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적의(義)

조회 수 5245 추천 수 119 2004.06.30 22:38:39
                          

                              업적의(義)



종교개혁자들의 가장 중요한 신학적 관심은 <업적의>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데 있었다. 당시의 로마 가톨릭 교회는 1천5백년의 역사를 통해서 교회당 건물은 물론이고 신학체계나 여러 제도와 기구를 매우 장엄하고 견실하게, 또는 방만하게 운영하고 있었다. 이들은 급기야 베드로 성당 건축을 완성시키기 위해서 소위 <면죄부>라는 편법까지 동원하게 되었다. 인간이 의로워지기 위해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만이 아니라 그 믿음에 상당한 업적이 필요하다는 가톨릭 교회 당국의 가르침은 그 당시에 나름대로의 논리구조를 갖고 있긴했지만 종교개혁자들의 눈에는 그것이 자기의(義)에 불과했기 때문에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믿음>뿐이라는 사실을 강력하고 줄기차게 밀고 나갔다. 이런 교회사적 사태와 교리문제에 대해서는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근본적으로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그리고 오늘의 교회와 신앙생활에서는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별로 심각하게 고려되지 않는다. 여기에 바로 교회사와 조직신학이 만나야 할 자리가 있다. 과거의 교회사 공부를 통해서 그런 잘못이 반복되지 않도록 교회의 상태를 점검하는 것과 아울러서 조직신학 공부를 통해서 아직 교회의 역사에 모두 드러나지 않은 종말론적인 진리에 대한 전망을 유지하는 것이다.

지나가는 길에 한 마디 덧붙인다면 앞으로 신학은 좀더 통합적인 방식으로 전개되어야 할 것이다. 성서신학, 교회사, 조직신학, 실천신학이 각각의 독립된, 그래서 개별화된 주제와 방법론에 고립되는 게 아니라 비록 방법론의 차이는 어느 정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각각의 전문분야가 간(間)학문적으로 소통되는 길을 찾아야할 것이다. 원래 신학이라는 게 오늘처럼 거의 무관하게 세분화된 게 아니라 오히려 통전적 방식으로 기독교의 진리를 변증해 보려는 노력의 결과였기 때문에 신학은 앞으로 다시 이런 전통으로 돌아가는 게 훨씬 바람직 할 것이다.

어쨌든지 오늘 우리는 이 업적의(義) 문제가 어떤 실질적 내용을 담고 있는지 몇 가지 각도로 생각을 넓혀보자. 종교적인 차원에서만 보면 이미 바리새인들의 태도에서 업적의가 어떻게 자리를 잡고 있는지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들은 자타가 공히 인정할 정도로 의롭게 살았다. 정기적인 기도, 명상, 금식, 구제, 헌금 등, 그들의 삶은 그야말로 모범적이었다. 오늘 우리가 영성이라는 말로 일컫고 있는 그런 신앙적인 삶의 전형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회칠한 무덤이라고, 또는 소경이라고 말씀하셨다. 인간의 행위라는 것이 아무리 그럴듯하게 보인다고 하더라도 그것 자체로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예수님은 꿰뚫어 보셨다. 업적의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심리적으로 자기들의 행위가 인정받지 못할 때 분노에 사로잡히게 되는데, 아마 바리새인을 중심으로 한 유대교 고위층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해야겠다고 작심한 이유도 자신들의 종교적 기득권을 보장하지 않는 예수님의 행태에 대한 분노였을 것이다. 루터에 대한 당시 로마 가톨릭 당국의 반응도 역시 이런 구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 문제는 종교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자신들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는 이 시대의 세속적 삶에 그대로 적용된다. 학문의 열정이라는 것도 순수하게 학문 자체에 있는 경우보다는 그것을 통해서 어떻게 자신의 정당성을 드러내는가에 놓여 있다. 윤리적으로 사는 것도 역시 그렇다. 우리들이 파렴치범이나 반사회범들을 비난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들보다 의롭다는 생각이 전제되기 때문이다. 엄격히 말해서 종교에서는 얼마나 윤리적인가, 또는 그 사회의 기준에 얼마나 적합한가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인간은 자기가 아무리 노력해도 의로워질 수 없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미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이런 인간의 본질을 해명하고 있다.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그 행위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이다. 우리는 자기 희생과 사랑을 똑같은 것으로 생각하지만 바울을 그것을 엄격하게 구별했다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자기의 전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는 행위는 본받을만한 것이긴 하지만 그것 자체가 의로운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때에 따라서 자신의 열등감이나 아무도 모를 개인의 죄책감을 보상받기 위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성서와 기독교는 인간이 겉으로 드러난 그 어떤 선한 행위로도 의로워질 수는 없다고 선언한다. 그런 노력들은 오히려 우리가 이룰 수 없는 절대의 상태에 도달해보려는 헛수고일 뿐이다. 그것보다는 무력한 상태, 그리고 부도덕한 상태 그대로 어떤 생명의 세계에 들어가는 게 우선적으로 필요하다. 그런 세계를 경험한 사람은 그때부터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공급받게 될 것이다. 자기의(義), 업적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전가된 의를 통해서 말이다(칼빈). 정용섭




[레벨:0]서우정

2006.01.22 17:56:44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레벨:0]世田谷の靑空

2007.01.30 12:19:48

단어의 의미를 잘 모르겠습니다. 업접의, 자기의 라는 단어의 정의를 좀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profile

[레벨:41]새하늘

2007.08.11 11:33:38

가슴에 와 닿는 내용입니다.
스스로의 당착에 빠진 것이, 교회에서의 제 업적에 대한 자부심입니다.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빠져 버려 정작 중요한 것을 잃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통해 이루신 선은 결코 인간 자신을 높은 위치에 올려 놓는것이 아니라, 내가 이루어 놓은 교회에서의 업적을 통한 기득권을 포기하라는 뜻도 포함된다고 생각합니다.
업적을 통한 기득권....
요즈음 교계에서 이루어지는 여러 현상들이 머리속에서 교차합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20 유신론과 무신론 [1] 2004-07-01 4763
19 하나님은 말씀하시는가? [2] 2004-07-01 5419
18 예수의 메시아 인식 2004-07-01 4849
17 하나님과 도(道) [1] 2004-07-01 4610
16 예수의 메시아 인식 [1] 2004-07-01 5863
15 하나님의 인격성 [1] 2004-07-01 7944
14 종말론적 공동체 [1] 2004-07-01 5590
13 무죄한 자의 고난 [5] 2004-07-01 5185
12 타종교 [2] 2004-07-01 7187
11 부활 [2] 2004-07-01 5820
10 신학과 영성 [2] 2004-06-30 4980
9 성서주석과 성서해석 [3] 2004-06-30 5462
8 신학자 2004-06-30 4523
7 과학과 신학 2004-06-30 5031
6 하나님의 은폐성 2004-06-30 5537
5 혁명, 개혁, 개량 [1] 2004-06-30 5336
» 업적의(義) [3] 2004-06-30 5245
3 하나님의 자기계시 [2] 2004-06-30 7097
2 역사와 종말 [1] 2004-06-30 5758
1 구원은 소유인가 존재인가? [5] 2004-06-14 8952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