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자

조회 수 4524 추천 수 119 2004.06.30 23:39:27


신학자



철학자나 생명공학자라는 용어가 있듯이 신학자라는 용어도 있기는 한데, 엄격한 의미에서 이 용어가 성립되는지는 잘 모르겠다. 철학이나 생명공학이라는 학문은 다루어야 할 대상이 나름대로 명확한 반면에 신학은 그 대상이 분명하지 않다는 점에서 그렇다. 신학(神學)은 신(神)에 대한 학(學)이다. 신학자는 바로 신을 학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이 신을 인식할 수 없다는 데에 있다. 만약에 신을 명증하게 인식했다고 생각한다면 그 인식은 그 순간에 신으로부터 멀어진 것이다. 왜냐하면 신은 우리가 인식하고 체감할 수 있는 이런 존재방식을 초월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여기 유치원 어린아이가 있다고 하자. 그 아이는 10까지의 숫자만 인식할 수 있다. 할아버지가 "사탕을 몇 개 주랴?"하면 열 개라고 대답한다. 이런 아이에게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풀어보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근본적으로 10이라는 숫자 안에서만 생각하는 아이와 같기 때문에 그 숫자 너머에 있는, 당연히 너머에 있어야만 하는 신을 배울(學) 수 없을 것이다.

물론 호모 사피엔스로 일컬어지는 인간의 사유능력이 오늘의 문명을 만들어냈고, 급기야 유전공학을 통해서 신의 영역이라 할 생명창조에 까지 이르렀다는 점에서 인간의 인식능력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 앞으로 이러한 인간의 문명이 스스로 파멸의 길을 가게될지 아니면 또 다른 돌파구를 찾아낼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어쨌든지 어떤 현상을 분석하고 인식하고 판단하는 인간의 능력이 출중하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인간은 이런 방식과 현상 이외의 세계에 대해서는 너무나 무지하다.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물질은 고체, 액체, 기체로 구성되어 있는데, 다른 방식의 물질에 대해서는 도저히 알 수가 없다. 더구나 어떤 물질이 존재하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 모를뿐만 아니라 그런 물질현상이 시간에 의해서만 가능한 그 이유를 우리는 인식할 수 없다. 물론 이런 문제들도 물리학이 발달하게 되면 풀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모르겠지만 더 근본적으로 "있음"과 "없음"의 상관관계를 모른다는 점에서 우리의 물리학은 어떤 근본적인 한계를 극복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철학적 질문에까지 갈 필요도 없이 인간의 인식능력이 얼마나 하잘 것 없는지는 우리의 작은 일상 경험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인간이 시각을 잃으면 아무리 위험한 물체가 자기 얼굴에 다가와도 피하지 않는다. 중국집 주방장이 아무리 불결하게 조리했더라도 우리는 아무 생각없이 자장면을 먹는다. 때로는 온갖 대장균이 득실거리는 음료수를 마시다가 병을 얻기도 한다. 잘 알다시피 인간의 청각이 구분해낼 수 있는 주파수만 우리 귀에 들린다. 너무 크거나 작은 소리는 우리의 인식능력에서 벗어난다. 그래서 우리 몸으로 감지해낼 수 없는 대상을 현미경이나 약품 등을 사용해서 다루고 있긴 하지만 그것도 역시 어떤 한계 안에서만 가능할 뿐이다.

이런 점에서 세계는 신비 자체다. 누가 마술을 부린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인식 한계를 벗어난다는 점에서 신비이다. 인간이 출생하고 병들고 죽고, 사랑하고 미워하며 살아가는 것도 역시 신비다. 한 개인이나 전체 인류의 운명이 이렇게 진행된 것이나 앞으로 진행될 모든 것이 한결같이 신비일 수 밖에 없다. 이는 곧 그 모든 것이 우리의 계산(인식)에서 벗어나 있다는 말이다. 셰익스피어가 자기 작품에서 죽은 혼령이나 요정들을 등장시키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성서에서도 하나님은 신비한 능력을 가진 분으로 묘사된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의 화산 폭발이나 대홍수 경험은 이런 신비한 능력을 가진 분의 사건으로 이해되었다. 성서의 어느 한 구절도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았다. 인간은 하나님을 볼 수도 없었다. 10이라는 범주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무한을 이해할 수도, 만나볼 수도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신학은 아예 불가능한 학문인가? 또는 칸트가 말하는대로 윤리적 요청에 답하는 학문인가? 불가지론이나 윤리적 요청은 신학이 서야할 자리가 아니다. 신학은 물리학이나 경제학처럼 물리적 현상이나 경제현상으로부터 시작해서 그것자체를 연구하는 게 아니라 신의 계시로부터 시작해서 이 세상 현상을 규정하는 학문이다. 이런 점에서 신학은 계시(Offenbarung)론이다. 비록 우리가 10이라는 숫자 안에서만 생각하는 어린아이들이지만 신이 10이라는 그 숫자의 방식으로 자신을 내보이고 있다는 전제가 있기 때문에 신학이 가능하다.

소박한 신자들은 신학을 그렇게 복잡한 학문으로 규정할 필요가 있는가 하고 질문할 것이다. 그저 성서를 바르게 풀어내고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 게 바로 신학과 교회의 사명이 아니냐하고 말이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모르고 구원을 말할 수 없으며, 또한 성서 자체가 구원의 하나님을 어떤 체계나 원리로 말하지 않고 늘 그런 인간의 구도와 계획을 뛰어넘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교회와 기독교인들은 부득이 자신의 자리를 이런 우주론적 차원에서 검토해나가야만 한다. 예컨대 역사적 예수가 "로고스"로서 창조사건 때 이미 존재했다는 요한의 증언에는 분명히 신학적 이해가 담겨 있다. 신학자들에게는 이런 진술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보편적인 설득력을 확보할 수 있는지 설명하고 변증해야 할 책임이 있다. (정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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