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 개혁, 개량

조회 수 5336 추천 수 149 2004.06.30 22:38:57


혁명, 개혁, 개량



베를린에서 7시 방향으로 대충 한 시간 여 정도 운전하다보면  일명 "루터 슈타트"(루터市)라고도 불리는 엘베강가의 "비텐베르크"가 나온다. 베를린은 말할 것도 없고, 포츠담이나, 할레, 라이프찌히, 막데부르크 같은 부근의 다른 도시에 비해서 훨씬 작은 이 비텐베르크가 유명한 이유는 단 한 가지, 마틴 루터 때문이다. 마틴 루터 박사는 1517년 10월31일 그 비텐베르크 성당의 출입구 위에 95개조항의 대자보를 내다걸었다. 루터가 34살이 채 못되었을 때였다. 이 날의 사건을 종교개혁의 도화선으로 삼은 교회사가들 덕분에 오늘 우리 종교개혁의 후예들은 매년 10월 마지막 주일을 종교개혁 기념 주일로 삼고 있다. 물론 루터 자신은 그런 역사적 의식 없이 이런 일을 시작했겠지만 말이다.

마틴 루터가 이런 행동을 취할 수 밖에 없었던 그당시의 로마가톨릭 교회의 정황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굳이 설명하지 않겠다. 다만 루터의 종교개혁이 뮌쩌에 비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쯔빙글리에 비해서도 미온적이고 여전히 보수적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 중심은 확실히 개혁적이라는 점만은 분명히 해야한다. 루터의 신학은 뮌쩌처럼 사회혁명을 불러일으키지는 않았지만 그런 혁명이 가능하게 하는 어떤 잠재력을 담고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내가 교회사가가 아니기 때문에 정확하게는 알 수 없어도, 마틴 루터와는 다른 방식으로 로마 가톨릭 교회를 바꿔보려는 시도가, 예컨대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로 로마 가톨릭 내부에서 일어난 반종교개혁 운동 같은 것들이 분명히 많았을 것이다. 아마 대다수의 당시 신학자들은 로마 가톨릭의 행태를 개량하는 것으로써 자신들의 역할을 다 하는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혁명은 말 그대로 기존의 체제를 완전히 부정하고 새로운 체제를 구축하려는 운동이다. 프랑스 혁명, 볼쉐비키 혁명, 또는 동학 혁명 등이 그런 것들이다. 그 혁명이 성공하게 되면 그 혁명의 대상은 완전히 해체된다. 교회사적인 면에서 보더라도 종교개혁을 혁명으로 여기던 이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정착시키기 위해서 성당의 기물을 파괴하기도 했으며, 급기야 전쟁도 불사했다. 혁명이 목적지향적이고 급진적이라고 한다면 개혁은 비교적 목적과 과정을 더불어 생각하면서 내면적인 변화를 모색하는 운동이라 할 수 있다. 마틴 루터는 급진주의자들에게서 적지 않은 욕을 먹었는데, 그 이유는 너무 기존 체제와 타협적인 자세를 보였기 때문이다. 특히 사회윤리적인 면에서 그가 보인 이중성, 또는 두왕국론은 철저하게 반개혁적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런 개혁운동은 그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이 온건할 뿐이지 내면적으로 혁명 못지 않게 과격하다. 개량은 기존의 체제를 거의 답습하면서, 그 목적에 동의하면서 그 방식을 약간씩 고쳐나간다는 뜻이다. 개량 한복이라는 말이 있듯이 기존의 것을 실사구시의 원칙에 따라서 개량하면 된다. 그런데 이 세 입장이 늘 완연하게 구별되는 게 아닐 뿐만 아니라 어느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그 색깔이 달라진다. 혁명적인 입장에서 보면 개혁은 개량에 불과하며, 개량의 입장에서 보면 개혁은 혁명으로 보인다.

여기서 종교개혁이라는 영어 단어 "Reformation"에 대한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이 단어의 구조만 생각한다면 종교개혁은 단지 "form"(형식)을 갱신한다는 뜻으로 보이는데 원래는 그렇지 않다. 오히려 형식을 어느 정도 인정한다고 해도 근본적인 것을 새롭게, 다시 한다는 뜻으로 보아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과 질료" 개념에서 보더라도,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형식은 "질료"(matterial)이며,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근원적인 힘은 "형상"(form)이다. 따라서 "Reformation"은 형식을 바꾸는 것이라기 보다는 근본 생각을 바꾸는 것이다. 형식만 바꾸는 것은 오히려 개량주의에 가깝다.

종교개혁 485주년을 맞는 우리 한국 개신교는 혁명적인가, 개혁적인가, 개량적인가? 겉모습은 개혁적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거의 개량주의에 머물고 있다. 예컨대 교회가 복지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요청때문인지는 몰라도 언제부터인가 많은 대형교회가 복지관을 설립하고 있다. 이런 행태 자체를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런 복지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으로 교회의 사회적인 책임이 면책되는 것처럼 여기거나, 심지어는 그것을 교회발전의 수단으로 삼으려는 의식을 지적한 것뿐이다. 우리 개신교회가 이런 방식으로는 결코 로마 가톨릭교회를 따라잡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런 것에 힘을 소진함으로써 더 근본적인 과업을 놓쳐버리면 안 된다. 하나님 나라가 얼마나 근본적이고 얼마나 철저한지 우리의 모든 삶에서 확인해야만 한다는 말이다. 이런 하나님 나라를 화두로 삼는 기독교 신앙은 교양이나 계몽이나 윤리, 봉사에 머물러 있을 수 없고, 끊임없이 전적인 회심(메타노이아)에 연결되어야만 한다. 이 회심이 바로 혁명이고 개혁이다.  정용섭




[레벨:8]流水不爭先

2007.07.08 09:33:33

아멘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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