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신학

조회 수 5032 추천 수 104 2004.06.30 23:39:15


과학과 신학



과학과 신학 사이의 논점을 보다 명확하게 들여다보기 위해서 우선 진화론과 창조론의 논쟁에서부터 풀어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창조와 진화에 대한 문제는 1859년에 다윈이 쓴 <종의 기원>에 의해서 격렬한 논쟁의 주제가 된 다음에 지금까지 150년 가까이 기독교인들의 마음을 매우 불편하게 만들었다. 창조론자들은 이 세상이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된 것이라고 주장하며, 진화론자들은 자연의 진화 질서에 의해서 발생한 것이라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양측 사이에는 흡사 기차 레일처럼 그 어디에도 접점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 이 창조, 진화 논쟁은 "전부 아니면 전무"(제로섬 게임)라는 틀 안에 갇혀있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인들 중에서도 "창조과학회"에 속한 이들처럼 근본주의적인 창조론자들이 아니라면 진화론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물론 창조과학회도 역시 종 사이의 진화를 반대하는 것이지 부분적인 진화 현상 자체까지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진화론자들 중에서도 창조론을 근본적으로 부정하지 않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진화의 과정을 창조 행위로 볼 수 있으니까 말이다.

최근에 한국의 창조과학회는 노아의 방주가 남아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터어키의 아라랏 산을 탐사하기 위해서 자원자를 모집했다. 이미 오래 전에 미국의 창조과학회가 이런 탐사 작업을 전개한 적이 있다. 노아 방주의 파편이라며 나무 토막을 그 증거물로 내놓기도 했다. 창조과학회 회원들은 이스라엘이 아모리 족속과 전쟁할 때 태양과 달을 멈추게 해달라는 여호수아의 기도가 성취된 증거를 약간의 우주 물리학적 증빙을 통해서 사실이라고 강변한다. 물론 그들의 주장 자체가 과학적으로도 모호하거나 일방적인 것이겠지만 설령 과학적 타당성이 어느 정도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반드시 신앙적으로 바른 태도가 될 수는 없다. 특히 모든 문제를 믿으면 된다는 식으로 접근하고 있는 한국 기독교인의 정서적 경향때문에 이런 근본주의적 행태가 상당 부분 수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이런 행태는 아무리 굳은 믿음이라고 하더라도 건강한 기독교 신앙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그 이유는 성서를 통해서 과학을 재단하는 그들의 일이 정당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서는 객관적인 과학 사실을 논증하는 문서가 아니라 그것의 근원에 대한 영적인 체험의 진술이다. 즉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바른 태도를 가르치고 있지 창조의 구체적인 방식을 논증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따라서 성서와 기독교의 2천년 역사에는 과학적 사실에 대한 오해가 적지 않았다. 성서 기자들은 과학자들이라기 보다는 역사가이며 신학자들이라는 점에서 하늘과 땅과 지하라는 삼층 구조의 우주관을 따를 수 밖에 없었다. 루터가 지동설주의자들을 비난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보더라도 역시 신학자들은 과학에 대한 섣부른 판정을 조심할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과학과 종교(신학)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자연과학자들과 인문학자들을 맹목적인 신앙으로 압박을 가하던 기독교가 근대주의 이후로 더 이상 그런 권위가 먹혀들지 않게 되자 이 세상 학문과의 사이에 담을 쌓아버리고 개인의 주관적 실존에만 신앙의 중심을 두게 되었는데, 이것도 역시 바람직한 태도는 아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분명히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의 창조물이기 때문이다.

과학자와 신학자는 분명히 다른 영역에 관심을 두고 있지만 결국은 하나의 대상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과학과 신학은 같은 길을 간다. 과학은 이 세상의 물리적 현상을 분석함으로써 그것의 궁극적인 내용에 접근하는 것이며,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와 기독교의 역사에서 이해된 도그마에 근거해서 오늘의 세계를 분석함으로써 그 모든 것의 근원자에게 접근하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진화론만 해도 그렇다. 생물학자들은 그 진화의 현상을 세밀하게 분석함으로써 그 현상을 가능하게 하는 원래의 힘을 찾아갈 수 있다. 물질의 근원을 해명해나가는 물리학도 역시 원자와 그것보다 작은 소립자의 세계를 분석함으로써 그것을 초월하는 어떤 힘을 드러내는 것이다. 과학자들이 생명의 근원이라고 부르는 그것을 훨씬 타당하게 풀어낼 수 있다면 우리 신학자들은 그들의 도움으로 그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을 이 세상에 훨씬 명쾌하게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과학과 신학이 늘 이렇게 상부상조한다는 말은 아니다. 적지 않는 과학자들은 이 과학의 원리를 절대화함으로써 인격적 존재라고 일컬어지는 하나님을 부정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과학이라는 것이 어떤 원리와 사실을 밝혀내는 그 순간에 그것보다 더 깊은 어떤 것이 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는 점에서 자신들의 과학을 통해서 절대 생명의 근원자라할 하나님을 부정할 수는 없다. 여기서 우리 신학자들은 공연히 잘 알지도 못하는 과학 행위 자체를 놓고 그들과의 부질없는 논쟁에 빠져들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과학적 노력에 근본적인 방향을 제시해주는 것으로 우리의 역할을 제한해야만 할 것이다. 이런 역할은 소극적인 게 아니라 종말론적인 면에서 신학의 한계를 전제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이 세상의 모든 학문을 하나의 진리로 집중시키는 적극적인 과업이다. (정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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