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종말

조회 수 5758 추천 수 99 2004.06.30 22:38:06


역사와 종말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역사는 언젠가 끝날 것인가, 아니면 영원히 이렇게 계속될 것인가? 오늘 우리의 일상적 경험으로만 생각하면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다. 비록 50억년 후에 태양의 수명이 다 하면 인간이 살고 있는 지구라고 불리우는 이 작은 혹성도 일찌감히 끝장이 나겠지만, 그 50억년이라는 시간이 우리 한 인간의 인생 시간에 비하면 거의 무한에 가깝기 때문에 종말은 우리의 체감과는 한참이나 거리가 먼 것처럼 느껴진다. 어제의 태양이 오늘도 있다. 그 태양이 내일도 다시 동쪽에서 떠오를것이라는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느낌일 뿐이지 변할 수 없는 확실한 사실은 아니다. 오히려 내일 태양이 떠오르지 않을 수 있다는 개연성이 훨씬 높다. 현재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만 있으며, 역으로 현재 존재하지 않는 것이 존재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태양은 언젠가는, 아무리 길게 잡아도 50억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사라진다. 그것으로 우리의 모든 존재 근거도 끝이다.

물론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다. 우선 인간은 태양의 수명이 끝나기 이전에 자기 종족을 연장해나갈 수 있는 길을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른다고 말이다. 요즘과 같이 자연과학의 기술이 발전하는 속도를 생각한다면 1억년 쯤 후에는 우리 후손들이 우주 어느 곳인가 지구와 비슷한 환경의 혹성을 발견해서 이주할 수 있으리라고 추정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곳에서 영화의 한 장면을 보듯이 TV화면으로 지구가 폭발하는 마지막 순간을 감상하다가, 그 별의 수명이 다하면 또 다시 다른 별을 찾는 방식으로 인간 종족이 영원하게 생존해나갈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구와 비슷한 다른 별을 발견하기 전에, 또는 발견했다고 하더라도 그곳으로 이동할 수 있는 현실적인 기술이 발견되기 전에 지구와 그 생명체가 소멸될 수 있는 가능성은 너무나 많다. 지구에 다시 빙하기가 찾아온다든지, 혜성과의 충돌이라든지, 심지어는 핵전쟁 같은 방식으로도 지구와 인간의 문명은 아주 간단하게 해체된다. 어디 그것만이겠는가? 지구 온난화의 가속화, 악성 바이러스의 이상증식, 지구의 사막화, 연료 에너지의 고갈, 공기 구성비율의 파괴 등등. 이런 문제들은 사전에 예방이 가능한 것도 있긴 하지만 우리가 전혀 손을 쓰지 못할 것도 많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지구와 우주의 관계라는 것이 어느 순간 까지는 정상적인 것처럼 유지되다가도 그 순간을 넘어서기만 하면 우리의 통제에서 벗어난다는 점을 유의해야만 한다. 물이 99도이면 여전히 그대로 물이지만 100도가 되면 수증기가 되는 것처럼 미세한 차이에 의해서 우주와 지구의 생태적 균형이 유지되기도 하고 허물어지기도 한다는 말이다.

다른 한편으로 성서와 기독교도 역시 이 세계의 역사와 종말 문제를 핵심 주제로 삼고 있다. 우리 기독교에서는 이 세상이 그저 우연하게 생긴 게 아니라 어떤 의지가 작용해서 현상으로 드러났다고 본다. 그 창조의 순간으로부터 이 세계가 지금까지 지내왔으며, 종말 때까지만 존재하게 된다. 이런 기독교적 종말론에 의하면 이 세계는 늘 잠정적이고 무상하지 결코 영원한 가치가 있는 게 아니다. 영원하고 궁극적인 세계는 이 세계가 끝나고 다시 새롭게 시작된다. 역사의 종말은 곧 새로운 세계의 시작이다. 이를 가리켜 요한계시록은 새예루살렘이라고 부른다. 그 세계는 오늘의 이 세계와 어떻게 다른가? 이 역사가 단절되고 전혀 다른 세계가 시작되는가, 아니면 이 역사와 연속적인 관계를 맺는가?

여기서 우리는 어떤 인식론의 한계를 절감하게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는 단지 오늘 우리가 감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이것 뿐인데, 이것이 끝나고 새롭게 시작되는 세계를 우리가 인식하기는 참으로 어렵다. 사과 맛, 아카시아꽃 향기, 사회제도 같은 것으로 구성된 이 세계와 전혀 차원을 달리하는 세계를 생각해내기가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성서는 이 세상의 이런 생명의 차원이 아니라 전혀 다른 생명의 차원을 가리켜서 부활이라고 일컫고 있다. 아무리 아름답다고 하더라도 잠시 있다가 없어질 이런 생명이 아니라 변하지 않는 그런 궁극적 생명의 세계를, 즉 사랑 자체인 하나님과 늘 함께 있는 그런 세계를 말한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세계가 숙명처럼 안고 있는 죽음과 파멸의 그림자를 보긴하지만 그것과 전혀 다른 생명과 사랑의 세계를 확연하게는 보지 못한다. 바울의 고백처럼 지금 우리는 여전히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게 보며, 그러나 희망하며 산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세계와 역사를 절대화 해서도 안 되지만 동시에 종말을 주술화해서도 안 된다. 역사와 종말의 변증적 역동성은 그 무엇보다도 역사적 예수와 부활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신앙에 의해서 해석되고 확보될 수 있는데, 이것의 보편타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훨씬 많은 공부가 필요할 것이다. (정용섭)




[레벨:1]chung

2008.11.22 04:11:35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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