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종교

조회 수 7186 추천 수 182 2004.07.01 14:28:50
타종교



사실 기독교는 민족주의적이고 배타적인 유대교와 달리 믿는 자 누구나 구원받는다는 보편주의에 근거하고 있는데도, 지난 2천년 기독교 역사에서 타종교와 이교도들을 박멸시키고자 하는 수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다. 원래 초기 기독교 스스로 종교적인 이유로 끔찍한 박해를 받았기 때문에 박해받는 입장을 어느 정도 이해할 만 한데도 불구하고 유럽의 역사에서 가혹한 박해자의 자리에 섰다는 것은 인간의 한계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고, 또한 종교가 시대정신이나 정치에 야합함으로써 그 진리성이 훼손될 수 있다는 그 위험성을 경고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슬람교도들과 피비린내 나는 십자군 전쟁(1096-1291), 가톨릭과 개신교 상호간의 30년 전쟁(1618-1648)이 있었으며, 아프리카와 아메리카에서 선교라는 미명으로 저지른 야만적 행위도 적지 않았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근본주의 미국 선교사들이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주었으며 교육이나 의료 부분에서 상당한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토착문화와 종교에 대해서 지나치게 적대시 한 것은 큰 아쉬움을 낳게 한다. 이 세상과 타종교를 적대적으로 보는 이들의 신앙적 태도는 오늘 우리에게까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간혹 불교사찰 훼손사건이나, 심지어는 성당에 불을 놓는 일까지 벌어지곤 한다. 물론 근본주의적 신앙에 빠져있는 일부의 사람들이긴 하지만 그것도 역시 우리의 모습임에 틀림없다.

우리가 타종교에 대해서 거의 신경증적으로 반응하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배타적인 구원론에 놓여있다. "나 이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출 20:3)이나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 4:12)는 말씀에 근거해서 다른 종교를 무가치하게 여기거나 더 나아가서 적그리스도로 간주한다. 물론 예수를 통한 구원은 배타적이다. 왜냐하면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은 정치, 경제, 종교의 역사에서 반복되는 사건이 아니라 유일회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실은 그의 이름에 어떤 주술적인 능력에 의존해서 구원받으려는 게 아니라 그의 삶과 운명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에게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철저하게 위임함으로써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는 뜻이다. 이렇듯 하나님과 하나가 된 사람은 절망적인 이 세상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으며, 불안한 시대 가운데서도 평안을 유지하게 된다. 바울이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성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갈 5:22,23)를 성령의 열매라고 일컫고 있듯이 구원받는 사람에게서는 이런 현상들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여기서 예수 사건의 객관적 현실성보다는 그것의 실존적 의미와 해석이 훨씬 중요하다는 뜻으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예수의 구원 사건이 이미 이런 해석학적 지평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주술적인 차원이 아니라 진리론적 차원에서 이 사실을 믿고 살아간다는 말이다. 예수 사건의 진리론적 차원이라는 것은 예수를 통한 구원의 도리가 일종의 도그마로서 완료되어버린 것이 아니라 종말에 이르기까지 훨씬 심원한 의미가 드러나야 한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생명의 궁극적 본질이 아직 우리에게 완전히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처럼 구원의 본질도 역시 그렇기 때문에 바울의 충고처럼 이 땅에서 구원을 이루어가야 하며(빌 2:12, 3:12), 진리론적인 차원에서 심화시켜나가야 한다. 사실 초기 기독교 3,4세기에 이르는 교리사 논쟁은 이를 위한 몸부림이었다. 이런 전통을 이어받은 오늘의 교회도 역시 타종교나 철학과의 진리논쟁에서 물러서지 말아야 한다. 교부들에 앞서 바울은 로마서에서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롬 1:19)고 진술하고 있다.

종교적 차이를 무시하고 어정쩡하게 어울려 지내는, 또는 진리론적이기보다는 단지 타협적으로 실존적 의미만 확보하려는 종교혼합주의는 마땅히 경계해야 되어야 하지만, 역으로 믿음이라는 명분을 내 세워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인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으며 사랑하시며 그 모든 세상의 구원을 바라신다는 사실을 훼손하는 태도도 역시 배격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기독교 신학과 신앙은 원래 교부들이 견지하던 변증적 전통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 기독교의 구원론이 어떤 이유에서 보편적인 진리인지 주변 세계와 대화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판넨베르크는 이렇게 주장했다. "기독교 신학은 철학적 사유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기독교는 자기 입장에서 철학의 의식을 변화시켰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이 현실성을 새롭게 이해하는 데, 또한 세계와 그 신적인 근원의 현실성을, 그리고 인간의 현실성을 새롭게 이해하는 데 개방적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이러한 새로운 이해를 통해서 얻어진 분명한 전망은 기독교 신학만이 아니라 철학적 숙고의 주제가 되기도 했다"(신학과 철학, 125). 기독교는 주변의 다양한 사상과의 대화를 통해서 자신의 진리성을 심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 사상으로 하여금 생각할 주제를 제공했다. 이제 21세기 한국의 기독교는 타종교와의 대화를 통해서 일부분 배울 것이 있으며, 궁극적으로 그들의 종교적 사유가 지향해야 할 하나의 목표점을 제공하는 일에 기독론적인 면에서 제시해야만 한다. 그것은 곧 종말에 일어나게 될 모든 죽은 자들의 부활이 예수에게서 선취되었다는 사실을 뜻한다. (2004년4월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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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1]새하늘

2007.08.11 13:46:36

타협(他協)?
아니 그들과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대화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레벨:0]신산배

2008.01.24 21:13:33

바로 알아야 변증의 단계에 갈수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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