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주석과 성서해석

조회 수 5463 추천 수 96 2004.06.30 23:39:39




         성서주석과 성서해석



하나님의 말씀을 신자들이 알아듣도록 전하는 목회 행위인 설교는 말씀과 청중, 또는 텍스트와 컨텍스트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정통적인 입장에 있는 사람은 말씀과 텍스트를 중요하게 생각할 것이고 현대적인 감각을 가진 사람은 청중과 컨텍스에 무게를 두고 설교할 것이다. 어느 쪽이 옳은가, 더 중요한가 하는 문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텍스트와 컨텍스트 문제는 우리의 인식론적 편의를 위해서 구분했을 뿐이지 근본적으로 하나의 사태다. 텍스트는 늘 컨텍스트를 담고 있으면, 컨텍스트는 늘 텍스트에서 해석되기 때문이다. 이런 상호성 가운데서 접근하지 않고 어느 한쪽에 치우쳐서 설교를 하게 되면 근본이 취약해진다.

어떤 설교자는 성서 안에서 우리의 삶에 그 어떤 현실성도 없는 이야기만 전달하고 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서의 정보를 낱낱이 꿰고 있지만 이런 설교는 텍스트의 범주에 갇혀 있는 셈이다. 이런 설교는 청중들의 성서지식만 확대시키지 신앙의 성숙으로 끌어내지 못한다. 그런데 이런 텍스트 중심의 설교보다 훨씬 바람직하지 못한 것은 컨텍스트에 사로잡혀 있는 설교다. 이들은 성서 구절을 명분으로 내세우고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요령만 모색한다. 구원, 성령, 기도, 믿음 등, 우리에게 익숙한 기독교적인 용어를 나열하면서, 실제로는 오늘의 부박한 시대정신이 자극하는 삶의 처세술을 선전하는 것이다.

우리의 설교 강단이 이렇게 양극단에 치우쳐 있으면서 실제로 성서의 본질에서 멀어진 이유는 이 시대 정신에 너무나 성급하게 영합한다는 데에 있다. 도시의 중산층 교회에서 매력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설교주제인 복지문제를 예로 들어보자. 교회가 이 사회의 복지문제에 최대한의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설교에 좋은 반응을 보인다. 이것은 바로 설교자와 청중이 빠져들기 가장 쉽고 어리석은 함정이다. 기독교라는 것이 기껏해야 착하게 살고, 봉사 잘 하고, 이 세상의 복지 향상을 위해서 존재하는 종교라고 한다면 얼마나 허탈한가? 우리의 삶에 별로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복지를 애물단지처럼 여긴다는 것은 설교의 근본이 상실되었다는 증거다. 물론 우리가 양심적으로, 윤리적으로 살고 우리의 세계를 복지사회로 발전시켜나가는 것은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우리가 감당해야할 당연한 의무이지만 교회의 본질에 속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따라서 교회의 본질에 천착해야할 설교는 그런 것과는 전혀 다른 토대에 놓여있어야 한다. 설교의 토대가 주변적인 것에 머물게 된 문제점이 어디에 있는지 검토하게 되면 설교가 근거해야할 그 자리가 눈에 보이게 될 것이다.

오늘 한국 교회의 설교가 정작 성서와 기독교 전통이 말하는 근본을 붙들지 못하는 이유는 설교의 원자료라할 성서를 주석하는 것에만 머물러 있지 해석하지 않기 때문이다. 설교를 준비하는 사람은, 개인에 따라서 차이가 있긴 하지만 대개 자신이 선택한 본문을 충분히 읽고 주석집의 도움을 받은 다음에 말씀을 들어야 할 청중들의 형편을 고려해서 설교를 작성한다. 이들은 대개가 무엇을 설교해야 할지 잘 알고 있다. 흡사 수능시험을 앞에 둔 수험생들이 문제를 풀어가듯이 성서를 공부한다. 머리가 좋고 많은 노력을 기울인 학생이 높은 점수를 받듯이 설교 능력이 뛰어나거나 노력을 많이 기울인 설교자는 그만한 성과를 거둔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다. 이미 드러난 사실들을 열거하면서 나름의 수사학을 이용해서 전달하기만 하면 된다. 이런 설교는 늘 거기서 거기다. 본문이 바뀌더라도 똑같은 설교만 하게 된다. 기도 열심히 하고, 교회 봉사 많이 하고, 세상 사람들에게 칭찬 받도록 반듯하게 살라고 한다.

이와 달리 성서를 해석하는 사람은 이미 아는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전하는 것보다는 모르는 이야기를 찾아나간다. 원래 해석학이라는 원어가 헬라 신화에 나오는 헤르메스에서 유래했는데, 헤르메스는 신의 뜻을 전하는 사자이다. 신의 뜻은 숨겨져 있다. 헤르메스는 인간이 모르는 신의 이야기를 인간이 알아듣도록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이런 점에서 설교가 해석학적이어야 한다는 말은 이미 지나간 이야기를 서술하는 게 아니라 아직 우리에게 오지 않은 사건을 선취적으로 해명해야한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설교는 예언이며, 그것이 곧 진리의 능력이다.  

사실 과학도 그렇고 예술도 그렇다. 과학 선생은 이미 나와있는 과학이론을 가르칠 뿐이지만 진정한 과학자는 아직 모르는 과학의 세계를 연구한다.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는 누구에게 배우거나 누구를 가르치지 않고 음악의 세계에 들어가 있을 뿐이다. 그 세계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열지 않고 연주자가 들어간 것만큼만 열기 때문에, 그 음악의 세계를 얼마나 기술적으로 잘 표현해 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은 그 다음의 문제이다. 그런데 우리 나라의 음악교육은 늘 이런 기술에만 머물러 있다. 사실 설교도 이런 수준에서 한걸음도 앞서지 못했다.

한국 교회의 설교는 아예 주석도 없이 자기의 종교경험만 일방적으로 전달하거나, 아니면 정보차원의 성서주석에 치우쳐 있다. 전자는 재미있기는 하지만 사이비성이 강하며, 후자는 진지하기는 하지만 진부하다. 예수님이 그렇게 설교했던 것처럼 설교의 지평은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에 착근되어야 한다. 따라서 그때까지 잠정적이며 유한한 역사 내의 모든 것들은 해석되어야 한다. (정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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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1]새하늘

2007.08.11 13:26:56

설교....
하나님이 우리에게 향하신 영적 메세지이며, 진리이 길이다.
전하는 자와 받는 자와의 관계에서 서로간의 노력과 의문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나님이 주신 은총속에 깨임이 필요함을 사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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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7]바우로

2008.01.06 02:12:24

설교를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생각하게 하시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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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열바

2014.04.17 11:31:16

해석으로 나아가야 겠는데..그 아득하고 낯선 길을 어찌가야할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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