대합니다.

[레벨:6]月光

2007.08.07 18:28:50

'그리스도교 윤리'란 과목을 한 학기 동안 공부한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아득한 옛날같이 느껴지지만 그 때에는 참 많은 깨달음을 가졌던 시절이었습니다.
생각나는 것은 "윤리적 기독교가 아니라 기독교적 윤리"라는 말입니다.
윤리적 기독교 < 기독교적 윤리
기독교는 윤리적 기독교의 수준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초월하여 기독교적 윤리를 지켜내야한다는 것이었죠.

세상의 윤리와 같은 윤리가 아니라 그 이상을 요구하시는 것이 바로 기독교적 윤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도전승에 의한 기록인 4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의 어록들이 참 많습니다.
그런데, 과연 예수님은 실천불가능한 것을 제자들과 무리들에게 명령하신 것일까요?
실천불가능한 윤리라면 왜 그것들을 말씀하셨을까요?
사도 바울이 말했던 것처럼 제자들이(무리들이) 실현불가능한 주문을 통해서 자신들의 무능함과 죄인임을 깨닫게 하시려고 그러셨을까요?
또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니, 또는 하느님 자신이시니 그런 사랑을 실천하실 수 있었고, 우리는 태생이 실천불가능한 인간이라 그런 요구는 언감생심인 것일까요?
사도바울이 자신을 죄인의 우두머리라며 곤고한 자로 표현한 것은 예수님의 삶을 따르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해서 그렇게 표현한 것일까요? 아님, 겸손해서 자기를 낮춘 것일까요?
많은 세월을 저에게 고민으로 던져진 문제들이었고, 지금도 그리 쉽게 답을 내지는 못합니다.

내 안에 하느님을 모시고 살아가도, 그 분께 내 모든 것을 맡기고 살아가더라도 불가능한 것일까?
아님 내 안에 그 분을 모시고 나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은 것인가?

그 문제는 구원의 문제와는 별개인 것 같습니다.
오히려 구원 그 이후의 문제이겠지요.(물론 구원의 개념도 견해가 다를 수 있지만요.)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아신다는 주님의 말씀은 도대체 오늘날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나요?
전도하는 것을 열매라고 해야 하나요, 아님 우리의 삶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인가요?

이렇게 써 놓은 글을 보니 ???연속이네요.
그 만큼 저 자신이 많이 고민하는 문제들이라 ???을 뿌려 놓은 것 같습니다.
목사님의 글로는 아직 그 답이 시원치는 않네염.(제가 이해력이 넘 부족해서...)

"기독교 윤리는 신앙에 의한 하나의 귀결이다. 신앙의 중심은 존재론적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사건이며, 윤리는 그 사건에서 창조적으로 발생한다. "

읽고 읽고 또 읽고...
드뎌 제 눈에 윗 글이 들어왔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의 귀결입니다.
그럼 기독교 윤리를 가벼이 여기고 어김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기를 거부하거나 유예하는 것이며, 신앙으로 나아가기를 거부하는 것은 아닌가염?
아니, 혹 더 나아가서 불신앙의 증거는 아닌가염?
왜 저는 자꾸만 그렇게 생각이 되는 걸까여?
저는 저의 불신앙이 넘 안타깝습니다.
많은 분들의 글을 읽으면서 저의 불신앙이 더욱 크게 느껴집니다.

이 글을 쓰면서 저에게 자꾸 짜증이 납니다.
시원한 글이 아니라 오로지 ???만 계속되니 말입니다.

그러니 읽으시는 분도 용서해 주세요!

[레벨:0]도루박

2007.08.07 21:12:28

글이 어렵네요. 윤리와 교양으로 인간이 변화될 수 없다는 말은 이해가 갑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은혜의 구원이란 존재론적 변화가 일어나면 필연적으로 삶이 윤리적으로 변화된다는 말씀인가요? 역으로말해서 윤리적이지 않은 사람은 존재론적인 변화가 없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까? 이미와 아직 사이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매순간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노력이 필요하기도 한데 이것이 윤리와 상관없다고 보십니까?

[레벨:0]이반

2007.08.08 17:34:30

한국 교회의 기독교윤리 수준이 낮아 고민이 참 많습니다.
이것을 성경적인 입장에서 생각하고 싶습니다.

구약성경에 이런 성구가 있습니다.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풀리라!"
(출20:6, 유사성구: 신5:10, 7:9, 수22:5, 느1:5절)
신약 성경에도 유사한 성구가 있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요14:15, 유사성구: 요14:21, 15:10,12절)

이 성구들은 기독교 윤리의 가능성을 전혀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윤리는 하나님이나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랑에 근거해야 한다고 신구약 모두 주장합니다.
이 사랑이 없이 계명이나 율법 또는 도덕이나 윤리를 실천하는 것은
일반은총 차원에선 그 나름대로 의미를 가지지만 특별은총의 영역에선 의미가 없습니다.

그럼 윤리적 삶을 가능케 하는 하나님 사랑은 어떻게 가능합니까?
성경에 기록된 그의 행하심을 묵상하며 어떻게 그가 우리를 사랑했는가를 알아내는 것입니다.
성경 창세기부터 계시록은 이 묵상을 가능케 하도록 하나님이 행하신 수많은 사건들을 기록합니다.

묵상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깨닫는다면 묵상자에게 두 가지 결단이 생깁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만 섬기며며 살겠다."
"그의 명령을 지키면서 살겠다."

이렇게 기독교 윤리가 어떻게 가능한지 신구약은 잘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신자의 인격이나 삶의 변화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해야 합니까?
인간이 목회자이든지 신자이든지 다른 이들의 윤리도덕 수준을 쉽게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로지 이웃을 사랑해야 할 윤리적인 의무만 성도에게 있습니다.

영적 그리고 정신적 변화는 급격히 또는 서서히 또는 아주 눈에 안 띠게 성도의 삶에 일어납니다.
그가 진정 주님을 사랑한다면...
성령이 반드시 그의 안에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변화의 정도를 측정하며 판단할 권한과 권세는 우리에게 없습니다.
우린 잘 모릅니다.
정확히 측정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랑으로 격려하고 위로하며 서로 도와주는 의무만 있습니다.

하나님의 원하시는 때 성도들의 윤리적인 수준은 눈에 띠게 향상됩니다.
그러나 영적 어두움의 시기 이런 향상은 거의 눈에 안 띱니다.
성경과 교회 역사가 이를 잘 증명합니다.

절망치 말고 복음을 전하며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도록 하고
성도간 사랑 실천만 노력하면 됩니다.

그리고 한 나라의 기존 종교가 주는 체제에 기독교인들도 무의식적으로 젖어있습니다.
이에서 벗어나려면 적어도 한두세기 정도 필요합니다.
믿었다고 금방 180도 달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칭의 이후 성화는 과정이며 많은 시간을 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교회가 바른 복음을 전할 때 이 기간은 단축될 수 있습니다.
지금처럼 복음에서 떠난 설교로는 더 많은 시간이 요합니다.
목회자의 각성과 회개 필요한 이유입니다.

기도밖에 없습니다.
샬롬!

[레벨:0]호호호사랑

2007.08.10 11:31:23

목사님 저는 평신도 입니다.
최근 설교비평,신학단상,마가복음큐티,설교말씀등을 접하면서
신앙의 지평을 넓히고 하나님의 사랑을 정립해가는데 많은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기독교인과 성화...
구원과 성화는 철저히 하나님의 배타적인 은혜로 이루어진다고
알고 있습니다.
성화는 죽을 때 까지 이루어지는 평생의 과업이지요.
구원과 성화의 결과물의 일부가 윤리적인 삶이 아닌가요.
아무리 윤리적이고 교양적으로 살기를 원하지만
구원된 신분과는 별개로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죄성으로 인해
윤리적인 삶은 한계를 갖을 수 밖에 없다는 쪽으로 이해를 했습니다.
순간순간 고민하면서 윤리적으로 살아가야 하겠지만
때때로 넘어지더라도 본질을 의심치 말자는 말씀 아닌가요.
"테레사"수녀님께 여쭈어 보아도 온전히 윤리적인 삶을 살지 못했다고
대답하실 것 같습니다. 하물며....
내가 구원의 확신이 있음에도 기독교인 답지 못함에 항상 기도하며
변화시켜주실 것을 간구해야겠지만 그렇지 못하다고 실망치 말고
신앙적 정진을 계속하시자는..
제대로 이해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목사님의 글에 답이 있다고 생각도 해 봅니다. 샬롬

[레벨:3]삶에서..

2007.08.11 02:04:19

최근에 이런저런 사건과 관련한 반 기독교적인 반응들에 대한 답변같이 여겨지네요..
복음이 이데올로기화되는 것을 거부해야 하는 것처럼..
상식과 교양을 복음과 같은 선상에 놓고 보는 일들은 피해야겠지요..
잠시 헷갈리던 것들에 대한 좋은 교훈을 얻은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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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1]새하늘

2007.08.12 18:17:32

기독교 윤리(倫理)는 가능한 가?
불현듯 생각나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구분을 지며, 배타적으로 바라보는 것을 이제는 바꿔야 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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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2]정수학

2007.08.14 17:13:14

나의 모습이 보일 때마다 찾게되는 곳 입니다. 답답하고 무엇인지 모를 때 함께 고민하고 격려하는 곳이기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저도 주변사람들에게 권하지만 저희 아버님께도 보내드리고 싶어서 드래그 해보지만 안됩니다 승급 부탁드립니다.

[레벨:2]운영자

2007.08.14 17:40:38

coolman 님 승급 조치 해 드렸어요.
이젠 필요대로 마음껏 사용하세요~~~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7.08.14 23:06:08

위의 여러분들이 주신 대글, 감사삽니다.
일일이 대답을 드리기 어렵겠군요.
몇몇 분들이 정확하게 짚으셨습니다.
삶에서 님이 지적한대로
복음은 교양이 아니랍니다.
복음은 칭의론이지요.
칭의야말로 존재론적 변화의 토대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존재론적 변화는 어떤 실제적인 변화를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만 가능한 변화라고 할 수 있지요.
따라서 하나님만이 사람의 변화를 판단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판단할 수 있는 변화를 가리켜 존재론적 변화라고 말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율법이 되겠지요.
율법은 당연히 복음이 아니겠지요.

[레벨:0]폴김

2007.08.18 15:14:30

목사님의 글의 요지는 '윤리에 중심을 둔 설교를 하지 마라. 다 소용없는 짓이다. 그렇다고 해서 존재론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복음을 전하라.'인 것 같네요. 결국은 목회자들을 질타하는 글인 것 같습니다. 목회자들이 윤리에 중심을 둔 설교를 아무리 한들 결국 무늬만 변할뿐 존재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비평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목사님, 몇 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첫째, 예수님과 사도바울의 메세지 속에서 나타나는 윤리적 가르침들은 설교학적으로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까?
둘째, 기독교인의 윤리는 개인의 상식과 교양에 맡기고 교회에서는 무관심해도 되는 것입니까?
셋째, 설교를 듣는 사람들 중에는 존재론적 변화가 일어난 사람들도 있고 변화가 일어나지 않은 사람들도 있는데, 설교자는 항상 존재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은 사람들을 향해서 복음만을 선포해야 하는 것입니까?

한 명의 설교자로서 답답해서 하는 말입니다.
이 땅의 모든 목회자들이 교양과 상식을 복음과 착각해서 윤리적인 설교를 하신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땅의 목회자들을 너무 우습게 여기시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목회자들이 윤리적인 설교를 해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비윤리적으로 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존재의 변화가 일어난 사람들은 모두 다 온전히 윤리적인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어떻게 목사님 눈에는 한국교회의 나쁜 점들만 보이고 좋은 점들은 보이지 않는 것입니까?
답답합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7.08.18 22:53:34

폴김 님,
질문을 주신 건지,
논쟁을 하자는 건지,
아니면 저의 글쓰기 전체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으신 것인지
잘 분간이 가지 않는군요.
처음 뵙는 분 같은데요.
목사님이지요?
제가 한국교회의 나쁜 점만 지적하지 않았는데요.
바로 직전에 기상 8월호에서도 옥한흠 목사님의 좋은 점들을 많이 이야기 했구요.
그 이외에도 많습니다.
제가 모든 목사님들을 우습게 여긴 게 아닌데,
폴김 님은 사실관계에서 정확하지 않으시군요.
그냥 위의 질문만 하셨으면 좋았을 텐데,
다른 말씀이 많아서
정상적으로 대답해야 할지 조금 망설여지는군요.
제 글을 꼼꼼이 읽으셨다면
설교에서 윤리와 도덕 문제를 다루면 안된다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아실 겁니다.
윤리와 도덕은 그것 자체로 설교의 주체가 아니라
케리그마에 종속되는 것이라는 걸 말하려는 것이지요.
기독교 윤리학이 왜 필요 없겠어요?
다만 그것은 교의학적 토대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서와 바울 편지의 윤리적 지침들도 여전히
예수사건과의 연관에서만 설득력이 있습니다.
이런 문제는 여기서 다룰만큼 한가한 게 아니니까 접어두지요.
존재론적 변화에 대한 말씀은
폴김 님이 <존재>에 대한 이해를 정확하게 하지 않아서 나온 것 같습니다.
그 문제는 기본적으로 칭의론과 연관됩니다.
사람이 존재론적으로 변화되었는지 아닌지는 사람이 판단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목사님,
제 글을 보고 답답하셨다면
기분을 푸세요.
그리고 제 글이 불평불만을 쏟아놓은 것이라면
얼마가지 않아서 모두 쓰레기 통에 버려질 겁니다.
그러니 크게 염려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주의 은총이.
좋은 주일을!

[레벨:0]폴김

2007.08.18 23:55:23

윤리와 도덕은 그것 자체로 설교의 주제가 아니라
케리그마에 종속되는 것이라는 걸 말씀하시려는 의도시라면
굳이 글의 흐름이나 내용이 본문과 같을 필요가 있을까요?

제가 글을 잘못 읽지 않았다면
본문의 서론 부분의 문제 제기는 굳이 '설교'라는 주제로 이어지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삶과 격리된 신앙의 문제점은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고,
그 원인 또한 다각적으로 분석할 수 있습니다.
물론 설교자에게도 문제의 원인이 있음을 저 또한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굳이 설교에 초점을 맟추는 것은 의도적이라고 보여집니다.

문제는 글에서 풍기는 뉘앙스입니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 얼마나 깊이있는 글읽기를 하는 사람들인지는 모르겠지만
평범한 사람들이 읽는다면 한결같이 '그래 역시 설교가 문제야' 할 것입니다.

글의 몸 말에 대해서는 저도 대부분 동의합니다.
첫째, 윤리적인 설교로는 사람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과,
둘째, 복음은 윤리 너머의 차원이라는 것,
적어도 기본이 되어있는 설교자라면 누구나 다 동의하는 내용입니다.

제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첫째, 글의 몸 말이 아니라 연결고리입니다.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목사들은...'하는 부분은
아무리 읽어보아도 앞부분과 자연스러운 연결이 아니라 의도적인 연결처럼 보여집니다.
이전의 문제 제기와 자연스럽게 연결되기 보다 급작스러운 방향전환처럼 보여집니다.

둘째, 목사들에 대한 목사님의 주관적인 평가입니다.
윤리적인 설교를 하는 목사들은 복음과 윤리의 차이를 모르는 사람들처럼 몰아가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윤리적인 설교가 윤리적인 사람들을 만들어내지 못할 수도 있지만,
윤리적인 설교를 한다고 하여 복음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쉽게 판단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글은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는 도구이지만
또한 다른 사람들을 공격하는 날카로운 칼이기도 합니다.
목사님의 글은 단순한 전달 도구를 넘어서 공격적인 칼날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칼날도 보통 칼날이 아닌 예리한 칼날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칼 끝에 서있는 저 같은 사람이 과민한 반응을 보이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양해를 구합니다.

[레벨:2]知dom

2007.08.22 11:06:59

깨달음과 신선한것을 잘 구분하려고 노력중입니다. 듣고 흘릴 수 있는 내용일 수도 있지만, 여기서는 매우 심도 있는 대화가 오가는 것을 봅니다. 감사드립니다.
부탁이 있어서 글을 올립니다.
이 글들을 프린트해서 보고 있는데, 메일로 보내서, 메일에서 다시 편집하여 프린트 합니다. 앞의 coolman님과 같이 저도 승급해 주시면 않될까요? 부탁드립니다.

[레벨:1]진리,자유

2007.09.04 22:27:26

정목사님의 글은 '복음과 율법', '칭의와 성화' 같은 주제를 쉽게 풀어놓으신 것 같습니다.(아닌가?^^) 또 제가 본 바로는 프로테스탄트 정신과 온전히 부합하는 글이라 생각됩니다. 복음과 율법, 칭의와 성화의 주제와 관련해 바울(로마서 등)과 루터, 그 외 기독교 역사를 통해 정리되어 온 것들을 이해한다면 이 글이 파격적이거나 새로운 해석이 아닌 신앙과 신학의 정통위에 서있음을 쉽게 알 수 있을 듯 합니다.
'의인이자 동시에 죄인', '좋은 나무에서 좋은 열매가 맺힌다.' ... 루터의 칭의는 매일 매일 계속되는 칭의이고 이 칭의가 성화와 다름이 아니라는... 의식적인 윤리나 선행(제자화)의 몸부림은 율법의 2용법에 의해 죄를 가중시키고 진노의 하나님에게로 몰아간다는... 선행(윤리)은 진정 복음과 칭의의 자연스런 결과임에 전적인 동의를 던집니다. ^^

[레벨:0]불꽃남자

2007.09.07 00:39:13

목사님이 쓴 책에 대해서 알아 보던 중 우연스럽게 이곳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많은 글이 있는데, 우리가 몰랐던, 이해하기 어려웠던, 그리고 생각지도 못 한 글들이 많습니다.
그런 글들로 인해서, 제 삶속에 지표를 다시한번 되세겨보는 기회가 되었네요.
주님 안에서 축복합니다. 평안하십시오. ^^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7.09.08 00:03:40

불꽃남자 님,
반갑습니다.
자주 뵙겠습니다.
주의 은총이.

[레벨:0]정예린

2007.09.11 09:36:28

안녕하세요, 정용섭 목사님.
오늘 저희 목사님께서
정용섭 목사님께서 지으신 "속 빈 설교 꽉찬 설교"라는 책을 제게 내밀며 읽어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목사들 중에도 이렇게 똑똑한 사람이 있구나. 같이 교제를 하며 말씀을 나누면 참 재미 있겠구나." 하셨습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사실 이제껏 저희 목사님이 다른 목사님을 칭찬한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일이라
의아하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하여 책을 읽어보았습니다.
(저희 목사님은 목사님보다는 오히려 신부님과 스님들과 교제를 하는 것을 더 좋아하십니다.)
글을 읽어가며 제가 개인적으로 느낀 점은,
저희 목사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갖고 계신 가치관이 참 비슷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두 분의 연배도 비슷하시고, 갖고 계신 가치관도 비슷하시니,
정말 함께 모여 말씀을 나눠 보는 것은 어떨런지요?
저는 사실 그 모습이 너무나 기대되고 흥분됩니다.
저희 목사님의 이메일 주소는 wonsim@hanmail.net 입니다.
저희 목사님과의 교제로,
정용섭 목사님께서도, 우리 한국에 참으로 교제를 할 만한 목사가 있구나 기뻐하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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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7.09.09 18:02:05

정예린 님,
안녕하세요?
저와 종씨군요.
제 큰딸 이름은 정지예랍니다.
두 자가 같군요.
어떤 교회에 다니시는지 모르지만
담임 목사님이 신자에게 다른 목사의 책을 읽어보라고 주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참 특이하군요.
목사님이 아주 넓게 열려 있는 분이신 것 같습니다.
예린 님이 다니시는 교회가 어딘가요?
예린 님이 부천에 사시니, 그 근처 어디겠군요.
홈페이지가 있으면 알려주세요.
이렇게 다비아까지 방문해서 글을 주셨군요.
감사드리구요,
주님 안에서 계속 좋은 교제가 있기를 바랍니다.
주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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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1]새하늘

2007.09.10 16:24:44

기독교 윤리는 가능한가?
성숙한 신앙인에게 나오는 향기가 윤리가 아니런지요?
윤리가 복음보다는 앞설 순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보는 잣대는 종교적인 모습보다는 세상의 윤리로 기독교인들을 평가하려고 합니다.
공격적으로 폄하하는 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반대로 그렇게 쉽게 폄하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윤리적인지 묻고 싶을때가 목까지 차오를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문제가 있기 때문에 지적을 당하는 어쩔 수 없는 사실이 부끄러운 현실입니다.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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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7.09.11 09:49:32

새하늘 님,
오늘 한국사회에 비친 교회 모습이 참으로 답답하지요?
우리의 신앙생활이 너무 어수선합니다.
뭔가에 들떠 있는 것 같지요.
기독교인들이 말 그대로 소금과 누룩처럼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세상을 새롭게 하는 존재론적 힘에
사로잡힌 사람들로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어떻게 보면 지금 우리의 모습은 졸부같습니다.
자기 성찰은 전혀 없고
단지 자기를 과시하기만 하는지 모르지요.
그렇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읽히고 성례전이 수행된다면
교회는 여전히 종말론적 구원 공동체로서
그 역할을 감당하고 있을 겁니다.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성령이 활동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기를 기도해야겠구요.
희망을 잃지 맙시다.

[레벨:3]서영준

2007.09.17 23:27:59

기독교는 윤리가 아니라는 말도 어렵고 기독교는 윤리다라는 말도 어렵습니다. 오히려 기독교가 윤리라는 말과 어울려야 하는지를 먼저 생각해봅니다. 기독교 윤리 가능한가?라는 제목이 저로 하여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저는 한국 누가회 간사 서영준 이라고 합니다. 기독교 윤리라기 보다는 기독교가 절로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유형의 윤리라는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기독교가 굳이 윤리적일 필요도 없고 윤리라는 범주 안에 들어갈 필요가 있나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기독교는 기독교인것만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을 텐데 말이죠.......

[레벨:0]karis

2007.09.22 23:22:48

기독교가 윤리가 아니라 칭의론이란 기본적인 라인에서는 공감을 합니다.
우리도 모르게 윤리가 유교사상과 함께 너무 깊숙히 박혀 있어 옭고 그름이 너무 쉽게 주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나 비그리스도인이나 할 것 없이 자신의 결정을 가지고 자기의 인생을 살아나가기 보다는 사회나 주변 사람들이 기대하고 원하는 모습들을 기준으로 적당한 윤리를 가지고 사는 삶들이 많습니다.
그런면에서 기본적으로 자의, 즉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 할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지는 것도 중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교회안에서도 이미 맞는 대답들을, 인생을 살아가는 정답들을 먼저 던저 주어 버리는 일들이 너무나 많지 않습니까. 복음으로 인한 재해석이 거의 필요 없게 되지요.
사실 미국을 비롯한 서양에서는 이미 윤리라는 것이 거의 흔적을 찾기 힘들 정도로 힘을 많이 잃어버린 상태이지요. 하지만 신기한 것은 그런 사회에서 오히려 윤리를 넘어서는 더 적극적인 선을 이루는 예가 많다는 것입니다. 더 높은 기준의 예수님의 기준도 중요지만 아주 기본적인 자유와 본능적인 자의를 인정하고 보장해주는 분위기와 문화가 더 절실한 듯 싶습니다.

[레벨:2]나실맨

2007.09.27 23:27:43

안녕하세요. 처음으로 이렇게 글을 적어봅니다.
목사님의 설교에 대한 비평들을 접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가끔 홈피에 들러서 곶감 빼먹듯 목사님의 글을 읽고 있습니다.
존재론적 변화에 집중하시는 목사님의 글을 통해서 많은 깨달음을 얻고 있습니다.
이 변화는 궁극적으로 배타적인 생명사건이요,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부분이라면 목회자는 역시 복음을 전하고 말씀앞에 성도들이 설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이 제일 중요하겠지요. 다시 한번 숙연해집니다. 감사합니다.
목사님의 글을 퍼갈 수 있도록 염치없지만 등업 부탁립니다^^;

[레벨:2]운영자

2007.09.28 00:19:07

나실맨 님, 승급 조치 해 드렸습니다.
마음껏 퍼가세요~~~

[레벨:0]엉클캐빈

2007.12.28 10:48:18

위 주제의 글을 읽고, 댓글을 읽어오면서 올해 나왔던...영화 "밀양"이 생각났습니다. 그 영화에서 사실 저는 자기 아들을 죽인 살인자를 면회하면서 그의 고백을 듣고 신앙의 태도가 180도 바뀌어 버린 주인공(전도연 분)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그녀의 심정이 어떠한지 조금은 이해를 할 것 같습니다. 오늘 이 글들은 어쩌면 목사님께서도 말씀하셨던 바, 온갖 비리와 속임수로 남의 인생을 짓밟고도 떳떳히 살아가는 어떤 기독교인들에게는 복음이겠으나, 그들로부터 짓밟힌 사람들에게는 큰 상처가 될 것 같습니다. 오른편 강도가 주님과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을 저는 믿습니다. 한편, 영화에서의 그 살인자 역시 믿음을 입으로 시인하니 구원에 이를 것 같습니다. 저도 제 주변 사람들에게 목사님의 말씀과 같은 논조로 기회가 생길 때마다 이야기를 하곤 했었습니다만, 오늘은 그 영화의 여주인공의 자리에서 그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울러 나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은 없는지 내 삶을 돌아보는 하루가 될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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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8]정성훈

2008.02.28 09:11:49

어쨌거나 상식과 교양이라도 통하는 기독교인이 됩시다...
도대체 몰상식한 분들이 많으니 교양이라도 가지라고 말 하고 싶습니다..
복음은 그 다음에 하나님에게 맡기고요..

하늘과 땅

2008.04.26 07:57:51

참 감질나는 글이다. 동의도 하지만 참 답답하다. 뭔가 보여주면서도 보여주지 않는, 아니면 뭔가 보여주고 싶지만 보여줄 수 없는 글이다.
첫째로: 저자의 논리를 따른다 하더라도, 윤리가 복음 다음의 문제라면, 목사들이 교인들 보고 윤리를 설교할 때, 도대체 그것이 무엇이 문제가 되나? 논리적으로 볼 때, 목사가 교회 밖에서 교인들 아닌 사람들에게 윤리적 설교를 통해 그들에게 소위 ‘구원’을 설명한다면 문제 아닌가?
저자에 의하면 윤리는 “일종의 교양” 이고, “율법” 이다. ‘윤리’라는 단어가 왜 ‘율법’과 등치되어 져야 할까? ‘윤리’ 가 그저 “교양에 불과하다” 는 말에 양심적이고 지성적인 신학자들이 얼마나 동의를 할까? ‘복음’과 ‘율법’에 대한 저자의 이해는 ‘바울’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루터가 해석한 ‘바울’의 견해에 머물러 있다 보니 ‘윤리’에 대해 말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설명한다 해도 윤리는 “복음의 메타-윤리적 차원”에서 그냥 부수적으로 언급 되어 질뿐이다. 윤리는 ‘지푸라기’ 가치밖에 안된다. 결국 복음과 견주어 볼 때 윤리란 그저 지푸라기다. 그러니 윤리란 그저 교양일 밖에.

윤리가 그저 교양이고, 지푸라기 인지 바울의 증언을 한번 들어 보자 (갈5:19)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갈5:20)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갈5: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바울이 전에 경계한 것 같이 또 경계한단다.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 이런 일들이 무엇인가? 뭐 여러 가지 있지만, 분쟁, 시기, 분냄, 당 짓는 것, 분리함, 이단, 투기, 술 취함, 방탕함... 또 그와 같은 것들이 아닌가? 시기와 장소에 마다 ‘윤리’에 대한 단어의 정의가 다르겠지만, “이와 같은 것들”이 ‘윤리’의 카테고리에 들지 않는다면,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바울의 주장 앞에서, 목사가 ‘시기’하지 말라는 설교 안하게 되었는가? 함부로 ‘분내지’ 말라는 것 설교 안하게 되었는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라는 것이 그저 교양의 문제인가?
제대로 거듭나면, 아니면 제대로 실존적 변화가 일어나면, 윤리가 “발생”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지만, 윤리라는 것이 거듭나면 그저 발생할 것이라면, 바울은 전에도 경계하고, 이번에는 또 왜 경계하는가? 수신자가 누군가? 갈라디아 교인들 아닌가? 바울은 왜 교인들에게 윤리를 설교하는 어리석은 짓을 할까? 복음만 전하고 손 놓고 있으면 ‘윤리’가 발생할 바에 바울은 왜 쓸데없이 고대 사회에서 ‘양피지’ 구하기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고, 편지 ‘배달’하는 것도 만만치 않았을 테고, 편지 쓰는 일도 귀찮은 일이었을 텐데, 바울은 왜 그 많은 편지들 속에 윤리적 지침, 심지어 가정에서의 지침(Household code)까지, 종과 주인의 관계, 먹고 마시는 문제까지 구구절절 그렇게 기록했을까? 윤리가 그저 교양이고, 거듭나면 소위 “발생”하는 것이라면 바울 서신의 반은 없어져야 하는 것 아닌가? 뭐하러 바울은 애써서 삽질을 하는 것일까?

신학적 양심, 목회적 양심을 가지고 볼때, 나는 “윤리”는 교양이 아니고 그 사람의 “정체성”이라고 본다. 그 사람의 본질은 그 사람의 행위로 들어난다. 결국 “열매로 알리라” 하는 주님의 말씀이 맞다. 마태의 증언대로, 주여, 주여 아무리 해 봐야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들은 다 천국을 유업으로 받을 사람들이 아니다. 그가 복음주의자던, 복음 순정품 주의자든, 뭘 들이대든, 천국 문턱에 어림도 없다. 바울의 말과 전혀 틀리지 않지 않는가? 그리고 도대체 복음이 뭔가? 복음이 어디 예수님의 주민등록 등본 열람하고, 호적 등본 열람하는 일인가? 그 서류에 기록된 사항들을 달달 외우거나, 그 사실들만을 되뇌이는 것이 복음인가? 예수의 탄생과 죽음, 부활에 대한 사실들만이 복음인가? 복음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서, 서른해 가까이 사시며,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시어,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께서 재림하신다는 것, 소위 케리그마가 복음의 전부인가? 누가 그렇게 정했는가? 바울의 증언만이 전부인가? 사복음서에 도대체 케리그마적으로 정리된 복음이 얼마나 들어나는가? 히브리서에 나오는 믿음의 영웅들이 이 케리그마적 복음에 얼마만큼이나 가까운가?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임하였도다" 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삭개오는 얼마나 정리된 캐리그마적 믿음이 있었는가? 예수를 인격적으로 조우하고 삶이 바뀐것(조직신학의 선입견없이 읽는 다면, 윤리없던 인간이 윤리있는 인간이 된것이 삭개오의 실존적 변화의 핵심 아닌가?), 그것이 회개고, 그것이 구원의 선언으로 이어진것 아닌가? 성경기자들의 다양한 스펙트럼 가운데 들어나신 하나님의 아들, 그분의 전인격을 통해 들어난 모든 것이 통째로 복음이 아닌가? 여기에 복음 따로, 윤리 따로 있던가? 윤리적인 설교가 삽질하는 것이라면, 소위 말하는 케리그마적 설교도 삽질이다. 자기를 희생시켜 남을 살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자기 중심적으로, 소비를 통해 욕구를 채우기만 하는 자본주의 사회에 윤리의 정수가 아니면 무엇인가?
거듭난 갈라디아 교회, 고린도 교회, 에베소 교회, 로마교회에 바울이 복음만 전한 것이 아니라, 그 바탕위에 “윤리”를 주구장창 설교 했는데, 목사인 나도 “윤리”에 대해 설교를 좀 해야 겠다. 전에 경계한 것 같이 다시 경계하는데,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가 없다. 라고 말이다.
제 아무리 주여 주여 해도, 왕 믿음, 큰 믿음 갖고 있다고 우겨도,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고,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이게 그저 교양인가? 내게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목회자로서의 처절한 전투다.
바울의 노력에 의하면 윤리는 거듭났다고 그저 발생되는 무엇이 아닌 모양이다. 지금 여기서 ‘복음’의 능력, 구원의 방편으로서의 ‘복음’에 대해 시비를 거는 것이 아니다. 시비를 거는 건, ‘발생’ 이라는 단어다. ‘윤리는 복음 다음 이다 라는 전제 하에 소위 ’복음‘(그것도 편협한 복음)’ 만을 강조하는 태도다. 구속사적 설교 속에 구약을 자기 입맛대로 함부로 재단하고, 케리그마를 위해 사복음서를 제멋대로 갖다 부치는 해석에 대한 불만이다. 다양한 스펙트럼 가운데 있는 성경의 증언들을 다 존중하면 안되는가? 그리스도의 산상수훈을 케리그마적 복음으로 다 재단해야 속이 찰까?
여튼 나는 누가 뭐래도 교회에서 옹골차게 지속적으로 ‘윤리’에 대해 설교를 좀 하련다. 왜 그런가? 난 그들이 거듭난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서 그렇다. 그리고 그들이 예수님을 아직 믿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나는 하련다 왜 그런가?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언제나 케리그마적인 소위 ‘복음’만을 설교하셨는가? 그렇담 성경이 무지 얇겠다. 그분은 약자들을 고치시고, 마음이 상한자를 위로하시고, 도덕적인 감화와 가르침을 가르치시지 않았는가? 사람이 한방에 무조건 변하는가? 어떤 이들은 윤리적 가르침에 호감을 가지고 교회를 다니다. 나중에 소위 ‘복음’에 한방 맞을 것 아닌가? 그러니 내가 교회에서 윤리에 대해서 설교할 때, 복음을 남보다 소위 심도 있게 깨달았다고 하시는 분들 시비 좀 걸지 마시라. ‘폴김’님 말대로 목사가 ‘윤리’ 설교한다고 다 바보 같은 목사들은 아니다. 그리고 그들이 복음의 ‘정수’를 모르는 사람들도 아니다.
나도 복음을 깨달은 사람이고, 내 인생도 복음으로 완전히 뒤 바뀐 인생이고, 복음을 위해 내 죽도록 헌신할 사람이지만, 성경에 나오는 신앙의 선배들이 복음의 진리 뿐만 아니라 ‘윤리’를 그토록 강조-소위 협박까지 해가며(천국 못 간다고)-하니, 내 무슨 용가리 통뼈라고 나는 윤리를 쏙 빼놓겠나?

루터가 지푸라기로 여긴 야고보서의 증언에 의하면 율법이 우리를 자유하게 한단다. 그것을 실행하는 자가 복을 받는단다. 율법대로 심판도 받는 단다.“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약1:25)”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2:12)”

그리고 내가 해석한 바울에 의하면 그가 공격 타겟으로 삼고 있는 것은, 율법 자체가 아니라 율법으로 구원을 받으려 하는 사람들,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고 하는 사람들의 시도 또는 태도인데, 결국 그런 사람들의 결과가 무엇인가? “Boastful" 한 것 아닌가? 바울이 지속적으로 율법과 복음에 대해 말할 때 하는 질문이 ”자랑할 것이 무엇이뇨“ 아닌가? 율법을 통해 의롭게 되는 자들의 결론이 무엇인가? 자랑하는 것이다. 자신의 당대에 주어진 금지 항목의 리스트들을 들고, 남보다 좀더 지켰다고 자긍심에 빠져서 함부로 남을 정죄하는 것 아닌가? 바울의 주 타겟은 ‘율법’ 자체가 아니다. 율법이 죄냐? Not at all 이것이 바울의 답변이 아닌가? 심지어 바울에 의하면 "(롬7:12) "the law is holy, and the commandment is holy and just and good." 이다. 단지 인간의 연약함 가운데 죄가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인 것이다.

루터의 ‘율법’에 대한 해석은 그저 ‘이신칭의’ 교리의 제물이 되다보니, 결국 ‘윤리’를 ‘교양’이나 ‘율법’으로 등치시킬 수 밖에 없고, 그 논리에서는 윤리에 대해 떠들어봐야 별 건질 것도 없고, 건질 수도 없다. 진정한 '루터란' 은 윤리에 대해 좀 입을 다물어 주시라, 왜냐하면 그 신학으로는 윤리가 제대로 안 나온다. 그러니 그냥 잘 하시는 것 하셨으면 좋겠다.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양 여기시지는 마시라. 왜 그런가? 진정한 루터의 제자라면 윤리, 율법, 행위는 다 지푸라기일 뿐이니까 말이다. 그 해석학적 틀은 성경해석학의 전부는 아니지 않는가? 루터의 신학으로는 '이신칭의'의 고운 빛깔이 프리즘으로 예쁘게 들어날 뿐인데, 그걸 빛의 전부라고 하면 오만하지 않은가? 내가 왜 성경의 그 많은 증언들을 두고 루터를 따라 가야 하나. 정통이라서? 루터의 해석은 하나의 해석이지 바로 ‘그 해석’은 아니지않은가?

둘째로
“기독교 윤리는 신앙에 의한 하나의 귀결이다” 누가 모르나? “신앙의 중심”이 “존재론적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사건이고,” “윤리는 그 사건에서 창조적으로 발생한다.” 했는데 현 한국의 상황에서는, 그 윤리가 창조적으로 발생 안하는 걸 어쩌란 말인가? 어디 이것이 한 두 사람의 문제인가? 저자의 ‘도입부’ 글처럼, 한국 교회 전체가 떠안은 문제 아닌가? 그리고 ‘발생’이라는 표현은 마치 ‘복음’에 의해 거듭나기만 하면 ‘윤리’가 절로 나오는 듯한 뉘앙스를 풍긴다. 결국 이러한 표현은 “그럼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대부분 ‘복음’을 된통으로 접하지 못해서, 존재론적으로 제대로 거듭나지 않아서 그런 것은 아닌가?” 하는 교만한 질문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복음’의 가치를 높이면 높일수록 그분들이 타인의 '신앙‘ 에 대해 바리새인들의 태도를 가진 다는 것이다. 나는 소위 ’복음 중심주의(나의 정의다)‘ 속에서 서슬 퍼렇게 살아있는 바리새파의 우월주의를 똑같이 보게 된다. 구체적으로 표현은 안하지만 그들은 참으로 Boastful 하다. 그러니 '윤리' 설교 하는 사람들에 대해 할말이 많은 것 아닌가? 나는 ‘복음’에 대한 좀 더 나은 이해를 가지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함부로 판단하는 사람들을 볼 때, 소위 ‘진정한 복음’으로 무장된 사람들을 볼때, 바리새인들의 망령을 보게 된다.

다행이도 저자의 리플에 의하면 그 사람이 제대로 변했는지에 대한 판단은 하나님만이 하신다. 하지만 독자는 이렇게 읽을 수밖에 없다: 적어도 윤리를 떠들어 대는 진보, 보수의 목사들은 복음이 뭔지 제대로 모르는 사람이다 라고 말이다.

"기독교 윤리 가능한가?" 라는 주제로 "기독교 윤리의 근거가 복음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기독교 윤리가 "불가능성과 가능성" 사이에 놓여 있다는 이런 진술들이 '복음'으로 견고히 무장된채 진흙탕 속에 비윤리적으로 사는 한국 교인들에게 어떤 도움이 되는 진술일까? 무엇하나 대안이 되는 진술인가?
나는 이 글이 한국 교회에 선하게 미칠 영향력은 그저 “불가능성과 가능성” 사이에 놓여 있을 뿐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 표현 이거 결국 아무것도 아니지 않는가?

바울의 '율법(윤리)과 복음'의 논리로 가려면 끝까지 가야한다.
바울의 논리를 좀 더 따라 가보자.

바울은 갈라디아 5장에서 이전의 논의들을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하고 결론을 낸다. 그러면 바울이 여기서 갈라디아서를 끝내는가? 가능성과 불가능성에서 흑암가운데 윤리를 버려 두는가? 그렇지 않다. 바울은 여기서 대뜸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린다고 말한다((갈5:5) "For through the Spirit, by faith, we eagerly wait for the hope of righteousness" NRSV). 내가 볼 때, 바울에게 있어서 ‘윤리’는 성령과 떼어놓고 설명할 수가 없다. 복음이 윤리를 가능케 하는 씨앗이라면 그 윤리를 싹트게 하고 꽃피게 하는 것은 ‘성령’이다. 그러니 ‘복음’만 제대로 전하고 손을 떼면 “the hope of righteousness"는 물건너 간 것이다.
갈라디아서 5장 14절은 율법에 대한 바울의 또 다른 측면의 이해이다. (갈5:14) 율법은 그저 몽학선생만이 아니다. 율법은 몽학선생이기도 하지만, 바울의 율법이해는 이것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율법이해와 다를 바 없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을 허물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라, 복음서의 증언에 의하면 율법을 성취하러 오신 분이다. 율법은 충분한 계시에 있어서 부족한 것이지 나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예수는 율법을 성취하신다. 사실 바울의 예수 사건조차도 새로운 종교로의 Conversion 인지 히브리인으로서의 Prophetic calling인지 바울 신학자들 간에 합의 된바가 아직 없고 두 견해가 공존하고 있다. 여튼 율법이 선한 것이 아니라면 왜 주께서 그 율법을 성취하시는가? 사실 그 성취된 율법이 새율법(새계명)이다. 그가 주신 새율법은 전혀 새것이 아니라, 새롭게 십자가를 통해 더욱 뚜렷이 계시된 “서로 사랑하라” 이다. 이것이 이전에 없던 전혀 새것인가? 그렇지 않다. 바울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면 온 율법의 핵심은 이미 ‘사랑’이다. 근데 이것이 그리스도의 탄생과 생애 그리고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온전이 성취되신다. 그 새율법에서도 드러나는 바는 결국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14절에서 율법이 사랑이라고 요약한 뒤에 15절에서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라고 권면한다. 그러나 남을 사랑하는 것, 충심으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는 이것이 인간의 힘으로, 거저 거듭난 어린 영혼으로 어떻게 가능한가? “(갈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이것이 바울의 권면이다 성령을 좇아 행할 때 우리는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17절 부터는 성령의 사람과 육체의 사람들에 대한 바울의 날카로운 대조다. 이 둘은 대적한다. 결국 바울은 ‘성령’을 통해 기독교의 윤리, 행위를 풀어나간다. 그러나 바울의 논리를 조금 더 조심해서 살펴보라. 윤리를 안 전해도 되는 건지? 윤리가 그저 교양인지?

(갈5: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갈5: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갈5:19)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갈5:20)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갈5: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우리가 맺는 것은 두가지 이다. 육체의 열매 또는 성령의 열매, 성령의 열매가 복음만 전하면 제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바울이 왜 우리에게 성령을 따라 살아라고 쓸때 없이 자꾸 강조하고, 그렇지 않으면 ‘죽는다’고 협박까지 하는가?
성령으로 사는 삶이 그렇게 만만한 삶인가? 지속적인 리마인드 없이, 강단의 선포나 가르침, 나눔없이 그냥 되는 것인가? 복음서의 증언에 의하면 예수는 성령으로 우리에게 세례를 주시는 분이시다. 세례가 무엇인가?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다시 산다는 의미 아닌가? 나를 죽이는 일이 쉬운가? 쉬운일이라면 바울이 왜 자신을 날마다 죽여야 하는가? 나를 죽이는 일이 ‘성령’의 전능하신 사역이 아니고 가능한가? 바울은 왜 성령으로 충만하라 하는가? 한 때 이들이 성령 충만 했던 사람들 아닌가? 성령 충만이 한번 받고 끝나는 건가? 하지만 여기서 오순절 분들은 너무 흥분하지 마시라 여기서 논의 하고자하는 성령 충만은 그저 외형적으로 들어나는 ‘은사’와만 관련된 이야기는 아니니 말이다.
바울에 의하면 성령의 열매(단수)는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들이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성령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윤리’적인 사람이 되게 하신다. 그 어떤 종교 못지않게, 윤리적인 ‘인간’들이 되게 하신다. 성령의 은사들은 한국에 이미 넘쳤다 모자라서 문제가 아니라, 고린도 교회처럼 많아서 문제였다. 물론 보수 꼴통의 장로교는 좀 다를지 몰라도 말이다(필자가 여기 출신이라서....)
하지만 22절의 마지막 부분은 가히 충격적인 표현이다.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NRSV를 보면 “There is no law against such things.” 이것만큼 오역된 구절도 없지 않나 싶다. Such things 가 무엇인가? 성령의 열매의 특징들이다. 사실은 성령의 열매는 ‘단수’이다. 그 열매의 특성들이 Scuch things이다. 이런 것들과 반대되는 혹은 거스르는 율법이라는 건 없다는 뜻이다. 어찌보면, 바울은 '성령의 열매'와 '율법'이 서로 적군이 아니고, 아군이라는 것이다. 성령의 열매와 율법 같은 편이다. 성령의 열매의 특성들과 율법과 반대되는 것이 없다. 거스르는 것이 없다.
자세히 대조 해 보라, 바울은 14절에서 “the whole law is summed up in a single commandment, "You shall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라고 율법을 정리했다. 온 율법이 한 문장으로 summed up 되는데, 그건 '사랑'이다. 근데 성령의 열매가 무엇인가? 아무리 뜯어보아도 첫째 단어 ‘사랑’ 에 다름 아니다. 대부분의 특성들이 고린도 전서 13장이 묘사하는 '사랑 장'과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결국 22절 후반에서 바울은 이런 것들(성령의 열매의 특성들)은 율법과 반대되지 않는다. 거스르지 않는다고 결론 낸다. 율법도 '사랑'이고 성령도 '사랑'이다 왜 그런가 모두가 '사랑'이신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이런 상황에서 '율법' 이 꼭 천대를 받아야만 하는가? 결국 바울에 의하면 윤리가 어디서 오는가? 율법을 순종함이 어디서 오는가? 우리 속에 거하시는 성령, 율법을 파괴하지 않으시고, 온전히 성취하러 오셨고,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 그 성령을 통해서 우리도 율법을 성취한다. 그래서 성령의 사람들은 더 이상 율법아래 있지 않다.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갈5:18) 왜 그런가? 우리는 성령 아래 있기 때문이다. 성령이 율법을 성취하니 성령을 좇아 사는한 우리는 율법의 저주 아래 귀속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성령은 율법의 핵심, 정수를 성취하게 만든다. 그분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에게 성령을 좇아 살라고 말하고, 술취하지 말고 성령 충만 받으라고 말한다. 술에 취하던, 성령에 취하던, 취한 것에 우리는 영향을 받고 통제를 받는다. 근데 성령이 그저 기계적으로 일방향으로만 통하는가? 바울에 의하면 성령은 근심도 하시고, 우리 속에서 소멸되시기도 한다. 문자적으로 해석을 하든, 비유적으로 해석을 하든 우리가 그냥 가만히 있어서 될 노릇은 아니다.
성령을 좇아 사는 사람, 성령에 민감한 삶은 사는 삶이 ‘의지’없이 그저 되는가? 왜 기독교 신앙에서 ‘의지’는 이토록 천대를 받는가? ‘지정의’의 인격적인 존재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우리 인간일진대, 복음은 그저 ‘앎’으로 그치는가? ‘감정’에 도취되어 그저 자발적인 애정 표현으로만 그치는가? ‘의지’도 있어야 할 것 아닌가? 복음은 우리의 전인격에 호소한다. 우리는 전인격으로 예수님을 믿는다. 우리가 ‘믿게 되었던’, ‘믿었던’ 그 사건은 전인격적인 사건이다.
왜 그토록 ‘정통신학’은 ‘의지’에 대해 알러지 반응을 가지는 걸까? 정통 신학에 의하면, 우리의 불순종이 어디서 오게 되었나? 우리 인간이 왜 정죄를 받았나?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지로, 사탄의 꾀임을 받아 우리 의지로 우리가 악을 선택한 것이 아니었나? 그러면 결국 회개하라는 말씀은 우리의 ‘의지’적 결단으로 다시 돌아 오라는 메시지가 아닌가? 회개가 거저 감정적으로 눈물 흘리고, 도취되어, 지적으로 고무되어 해서 한꺼번에 사람이 통째로 변하는 수준만은 아니지 않는가? 의지도 동원되야 할 것 아닌가?
여튼 성령을 좇아 살지 않는 사람은, 그 반대편 육의 열매를 맺고 삶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 사람일 뿐인데, 비윤리적으로 사는 그들이 아무리 소위 복음의 그늘에 숨어 있다 할지라도, 복음서 기자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돌들로도 복음주의자들을 만들어 내시는 것이 될 것이고, 바울에 의하면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으리라.

아직 율법과 복음을 날카롭게 대조 시키며 구약의 사람들이나 바리새인들이 율법의 행함으로 구원을 시도했던 사람들이라고 믿는 순진한 사람들이 있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그들의 믿음이 얼마나 대단한가? 아브라함의 자손, 야곱의 자손인 자신들,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인 자신들만 구원을 받고 개같은 이방인이나, 사마리아인들은 구원의 문턱에도 오르지 못한다고 철썩같이, 굳건하게 믿음을 가진 자들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그 믿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삶 때문에 이방인 가운데 하나님의 이름이 멸시를 받는 지경이었다. 결국 이것이 히브리인들의 포로기이고, 멸망이고 하지 않았나? 이사야나 에스겔 구약의 많은 선지자들이 바라본 '구원'과 '회복'은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인 삶때문에 깨어진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의 회복이지 않았던가? 그 언약의 관계가 왜 깨어졌나? 종교적 열심의 상실도 아니고, 선택받은 민족에 대한 믿음의 부재도 아니고, 그들의 삶 때문이 아니었는가?

한국의 교회 상황이 복음의 진수를 덜 전해서 윤리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가? 한국 강단에서 복음을 전하는 목사들이 ‘복음’의 정수를 제대로 깨닫지 못해서 그렇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수없이 많이 봐왔다. 오직 예수!, 십자가의 도! 를 매주 목이 터져라 외쳐대며, 견고한 구원의 확신 가운데, 기독교를 ‘개독교’로 만든 대부분이 그 십자가의 복음 그늘아래 게토처럼 군집하고 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갈5:24)라는 문구 다음에 바울이 왜 또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갈5:25) 라고 논리를 이어 가는가? 신자가 성령으로 살지 않는 한 우리는 늘 예수만 십자가에 못을 박지, 그 예수로 은혜만 받지, 우리는 그 십자가에 오르지 않는다. 십자가 아래서만 십자가를 보게 되지 십자가 위에서 세상을 보지 않는다.
예수의 철철 흘리시는 보혈은 나의 구원, 나의 은혜, 내 생명을 담보해 주는 한 매일 죽으실수록 좋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나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는 자기 부인, 자기 죽음은, '세례'를 우리에게 주셨고, '세례'의 의미를 날마다 새롭게 하시는 성령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 나는 갈수록 요즘 바울을 읽을수록 그가 성령을 얼마나 강조했는가 하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특별히 롬 8장을 읽어보라 성령없이 뭐가 하나 가능한게 있나?

그저 성령안에 사는 삶이 아니라, 성령을 의지적으로 좇아 사는 삶속에, 기독교 윤리는 불가능성과 가능성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능성의 중심에 서 있으며, 성경의 신실한 증언에 의하면, 그 윤리 없이는 천국의 문턱에 어림도 없다.

제발 ‘복음’ 설교 안한고 ‘윤리’ 설교 한다고 너무 까대지 마시라. 제발, 소위 자기가 생각하는 ‘복음’의 개념(그것이 무엇이든)하나로 타인의 신앙과 성경의 다양한 해석과 적용들을 뭉게지 마시라.
목사로서 나는 단연코 한국 교회가 ‘복음’ 설교 한답시고 그저 복음 안에서 변죽만 울리는 두루뭉실한 윤리적 모호성을 유지하는 설교를 더 많이 하는 것이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기도의 골방에 들어갈 때마다 이 질문을 피할 길이 없다: “그럼 너만 잘났는가?”

그래서 결국 기독교 윤리에 대한 나의 생각도 하나의 '견해'임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이 댓글을 싸이월드 '복음주의' 의 '복음주의 신학 탐구: 신학단상과 메모 란에 올렸습니다. 올린 이유는 '복음' 이란 단어만 갖다부치면 장땡인가? 하는 느낌이 들어서 이런 현상들에 대해 논의를 좀 해보고자 하는 생각에 올립니다. 저의 생각 역시도 아직 '과정' 중에 있으니, 이런 저런 분들의 의견을 듣고 싶어서 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몇편(5편정도) 안되는 정용섭 목사님의 에세이를 읽었지만, 현재까지는 윤리의 부분을 제외하고는, 현 한국적 상황에서 그분의 활동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분 같은 분들이 훨씬 많아졌으면 하는 바램이 있습니다. 그래야 저 같은 목사들이 목회하고 설교 할때마다 정신이 버쩍 들지요.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8.04.26 23:46:42

하늘과땅 님,
굉장하십니다.
대글을 꼭지글보다 더 길게, 더 진지하게 쓰셨네요.
그건 보통의 내공이 아닙니다.
글을 끌고 갈 수 있는 힘이 있다는 뜻이니까요.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다보면 서로 통하는 부분들이 많을 겁니다.
위의 대글에 관해서 제가 긴 말씀을 드릴 건 없구요.
제 글을 오해하신 것 같아서 한 마디만 할께요.
설교에서 무조건 윤리가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니랍니다.
윤리가 나올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좋다는 뜻이지요.
이런 건 아마 인간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차이에서 서로 다른 주장을 할 수 있을 거에요.
저는 인간이 변하지 않는다는 쪽에 무게를 둡니다.
변하지 않을 인간을 향해서 자꾸 똑바로 살아라 하고 말해봐야
우이독경이라는 거지요.
존재가 바르게 되면 똑바로 살아라 말하지 않아도 그렇게 살게 되거든요.
인간의 변화하지 않으니까 우리에게 칭의가 필요한 거구요.
좋은 주일!

하늘과 땅

2008.05.14 23:33:19

"변하지 않을 인간을 향해서 자꾸 똑바로 살아라 하고 말해봐야 우이독경이라는" 것 인정합니다. 저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칭의'에 대한 지나친 강조와 관심으로 인해 발생하는 '성화'에 대한 '거룩한 근거리 목표(영화에 비해서)'에 대한 황망스런 무시의 상황을 지나치게 자주, 한국교회에서 목도하는 바, 제게 있어서 교회에서의 '윤리' 설교는 '성화'에 대한 목회적 관심이자 우리의 정체(Identity)에 대한 지속적인 '자기인식'입니다.

그리고 윤리를 설교하는 이유가 하나더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목사님과 저의 '차이'는 인간론에 대한 이해 보다, '복음'에 대한 이해의 폭 차이가 아닌가 싶습니다. 제게 있어서 '복음'은 윤리가 나올 수 있는 근거 이기도 하지만, '복음'안에 윤리가 같이 살고 있고, 분리 불가능입니다. 그 윤리는 인간의 '자기 의'를 위한 윤리도 아니고, 사회, 문화, 정치의 모든 판에 함부로 감놔라 팥놔라 하는 윤리도 아닙니다. 성경의 텍스트가 가는 만큼, 서는 만큼의 윤리입니다.
'윤리'설교 하시는 목회자들 중에 '복음'의 가치를 몰라서, '인간론'이 빈약해서' 또는 '달라서, '복음'의 본업에 충실하지 못하여 이런 등식... 이 불편했을 뿐입니다. '복음' 자체에 대한 해석적 '폭'이 다를 수 있음도 기억하셨으면 해서 몇자(꽤 올렸군요) 올렸습니다.

[레벨:4]지우파

2008.12.30 21:21:29

댓글들이 오래지났지만 '복음과 윤리'에 대해서 촛점이 자꾸 어긋나는것 같아 의견 올립니다.

이 문제는 근본적으로 예배 설교시간에 목사님은 예배드리는 교인들에게 뭔가를 주어야 하고 변화를 시켜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출발한다고 봅니다.
예배는 성도들만 드리고 목사님은 우월적인 위치에서 은혜를 내려주는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님과 성도들, 성가대 각각 자기 위치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것이 예배라고 생각합니다.
이 생각을 가진 어떤 목사님은 위에 단상위에 의자 놓고 앉지 않습니다. 회중의 자리에 모두 같이 앉아 있다가 설교시간에만 단상에 올라갑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면 목사님은 설교시간에 철저하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메시지에 집중할수밖에 없지않겠습니까?

윤리에 대한 설교자체가 불가하다는 것은아닙니다. 복음에 기초한 설교내용중에 부수적인 내용이 되어야한다는 정목사님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위 글에 '복음과 윤리'는 분리 불가한 것이라는 주장은 자칫하면 두가지를 동등선상에 놓은것처럼 오해될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믿어야 하는데 믿음이라는 것은 정신적이고 관념적인 것에 한정된 것 뿐만 아니라 실천이 따라야 합니다. 모두다 아시다시피 야고보서 2장 17절에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죽은 믿음이라' 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행함이라 하는 것은 윤리적인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을 폐하러 오신게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고 하셨지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으면 저절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게 될 것이고 기독교 윤리는 저절로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윤리는 복음에 종속적입니다.

복음에 대한 올바른 선포가 되어진다면 기독윤리에 대한 설교자들의 걱정은 기우에 불과하다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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