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인격성

조회 수 7945 추천 수 125 2004.07.01 14:32:26




하나님의 인격성



우리가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야"라고 할 때 일반적으로 떠올리게 되는 하나님 상(像)이 있다. 어린아이의 머리 속에는 하나님이 인간과 비슷한 외형을 가진 분으로 그려진다. 우리처럼 희로애락을 모두 겸비한 어떤 인간적 성품의 존재쯤으로 여긴다. 이를 가리켜 '신인동성동형론'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불렀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예수님의 아버지 호칭은 하나님을 두려운 심판자로만 생각한 유대인들의 생각을 근본적으로 바꾼다는 데에 초점이 있는 것이지 하나님을 우리 인간 삶에서 확인될 수 있는 그런 아버지와 아들 관계로 설명한 것은 결코 아니다. 하나님의 인격성을 이렇게 외형적 모습으로 생각하는 경향은 아마 초기 기독교가 헬라철학의 '실체론적 형이상학'에 영향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즉 하나님이 어떤 실체(Substanz)로 존재한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시공간 안에 살고 있는 우리는 감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만을 확실한 것으로, 즉 리얼리티로 여기기 때문에 하나님도 이런 범주 안에 놓고 싶어한다. 실체론적 형이상학의 근거가 사라진 지금도 여전히 그런 정도의 수준에서 하나님을 이해하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면 자신의 정신 수준을 돌아볼 일이다.

어느 정도 인식론적 훈련을 거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인격성을 '대화'에서 찾으려고 할 것이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대화가 가능하다는 사실이 곧 하나님의 인격성이라고 말이다. 이런 주장은 성서의 관점에서도 그 정당성이 보장된다. 성서에는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와서 말을 거는 분으로 묘사되어 있다. 아브라함에게 말을 걸고, 이삭, 야곱, 요셉에게 말을 걸며, 모세를 불러 바로와 싸우도록 말씀하셨다. 그 이외에서 구약의 모든 예언자들은 바로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과 대화를 나눈 영적인 지도자들이었다. 신약성서는 구약과 약간 다른 형식이긴 하지만 원칙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과 대화를 나눈다는 말은 양측의 자유가 보장되었을 때 가능하다. 만약 한쪽에서 일방적으로 말을 하고 다른 쪽에서 일방적으로 듣기만 한다면 그것은 대화가 될 수 없다는 점에서 양측의 자유는 전제 조건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인격성이 대화에 있다고 보는 주장은 인간의 자유를 제고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견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 도대체 인간과 하나님이 대화를 한다는 발상 자체가 말이 되는가, 라고 말이다. 두 가지 차원에서 문제가 있다. 하나는 이 대화 구조가 여전히 신인동성동형론적인 사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자유를 확보하려다가 오히려 하나님의 신성을 초라한 지경으로 끌어내린 결과가 아닌가 말이다. 다른 하나는 성서는 인간과 하나님의 대화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점이다. 대화가 아니라 말함과 들음의 관계라는 것이다. 그래서 칼 바르트는 성서 안에서 인간이 무엇이라고 말하거나 무엇이라고 생각했는가를 찾지 말고 하나님이 무엇을 말했는지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간혹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인격적인 분이라고 생각하면서 친구에게 말하듯 실제로 하나님과 말을 주고받는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의 순수한 마음이야 모를 바 아니지만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다가는 하나님을 자신의 심리작용 안에 폐쇄시켜버릴 위험성이 적지 않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인격성'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인격적이라는 말은 두 가지 차원에서 설명되어야 한다. 하나는 그분의 고유한 존재양식이며, 다른 하나는 그분의 고유한 행동양식이다. 우선 존재양식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인간의 인격이 아니라 하나님의 고유한 인격으로 존재하신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나님의 고유한 신격(神格)이라고 해야 하지만, 우리의 이해를 위해서 하나님의 인격이라고 부를 뿐이다. 만약 하나님을 인간의 인격적 범주 안에 가두게 되면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도저히 설명해낼 길이 없다. 정용섭의 인격은 정용섭 하나일 뿐이지 정용섭의 인격이면서 문혜숙의 인격이 될 수는 결코 없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인격을 벗어나 있기 때문에 '삼위일체'로 존재하실 수 있다. 본질로는 하나이지만 위격으로 셋으로 존재하신다.

다른 하나는 인격으로서의 하나님은 자신의 고유한 자유 안에서 활동하기 때문에 우리 인간의 판단과 예상을 벗어난다는 사실이다. 만약 이 세계가 고정된 길을 따라서 진행된다면, 즉 우리의 예상 안에 한정되어 있다면 이 세상을 끌어가는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런데 생물학이나 물리학, 또는 역사학에서 볼 수 있듯이, 뿐만 아니라 개인들의 인생살이에서 볼 수 있듯이 모든 역사의 흐름은 예정된 길을 벗어난다. 그것을 가리켜 '우연성'이라고 하는데, 이 우연성이 곧 하나님의 고유한 인격성을 증명하고 있다. 그래서 칼 바르트는 신학자의 실존을 가리켜 '놀라움'으로 설명한 적이 있다. 자신의 고유한 인격 안에서 활동하는 하나님을 진술한다는 것은 일종의 두려움이 아닐 수 없다는 말이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존재 양식을 벗어나서 자신만의 고유한 존재방식으로 존재하는 하나님을 인간학의 범주에 제한시키거나, 우리가 예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을 기계론적 역사철학에 제한시키는 잘못을 곧잘 저지른다. 교회 밖의 사람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까지 그런 경우가, 더구나 믿음이 좋다고 자처하는 이들까지 그런 경우가 많다. 바리새인들의 닫힌 사유방식이 그것이다.  <2003년9월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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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1]새하늘

2007.08.12 15:03:50

하니님의 인격성(人格性)?
어느 신문에서 '하나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설문조사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침묵의 하시는 자라고 선택했다는 것이다.
정의의 하나님, 선의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내용 보다 인간의 역사 앞에 침묵하신다는 것이다.
어쩌면 인간의 역사에 관여 하지 않으신 것일까?
단지 침묵자로서 이 세상의 전쟁과 불의, 생태 파괴앞에서 말없이 계시지 않은지 물어 본다.
침묵속에 변화되지 않는 이 세상 현실속에 종말로 다가 오시지 않는지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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