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와 일상의 과잉

조회 수 3531 추천 수 2 2008.09.15 23:26:58
설교와 일상의 과잉

작년까지는 이런저런 사정으로 제법 CBS 설교방송에 귀를 기울였지만 요즘은 거의 포기한 상태이다. 거기서 흘러나오는 설교라는 게 대부분 잡담이나 상식, 혹은 윤리적 교훈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오늘밤에도 혹시나 하고 라디오 채널을 그쪽으로 맞추었더니 기껏 한다는 말이 부부끼리 서로 섬기며 살라는 주문이었다.
언제부터인가 한국교회의 설교가 ‘일상’의 수준으로 떨어졌다. 자식교육, 부도 효도, 부부관계, 친구와 사회생활 같은 주제들이 자주 등장한다. 과거에 주로 추상적인 교리 설교가 더 이상 설득력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인지 거의 모든 설교가 일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일단 일상 중심의 설교는 나름의 호소력을 보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일반 청중들의 관심이 거의 일상에 집중되고 있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그 이상이라는 게 기복적이거나 열광적인 현상에 머물렀지만 이제는 약간 무늬를 다르게 해서 매우 교양적이고 세련된 일상으로 올라섰다. 기독교인이 세상 사람들보다 더 성실하고 모범적으로, 희생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점을, 그래야만 복음이 전파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런 일상 중심의 설교라고 하더라도 설교자의 수준에 따라서 정말 유치한 장광설에 머무는 경우도 있지만 때로는 매우 감동적으로 전달되는 경우도 있다. 이런 감동적인 설교는 대개 드라마틱한 ‘휴머니티’를 그 안에 담고 있다. 예컨대 아무도 돌보지 않는 장애인을 남모르게 돌보는 이야기라든지 믿지 않고 폭력적이었던 남편을 위해서 꾸준하게 기도하고 사랑을 베풀다가 결국 그 남편을 변화시킨 이야기 같은 것들이 그런 것들이다. 요즘 괜찮은 교회, 괜찮은 설교자가 있는 교회는 대개 이런 유의 설교가 행해진다.
이런 일상 중심의 설교는 아무리 감동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하더라도, 그리고 그런 일상이 아무리 고상한 인격의 설교자에 의해서 세련되게 포장되었다 하더라도 주일공동예배의 설교로서는 문제가 있다. 좀더 냉정하게 판단한다면 문제가 있는 정도가 아니라 그 이전에 있었던 기복설교나 열광주의설교 못지않을 정도로 문제가 심각하다.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문제가 있다. 하나는 설교자가 제시하는 일상에 대한 해결방법은 거의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이 말은 곧 어떤 한 사람의 일상은 제삼자가 간섭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다는 뜻이다. 예컨대 아내의 생일을 기억해서 축하해주라는 말은 부분적으로만 옳은 제안이다. 자녀들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체벌을 가하지 말고 사랑으로 감싸주라는 제안도 역시 결정된 대답이 아니라 부분적이고 제한적인 대답일 뿐이다. 거짓말 하지 말라든지, 탈세하지 말라는 요구도 역시 모든 사람들이 어떤 경우에도 반드시 지켜야할 절대적인 규범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거짓말과 탈세도 경우에 따라서 괜찮다는 말은 아니다. 설교자는 설교를 듣는 사람의 삶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가능한대로 구체적인 삶의 현장이 일상에 대한 언급은 삼가는 것이 옳다. 만약에 청중들을 초등학생 정도의 수준으로 생각한다면 그런 일상을 말할 수밖에 없겠지만 자신의 삶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 살아가려는 성숙한 사람들에게는 그런 말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또 하나의 다른 문제는 설교는 사람들의 일상을 교정하는 데 목표가 있는 게 아니라 케리그마를 선포하는 데 있다는 사실이다. 케리그마는 바로 인간과 역사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과 실천과 약속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의 일상이 교정됨으로써 실현되는 건 아니다. 그런 것과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사건이다. 출애굽 사건은 하나님이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유대인들의 일상과 믿음을 보고 구원하신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일방적인 행위였다.
그 행위가 일어나게 된 조건은 단 두 가지이다. 하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었던 약속을 하나님이 기억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유대인들의 고통소리를 하나님이 들으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 사건은 완전히 하나님에게 주도권이 있는 것이지 사람에게는 없다. 설교자는 그것을 선포하기만 하면 된다. 그런 하나님의 주도적 구원 행위가 역사적으로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에 오늘의 설교자는 이런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가능한대로 정확하게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들은 기독교인들이 좀 양심적으로 살고,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을 본받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많은 노력을 기울이면 상대적인 도덕적 우월성을 확보할 수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거의 차이가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행위와 이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설교와 일상이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는 말은 아니다.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깊이 인식하고 그 앞에서 삶을 새롭게 인식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일상은 변화될 것이다. 종교적인 변화가 일어난 사람과 그런 사회는 언제나 변화가 있었다. 그렇지만 이런 변화는 반드시 종교적인 경험만으로 가능한 것은 아니다. 탕자 같은 사람 중에서도 자기 딸의 효성에 감동해서 변화된 사람이 있다. 이런 일상의 변화는 기독교 신앙만이 아니라 여러 계기로 주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설교자는 이 일상을 주제로 삼는 일을 조심해야 한다.  
설교가 일상에 떨어지게 될 경우에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은 설교가 거의 ‘리더스 다이제스트’ 수준이나 휴먼 드라마 수준에 머문다는 것이다. 인류사에 나타났던 온갖 감동적인 휴머니티가 설교의 중심을 들어선다면 설교가 정작 천착해야 할 하나님의 구원 행위와 그런 사건은 형해화하고 만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교리적으로 완료된 상품으로 떨어지고 그것을 받은 사람들의 감동적인 일상의 변화만 득세하게 된다.
일상은 아무리 감동적이라고 하더라도 인간을 구원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런 일상은 두 번만 반복되면 우리를 지루하게 만든다. 설교자들이 이런 일상의 잡다한 이야기에 파묻혀서 하나님의 구원, 그 나라, 그 통치, 그 종말론적 성격에 대해서는 전혀 질문하지 않는다면 그 설교자의 설교가 얼마나 초라할지, 불을 보듯 분명하다. 만약 하나님의 나라를 심층적으로 접근하고 새로운 지평에서 해석해낼 수 있다면 굳이 감동적인 일상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청중들의 일상은 거룩한 길을 향해서 조금씩 변화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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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9]유니스

2008.09.18 13:52:32

개신교에는 리터지가 없다고 하셨는데
어려서부터 이 곳에서 성장한 저로서는
지금의 예배형태가 다라고 알고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압축적으로 상징하는 것이 없는 가운데
설교중심의 예배에서 성도들은 심적으로
설교를 향하여 의식이 고양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선포되는 설교가 '교양강좌스러운 일상'임을 알게될 때
얼마나 맥이 빠지는지...
이것도 설교의 시류라고 하시니 유행은 다 격어보네요.

하나님나라의 원리를 말씀하면
나머지는 알아서 일상에 적용할 수 있는데,
영혼을 터치만 해주시면
삶속에 그 파장이 흘러갈텐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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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8.09.18 23:22:27

다비아에 들어온지 얼마 안 된 초자이면서
대글의 수준은 고참과 비슷하네요.
하나님 나라에 집중하고 싶으시지요?
영혼의 깊이로 들어가고 싶으시지요?
그런 것이 없으면 인간은 결코 만족할 수 없답니다.
주님의 도우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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